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재덕 2


 

선조의 재덕 2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선조의 덕행” 항을 마무리 하면서 선조에 대한 종합적인 평을 다음과 같이 내린다.

금은 문(文)으로는 족히 지극한 정치를 이룩할 수 있고, 무(武)로는 족히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있고, 밝기는 충(忠)과 사(邪)를 변별할 만하고, 지혜로워서 사무를 처리할 만하니, 참으로 이른바 세상에 드문 성인이요, 크게 일할 수 있는 임금이었다. 그 중간에 비색한 운을 만나 잠깐 파천하는 고생을 겪었던 것은 태평 끝에 난이 오는 운수의 관계이다. 마침내는 난리를 평정하고 몸소 나라를 중흥시켜 나라의 운수를 무궁하도록 연장시켰으니, 천하의 신무(神武)가 아니면 누가 능히 여기에 참여할 수 있으랴. 모두 위와 같다.

이긍익의 이 말들은 선조의 시호인

“선조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중에서 선조의 ‘현성의무성예(顯文毅武聖睿)’한 재덕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중간에 비색한 운을 만나 잠깐 파천하는 고생을 겪었던 것은 태평 끝에 난이 오는 운수의 관계”

라고 하는데, 비색한 운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임에 틀림없다. 이긍익은 ‘비색한 운’의 소치라고 하고,

“마침내는 난리를 평정하고 몸소 나라를 중흥시켜 나라의 운수를 무궁하도록 연장시켰다”

고 평가를 내리는데, 이는 선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는 사뭇 다르다.
오늘날 선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임진왜란(1592-1598)이고, 그 뒤에 따라오는 평가는 무능함이라는 세 글자이다. 더욱이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결행했을 때 선조는 백성을 버린 왕이라는 가시면류관을 쓰게 된다.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 현종은 위기를 잘 넘긴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엄정한 역사의 잣대로 평가했을 때 결코 성공한 왕은 아니다.

그렇지만 선조 때는 훈구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라는 신진세력이 등장하면서, 학문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시기로 조선 유학사의 중대한 고리이기도 하거니와 수많은 영걸들이 활약한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중국의 왕조로 따지면 송나라가 문약하여 이방 민족의 칼날을 하루라도 힘겨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성리학과 문치의 훌륭한 전통을 남겨둔 것에 비견할 만하다.

사림 정치의 문이 활짝 열린 데에는 운수의 관계이기도 하겠지만 선조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마치 임진왜란이 이긍익의 말처럼 운수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선조의 과(過)를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율곡은 <석담일기>에서 학문에 열성인 선조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무진(戊辰) 원년(元年)이라 임금이 자주 경연에 나와 변론하고 묻는 것이 매우 자세하니, 학문이 넓지 못한 강관은 입시하기를 매우 꺼렸다.”

무진년이면 1568년으로 선조의 나이 16세였을 때이다.

 

<연려실기술>은 선조의 유학 현창을 자세하게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고려(高麗)에서 정몽주(鄭夢周)가 처음으로 끊어졌던 유학을 일으켰고, 본조(本祖)에 이르러서는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 등이 계속해 나와서 경전의 뜻을 드러내 밝히고 의리를 강구해 밝혔으니, 임금이 그들은 도학에 큰 공이 있다 하여,특명으로 제사를 내리시고, 묘 지키는 사람을 두게 하고, 증직과 시호를 주며 그 자손을 추슬러 쓰게 하시고, 유학자인 신하 유희춘(柳希春) 등에게 명하여 그들의 말과 행실을 편집하여 이름을 <유선록(儒先錄)>이라 하고, 인하여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소학(小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 서적을 인쇄하여 발행하기를 명하고, 예조에 신칙하여 <소학>을 배우기를 권장하게 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학문에 대한 정성과 조예가 지극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림정치가 선조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선조 때에 유신들이 대거 조정에서 활약을 하는 데에는 선조의 인재관이 일정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긍익은 선조의 인재 등용에 관한 일화를 한 토막을 <연려실기술>에 적어 두었다.

임금은 인재를 애용하여 모두 제각기 그 직무에 합당하게 썼으며, 더욱 유학하는 선비를 중하게 여기어 혹 헐뜯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곡진하게 보호하였다. 언젠가는 대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인재가 적은데 그 취해 쓰는 방법도 오로지 과거에 있을 뿐이니, 그중에는 과거 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여, 산림에서 그대로 늙는 자가 없지도 아니할 것이다. 사람을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경들의 직무이니 마땅히 기특한 재주와 특이한 행실이 있는 자를 힘써 구하여 나로 하여금 그들을 쓰게 하라. 예전에 안영(晏嬰)은 그 종을 천거하였고, 사안(謝安)은 그 조카를 추천하였으니, 진실로 쓸 사람이라면 친척이라고 겸연쩍게 여기지 말고 미천하다고 버리지 말라.”

하였다.

선조의 조정에 과연 기특한 재주와 특이한 행실이 있는 자라면 천거하라는 그 명에 따라 등용된 인재가 얼마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조 때에 명현들이 즐비한 것은 역사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현량한 인재를 찾아 어진 신하에게 정사를 맡기라는 것이 유학의 기본적인 정치론이기는 하지만, 이를 군주가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 그러하기에 이긍익은 선조의 이 말을 특별히 기록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다양한 인재를 발탁하겠다는 선조의 의지는 성리학만을 독존하지 않고 이교(불교)를 용납하는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계유년에 성균관의 유생이 상소하여, 정업원(淨業院, 성중에 있는 승방)을 철폐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손수 써서 대답하기를,

“수선(首善 성균관을 말하는데 착한 것을 주창(主倡)하는 곳이라는 것임)의 처지에 있으며, 강론하는 것은 도의요, 기대하는 것은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이니 마땅히 마음을 단련하고 성질을 참아서 갈고 닦아, 경(敬)과 의(義)를 행하여 안과 밖의 수양을 쌓아서 훗날에 참 선비가 되어, 위로는 임금인 나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혜택을 끼쳐서, 정치가 잘 되고 풍속이 아름답게 되면 유학이 쇠하고, 이단(異端 불교(佛敎))이 성행하는 것은 염려조차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굳이 위(魏)의 태무제(太武帝)와 같이 중을 죽이고 절을 헐어야 할 것이 있으랴.”

하였다.

현대 양명학 연구가들이 양명학의 시작을 남언경(南彦經)과 그에게서 양명학을 배웠다는 이요(李瑤)라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왕족인 이요와 선조가 양명학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긍정적 평가를 내린 대화가 기록으로 전해온다. 이 또한 선조의 학문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