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기철학


 

율곡과 기철학

 

철학(氣哲學)이란 무엇일까?

이 말은 기(氣)와 철학(哲學)의 합성어이다. 기는 우리 전통에 있는 말이요, 철학(哲學)은 서양의 필로소피(Philosophy)를 일본인이 한문으로 옮긴 말이다. 그러니까 기철학이란 기(氣)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라고 말하면 될까?

사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철학이라는 용어가 없었다고 해서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풍부한 철학의 영역이 존재한다. 다만 기를 철학적으로 다룬 것만 가지고 흔히 기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또 기란 무엇일까? 이 또한 한마디로 말하기 쉽지 않다. 기는 인간사의 모든 영역에 걸쳐있다. 철학만이 아니라 예술·과학·의학·정치·문화·생활·종교 등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숨 쉬고 먹고 살고 생활하는 데에 기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질의 근원이자 현상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활동을 이루고 있는 것도 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한 기철학의 입장에서 말하는 기를 좀 거칠지만 간단히 말하면 ‘영원불멸한 존재로서 만물의 근원임과 동시에 물질운동과 생명활동 및 인간의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실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기철학의 입장으로 되돌아가, 철학사에서 기철학의 기초를 다진 북송 때의 철학자 장재(張載)의 기철학은 간단히 살펴보자.

그는 세계를 태허(太虛)와 만물로 가정한다. 태허는 감각을 초월한 기의 원래적 모습이고 만물은 기로 이루어진 현실의 다양한 모습을 가리킨다. 태허에서 기가 모여 만물이 되고 만물이 소멸하면 태허로 되돌아가는데, 태허에서 만물로 진행할 때 맑고 순수했던 기가 탁하거나 무겁거나 가벼운 잡다한 기로 바뀌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는 태허에서 만물로, 만물에서 태허로 모이고 흩어지는 취산(聚散)만 있지 소멸하지 않는 영원불멸한 존재이다.

이러한 기는 어떤 인격적인 절대자나 외부적인 원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기 자체의 내재적인 원인에 따라서 운동이 진행되며, 그 운동의 특별한 목적은 없다. 양기(陽氣)가 능동적으로 펼쳐 움직여 그 정수는 태양이 되고, 음기(陰氣)는 수동적으로 움츠려 모여 그 정수가 달이 외었으며 그 남은 찌꺼기가 별이 되었다고 한다. 지상에서는 불은 양기, 물은 음기로서 각각 존재한다.

이상이 장재 기철학에 있어서 자연철학의 모습이다. 이 「천도책」에 등장하는 문제와 율곡의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철학의 기본개념을 알아야 하겠기에 먼저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이런 기철학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을까?

 

“천지가 만물에게 각각 그 기(氣)를 두어서 그것을 이루었는가, 아니면 하나의 기(氣)가 유행(流行)하여 흩어져서 만물이 되었는가?”

 

여기서 ‘천지가 만물에게 각각 그 기를 두어서 그것을 이루었는가?’라는 말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이 문제는 자연에 있는 각각의 사물들은 원래부터 제각기 해당하는 기가 있어서 그 사물이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또 ‘아니면 하나의 기(一氣라 부름)가 유행하여 흩어져서 만물이 되었는가?’라는 문제는 앞에서 설명한 기철학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곧 하나의 기가 전통의 기철학의 전제인데, 세계는 하나의 기가 모이고 흩어져 만물이 되거나 소멸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행(流行)’이란 기가 흘러 운행한다는 운동방식을 표현한 말이다. 오늘날의 ‘패션’이라는 말과 다른 말이다. ‘흩어져 만물이 되었는가?’라는 말은 하나의 기가 흩어져서 각각의 만물로 되었는가라는 말이다.

율곡의 답은 이렇다.

 

“아아! 하나의 기가 운화(運化: 운동과 변화)하여 흩어져서 만물이 됩니다. 분리해서 말하면 천지와 만물은 제각기 다른 각자의 기이나, 합쳐서 말하면 천지와 만물이 모두 같은 하나의 기입니다. 오행(五行)의 바른 기운이 모인 것은 해와 달과 별이요, 천지의 어그러진 기운을 받는 것은 짙은 안개, 흙비, 우박이 됩니다. 천둥과 번개와 벼락은 두 기가 서로 부닥치는 데서 생기고, 바람·구름·비·이슬은 두 기가 서로 합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니, 그 구분은 비록 다르나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만물은 하나의 기로부터 생성하였음을 말함으로써 기철학의 전제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음양에서 오행으로 더 분화시켜 해와 달과 별이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오행 가운데 화(火)와 목(木)은 양(陽)에, 수(水)와 금(金)은 음에 속하기 때문에, 태양은 화(火)로서 양에 달은 수(水)로서 음에 속하므로 앞의 장재의 설과 달라진 것은 없다. 특히 앞에 등장했던 오성(五星: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도 오행(五行)에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율곡이 앞에서 말한 기철학의 전제를 모두 받아들였을까? 이 답안지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다. 이 질문의 답은 그가 성리학자였다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잘 알다시피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정자(程子)와 그것을 완성한 주자(朱子)는 기가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관점에 찬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불교의 윤회설(輪回說)처럼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낡고 오래된 기는 소멸하고 새로운 기가 생겨난다는 설로 바꾸었다. 물론 기가 그렇게 생겨나고 현상적으로 운동이나 변화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는 원인자는 이(理)라고 보았다.

율곡 또한 이 견해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그가 기를 보는 관점은 성리학적 틀이었다. 기철학자들이 보는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기철학자들이 상대적으로 자연철학에 대한 관심이 일차적이라면, 성리학자들은 자연탐구보다 심성철학(心性哲學)에 관심이 더 많았다. 율곡의 기발이승(氣發理乘), 이기지묘(理氣之妙), 이통기국(理通氣局), 교기질(矯氣質) 등의 논리는 다 그런 배경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