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재덕 1


 

선조의 재덕   1

 

<연려실기술> “선조” 항에 선조의 존호와 재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조 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은, 휘가 연(昖)인데, 처음 휘는 균(鈞)이었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이다. 비(妣)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는, 판중추부사 세호(世虎)의 딸이다. 가정 31년(1552) 임자 명종 7년 11월 11일 기축에 인달방(仁達坊) 사제(私第) 덕흥대원군의 집에서 나서 처음에는 하성군(河城君)을 봉하였었고, 융경(隆慶) 정묘년에 명종의 유명으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라, 만력(萬曆) 경인년에 존호를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 올렸고, 갑진년에 지성대의격천희운(至誠大義格天熙運)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만력 36년 무신 2월 1일 무오에 황화방(皇華坊) 별궁 경운궁(慶運宮) 에서 승하하였으니, 왕위에 있은 지 41년이요, 향년 57세였다. 명나라에서 소경(昭敬)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洪烈)이라는 존호를 사용한 만력 경인년(1590)은 선조 23년이고, 지성대의격천희운(至誠大義格天熙運)이라는 존호를 가첨한 만년 갑진년(1604)은 선조 32년이다. 선조 사후 시호를 선종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라고 했는데, 광해군 때 묘호를 선조로 바꾸어 존호를 더 올렸다. 대한제국 때에 명나라에서 내린 소경(昭敬) 시호를 폐지하여, 정식 시호는 선조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祖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다. <연려실기술>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부친 이광사(李匡師)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타계(他界)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하니, 대한제국 이전이라 소경(昭敬)을 시호에 넣었다.

선조는 왕위에 있은 지 41년이고 향년 57세로 승하했으니, 왕위에 오른 당시의 나이가 16세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아름다운 바탕에 용모가 맑고 준수했다고 여러 기록들이 전하고 있듯이 남다른 자질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일화 중에 명종이 왕손들에게 글자를 써서 올리라고 명령하였는데, 혹은 짧은 시(詩)를 쓰기도 하고, 혹은 연구(聯句)를 쓰기도 했는데, 선조가 홀로 ‘충성과 효도가 본시 둘이 아니다.’고 여섯 자를 썼으므로 명종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는 율곡의 기록이 전한다.

선조의 비범한 자질을 율곡은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는데, 명종의 뒤를 이어 갑작스레 왕좌를 계승한 16세의 하성군이 조선왕조 최초로 방계로 왕위에 오르는 장면도 그 중 하나다. 명종이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갑작스레 승하함으로 하여 조선은 혼란에 빠질 수 있었다. 이는 명나라 사신 한림검토(翰林檢討) 허국(許國)과 병부급사(兵部給事) 위시량(魏時亮)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조서를 반포하려고 조선으로 오다가 안주(安州)에 이르러 명종의 부고를 듣고, 국중에 변고 있을까 의심하였다는 기록에도 알 수 있다. 이 두 사신이 막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조서를 전하는 장면을 <석담일기>에서 율곡은 이렇게 적고 있다.

임금이 권지국사로서, 곤룡포와 면류관 칠장복을 입고, 명나라 황제의 조서를 교외에서 맞을 때에 두 사신이 주목하기를 잠시도 그치지 아니하다가 접대함이 법도에 어긋나지 아니하니, 탄식하면서, “저런 어린 나이로 행동이 예절에 합하니, 이런 어진 임금을 얻은 것은 조선의 복이다.” 하였다. 그때에 왕의 춘추는 16세였다. 그 이튿날 두 사신이 소복으로 조상하였다.

황망한 중에 대국의 사신을 접대하여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의식의 절차가 적법하였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조의 몸가짐과 행동이 위엄과 권위가 있었음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는 타고난 재덕 위에 평소 공부의 소양이 덧입혀져야 가능하다. 전일에 명종이 선조를 사랑하여 별도로 선생을 뽑아 한윤명(韓胤明), 정지연(鄭芝衍)으로 가르치게 했다고 율곡은 <석담일기>에 적어 두었다. 그렇다면 선조의 늠름한 기상은 명종의 정훈(庭訓)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인들은 시를 통해서 인물이 타고난 재질을 가늠하곤 했는데, <연려실기술> “선조의 아름다운 덕행” 항에 선조의 시를 연달아 적어두었다.

 

외로움을 품고서 펴지 못한 채 홀로 다락에 기대었더니 /
抱孤難攄獨依樓

속에서 나오는 백 가지 감정과 근심을 이기지 못하겠네 /
由中百感不勝愁

달은 옛 궁전에 밝은데 향 피우는 연기는 다하였고 /
月明古殿香煙盡

바람은 성긴 수풀에 찬데 밤눈이 남아 있다 /
風冷疎林夜雪留

몸은 사마상여와 같이 병이 많고 /
身似相如多舊病

마음은 송옥(宋玉)과 같이 괴로워 가을을 슬퍼하누나 /
心如宋玉苦悲秋

처량한 정원에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안 들리고 /
凄凉庭院無人語

구름 밖 종소리만이 절로 아련하네 /
雲外鐘聲只自悠

 

이 시를 두고서 율곡은 시의 정조가 너무 애상적이고 기교적인 수사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임금은 임금 된 낙이 있으니, 사람을 제대로 등용하여 직무를 맡기면 태연히 화평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시로 자신의 성정을 읊조리는 것은 성현들도 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 문장에 마음을 쓰면 학문에 해가 된다고 평하고 있다.

이어서 그 아래에 선조 22년(1589) 기축년에 민응기(閔應箕)가 왕자의 사부가 되었을 때, 선조가 손수 부채에 써서 하사한 시 두 편이 나온다.

 

주석들이 생긴 뒤로 변설이 번거로워 /
箋註成來辨說繁

얼마나 많은 고금의 속된 선비들이 떠들었는가 /
幾多今古俗儒喧

그대는 보라, 한 조각 마음속의 밝은 달을 /
君看一片靈臺裏

다만 진공일 뿐 말이 필요치 않네 /
只是眞空不待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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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칼을 어루만지니 기(氣)가 무지개같이 뻗어 나네 /
撫劒中宵氣吐虹

장한 마음 일찍 우리 동쪽나라 편안하게 하리라 작정하였는데
壯心曾許奠吾東

연내로 하는 일 한단 걸음 같아서 /
年來業似邯鄲步

서풍에 머리를 돌리니 한이 끝없어라 /
回首西風恨不窮

 

앞서 율곡이 기록한 시와 비교하자면 그 기상과 구조가 우렁차면서도 초연한 맛이 있다. 율곡이 기록한 시는 선조가 젊은 시절에 쓴 시라 아무래도 애상이 지나치고 기교에 치우친 면이 보인다면 이 두 편의 시는 기교는 아랑곳하지 않는 담박함이 묻어나고 초연한 기상을 잘 느낄 수 있다. 이 또한 학문 연찬과 연륜의 소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