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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흠(宋明欽, 1705-1768) – 제2편


송명흠(宋明欽, 1705-1768) – 제2편               PDF Download

 

명흠은 자는 회가(晦可)이고 호는 늑천(櫟泉)이며, 본관은 은진이다. 고조는 동국 18현인의 한 명인 송준길(宋浚吉), 증조는 공조정랑을 지낸 송광식(宋光栻), 조부는 의금부도사를 지낸 송병원(宋炳遠)이다. 병원은 딸만 둘을 두어 동생 병익의 2자 요좌(堯佐, 1678-1723)로 계후하였다. 송요좌의 큰 아들이 송명흠이다. 송명흠은 동생 송문흠(宋文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이재의 문인이다.

송명흠은 어려서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고, 9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재독할 만큼 영민하였다. 16세에 김육(金堉)의 현손인 김도흡(金道洽)의 딸을 배필로 맞이했다. 18세 때(경종 2년)에 신임옥사가 일어나 고모부 김제겸(金濟謙)의 부친이면서 노론 사대신의 한 명이었던 김창집(金昌集)이 죽고 김제겸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송명흠은 부친 송요좌가 사화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옥천(沃川)으로 낙향할 때 함께 갔다.

23세 때 이재를 처음으로 찾아뵙고, 이후 자주 내방하여 수학하였다.

30세 때에 운평 송능상과 맹자와 주서(朱書)를 독서하였고, 12월에는 녹문 임성주와 운평 송능상과 모여서 독서하였다.

영조 15년 35세 때에 신임사화가 소론과격파에 의해 조작된 무옥임이 밝혀져 경신처분이 내려졌다. 신임사화가 마무리되자 영조는 세자 교육을 담당할 산림 천거를 요청하는데, 송인명이 세자의 강학을 위해 도학이 있고 행실이 바른 선비로 5명을 천거하였는데, 그 중에 한 명으로 송명흠도 있었다.

50세 때에 민우수(閔遇洙), 신경(申暻), 김원행(金元行), 송능상(宋能相), 최재흥(崔載興)과 함께 시강원 서연관으로 제수되었으나 어머니 병 때문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762년(영조38) 윤5월에 사도세자가 사망한 이후 송명흠을 다시 징소하면서 영조가 “마땅히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상설(象設)을 바라보라. 칠순이나 되는 임금의 기대는 오직 호서(湖西)에 있고 동궁의 보도(輔導) 또한 산림(山林)에 있다. 글로는 뜻을 다할 수 없고 오직 ‘반드시 보고 싶다.[必欲見]’라는 세 글자가 있을 뿐이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라고 했다.

59세(영조39) 때 3월 5일의 상소에서 영조를 조후(曹侯)비유한 ‘적불(赤芾)’이란 말로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적불(赤芾)은 붉은 무릎 가리개로, 대부(大夫)이상의 관원은 적불을 착용하고 초헌(軺軒)을 탔는데, <시경(詩經)> 조풍(曹風) 후인장(候人章)에 조(曹)나라 군주가 군자(君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였으므로, 대부가 5인인 제후(諸侯)의 제도를 무시한 채 그 복색(服色)을 한 자가 수백 명이었으며 어진 이는 도(道)를 지키느라고 도리어 빈천(貧賤)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이에 대해 계속해서 초선(抄選)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영조는

“송명흠의 적불이란 말도 역시 산야(山野)의 당론”

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후 박세채의 문묘 종향 문제로 당론이 이어지자 신경(申暻)ㆍ송명흠ㆍ홍계능(洪啓能)ㆍ김양행(金亮行)을 모두 초선에서 빼라고 명하면서 당습(黨習)은 망국의 단서인데 그 원인은 산림의 선비에게서 말미암았다고 글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 송명흠, 김양행, 홍계능을 서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영조43년에 유림을 서인으로 만든 것은 3백 년 동안 없던 바라 하여 송명흠을 서인으로 삼으라는 명을 정지하였다.
영조실록⌋ 44년 조에 송명흠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사관의 평이 다음과 같다.

“송명흠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士林)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정초(旌招)를 누차 내렸으니 뜻을 지키고 나오지 않더니, 은례(恩禮)가 갈수록 융성해지자 감격하여 조정에 나왔다. 전석(前席)에 출입하면서 애연히(藹然)히 서로 믿음이 있었는데, 마침내 처음의 예우(禮遇)를 계속하지 않기에 이르자 진소(陳疏)하고 지레 돌아감으로써 그 쓰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론(士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송명흠이 이재의 문인이 된 데에는 부친 송요좌가 낙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배경을 작용했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연혼관계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재의 부친 이만창(李晩昌)은 민유중(閔維重)의 딸과 결혼했는데, 민유중은 송존길의 사위이자 문인이다. 이재에게 송준길가는 어머니의 외가가 된다.

송명흠의 학연을 논할 적에 김창협→이재→송명흠으로 학통이 이어진다고 본다. 이재(1680-1746)를 김창협(1651-1708)의 문인으로 본다. 그런데 이재가 김창협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는지는 다소 명확하지 않다. 이재 스스로가 김창협으로부터 직접 사사했다는 기록이 안 보이고, 김창협이 사망할 때 이재의 나이가 19세였던 점을 고려하면 김창협에게서 직접 학문을 전수받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받았다고 하더라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김창협과 이재의 관계는 직접적인 학문적인 사승관계보다는 연혼관계를 통한 사숙일 가능성이 높다. 이재는 어려서 숙부 이만성(李晩成, 1659-1722)에게 수학했다. 이만성의 배위는 김창협의 숙부인 김수흥(金壽興)의 딸로 이재에게는 작은어머니가 된다. 김창협과 이만성은 사촌처남과 사촌매제 사이다. 이재에게 이만성은 숙부이면서 스승이었고, 김창협은 이만성과 사촌처남매제의 관계다. 이런 연혼 관계로 이재가 김창협에게 직접 지도를 받지는 못했지만 사숙하여 학문이 낙론으로 귀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자료>
「영조실록」
성봉현, 「늑천(櫟泉) 송명흠(宋明欽)의 학연과 경세관(經世觀)」,「우계학보」 34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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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응수(楊應秀, 1700-1767) – 제2편


양응수(楊應秀, 1700-1767) – 제2편               PDF Download

 

응수는 자는 계달(季達)이고 호는 백수(白水)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아버지는 승의랑(承議郞) 양처기(楊處基)이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외우(畏友)인 화산(華山) 권(權) 선생에게 배우고, 후에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이 9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극진한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어른과 같았다. 부친상을 마치고 13세에 선친의 외우인 화산 권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는다. 생전에 화산은 외우이니 가르침을 받도록 하라는 유명을 따른 것이다. 권 선생이 공의 총명함을 보고서, “내 친구의 아들이 여기 있으니 비록 몸은 죽었지만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해 12월에 모친상을 당해 지극 정성을 다했다. 17세에는 스승 권 선생이 졸하였다.

공은 본래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부형들의 기대가 있어 부득이 과업을 준비했었다.

24세에 과장에 들어갔다 마침 내린 비로 의관을 더럽힌 후로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성리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38세에 한천에서 강학하고 있는 이재 선생을 찾아뵙고 사제의 연을 맺었다. 먼저 제자를 보내 이재 문하의 가르치는 법도를 살핀 후에 공이 직접 찾아뵈었다. 첫 만남부터 사제 간에 감복하고 기뻐함이 그지없었다. 공을 제자로 받아들인 후에 이재는 큰 기대를 했고, 사제 간의 정분이 부자처럼 다정했다.

56세에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고, 이어 익위사부수(翊衛司副수)로 옮겨졌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오로지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만 전념해 「사서강설(四書講說)」을 남겼다. 만년에는 박성원(朴聖源), 김원행(金元行), 송명흠(宋明欽) 등 당시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천문학(天文學)에도 밝아 천체의 운행과 해·달·별 등의 천상(天象)을 도표로 만들어 우주관을 해설한 「혼천도설(渾天圖說)」을 지었다.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스승 이재의 학설인 이일기이설(理一氣二說)을 바탕으로, 기(氣)의 본원은 하나이지만 동정(動靜)에 따라서 음양(陰陽)·이기(二氣)가 교합되어 오행(五行)·만물이 화생한다는 일기이기설(一氣二氣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람의 일신(一身)에는 혼백(魂魄) 또는 혈기가 있으며, 심(心)에는 이(理)와 지각(知覺)이 겸해 있다고 전제하고, 본연지기(本然之氣)와 혈기지기(血氣之氣)가 교합됨으로써 지각의 묘를 생한다는 「이기설(二氣說)」과 「지각설변(知覺說辨)」을 지었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낙론(洛論)을 지지하고, 호론(湖論)을 배척하였다. 만년에는 박성원(朴聖源)·김원행(金元行)·송명흠(宋明欽) 등 당시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중용강설」에서 인물성동이론의 중요한 논쟁처인 ⌈중용⌋ 수장을 해석한 내용을 통해 공의 학문 규모와 엄밀함을 살필 수 있다.

(질문) ‘사람과 동물이 태어날 적에 각자에게 부여된 이치를 받아서 건순오상의 덕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각각 얻는다(各得)’이라는 말은 호랑이와 이리는 단지 부자간의 인(仁)만을 부여받았고, 벌과 개미는 군신간의 의리(義)만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인가?’

(답) ‘그렇지 않다. 이는 호서학파(호론)의 입장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과 동물의 본연지성이 각각 다르다고 한다. 개끼리는 본연지성이 같지만 소와는 다르고, 소끼리는 본연지성이 같지만 사람과는 다르다. 사람끼리는 본연지성이 같지만 개나 소와는 다르다 하는 말은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질문) ‘그렇다면 동물도 오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답) ‘그렇다. 본성은 다섯 가지이지만 실상은 단지 생리(生理) 하나다. 인이 생리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인을 가지고 있다. 의예지신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개를 가지고 설명하면, 어미개가 새끼를 사랑하는 것이나 주인을 사랑하는 데에서 인을 볼 수 있다. 도둑을 막는 데에서 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하지 말하는 것은 순종하는 데에서 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인, 의, 예)를 아는 것이 지이다. 이 세 가지를 지키고 결코 허물지 않으며 주인을 죽을 때까지 따르며 결코 다른 이에게 가지 않는 것이 신이다. ……그래서 정자가 동물과 인간은 매우 비슷하지만 미루어 갈 수 있는지 여부에서 차이가 난다고 했다. 또 혈기가 있는 것들을 모두 오상을 가지고 있지만 확충할 줄 모른다고 했다.’

(질문) ‘그렇다면 주자가 순수한 인의예지를 동물이 어떻게 완전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는가?’

(답) ‘이는 정자가 미루어가고 확충하지 못한다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이다. 동물의 본연지성은 사람과 같지만 기품의 구속되어 오성의 전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인을 가지고 말하자면, 사람은 부모를 아끼고 타인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낄 수 있지만 동물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애초에 남당의 말처럼 금수는 오성 중에서 인만을 품부 받거나 혹은 의만을 품부 받고 나머지 네 개가 없는 것이 아니다.’

호락논쟁은 외암 이간과 남당 한원진에게서 그 논쟁의 본말이 모두 시작되었는데, 이간은 양자 간의 논쟁점을 미발(未發)과 오상(五常)에 관한 논쟁으로 정리하였다.
미발에 관한 논쟁은, 이간은 미발시에 선악이 있느냐는 문제로 논의를 전개했다면, 한원진은 미발시에 기질지성이 있느냐를 문제로 논의를 전개했다. 이간은 미발시에 악이 있지 않다는 입장이고 한원진은 미발시에 기질지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오상에 관한 논쟁은, 이간은 오상을 인물이 모두 품부 받았다는 입장에서 인물성동론을 주장하고, 한원진은 오상은 사람만이 온전하게 품부 받았다는 입장에서 인물성이론을 주장한다. 한원진은 사람이 동물과 다른 근거로 오상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인의예지신 전체를 동물이 갖지 못하다는 설명을 했는데, 양응수는 이재의 논리를 따라 一理의 전일성을 기반으로 인의예지신을 동물도 갖고 있다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였다.
<참고문헌>
양응수, 『백수집(白水集)』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전라문화연구소, 전북대학교, 1990
권오봉, 「白水 楊應秀의 讀書論에 관한 硏究」, 전남대학교 석사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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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호(兪彦鎬, 1730-1796년)


유언호(兪彦鎬, 1730-1796년)                           PDF Download

 

언호는 자는 사경(士京)이고 호는 칙지헌(則止軒)으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우윤 유직기(兪直基)이다. 형이 은일로 이조참의에 천거된 유언집(兪彦鏶, 1714-1783)이다.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 해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었다. 이후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이라 공격해 이를 배척하는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을 만들자, 권진응(權震應)·김문순(金文淳) 등과 함께 상소해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 정치의 제거가 청의(淸議)와 명분을 살리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정치적 동지들의 모임인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의 타파를 탕평으로 생각한 영조의 엄명으로 흑산도로 정배의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했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자신의 이름이 ⌈명의록⌋에 올라 있기도 하다.

그 뒤 이조참의·개성유수·규장각직제학·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정조 11)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과 희빈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향리에 칩거했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정조 즉위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또, 영조 때 탕평책 하에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고 개정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해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김우진(金宇鎭)·심환지(沈煥之)·김종수와 친하게 지내고, 홍봉한의 당을 공격함이 의리라는 김구주 당의 견해에 동조했으므로, 순조대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는 ⌈칙지헌집⌋이 있다.

정조실록⌋ 20년 조에 유언호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정조의 남다른 마음과 유언호의 인품이 잘 드러난다.

사관이 다음과 같이 총평을 하였다.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죽었다. 언호는 자가 사경(士京)이며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족질이다. 젊어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영종(英宗) 신사년에 등제하여 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주연(胄筵)에서 지우를 받았다. 상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그에 대한 총애와 발탁이 다른 신하들과 아주 달라서, 몇 년 동안에 화요직을 두루 거쳐 정경(正卿)에 뛰어 올랐고 정미년에 정승이 되었다.

무신년 조덕린(趙德隣)을 복관(復官)시킬 때에는 상의 노여움이 대단하였으나 뜻을 크게 지키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로 인해 비록 외진 섬으로 정배되는 엄한 견책을 입었으나 오래지 않아서 사면을 받아 다시 정승에 임명되어 상의 권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죽자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이어서 정조의 하교를 기록하였다.

“지우를 받음이 동료들 가운데 가장 앞섰고 칭찬을 받은 것도 끝내 변함이 없었으니 같은 사람을 어디서 다시 찾아오겠는가. 이제는 죽었는지라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애석하고 불쌍한 마음에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의 행적과 나를 정성으로 섬긴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속일 수 없는 공의가 있다. 그러니 포장하는 것은 지나친 칭찬에 가깝고, 하지 않으면 또한 사실을 매몰시키게 되는데 어찌 명정(銘旌)을 쓸 때까지 늦추겠는가.

의당 사관으로 하여금 군신 간에 서로 잘 만난 전말을 갖추 기술하여 징신할 증거로 삼아야 한다. 시호를 내리는 은전은 시장(諡狀) 짓기를 기다려서 속히 거행할 것이요, 조문하고 자손을 녹용하는 일은 관례에 의해서 거행하라.”

다시 시장과 관련하여 정조가 하교하길,

“듣건대, 갑오년 이후에 주대(奏對)한 것과 그 사실들을 대신이 손수 기록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서 가묘(家廟)에 보관해 두었는데, 비록 집안사람이라도 열람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니,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거행하라.”

하였다.
또 정조가 그를 두고 말하길,

“외모는 비록 청수하고 허약한 듯하였으나, 마음속의 지조는 아주 확고하였었다. 연전에 탐라로 귀양 보낸 일은 내가 부득이해서였다. 어찌 털끝만치라도 그를 손상시키려고 했겠는가.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은 자신의 실수였으나 제우의 융숭함은 시종 변함이 없었다.”

라고 했다.

장례 때에 유언호 집에서 유계(遺戒)가 있다 하여 예장(禮葬)을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조가 하교하길,

“시호를 청하지 말고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했더라도 조정의 명령이 있으면 으레 모두 받는 법인데 더구나 예장이겠는가. 상주의 집에 유시하여 관례에 따라 받도록 하게 하라.”

라고 했다.

1802년(순조 2)에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순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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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집(兪彦鏶, 1714-1783)


유언집(兪彦鏶, 1714-1783)                                  PDF Download

 

언집은 자는 사호(士鎬)이고 호는 대재(大齋)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한성부우윤 유직기(兪直基, 1694-1768)이다. 정조 때 영돈녕부사에 오르고, 정조 묘정에 배향된 유언호(劉彦鎬)는 그의 동생이다. 권상하(權尙夏)·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유직기가 『소학』의 「가언」과 「선행」편에 해당하는 내용을 정리한 것을, 유언집이 편집한 『대동가언선행』은 송대에 나온 『소학』의 「가언」과 「선행」 체제를 따라 조선 유학자들의 글에서 필요한 자료를 뽑아서 편집하였다.

대동가언선행』은 아동 교육서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본받을만한 훌륭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은 대체로 『격몽요결(擊蒙要訣)』·『성학집요(聖學輯要)』·『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등에서 해당 내용을 뽑아 정리하였다.

유직기가 책을 엮으면서 우리나라 인물들의 언행과 덕행을 채택한 것은 중국과 차별되는 독자적인 문화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총애했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는,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은 소학의 사다리요, 유직기가 편집한 『대동가언선행』은 『소학』의 날개이다. 그 말이 모두 깊고 알기 쉬우니, 『소학』을 읽을 때 항상 참고하면 그 효과가 매우 클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유언집은 학행이 있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정조 1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유언집이 사직 상소를 올리자 정조가 다음과 같이 비답했다.

“그대가 일찍이 도관(道關)에 계합(契合)하고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조예(造詣)의 공부와 의리(義理)의 정밀함은 본래 깊이 알았던 바이고 우연히 듣게 된 것이 아니었는데, 그대가 어찌 한결같이 지나치게 사양함이 이렇게 심한 데에 이른단 말인가? 그리고 그대의 소장 가운데 과업(科業) 운운한 것은 진실로 또한 지나치다.

퇴계(退溪)·율곡(栗谷)도 유독 과목(科目) 중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내 뜻을 마땅히 그대의 아우에게 유시(諭示)할 것이니, 그대는 신병의 차도가 있음을 기다려서 곧바로 길에 올라 내가 옆자리를 비워두고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1778년(정조 2) 경연관이 되었으며, 1783년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어 원자를 보도(輔導)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정조실록⌋ 7년 조에 유언집이 졸하자, 정조가 이에 하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유신(儒臣)은 내가 모앙(慕仰)하는 바이었으나 내 성의가 부족한 것 때문에 마침내 한 번도 조정으로 불러내어 함께 국가 일을 하게 되지 못했다. 매양 그의 아우가 고감에 따라 그때마다 쏠리고 있는 이 마음을 표해 왔었는데, 어찌 오늘 그가 장서(長逝)하였음을 듣게 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당면한 지금 세상의 도의가 풀려 버리고 민생에 대한 근심이 몹시 다급하므로, 이런 때를 바로잡아 구제해 가는 방책에 있어서 그윽이 임하(林下)에서 독서(讀書)하는 선비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하물며 이 유신은 나이와 덕이 모두 높아 조야(朝野)가 의지하며 중시했었으니, 내가 기대하며 바라게 되는 바가 더욱 어떠했겠느냐? 이제는 그만이게 되어버렸으니 다시 말을 한들 무엇하겠는가? 성복(成服)한 뒤에는 마땅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겠는데, 제문(祭文)도 마땅히 친히 짓겠다. 무릇 은졸(隱卒)에 관한 범절을 한결같이 고 장령(掌令) 김종후(金鍾厚)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연이어 사관이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유언집의 자는 사집(士集)인데, 유언호(兪彦鎬)의 형이다. 젊어서부터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노닐었고,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했었다. 드디어 초복(初服)에 당하여 경학에 통달하고 덕행이 있음으로써 선발되어 벼슬이 이조참의에 이르렀으나 여러 차례 불러도 나오지 않았고, 몸이 고되도록 학문 연구를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졸하였다.”

 

편서(編書)로는 『오복명의(五服名義)』가 있다. 이는 고금의 예제(禮制)를 참작하여 다섯 가지 상복의 이름과 그에 대한 뜻을 적은 책이다.

정현(鄭玄)·주희(朱熹) 등 중국의 예학자는 물론 김장생(金長生)·박세채(朴世采) 등과 성리학자이며 예학자인 이황(李滉)의 학설을 망라한, 오복에 관한 예설을 집대성한 책이다.

인용된 참고도서는 ⌈주례(周禮)⌋·⌈의례(儀禮⌋를 비롯,⌈가례家禮)⌋·⌈개원례(開元禮)⌋·⌈정화례 (政和禮)⌋·⌈개보례(開寶禮)⌋ 등과⌈당률(唐律)⌋·⌈당예의지(唐禮儀志)⌋·⌈송사예지(宋史禮志)⌋·⌈대명집례(大明集禮⌋·⌈대명회전(大明會典)⌋·⌈상례비요(喪禮備要)⌋ 등 두루 참고하였다.

이 책은 정구의⌈오복연혁도⌋와는 달리 군신관계의 상복부터 다루지 않고 부자관계의 본종복부터 설명하였다. 또한 단순한 도표가 아니라 왜 그러한 상복을 입는지 그 이유와 의의를 설명하였다. 이는 중국의 모방에서 벗어나 독자적·의식적으로 오복의 예설을 준행했음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극효(安克孝, 1741년 식년문과 장원)


안극효(安克孝, 1741년 식년문과 장원)       PDF Download

 

 

극효는 자는 사칙(士則)이고 호는 백강(栢岡)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아버지는 첨추(僉樞) 안숙(安橚)이다. 사촌동생 안극권(安克權), 안극관(安克觀)과 더불어 이재의 문하에서 사사했다. 동문수학한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목산(木山) 이기경(李基敬) 등과 막역지우로 서로 학문을 교류하였다.

안극효는 1741년(영조 17)의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헌부의 지평, 장령, 헌납 등 주로 언관직에서 근무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력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활발한 언론을 펼쳤다.

일찍이 영조와 8촌간인 여천군(驪川君)이 동생 이학(李學), 외손인 이권책(李權冊) 등과 함께 투서를 조작하여 역모 혐의를 덮어 씌었을 때 안극효는 영조와 맞서 이들 종친을 법으로 다스리는 데 앞장섰다.

이후 결국 영조로부터 축출된 것도 이때의 언관 활동으로 미움을 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극효는 또한 중종 때의 명신 김정(金淨)을 문묘(文廟)에 배향하고자 여러 차례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안극권은 유집사실(遺什事實)·세계비지(世系碑誌)·제현기술(諸賢記述) 등에서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안향(安珦)에 대한 사적(事蹟)을 모아 ⌈문성공실기(文成公實記)⌋를 1766년에 간행하였다.

안극권은 안향의 17대손이다. 책머리에는 대제학 이정보(李鼎輔)를 비롯하여 박성원(朴聖源)·송명흠(宋明欽) 등의 서문이 있으며, 16대손 안석근(安錫謹)의 발기(跋記)가 있다.
<참고문헌>
유제식, 「전북 지역문화의 성립기반과 그 맥락에 대한 연구: 전북유학의 전개」,「전라문화연구」 3호, 1989.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신이의(愼爾儀, 1685-1756)


신이의(愼爾儀, 1685-1756)                                  PDF Download

 

이의는 자가 가상(可象)이고 호는 취촌(醉村) 또는 명발와(明發窩)이다.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부친은 신제윤(愼齊尹)이다. 어려서는 큰아버지인 신후윤(愼後尹)에게 수학하여 시에 능하였으며,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신이가 학문의 기틀을 잡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는 큰아버지인 대곡(大谷) 신후윤인데, 신후윤의 스승이 타우(打愚) 이상(李翔, 1620-1690)이다. 이상은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서 김집(金集)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이상은 1658년(효종 9)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자의에 임명된 뒤, 산림직(山林職) 진선을 역임하였으며, 1661년(현종 2) 이후 지평을 비롯한 장령·집의 등의 사헌부 관직을 맡기도 하였다.

현종 말년의 예송(禮訟)에서 남인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실세하였으나,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재등용되어 1681년에 사업이 되고, 형조참의·우윤·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88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고,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세한 뒤인 1690년 옥사하였다.

이상이 신후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동로(東老, 신후윤)처럼 출중한 능력으로 출사하지 않고 시골 사람 살림살이를 하고 있으니 무척 안타깝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허명을 얻어서 출사하여 당화(黨禍)를 당하고 있는 것은 그대에게 좋은 경계가 되길 바라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신후윤은 이상의 고족으로 큰 기대를 받았다.

신이의는 30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극진한 정성을 다하였고, 그 후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재가 큰 기대를 하면서 궁리거경(竆理居敬)의 요체를 지도하였다. 56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역시 극진히 정성을 다했다. 이후로 환로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접고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하였다. 명발와(明發窩)라는 호는 이재가 신이의를 위해 지어준 호이다.

60세가 다 되어서도 스승 이재로부터 서명(西銘)과 태극도설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신이의가 예기에는 60세가 되면 가르침을 직접 받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나이 들어 가르침을 받는 것이 무슨 부끄러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재 또한 공의 정신이 가상하다고 칭찬하였는데, 이는 마치 우암 송시열이 그의 제자인 타로 이상에게 기대했던 것처럼 이재가 공에게 기대한 것이다.

이재가 죽자 3년간 심상(心喪)을 행하였다. 1751년(영조 27) 학행(學行)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천거,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에 제수되자

“일흔 넘어 첫 벼슬이지만 원량(元良: 왕세자) 한번 뵙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고 벼슬에 나아가, 왕세자에게 『서경』을 진강(進講)하고,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뜻을 상설하여 세자의 칭찬을 받았다.

강을 마치고 나면 세자의 공부가 어느 정도인지를 기록하여 부왕이 친람하도록 하였는데, 통례상 가급적 잘했다고 기록했었다. 그러나 신수의는 ‘천지의 도리는 공명정대하다. 어떻게 왕을 속일 수 있겠는가’ 하면서 사실대로 성적을 매겼기 때문에 세자가 무척 싫어했다. 이에 맡은 바 소임을 마무리하고 물러나왔다.

공 다음으로 진강한 이강중(李剛中)이 우리라면 도저히 공처럼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탄식하면서 그 확고하고 분명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공은 이제 소원을 풀었으니 돌아가야지 하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임종에 즈음하여 효제근신독서궁리(孝悌謹愼讀書竆理)로 유서하였다.

공은 ⌈심경⌋,⌈근사록⌋,⌈가례⌋등에 정통하고 역학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소학은 평생 몸으로 실천했다. 경(敬)을 학문의 요체로 삼았다.

“정자 때에는 ⌈소학⌋에 전주(傳注)가 없었는데, 정자가 경을 보충하였다. 이 경은 주자가 요체로 설명한 것이니, 주자가 ⌈소학⌋을 집주한 것은 다름 아닌 정자의 경이다. 따라서 경이야 말로 상하좌우전후를 관통하는 가장 긴용한 공부다”

라고 했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남당 한원진이 주장한 “인물은 각각의 본연이 있다(人物各本然)”, 미발에 선악이 공존한다(未發前淑慝), 명덕은 분수가 있다(明德有分數)의 설에 대해 체계적인 비판을 가한다. 또한 한원진의 인물성이론을 옹호한 병계(屛溪) 윤병구(尹鳳九)와도 변론하였다.
<참고문헌>
이상(李翔), 타우유고(打愚遺稿)
임헌회(任憲晦), 『고산집(鼓山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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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이(愼守彛, 1688-1768)


신수이(愼守彛, 1688-1768)                                 PDF Download

 

수이는 자가 군서(君叙), 호는 취한당(就閒堂)이며 황고선생(黃臯先生)으로 불렸다.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조부는 신경호(愼景昈)이고 부친은 신부(愼桴)이다.

8세 무렵에 새잡이 그물을 치는 것으로 동네 아이들 끼리 옥신각신하다 욕설이 오고갔는데, 공이 사람은 양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거늘 한동네에서 사소한 이익 때문에 싸우는 것은 안 된다고 하면서 이를 시로 지었는데 그 사리가 분명하였다.

장성하여 공부하러 다닐 적에 일상 언행을 소학에 따라 준행하여 소학동자라고 일컬어졌다. 나무를 깎아 패로 만들어 환성자(喚醒子)로 명하고 허리춤에 차고 다녔는데, 나무패가 부딪힐 때 나는 소리로 자신을 각성하였다.

한천에서 학문을 가르치던 도암 이재를 찾아뵙고, 수개월 동안 가르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제자의 예를 표했다. 이재는 공의 연수와 학문을 고려하여 도학지우로 지내고자 했으나 한사코 거부했다. 이재 또한 겸양하고 제자로 대하지 않았다.

공이 이재와 변론한 내용들은 사문 안에서 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재가 졸하자 제자로서 심복을 하고 이재의 어록을 수정하였다. 공이 기록한 어록은 내용이 자세하면서도 분명하여 이재의 평소 가르침을 잘 전하고 있다.

공이 죽은 후에 구연서원(龜淵書院)에 배향하고 후에 도암 이재, 역천 송명흠과 더불어 성천서원(星川書院)에 배향하려고 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공은 기품이 순수하고 자질이 돈후하였으며, 의양이 단정했다. 평소 집안에 거할 적에도 경계하고 독실하게 처신하였다. 집안이 다스려지는 것은 아내에게 본보기가 되는가에 달려 있으니, 이것이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했다.

8권 3책으로 된 황고집(黃皐集)이 전한다. 증손 신필우(愼必祐) 등이 수집 편집하여 1845년(헌종 11)에 간행하였다. 시(詩)·서(書)·서(序)·발(跋)·기(記)·설(說)·상량문(上樑文)·제문(祭文)·애사(哀辭)·고축문(告祝文)·잡저·묘갈명(墓碣銘)·묘표(墓表)·행장·부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침착하고 돈중(敦重)한 학자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고, 벗들과의 차운시·수증시가 많다. 「한중만음(閒中謾吟)」에서는 초가을 활짝 갠 푸른 하늘 아래 자연과 함께 동화된 유유한 심회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서(書)에는 일상적 안부를 묻는 내용 외에 성리설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개진한 것도 다소 있다. 이재(李縡)는 당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시비로 야기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진전 과정에서 윤봉구(尹鳳九)와 호서심설의 문제로 논쟁했는데, 이재는 낙론(洛論), 윤봉구는 호론(湖論)을 지지한 바 있었다. 서 가운데 이재에게 올린 「상도암이선생서(上陶庵李先生書)」는 당시 학계의 커다란 쟁점이 되었던 심설(心說)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여기서 공은 주희(朱熹)의 합이기설(合理氣說)을 들어 주기적(主氣的) 성향을 배척하였다. 별지에서는 장재(張載)의 이원론을 들어 주리(主理) 또는 주기의 일원론을 논박하고, 여러 선유(先儒)의 설을 인용해 심즉이기(心卽理氣)의 이원론을 논증하여 스승의 설에 동조하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잡저의 「한천어록(寒泉語錄)」은 이재의 어록이다. 스승을 처음 만난 날로부터 죽을 때까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자세히 적어, 덕행과 학문의 대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밖에 여러 논의들도 당시 심설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던 학계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영조실록⌋ 영조 13년 조에 신수이에 대한 평이 나온다.

“경상도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도내(道內)에 있는 인재들을 천거하기를, ……안음(安陰)의 신수이(愼守彝)는 학문과 행실이 정밀하고 독실한데가 재능도 갖추고 있으며, ……”

<참고문헌>
신수이, ⌈황고집(黃皐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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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석(宋瑚錫, 1693-1756)


송호석(宋瑚錫, 1693-1756)                                  PDF Download

 

호석은 자가 자는 기여(器汝), 호는 몽와(蒙窩)이고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증조부는 송격(宋格)이고, 조부는 송지희(宋之熺)이며, 부친은 송득규(宋得奎)이다.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심경연의(心經演義)』를 저술하였으며, 『몽와유고(夢窩遺藁)』 5권이 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모친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모친이 연로하자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며 기쁘게 해드렸다. 가난한 중에도 제수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모친을 봉양하는 데에는 온갖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잘못된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아서 과실이 있는 자들은 함부로 집으로 드나들지 못했다.

도암 이재가 한천에서 강학을 할 적에 병들고 가난하여 이재의 문하에 직접 나아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글을 올려 질문하였는데 경전의 뜻을 밝힌 것이 많았다. 이재가 직접 면대하지 않더라도 글을 통해 학문을 논하는 것은 옛날의 도리하고 하면서 오늘날의 군자로 허여하고 위기무실(爲己務實) 네 글자로 권면하였다.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송호석의 행장을 지었는데,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頤齋遺藁)』 卷18에 「몽와처사송공행장(蒙窩處士宋公行狀)」으로 전해진다.

황윤석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1759년(영조 35) 진사시에 합격, 1766년에 은일(隱逸)로서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고, 뒤이어 사포서(司圃署)의 직장·별제를 거쳐 익위사의 익찬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79년(정조 3)에 목천현감이 되었다가 다음해 사퇴하였고, 1786년전생서(典牲署)의 주부를 거쳐 전의현감(全義縣監)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사퇴하였다.

그의 학문은 실학시대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인데, 처음에는 이학(理學)의 공부에 힘쓰고 『주역』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북경을 거쳐서 전래된 서구의 지식을 받아 이를 소개한 공이 크고, 또 종래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한 점이 특색이다.

송호석의 손자인 송상은(宋相殷)이 승문원 정자로 있을 적에 조부의 문집 ⌈몽와유고(蒙窩遺稿)⌋를 간행하려고 하면서, 김종후(金鍾厚, 1721-1780)에게 서문을 부탁한다.

김종후는 송호석의 학문은 궁리‧정심‧수신‧정가(窮理正心修身正家)의 올바른 법도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조금의 가식도 없다고 평한다.

또한 인물성오상을 논할 적에 주자가 논한

“위치가 다르면 이치의 발용도 동일하지 않다(所居之位不同則其理之用不一)”,

“명덕은 심과 성의 합일이다(明德合心性)”,

“마음은 리를 탑재한 기이다(心爲載理之氣)”

등을 가져와 변론한 내용은 탁견이라고 평한다.
송호석은 평생토록 도암 이재를 앙모하였고, 이재가 졸하자 제자의 예를 다했다고 적었다. 송호석이 비록 병들어 이재 문하에 나아가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편지로 올린 질문을 이재가 크게 허여하였고, 이재와 송호석이 면대하여 가르침을 수수하지는 못했지만 틀림없는 사제간이라고 했다.

아울러 송윤석이 보내준 「몽와처사송공행장(蒙窩處士宋公行狀)」을 읽으니 송호석의 학문과 인품이 출중함을 잘 알겠다고 했다.

김종후는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문인이고, 민우수는 김창협과 권상하의 문인이다. 그리고 이재는 김창협의 문인이다.
<참고문헌>
황윤석(黃胤錫), 이재유고(頤齋遺藁)
김종후(金鍾厚), 본암집(本庵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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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수(徐逈修, 1725-1779)


서형수(徐逈修, 1725-1779)                                  PDF Download

 

형수는 자는 사의(士毅), 호는 직재(直齋)이고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할아버지는 서종대(徐宗大)이고, 아버지는 현령 서명훈(徐命勳)이다. 이재(李縡)·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김원행의 딸을 배필로 맞이했고, 대사성 서유망(徐有望)이 아들이다.

1751년(영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척신(戚臣) 홍계희(洪啓禧) 등 요인들이 교유를 청해온 것을 거절하여 관계의 진출이 늦어졌다.

1757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서 윤시동(尹蓍東)의 신구(伸救)를 청하였으나 당쟁을 일삼는다 하여 남해현(南海縣)으로 방귀(放歸)되었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1771년 교리로서 척신의 자제가 대거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폐단의 시정을 촉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승지로서 국가 대훈자(大勳者)의 특전이 너무 지나침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였다. 그 해 벽파(僻派)를 탄핵하였다가 면직당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1773년 승지로 재기용된 뒤 대사간·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776년(정조 즉위년) 공조참의에 이르러 홍인한(洪麟漢)·이득신(李得臣) 일파의 전횡을 규치할 것을 계속 주장하였고, 그 뒤 대사간·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실록⌋ 33년 3월 기사에 정언 서형수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남해현(南海縣)에 방귀(放歸)하도록 명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서형수가 상서하길,

“윤시동(尹蓍東)이 연좌된 것은 마음속에 품은 바가 있으면 숨기지 않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라고 하여 그를 신원하자, 영조가 명하길,

“당습(黨習)을 다시 행하려 한다“

고 하여 방축을 명하였다.
윤시동(尹蓍東, 1729-1797)은 1754년(영조 30) 25세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설서가 되었고,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56년 당론을 일으켰다고 탄핵을 받아 7년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가 풀려났고, 1766년 대사간이 되자 신광집(申光緝)의 무죄를 논하다가 다시 전리에 방축되었고, 1776년(정조 즉위년) 경기도관찰사로 재직시 당론을 운위하다가 다시 남해현에 유배되었고, 그 뒤 형조판서로 있을 때 당론을 다시 운위하다가 삼화로 유배되었다. 김종수(金鍾秀)·심환지(沈煥之) 등 시파와 함께 벽파공격에 앞장섰고, 김한구(金漢耉)·홍인한(洪麟漢) 등 척신의 축재를 규탄하였다.

1795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서형수의 딸인 영수합(令壽閤) 서씨는 조선의 대문장가로 불리는 홍석주의 어머니로, 학문이 뛰어나고 겸손한 인품에 자식들까지 훌륭하게 키웠다.

서씨는 남자 형제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스스로 글을 터득했지만, 다른 형제들보다 빠르게 학문을 받아들였다. 서형수가

“세 아들이 모두 뛰어나지만, 네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한세상을 풍미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서씨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으나, 아녀자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홍석주는 사람들 몰래 어머니에게 책을 가져다주고는 했다. 남편 홍인모도 그녀가 학문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홍인모는 자식들에게 어머니가 시를 읊으면 몰래 베껴놓으라고 지시했고, 자식들은 수백 편이나 되는 시를 기록했다.

서씨의 시는 『영수합고(令壽閤稿)』라고 하여 남편 홍인모의 문집 『족수당집(足睡堂集)』에 실려 있다.

서형수의 아들인 서유망은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합격, 1803년(순조 3)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806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었다. 1808년 전라우도의 암행어사로 나갔고,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으며, 1812년 대사성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독서에 정진하였으며 뛰어난 문장을 이루었다. 아버지를 본받아 청직(淸直)의 전통을 세웠다.

두 자녀를 통해서도 서형수의 학문과 인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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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朴聖源, 1697-1767)


박성원(朴聖源, 1697-1767)                                 PDF Download

 

성원은 자는 사수(士洙), 호는 겸재(謙齋)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며, 윤봉구(尹鳳九), 송명흠(宋命欽), 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박성원은 1721년(경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 사간원정자·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2년 뒤 석방되었다.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인 정조를 보도(輔導)하였으며, 참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공의 심성론은 스승인 이재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고 낙론(洛論)에 동조하였다. 또한 예서(禮書)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혹된 점을 일일이 초출하여, 조목마다 사견을 첨부하여 『예의유집(禮疑類輯)』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후학들의 예서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저서로는 『돈효록(敦孝錄)』·『보민록(保民錄)』·『돈녕록(敦寧錄)』·『겸재집(謙齋集)』 등이 있다.

돈효록』은 효에 관한 내용을 종합 정리하여 편찬한 책이다. 박성원은 효가 만선(萬善)의 근원이고 지덕(至德)인 동시에 지도(至道)로 『효경』이 이러한 도덕연원의 근본으로 사람이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효에 관한 지언(至言)과 격론(格論)을 여러 책에서 모아『돈효록』을 편찬하였다. 원 제목은 ‘효경연의(孝經衍義)’라고 제목을 붙였으나, 스승인 이재(李縡)가 효행의 돈독함을 권장한다는 의미를 강조해 ‘돈효(敦孝)’라고 이름 지은 것을 존중하여 그대로 책이름으로 삼았다.

예의유집』은 관혼상제을 해설한 책이다. 관혼상제에 대한 해설로서 주희(朱熹)의 『가례』를 따르지 않은 곳도 있다. 오복(五服)의 제도는 참최(斬衰: 거친 베로 짓되 아랫도리를 접어서 꿰매지 않은 상복) 3년부터 시작했고, 상장(喪葬)과 도구(道具)에 관해서는 치상도구(治喪道具)부터 기록하였다. 제례는 사례(四禮) 위주로 제현의 설 가운데 서로 같지 않을 때는 모두 기록한 것이 특색이다.

정조는 어제서문에서

“본조의 열성(列聖)이 유교를 진작한 뒤 300년 동안 예에 밝은 사람이 40∼50가에 이르니 예에 대한 고훈과 학설이 각처에 산재해 한 데 모으기가 어려웠는데, 박성원이 이를 극복하고 종법과 잡례를 총망라해 책을 만든 것이 가상해 교서관에 명해 간행하도록 한다.”

고 그 간행 경위를 밝혔다.
⌈영조실록⌋ 20년 조에 박성원이 영조에게 간쟁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박성원이 대간에 나아가 11개 조목에 대해 간쟁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기로소에 들어가려는 영조에게 중지할 것을 간언한 내용이다. 영조는 박성원을 불러들여서 노기를 띤 채,

“조신(朝臣)이 혹시 비슷하지도 않는데 기사(耆社)에 들어가는 자가 있다면 이것을 반박하더라도 좋겠지만, 네가 감히 인군(人君)이 기사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존호(尊號)의 여덟 글자를 어찌하여 반박해서 바로잡지 아니하고 곧 이처럼 계달(啓達)하는가?”

라고 엄하게 하교하고 박성원을 남해현으로 귀양 보냈다.
박성원의 11조목의 간쟁과 영조의 반응 및 제신들의 변론 및 의견을 기사를 적은 후에 사관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박성원은 임금과 소원한 신하로서 감히 말하기를 꺼리지 아니하였으니, 비록 그 마음이 과연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 기백은 숭상할 만하고, 그 말도 또한 취할 만한 것이 많았는데, 특히 한 마디 말이 임금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그 몸은 귀양 가고 그 말은 쓰이지 못했으니, 애석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

 

<참고문헌>
『영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