일본 사회


일본 사회

 

율곡: 제가 조선 군대의 문제점을 너무 소상히 지적을 했군요. 왜놈 앞에서요. 하하. 농담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소라이 선생님이 태어나셨는데, 선생님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이란 무엇인가요?

소라이: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저는 일본에 태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에도시대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율곡: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라이: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킨 전쟁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통해서 일본을 평정하고 휘하의 장수들을 달래서 대륙침략의 야욕을 불태웠지요. 결국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으로 침략한 결과, 자신의 세력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그렇군요.

소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몰락하면서 그와 대립하면서도 협조자의 위치에 서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이 일본 전국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고 에도막부가 성립된 것이지요. 만약에 임진왜란이 없었으면 에도막부가 성립하지 못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계속 일본을 호령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저의 부친이 에도막부에 봉사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혹시 제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하.

율곡: 재미있는 상상이군요.

소라이: 혹시 제가 태어났더라도 학문적으로 이 소라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율곡: 왜 그런지요?

소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고 조선처럼 유학으로 일본을 통치하고자 하였습니다. 무사들의 시대를 끝내고 학문과 도덕으로 정치를 하고자 하였지요. 그래서 후지와라 세이카나 하야시 라잔과 함께 유학의 도입을 적극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하야시 라잔이 막부에 들어와 정치적 학문적인 자문을 하면서 일본 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일본에서 유학, 즉 신유학인 성리학은 하야시 라잔이 막부의 지원을 받아 발전시킨 공로가 큽니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었더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율곡: 오호, 그렇군요.

소라이: 그 외에도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지요. 도자기 기술자들이 임진왜란을 통해서 대거 일본에 들어왔고, 일본은 그 뒤에 도자기 생산국으로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지요. 사실은 그것보다도 더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성리학입니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다수의 성리학 서적들이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강항과 같은 훌륭한 학자들이 포로로 들어와 일본에 성리학을 전파했습니다. 그런 사정이 없었다면 일본 땅에 성리학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율곡: 그 전에 이미 중국에서 성리학이 전해지지 않았습니까?

소라이: 일부 승려들을 통해서 성리학 서적들이 들어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는 몰랐지요. 단지 지적 호기심으로 관심을 조금 두는 정도뿐이었습니다. 성리학이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고, 그것이 현실의 생활에 유용한 것이라는 점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통해서 일본 사람들이 알게 된 사실입니다.

율곡: 참 신기한 일이군요. 성리학의 의미를 몰랐다니.

소라이: 조선의 정치 체제를 잘 알게 되고 성리학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일본은 주자학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이지요.

율곡: 그런 주자를 선생님은 비판을 했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주자학이 들어오고 나서 주자학은 막부와 하야시 라잔 집안에서 적극 연구하는 관변학문이 되었습니다. 과거시험이 별도로 없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은 자유스럽게 주자학 관련 서적을 읽었습니다.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요.

율곡: 조선과는 다른 상황이군요.

소라이: 일본 지식인들은 주자학을 알고 나서, 그 뒤에 등장하는 양명학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명학은 상대적으로 일본 지식인들에게 적극 수용되었습니다. 너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주자학보다는 일본의 상황에 더 어울리는 학문이 양명학이었지요. 일본인들의 심성에 양명학이 더 와 닿았지요. 무사들이 주류인 일본에서 단순한 주장을 펼치는 양명학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양명학에 심취한 대표적인 학자가 나카에 도쥬(中江藤樹, 1608년∼1648년)이지요.

율곡: 조선에서 양명학은 많은 배척을 받았습니다. 퇴계 선생도 적극 비판을 하고 많은 유학자들이 배척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그와 달리, 양명학이 점점 더 세력을 떨쳐 명치유신 시기에는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들었습니다.

소라이: 그렇습니다. 만약 양명학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명치유신이 그렇게 빨리 성공했을지도 의문입니다. 양명학도 그렇지만 고학, 그리고 제가 주창한 고문사학도 일본에 전해진 주자학, 양명학을 바탕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앞서 그런 학문들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학문입니다. 그리고 국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국학은 주자학이 변형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주자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형성된 학문입니다. 그러니 사실 근대 일본의 형성은 멀리는 조선에서 들어온 성리학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선에서 그런 학문을 들여오지 못했다면 근대 일본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율곡: 대단한 사건이었군요. 임진왜란은.

소라이: 그러므로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저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고 전제 조건입니다. 없었으면 모든 것이 설명이 안 되지요.

율곡: 아하,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