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의 유차(遺箚)


 

이준경의 유차(遺箚)

 

<연려실기술>에는 “이준경의 유차(遺箚)” 항을 별도로 만들어 기술하고 있다.

차란 유서 형식의 차자라는 말이니 이준경이 선조에게 유언처럼 올린 차자라는 말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이준경의 유차를 그의 문집인 <동고집>에 실린 내용을 전재하였다.

임신년 7월 7일에 영중추부사 이준경이 마지막 차자를 올리고 정침에서 죽었는데, 준경이 병이 위독하자 의원을 물리치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천명이 이미 다 하였거늘 어찌 이것을 먹어 생명을 연장시키랴, 단지 임금에게 한 말씀 올려야겠다.”

하고 차자를 초하였으니, 그 차자의 대략에,

“첫째는 제왕의 힘쓸 것은 오직 학문하는 것이 제일 큰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함양 공부는 모름지기 경(敬)을 하여야 하고 진학은 앎을 지극히 하는데 달렸다.’ 하였습니다. ……

둘째는 신하를 대하실 때에 위의가 있으셔야 합니다. ‘천자가 거룩하니 제후가 공경한다.’고 신은 들었으니 위의는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

셋째는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군자라면 소인들이 비록 공격하더라도 발탁하여 써서 의심하지 마시고, 진실로 소인이라면 비록 사정이 있더라도 반드시 배척하여 쫓으실 것입니다. ……

넷째는 사사로운 붕당(朋黨)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혹 지나친 행동이 없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기네와 한마디의 말이라도 합하지 아니하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은 행실을 닦지 아니하고 글 읽기에 힘쓰지 아니하며, 거리낌 없이 큰소리치며 당파를 지으면서 그것이 높은 것이라고 하며 헛된 기풍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군자이면 함께 서서 의심하지 마시고 소인이거든 버려두어 저희끼리 흘러가게 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이제야 말로 전하께서 공평하게 듣고 공평하게 보아 주시어 힘써 이 폐단을 제거하실 때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근심이 될 것입니다.

이 유차는 조선시대 명재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준경의 심혈이 녹아들어간 글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목이 네 번째의 사사로운 봉당을 깨트려야 한다는 말이다. 왜 문제가 되었던가? 조선 후기 문신인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조선 당쟁사를 기록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의 기록을 참조하면 대강 이렇다.

선조 5년(1572년) 이준경이 죽음을 앞두고

“지금 사람들이 고상한 이야기, 훌륭한 말들로 붕당(朋黨)을 결성하는데 이것이 결국에는 이 나라에서 뿌리 뽑기 어려운 커다란 화근이 될 것입니다”

라는 유차를 올렸다. 이준경이 붕당을 만들 인물로 율곡을 지목했다고 알려지면서 율곡은 이에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장차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고 했는데 이준경은 그 말이 사납습니다.”

하고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이이를 지지하는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일제히 상소를 올려 이준경의 관작 삭탈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 서애 류성룡이 “대신이 죽음에 임해서 임금에게 올린 말이 부당한 것이 있으면 물리치는 것은 옳지만, 죄를 주기까지 한다면 너무 심한 것 아닌가”라고 반대해 삭탈관작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동고연보>의 내용은 율곡의 비판을 더욱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뒤에 이이가 또 따로 소를 올려 추한 욕을 하였으니 심지어는, ‘이준경이 머리를 감추고 형상을 숨기고 귀역(鬼蜮)처럼 지껄였다.’ 하였고, 또, ‘이준경의 말은 시기와 질투의 앞잡이요, 음해하는 표본입니다.’ 하였고, 또 ‘옛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선했지만 오늘날은 죽을 때에도 그 말이 악합니다.’”라고 했다고 기록하였다.

<율곡연보>에서는 이 일을 두고 “이준경이 임종할 때의 차자는 신‧구 두 파를 가리킨 것이었다. 이이는 그것이 임금의 마음에 의혹을 일으켜 간사한 자가 그 틈을 타서 사림에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차자를 올려 통렬하게 논박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신‧구 양파 간의 알력을 이준경과 기대승을 들어 밝히고, 백인걸이 신‧구 양파 간의 알력을 조정하려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백인걸의 이 입장은 동서분당 이후 조제보합론을 주장하면서 신‧구 양파 간 조정을 위해 노력했던 율곡이 입장과 묘하게 겹친다.

처음에 이준경이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일시에 명망이 있었으나, 다만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고 성질이 높고 거만하면서, 선비를 높여 주고,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어 재해가 절박하고 인심이 흉흉한 때를 당해서도 별로 건의함이 없으므로 선비들의 비난을 받게 되니, 준경도 스스로 불안하여 신진사류들과 화합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대승(奇大升)은 재주와 기개가 넉넉하여 일을 논할 때에 과감하고 날카로워 이준경과 점점 틈이 생겨 기대승이 분이 나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사류들이 대부분 아깝게 여겼다. 백인걸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조정에서 신ㆍ구(新舊)가 불화한 것은, 대신은 안정에만 힘쓰는 데에 그 폐단이 있고, 사림은 무엇을 하려고만 힘쓰므로 과격한 데에 그 폐단이 있으니, 마땅히 조정하여 중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내가 전하를 뵙고 다 아뢰겠다.”

하니, 듣던 자가 백인걸은 말이 번다하여 본의를 잃어 도리어 임금으로 하여금 조정에 붕당이 있는가 하는 의심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힘껏 말렸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근거하면 백인걸 본인은 본래부터 이준경의 인격에 심복하여 사류들이 이준경에게 동조하지 않는 것을 불만으로 여겼고, 기대승과 심의겸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기는 하지만 대신과 사림을 조정하여 중도를 잡겠다는 백인걸의 말은 율곡의 조제보합론의 취지와 일치한다.

당시 율곡이 이준경의 유차에 대하여 반박 상소를 올린 것은 자신은 붕당을 결성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준경이 죽은 지 3년 후인 1575년(선조 8)에 과연 동서분당이 일어났다. 이 점에서 보자면 율곡의 이준경 반박 상소는 적절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붕당이 생기자 율곡이 조제보합론을 제창하며 특정 당파에 편중하기 보다는 당론 조정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는 점을 상기하면 율곡이 이준경의 유차를 비판한 본의를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준경과 기대승 간의 갈등을 묘사한 율곡의 글처럼, 이준경과 율곡 간의 갈등도 안정을 추구하는 대신과 혁신을 도모하는 사림 사이의 갈등이 그 내면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견해 차이는 선배·후배 사림의 시국관과 출처관의 차이가 그 이면에 깔려있다.

이준경은 율곡이 지나치게 따지고 남을 신랄하게 비평하는 것을 싫어했다면, 율곡은 당시의 정국이 무너지기 직전의 초가집 같으니 빨리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율곡은 왕이 개혁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나와서 돕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 후진이나 양성하겠다는 태도라면, 이준경은 정치적 상황이 어떻건 간에 왕을 도와 경세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선배 사림으로서 이준경은 김개, 홍담 등과 같은 훈구파의 입장을 존중하였다면 후배 사림으로서 율곡은 개혁적 사림 정치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