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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경의 유차(遺箚)


 

이준경의 유차(遺箚)

 

<연려실기술>에는 “이준경의 유차(遺箚)” 항을 별도로 만들어 기술하고 있다.

차란 유서 형식의 차자라는 말이니 이준경이 선조에게 유언처럼 올린 차자라는 말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이준경의 유차를 그의 문집인 <동고집>에 실린 내용을 전재하였다.

임신년 7월 7일에 영중추부사 이준경이 마지막 차자를 올리고 정침에서 죽었는데, 준경이 병이 위독하자 의원을 물리치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천명이 이미 다 하였거늘 어찌 이것을 먹어 생명을 연장시키랴, 단지 임금에게 한 말씀 올려야겠다.”

하고 차자를 초하였으니, 그 차자의 대략에,

“첫째는 제왕의 힘쓸 것은 오직 학문하는 것이 제일 큰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함양 공부는 모름지기 경(敬)을 하여야 하고 진학은 앎을 지극히 하는데 달렸다.’ 하였습니다. ……

둘째는 신하를 대하실 때에 위의가 있으셔야 합니다. ‘천자가 거룩하니 제후가 공경한다.’고 신은 들었으니 위의는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

셋째는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군자라면 소인들이 비록 공격하더라도 발탁하여 써서 의심하지 마시고, 진실로 소인이라면 비록 사정이 있더라도 반드시 배척하여 쫓으실 것입니다. ……

넷째는 사사로운 붕당(朋黨)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혹 지나친 행동이 없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기네와 한마디의 말이라도 합하지 아니하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행실을 닦지 아니하고 글 읽기에 힘쓰지 아니하며, 거리낌 없이 큰소리치며 당파를 지으면서 그것이 높은 것이라고 하며 헛된 기풍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군자이면 함께 서서 의심하지 마시고 소인이거든 버려두어 저희끼리 흘러가게 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이제야 말로 전하께서 공평하게 듣고 공평하게 보아 주시어 힘써 이 폐단을 제거하실 때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근심이 될 것입니다.

이 유차는 조선시대 명재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준경의 심혈이 녹아들어간 글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목이 네 번째의 사사로운 봉당을 깨트려야 한다는 말이다. 왜 문제가 되었던가? 조선 후기 문신인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조선 당쟁사를 기록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의 기록을 참조하면 대강 이렇다.

선조 5년(1572년) 이준경이 죽음을 앞두고

“지금 사람들이 고상한 이야기, 훌륭한 말들로 붕당(朋黨)을 결성하는데 이것이 결국에는 이 나라에서 뿌리 뽑기 어려운 커다란 화근이 될 것입니다”

라는 유차를 올렸다. 이준경이 붕당을 만들 인물로 율곡을 지목했다고 알려지면서 율곡은 이에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장차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고 했는데 이준경은 그 말이 사납습니다.”

하고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이이를 지지하는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일제히 상소를 올려 이준경의 관작 삭탈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 서애 류성룡이 “대신이 죽음에 임해서 임금에게 올린 말이 부당한 것이 있으면 물리치는 것은 옳지만, 죄를 주기까지 한다면 너무 심한 것 아닌가”라고 반대해 삭탈관작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동고연보>의 내용은 율곡의 비판을 더욱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뒤에 이이가 또 따로 소를 올려 추한 욕을 하였으니 심지어는, ‘이준경이 머리를 감추고 형상을 숨기고 귀역(鬼蜮)처럼 지껄였다.’ 하였고, 또, ‘이준경의 말은 시기와 질투의 앞잡이요, 음해하는 표본입니다.’ 하였고, 또 ‘옛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선했지만 오늘날은 죽을 때에도 그 말이 악합니다.’”라고 했다고 기록하였다.

<율곡연보>에서는 이 일을 두고 “이준경이 임종할 때의 차자는 신‧구 두 파를 가리킨 것이었다. 이이는 그것이 임금의 마음에 의혹을 일으켜 간사한 자가 그 틈을 타서 사림에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차자를 올려 통렬하게 논박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신‧구 양파 간의 알력을 이준경과 기대승을 들어 밝히고, 백인걸이 신‧구 양파 간의 알력을 조정하려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백인걸의 이 입장은 동서분당 이후 조제보합론을 주장하면서 신‧구 양파 간 조정을 위해 노력했던 율곡이 입장과 묘하게 겹친다.

처음에 이준경이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일시에 명망이 있었으나, 다만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고 성질이 높고 거만하면서, 선비를 높여 주고,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어 재해가 절박하고 인심이 흉흉한 때를 당해서도 별로 건의함이 없으므로 선비들의 비난을 받게 되니, 준경도 스스로 불안하여 신진사류들과 화합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대승(奇大升)은 재주와 기개가 넉넉하여 일을 논할 때에 과감하고 날카로워 이준경과 점점 틈이 생겨 기대승이 분이 나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사류들이 대부분 아깝게 여겼다. 백인걸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조정에서 신ㆍ구(新舊)가 불화한 것은, 대신은 안정에만 힘쓰는 데에 그 폐단이 있고, 사림은 무엇을 하려고만 힘쓰므로 과격한 데에 그 폐단이 있으니, 마땅히 조정하여 중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내가 전하를 뵙고 다 아뢰겠다.”

하니, 듣던 자가 백인걸은 말이 번다하여 본의를 잃어 도리어 임금으로 하여금 조정에 붕당이 있는가 하는 의심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힘껏 말렸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근거하면 백인걸 본인은 본래부터 이준경의 인격에 심복하여 사류들이 이준경에게 동조하지 않는 것을 불만으로 여겼고, 기대승과 심의겸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기는 하지만 대신과 사림을 조정하여 중도를 잡겠다는 백인걸의 말은 율곡의 조제보합론의 취지와 일치한다.

당시 율곡이 이준경의 유차에 대하여 반박 상소를 올린 것은 자신은 붕당을 결성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준경이 죽은 지 3년 후인 1575년(선조 8)에 과연 동서분당이 일어났다. 이 점에서 보자면 율곡의 이준경 반박 상소는 적절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붕당이 생기자 율곡이 조제보합론을 제창하며 특정 당파에 편중하기 보다는 당론 조정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는 점을 상기하면 율곡이 이준경의 유차를 비판한 본의를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준경과 기대승 간의 갈등을 묘사한 율곡의 글처럼, 이준경과 율곡 간의 갈등도 안정을 추구하는 대신과 혁신을 도모하는 사림 사이의 갈등이 그 내면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견해 차이는 선배·후배 사림의 시국관과 출처관의 차이가 그 이면에 깔려있다.

이준경은 율곡이 지나치게 따지고 남을 신랄하게 비평하는 것을 싫어했다면, 율곡은 당시의 정국이 무너지기 직전의 초가집 같으니 빨리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율곡은 왕이 개혁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나와서 돕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 후진이나 양성하겠다는 태도라면, 이준경은 정치적 상황이 어떻건 간에 왕을 도와 경세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선배 사림으로서 이준경은 김개, 홍담 등과 같은 훈구파의 입장을 존중하였다면 후배 사림으로서 율곡은 개혁적 사림 정치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2


 

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2

 

<연려실기술> “첫 정사의 출척(黜陟)” 항에는 김개 외에도 훈구파의 거두인 홍담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겨두었다.

담(洪曇, 1509–1576)의 이력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조하면 정리하면,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저작(著作)·설서(說書)·정언을 역임했다.

명종 1년인 1546년(명종 1) 예조와 이조의 정랑, 1547년 장령·장악원첨정·응교를 역임하였다. 1548년 사간, 사복시와 사재감의 정(正), 집의가 되고 이듬해 예빈시부정·전한(典翰)을 거쳐, 1550년 직제학·동부승지, 1553년 호남관찰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우윤, 형조참판을 지냈다.

1555년 한성부좌윤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부제학·도승지·대사간·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560년 영남관찰사·홍주목사, 형조와 공조의 참판, 1565년 함경도관찰사·지중추부사 겸도총관을 역임했다. 선조 1년인 1568년(선조 1) 병조판서, 동지경연성균관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조와 예조의 판서, 1574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좌참찬·영중추부사를 거쳐, 1576년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한 뒤 지중추부사·우참찬에 이르렀다.

홍담은 명종 재위 기간(1545-1567)을 거쳐 선조 초년까지 지속적으로 국정에 참여하면서 중책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응교로 있을 때 진복창(陳復昌)이 윤원형(尹元衡)의 권세에 빌붙어 사사로이 중상모략을 하자 이를 막았고,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던 인물이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

홍담은 조정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대범한 것으로 이름나 있었다.”

“홍담은 깨끗하고 검소한 지조가 있고, 또 가정에서는 행검이 있었다. 계모 섬기기를 효성스럽게 하고 상중에 예를 극진히 지켰다.”

라고 말하면서도 홍담에 대한 율곡의 평가는 높지 않다. <석담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윤달에 이조 판서 홍담이 파면되었다. 홍담은 조정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대범한 것으로 이름나 있었으나, 다만 학문하는 선비를 미워하여 사람에게 말하기를,

“참 유학자가 어찌 지금 세상에 나겠는가. 지금 학문한다고 자칭하는 자는 다 허위이다. 만일 참 유학자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공경하고 사모할 것이지 어찌 감히 트집 잡겠는가.”

하였었다. 이조 판서가 되자 더욱 좌상 정철(鄭澈)과 틈이 생겼고, 사류를 꺼려서 어떻게 쫓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구신(舊臣) 우상 홍섬(洪暹) 담(曇)의 종형, 판서 송순(宋純)ㆍ김개(金鎧)가 모두 홍담과 합심하여, 먼저 송순을 대사헌으로 만들어 사류들을 공격하려 하다가, 마침 허물이 있어 갈렸으므로 김개를 썼는데, 김개가 쫓겨나자 홍담은 스스로 불안하여 병을 사칭하고 사면하였다.

홍담은 깨끗하고 검소한 지조가 있고, 또 가정에서는 행검이 있었다. 계모 섬기기를 효성스럽게 하고 상중에 예를 극진히 지켰다. 다만 도학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의논하는 것이 비열하고 속된 까닭으로, 선비의 여론이 허여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크게 쓰이지 못하였으므로 울분과 불평으로 지내었다. 박순(朴淳)이 이이(李珥)에게 말하기를,

“홍태허(洪泰虛)가 분한 마음을 품은 지 오래니, 이조 판서를 시켜서 위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자가 국량이 얕아서 만일 좋은 벼슬을 얻으면 반드시 기뻐하여 감정을 풀 것입니다.”

하니, 이이가,

“며칠 동안은 반드시 기뻐할 것이지만 며칠 지나면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다가 사류들이 듣지 아니하고 서로 버틴다면 오히려 노할 것이니, 어찌 며칠 동안의 기뻐함으로 그 평생의 노여움을 풀 수 있겠습니까. 또 자고로 사람의 노여워함을 두려워해서 큰 권력을 주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홍담이 죽었다.

율곡은 홍담이 청령하고 대범하고 깨끗하고 검소한 지조를 지녔고 계모에게 효를 다하고 가정을 법도에 맞게 다스렸다고 평가한다. 율곡의 기록에 근거하면 홍담은 수신과 제가 방면에서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인물이다. 사림파와 대비되는 훈구파라고 한다면, 현실 정치에서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권력 지향적이고, 부도덕하고 행검이 엄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이해된다.

성리학(도학)의 목표가 성인지학이라고 할 때 홍담이 보여준 행실은 상당히 훌륭한 도학군자의 풍모로 읽힐 수 있는데, 율곡이 홍담을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율곡은 홍담이 학문하는 선비, 곧 도학을 공부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의논하는 것이 비열하고 속된 바가 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비판적 평가는 비단 홍담만이 아니라 김개에 대한 기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훈구파의 거두인 홍담이나 김개는 왜 학문하는 선비, 도학하는 선비를 싫어한 것일까? 이는 당시 새롭게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파들에 대한 정치적 입장 차이와 반감이 작동했을 것이다. 홍담이

“참 유학자가 어찌 지금 세상에 나겠는가. 지금 학문한다고 자칭하는 자는 다 허위이다. 만일 참 유학자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공경하고 사모할 것이지 어찌 감히 트집 잡겠는가.”

라는 대목에서 홍담의 진의를 읽을 수 있다.

이는 이준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된 세 명의 대신이 이황, 이이 그리고 이준경이다. 더욱이 이준경은 명종의 고명지신으로 명종의 유명을 받들어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통치 기반을 닦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명신이다.

선조 초년의 원로대신이었던 이준경과 이이가 서로 알력관계였다고 하는 사실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선조 즉위 후에 을사년의 원통함을 풀고 을사년의 위훈(僞勳)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신중론을 편 이준경에 대해 이이가 직접적으로 반대함으로 하여, 이준경이 백인걸에게

“자네의 이이가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하는가.”

라고 비판하면서 양현 간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준경이 퇴계를 두고 평한 내용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는데, 이는 김개와 홍담이 도학자를 비판하는 대목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준경은 진실로 어진 정승이어서 그 공적이 국가에 있으므로 이이도 전부터 일컬어 왔었다. 그러나 그 높고 교만한 성질은 도학(道學)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심지어 이황(李滉)을 가리켜 산금야수(山禽野獸)라고까지 하였으니, 퇴계의 나오기 어려워하고 물러나기 잘하는 것이 산새나 들짐승처럼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준경의 퇴계 비판을 곱씹어 보자면, 여기에는 국정을 이끌어온 노 정치가의 경륜에 비추어 봤을 때 명분과 의리에만 매달리는 것은 경솔하거나 무책임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것의 연속선상에서 도학하는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1


 

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1

 

조 때부터 동인과 서인 붕당이 결성되면서 이른바 붕당정치를 하게 되는데, 서인이든 동인이든 이른바 사림파라는 점에서는 모두 한 집안이고 그 반대편에 훈구파가 자리한다. 따라서 선조 때에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는 말은 선조 때부터 사림파가 조선 역사의 전면에 들어서면서 훈구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말과 동일하다.

고려 말의 적폐를 일소하기 위해 나섰던 신진사대부들의 이념적 무기는 성리학이었다. 이들은 조선 왕조의 건립을 기점으로 고려의 유신으로 의리와 절개를 지킨 사류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동참한 사류들로 나뉘는데, 전자를 통칭하여 사림파라고 하고 후자를 관학파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관학파를 훈구파라고도 하는데, 이는 세조 때 이후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료집단을 통칭한 말이다.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권좌에 올랐으니, 곧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바로 이 정난에 공을 세운 공신들이 정난공신으로 이후 훈구파의 뿌리가 된다. 왕좌에 오른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왕조를 반석에 세우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군왕으로서 세조의 치적은 무시할 수 없는 바가 있지만 문제는 유교를 이념으로 한 조선왕조에서 삼촌이 조카를 살해하고 왕좌에 올랐다는 점이다. 이러한 패역을 방조 협력한 사류들은 당연히 성리학의 도덕적 잣대로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사림파와 비교하면, 정난공신에서 훈구파의 뿌리가 시작되었으니 훈구파가 현실 정치에서 능력을 발휘할지는 모르지만 도덕적인 흠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연려실기술> “첫 정사의 출척(黜陟)” 항에

“6월에 대사헌 김개(金鎧)의 관직을 삭탈하고 문 밖으로 내쫓았다.”

는 기록으로 시작하는 율곡의 <석담일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김개(金鎧, 1504-1569)는 선조 초년의 훈구파의 거두로, 1501년에 태어난 퇴계보다는 3년 뒤에 태어나 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1525년(중종 20)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된 뒤 1544년 정언(正言), 1546년(명종 1) 수찬(修撰), 1548년 검상(檢詳)·장령(掌令), 이듬해 집의(執義)·응교(應敎), 1550년 선공감정(繕工監正)을 차례로 역임하여 이듬해 구황 겸 선위사(救荒兼宣慰使)로 청홍도(淸洪道)에 파견되었다. 1552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554년 형조참의가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7년 청홍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어서 대사헌과 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563년 형조판서, 15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었다.

김개는 관직에 있으면서 매우 청렴하여 1552년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하기에 율곡도 김개는

“구신으로서 조금 청렴하고 대범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김개에 대한 율곡이 평가는 높지 않다. <석담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6월에 대사헌 김개(金鎧)의 관직을 삭탈하고 문 밖으로 내쫓았다. 김개는 구신으로서 조금 청렴하고 대범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위인이 강퍅하고 자신만만하였으며 도학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시속과 다른 사람을 보면 반드시 대단히 미워하였다. 이황(李滉)이 물러간 뒤에 김개가 마음으로 불평하여 사람에게 말하기를,

“경호(景浩 이황의 자)의 이번 길은 소득이 적지 아니하군. 잠시 서울에 왔다가 손에 일품첩지[一品告身]를 쥐고 돌아가 고향에서 큰 영광이 될 것이니, 어찌 만족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이전에 훈구파의 또 다른 거두인 홍담(洪曇)이 이조판서가 되어 김개를 추천하여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을 맡았다. 율곡이 보기에 김개는 청렴하고 대범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여 상대방을 용납하는 기상이 부족한데 그 용납하지 않는 것 중에

“도학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시속과 다른 사람을 보면 반드시 대단히 미워하였다”

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본다면, 김개가 도학적 학풍을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를 평가 절하한 데에도 이와 같은 인식이 작동했을 것이다.

김개가

“요새 선비의 무리들이 함부로 무엇을 해 보겠다고 하니, 꺾어 억제하지 않을 수 없다.”

고도 한 말은 당시 새롭게 등장하는 사림파 정치 세력을 겨냥한 것이다. 율곡은 이 말을 기록한 후에 김개가 “기대승, 심의겸, 이후백” 등을 두고 한 말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개의 이와 같은 비판을 통해 당시 사림파는 훈구파에 맞서 어떤 개혁의 의지를 담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훈구파의 거두로서 김개가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파 정치 세력을 비판하면서, 어느 날 경연에서 선조에게

“선비 된 자는 마땅히 제 몸이나 닦고 입으로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지금 소위 선비라는 것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망령되게 시비나 말하고, 대신이나 헐뜯으니, 이런 기풍은 양성시켜서는 안 됩니다. 기묘년에도 조정에 경박한 무리가 많아서 저들과 같은 자는 끌어들이고, 저들과 다른 자는 배척하였으므로 조광조가 죄를 얻었으니, 모두 그 경박한 자들이 화를 양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러한 버릇을 억제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다. 이 기록 끝에 “사림들이 의심하게 되었다”라는 율곡의 첨언은 김개가 선조에게 아뢴 말이 조광조를 비방한 내용으로 의심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이에 대해 지평 정철(鄭澈)은

“김개가 전하를 현혹시켜 사림에 화를 끼치려 하니, 전하께서는 살피시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김개의 과실을 들추어 그 병통을 통절히 지적하니 김개가 얼굴이 흙빛이 되어 절하고 먼저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이후 삼사(三司)가 다투어 탄핵하는 소를 올려서 관작을 삭탈하고 내쫓기를 청하여, 결국 김개가 탄핵을 당하고 서울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시흥에서 낙향해 있으면서 대간이 탄핵한 글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이 아뢴 말을 보니 나를 소인이라고 하였구나.”

하고, 근심과 울분으로 병이 나서 두어 달 만에 죽었다고 <석담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근심이란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외지로 쫓겨난 것에서 연유한 것이라면 울분이란 자신을 소인이라고 한 데에 대한 울분일 것이다. 당시 새롭게 선조 조정에서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사림파 정치 세력을 봤을 때 그들이야말로 소인인데 어찌하여 자신이 소인이라는 평을 받았는가에 대해 울분이다. 이는 김개가 경연에서 선조에게 아뢸 적에 “지금 소위 선비라는 것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망령되게 시비나 말하고, 대신이나 헐뜯으니, 이런 기풍은 양성시켜서는 안 됩니다.”라는 그 말에 도학을 논하는 선비들을 소인으로 취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유교정치사에서 사색당파의 시초가 되는 동서 분당이 선조 연간에 만들어지고, 이후 조선 유교정치를 사림파가 좌지우지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선조 초년 사림파 정치세력과 훈구파 세력 간의 알력 또는 사림파 정치세력의 개혁적 요소 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김개가 당시 세력을 확장해 가던 사림파 정치세력을 평가하는 입장과 율곡이 김개를 평가하는 대목들을 교차적으로 검토한다면 선조 초년의 정치 현장을 한층 입체적으로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명종 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처음으로 강의하기 시작한 사연


 

명종 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처음으로 강의하기 시작한 사연

 

조가 명종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해가 1568년이다. 선조는 조선왕조에서 방계로 왕위를 계승한 최초의 군왕이다. 선조가 명종을 이어 후사로 책정되어 가는 과정은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참조하면 을축년(1565) 무렵으로 보인다.

을축년(1565) 9월에 명종이 편찮으시었다. 그 당시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이미 죽었으나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아, 인심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므로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등이 미리 국본을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니, <동각잡기>에 이르기를,

“이준경이 약방 제조 심통원(沈通源)과 의논하여 약방에서 중전께 아뢰어 미리 계사(繼嗣)를 정하여 인심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였다.”

하였다.

명종의 환후가 위독하자, 중전이 봉함편지 한 통을 대신 처소에 내리시고 대신에게만 보게 하셨는데, 그중에 하성군(河城君)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석담일기>에, ‘하성군’은 선조의 봉군한 군호(君號)라 하였다.

을축년(1565)에 명종의 환후가 위독하게 되자, 후사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졸하게 되면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이준경 심통원 등이 중전에게 계사를 정할 것을 간청했으며, 인순왕후가 명종의 뜻을 헤아려 훗날 선조가 되는 하성군을 계사로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종이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후사를 논의하는 것은 조정의 대신이나 남은 왕족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문제는 군왕의 역린을 건드리는 문제다.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후사(세자)를 책봉하는 문제로 추방되거나 비명에 간 신하들이 무수하다. 가까운 예로 선조 연간에 정철이 기축옥사의 위관을 담당하게 된 데에는 선조의 적극적인 후원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기축옥사 후에 선조가 태도를 일변하여 정철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이게 되는 계기가 바로 후사를 세우는 건저문제였다.

<연려실기술>에서는 명종의 환후가 조금 나아진 후에 명종의 계사를 신하들이 논의했음을 실토하고 혜량을 간구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진덕수(陳德秀)의 <대학연의>가 등장한다.

그때는 온 나라가 모두 경황이 없었는데, 당시의 판서 민기(閔箕)가 수상 이준경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왕의 환후가 오래가는데 대감은 나라를 맡고 있으면서 어찌 사직(社稷)을 근심하는 마음이 없으십니까.”

하니, 이준경이 크게 깨닫고, 계사를 정할 것을 들어가서 청하였으나, 임금의 말은 벌써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순회세자가 돌아간 후에 왕이 덕흥군의 셋째 아들을 보시고 탄식하시며, ‘참 임금 될 사람이 이미 났으니, 내 자식은 의당 죽을 것이다.’고 말씀하였다.”

하니 이준경이,

“천의(天意)가 거기에 계십니다.”

하고, 마침내 장수에게 명하여 선조의 집을 호의하게 하였으나 명종은 모르셨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어 경연을 열자 민기가 자청하여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하였고, 이준경은 임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성상께서 편찮으실 때, 온 나라가 모두 국본으로 두려워하며 근심하므로, 신은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종사를 위하여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의 안색이 좋지 않아지시며,

“내 병이 어찌 죽게까지 되었다고 대신이 미리 그린 짓을 하였단 말이오.”

하니, 민기가 소매 속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꺼내 들고 ‘국본 정한다’는 장(章)을 보이며,

“대신이 나라 일을 위하여 어찌 몸을 돌보겠나이까.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어지럽고 망하는 것은 항상 계사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였다. 명종이 그 글을 자세히 보더니 비로소 낯빛이 화평해지며,

“수상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하려 하였으니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할 만하오.”

하고, 이내 명하여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강의하게 하고, 민기에게 표범 가죽 웃옷을 하사하였으니, <대학연의>를 강의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선조가 등극한 뒤에 민기가 제일 먼저 정승이 되었다.

민기가 명종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건저 문제를 슬기롭게 대처한 내용이 생생하게 잘 드러난 기록이다. 특히 민기가 소매에서 <대학연의>를 꺼내들고 ‘국본 정한다는’는 장의 내용을 설파한 방법이 주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명종이 <대학연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조선왕조의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원래 유학은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는 학문일 뿐만 아니라 타인과 사회 전체의 공동체 이상을 실현하는 학문이다. 유학에서는 이러한 학문적 이념을 ‘內聖外王’, ‘修己治人’, ‘成己成物’로 표현한다. 주자학도 예외가 아니다. 주자의 이러한 학문적 특징은 여조겸과 함께 편찬한 ⌈근사록⌋의 목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근사록⌋통행 본 목차는 후대에 수정되기는 했지만, 원래 목차는 수기와 치인을 내용을 구성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유학에서 수기와 치인의 상관성을 체계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는 경전이 무엇인가 바로 <대학>이다. <예기>의 한 편이었던 <대학>이 송대에 이르러 유학자들로부터 본격적인 주목을 받는다. 왕안석은 ⌈광대학(廣大學⌋을 편찬하였고, 이정(二程)도 대학을 중시했다. 이정이 대학을 강조한 이유는 당연히 <대학>이 유학의 체계적인 수행방법뿐만 아니라 도덕과 경세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에서 도덕과 경세의 문제는 내성외왕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주자는 선현들의 업적을 이어 받아 명실상부한 제왕학의 교재로서 <대학장구>를 완성하였다.

주자학은 남송시대에 한때 위학으로 간주되어져 정치권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주자학이관학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배경에는 진덕수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그가 남송 이종(理宗)에게 <대학>을 강연하면서 지은 책이 바로 <대학연의(大學衍義)>다. <대학연의>라는 말은 <대학>의 뜻을 넓혀 나간다는 의미이다.

진덕수는 매 조목마다 고대경전 및 사적에서 그 근거를 확보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명말 유학자인 정신(丁辛)이

“니산(尼山)은 <대학>으로 육경을 연(衍)하였다면, 선생은 오히려 육경으로 <대학>을 연(衍)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는 경연에서 <대학연의>와 더불어 명나라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하였다. 훗날 정조가 진덕수의 <대학연의>와 구준의 <대학연의보>에서 가장 절실한 글을 선별하여 <대학유의(大學類義)>를 만들게 된다. 정조는 이 책의 제(題)에서

“임금이 이 글을 읽으면 태평의 교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요, 신하가 이 글을 읽으면 참찬(參贊)의 공(功)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이름을 <대학유의>라 명명하였다.”

라고 하면서 위정자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강조하였다.

선조의 재덕 2


 

선조의 재덕 2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선조의 덕행” 항을 마무리 하면서 선조에 대한 종합적인 평을 다음과 같이 내린다.

금은 문(文)으로는 족히 지극한 정치를 이룩할 수 있고, 무(武)로는 족히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있고, 밝기는 충(忠)과 사(邪)를 변별할 만하고, 지혜로워서 사무를 처리할 만하니, 참으로 이른바 세상에 드문 성인이요, 크게 일할 수 있는 임금이었다. 그 중간에 비색한 운을 만나 잠깐 파천하는 고생을 겪었던 것은 태평 끝에 난이 오는 운수의 관계이다. 마침내는 난리를 평정하고 몸소 나라를 중흥시켜 나라의 운수를 무궁하도록 연장시켰으니, 천하의 신무(神武)가 아니면 누가 능히 여기에 참여할 수 있으랴. 모두 위와 같다.

이긍익의 이 말들은 선조의 시호인

“선조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중에서 선조의 ‘현성의무성예(顯文毅武聖睿)’한 재덕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중간에 비색한 운을 만나 잠깐 파천하는 고생을 겪었던 것은 태평 끝에 난이 오는 운수의 관계”

라고 하는데, 비색한 운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임에 틀림없다. 이긍익은 ‘비색한 운’의 소치라고 하고,

“마침내는 난리를 평정하고 몸소 나라를 중흥시켜 나라의 운수를 무궁하도록 연장시켰다”

고 평가를 내리는데, 이는 선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는 사뭇 다르다.
오늘날 선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임진왜란(1592-1598)이고, 그 뒤에 따라오는 평가는 무능함이라는 세 글자이다. 더욱이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결행했을 때 선조는 백성을 버린 왕이라는 가시면류관을 쓰게 된다.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 현종은 위기를 잘 넘긴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엄정한 역사의 잣대로 평가했을 때 결코 성공한 왕은 아니다.

그렇지만 선조 때는 훈구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라는 신진세력이 등장하면서, 학문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시기로 조선 유학사의 중대한 고리이기도 하거니와 수많은 영걸들이 활약한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중국의 왕조로 따지면 송나라가 문약하여 이방 민족의 칼날을 하루라도 힘겨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성리학과 문치의 훌륭한 전통을 남겨둔 것에 비견할 만하다.

사림 정치의 문이 활짝 열린 데에는 운수의 관계이기도 하겠지만 선조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마치 임진왜란이 이긍익의 말처럼 운수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선조의 과(過)를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학문에 열성인 선조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무진(戊辰) 원년(元年)이라 임금이 자주 경연에 나와 변론하고 묻는 것이 매우 자세하니, 학문이 넓지 못한 강관은 입시하기를 매우 꺼렸다.”

무진년이면 1568년으로 선조의 나이 16세였을 때이다.

 

<연려실기술>은 선조의 유학 현창을 자세하게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고려(高麗)에서 정몽주(鄭夢周)가 처음으로 끊어졌던 유학을 일으켰고, 본조(本祖)에 이르러서는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 등이 계속해 나와서 경전의 뜻을 드러내 밝히고 의리를 강구해 밝혔으니, 임금이 그들은 도학에 큰 공이 있다 하여,특명으로 제사를 내리시고, 묘 지키는 사람을 두게 하고, 증직과 시호를 주며 그 자손을 추슬러 쓰게 하시고, 유학자인 신하 유희춘(柳希春) 등에게 명하여 그들의 말과 행실을 편집하여 이름을 <유선록(儒先錄)>이라 하고, 인하여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소학(小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 서적을 인쇄하여 발행하기를 명하고, 예조에 신칙하여 <소학>을 배우기를 권장하게 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학문에 대한 정성과 조예가 지극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림정치가 선조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선조 때에 유신들이 대거 조정에서 활약을 하는 데에는 선조의 인재관이 일정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긍익은 선조의 인재 등용에 관한 일화를 한 토막을 <연려실기술>에 적어 두었다.

임금은 인재를 애용하여 모두 제각기 그 직무에 합당하게 썼으며, 더욱 유학하는 선비를 중하게 여기어 혹 헐뜯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곡진하게 보호하였다. 언젠가는 대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인재가 적은데 그 취해 쓰는 방법도 오로지 과거에 있을 뿐이니, 그중에는 과거 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여, 산림에서 그대로 늙는 자가 없지도 아니할 것이다. 사람을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경들의 직무이니 마땅히 기특한 재주와 특이한 행실이 있는 자를 힘써 구하여 나로 하여금 그들을 쓰게 하라. 예전에 안영(晏嬰)은 그 종을 천거하였고, 사안(謝安)은 그 조카를 추천하였으니, 진실로 쓸 사람이라면 친척이라고 겸연쩍게 여기지 말고 미천하다고 버리지 말라.”

하였다.

선조의 조정에 과연 기특한 재주와 특이한 행실이 있는 자라면 천거하라는 그 명에 따라 등용된 인재가 얼마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조 때에 명현들이 즐비한 것은 역사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현량한 인재를 찾아 어진 신하에게 정사를 맡기라는 것이 유학의 기본적인 정치론이기는 하지만, 이를 군주가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 그러하기에 이긍익은 선조의 이 말을 특별히 기록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다양한 인재를 발탁하겠다는 선조의 의지는 성리학만을 독존하지 않고 이교(불교)를 용납하는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계유년에 성균관의 유생이 상소하여, 정업원(淨業院, 성중에 있는 승방)을 철폐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손수 써서 대답하기를,

“수선(首善 성균관을 말하는데 착한 것을 주창(主倡)하는 곳이라는 것임)의 처지에 있으며, 강론하는 것은 도의요, 기대하는 것은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이니 마땅히 마음을 단련하고 성질을 참아서 갈고 닦아, 경(敬)과 의(義)를 행하여 안과 밖의 수양을 쌓아서 훗날에 참 선비가 되어, 위로는 임금인 나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혜택을 끼쳐서, 정치가 잘 되고 풍속이 아름답게 되면 유학이 쇠하고, 이단(異端 불교(佛敎))이 성행하는 것은 염려조차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굳이 위(魏)의 태무제(太武帝)와 같이 중을 죽이고 절을 헐어야 할 것이 있으랴.”

하였다.

현대 양명학 연구가들이 양명학의 시작을 남언경(南彦經)과 그에게서 양명학을 배웠다는 이요(李瑤)라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왕족인 이요와 선조가 양명학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긍정적 평가를 내린 대화가 기록으로 전해온다. 이 또한 선조의 학문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선조의 재덕 1


 

선조의 재덕   1

 

<연려실기술> “선조” 항에 선조의 존호와 재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조 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은, 휘가 연(昖)인데, 처음 휘는 균(鈞)이었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이다. 비(妣)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는, 판중추부사 세호(世虎)의 딸이다. 가정 31년(1552) 임자 명종 7년 11월 11일 기축에 인달방(仁達坊) 사제(私第) 덕흥대원군의 집에서 나서 처음에는 하성군(河城君)을 봉하였었고, 융경(隆慶) 정묘년에 명종의 유명으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라, 만력(萬曆) 경인년에 존호를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 올렸고, 갑진년에 지성대의격천희운(至誠大義格天熙運)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만력 36년 무신 2월 1일 무오에 황화방(皇華坊) 별궁 경운궁(慶運宮) 에서 승하하였으니, 왕위에 있은 지 41년이요, 향년 57세였다. 명나라에서 소경(昭敬)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는 존호를 사용한 만력 경인년(1590)은 선조 23년이고, 지성대의격천희운(至誠大義格天熙運)이라는 존호를 가첨한 만년 갑진년(1604)은 선조 32년이다. 선조 사후 시호를 선종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라고 했는데, 광해군 때 묘호를 선조로 바꾸어 존호를 더 올렸다. 대한제국 때에 명나라에서 내린 소경(昭敬) 시호를 폐지하여, 정식 시호는 선조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祖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다. <연려실기술>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부친 이광사(李匡師)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타계(他界)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하니, 대한제국 이전이라 소경(昭敬)을 시호에 넣었다.

선조는 왕위에 있은 지 41년이고 향년 57세로 승하했으니, 왕위에 오른 당시의 나이가 16세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아름다운 바탕에 용모가 맑고 준수했다고 여러 기록들이 전하고 있듯이 남다른 자질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일화 중에 명종이 왕손들에게 글자를 써서 올리라고 명령하였는데, 혹은 짧은 시(詩)를 쓰기도 하고, 혹은 연구(聯句)를 쓰기도 했는데, 선조가 홀로 ‘충성과 효도가 본시 둘이 아니다.’고 여섯 자를 썼으므로 명종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는 율곡의 기록이 전한다.

선조의 비범한 자질을 율곡은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는데, 명종의 뒤를 이어 갑작스레 왕좌를 계승한 16세의 하성군이 조선왕조 최초로 방계로 왕위에 오르는 장면도 그 중 하나다. 명종이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승하함으로 하여 조선은 혼란에 빠질 수 있었다. 이는 명나라 사신 한림검토(翰林檢討) 허국(許國)과 병부급사(兵部給事) 위시량(魏時亮)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조서를 반포하려고 조선으로 오다가 안주(安州)에 이르러 명종의 부고를 듣고, 국중에 변고 있을까 의심하였다는 기록에도 알 수 있다. 이 두 사신이 막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조서를 전하는 장면을 <석담일기>에서 율곡은 이렇게 적고 있다.

임금이 권지국사로서, 곤룡포와 면류관 칠장복을 입고, 명나라 황제의 조서를 교외에서 맞을 때에 두 사신이 주목하기를 잠시도 그치지 아니하다가 접대함이 법도에 어긋나지 아니하니, 탄식하면서, “저런 어린 나이로 행동이 예절에 합하니, 이런 어진 임금을 얻은 것은 조선의 복이다.” 하였다. 그때에 왕의 춘추는 16세였다. 그 이튿날 두 사신이 소복으로 조상하였다.

황망한 중에 대국의 사신을 접대하여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의식의 절차가 적법하였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조의 몸가짐과 행동이 위엄과 권위가 있었음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는 타고난 재덕 위에 평소 공부의 소양이 덧입혀져야 가능하다. 전일에 명종이 선조를 사랑하여 별도로 선생을 뽑아 한윤명(韓胤明), 정지연(鄭芝衍)으로 가르치게 했다고 율곡은 <석담일기>에 적어 두었다. 그렇다면 선조의 늠름한 기상은 명종의 정훈(庭訓)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인들은 시를 통해서 인물이 타고난 재질을 가늠하곤 했는데, <연려실기술> “선조의 아름다운 덕행” 항에 선조의 시를 연달아 적어두었다.

 

외로움을 품고서 펴지 못한 채 홀로 다락에 기대었더니 /
抱孤難攄獨依樓

속에서 나오는 백 가지 감정과 근심을 이기지 못하겠네 /
由中百感不勝愁

달은 옛 궁전에 밝은데 향 피우는 연기는 다하였고 /
月明古殿香煙盡

바람은 성긴 수풀에 찬데 밤눈이 남아 있다 /
風冷疎林夜雪留

몸은 사마상여와 같이 병이 많고 /
身似相如多舊病

마음은 송옥(宋玉)과 같이 괴로워 가을을 슬퍼하누나 /
心如宋玉苦悲秋

처량한 정원에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안 들리고 /
凄凉庭院無人語

구름 밖 종소리만이 절로 아련하네 /
雲外鐘聲只自悠

 

이 시를 두고서 율곡은 시의 정조가 너무 애상적이고 기교적인 수사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임금은 임금 된 낙이 있으니, 사람을 제대로 등용하여 직무를 맡기면 태연히 화평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시로 자신의 성정을 읊조리는 것은 성현들도 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 문장에 마음을 쓰면 학문에 해가 된다고 평하고 있다.

이어서 그 아래에 선조 22년(1589) 기축년에 민응기(閔應箕)가 왕자의 사부가 되었을 때, 선조가 손수 부채에 써서 하사한 시 두 편이 나온다.

 

주석들이 생긴 뒤로 변설이 번거로워 /
箋註成來辨說繁

얼마나 많은 고금의 속된 선비들이 떠들었는가 /
幾多今古俗儒喧

그대는 보라, 한 조각 마음속의 밝은 달을 /
君看一片靈臺裏

다만 진공일 뿐 말이 필요치 않네 /
只是眞空不待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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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칼을 어루만지니 기(氣)가 무지개같이 뻗어 나네 /
撫劒中宵氣吐虹

장한 마음 일찍 우리 동쪽나라 편안하게 하리라 작정하였는데
壯心曾許奠吾東

연내로 하는 일 한단 걸음 같아서 /
年來業似邯鄲步

서풍에 머리를 돌리니 한이 끝없어라 /
回首西風恨不窮

 

앞서 율곡이 기록한 시와 비교하자면 그 기상과 구조가 우렁차면서도 초연한 맛이 있다. 율곡이 기록한 시는 선조가 젊은 시절에 쓴 시라 아무래도 애상이 지나치고 기교에 치우친 면이 보인다면 이 두 편의 시는 기교는 아랑곳하지 않는 담박함이 묻어나고 초연한 기상을 잘 느낄 수 있다. 이 또한 학문 연찬과 연륜의 소산일 것이다.

선조에게는 외증조부의 피가 흐른다


선조에게는 외증조부의 피가 흐른다

 

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는 명종의 자식이 아니고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岧)의 셋째아들이다.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1567(명종 22)년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려 처음에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沈氏)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이듬해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선조가 왕위에 오름에 따라 아버지가 대원군으로 봉해짐으로써 조선에서 처음으로 대원군제도가 시행되었다.

선조의 치세기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발생하여 사림 간에 분열이 발생하였다. 선조가 국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제대로 재건했다면 위기를 기회로 극복한 위대한 군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 현종은 위기를 잘 넘긴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선조 때를 본격적인 사림정치의 시작으로 보는데, 이는 연산군부터 명종까지 이어진 이른바 4대 사화를 겪으면서 위축되었던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유학의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펼치게 되었다는 의미다. 선조는 재위 초기 조선 전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림들을 신원하여 주었고, 반대로 선비들에게 해를 입힌 훈구세력들에게는 벌을 내려 사림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증직하고 그에게 피해를 입힌 남곤의 관작은 추탈하였다. 또한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 등을 죽인 윤원형(尹元衡)의 공적을 삭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사림들에게 중앙정계 진출이라는 명분을 확보해 주어 새로운 인물들이 등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혹자는 재위 초기의 선조와 중후반기의 선조를 구별하여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재위 초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중후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기록에 전하는 어린 시절 선조의 모습은 분명 남다른 바가 있다.

명종이 왕손들에게 글자를 써서 올리라고 명령하였더니, 짧은 시(詩)를 쓰기도 하고, 혹은 연구(聯句)를 쓰기도 하였는데, 선조는 홀로, ‘충성과 효도가 본시 둘이 아니다.’고 여섯 자를 썼으므로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명종이 선조를 총애하여 자주 불러 학업을 시험해 보고 은사(恩賜)가 있었다고 한다. 또 별도로 선생을 뽑아 한윤명(韓胤明)과 정지연(鄭芝衍)으로 가르치게 하였는데, 선조는 글 읽는 것이 매우 정밀하여 때로는 질문하는 바가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어서 선생들도 대답을 못하였다고도 한다.

선조는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었으며 용모가 맑고 준수하기도 하였지만 근칙하는 마음자세와 조신한 몸가짐을 지녔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선조가 익선관을 함부로 쓰지 않은 일화는 대표적이다. 선조의 이러한 몸가짐은 타고난 자질이 수승하고 학문을 배워 몸에 익힌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태생과도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선조의 부친 대원군의 어머니는 창빈 안씨(昌嬪安氏)이다. 창빈(昌嬪) 안씨는 탄대(坦大)의 딸로, 중종 후궁으로 들어가 숙용(淑容)이 되고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영양군(永陽君) 거(岠)요, 둘째가 선조의 친부가 되는 덕흥대원군이다. 중종이 죽은 후에 3년이 지나자, 관례대로 인수사(仁壽寺)로 나가려 하였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특명으로 궁중에 남아 있게 하였다.

선조의 할머니가 되는 창빈 안씨는 애초 중종 후궁 출신으로 그 집안은 여느 왕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미천한 집안이었다. 당시의 통례로는 중종이 승하한 후에 창빈이 인수사로 출가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는 것이었음에도 문정왕후가 특명을 내려 궁중에 남아 있게 한 데에는 창빈 안씨의 마음씀씀이를 어여삐 여긴 문정왕후의 은전이기도 했지만, 권력의 암투가 휘감고 있는 구중궁궐에서 사단을 일으킬 수 없는 한미한 집안이라는 생각도 작용한 것이다. 이는 이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은 후에 명종의 왕비였던 인순왕후가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던 하성군으로 보위를 잇게 한 데에도 역시 선조의 한미한 집안 내력이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선조가 명종의 후사를 잇는 데에는 그의 근실독려한 몸가짐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 근실독려한 몸가짐은 그의 출생 내력과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집안이 단지 한미한 것만으로 그의 근실독려한 몸가짐의 내력을 설명하기는 부족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그의 외증조부는 비록 집안이 미천하였지만 조신한 태도는 여느 명문가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공사견문에> 선조의 증조부가 되는 안탄대(安坦大)에 대한 대략의 내용이 나오는데, 글이 상세하지는 않지만 안탄대의 사람됨과 처신을 알기에는 충분하다.

안탄대의 본관은 안산(安山)으로 집안은 매우 미천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점잖고 조심스러워 남과 겨루는 일이 없었다. 딸이 궁중에 들어간 뒤로는 몸가짐이 더 겸손하고 근신하였는데, 창빈이 왕자녀(王子女)를 낳은 뒤에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남들이 혹시나 왕자의 외조라고 할까봐 두려워서였다. 선조가 대통(大統)을 계승한 뒤로는 처지가 더욱 존귀하건만 몸에 주단을 걸치지 아니하고, 만년에는 노병으로 눈이 멀었다.

선조가 초피 갖옷을 주어서 그 몸에 영광이 되게 하려 하여 사람을 시켜 그 뜻을 묻게 하니, 안탄대는,

“나는 미천한 사람이요, 초피 갖옷을 입는 것은 죽을 죄가 됩니다. 그러나 임금의 명을 어긴다는 것도 역시 죽을 죄이지만, 죽기 일반이라면 차라리 제 분수대로 지키다가 죽을까 하오.”

하였다. 선조가 그 뜻을 꺾지 못할 줄 안고 집 사람을 시켜서 강아지 가죽이라 하고 주었더니, 손으로 만져 보며,

“궁중의 개는 특별한 종자가 있나 보다. 부드럽고 곱기가 이렇단 말이냐.”

하였다고 한다.

임금이라도 부자의 천륜을 저버릴 수는 없다


임금이라도 부자의 천륜을 저버릴 수는 없다

 

조는 명종을 이어 조선의 14대 임금에 오른다. 선조가 비록 명종을 이어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명종 소생은 아니다. 건강이 좋지 못한 명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자, 명종의 왕비였던 인순왕후가 그 당시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던 하성군으로 보위를 잇게 하였다. 이는 왕이 후사를 정하지 않으면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 정하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선조는 방계로서 왕위에 오르는 최초의 임금이다.

선조가 왕위에 오른 데에는 인순왕후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고 하지만, 실상 명종이 생전에 하성군을 무척 아꼈다는 기사는 도처에 보인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선조는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었으며 용모가 맑고 준수하였다. 명종이 아들이 없으므로 속으로 이미 선조에게 기대를 정하고서 매양 불러볼 때마다 반드시 탄식하기를, ‘덕흥은 복이 있다.’고 하였다.“

라고 기록을 남겨두었다.
선조가 명종의 마음에 든 데에는 역시 하성군의 근칙하는 마음자세와 조신한 몸가짐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 김시양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

“처음에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하원군(河原君)ㆍ하릉군(河陵君)ㆍ선조ㆍ풍산군(豐山君)에게 하루는 익선관(翼善冠)을 왕손들에게 써 보라 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려고 한다.’ 하시고, 여러 왕손들에게 차례로 써 보게 하였다. 선조는 나이가 제일 적었었는데도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갖다 놓고 머리를 숙여 사양하며,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명종이 심히 기특하게 여겨, 왕위를 전해 줄 뜻을 정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왕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던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일로 치자면 분명 국왕의 친아버지인 덕흥군이 복이 있다는 명종의 말은 허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선조가 명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이상 왕가의 예법으로 따지면 명종과 선조가 부자간이 되고, 선조는 덕흥군을 부자의 예로 섬길 수 없게 된다.

선조는 자식 된 도리로 어떻게든 생부를 높이고자 하였지만 이때마다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사은(私恩)이 국법을 넘어서면 국가기강을 훼손하게 되기 때문이다. 선조는 어떻게든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 싶어 했고, 신하들은 사은이 국법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다.

선조가 신하들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부를 추존하고자 했던 저간의 사정은 <조야첨재(朝野僉載)>에 나오는 임기(林芑) 관련 기사에도 잘 드러난다. 기록에 의하면 임기는 글을 잘하고 이문학관(吏文學官)의 직에 있었는데 성질이 음험하고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였다. 항상 더 출세를 하려고 조정에 무슨 일이 생기는 요행의 기회를 바라더니, 병자년에 임금의 마음이 선비들을 싫어하고 또 덕흥군을 임금으로 추존하고 싶어하는 것을 눈치채고 소를 올렸는데

“남의 후사된 자가 그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성인의 법이 아닙니다. 임금께서는 마땅히 덕흥군의 아들로서 덕흥군을 높이는 도리를 극진히 하여야 합니다.”

하고 인종(仁宗)의 신주가 문소전(文昭殿)에 있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 하고, 또 선비들의 풍습을 헐뜯어,

“<심경>이나 <근사록> 따위를 읽어 헛이름만 낚아서 허위의 풍습을 조장합니다.”

고 하였다.

이 소를 두고서 사간원에서

“임기가 몰래 패역한 마음을 품고 흉하고 간사한 말을 선동시켜 시비를 혼란하게 하고, 이목을 속여서 조정에 근심을 끼치고, 사림에 화를 돌리려는 꾀가 혹독합니다. 바로 잡아들여 국문하소서”

하였는데, 선조가

“문소전을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는 말은 조광조(趙光祖)의 입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으로 죄를 주려면 조광조가 먼저 그 죄를 당하여야 한다. 저 사람(조광조(趙光祖))은 죄주지 아니하고 이 사람(임기)을 죄준다면, 임기가 불복하는 데는 어찌할 것인가. 또 임기의 말은 낳은 어버이를 대대로 제사 지내자는 것이요, 임금으로 추존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그만 임기 하나로 하여 양사(兩司)에서 궐문 밖에 엎드려 청하기까지 하는 것은 너무 조급한 짓이 아닌가.”

하고 양사의 청을 듣지 아니하여, 궐문 밖에 엎드려 청한 지 달이 지나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선조가 임기를 두둔한 데에는 필시 덕흥군 제사에 대한 그의 글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율곡은 어떤 입장을 견지했을까? 정축년(1577) 5월에 선조가 대원군 사당에 친히 제사지내려 하였는데, 이때 홍문관에서

“예(禮)에 사묘(私廟)에 제사 지낼 수 없습니다.”

하고 글을 올린다. 이에 선조가 크게 노하여,

“누가 이 말을 처음 내었는가.”

하고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려 하는 것을 대신이 나서 말린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두고서 율곡이 <석담일기>에서 천륜과 국법이 창과 방패처럼 서로 맞서지 않게 하면서 사리와 인정에 맞아떨어지는 설명을 내리고 있다.

“삼가 살피건대, 남의 후사된 의리가 진실로 중하지만 낳아준 부모의 은혜도 가볍지 않은 것이다. 비록 정통에 전심하여야 할 것이나, 어찌 사친의 정을 끊겠는가. 임금이 대원군 사당에 친히 제사 지낸다는 것은, 예에도 어김이 없고 정으로도 면하지 못할 것인데, 옥당은 무슨 소견으로 못한다고 하였는가. 혹자는 의심하기를 임금이 대원군을 제사 지낼 때에 만일 임금이 신하의 사당에 임하는 예로 한다면, 자식이 아버지를 신하로 할 수 없는 것이요,

만일 자식이 아버지 사당에 들어가는 예로 한다면 정통을 존중하게 여기는 데 방해가 될 것이므로, 임금이 사친의 사당에 제사 지낼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글 읽지 못한 사람의 말이다. 예에는 공조례(公朝禮)ㆍ가인례(家人禮)ㆍ학궁례(學宮禮)가 있는 것이니, 공조례에는 임금이 존엄하므로 숙부들도 신하의 예절을 공손히 지켜야 할 것이나, 친아버지는 신하로 대할 수 없고, 가인례에는 존속(尊屬)이 중하므로 임금도 부형의 아랫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 한(漢) 나라 효혜제(孝惠帝)가 궁중에서는 형 되는 제왕(齊王)의 아래에 앉는 것과 같은 것이요, 학궁례에는 스승이 높은 이가 되므로, 비록 왕자라도 역시 늙은이에게 절하는 일이 있으니,

한 나라 효명제(孝明帝)가 환영(桓榮)에게 절한 것 같은 일이다. 하물며 대원군은 임금의 몸을 낳았으니 가령 아직도 생존하였다면, 임금도 신하로 대하지 못하고 궁중에서 보면 반드시 절하였을 것이니, 이제 그 사당에 들어가서 조카가 숙부에게 제사 지내는 예를 쓴다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속된 선비들이 이치를 연구하는 공부가 없어, 한갓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누르는 것이 예 되는 줄만 알고, 사친을 끊지 못할 것은 알지 못하여 근거 없는 의논을 드려서 임금으로 하여금 노함을 일으켜 지나친 거조가 있을 뻔 하였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

과연 조선을 대표하는 명유의 탁견이 그대로 발휘된 글이다.

신익전(申翊全, 1605-1660) – 제2편


신익전(申翊全, 1605-1660) – 제2편              PDF Download

 

익전은 자가 여만(汝萬)이고 호는 동강(東江)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증조부는 우참찬 신영(申瑛)이고, 조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다. 부친은 영의정 신흠(申欽, 1566-1628)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신흠은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

고 하였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黨與)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23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다.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죽었다.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 바른 종통)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 月沙 이정구, 象村 신흠, 谿谷 장유, 澤堂 이식을 일컬음)으로 칭송되었다.

공은 1628년(인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재랑(齋郎)이 되고, 이어 검열·정언·지평 등을 지냈다. 163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부응교·사인(舍人)·사간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1639년에는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때 상사(上使)인 상국(相國) 최명길(崔鳴吉)과 기자묘(箕子廟)에 들러 제사를 지내면서 크게 강개하여 기휘(忌諱)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후 이때 한 말이 명나라를 부지하려 했다는 것이라는 이계(李煃)의 고변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인조 19년(1641) 이계(李煃)가 선성부사(宣川府使)로 있을 때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청나라 장군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신익전(申翊全), 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고 무고했다.

신익전을 엮을 적에 최명길과 기자묘에서 기휘를 언급한 것으로 했다. 또한 공의 나이 52세 때인 효종 7년(1656)에는 청나라에서 사신이 나와 다시 이 일을 사문(査問)하자, 체직되어 청나라 사신이 머무는 곳에서 심문에 답해야 했다.

공의 나이 47세가 되던 효종 2년(1651)에 사위인 숭선군과 그의 조카 신면(申冕)이 김자점(金自點)의 옥(獄)과 조귀인(趙貴人)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었으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논자들이

“이때에 능히 충신으로서 스스로를 보전한 이로는, 공이 충익공(忠翼公) 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수 있다.”

하였다. 이시백은 그의 아우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았다.
박세채는 「신도비명」에서

“만일 쉬움과 어려움을 따진다면 또 분별할 바가 있으니, 이는 어찌 공이 평소에 겸공(謙恭)하고 근확(謹確)했던 증험이 아니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라고 했다.

이어서 신익전이 “염정(恬靜)을 숭상함에 뜻을 두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왕실(王室)과 인척 관계를 맺기에 미쳐서는 더욱 삼가하여, 비록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담담하기가 마치 초야(草野)에 거처하고 공허(空虛)한 데로 도피하는 것 같았으며, 기미(幾微)를 보고 간략함을 지켜 한결같이 옛 전적(典籍)에 종사하였으므로, 무릇 속세의 현회(顯晦)ㆍ장부(藏否)는 족히 그의 마음을 얽매지 못하였다.”라고 평했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년 조에 신익전의 졸기가 적혀있다.

“전 참판 신익전(申翊全)이 죽었다. 익전은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집안 대대로 유아(儒雅)했는데, 익전 역시 문사(文辭)에 뛰어났다. 사람됨이 순박하고 겸허하였으며, 명가(名家)의 자제로 화현직(華顯職)을 역임하였는데, 권요(權要)의 직책에 당하게 되면 사양하며 피하고 처하지 않았다. 형의 아들 신면(申冕)이 권력을 좋아하여 패거리를 끌어 모으자 마음속으로 매우 싫어하며 늘 이 점을 자제들에게 경계시켰다.

신면이 이미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고 딸이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시집갔어도 화복(禍福)의 갈림길에서 전혀 오염을 받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들 인정하였다. 만년에 더욱 염정(恬靜)한 생활로 일관하며 세상일에 참여하지 않고 끝까지 아름다운 이름을 간직하다가 죽었다.”

 

<참고문헌>
『현종실록』
『효종실록』
『국조인물고』
윤재환, 「東江 申翊全의 詩文學 硏究 : 戰亂 經驗의 詩的 對應 樣相 檢討」,「동양학」 제56집, 2014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응구(申應榘, 1553-1623)- 제2편


신응구(申應榘, 1553-1623)- 제2편                PDF Download

 

응구는 자는 자방(子方)이고 호는 만퇴헌(晩退軒)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증조는 판결사 신한(申瀚)이고, 조부는 가평군수 신여주(申汝柱)이며, 부친은 동지중추부사 신벌(申橃, 1523-1616)이다. 우의정을 역임한 신익상(申翼相)이 그의 손자다. 성혼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신벌은 명종 7년에 효자로 천거 받아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이 되었고, 그 뒤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장악원직장(掌樂院直長)·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등을 지내고 직산현감·개성부도사·안산군수·여산군수·단양군수 등의 외직을 거쳤다. 이 후 선조 27년에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와 선공감판관(繕工監判官)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갔다.

80세에 당상으로 오르고, 아들 양주목사 응구(應榘)가 자기 아버지의 나이가 90이 되었으므로 은전을 베풀어줄 것을 아뢰자 왕이 실직제수(實職除授)를 명하여 1612년(광해군 4)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인품이 근엄하고 겸손하였으며, 직산현감 자리를 떠난 뒤 읍민이 송덕비를 세우자, 이를 철거하도록 하였다.

공은 158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천거로 장원(掌苑)이 되었다. 1588년 직산현감(稷山縣監)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그 뒤 임실·함열 등의 현감을 잠시 지낸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7년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관계에 들어가 형조정랑·한성부서윤·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1602년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

경기어사 유몽인(柳夢寅)이 상고하길,

“전 이천 부사(利川府使) 신응구(申應榘)는 중국 사신의 지공(支供)을 핑계로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의 70여 석이나 거두어다가 이를 강선(江船)에 가득 싣고 갔는데 끝내 어찌 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체직되었기 때문에 민간에서 증오하여 그의 살점을 먹고자 합니다. 응구는 명신 성혼(成渾)의 고제(高弟)로 당시 사람들이 사호(四皓)에 비유했었는데, 도리어 도척(盜蹠)도 하지 않는 짓을 하였습니다. 감사로 하여금 국안(鞫案)을 올려 보내게 하여 그 허실을 조사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이 기사를 적은 후에 사관이 평하길, “이것은 혼(渾)이 바야흐로 시론에 배척당하자 응구가 그 파도에 휩쓸린 탓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했다.

다시 충주목사·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고,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에 형조참의·동부승지·좌부승지 등을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1년 기사에 신응구가 사직하는 소를 올려 녹훈을 사양하는 기사를 적고 있는데 사관의 평이 박하다.

“응구는 조금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선임되어 왕자의 사부가 되었는데, 주군(州郡)을 맡고서는 명성이 크게 떨어졌다. 또 몸가짐을 깨끗하고 바르게 하지 못하여, ‘관직에 있지 않으면서도 나라를 염려했다.’는 이유로 임해군(臨海君) 옥사로 공신에 들기까지 함으로써 사론(士論)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래서 겸손한 말로 녹훈을 사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노자(奴子)로 하여금 궁궐에 드나들게 하였는데 왕이 모든 청탁을 다 들어주었으므로 사론이 추하게 여겼다.”

또한 ⌈인조실록⌋ 인조 1년 11월 조에는 졸기가 나오는데, 사관의 평이 역시 박하다.

“춘천부사(春川府使) 신응구(申應榘)가 졸(卒)했다. 응구는 젊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부터 중망(重望)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모두 추허(推許)하였다. 그런데 폐조 때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을 당하여 조진(趙振) 등과 함께 정훈(正勳)에 참여되었는데, 당시에 그를 일컬어 집에 있으면서 국가를 걱정한 공신이라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뒤에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어서도 행실을 삼가지 못하였다는 비난이 많았으니, 선사(先師)를 욕되게 하였다 하겠다.”

한편 그에 앞서 인조 1년 1월에 인조가 신응구를 춘천부사로 보내려고 하자, 재고를 요청하는 간관의 말은 신응구가 공직을 잘 수행한다는 평가다. 사관이 “춘천 부사(春川府使) 신응구(申應榘)는 과거 판결사로 있을 적에 임무 수행이 엄명하고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아서 청단(聽斷)과 신리(伸理) 모두에 공평성을 얻었으니 당연히 그 직임에 오래 두어야 하는데도 갑자기 외관으로 옮겼습니다. 상규(常規)에 얽매이지 말고 특별히 잉임시켜서 청송(聽訟)하는 자리를 신중하게 하소서.” 하고 아뢰었다.

한편 김상헌은 신응구의 묘갈명에서 다음과 같이 공을 평하고 있다.

“공의 모습을 바라보니, 한 겨울의 눈 속에 늠름한 송백(松栢)처럼 우뚝 서 있었고 공의 중심을 살펴보면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에 합치되어 얼음이 녹듯이 화평했도다. 약관(弱冠)에 향양(向陽)의 마을에 찾아가 배워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니,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를 따른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세상에 어려움을 만나 조금만 시험해 보고 항상 곤궁하게 살았도다. 하늘에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결국 창생의 한을 남기었도다. 아! 매우 슬프도다!”

신응구의 손자인 신익상의 졸기가 숙종실록 숙종 23년 조에 실려 있는데, 그 중에 “당시 조정의 형상이 오이를 가르듯 노론(老論)·소론(少論)의 색목(色目)이 있었는데, 신익상이 그의 조부(祖父) 신응구(申應榘)가 송시열(宋時烈)에게 배척당하였다 하여 유감과 한을 깊이 품고 있다가, 마침내 송시열에게서 떠나 소론의 무리가 되었었다.”라는 사관의 기록이 나온다.

신응구에 대한 실록의 평가는 당론의 향배가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광해군중초본⌋
⌈인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