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라도 부자의 천륜을 저버릴 수는 없다


임금이라도 부자의 천륜을 저버릴 수는 없다

 

조는 명종을 이어 조선의 14대 임금에 오른다. 선조가 비록 명종을 이어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명종 소생은 아니다. 건강이 좋지 못한 명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자, 명종의 왕비였던 인순왕후가 그 당시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던 하성군으로 보위를 잇게 하였다. 이는 왕이 후사를 정하지 않으면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 정하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선조는 방계로서 왕위에 오르는 최초의 임금이다.

선조가 왕위에 오른 데에는 인순왕후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고 하지만, 실상 명종이 생전에 하성군을 무척 아꼈다는 기사는 도처에 보인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선조는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었으며 용모가 맑고 준수하였다. 명종이 아들이 없으므로 속으로 이미 선조에게 기대를 정하고서 매양 불러볼 때마다 반드시 탄식하기를, ‘덕흥은 복이 있다.’고 하였다.“

라고 기록을 남겨두었다.
선조가 명종의 마음에 든 데에는 역시 하성군의 근칙하는 마음자세와 조신한 몸가짐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 김시양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

“처음에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하원군(河原君)ㆍ하릉군(河陵君)ㆍ선조ㆍ풍산군(豐山君)에게 하루는 익선관(翼善冠)을 왕손들에게 써 보라 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려고 한다.’ 하시고, 여러 왕손들에게 차례로 써 보게 하였다. 선조는 나이가 제일 적었었는데도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갖다 놓고 머리를 숙여 사양하며,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명종이 심히 기특하게 여겨, 왕위를 전해 줄 뜻을 정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왕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던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일로 치자면 분명 국왕의 친아버지인 덕흥군이 복이 있다는 명종의 말은 허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선조가 명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이상 왕가의 예법으로 따지면 명종과 선조가 부자간이 되고, 선조는 덕흥군을 부자의 예로 섬길 수 없게 된다.

선조는 자식 된 도리로 어떻게든 생부를 높이고자 하였지만 이때마다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사은(私恩)이 국법을 넘어서면 국가기강을 훼손하게 되기 때문이다. 선조는 어떻게든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 싶어 했고, 신하들은 사은이 국법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다.

선조가 신하들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부를 추존하고자 했던 저간의 사정은 <조야첨재(朝野僉載)>에 나오는 임기(林芑) 관련 기사에도 잘 드러난다. 기록에 의하면 임기는 글을 잘하고 이문학관(吏文學官)의 직에 있었는데 성질이 음험하고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였다. 항상 더 출세를 하려고 조정에 무슨 일이 생기는 요행의 기회를 바라더니, 병자년에 임금의 마음이 선비들을 싫어하고 또 덕흥군을 임금으로 추존하고 싶어하는 것을 눈치채고 소를 올렸는데

“남의 후사된 자가 그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성인의 법이 아닙니다. 임금께서는 마땅히 덕흥군의 아들로서 덕흥군을 높이는 도리를 극진히 하여야 합니다.”

하고 인종(仁宗)의 신주가 문소전(文昭殿)에 있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 하고, 또 선비들의 풍습을 헐뜯어,

“<심경>이나 <근사록> 따위를 읽어 헛이름만 낚아서 허위의 풍습을 조장합니다.”

고 하였다.

이 소를 두고서 사간원에서

“임기가 몰래 패역한 마음을 품고 흉하고 간사한 말을 선동시켜 시비를 혼란하게 하고, 이목을 속여서 조정에 근심을 끼치고, 사림에 화를 돌리려는 꾀가 혹독합니다. 바로 잡아들여 국문하소서”

하였는데, 선조가

“문소전을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는 말은 조광조(趙光祖)의 입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으로 죄를 주려면 조광조가 먼저 그 죄를 당하여야 한다. 저 사람(조광조(趙光祖))은 죄주지 아니하고 이 사람(임기)을 죄준다면, 임기가 불복하는 데는 어찌할 것인가. 또 임기의 말은 낳은 어버이를 대대로 제사 지내자는 것이요, 임금으로 추존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그만 임기 하나로 하여 양사(兩司)에서 궐문 밖에 엎드려 청하기까지 하는 것은 너무 조급한 짓이 아닌가.”

하고 양사의 청을 듣지 아니하여, 궐문 밖에 엎드려 청한 지 달이 지나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선조가 임기를 두둔한 데에는 필시 덕흥군 제사에 대한 그의 글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율곡은 어떤 입장을 견지했을까? 정축년(1577) 5월에 선조가 대원군 사당에 친히 제사지내려 하였는데, 이때 홍문관에서

“예(禮)에 사묘(私廟)에 제사 지낼 수 없습니다.”

하고 글을 올린다. 이에 선조가 크게 노하여,

“누가 이 말을 처음 내었는가.”

하고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려 하는 것을 대신이 나서 말린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두고서 율곡이 <석담일기>에서 천륜과 국법이 창과 방패처럼 서로 맞서지 않게 하면서 사리와 인정에 맞아떨어지는 설명을 내리고 있다.

“삼가 살피건대, 남의 후사된 의리가 진실로 중하지만 낳아준 부모의 은혜도 가볍지 않은 것이다. 비록 정통에 전심하여야 할 것이나, 어찌 사친의 정을 끊겠는가. 임금이 대원군 사당에 친히 제사 지낸다는 것은, 예에도 어김이 없고 정으로도 면하지 못할 것인데, 옥당은 무슨 소견으로 못한다고 하였는가. 혹자는 의심하기를 임금이 대원군을 제사 지낼 때에 만일 임금이 신하의 사당에 임하는 예로 한다면, 자식이 아버지를 신하로 할 수 없는 것이요,

만일 자식이 아버지 사당에 들어가는 예로 한다면 정통을 존중하게 여기는 데 방해가 될 것이므로, 임금이 사친의 사당에 제사 지낼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글 읽지 못한 사람의 말이다. 예에는 공조례(公朝禮)ㆍ가인례(家人禮)ㆍ학궁례(學宮禮)가 있는 것이니, 공조례에는 임금이 존엄하므로 숙부들도 신하의 예절을 공손히 지켜야 할 것이나, 친아버지는 신하로 대할 수 없고, 가인례에는 존속(尊屬)이 중하므로 임금도 부형의 아랫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 한(漢) 나라 효혜제(孝惠帝)가 궁중에서는 형 되는 제왕(齊王)의 아래에 앉는 것과 같은 것이요, 학궁례에는 스승이 높은 이가 되므로, 비록 왕자라도 역시 늙은이에게 절하는 일이 있으니,

한 나라 효명제(孝明帝)가 환영(桓榮)에게 절한 것 같은 일이다. 하물며 대원군은 임금의 몸을 낳았으니 가령 아직도 생존하였다면, 임금도 신하로 대하지 못하고 궁중에서 보면 반드시 절하였을 것이니, 이제 그 사당에 들어가서 조카가 숙부에게 제사 지내는 예를 쓴다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속된 선비들이 이치를 연구하는 공부가 없어, 한갓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누르는 것이 예 되는 줄만 알고, 사친을 끊지 못할 것은 알지 못하여 근거 없는 의논을 드려서 임금으로 하여금 노함을 일으켜 지나친 거조가 있을 뻔 하였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

과연 조선을 대표하는 명유의 탁견이 그대로 발휘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