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회


조선 사회

 

율곡: 그렇기는 하지요. 그것 말고도 당시는 소위 동인들이 임금 곁에 있어서 저에 대한 시기와 모함이 심했지요. 제 말년이 순탄치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살아 있었더라면 저에게 글을 배운 정여립이 난을 일으킬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난을 일으켰을 리가 없고 저를 따르던 서인들이 그렇게 몰고 갔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소라이: 그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서인, 동인이라는 말도 생소합니다.

율곡: 제가 조정에서 활동하던 때에 붕당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인, 동인 이렇게요. 서인이란 1575년경 일겁니다. 그동안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훈구파와 낙향하여 지방에서 유지가 되거나 글을 읽는 선비들을 지칭하는 사림파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제외한 젊은 관료들이 두 파로 나뉘어 경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쪽은 동인이라 하고 다른 한 쪽은 서인이라 칭했지요. 동인은 비교적 강하게 훈구파나 사림파를 비판하고 서인은 비교적 온건했습니다. 서인파에 속한 사람들은 기존의 권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지요.

소라이: 아 그렇습니까?

율곡: 서인들의 중심에 심의겸이라는 인물이 있었으며 저와 제 친구, 그리고 정철도 서인들의 주동자라는 의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들과 가까이하기는 했으나 나중에는 그것을 후회하고 붕당 자체를 비판했습니다. 임금에게는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시라고 건의도 많이 했습니다.

소라이: 그런 배경으로 정여립의 사건이 발생했군요.

율곡: 1582년에 저는 병조판서로 임명된 직후에 과로로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관직을 물러나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동인들은 저를 계속 비난하고 공격을 했지요. 하지만 저는 서인의 대표로 있는 심의겸을 비판하고 당쟁의 갈등을 없애려고 노력을 했지요. 친한 서인 쪽 지인들에게 여러 모로 호소도 하고 부탁도 하였지만, 이미 동인들과 서인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너무 깊었습니다. 동인들은 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더욱 심해졌고요.

소라이: 동인과 서인 사이에 끼여서 곤욕을 치루셨군요.

율곡: 정여립은 그 미묘한 시기인 1583년에 이조전랑 후보가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이조판서였습니다. 그리고 정여립은 저의 제자이기도 했으니 저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나 저는 그의 임명을 반대했습니다. 그 사람은 좀 과격한 면이 있었지요.

소라이: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은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셨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정여립 사건을 기축옥사(己丑獄死, 1589년)라고 부릅니다. 정여립은 다소 과격한 성격이라 저는 그가 큰 직책을 맡는 일을 반대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원한을 산 것 같습니다. 그는 원래 저와 가깝게 지내다 나중에 멀어졌습니다. 그는 제가 가깝게 지낸 사람들 중에 서인당 사람들이 많다고 비판을 하기도 했지요. 제가 죽은 뒤에는 더욱 저를 비판하고 서인 쪽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동인 편에 섰지요. 이러한 사실을 선조 임금이 알고 싫어했습니다. 특히 경연의 자리에서 저를 노골적으로 비판한 사실이 임금의 마음을 거슬려 그가 곤욕을 치뤘습니다.

소라이: 그랬군요. 그래서 그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당시 동인들 중에는 호남 사람들도 많았는데 정여립은 전라도로 내려가 거기에서 지냈습니다. 나중(1587년)에 그는 호남에 나타난 왜구를 소탕하고 무술을 연마하며 대동계를 조직하여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난을 일으킨다는 의심을 받은 것이지요. 서인들은 또 그것을 계기로 그를 반란자로 낙인찍고 관련자들을 대거 죽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정여립 사건입니다. 관련자들이라고 해도 거의가 다 동인들입니다.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아마도 제가 살아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소라이: 그렇더라도 동인과 서인들 사이에서 선생님이 편하게 고향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노후를 편안하게 즐길 상황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점점 더 동인, 서인의 경쟁이 치열했을 테니까요.

율곡: 그렇겠지요. 그리고 차츰 일본의 침략 움직임도 심해져서 조정의 생활이 많이 바빴겠지요. 저는 말년에 병조판서를 맡았습니다. 전쟁 준비도 저의 책임이 되었겠지요. 제가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더라도 저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제일 전방에 서야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10년쯤 더 살았더라면, 선생님 말씀대로 예측할 수 없는 재난에 처해 말년에 고생만 하다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소라이: 선생님 연표를 보니 저와 선생님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율곡: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라이: 저는 소위 임진왜란 이후 사람이고, 선생님은 임진왜란 이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분로쿠 전쟁(文禄の役, 1592-1593)이라고 부르고 정유재란을 게이초 전쟁(慶長の役, 1597-1598)이라고 부릅니다만. 선생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에 사망했고 저는 임진왜란이 모두 끝나고 68년이 지난 뒤에 태어났습니다.

율곡: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올 것이라는 예측은 조정에서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관리들을 파견하여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지요.

소라이: 그랬는데 동인의 보고와 서인의 보고가 달랐다고 들었습니다. 한쪽은 일본이 침략을 해올 것이라고 보고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그렇지요. 1589년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선통신사를 보내기로 조정에서는 결정했지요. 그런데 정여립 사건이 일어난 그 다음해 1590년에야 통신사들을 파견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2년 전입니다. 그리고 1년 뒤에 통신사들이 돌아왔습니다. 통신사 대표로 간 사람은 황윤길로 서인쪽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서 반드시 침략을 해올 것이라고 보고를 하였지요. 그러나 부대표로 간 통신사는 일본이 침략을 해오지 않을 것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렇게 똑똑한 인물이 못되고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요. 이렇게 보고한 부대표는 김성일로 동인 쪽 사람입니다. 이렇게 의견이 나뉘면서 조정은 동인쪽 말만을 믿고 전쟁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지요.

소라이: 일본은 사실 오랫동안 조선 침략을 준비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활동한 전국시대(1467-1603) 전체가 사실은 전쟁 준비 시기나 마찬가지였지요. 일본 전체가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니까요. 말하자면 전쟁 연습을 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미리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시고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10만양병설 말씀이지요? 요즘은 그것이 제 주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의 일이라 잘 모르겠고요. 하하. 어쨌거나 저는 말년에 국방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조정에 군정의 개혁과 혹시 있을지 모를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