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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한해


 

1775년, 그저 평범한 한해

 

일성록⌋과 ⌈영조실록⌋을 보면,

1775년 즉 영조(英祖, 1694년 ∼ 1776년) 51년(을미년) 음력 4월 19일(양력 5월 18일) 임금 영조는 손자인 이산(李祘) 즉 훗날의 정조(正祖, 1752년∼1800년)를 데리고 같이 홍문관(弘文館)에서 글을 읽었다.

그 날 임금의 공부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 앞서 글에서는 영조·정조시대의 문화적인 분위기, 즉 미술계의 사정을 살펴보았다.
1775년 한 해는 어떤 해였을까? 그 해의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서 당시 조선시대의 1770년대를 살펴보기로 한다.
영조가 자신의 둘째아들 사도세자(莊獻世子, 1735∼1762)를 사망하게 한 것은 1762년(영조 38년)이었다. 그 뒤 시간이 8년이나 지나,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은 벌써 만 18세의 나이로 성장해 있었다.

1770년. 영조 46년. 정조 만 18세.
이해에 전국적으로 가뭄에 대비하여 저수지나 강둑을 수리하고 보완하였다. 오늘날의 백과사전과 같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00권이 완성되었다. 조선의 문물제도 전반에 관하여 소개한 책으로 당시로서는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지식을 모아놓은 기초 필수 문헌이었다.
이 서적의 주요 편찬자는 홍봉한(洪鳳漢, 1713년∼1778년)이다.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로, 정조에게는 외할아버지에 해당한다. 174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나중에 좌의정과 영의정까지 역임하였다.

1772년. 영조 48년. 정조 20세.
구리 활자인 갑인자(甲寅字)를 보수하여 15만 자의 활자를 만들었다. 갑인자는 세종 시기 1434년(세종 16년)에 주조한 것인데, 그것을 추가하고 보완한 것이다. 변계량(卞季良)은 이 활자 덕분에 세종 시대 때에 조선에서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다”고 하였다.

1772년에 만든 활자는 임진년에 만들었다고 하여 임진자(壬辰字)라고 하는데, 세손(世孫)이었던 정조가 명을 내려 만든 것이다. 이 활자로 이해에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을 찍었다. 다음해 1773년에는 ⌈신정자치통감강목속편(新定資治通鑑綱目續編)⌋을 출판하고 1775년에는 ⌈경서정문(經書正文)⌋을 찍었다. 1777년에 정조는 왕에 즉위하여 다시 활자를 만들게 하였는데, 이 때 활자는 정유자(丁酉字)라고 불린다. 이 해에 ⌈원속명의록(原續明義錄)⌋을 인쇄하고 1779년에는 ⌈아송(雅誦)⌋을 찍었다.

1773년. 영조 49년. 정조 21세.
서울의 청계천 강둑을 돌로 쌓기 시작했다. 청계천은 서울 중심을 흐르고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준설작업과 둑 쌓기 등 치수 사업의 중요한 대상이었다. 1760년에 이미 영조는 한차례 개천 준설작업을 지시하여 하천 바닥의 흙을 파서 물 흐름을 개선하였는데, 이 해에 백운동에서 흐르는 물과 삼청동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오간수문(五間水門)까지 직선으로 석축을 쌓게 하였다.
이해 11월에 총융청(摠戎廳)에서 새로운 포탄을 만들어 사격 실험을 하였다. 총융청은 조선의 5군영 중 하나로, 서울의 북부 방비를 담당하는 수비군이다.

1774년. 영조 50년. 정조 22세.
등준시(登俊試)를 실시하여 15명이 급제하였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식년시(式年試)가 있고,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여러 종류의 과거가 있었다. 등준시는 현직 관리나 왕의 친척 등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임시과거인데, 이 해에는 종 1품에서 당상 정3품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1776년. 영조52년. 정조 24세.
영조가 향년 82세로 사망하였다. 왕세손 이산인 정조가 조선의 22대왕으로 즉위였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부친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서 경모궁(景慕宮)을 다시 세우고, 억울하게 죽은 부친 영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올렸다.

“너무도 슬프면 말이 길지 않고, 지나치게 애절하면 감정이 오히려 무뎌집니다. 소자(小子)가 지금까지 15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죽을 줄 몰라서가 아니라 선왕의 은혜를 입어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서입니다. 선친께 장헌이란 시호를 올리고 경모궁을 다시 짓고 선친의 묘소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지었습니다. 예조판서에게 이와 같이 모든 의식을 정하도록 시키고, 의식에 쓸 제기와 악기 등은 종묘에 비해 한 단계 낮게 정하였습니다. 저 세상에 계신 영령께서 이 소자의 마음을 알고 계실는지요. 숭정(崇禎) 이후 세 번째 병신년에 피눈물로 삼가 서문을 씁니다.”

(⌈홍재전서⌋ 권8)

 

이해에 창덕궁 후원 부용지 옆에 규장각(奎章閣)을 새로 지었다. 규장각은 세종대왕 때의 집현전과 같은 기관으로, 왕실 도서관이며 학문 연구 기관이다. 숙종 때 규장각이라는 작은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시설을 확충하고 직제를 갖추고 조직을 강화해나갔다. 예를 들면 3년 뒤인 1779년에는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을 설치하였는데, 내각은 규장각으로 그 안에서 검서(檢書), 즉 도서를 관리하는 공무원을 둔 것이다.

규장각 규모는 문관이 모두 6명, 기타 잡직 총 35명, 그리고 거기에 따른 인원 등으로 모두 80명이 넘었다. 원래는 역대 왕들의 글과 책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도서관 기능이 컸으나, 정조는 더 많은 임무를 규장각에 부과하였다.
비서실의 기능과 문서, 서신관리 그리고 과거 시험을 주관하게 하고, 문신들을 교육하는 임무까지 부여하였다. 또 규장각에서 많은 책을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환경에서 박제가(朴齊家, 1750∼1815), 유득공(柳得恭, 1748∼1807), 이덕무(李德懋, 1741∼1793) 같은 지식인들이 성장하게 되어 학문이 발전하고 새로운 학술사상이 싹텄다.

1780년. 정조 4년. 28세.
창덕궁에 측우기를 설치하고 천문, 지리, 책력 등을 담당하는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천세력(千歲曆)⌋을 만들게 하였다. 당시는 세종 때 만든 역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결함을 시정하고 좀 더 세밀한 역서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역서는 농업이 국가의 기간산업이었던 당시로서는 국가의 부강과 국민들의 생활에 직결되는 중요한 자료였다.

또 10년 전에 제작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가 너무 급히 편찬되어 잘못된 점과 누락된 것이 많았는데 이를 수정하고 보완하기 위한 보완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이후 16년간 진행되어 1796년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라는 이름으로 146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이 책은 고종 때에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라는 이름으로 총 250권의 방대한 백과사전으로 발전하였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상위(象緯), 여지(輿地), 제계(帝系),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糴), 교빙(交聘),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 예문(藝文) 등이다.

조선의 1770년대는 이렇듯 대외적으로 특별한 위협이 없이, 대내적으로도 큰 혼란이 없이 국가 사회가 안정적으로 내실을 다지고 있던 시기였다. 1775년은 크게 특기할 만한 일도 없었다.
전란으로 점철되었던 16세기 말의 임진왜란(1592∼1593), 정유재란 (1597∼1598), 그리고 17세기 초반의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1637년) 등 전화에서 벗어나 100여년이 지나면서 조선사회는 바야흐로 태평성대라고 불리는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1775년은 그러한 시기의 중간에 있었던 평범한 한해였다.

영조와 정조의 시대


 

1775년 4월 19일, 영조와 정조의 시대

 

조(英祖) 51년 을미년, 즉 1775년 음력 4월 19일(양력 5월 18일)에 영조는 손자인 정조(正祖), 즉 당시의 세손(世孫)을 데리고 홍문관(弘文館)에서 글을 읽었다. 이 기록이 ⌈일성록⌋과 ⌈영조실록⌋에 보인다.

율곡 이이(1537년∼1584)가 사망하고 191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이 때 율곡은 ‘선정(先正)’이라 불리며, 퇴계 이황과도 같은 훌륭한 유학자이자 국가적인 스승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우선 그 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음력 4월 19일 이 날은 육십갑자로 병신일(丙申日)에 해당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기록은 1775년, 즉 을미년(乙未年)의 음력 4월 19일 ⌈일성록⌋과 ⌈영조실록⌋의 기록이다.

1775년은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100년씩 나누어 구분해본다면 300년이 지나고 400년에 가까운 시기이다. 조선이 4/5정도 지나면서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침략하여 한반도의 남부 지역이 병란에 휩싸인 사건이며,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침략으로 한반도의 북부가 유린된 사건이다.

이러한 커다란 혼란을 이겨내고 피폐해진 국가 재정을 극복하여 영조시기(영조 재위 시기, 1724년∼1776년)는 조선의 국력과 문화가 새롭게 부흥하는 시기였다. 역사가들은 영조 재위시기와 이 뒤를 이은 정조 재위시기(1776년∼1800년)를 합하여 조선의 르네상스기, 혹은 조선 문화의 중흥기라고 높게 평가한다.

이 시기에는 그러한 평가에 걸맞게 조선시대 대표적인 예술가들, 학자들이 출현하여 활약하였다. 문화는 사회 안정과 발달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안정되고 발달하면 문화가 흥성한다.
예를 들면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린 정선(鄭歚, 1676년∼1759년)이 영조 재위시기에 활약하였다. 이른바 ‘진경산수’란 ‘산수(山水)’ 즉 물과 산을 그린 경치가 ‘진경(眞景)’ 사실적인 경치에 가깝다는 것이다.

정선(鄭歚)의 광나루 그림 . 중국 산수화처럼 기이하고 웅장한 멋은 없지만 포근하고 친근한 풍경이 그려져 있다.
정선(鄭歚)의 광나루 그림 <광진(廣津)>. 중국 산수화처럼 기이하고 웅장한 멋은 없지만 포근하고 친근한 풍경이 그려져 있다.

그 전에 조선의 화가들은 자신이 사는 산천 경치를 그리는 것보다는 중국 사람들이 그린 산수화를 배워서 경치를 그렸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초기에 활약한 안견(安堅)의 그림을 보면 그러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안견의 중 만추(晩秋)
안견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중 만추(晩秋)

 

그림을 보면 높이 속은 봉우리와 구름에 잠긴 산 중턱, 기다랗게 떨어지는 폭포수 등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보는 경치가 아니다. 중국의 황산(黃山) 어느 골짜기에서 그린 듯한 이러한 그림은 중국화가의 작품을 모방하고 상상하여 창조한 것이다. 정면의 조그마한 산봉우리에 지어놓은 정자도 중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저렇게 산꼭대기에 지은 정자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안견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도 환상적인 이상의 세계를 아름답게 표현하였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자연의 세계는 말이 자연이지 사실은 추상적인 피안의 세계일뿐이다.
안견의 그림은 비록 조선시대 미술사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독창성의 측면, 그리고 사실성의 측면에서는 영조·정조 시대의 작품들에는 미치지 못한다.

조선 초기와 중기의 그림들이 중국 그림을 적극적으로 모방하고 중국 경치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는 이면에는, 달리 말한다면 자신들이 사는 곳은 경치를 그리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열등감이 내재되어 있다. 중국의 문화, 그리고 그러한 문화가 그려내는 중국의 자연이 중심이고 자신의 문화나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자연은 주변인 것이다.

그러한 열등감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의 시기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사라지면서 변화를 맞게 되었다. 민족적인 위기와 그 위기를 극복하고 수습하면서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숙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사는 곳의 경치도 화폭에 옮겨서 그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진경산수화의 등장은 바로 조선의 문화계가 중국 중심적이고 중국 위주의 사대주의적인 관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음을 나타낸다. 마치 조선의 유학 사상이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추상적인 주자 철학이나 이기론(理氣論)보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 유사하다. 중국 송나라 시대 주자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가르침을 우리나라의 현실 상황에 어떻게 활용하고 변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관심이 옮겨간 것과 같다.

이러한 영조·정조 시대 정선 외에 풍속화 화가로 잘 알려진 김홍도(金弘道, 1745년∼1806년)와 신윤복(申潤福, 1758년∼1814년?)도 등장하여 활약하였다. 그리고 김득신(金得臣, 1754년∼1822년), 강세황(姜世晃, 1713년∼1791년) 등 인물도 이 시기에 활약하였는데, 이들이 자기 주변의 자연이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바로 당시 조선의 문화계가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중국과 비교하여 자기들 나름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기 화가들이 자기 주변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사회와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윤복 그림 이 시기 화가들이 자기 주변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사회와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윤복 그림 <젊은이들의 봄나들이>
이 시기 화가들이 자기 주변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사회와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진경산수화 중에 볼만한 것이 강세황(姜世晃, 1713년∼1791년)의 그림이다. 그는 장원 급재하고 예조판서까지 지낸 문인이자 화가였다. 그는 김홍도의 스승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그림은 중국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중국인들이 하는 것처럼 중국의 경치를 그렸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그의 그림을 구경해보자.

강세황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일부
강세황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일부

 

커다란 바위들이 나지막한 산등성이 아래에 몰려 있다. 그런데 바위 오른 쪽으로 길이 나 있고 그곳에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사실은 거대한 돌들과 웅장한 산의 모습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친근하고 정겨운 풍경이다. 우리나라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에게는 기이한 풍경일 것이다.

강세황, 백석담(白石潭)
강세황, 백석담(白石潭)

 

위 그림은 <송도기행첩(松島紀行帖)>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수많은 바위가 인상적이다. 바위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 마치 고인돌 군락지와도 같다.
우리나라에는 전 세계 고인돌의 50%정도가 몰려있는 고인돌 대국이다. 왜 이러한 고인돌이 우리나라에만 많이 몰려 있는지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약 4만기 정도의 고인돌이 우리나라에 있다.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은 전라도 지역이지만 개성의 관산리도 유명한 고인돌 군락지다. <송도기행첩>의 송도는 바로 개성이고, 저 바위들의 모습은 그곳의 고인돌을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영조·정조시대의 화가들은 자기 주변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1775년 5월 18일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를 그림으로 살펴보았다.

자연현상과 인간사회


 

자연현상과 인간사회

 

제 율곡의 「천도책」이 어떤 성격의 글인지 밝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 내용에는 부분적으로 순수한 자연과학적인 내용도 들어있지만, 전체 맥락은 인간사회의 일이 날씨와 천문현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한나라의 동중서(董仲舒) 이후의 천인감응설이 녹아있다. 「천도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문제와 답은 이를 한층 강조하여 마무리 짓고 있다. 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제대로 이해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인간사회의 일 특히 군주가 하는 일이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지막 문제는 이렇다.

 

“간혹 자연의 운행이 평상시와 달리 어긋나는 것은 하늘의 기가 어그러진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사회의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고, 별이 궤도를 잃지 않고, 우레와 벼락이 치지 않고,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않고, 눈이 너무 많이 내리지 않고, 우박이 재앙이 되지 않고, 폭풍과 긴 장마의 피해가 없이 각각 그 질서에 따라서, 마침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잘 길러지는 경지에 이르는가? 그 경지는 어떻게 가능한가?”

 

요즘은 명석한 초등학생 수준이라도 이 문제의 답을 말할 수 있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천문현상과 날씨 변화는 오늘날 과학이 발달한 세상에서도 막을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미리 알아 대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날씨와 기후는 이제 인간의 일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 대기오염과 지구의 온난화로 말미암아 그렇다.

그렇다면 당시 어떤 신통술을 써서 날씨나 기후 또는 천문현상마저도 조절이 가능할까? 먼저 율곡의 답을 살펴보자.

 

“저는 듣기로 임금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세상을 바르게 하고, 세상이 바로 되면 천지의 기도 바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마음이 화평하면 몸도 화평하고, 몸이 화평하면 기도 화평하고, 기가 화평하면 천지도 화평하게 응한다고 하였습니다. 천지의 기가 바르다면 어찌 일식과 월식이 생기며, 별이 어찌 그 궤도를 잃겠습니까? 천지의 기가 화평하다면 천둥·번개·벼락이 어찌 그 위력을 날리며, 바람·구름·서리·눈이 어찌 그 때를 놓치며, 흙비를 내리는 어그러진 기가 어찌 그 재앙을 만들겠습니까? 자연은 비·햇볕·더위·추위·바람을 가지고 만물을 생성하고, 임금은 삼가고 어질고 명철하고 지략이 있고 성스럽게 함으로써 자연의 원리에 응합니다. 자연이 때에 맞게 비를 내리는 것은 삼감과 같고, 때에 맞게 햇볕이 나는 것은 어진 것과 같고, 때에 맞게 더운 것은 명철에 응한 것이며, 때에 맞게 추운 것은 지략에 응한 것이며, 때에 맞게 바람이 부는 것은 성스러움에 응한 것입니다. 이같이 살펴보면 천지가 제 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지는 것은 어찌 임금 한 사람이 덕(德)을 닦는 데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로 『중용』을 지었다고 전해짐)가 말하기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 능히 화육(化育)할 수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넓고 크게 만물을 발육하여 높이 하늘에 닿았다.’ 하였으며, 정자(程子, 북송 때의 철학자)가 말하기를,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요령은 다만 홀로 삼가는 데 있다.’ 하였습니다. 아! 지금 우리나라의 동물과 식물이 모두 자연의 화육(化育) 속에 고무(鼓舞)되는 것이 어찌 성스런 임금이 홀로 삼가는 데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천지의 변화 곧 천문현상을 포함하여 날씨와 기후는 전적으로 인간에 달려있고, 그 또한 세상을 통치하는 군주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결론짓는다. 군주가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삼가는 신독(愼獨)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중용』과 『대학』의 중심 사상이 녹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애초에 가졌던 의문, 곧 율곡 같이 명석한 분이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상식에 맞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이론을 정말로 믿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어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율곡 자신도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상식 밖의 이론이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과거시험의 문제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입장 또는 견해를 묻는 일종의 면접시험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있다. 곧 답안에서 등장하는 측천무후가 바로 당시 명종을 섭정했던 문정황후를 상징하듯이, 자연의 이변을 통해 잘못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자 하는 또는 군주의 전횡을 견제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나온 문제와 답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과거시험을 보는 초학자들에게 그런 마음의 자세를 묻는 문제라고 한다. 자신의 입장을 묻는 논술시험이라고나 할까?

필자는 당시 유학자들이 이런 취지로 과거시험의 문제를 제출할 수 있다는 데 일단 동의한다. 그런데 율곡이 정말 그런 생각이 상식에 벗어난 줄 알면서 답을 썼을까? 그렇다면 율곡은 정말로 정직하지 못한 과거시험의 합격만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율곡은 단지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유학자들의 이념적인 이론을 묵묵히 따르는 지극히 현실에 영합하는 모범생일 뿐이다. 정말 그럴까?

그보다 사실 율곡이 이 답안을 쓸 때는 23살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자신이 읽고 들은 대로만 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전의 관점을 특별한 비판 없이 믿고 종합해서 진술했을 것이다. 천인상감설이 상식에 벗어났다는 점을 익히 알면서 이 답안을 작성했다면 너무 약삭빠르고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자연관은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고 천자(왕)는 하늘의 명을 받아 세상을 다스린다는 정치철학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자연의 원리와 인간사회의 일이 관여한다는 점은 어쩌면 순수한 자연과학의 발전의 저해요인이 될 수 있었다. 서양에서도 바로 자연에서 중세의 신학적 목적론을 제거하고, 자연을 순수한 그 자체의 원리로 보고자 함으로써 근대과학이 출발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홍대용과 최한기의 경우는 비록 신학적 목적론이 함유된 서양과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런 목적론을 제거하고 자연을 인간의 일과 무관한 그 자체로 보고자 하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런 천인상감적인 분야설(分野說)과 일식과 월식을 바라보는 미신적 견해를 비판하였다. 그들에겐 자연을 인간사회와 무관한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

한편 이런 천인상감적 태도는 최근까지 남아있었는데, 기상이변이나 풍년과 흉년을 대통령의 치적과 연관시키는 일이 그것이었다. 1980년대만 해도 방송에서 몇 년 째 풍년이 들었다고 강조하는 일을 결코 우연한 일로 보아 넘길 것은 아닐 것 같다.

율곡과 기철학


 

율곡과 기철학

 

철학(氣哲學)이란 무엇일까?

이 말은 기(氣)와 철학(哲學)의 합성어이다. 기는 우리 전통에 있는 말이요, 철학(哲學)은 서양의 필로소피(Philosophy)를 일본인이 한문으로 옮긴 말이다. 그러니까 기철학이란 기(氣)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라고 말하면 될까?

사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철학이라는 용어가 없었다고 해서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풍부한 철학의 영역이 존재한다. 다만 기를 철학적으로 다룬 것만 가지고 흔히 기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또 기란 무엇일까? 이 또한 한마디로 말하기 쉽지 않다. 기는 인간사의 모든 영역에 걸쳐있다. 철학만이 아니라 예술·과학·의학·정치·문화·생활·종교 등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숨 쉬고 먹고 살고 생활하는 데에 기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질의 근원이자 현상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활동을 이루고 있는 것도 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한 기철학의 입장에서 말하는 기를 좀 거칠지만 간단히 말하면 ‘영원불멸한 존재로서 만물의 근원임과 동시에 물질운동과 생명활동 및 인간의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실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기철학의 입장으로 되돌아가, 철학사에서 기철학의 기초를 다진 북송 때의 철학자 장재(張載)의 기철학은 간단히 살펴보자.

그는 세계를 태허(太虛)와 만물로 가정한다. 태허는 감각을 초월한 기의 원래적 모습이고 만물은 기로 이루어진 현실의 다양한 모습을 가리킨다. 태허에서 기가 모여 만물이 되고 만물이 소멸하면 태허로 되돌아가는데, 태허에서 만물로 진행할 때 맑고 순수했던 기가 탁하거나 무겁거나 가벼운 잡다한 기로 바뀌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는 태허에서 만물로, 만물에서 태허로 모이고 흩어지는 취산(聚散)만 있지 소멸하지 않는 영원불멸한 존재이다.

이러한 기는 어떤 인격적인 절대자나 외부적인 원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기 자체의 내재적인 원인에 따라서 운동이 진행되며, 그 운동의 특별한 목적은 없다. 양기(陽氣)가 능동적으로 펼쳐 움직여 그 정수는 태양이 되고, 음기(陰氣)는 수동적으로 움츠려 모여 그 정수가 달이 외었으며 그 남은 찌꺼기가 별이 되었다고 한다. 지상에서는 불은 양기, 물은 음기로서 각각 존재한다.

이상이 장재 기철학에 있어서 자연철학의 모습이다. 이 「천도책」에 등장하는 문제와 율곡의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철학의 기본개념을 알아야 하겠기에 먼저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이런 기철학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을까?

 

“천지가 만물에게 각각 그 기(氣)를 두어서 그것을 이루었는가, 아니면 하나의 기(氣)가 유행(流行)하여 흩어져서 만물이 되었는가?”

 

여기서 ‘천지가 만물에게 각각 그 기를 두어서 그것을 이루었는가?’라는 말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이 문제는 자연에 있는 각각의 사물들은 원래부터 제각기 해당하는 기가 있어서 그 사물이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또 ‘아니면 하나의 기(一氣라 부름)가 유행하여 흩어져서 만물이 되었는가?’라는 문제는 앞에서 설명한 기철학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곧 하나의 기가 전통의 기철학의 전제인데, 세계는 하나의 기가 모이고 흩어져 만물이 되거나 소멸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행(流行)’이란 기가 흘러 운행한다는 운동방식을 표현한 말이다. 오늘날의 ‘패션’이라는 말과 다른 말이다. ‘흩어져 만물이 되었는가?’라는 말은 하나의 기가 흩어져서 각각의 만물로 되었는가라는 말이다.

율곡의 답은 이렇다.

 

“아아! 하나의 기가 운화(運化: 운동과 변화)하여 흩어져서 만물이 됩니다. 분리해서 말하면 천지와 만물은 제각기 다른 각자의 기이나, 합쳐서 말하면 천지와 만물이 모두 같은 하나의 기입니다. 오행(五行)의 바른 기운이 모인 것은 해와 달과 별이요, 천지의 어그러진 기운을 받는 것은 짙은 안개, 흙비, 우박이 됩니다. 천둥과 번개와 벼락은 두 기가 서로 부닥치는 데서 생기고, 바람·구름·비·이슬은 두 기가 서로 합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니, 그 구분은 비록 다르나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만물은 하나의 기로부터 생성하였음을 말함으로써 기철학의 전제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음양에서 오행으로 더 분화시켜 해와 달과 별이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오행 가운데 화(火)와 목(木)은 양(陽)에, 수(水)와 금(金)은 음에 속하기 때문에, 태양은 화(火)로서 양에 달은 수(水)로서 음에 속하므로 앞의 장재의 설과 달라진 것은 없다. 특히 앞에 등장했던 오성(五星: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도 오행(五行)에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율곡이 앞에서 말한 기철학의 전제를 모두 받아들였을까? 이 답안지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다. 이 질문의 답은 그가 성리학자였다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잘 알다시피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정자(程子)와 그것을 완성한 주자(朱子)는 기가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관점에 찬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불교의 윤회설(輪回說)처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낡고 오래된 기는 소멸하고 새로운 기가 생겨난다는 설로 바꾸었다. 물론 기가 그렇게 생겨나고 현상적으로 운동이나 변화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는 원인자는 이(理)라고 보았다.

율곡 또한 이 견해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그가 기를 보는 관점은 성리학적 틀이었다. 기철학자들이 보는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기철학자들이 상대적으로 자연철학에 대한 관심이 일차적이라면, 성리학자들은 자연탐구보다 심성철학(心性哲學)에 관심이 더 많았다. 율곡의 기발이승(氣發理乘), 이기지묘(理氣之妙), 이통기국(理通氣局), 교기질(矯氣質) 등의 논리는 다 그런 배경을 갖는다.

 

눈꽃의 수와 우박


 

눈꽃의 수와 우박

 

사람들도 자연현상의 원리가 어떤 것인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떤 꽃들은 꽃잎의 수가 일정하다든가 또 눈꽃이나 얼음의 결정이 육각형을 띠고 있는지 그 원리를 알고 싶었던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호기심이랄까 궁금증은 「천도책」의 질문에도 반영되어 있다.

 

“초목의 꽃잎은 다섯 잎으로 된 것이 많은데, 눈꽃은 유독 여섯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꽃잎이 5장이 되는 식물에는 살구·복숭아·채송화·패랭이꽃·찔레·딸기·사과 등이 있고, 붓꽃은 3장이고, 달맞이꽃·냉이·무·배추 등은 4장이며 코스모스나 모란은 8장이다. 또 금잔화는 13장이고, 과꽃은 21장, 질경이는 34장이라고 한다. 꽃잎의 수가 반드시 홀수나 짝수에 한정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눈꽃이 육각형인 것은 물분자의 구조와 관계있다고 한다. 곧 산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가 두 개로 이루어진 물분자가 동결될 때는 다른 물분자와 달라붙어서 안정된 형태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6각형을 띤다고 한다.

그렇다면 율곡은 어떻게 답했을까?

 

“초목의 꽃은 양기(陽氣)를 받았기 때문에 꽃잎이 다섯 장이 많은데, 다섯은 양수(陽數)입니다. 눈꽃은 음기(陰氣)를 받았기 때문에 유독 여섯이 되었으니, 여섯은 음수(陰數)입니다. 이 역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전통의 양수와 음수는 제각기 홀수와 짝수를 말한다. 오늘날 양수(+)와 음수(-)의 그것과 다르다. 율곡의 답은 전통의 양수와 음수 곧 홀수와 짝수를 가지고 초목과 눈의 꽃잎의 수를 설명했다. 만약 식물의 꽃잎이 모두 홀수로만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그나마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는 근거가 없다.

이어서 눈꽃이 여섯인 것은 음수로 음기와 관련시키고 그렇게 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눈꽃이 육각형 형태를 띤 것은 필연적인 자연의 원리이므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이 논리로 보자면 모든 액체가 온도가 내려가 응고할 때 모두 짝수의 결정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결정체의 분자구조를 밝히지 못한 이상, 음수와 양수를 유비적으로 사물에 적용한 것은 근대과학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그런데 자연현상 가운데 보기 드문 사례에는 우박·지진·해일·화산폭발 등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우박 외의 다른 것들은 흔한 일이 아니어서 이런 자연현상에 대한 질문은 없다. 그래서 우박의 문제를 내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우박은 서리도 아니고 눈도 아닌데 무슨 기(氣)가 모인 것인가? 어떤 것은 말의 머리만큼 크고 어떤 것은 달걀만큼 커서, 사람과 새와 짐승들을 죽인 것은 어느 때에 있었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우박은 어떤 기가 모여서 된 것인가?’라는 질문에 관심을 가져 보아야 한다. 두 가지 방향으로 문제를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순수한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우박이 생기는 원리를 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적 관점 또는 인간사회의 일과 관련시켜서 묻는 관점이다. 앞에서도 줄곧 이런 두 가지 패턴으로 질문했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기가 모인 것인가?’라는 질문은 형체가 있는 모든 사물은 기가 모여서 형성된다는 기철학적인 전제를 갖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곡의 답안은 이렇다.

 

“우박은 어그러진 기가 만든 것입니다. 음기가 양기를 위협하기 때문에 그 우박이 생길 때는 물건을 해칩니다. 옛일을 상고하면 우박이 큰 것은 말 머리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여, 사람을 상하게 하고 짐승을 죽였던 일은 전란이 심한 세상에 일어나거나 재앙의 기초가 되는 임금을 경고하기 위하여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역대의 경계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은 반드시 여러 번 진술하지 않더라도 이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박은 적란운(積亂雲: 수직으로 크게 발달한 구름)이 발달되어 얼음알갱이가 형성되어 떨어지면서 과냉각된 구름 알갱이와 충돌하면서 얼어붙고, 또 상승기류를 만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 큰 얼음알갱이로 변해 떨어지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5㎜∼10㎝ 크기의 얼음 또는 얼음 덩어리이다.

여기서 율곡은 우박을 어그러진 기가 만든 것으로 보는데, ‘어그러진 기’의 원문은 여기(戾氣)이다. 이것의 반대는 ‘바른 기’ 곧 정기(正氣)이다. 그 여기를 한의학에서 괴려지기(乖戾之氣) 또는 독기(毒氣)라고도 말하며 감염증과 전염병을 일으키는 사기(邪氣)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어째든 그 어그러진 기란 인간과 만물에 해가 되는 기로서 음기에 속한다고 보았다. 우박이 찬 얼음알갱이로 이루어져 있고, 찬 공기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음기로 본 것은 당연하다.

고대의 인류는 기후나 날씨가 차가운 것보다 따뜻한 것을 선호했다. 그것은 당시에 기술적으로 난방시설을 잘 갖추지 못했고 또 몸을 따뜻하게 하는 옷이 부족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날씨가 추우면 농장물이나 가축이 잘 자랄 수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류의 생산과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농업이 주요산업이었던 동아시아에서는 차가운 음기(陰氣)보다 따뜻한 양기(陽氣)에 더 가치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연의 영역에서도 양기를 선호하고 음기를 멀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박이란 그런 음기의 소산이다.

이런 음기가 왕성한 것은 비록 자연적인 현상이라 할지라도 인간사와 무관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거나 포악한 군주가 있으면 경고하기 위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이점은 앞에서 여러 차례 밝혔기 때문에 율곡 자신도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재차 강조하지는 않았다.

비가 내리는 원리


 

비가 내리는 원리

 

란 대기 중의 수증기가 엉겨 작은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현상이다. 한 개의 빗방울이 되기 위해서는 10만개의 구름방울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구름이 모여 있다고 해서 곧장 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려면 몇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 찬 기운과 더운 공기가 교차하는 전선(前線)이 형성되어야 하거나, 여름철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아래와 위로 뒤바뀌고 섞이면서, 또 지형적으로 높은 산이 있거나 태풍이 불 때 비가 온다.

천도책」의 비에 대한 질문 역시 두 가지 관점에서 묻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아래와 같다.

 

“비는 구름을 따라 내리는 것인데, 간혹 구름만 빽빽하고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비가 내리기 위해서는 구름이 있어야 하는 것이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빽빽한 구름이 있어도 비가 내리지 않을 때가 있다.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앞에서 비가 오는 네 가지 현대 기상이론을 소개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율곡의 경우는 어땠을까? 그의 답은 이렇다.

 

“비와 이슬은 다 구름에서 나오는 것인데 젖은 기운이 왕성한 것은 비가 되고, 젖은 기운이 적은 것은 이슬이 됩니다. 음양이 서로 합하면 이에 비가 내리는데, 간혹 구름만이 자욱하고 비가 오지 않는 것은 아래위가 서로 합하지 못해서입니다. 『홍범전(洪範傳)』에 이르기를, ‘황제가 지극하지 못하면 그 벌(罰)은 항상 음(陰)하다.’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입니다.”

 

‘젖은 기운’이란 말을 썼는데 현대말로 물방울로 보아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니까 물방울이 왕성하면 비가 된다는 것은 일리가 있으나 젖은 기운이 적은 구름이 이슬이 된다는 말은 맞지 않다. 여기서 음기와 양기가 합하면 비가 된다는 말에서 음기와 양기는 찬 공기와 더운 공기로 바꾸어 말할 수 있어, 앞에서 소개한 대로 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음기와 양기는 순수한 자연의 기로만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황제가 지극하지 못하면 그 벌은 항상 음하다.’라는 설이 나왔다. 『홍범전』의 이 말은 『한서(漢書)‧하후승전(夏侯勝傳)』에 보이는데, 황제가 바르지 않으면 하늘은 벌을 내려 음기가 왕성하고, 양기가 부족해 합쳐 비를 만들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여기서도 자연과 인간의 일이 서로 감응한다는 천인상감(天人相感)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문제도 이 같은 맥락에서 묻고 있다.

 

“신농씨(神農氏) 때에는 비를 원하면 비가 오는 태평한 세상이라 연간 36번의 비가 있었으니, 자연 또한 사사롭게 운행하는 것이 두터운가? 혹은 군사를 일으킬 적에 비가 오고, 혹은 옥사(獄事)를 판결할 적에 비가 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농씨는 중국 전설에 농사를 가르쳐 준 제왕이다. 자연의 운행도 태평한 세상에는 알맞게 비가 오니, 그것이 인간의 일과 관계 되느냐의 질문이다. 다른 인간의 중대사 또한 그러한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율곡의 답안은 다음과 같다.

 

“양기가 가득 차오르면 가물고, 음기가 왕성하면 장마가 지는데, 반드시 음양이 조화하여야 비 오거나 맑은 날씨가 때를 맞춥니다. 대개 신농씨 같은 성인이 다스리는 순박하고 밝은 시대에는 맑은 날씨를 바라면 맑고, 비를 바라면 비가 온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이치입니다. 성왕이 백성을 다스릴 때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5일에 한 번씩 바람이 불고, 10일에 한 번씩 비가 내린 것도 역시 그 떳떳한 이치입니다. 이 같은 덕이 있으면 반드시 이 같은 보응이 있는 것이니, 어찌 자연의 운행이 사사로이 두텁게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대개 원통한 기운은 가뭄을 부르기 때문에 한 여자가 한을 품어도 흉년이 됩니다.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긴 것이 족히 천하의 억울한 기운을 해소하기에 충분하였고, 안진경(顔眞卿)이 옥사를 판결한 것이 한 지방의 원통한 기운을 해소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알맞게 비가 내린 것이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태평한 세상에는 본래 필부필부(匹夫匹婦)조차도 그 은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으니, 어찌 비와 바람이 순조롭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추울 때에도 하늘과 땅이 비록 닫히고 막혔으나, 음양이 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비가 엉겨서 눈이 되는데, 이는 대개 음기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 자연에서 양기는 보통 덥고 건조한 공기이며, 음기는 그것에 상대적으로 차갑고 습한 공기를 일컫는다. 이런 공기가 만나야 비를 이룬다. 이런 자연의 기는 인간이 내뿜는 기와 관계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사회에 억울하거나 원통한 일이 있으면 인간의 기가 자연의 기와 섞여 날씨나 기후가 고르지 않게 된다고 믿었다. 결국 그 원인은 통치자인 왕이나 그 통치를 대신 맡은 관리들에게 있다. 율곡의 답안에서 주나라 무왕(武王)이나 당나라 정치가이자 서예의 대가로 알려진 안진경의 예를 든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앞의 글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비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김없이 자연의 원리에 인간사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여기서 순수한 자연과학적 견해를 추출해 볼 수도 있지만, 문제나 답안 자체는 자연과학적 문제에 그다지 비중을 두기보다, 오히려 인간사와 그것을 관련시키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물론 답이란 문제 때문에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숙제는 율곡이 과연 자연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예전의 견해처럼 그대로 수용했는가 하는 점이다. 아니면 자연 이해에 미신적 견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전제 왕권을 제한하기 때문에, 아니면 시험관들이 정치적 자연관을 묻는 그 의도를 간파해서 이런 답을 하였을까? 이 문제를 답하기는 아직 이르고, 좀 더 숙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슬과 서리


 

이슬과 서리

 

구 대기권에서 일어나는 기상현상에는 비·바람·눈·안개·서리·이슬·우레·구름·우박·무지개·황사 등이 있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 과학에서 볼 때 파악하기 쉬운 것들이지만, 옛날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이러한 기상현상이 평상시와 다르게 이변이 되었을 때, 그것을 가지고 인간사의 일을 점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자연현상에 대해 옛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견해는 첫째 그것이 일어나는 원리가 어떤 것인지 하는 것과 둘째 이변과 인간사가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파악하는 문제였다. 지금까지 소개한 「천도책」의 문제와 답은 모두 이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서리와 이슬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 첫 번째 문제는 이렇다.

 

“서리는 풀을 죽이고 이슬은 만물을 적시는데, 서리가 되고 이슬이 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서리가 풀을 죽인다는 말은 풀이 서리를 맞으면 죽는 것을 의미한다. 늦은 가을 찬 서리가 풀 위에 앉으면 풀은 말라 죽고, 나뭇잎은 낙엽이 지기도 하고 말라서 떨어지기도 한다. 사실은 서리 때문에 풀이 죽은 것이 아니라 서리가 내릴 정도로 온도가 영하로 내려갔기 때문에 얼어서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서리란 영하의 기온에서 공기 중의 수증기가 땅에 접촉하여 얼어붙은 매우 작은 얼음이다.

이슬은 주로 봄철이나 여름철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갔을 때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풀이나 물체 위에 작은 물방울로 맺혀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만물을 적신다고 표현하였다. 여름철 차가운 음료수 병 표면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서리와 이슬이 생기는 원리를 율곡은 뭐라고 답했을까?

 

“양기(陽氣)가 펴질 때에 이슬이 만물을 적시는 것은 구름이 축축하게 한 것입니다. 음기(陰氣)가 혹독할 때에 서리가 풀을 죽이는 것은 이슬이 동결(凍結)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갈대는 푸르고 푸른데, 흰 이슬은 서리가 된다.’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양기가 펴질 때’란 주로 봄철과 여름철을 말한다. 대개 양기가 펼칠 때 만물이 소생하여 무성하게 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슬은 봄과 여름철에 구름이 축축하게 했다고 하는데, 물론 틀린 생각이다. 잘 알다시피 이슬은 공기 중에 습도가 높고 구름이 없는 맑은 날 기온의 일교차가 클 때 잘 맺힌다.

음기가 혹독할 때는 늦가을부터 겨울철이다. 대개 찬 기운을 음기로 표현한다. 이때의 서리를 이슬이 동결한 것이라 표현한 것은 비교적 정확하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밤 동안 얼지 않고 맺히면 이슬이요, 얼어서 물건에 달라붙으면 서리가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남월(南越)은 따뜻한 지방으로 6월에 서리가 내리는 것은 혹독한 괴변인데, 당시의 일을 상세하게 말할 수 있는가?”

 

남월은 지금의 중국 광동·광서 지방에 있었던 한나라 때의 나라 이름으로, 중국에서도 남쪽 지방에 속한다. 이 문제는 이슬이나 서리가 생기는 원리에 이어, 이변이 생겼을 때 인간사와 연결시키는 질문이다. 사실 첫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은 절기상으로 보면 입동(立冬) 바로 앞에 있다. 그런데 더운 여름철에 내린다면 이변이다. 여기서 6월이란 아마도 음력일 것이므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대개 7월에 해당된다.

율곡의 답은 이렇다.

 

“음기가 극성하면 서리가 내립니다만, 간혹 서리가 제 때에 내리지 않기도 합니다. 당나라 때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조정에 임하자, 음·양의 위치가 바뀌어 남월(南越)은 지극히 따뜻한 지방인데도 6월에 서리가 내렸으니, 생각건대 이는 반드시 온 세상이 온통 몹쓸 음기(陰氣) 속에 갇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측천무후의 일은 말할 수 있지만 말하려면 길어집니다.”

 

여기서 측천무후는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당나라 고종의 황후였지만 690년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음양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말은 여성이 황제가 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옛날에는 음양으로 사물을 두 가지 방식으로 분류하기도 했는데, 가령 양은 따뜻함, 남성, 군자, 임금, 강함, 적극성, 태양, 봄과 여름 등을 상징하고, 음은 차가움, 여성, 소인, 신하, 부드러움, 소극성, 달, 가을과 겨울 등을 상징했기 때문에 이런 사고가 가능했다. 전통적으로 음을 누르고 양을 붙들어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니 여성이 황제가 되었으므로 음의 기운이 왕성하여 6월인데도 서리가 내렸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것은 과학적인 판단보다는 상당히 정치적인 견해에 가깝다. 율곡이 정말로 여왕이나 여자황제가 있기 때문에 여름에 서리가 내린다고 믿었는지 알 수 없지만, 과거시험을 통해 수험자들에게 전통의 음양사상의 내용을 물었기 때문에 이렇게 답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조선후기 최한기(崔漢綺)는 이슬과 서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땅의 습기가 높이 치솟지 않아 구름을 맺을 수 없어 지면에 흘러 다니다가, 해가 진 후 차가운 밤기운을 받아 상승했던 강한 힘이 소멸하고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것이 이슬과 서리이다. 외부의 냉기가 많은 가을과 겨울에는 서리를 맺고, 외부의 냉기가 적은 봄과 여름에는 이슬을 이룬다. 하늘이 맑고 바람이 없으면 이슬이나 서리가 맺힐 수 있으나, 만약 바람이 불거나 흐린 날에는 기가 흩어져 서리나 이슬이 맺힐 수 없다. 물에 비유하면 흐름이 멈추어 있는 것은 쉽게 얼고 흘러 움직이는 것은 얼기 어려운 것과 같다
(최한기저|이종란 옮김, 『운화측험』, 한길사, 2014, 299쪽).”

이런 견해는 당시 서양과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19세기에 말한 것이므로 당연히 현대 과학의 견해에 가깝다.

우레와 벼락은 누가 만드나?


 

우레와 벼락은 누가 만드나?

 

레와 번개가 치면 사람들은 습관처럼 두려워한다. 빛과 소리가 사람의 눈과 귀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 옛날 공자도 천둥이 울리면 얼굴빛이 변하며 자다가도 일어나 의관을 갖춰 입고 바로 앉았다고 전한다. 우레 소리에 삼가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닐까? 이것은 오늘날처럼 전기방전에 따른 단순한 기상현상이라는 사실을 그 옛날에는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로 보이며,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우레와 번개에 대해 여러 가지 신화적 또는 미신적 견해가 생기게 되었다.

옛날에는 통속적으로 우레와 번개를 다스리는 신이 있었다고 여겼는데, 그것을 뇌공(雷公) 또는 뇌사(雷師)나 뇌신(雷神)으로 불렀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제우스나 유피테르가 우레를 일으키며 손에는 뇌정(雷霆)과 왕홀(王笏)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이런 번개나 우레의 원인이나 원리를 얼마나 실제와 가깝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태도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율곡의 「천도책」에서 묻는 이번 문제는 바로 우레와 벼락에 관한 것이다. 그 첫 번째 질문은 이렇다.

 

“우레와 벼락은 누가 이를 주재(主宰)하여 그 빛이 번쩍번쩍하고 그 소리가 두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문제에서 ‘누가 이를 주재하며’라는 말은 분명 어떤 인격적인 존재가 우레나 번개를 주재한다는 옛 신화 또는 종교적 흔적이 남아 있는 표현이다. 아니면 시험관이 이 자연현상을 수험생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있는지 묻는 함정일 수도 있다.

율곡의 답안은 이렇다.

 

“양기가 발산한 뒤에 음기가 양기를 싸서 양기가 나오지 못하면, 떨치고 쳐서 우레와 번개가 됩니다. 우레는 반드시 봄과 여름에 일어나니, 이는 천지의 노한 기운입니다. 빛이 번쩍이는 것은 양기가 발하여 번개가 된 것이요, 소리가 두려운 것은 두 기가 부닥쳐서 우레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반드시 어떤 누군가가 그 벼락 치는 권한을 잡고 주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게 따지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 답안을 여기까지만 읽어보면 신화적·종교적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음기와 양기로서 나름의 합리적 견해로 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설명할 때 기(氣)를 사용한다. 그래서 양기와 음기로써 설명해내었는데, 뻗어나가는 양기와 움츠려드는 음기의 성질을 가지고 설명했다. 실제로 양전하(+)와 음전하(+)의 방전현상으로 생기는데 번개는 빛이고 소리는 우레이다. 여기서 단지 방전현상이라는 것만 몰랐지 두 기가 관계해서 생긴다는 견해는 실제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

17세기까지도 서양 사람들 가운데는 번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따랐는데, 이렇게 말하였다.

“건조하고 더운 공기가 이미 차가운 구름 안에서 막혀서 이리저리 날라 다니면서 충돌하기 때문에, 불에 타면서 빛이 생기므로 번개가 된다
(알폰소 바뇨니 저|이종란 옮김, 『공제격치』, 한길사, 2012. 참조).”

이 또한 천둥과 번개가 전기방전이라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했던 것이다.

우레에 관한 두 번째 질문은 벼락에 대한 것으로 옮겨간다.

 

“간혹 사람이나 물건이 벼락을 맞는 것은 또 무슨 이치인가?”

 

오늘날에도 우리는 가끔 야외에서 등산을 하거나 골프를 치다가 벼락을 맞았다는 뉴스를 접할 때가 있다. 그 사람들은 왜 벼락을 맞았을까?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나쁜 죄가 있어서일까?

율곡의 답안은 이렇다.

 

“예전 선비들이 말하기를, ‘우레와 번개는 음양의 정기(正氣)라, 겨울잠 자는 동물이 놀라서 깨어나게도 하거나 간사한 사람을 치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본디 사기(邪氣)가 모인 것이 있고 물건에도 역시 사기가 붙어 있으니, 정기가 사기를 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입니다. 공자께서 심한 천둥이 칠 때면 반드시 얼굴빛이 변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물며 마땅히 벼락이 쳐야 할 곳에 친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상(商)나라의 무을(武乙)에게, 또 노(魯)나라의 이백(夷伯)의 사당에 벼락이 친 것에 대해 이런 이치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을 가치중립적으로 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유학자들은 비록 인격적인 신이 자연의 운행을 주관한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자연의 이법이나 원리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그래서 정기(正氣)란 지극히 공평하고 크고 바른 천지의 원기(元氣)로 여겼으며, 반면에 사람과 물건에 바르지 못한 나쁜 기운인 사기(邪氣)도 있다고 여겼다. 이런 사기가 있는 까닭은 기의 운동과 변화과정에서 치우치거나 막히거나 거칠거나 어둡거나 잡된 것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벼락은 정기가 사기를 치는 것이라 여겼다.

여기서 무을은 상나라의 무도한 왕인데, 가죽 주머니에 피를 넣어 나무에 매달아놓고 활을 쏘아 맞히고는 ‘내가 하늘과 싸워 이겼다.’라고 했다가 들에 나갔을 때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또 노나라 대부 전씨(展氏)의 조상인 이백(夷伯)의 사당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을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것을 두고 하늘이 벌을 주었는데, 전씨에게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죄악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조선시대까지 천둥과 번개를 비롯한 자연현상을 보는 것에는 인간의 도덕적 관점이 녹이 있다. 오늘날도 누구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야, 이 벼락을 맞아 죽을 놈아!”

이렇게 말하는데, 바로 이런 자연관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선후기 홍대용의 글에서도 이런 점이 발견된다.

“무릇 우레는 그 성질이 굳세며 세차고 그 기세는 떨치며 맹렬하여, 바르고 곧은 것은 피하고 부정하고 악한 것에 반드시 달려간다. 대개 바르고 곧은 것은 우레가 두려워하고, 부정하고 악한 것은 우레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의산문답』).”

여러분은 아직도 죄 있는 사람이 벼락을 맞는다고 믿는가?

안개와 그 색깔


 

안개와 그 색깔

 

개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공기를 만나 응결하여 지표면 가까이 떠다니는 현상을 말한다. 대개 밤낮의 기온 차이가 심한 봄이나 가을철에 많이 생긴다. 안개는 본질적으로 구름과 같지만 지표면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그것과 다르다. 이 밖의 조건은 공기 중에 수증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데, 수증기의 공급원이 되는 강이나 호수 또는 바닷가에 안개가 자주 발생한다.

또 안개가 발생하는 실험을 간단히 할 수 있다. 집기병 속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다음 잠시 후 물을 조금만 남기고 쏟아 버린다. 그런 다음 비닐로 얼음조각을 싼 다음 실로 묶어 병속에 매달아 두고 관찰한다. 수증기가 많이 포함된 따뜻한 공기가 식으면서 안개가 발생한다.

현대 과학적으로 보면 안개는 이렇게 간단하지만 옛날에는 어떻게 설명했을까? 먼저 「천도책」에 나오는 문제부터 살펴보자.

 

“안개는 무슨 기운이 발동한 것이며, 그것이 붉고 푸르게 되는 것은 무슨 징조인가? 누런 안개가 사방을 막기도 하고, 낮에 많은 안개가 끼어 어둡기도 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이 문제는 먼저 안개가 어떻게 생기는지, 안개가 붉고 푸른색은 무슨 징조인지, 또 누런 안개가 사방을 막고 낮에 어두울 정도로 안개가 끼는 까닭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다. 보통 안개를 하얀색으로 알고 있는데, 실은 무색의 작은 물방울에 빛이 산란하면서 희게 보이는데, 붉은색이나 푸른색 그리고 누런색은 왜 생길까?

일단 율곡의 답을 살펴보자.

 

“안개는 음기(陰氣)가 새어나가지 못하여 찌고 막힌 것입니다. 물건의 음기가 모인 것도 안개를 만들 수 있으니, 대개 산천의 나쁜 기운입니다.”

 

전통에서 말하는 음기는 보통 물기가 많이 포함된 기 또는 차가운 기를 말한다. 일단 안개를 물기가 많은 공기 곧 수증기와 차가운 공기와 연관시켰다는 점에서는 일리가 있다. 더구나 새어나가지 못하고 찌고 막힌 것이란, 정확하지는 않지만 더운 수증기가 식어 물방울로 변한 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또 물건의 음기가 모인 것도 안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 소개한 안개 실험에서 차가운 기가 수증기가 포함된 더운 공기를 식혀 안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안개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물건의 음기가 산천의 나쁜 기운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보통 음기를 차가운 기로 본다. 늦가을이나 겨울철에 해당하는 기여서 식물을 말라죽게 하고 동물과 인간에게도 피해를 주므로 해로운 기로 여겼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따뜻한 양기는 생물을 살리므로 좋은 기로보고, 그 차가운 음기는 그 반대의 성질을 가졌으므로 나쁜 기운으로 여겼다.

그 다음 율곡의 답안은 이렇다.

 

“그 붉은 것은 전쟁의 상징이 되고, 푸른 것은 재앙이 되는 것은 모두 음이 왕성한 징조입니다. 역적 왕망(王莽: 전한 말 정치가)이 한나라의 황제자리를 찬탈했을 때에는 누런 안개가 사방에 쌓였고, 당나라 안록산의 난 때에는 큰 안개로 낮에도 어두웠으며, 한나라 고조 유방이 백등(白登)에서 포위되었을 때나, 문천상(文天祥: 송나라의 충신)이 시시(柴市)에서 죽을 때에는 다 축축한 흙비가 왔습니다. 간혹 신하가 임금을 반역한다거나 오랑캐가 중국을 침략하면, 이런 것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앞에서 소개한 다른 자연현상처럼 안개의 색깔을 가지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점치고 있다. 앞에서 붉은 구름이 전쟁을 상징하듯 붉은 안개도 전쟁을 상징한다고 한다. 푸른 안개는 자연재해가 되는 것은 음이 왕성한 징조라고 한다. 아마도 푸른 안개가 낄 때는 날씨가 매우 추웠던 것 같다. 또 왕망이 한나라의 황제자리를 찬탈했을 때는 황사가 많이 일어났던 것 같다. 아마도 중국 땅이니까 누런 황사를 안개로 오인했을 것이다. 때로는 안개가 낮이 어두울 정도로 짙게 끼는 때가 있다. 필자도 그런 것을 본적이 있으므로 안록산이 난을 일으켰을 때 그 점을 악용했는지도 모르고 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또 한나라 고조 유방이 백등(白登)에서 흉노(匈奴)의 모돈선우(冒頓單于)에게 패할 때나, 송나라 충신 문천상이 원나라에 협력하지 않고 시시(柴市)에서 사형당할 때 축축한 흙비가 내렸다는 것은 아마도 황사가 일어났을 때 비가 오면 흙비가 온다. 필자도 대개 봄날 비온 뒤 밖에 세워둔 승용차 유리창을 닦으면서 자주 경험해 본 바이기도 하다.

사실 순수한 안개는 색깔이 없고 흰색은 본래의 색깔이 아니라 눈처럼 빛이 산란하기 때문이다. 안개에 색깔이 있는 것은 대기 중의 먼지나 오염물질이 섞여서 생긴다. 때로는 아침이나 저녁의 노을의 영향을 받거나 햇빛이 반사 또는 굴절되면서 색깔이 달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안개가 아닌 황사나 오존이 섞인 스모그의 경우도 안개로 오인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일과 특정한 일을 연관시켜 안개의 색깔을 보고 점치는 일은 오늘날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근거가 없다.

아마도 이런 견해는 중국의 자료를 근거로 해서 나온 것 같다. 옛날에도 우리나라보다 중국의 대기가 좋지 않기 때문에 이런 기록들이 자주 보이고, 그것을 인용한 조선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믿은 것으로 보인다. 자연현상을 보고 점치는 일은 동서를 막론하고 흔히 있었던 일이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

참고로 17세기 초기 서양 사람의 안개에 대한 견해도 다음과 같이 정확하지 않다.

“만약 구름 속의 습기에 맑고 탁함이 균등하지 않으면, 맑은 것은 거듭 물로 변하여 비가 되고, 그 탁한 것은 물로 변할 수 없어, 이에 떨어지면서 안개가 된다. 음식에 비유하면, 맑은 음식은 변하여 인체를 기르지만, 탁한 것은 피로 변하여 [인체를] 기르기에 부족하므로, 반드시 버리니 찌꺼기가 된다
(알폰소 바뇨니 저|이종란 옮김, 『공제격치』, 한길사, 2012, 261쪽. 참조).”

구름과 그 색깔


 

구름과 그 색깔

 

람에 이어 「천도책」에서 묻는 문제는 구름에 관한 것이다. 질문의 내용은 이제 천문(天文)에서 기상(氣象)으로 자연스럽게 옮아가고 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천문과 기상은 매우 중요했다. 조선은 농업을 산업의 근본으로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날씨나 기후에 따라 농작물의 생산량이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름에 대한 질문은 어떤 것일까?

 

“구름은 어디에서 일어나고, 흩어져서 오색(五色)이 되는 것은 무엇에 감응한 것이며, 간혹 연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무성하고 뒤섞여 흩날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구름이 어디서 일어나는 것을 묻는 게 이상하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당연히 하늘에서 생긴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렇다. 그러나 사실 이 질문은 ‘구름은 어디로부터 생기는가?’라는 묻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여기서 답해야 할 내용은 세 가지이다. 구름이 발생하는 곳, 구름의 다섯 가지 색깔의 징조, 그리고 연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은 구름의 원인이 그것이다.

율곡의 답안은 이렇다.

 

“만약 산천의 기운이 올라가서 구름이 된다면, 좋고 나쁜 징조를 그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선왕(先王)은 영대(靈臺)를 설치하고 구름을 관찰하여 길흉의 징조를 살폈습니다. 대개 좋고 나쁜 징조는 구름이 생기는 그 날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미리 징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희면 반드시 흩어지는 백성이 있고, 구름이 푸르면 반드시 곡식을 해하는 벌레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검은 구름이 어찌 수재(水災)의 징조가 되지 않으며, 붉은 구름이 어찌 전쟁의 징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누런 구름만이 풍년이 들 상서로운 징조이니, 이는 곧 기운이 먼저 나타난 것입니다. 연기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것이 분분하게 빛나고 맑게 흩어져 유독 지극히 화한 기운을 얻어서, 성왕(聖王)의 상서로운 것이 되는 것은 오직 경사로운 구름입니다. 진실로 백성의 재물을 살찌게 하고 노여움을 풀어 주는 덕이 없으면 이것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어찌 물과 흙의 맑고 가벼운 기운이 한갓 백의창구(白衣蒼狗)가 되는 데 비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구름은 산천의 기(氣)가 올라가서 구름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만약 산천의 기운이 올라가서 구름이 된다면’과 ‘어찌 물과 흙의 맑고 가벼운 기운이’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점은 조선후기까지 일반적으로 구름이 형성하는 원리를 그렇게 설명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수증기가 증발하여 상승해 단열팽창을 통하여 구름이 된다. 물과 흙의 맑고 가벼운 기를 수증기와 거기에 섞인 물질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문제는 이 질문의 의도가 그런 일반적인 것을 묻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구름을 관찰하여 일종의 미래를 점치는 일에 더 비중을 둔 것 같다. 여기서 영대(靈臺)란 옛날 왕의 정원에 세워 사방을 관찰하던 누대(樓臺)로 오래된 것으로 문헌에 보이는 것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영대이다.

자, 문제는 구름의 색깔을 보고 길흉을 점쳤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색깔은 전통의 오방색과 같이 청·백·홍·흑·황색으로 분류된다. 그 색깔이 의미하는 징조는 각각 다르다. 인간에게 해가 되는 징조를 나타내는 것도 있고 경사스런 징조를 나타내는 구름도 있다. 그래서 구름을 단지 산천의 기운이 물리적으로 상승하여 백의창구(白衣蒼狗) 곧 흰옷이나 푸른 개 모양으로 이리저리 변하는 것으로만 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율곡만의 독창적인 해석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어 왔던 일이다. 가령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 속에 소개하는 고려 말 정몽주의 시에서는 “남쪽에 황색구름이 끼어 있으니 풍년이 들 것을 미리 안다.”라는 말이 보이는데, 율곡의 견해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예는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에도 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구름으로 점치는 운점(雲占)이라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에서 들여 온 『천원옥력(天元玉曆)』이 있어 지식인들이 이것을 많이 참고했다고 전한다.

사실 이 운점은 점성술과 유사한 점이 있다. 별을 보고 다른 하나는 구름을 보고 점을 친다는 것만 다를 뿐이지 결국 인간사회의 길흉을 점쳤다는 것은 동일하다. 자연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 어떤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것에는 이전에 관찰한 자연현상과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여, 후대에 똑같은 자연현상이 일어났을 때, 당시 일어났던 일이 다시 반복해 일어난다는 것을 믿음으로서 가능했다. 예컨대 가장 단순한 것으로 ‘개미가 이사 가면 비가 온다.’든지, ‘겨울이 몹시 추우면 이듬해 해충이 적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은 대개 같은 경험이 반복되어 생긴 믿음이다.

아무튼 이런 것에는 비교적 사실과 일치하는 것도 있고, 미신인 것도 있다. 미신인 것은 아무래도 어떤 현상과 일어나는 사건사이의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검은 구름에 수재가 난다는 것은 구름이 짙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올 확률이 있어 어느 정도 인과관계가 인정되지만, 나머지 색깔은 정말 그런지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인간사회의 일과 구름의 색깔이나 모양을 연결시켰다는 점은 앞서 소개한 동중서(董仲舒)의 이론과 관계된다.

재미있는 점은 서양에서도 이러한 자연현상으로 날씨나 기후 등을 점쳤다는 점이다. 앞서 소개한 『공제격치』에는 이런 말이 보이는데, 자연현상으로 점치는 일은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구름이 서쪽에서 동으로 움직이면, 곧 하늘이 개이게 된다. 구름이 쌓이나 움직이지 않으면 바람이 분다. 바람 뒤에 비가 왔다가 해가 나올 때는 날씨가 흐리게 된다. 둘러싸인 구름이 빽빽할수록 장차 불어 올 바람도 크고, 둘러싸인 구름이 비로소 열리면, 그 방향에 반드시 바람이 생기며, 둘러싸인 구름이 일시에 얼음처럼 변하면, 반드시 맑을 것이다. 구름이 산 정상에 내려앉으면 비가 올 것이고, 구름이 젖어서 흰색이면 우박이 내릴 것이며, 구름이 골짜기 아래에 내려앉으면 맑을 것이다. 제비가 물 가까이 날고, 오리가 연달아 울면서 날아올라 구름에 이르고, 소가 하늘의 냄새를 맡듯이 머리를 쳐들고 그 털의 결을 거꾸로 핥으며, 개미가 황급히 그 집안으로 숨고, 자벌레가 흙에서 나오며, 파리가 사람에게 성가시게 달라붙어 쫓아도 도망가지 않는 것은 모두 바람이 불고 비가 올 조짐이다
(알폰소 바뇨니 저|이종란 옮김, 『공제격치』, 한길사, 2012, 255-260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