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2


 

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2

 

<연려실기술> “첫 정사의 출척(黜陟)” 항에는 김개 외에도 훈구파의 거두인 홍담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겨두었다.

담(洪曇, 1509–1576)의 이력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조하면 정리하면,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저작(著作)·설서(說書)·정언을 역임했다.

명종 1년인 1546년(명종 1) 예조와 이조의 정랑, 1547년 장령·장악원첨정·응교를 역임하였다. 1548년 사간, 사복시와 사재감의 정(正), 집의가 되고 이듬해 예빈시부정·전한(典翰)을 거쳐, 1550년 직제학·동부승지, 1553년 호남관찰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우윤, 형조참판을 지냈다.

1555년 한성부좌윤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부제학·도승지·대사간·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560년 영남관찰사·홍주목사, 형조와 공조의 참판, 1565년 함경도관찰사·지중추부사 겸도총관을 역임했다. 선조 1년인 1568년(선조 1) 병조판서, 동지경연성균관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조와 예조의 판서, 1574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좌참찬·영중추부사를 거쳐, 1576년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한 뒤 지중추부사·우참찬에 이르렀다.

홍담은 명종 재위 기간(1545-1567)을 거쳐 선조 초년까지 지속적으로 국정에 참여하면서 중책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응교로 있을 때 진복창(陳復昌)이 윤원형(尹元衡)의 권세에 빌붙어 사사로이 중상모략을 하자 이를 막았고,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던 인물이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

홍담은 조정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대범한 것으로 이름나 있었다.”

“홍담은 깨끗하고 검소한 지조가 있고, 또 가정에서는 행검이 있었다. 계모 섬기기를 효성스럽게 하고 상중에 예를 극진히 지켰다.”

라고 말하면서도 홍담에 대한 율곡의 평가는 높지 않다. <석담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윤달에 이조 판서 홍담이 파면되었다. 홍담은 조정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대범한 것으로 이름나 있었으나, 다만 학문하는 선비를 미워하여 사람에게 말하기를,

“참 유학자가 어찌 지금 세상에 나겠는가. 지금 학문한다고 자칭하는 자는 다 허위이다. 만일 참 유학자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공경하고 사모할 것이지 어찌 감히 트집 잡겠는가.”

하였었다. 이조 판서가 되자 더욱 좌상 정철(鄭澈)과 틈이 생겼고, 사류를 꺼려서 어떻게 쫓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구신(舊臣) 우상 홍섬(洪暹) 담(曇)의 종형, 판서 송순(宋純)ㆍ김개(金鎧)가 모두 홍담과 합심하여, 먼저 송순을 대사헌으로 만들어 사류들을 공격하려 하다가, 마침 허물이 있어 갈렸으므로 김개를 썼는데, 김개가 쫓겨나자 홍담은 스스로 불안하여 병을 사칭하고 사면하였다.

홍담은 깨끗하고 검소한 지조가 있고, 또 가정에서는 행검이 있었다. 계모 섬기기를 효성스럽게 하고 상중에 예를 극진히 지켰다. 다만 도학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의논하는 것이 비열하고 속된 까닭으로, 선비의 여론이 허여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크게 쓰이지 못하였으므로 울분과 불평으로 지내었다. 박순(朴淳)이 이이(李珥)에게 말하기를,

“홍태허(洪泰虛)가 분한 마음을 품은 지 오래니, 이조 판서를 시켜서 위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자가 국량이 얕아서 만일 좋은 벼슬을 얻으면 반드시 기뻐하여 감정을 풀 것입니다.”

하니, 이이가,

“며칠 동안은 반드시 기뻐할 것이지만 며칠 지나면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다가 사류들이 듣지 아니하고 서로 버틴다면 오히려 노할 것이니, 어찌 며칠 동안의 기뻐함으로 그 평생의 노여움을 풀 수 있겠습니까. 또 자고로 사람의 노여워함을 두려워해서 큰 권력을 주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홍담이 죽었다.

율곡은 홍담이 청령하고 대범하고 깨끗하고 검소한 지조를 지녔고 계모에게 효를 다하고 가정을 법도에 맞게 다스렸다고 평가한다. 율곡의 기록에 근거하면 홍담은 수신과 제가 방면에서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인물이다. 사림파와 대비되는 훈구파라고 한다면, 현실 정치에서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권력 지향적이고, 부도덕하고 행검이 엄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 이해된다.

성리학(도학)의 목표가 성인지학이라고 할 때 홍담이 보여준 행실은 상당히 훌륭한 도학군자의 풍모로 읽힐 수 있는데, 율곡이 홍담을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율곡은 홍담이 학문하는 선비, 곧 도학을 공부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의논하는 것이 비열하고 속된 바가 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비판적 평가는 비단 홍담만이 아니라 김개에 대한 기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훈구파의 거두인 홍담이나 김개는 왜 학문하는 선비, 도학하는 선비를 싫어한 것일까? 이는 당시 새롭게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파들에 대한 정치적 입장 차이와 반감이 작동했을 것이다. 홍담이

“참 유학자가 어찌 지금 세상에 나겠는가. 지금 학문한다고 자칭하는 자는 다 허위이다. 만일 참 유학자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공경하고 사모할 것이지 어찌 감히 트집 잡겠는가.”

라는 대목에서 홍담의 진의를 읽을 수 있다.

이는 이준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된 세 명의 대신이 이황, 이이 그리고 이준경이다. 더욱이 이준경은 명종의 고명지신으로 명종의 유명을 받들어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통치 기반을 닦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명신이다.

선조 초년의 원로대신이었던 이준경과 이이가 서로 알력관계였다고 하는 사실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선조 즉위 후에 을사년의 원통함을 풀고 을사년의 위훈(僞勳)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신중론을 편 이준경에 대해 이이가 직접적으로 반대함으로 하여, 이준경이 백인걸에게

“자네의 이이가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하는가.”

라고 비판하면서 양현 간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준경이 퇴계를 두고 평한 내용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는데, 이는 김개와 홍담이 도학자를 비판하는 대목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준경은 진실로 어진 정승이어서 그 공적이 국가에 있으므로 이이도 전부터 일컬어 왔었다. 그러나 그 높고 교만한 성질은 도학(道學)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심지어 이황(李滉)을 가리켜 산금야수(山禽野獸)라고까지 하였으니, 퇴계의 나오기 어려워하고 물러나기 잘하는 것이 산새나 들짐승처럼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준경의 퇴계 비판을 곱씹어 보자면, 여기에는 국정을 이끌어온 노 정치가의 경륜에 비추어 봤을 때 명분과 의리에만 매달리는 것은 경솔하거나 무책임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것의 연속선상에서 도학하는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