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에게는 외증조부의 피가 흐른다


선조에게는 외증조부의 피가 흐른다

 

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는 명종의 자식이 아니고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岧)의 셋째아들이다.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1567(명종 22)년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려 처음에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沈氏)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이듬해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선조가 왕위에 오름에 따라 아버지가 대원군으로 봉해짐으로써 조선에서 처음으로 대원군제도가 시행되었다.

선조의 치세기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발생하여 사림 간에 분열이 발생하였다. 선조가 국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제대로 재건했다면 위기를 기회로 극복한 위대한 군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 현종은 위기를 잘 넘긴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선조 때를 본격적인 사림정치의 시작으로 보는데, 이는 연산군부터 명종까지 이어진 이른바 4대 사화를 겪으면서 위축되었던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유학의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펼치게 되었다는 의미다. 선조는 재위 초기 조선 전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림들을 신원하여 주었고, 반대로 선비들에게 해를 입힌 훈구세력들에게는 벌을 내려 사림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증직하고 그에게 피해를 입힌 남곤의 관작은 추탈하였다. 또한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 등을 죽인 윤원형(尹元衡)의 공적을 삭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사림들에게 중앙정계 진출이라는 명분을 확보해 주어 새로운 인물들이 등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혹자는 재위 초기의 선조와 중후반기의 선조를 구별하여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재위 초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중후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기록에 전하는 어린 시절 선조의 모습은 분명 남다른 바가 있다.

명종이 왕손들에게 글자를 써서 올리라고 명령하였더니, 짧은 시(詩)를 쓰기도 하고, 혹은 연구(聯句)를 쓰기도 하였는데, 선조는 홀로, ‘충성과 효도가 본시 둘이 아니다.’고 여섯 자를 썼으므로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명종이 선조를 총애하여 자주 불러 학업을 시험해 보고 은사(恩賜)가 있었다고 한다. 또 별도로 선생을 뽑아 한윤명(韓胤明)과 정지연(鄭芝衍)으로 가르치게 하였는데, 선조는 글 읽는 것이 매우 정밀하여 때로는 질문하는 바가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어서 선생들도 대답을 못하였다고도 한다.

선조는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었으며 용모가 맑고 준수하기도 하였지만 근칙하는 마음자세와 조신한 몸가짐을 지녔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선조가 익선관을 함부로 쓰지 않은 일화는 대표적이다. 선조의 이러한 몸가짐은 타고난 자질이 수승하고 학문을 배워 몸에 익힌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태생과도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선조의 부친 대원군의 어머니는 창빈 안씨(昌嬪安氏)이다. 창빈(昌嬪) 안씨는 탄대(坦大)의 딸로, 중종 후궁으로 들어가 숙용(淑容)이 되고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영양군(永陽君) 거(岠)요, 둘째가 선조의 친부가 되는 덕흥대원군이다. 중종이 죽은 후에 3년이 지나자, 관례대로 인수사(仁壽寺)로 나가려 하였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특명으로 궁중에 남아 있게 하였다.

선조의 할머니가 되는 창빈 안씨는 애초 중종 후궁 출신으로 그 집안은 여느 왕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미천한 집안이었다. 당시의 통례로는 중종이 승하한 후에 창빈이 인수사로 출가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는 것이었음에도 문정왕후가 특명을 내려 궁중에 남아 있게 한 데에는 창빈 안씨의 마음씀씀이를 어여삐 여긴 문정왕후의 은전이기도 했지만, 권력의 암투가 휘감고 있는 구중궁궐에서 사단을 일으킬 수 없는 한미한 집안이라는 생각도 작용한 것이다. 이는 이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은 후에 명종의 왕비였던 인순왕후가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던 하성군으로 보위를 잇게 한 데에도 역시 선조의 한미한 집안 내력이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선조가 명종의 후사를 잇는 데에는 그의 근실독려한 몸가짐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 근실독려한 몸가짐은 그의 출생 내력과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집안이 단지 한미한 것만으로 그의 근실독려한 몸가짐의 내력을 설명하기는 부족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그의 외증조부는 비록 집안이 미천하였지만 조신한 태도는 여느 명문가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공사견문에> 선조의 증조부가 되는 안탄대(安坦大)에 대한 대략의 내용이 나오는데, 글이 상세하지는 않지만 안탄대의 사람됨과 처신을 알기에는 충분하다.

안탄대의 본관은 안산(安山)으로 집안은 매우 미천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점잖고 조심스러워 남과 겨루는 일이 없었다. 딸이 궁중에 들어간 뒤로는 몸가짐이 더 겸손하고 근신하였는데, 창빈이 왕자녀(王子女)를 낳은 뒤에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남들이 혹시나 왕자의 외조라고 할까봐 두려워서였다. 선조가 대통(大統)을 계승한 뒤로는 처지가 더욱 존귀하건만 몸에 주단을 걸치지 아니하고, 만년에는 노병으로 눈이 멀었다.

선조가 초피 갖옷을 주어서 그 몸에 영광이 되게 하려 하여 사람을 시켜 그 뜻을 묻게 하니, 안탄대는,

“나는 미천한 사람이요, 초피 갖옷을 입는 것은 죽을 죄가 됩니다. 그러나 임금의 명을 어긴다는 것도 역시 죽을 죄이지만, 죽기 일반이라면 차라리 제 분수대로 지키다가 죽을까 하오.”

하였다. 선조가 그 뜻을 꺾지 못할 줄 안고 집 사람을 시켜서 강아지 가죽이라 하고 주었더니, 손으로 만져 보며,

“궁중의 개는 특별한 종자가 있나 보다. 부드럽고 곱기가 이렇단 말이냐.”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