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의 시대


 

1775년 4월 19일, 영조와 정조의 시대

 

조(英祖) 51년 을미년, 즉 1775년 음력 4월 19일(양력 5월 18일)에 영조는 손자인 정조(正祖), 즉 당시의 세손(世孫)을 데리고 홍문관(弘文館)에서 글을 읽었다. 이 기록이 ⌈일성록⌋과 ⌈영조실록⌋에 보인다.

율곡 이이(1537년∼1584)가 사망하고 191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이 때 율곡은 ‘선정(先正)’이라 불리며, 퇴계 이황과도 같은 훌륭한 유학자이자 국가적인 스승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우선 그 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음력 4월 19일 이 날은 육십갑자로 병신일(丙申日)에 해당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기록은 1775년, 즉 을미년(乙未年)의 음력 4월 19일 ⌈일성록⌋과 ⌈영조실록⌋의 기록이다.

1775년은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100년씩 나누어 구분해본다면 300년이 지나고 400년에 가까운 시기이다. 조선이 4/5정도 지나면서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침략하여 한반도의 남부 지역이 병란에 휩싸인 사건이며,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침략으로 한반도의 북부가 유린된 사건이다.

이러한 커다란 혼란을 이겨내고 피폐해진 국가 재정을 극복하여 영조시기(영조 재위 시기, 1724년∼1776년)는 조선의 국력과 문화가 새롭게 부흥하는 시기였다. 역사가들은 영조 재위시기와 이 뒤를 이은 정조 재위시기(1776년∼1800년)를 합하여 조선의 르네상스기, 혹은 조선 문화의 중흥기라고 높게 평가한다.

이 시기에는 그러한 평가에 걸맞게 조선시대 대표적인 예술가들, 학자들이 출현하여 활약하였다. 문화는 사회 안정과 발달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안정되고 발달하면 문화가 흥성한다.
예를 들면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린 정선(鄭歚, 1676년∼1759년)이 영조 재위시기에 활약하였다. 이른바 ‘진경산수’란 ‘산수(山水)’ 즉 물과 산을 그린 경치가 ‘진경(眞景)’ 사실적인 경치에 가깝다는 것이다.

정선(鄭歚)의 광나루 그림 . 중국 산수화처럼 기이하고 웅장한 멋은 없지만 포근하고 친근한 풍경이 그려져 있다.
정선(鄭歚)의 광나루 그림 <광진(廣津)>. 중국 산수화처럼 기이하고 웅장한 멋은 없지만 포근하고 친근한 풍경이 그려져 있다.

그 전에 조선의 화가들은 자신이 사는 산천 경치를 그리는 것보다는 중국 사람들이 그린 산수화를 배워서 경치를 그렸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초기에 활약한 안견(安堅)의 그림을 보면 그러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안견의 중 만추(晩秋)
안견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중 만추(晩秋)

 

그림을 보면 높이 속은 봉우리와 구름에 잠긴 산 중턱, 기다랗게 떨어지는 폭포수 등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보는 경치가 아니다. 중국의 황산(黃山) 어느 골짜기에서 그린 듯한 이러한 그림은 중국화가의 작품을 모방하고 상상하여 창조한 것이다. 정면의 조그마한 산봉우리에 지어놓은 정자도 중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저렇게 산꼭대기에 지은 정자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안견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도 환상적인 이상의 세계를 아름답게 표현하였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자연의 세계는 말이 자연이지 사실은 추상적인 피안의 세계일뿐이다.
안견의 그림은 비록 조선시대 미술사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독창성의 측면, 그리고 사실성의 측면에서는 영조·정조 시대의 작품들에는 미치지 못한다.

조선 초기와 중기의 그림들이 중국 그림을 적극적으로 모방하고 중국 경치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는 이면에는, 달리 말한다면 자신들이 사는 곳은 경치를 그리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열등감이 내재되어 있다. 중국의 문화, 그리고 그러한 문화가 그려내는 중국의 자연이 중심이고 자신의 문화나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자연은 주변인 것이다.

그러한 열등감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의 시기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사라지면서 변화를 맞게 되었다. 민족적인 위기와 그 위기를 극복하고 수습하면서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숙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사는 곳의 경치도 화폭에 옮겨서 그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진경산수화의 등장은 바로 조선의 문화계가 중국 중심적이고 중국 위주의 사대주의적인 관념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음을 나타낸다. 마치 조선의 유학 사상이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추상적인 주자 철학이나 이기론(理氣論)보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 유사하다. 중국 송나라 시대 주자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가르침을 우리나라의 현실 상황에 어떻게 활용하고 변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관심이 옮겨간 것과 같다.

이러한 영조·정조 시대 정선 외에 풍속화 화가로 잘 알려진 김홍도(金弘道, 1745년∼1806년)와 신윤복(申潤福, 1758년∼1814년?)도 등장하여 활약하였다. 그리고 김득신(金得臣, 1754년∼1822년), 강세황(姜世晃, 1713년∼1791년) 등 인물도 이 시기에 활약하였는데, 이들이 자기 주변의 자연이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바로 당시 조선의 문화계가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중국과 비교하여 자기들 나름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기 화가들이 자기 주변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사회와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윤복 그림 이 시기 화가들이 자기 주변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사회와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윤복 그림 <젊은이들의 봄나들이>
이 시기 화가들이 자기 주변의 풍속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사회와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진경산수화 중에 볼만한 것이 강세황(姜世晃, 1713년∼1791년)의 그림이다. 그는 장원 급재하고 예조판서까지 지낸 문인이자 화가였다. 그는 김홍도의 스승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그림은 중국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중국인들이 하는 것처럼 중국의 경치를 그렸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그의 그림을 구경해보자.

강세황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일부
강세황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일부

 

커다란 바위들이 나지막한 산등성이 아래에 몰려 있다. 그런데 바위 오른 쪽으로 길이 나 있고 그곳에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사실은 거대한 돌들과 웅장한 산의 모습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친근하고 정겨운 풍경이다. 우리나라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에게는 기이한 풍경일 것이다.

강세황, 백석담(白石潭)
강세황, 백석담(白石潭)

 

위 그림은 <송도기행첩(松島紀行帖)>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수많은 바위가 인상적이다. 바위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 마치 고인돌 군락지와도 같다.
우리나라에는 전 세계 고인돌의 50%정도가 몰려있는 고인돌 대국이다. 왜 이러한 고인돌이 우리나라에만 많이 몰려 있는지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약 4만기 정도의 고인돌이 우리나라에 있다.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은 전라도 지역이지만 개성의 관산리도 유명한 고인돌 군락지다. <송도기행첩>의 송도는 바로 개성이고, 저 바위들의 모습은 그곳의 고인돌을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영조·정조시대의 화가들은 자기 주변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1775년 5월 18일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를 그림으로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