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1


 

선조 초년 훈구파의 거두들 1

 

조 때부터 동인과 서인 붕당이 결성되면서 이른바 붕당정치를 하게 되는데, 서인이든 동인이든 이른바 사림파라는 점에서는 모두 한 집안이고 그 반대편에 훈구파가 자리한다. 따라서 선조 때에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는 말은 선조 때부터 사림파가 조선 역사의 전면에 들어서면서 훈구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말과 동일하다.

고려 말의 적폐를 일소하기 위해 나섰던 신진사대부들의 이념적 무기는 성리학이었다. 이들은 조선 왕조의 건립을 기점으로 고려의 유신으로 의리와 절개를 지킨 사류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동참한 사류들로 나뉘는데, 전자를 통칭하여 사림파라고 하고 후자를 관학파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관학파를 훈구파라고도 하는데, 이는 세조 때 이후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료집단을 통칭한 말이다.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권좌에 올랐으니, 곧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바로 이 정난에 공을 세운 공신들이 정난공신으로 이후 훈구파의 뿌리가 된다. 왕좌에 오른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왕조를 반석에 세우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군왕으로서 세조의 치적은 무시할 수 없는 바가 있지만 문제는 유교를 이념으로 한 조선왕조에서 삼촌이 조카를 살해하고 왕좌에 올랐다는 점이다. 이러한 패역을 방조 협력한 사류들은 당연히 성리학의 도덕적 잣대로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사림파와 비교하면, 정난공신에서 훈구파의 뿌리가 시작되었으니 훈구파가 현실 정치에서 능력을 발휘할지는 모르지만 도덕적인 흠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연려실기술> “첫 정사의 출척(黜陟)” 항에

“6월에 대사헌 김개(金鎧)의 관직을 삭탈하고 문 밖으로 내쫓았다.”

는 기록으로 시작하는 율곡의 <석담일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김개(金鎧, 1504-1569)는 선조 초년의 훈구파의 거두로, 1501년에 태어난 퇴계보다는 3년 뒤에 태어나 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1525년(중종 20)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된 뒤 1544년 정언(正言), 1546년(명종 1) 수찬(修撰), 1548년 검상(檢詳)·장령(掌令), 이듬해 집의(執義)·응교(應敎), 1550년 선공감정(繕工監正)을 차례로 역임하여 이듬해 구황 겸 선위사(救荒兼宣慰使)로 청홍도(淸洪道)에 파견되었다. 1552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554년 형조참의가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7년 청홍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어서 대사헌과 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563년 형조판서, 15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었다.

김개는 관직에 있으면서 매우 청렴하여 1552년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하기에 율곡도 김개는

“구신으로서 조금 청렴하고 대범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김개에 대한 율곡이 평가는 높지 않다. <석담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6월에 대사헌 김개(金鎧)의 관직을 삭탈하고 문 밖으로 내쫓았다. 김개는 구신으로서 조금 청렴하고 대범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위인이 강퍅하고 자신만만하였으며 도학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시속과 다른 사람을 보면 반드시 대단히 미워하였다. 이황(李滉)이 물러간 뒤에 김개가 마음으로 불평하여 사람에게 말하기를,

“경호(景浩 이황의 자)의 이번 길은 소득이 적지 아니하군. 잠시 서울에 왔다가 손에 일품첩지[一品告身]를 쥐고 돌아가 고향에서 큰 영광이 될 것이니, 어찌 만족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이전에 훈구파의 또 다른 거두인 홍담(洪曇)이 이조판서가 되어 김개를 추천하여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을 맡았다. 율곡이 보기에 김개는 청렴하고 대범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여 상대방을 용납하는 기상이 부족한데 그 용납하지 않는 것 중에

“도학하는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시속과 다른 사람을 보면 반드시 대단히 미워하였다”

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본다면, 김개가 도학적 학풍을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를 평가 절하한 데에도 이와 같은 인식이 작동했을 것이다.

김개가

“요새 선비의 무리들이 함부로 무엇을 해 보겠다고 하니, 꺾어 억제하지 않을 수 없다.”

고도 한 말은 당시 새롭게 등장하는 사림파 정치 세력을 겨냥한 것이다. 율곡은 이 말을 기록한 후에 김개가 “기대승, 심의겸, 이후백” 등을 두고 한 말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개의 이와 같은 비판을 통해 당시 사림파는 훈구파에 맞서 어떤 개혁의 의지를 담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훈구파의 거두로서 김개가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파 정치 세력을 비판하면서, 어느 날 경연에서 선조에게

“선비 된 자는 마땅히 제 몸이나 닦고 입으로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지금 소위 선비라는 것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망령되게 시비나 말하고, 대신이나 헐뜯으니, 이런 기풍은 양성시켜서는 안 됩니다. 기묘년에도 조정에 경박한 무리가 많아서 저들과 같은 자는 끌어들이고, 저들과 다른 자는 배척하였으므로 조광조가 죄를 얻었으니, 모두 그 경박한 자들이 화를 양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러한 버릇을 억제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다. 이 기록 끝에 “사림들이 의심하게 되었다”라는 율곡의 첨언은 김개가 선조에게 아뢴 말이 조광조를 비방한 내용으로 의심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이에 대해 지평 정철(鄭澈)은

“김개가 전하를 현혹시켜 사림에 화를 끼치려 하니, 전하께서는 살피시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김개의 과실을 들추어 그 병통을 통절히 지적하니 김개가 얼굴이 흙빛이 되어 절하고 먼저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이후 삼사(三司)가 다투어 탄핵하는 소를 올려서 관작을 삭탈하고 내쫓기를 청하여, 결국 김개가 탄핵을 당하고 서울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시흥에서 낙향해 있으면서 대간이 탄핵한 글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이 아뢴 말을 보니 나를 소인이라고 하였구나.”

하고, 근심과 울분으로 병이 나서 두어 달 만에 죽었다고 <석담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근심이란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외지로 쫓겨난 것에서 연유한 것이라면 울분이란 자신을 소인이라고 한 데에 대한 울분일 것이다. 당시 새롭게 선조 조정에서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사림파 정치 세력을 봤을 때 그들이야말로 소인인데 어찌하여 자신이 소인이라는 평을 받았는가에 대해 울분이다. 이는 김개가 경연에서 선조에게 아뢸 적에 “지금 소위 선비라는 것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망령되게 시비나 말하고, 대신이나 헐뜯으니, 이런 기풍은 양성시켜서는 안 됩니다.”라는 그 말에 도학을 논하는 선비들을 소인으로 취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유교정치사에서 사색당파의 시초가 되는 동서 분당이 선조 연간에 만들어지고, 이후 조선 유교정치를 사림파가 좌지우지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선조 초년 사림파 정치세력과 훈구파 세력 간의 알력 또는 사림파 정치세력의 개혁적 요소 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김개가 당시 세력을 확장해 가던 사림파 정치세력을 평가하는 입장과 율곡이 김개를 평가하는 대목들을 교차적으로 검토한다면 선조 초년의 정치 현장을 한층 입체적으로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