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해야 할 공부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05>

임금이 해야 할 공부

 

‘대통령학’이라는 학문분야가 있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다. 한국대통령학회도 있고, 한국대통령학연구소도 있다. ‘대통령학’이라면 사실 유교의 가르침만큼 체계적인 것이 없을 것이다. 유교, 특히 성리학은 그러한 학문이 집대성된 철학이다.

곡은 선조에게 수시로 대통령학 강의를 하였다. 선조 2년의 기록이다.

“임금이 백성을 다스릴 생각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다스리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학문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단지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아와 고서(古書)를 많이 읽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하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지로 효과가 있게 되는데, 그런 다음에야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연이란 궁중에서 학자들이 임금과 함께 유교 경전이나 역사서 등을 읽는 것이다. 말하자면 임금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다. 율곡은 임금이 잡다한 서적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격물(格物)이란 사물을 잘 살펴보고 연구하는 것을 말하며, 치지(致知)란 지식을 넓히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통하여 뜻을 정성스럽게 가지며[誠意],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正心]. 대학에 나오는 이러한 개념은 바로 마음 공부, 수양 공부를 의미한다. 마음을 바로 하는 공부를 한 뒤에야 실질적인 효과가 나오고 비로소 학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율곡이 선조 2년, 즉 1569년에 임금을 앞에 두고 이렇게 대통령학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던 것은 어떤 배경 때문이었을까?

율곡은 당시 34세였다. 그는 1564년(명종 19)에 문과에 급제한 뒤, 호조좌랑으로 임명되고, 곧이어 예조좌랑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 때 그는 왕실의 외척 윤원형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비행을 일삼던 승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해에는 횡포를 일삼던 재상 심통원을 탄핵하여 관직에서 쫓아냈다. 1568년에는 명나라 사신을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동행하였으며, 그 다음해 1569년에 귀국한 뒤에는 홍문관의 부교리, 교리로 승진되었다. 그와 동시에 춘추관기사관을 겸임하였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율곡은 당시 임금의 경연에 참석하고 임금을 가르치며, 임금과 관료들의 잘못을 살펴서 바로잡는 직책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거침없는 충고와 가르침을 펼 수 있었던 것이다.

임금은 왜 수양 공부를 해야 하는가? 율곡은 임금에게 계속 이렇게 말했다.

“필부는 집에 있으므로 아무리 학문의 공이 있다 해도 그 효과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지만, 임금은 그렇지 않아 마음과 뜻에 축적된 것이 정사(政事)에 발휘되는 까닭에 그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재 민생은 궁핍하고 풍속은 경박하며 기강은 무너지고 관리들의 기풍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몇 해가 되는데도 다스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전하의 격물·치지·성의·정심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이런 풍조가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날로 더욱 퇴패(頹敗)해진다면 나라 모양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름 없는 필부, 즉 일반 시민은 영향력이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그가 결정한 일들이 한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기 힘들지만 임금의 결정은 그렇지 않다. 임금의 마음 씀에 따라서 수천만, 수억의 인구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피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임금의 한마디 말에 따라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은 잡다한 지식을 쌓기 전에 먼저 마음의 수양공부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그 밑의 신하들이 그것을 따라 정치가 잘 이루어지고, 백성들은 당연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율곡은 당시 풍조가 경박하고 기강이 무너진 것은 결국 임금인 선조의 수양 공부가 부족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지극히 유학자다운 판단이었다. 율곡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전하께서는 크게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분발하시어 도학(道學)에 마음을 두시고 선정(善政)을 강구하시어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임금이 장차 삼대(三代)의 도를 흥기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십시오. 그런 뒤에 모든 신하들의 선악을 자세히 살피시어 충군 애국하는 자들을 가려 그들과 함께 일을 하시고, 아무 뜻도 없이 평범하게 국록만 탐하는 자들은 큰 직책에 있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인사의 타당함을 얻고 인물과 자리가 서로 걸맞게 된다면, 경세제민(經世濟民)하는 선비들 중 세상에 소용이 되는 자가 반드시 나와 나라의 일이 제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도학’에 마음을 두라는 것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이며, ‘삼대’의 도(道)를 흥기시키자는 것은 중국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좋은 정치와 제도를 조선에서 다시 부흥시키자는 것이다. 요즘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다소 편협한 제안일 수 있으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전인 전통사회에서는 유교를 중시하는 지식인으로서 당연한 제안이었다.

이날 기록의 마지막 부분에 율곡은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제안하였다.

“이제 전하께서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시어 일상의 언행을 순수하게 하시고, 한결같이 올바르게 하여 신하와 백성들의 모범이 되신다면, 군자(君子)들은 믿는 바가 있게 되어 충성을 다해 보좌할 것이며, 소인들 역시 임금의 마음을 사사로이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반드시 허물을 고치고 선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임금의 마음이 바르게 되면 나라가 안정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맹자⌋(「이루상편」)에

“군주가 어질면 모든 일처리가 어질지 않음이 없고, 군주가 의로우면 모든 일이 의롭지 않음이 없고, 군주가 바르면 모든 일이 바르지 않음이 없다. 군주의 마음이 바르게 되면 나라가 안정된다.”

고 하였다. 율곡은 그 문구를 이용해 임금이 항상 몸가짐과 생각을 바르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삼권분립의 정신을 바탕으로 정치가 행해지는 지금과 달리, 율곡이 살았던 전통시대에는 임금의 역할이 막중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정신 자세가 매우 중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반드시 대통령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부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04>

정치가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치에 뜻을 둔 사람들은 대개 ‘학력’ 관리에 힘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학력 관리가 아니라 ‘학교 간판’ 관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여 좋은 학연을 만들려고 한다. 그것이 동문들의 표를 얻을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고, 또 투표자들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과시할 수 있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가는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569년 선조 2년 때의 이야기다.

율곡은 당시 34세로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였다. 홍문관은 성종 때(1470년) 설치된 기관으로 집현전의 성격을 계승한 것이다. 업무는 주로 문서에 관련된 일을 하였는데, 간언(諫言)의 임무도 있었다. 간언이란 임금이 국정을 행할 때 잘못 판단을 하거나 국가대사를 추진하는데 문제가 있을 경우 그 잘못을 지적하고, 직언을 하는 것이다.

8월 16일(음력), 율곡은 왕에게 맹자를 강의하였다. 왕조실록 기사 「홍문관 교리 이이(李珥, 율곡)가 맹자를 강의하고 인심(人心)의 진작과 성학(聖學)의 정진을 말하다」라는 기록의 이야기다. 인심이란 요즘으로 말하자면 ‘민심’이며, ‘성학’이란 대통령의 수양 공부다. 율곡은 맹자 문장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각 시대마다 각기 숭상한 바가 있었습니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숭상한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있었습니다. 전쟁에 이기고 공략하여 탈취하는 데 그쳤습니다. 서한(西漢) 때는 순박함을 중시하고, 동한(東漢) 때는 절의(節義)를, 서진(西晉) 즉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청담(淸談)을 중시했습니다.”

 

중국의 전국시대는 주나라 때로 동주(東周)의 후반에 속한 시기다. 전반기는 춘추(春秋)시대라고 불린다. 공자가 살았던 때는 춘추시대 말엽이며, 맹자가 살았던 때는 전국시대 초기다. 전국시대는 특히 약육강식의 시대로 상하의 관계가 흐트러지고 힘 있는 자가 득세하는 시기였다. 율곡은 ‘부국강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력하게 만들어 전쟁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율곡의 설명에 따르면, ‘부국강병’의 정책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단지 전쟁에 이기고 남을 공격하고 탈취하는 일을 중시할 뿐이다. 그는 한나라 때는 순박함이나 절의를 중시하였다고 하면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청담사상을 중시하였음을 지적한 뒤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된 사람은 백성들이 중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그 것이 잘못되었으면 마땅히 그 폐단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권력과 세력을 가진 간사한 신하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그 뒤를 이어서 관리들의 기상이 쇠약해지고 나태해져 한갓 녹(祿)을 받아먹고 자기 한 몸 살찌울 줄만 알지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설령 한두 사람 뜻을 가진 이가 있어도 모두 속된 시류에 휩쓸려 감히 기력을 발휘하여 국세를 진작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태가 이러하니 임금께서는 마땅히 크게 일을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가지시고 관리들의 기풍을 진작시켜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잘못된 시류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율곡이 중국 고대의 역사, 엄밀히 말하면 문화사를 언급하면서 이런 말은 한 것은 정치 지도자는 백성들에게 이상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고, 시류를 파악하고, 백성들과 관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정치지도자 스스로의 ‘공부’를 통해서만 그런 것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율곡은 “국세를 진작시키라”, “임금이 마땅히 일을 크게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가져라”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미래에 대한 비전의 제시다.

젊은 나이의 율곡은 당시 선조 2년의 시류와 세태에 대해서 몹시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특히 권세를 가진 관료들이 나태하고 대의를 보지 못하며 사적인 이익 추구에 몰두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원문에서 ‘사기(士氣)’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를 ‘선비의 기풍’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관리들의 기풍’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당시 율곡이 비판하고 있는 점은 국정과 관련된 잘못이지, 초야에서 글을 읽는 선비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어서 율곡은 맹자의 공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임금의 책임을 언급하였다.

 

“옛날에 맹자는 필부의 힘으로 단지 언어(言語)로 사람들을 가르쳤는데도 사악한 논의를 종식시키고 바른 도(道)를 넓히어 우(禹)임금과 같은 공을 이루었습니다. 임금께서는 백성을 다스릴 책임을 맡고 있으니 이 도로써 제대로 백성들을 가르치기만 하면 후세에 교화를 드리울 뿐만 아니라 당대에 교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니 그 공이 어찌 맹자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잘못된 일에 빠져들어 홍수의 재해와 양묵(楊墨)의 피해보다 심하니, 임금께서는 다만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교화를 세상에 널리 펴시어, 군주의 책임을 다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율곡이 맹자를 예로 든 것은 당시 강연에 사용한 책자가 맹자였기 때문이다. 맹자는 권력도 없었고, 임금의 위치에 있지도 않았으나 글을 쓰고 가르침을 통하여 큰 공을 이룩하였다고 보고 임금이 된 지 2년차인 선조에게 맹자의 가르침을 받들고 따르면 어찌 그보다 못하겠는가하고 분발을 촉구하였다.

맹자에도 언급되어 있는 ‘양묵’의 피해란 양주(楊朱)와 묵가의 피해를 말한다. ⌈맹자⌋ (「진심장구」)에 이런 말이 있다.

“양주는 ‘나를 위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나의 한 오라기 털을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에 묵자는 겸애(兼愛)를 주장하여 머리에서 발꿈치까지 모든 털이 다 닮아 없어지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고 한다.”

어느 주장이나 그것은 세상에 피해를 주는 것이다. 그 출발은 임금이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교화를 세상에 널리 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교화’란 어떤 의미일까? 당시 율곡은 유학자의 입장에서 공자가 설파한 인의(仁義)의 가르침만이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의미한 ‘교화’는 공맹의 사상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말로 이러한 ‘교화’의 뜻을 바꿔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비전을 정치 지도자가 제시하고, 그것을 일반 시민들과 공유해나가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가 그런 것을 할 수 있으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율곡과 과거시험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3>

율곡과 과거시험

 

율곡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즉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한 사람’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한차례 과거에 합격하기도 어려운 데 아홉 번이나 과거에 합격했다는 것은 율곡이 그만큼 열심히 유교 공부를 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시자 파주 자운산에 있는 어머니 묘소 옆에서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율곡에게는 이 시기가 조용히 학문에 침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묘살이를 끝내고 그는 갑자기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불교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였지만 환속하여 과거시험에 도전하여 잇달아 장원 급제를 하였다.

율곡은 이미 1548년, 13세 때 진사 초시에서 장원 급제를 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1556년 21세 때, 한성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1558년 23세 때 행해진 별시(別試)에서는 「천도책(天道策)」이라는 문장으로 장원하고, 그 뒤에 있었던 생원진사시(1564년)에 합격하고, 다시 한달 뒤에 시행된 명경시(明經試)에 급제하였다.

이러한 장원 급제를 발판으로 그는 곧 호조좌랑, 예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거쳐서 홍문관 부교리, 춘추관 기사관, 홍문관 교리, 청주 목사,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아홉 차례나 과거에 급제하였던 성과가 그의 화려한 관직생활의 배경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공무원 시험이었던 과거시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시험은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는데 문과는 3년마다 치르는 식년시와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별시, 알성시 등 시험이 있었다. 시험 단계별로는 먼저 초시를 보고, 거기에 합격하면 복시를 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전에 들어가 왕 앞에서 보는 전시가 있었다. 복시에서는 33명을 뽑았는데 전시에서 그 순위를 결정하였다.

중종 32년, 즉 율곡이 탄생한 다음해인 1537년에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의 관리들이 문장을 중시하고 궁궐이나 관청에서 문헌을 매우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감탄하면서 조선의 관리들은 도대체 어떤 단계를 거쳐 선발되는지 몹시 궁금해 하였다. 마침 경복궁을 방문하여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중종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명나라 사신 : 저희들이 외람하게 천은을 입어 조서를 받들고 문헌(文獻)의 나라에 와서, 예의와 제도가 모두 갖추어져 참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껏 보고 매우 탄복했습니다. 한 가지 일을 묻겠습니다. 귀국에서는 관리를 뽑는데 어떤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까?

조선의 임금 : 향시(鄕試)는 인·신·사·해(寅申巳亥)의 해에 시행하고 회시(會試)는 자·오·묘·유(子午卯酉)의 해에 시행합니다.

명나라 사신 : 인원수는 몇 명이나 됩니까?

조선의 임금 : 회시에서는 33명을 뽑습니다.

명나라 사신 : 과거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까?

조선의 임금 : 있습니다.

명나라 사신 : 그렇다면 그 기록을 한 번 보았으면 합니다.

조선의 임금 : 그렇게 하시지요.

 

율곡이 과거시험에 여러 차례 장원을 한 성과를 보면 그런 일이 너무도 쉬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이었다. 조선시대에 보통 양반집 자제들은 5살 정도가 되는 때부터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서당이나 자기 집에서 천자문 공부를 하고, 동몽선습과 같은 초급용 학습교재를 사용하여 한문 읽기와 쓰기 기초를 세웠다.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도 나중에는 중요한 초급 학습교재로 활용되었다.

기초과정을 마치면 아이들은 그 뒤에 유교경전인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 삼경(三經, 시경·서경·역경)을 교과서로 삼아 철저한 경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과거 시험의 기본텍스트가 바로 사서삼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뒤 보통은 20년에서 30여년 간을 그러한 공부에 매진한 뒤에 비로소 과거합격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합격자들은 유학의 경학공부와 함께 한문으로 시문과 문장을 짓는 능력을 배양하게 되고, 국가가 현재 처해 있는 중요한 일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잘 정리하여 어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시험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당시 현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책문(策文) 시험이 있었다. 율곡이 별시에서 장원할 때 지었던 「천도책」은 바로 그러한 시험의 답안이었다.

결국 과거에 합격한 조선의 관리들은 사서삼경의 문장을 거의 완벽하게 외우고, 한문 고전의 멋진 글귀들을 활용하여 자신의 문장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알았으며, 국가의 시급한 과제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식견을 갖춘 인재였다. 사서 삼경은 특히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읽고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하는 인문학적 철학사상을 기본 소양으로 갖춘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왜 이러한 지식인들을 관리로 채용하였을까? 우선은 당시 외교나 국방과 같이 국가적인 대사를 추진하기 위해서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한문과 한자에 대한 소양이 필요했다. 국가의 중요한 기록이나 문헌이 모두 한자와 한문으로 되어 있었고,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했던 중국이 그러한 문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성리학적인 이유를 들 수 있는데, 그것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의 성품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공평무사하여야 하는데, 장기적으로 성리학 공부를 하고 수양을 한 지식인은 그러한 품성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불교나 도교를 공부한 사람들 보다는 주자학에 기초한 유학 공부를 한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데 더 적합할 것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 경전을 중요 교과서로 삼고 그것을 과거시험으로 테스트한 것이다.

서유본(徐有本, 1762년∼1822년)


 

서유본(徐有本, 1762년∼1822년)                      PDF Download

 

유본(徐有本, 1762년∼1822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실학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서학과 북학에 정통한 유련(柳璉), 서형수(徐瀅修) 등에게 배웠다. 영조, 정조시대에 대대로 고관을 지낸, 소위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북경에서 전해지던 고증학, 천문학, 기하학, 역학(曆學), 상수학(象數學), 율려학(律呂學) 등 실용적인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정조에서 순조로 왕권이 넘어가는 시기에 집안이 몰락하면서 관직을 떠난 그는 부인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 동생 서유구의『임원경제지』가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새로운 학문을 모색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1762년(1세,영조38년) 2월 6일, 조선후기의 명문 가문인 서씨 집안 서호수(徐浩修, 1736~1799)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혼원(混原), 호는 좌소산인(左蘇山人)이다. 선조 임금의 사위 서경주(徐景주, 1579∼1643)와 목사 서정리(徐正履)가 그의 먼 조상이다. 그 뒤 숙종때에 이르러,  조상서 종태(徐宗泰)가 영의정으로 있었을때는,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이
나 될 정도로 위세를 떨친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서종옥(徐宗玉, 1688∼1745)은 1725년(영조1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이조좌랑, 대사성, 세자시강원보덕, 황해도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등을역임했다.

서종옥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네 아들은 차례로 서명익(徐命翼), 서명응(徐命膺), 서명선(徐命善), 서명성(徐命誠)이다. 서명익의 호적상의 손자가 서유본이다 . 서명익은 아들이 없이 일찍 죽어서 서명응의 둘째 아들 서호수가 서명익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서유본에게 사실상 친 할아버지는 서명응이다.
호적상 둘째 작은 할아버지가 되는 서명응(1716∼1787)은 영조때, 대사헌, 황해도관찰사, 수군절도사,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또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1728년~1791년)은 정조가 등극하는데 공헌을 한 공신으로 정조 재위 초기에 삼정승을 거친 인물이다.  1763년증광문과에 을과 급제하여,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헌,승지등을 역임하고 선조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등 요직을 두루거쳤다.
아버지 서호수(徐浩修)는 1764년 칠석제(七夕製)에 장원하고, 급제한 뒤, 홍문관 부교리, 도승지(都承旨), 대사성, 대사헌, 규장각직제학, 이조·형조·병조·예조 등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학문으로는 당시 서학이라 불리던 천문학과 수학, 기하학에 정통했다.
서유본의 작은 아버지 되는 서형수(徐瀅修)는 1783년(정조7) 증광문과에을과로급제한뒤, 광주목사, 청나라사은부사, 이조참판, 경기관찰사등을역임하였다.
당시 중국 청나라에서 전해진 고증학과 경학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규장각 편찬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나중에 18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조카인 서유본은 그에게서 글을 배우는 등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63년(2세,영조39년)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이해에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임명되었다. 영조 임금은 그의 부친(서종옥)을 추모하여 그 다음날 교리로 특별 승진을 시켰다.  둘째 작은 아버지 서명응은 이해에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 판의금,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1735합격,  1751년에 호조좌랑, 의흥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며, 1754년에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병조좌랑, 정언, 함경도 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대사간, 승지,부제학, 이조참의,황해 감사 등을 거쳤다.

1764년(3세,영조40년) 동생 서유구(徐有榘)가 태어났다. 아버지 서호수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는데,  맨 위 장남이 서유본이고 그 다음이 서유구다.  서유구(1764년∼1845년)는 나중에 출세하여 이조판서, 대제학까지 올랐는데,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지은 실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은 이해에 대사헌, 한성 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은 홍문관 관원들이 올린 상소문으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부에 유배되었다.  하지만곧 풀려나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이해에 아버지 서호수가 칠석제에서 장원을 하였다.

1765년(4세,영조41년) 아버지 서호수가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를하였다.  곧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되었으나 남해에 유배되었다.  하지만 다음해에 홍문관 부교리로 특채 되었다.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대사헌, 부제학, 도승지등에 임명되었다.

1767년(6세,영조43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예조참판,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다.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을 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갑산 부사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다음해에 다시 예조참판으로 복귀하였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에 부교리, 승지를 역임하였다.

1769년(8세,영조45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형조참판, 청나라 사신 동지정사, 한성 판윤, 홍문 관제학, 형조 판서등을 역임했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잠시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 되었는데, 곧 이어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헌, 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이 되었다.

1773년(12세,영조49년) 이해 부인을 맞이했다. 부인은 대대로 명망이 높은 소론가 문인 이씨 집안 이창수(李昌洙)의 딸이다.  둘째 할아버지 서명응이 추진한 결혼이었다.  할아버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버지 이창수를 따라 ⌈소학 ⌋과 ⌈시경 ⌋을 읽고 총명한 이씨의 딸을 손자 며느리로 삼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유본보다 3살 많은 부인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년∼1824년)는나중에조선에서 유일한실 학자이자 경제학자로 이름이 알려진다.  그녀는 시집와서 7살 된 시동생 서유구를 직접가르쳤다.  장모, 즉빙허각의 어머니는 유씨(柳氏)인데,  유씨 집안 역시 실학과 고증학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이었다.  빙허각 이씨는 서유본과 사이에 4남 7녀를 두었으나 3남 5녀를 일찍 잃었다. 서유본은 그녀의 학문적인 재능을 인정해 주었고 평생을 학문적인 동지로 지냈다.

1775년(14세,영조51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전년에 파직 되었다가 이해 10월에 병조판서로 복귀하였다.  11월에 이조 판서가되었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세손(정조)을 핍박하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홍인한(洪麟漢) 등 일파를 탄핵하였다.  덕분에 세손의 대리청정이 시행되었는데,  정권을 잡은 세손에 의해 서명선은 공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76년(15세, 정조즉위년)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평안감사, 규장각 제학에 임명되었다.  정조 즉위의 일등공신이 된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은 임금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수어사(守禦使), 총융사(摠戎使)를 겸임하고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또 우참찬,  판돈녕부사등을 역임했다.  아버지 서호수가 도승지에 임명되어, 임금의 측근이되었다.  진귀한 책들과 북학과 관련된 소식을 전했다.  서호수는 1770년에 ⌈동국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하였는데 , 규장각 직제학에 임명되어 규장각의 여러 편찬사업을 주도하였으며,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의 기초가 되는 ⌈어제춘저록(御製春邸錄) ⌋의 간행을 주관했다. 후에 이조, 형조, 병조,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임금의 은밀한 부탁으로 청나라 서적의 수입을 추진하였으며,  청나라 사신을 다녀오면서 ⌈연행기(燕行紀) ⌋를 지었다.

1777년(16세, 정조1년)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좌의정,  그 다음해에는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779년(18세, 정조3년) 모친상을 당하였다.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영의정에 올랐다.  인정받은 그는1780년에 일시적으로 한직에 물러났다가 곧바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고,  1783년에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동생 서유구는 용주(蓉州, 지금의 용산 혹은 마포 부근)에서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을 모시고 농학서 ‘본사(本史)’ 의 집필을 도왔다.  동생은 이즈음부터 ‘풍석(楓石)’ 이란 호를 쓰고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 이란 서재를 만들었다.

1781년(20세, 정조5년) 서유본은 동생 서유구와 함께 작은 아버지 서형수의 지도를 받아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시작했다.  또 작은 아버지를 통해서 중국에서 유행하는 고증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등에서 사용하던 관각체(館閣體)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는데, 수준이 매우 높았다.  없으나 아버지와 친한 유금(柳琴,  1741년∼1788년)에게 학문을 배웠다. 유금은 아버지 서호수가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갈 때 막객(幕客)으로 따라 간 사람으로,  본명이 유련(柳璉)인데 가야금을 좋아하여 유금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사람이다.  그는 또 서유본의 둘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수학에 밝았으며, 천문학과 율력, 서화, 금석, 전각 등의고증학적인 분야에 일가견을 갖춘 학자 관료였다. 특히 당시 조선에 전해진 기하학을 좋아하여 기하실(幾何室)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1783년(22세, 정조7년) 작은 아버지 서형수(徐瀅修)가 이해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광주 목사와 영변부사 등에 임명되었다.  서유본은 이해에 처음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즈음 변려문(騈儷文) 공부에 힘썼다.  그는 나중에 의고문(擬古文), 팔가문(八家文) 등에 관심을 가지고 글공부를 하는데 모범으로 삼기도 하였다.
스승  박지원(朴趾源)은 이때 47세였는데, 1765년(29세)에 처음으로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서유본이 문장에 관심이 많을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 ⌈연암집 ⌋贈左蘇山人)를 지어 주고 훈계하였다.

“세상 사람들을 살펴보니, 남의 문장을 칭찬하는 자는 꼭 ‘문장은 양한(兩漢)이요, 시는 성당(盛唐)이요.’ 하더군.  비슷하다는 말은 이미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네.  한나라, 당나라가 어찌 또 있겠는가? 우리 나라 습속은 옛  말투를 즐겨,  촌스러운 그 문장을 당연하게 여기네.  듣는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이 없더군 .……  잔재주 따위는 우선 버리게.  조용히 내가 한 말을 들어보게.  그 마음이 아마도 너그러워질 것이네.…… 걸음을 배우려다가 도리어 기어 다니고 ,(서시西施의) 찌푸림을 흉내 내면 단지 추해질 뿐이네.  이제 알 것이네.  그린 계수나무는 생생한 오동나무만 못하다는 걸.  초(楚)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라도 결국은 남의 의관(衣冠)을 빌린 것이네.…… 제 속이 속된 줄은 생각 안하고, 아름다운 붓과 벼루만 애써 찾더군.  문장 짓는데,  육경의 글자로만 점철하는건,  마치 사당에 몸을 의탁한 쥐와 똑같네. 훈고(訓詁)의 어휘를 주워 모으면, 못난 선비들은 입이다 벙어리가 되지.……  여름철 농사꾼이 허술한 제차림은 잊고, 갑자기 갓끈과 허리띠로 겉치장 한셈이네.  바로 눈앞에 참된 흥취가 살아있는데,  하필이면 먼 옛 문장을 취하는가? 한나라 당나라는 지금 세상이 아닐 뿐더러, 우리 민요는 중국과 전혀 다르네.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들은 결코 모방하지 않겠지.  새 글자는 창조하기 어렵더라도,  자기 생각은 마땅히 다 풀어놓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옛 방식에만 구속당하여, 허겁지겁 붙잡고 매달리는가?  지금 시대가 천박하다고 생각지말게.  천년 뒤에는 당연히 고귀하게 여길 걸세.……  한창 젊을 적에 노력한다면,  문장으로 천하를 호령할 수  있을 것이네.”

이러한 조언을 받 은서유본은 “나는 지금 사람이니 지금 문장을 쓰겠다. 옛 것을 모방해봐야 무엇 하겠는가?” 라고 하며 자신이 그동안 즐겨 배웠던 옛 문장체를 버리고 새로운 각오로 자신의 학문을 모색했다.

1786년(25세, 정조10년) 동생 서유구가 생원시에 합격하다. 스승 박지원이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  이후 1789년에 평시 서주부(平市署主簿),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1791년에 한성 부판관, 1792년에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에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에 양양부사등을 역임하였다.

1787년(26세, 정조11년) 이해 12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이 사망하였다. 향년72세였다. 서명응은 정조시대 최고의 학자로 평가되는 인물로 규장각의 창설을 주도한 공이 컸다.  또 서씨 집안에 ‘농학’을 가학으로 전수했는데, 저술로 ⌈보만재총서⌋가 있다.

1790세(29세, 정조14년) 동생 서유구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분관(分館)에 취임하였다.  다음해 셋째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이 별세하였다. 향년64세였다.

1794년(33세, 정조18년) ⌈진주순난제신전(晋州殉難諸臣) ⌋을 집필하였다.  1592년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던 주요 인물13명, 부수적인 인물 20명,  모두 33명의 전기를 정리한 기록이다.  도입부를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호남과 영남의 경계가 나뉘는 곳에 진주는 중요한 요충지로 위치한다.  이는 병법에서 말하는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인 것이다. (중략)
바둑에서 한 점을 얻음으로써 전체 승부를 판가름하는 것과 같이 한성을 지킴으로써 천하의 안위가 달려있게 된다.  이것을 아는 자라야 비로소 병법을 더불어 말할 수 있다. 호남은 우리나라의 천부(天府)의 땅이고 나라의 근본이다. 임진년에 섬나라 도적들이 쳐들어와 봉홧불이 이르러 이 나라 수 천리를 돌고 잿더미가 된 속에서도 호남만이 무사했던 것은 진주 사람들이 길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1797년(36세, 정조21년) 동생 서유구가 순창(淳昌) 군수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서유본은 성균관시에서 지은 주문(奏文, 임금에게 아뢰는글)으로 정조 임금의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대 과에는 계속 낙방을 하였다.

1799년(38세, 정조23년) 1월,  부친 서호수(徐浩修)의 상을 당하였다. 그는 아버지 서명응이 전한‘농학’을 계승하여 조선시대 농학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해동농서⌋를 지었다. 이 책 은전8권으로 이루어졌는데, 농무(農務), 과류(瓜類), 채류(菜類), 과류(果類), 목류(木類), 초류(草類), 잠상(蠶桑), 복거(卜居), 목양(牧養), 조양(造釀),구황(救荒), 벽온(酸瘟), 치약(治藥), 단약(丹藥) 등으로 나누어 서술되었다.
서호수는 아들들에게 어느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재주가 없어 아마도 이 귀중한 책들은 뒷날 깨진 간장독을 바르는데 쓰게 될 것이다.”

서호수는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모은 서적들 중에는 천문, 역산(曆算), 음악, 기하학 등 특이한 분야의 서적이 많았는데,  자신의 네 아들 중에 그러한 자신 의학문을 이어줄 마땅한 자식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부친의 말은 서유본과 서유구, 그리고 서유본의 부인 빙허각에게 항상 경계의 말이 되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남긴 책들을 모두 읽고 그 바탕위에 생활에 꼭 필요한 지식의 백과사전을 만들어 내는 일이 그 이후 서씨 가문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1804년(43세,순조4년)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동생 서유구가 형조참의에 임명 되었다가 ⌈정조실록 ⌋의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생은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제학, 형조 판서,  전라도 관찰사, 호조판서, 병조판서,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1805년(44세,순조5년) 가을에 음보(蔭補, 조상의 덕으로 얻은 벼슬)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서유본으로서는 처음 갖게 된 관직이었다.  이해 스승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향년 69세로 사망하였다.  작은 아버지 서형수(徐瀅修)는 경기 관찰사가 되었다.

1806년(45세,순조6년) 이해에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서 벽파 계열인 우의정 김달순 등이사약을 받았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관직을 박탈당했다.  당시 할아버지들과 부친이 모두 돌아가신 상황에서 작은 아버지는 가문의 중심이었다.  그의 관직 박탈은 바로 가문의 몰락을 의미했다.  정조 임금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서씨 가문은 순조 시대로 접어들면서 차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는 이후 전라도 홍양현 등지에서 18년 동안이나 유배 생활을 하게되었다.  1817년에는 추자도에 유배되었으며, 나중에(1823년)  전라도 임피현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사망했다.
서형수는 조카들인 서유본과 서유구에게 큰 영향 을미쳤다.  그 는‘필유당(必有堂)’이란 서재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은 ‘자손 가운데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나올 것이라는 의미’ 였다. 서유본은 작은 아버지가 지은 필유당에 대해 필유당기(必有堂記) 에서 이렇게 썼다.

“대나무가 우거진곳의 서쪽에는 나무를 엮어 가리개를 만들고,  가리개 안쪽에는 땅을 정리하여 서재를 지었다.  조용하고 깨끗하여 마치  산 속에 있는 듯한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내 작은 아버지 서형수 선생께서는 그 안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서적을 비치해 놓으시고 자제들이 그 곳에 모여 학문을 익히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곳의 편액 을‘필유(必有)’라고 하였다.  옛날에 정기(丁覬)라는 사람이 만권의 책을구입하고는 ‘내 자손 중에 틀림없이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서재 이름을 이렇게 지은 뜻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해 서유본 역시 자신에게 닥쳐올 후환을 피하기 위해 사직했다.  서울 외곽 인동호 행정(지금의 용산)으로 내려가 아내 빙허각과 함께 차밭을 일구며 생활을 꾸려갔다.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독서와 저술에 힘썼다.  원래 높지 않은 관직생활 이었기 때문에 그는 벼슬이나 정치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릴 수 있었다.

한때는 또 전라도에 내려가 그곳에서 남의 집을 빌려 살면서 경학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사기 ⌋공부를 하거나 작은 아버지 서형수의 필유당(必有堂)에서 동생 서유구 등과 고문을 짓 는공부를 하기도하였다.  그리고 부친이 남긴 과업을 이어서 기하학과 역학(曆學), 상수학(象數學), 율려학(律呂學) 등을 5년여에 걸쳐 연구하였다.

부인 빙허각은 갑자기 궁핍해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밭일을 하면서 틈틈이 자신이 경험한 생활 지식과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실학 서적의 여러 내용을 종합하여 여성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정리했다.  당시  서유본의 집안에는 수많은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돌아가신 작은 할아버지 서명응의 서재죽 서재(竹西齋)의 책들, 서유본의 서재불 속재(不俗齋)에 보관된 책들, 또 시동생 서유구가 모은 태극실(太極室)의 책 등이 있었다.  가정 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 ⌋(1809년)는 그러한 환경을 배경으로 완성 되었는데,  그 외에도 빙허각이 당시 지은 글들이 ⌈빙허각시집 ⌋, ⌈청규박물지 ⌋등에 담겨있다.  빙허각은 ⌈합총서 ⌋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는 동호(東湖)의 행정에 살면서 집안에서 밥을 짓고 반찬 만드는 틈틈이 사랑에 나가 옛 글을 읽었다.  그 가운데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한 내용과 산야에 묻혀 있는 모든 글 들을 구해 보았다.  손길 닿는 대 로펼쳐보고 견문을 넓히고 또 무료함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총명함은 무딘 문장만 못하다.’라는 옛 사람의 말을 떠올렸다. 기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잊어 버렸을때 도움이 되겠는가? 그래서 모든 글을 보고 가장 중요한 말을 가려 뽑아 적고 혹시 따로 내 생각을 덧붙여 다섯 편의 글( ⌈규합총서 ⌋)을 지었다.”

남편 서유본이 또 이렇게 썼다.

“내 아내가 여러 책에서 뽑아 모아 각각 항목별로 나누었다.  시골의 살림살이에 요긴하지 않는 것이 없다. 더욱이 초목, 새, 짐승의 성미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다. 내가 그 책 이름을 지었는데 ⌈규합총서 ⌋라고 하였다.”

동생 서유구도 이해 1월 18일 상소문을 올려 홍문관 부제학의 자리에 서물러나 낙향하여 은둔하였다.  서유본과는 달리 고위관직에 오래 있었던 서유구는 그 만큼 더 신변의 위험을 느꼈으며 더욱 철저하게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후 터전을 옮겨다니며 20년 가까이 농사를 지으며 학문에 힘썼다.  그는 실학에 조예가 깊었고,  다양한 분야에 통달하여 문장도 잘 지었는데,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 ⌋, ⌈번계모여집(樊溪耄餘集)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을 저술하였다. ⌈임원경제지 ⌋는 113권 52책으로 백과 전서이며 생활과학 서적이다.  전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  특히 선비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기예와 취미 관련 지식을 모두 모았다. 16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800여종의 문헌을 참고하여 당시 알려진 생물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집대성한 거작이었다.

1810년(49세,순조10년) 이해 여름부터 주희가 지은『의례경전통해집전집주(儀禮經傳通解集傳集註)』를 공부하였다.  이후 9년간 그 책의 요점을 뽑아 『주례(周禮)』와 『예기(禮記)』를 부기한『삼례소지(三禮小識)』 6권을 만들어 1819년(순조19년)에 편찬하였다.  그는 주희를 본받아 『의례(儀禮)』를 매우 중시하였다.

1820년(59세,순조20년) 『주자가례』를 연구하였다.  주희가 주장한 내용을 초기와 후기로 나누어 정리한 다음에, 그 차이점을 검토하여 주자의 정론(定論)을 확정한 다음『가례소지(家禮小識)』 2권을 편찬했다.  이외에도 역사서를 읽기 위해서는 역대관제(官制)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관제연혁고(官制沿革考)』2권을 지었다.

1822년(61세,순조22년) 7월 14일에 갑자기 병을 얻어사망하였다.  동생 서유구가 묘지명( 백씨좌소산인묘지명伯氏左蘇山人墓誌銘)을 썼다.  부인 빙허각은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고,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을 씻지 않으며,  자리에 누워 19개월 만인 1824년 66세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 문집으로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 ⌋ 8권 4책이 있다. 문집에는 시문, 서간문, 애제문(哀祭文),  잠명문(箴銘文) 등 문장 외에도 상제론(喪祭論), ⌈독명사 교사지(讀明史郊祀志)⌋, ⌈진주순난제신전(晉州殉難諸臣傳)⌋, ⌈김인의영가전(金引儀泳家傳 )⌋(정조시대 대표적인 천문역산가天文曆算家 김영金泳 전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또 ⌈주자가례 ⌋, ⌈의례경전통해집전집주(儀禮經典通解集傳集注) ⌋등을 연구하여 ⌈삼례소지(三禮小識) ⌋ 6권과 ⌈가례소지(家禮小識) ⌋2권을 편찬하였다.

서유본은 관직에만 매달리지 않고 자유스럽게 자신이 하고자하는 공부를 추구했다.  청나라에서 전해진 북학이 조선 에알려지기 시작한 시대에 살면서 그는 새로운 학문의 수용에 열성이었고, 실용적인 생활의 지식을 모으고 집대성하는데 힘썼다.
그가 남긴 문장 중에는 조선후기 과학사의 연구에 중요한 것들이 적지 않다.  경학공부도, 실사구시적인 연구를 추구하였는데, 주희의 학설을 검토하여 옳고 그름을 분석하여 그 본 뜻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고증학적인 입장에서,  당시 사람들이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근거 없이 주희를 헐뜯고 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참고자료>
-박지원, ⌈ 贈左蘇山人⌋, ⌈연암집 ⌋
-심경호, ⌈서유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심경호, ⌈좌소산인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구만옥, ⌈서유본의학문관과자연학담론⌋, ⌈한국사연구⌋ 166,2014
-임유경, ⌈서유본의 <진주순난제신전(晋州殉難諸臣)>연구, <어문학> , 2004
-한민섭, ⌈조선후기가학의한국면- 서명응일가의문학을중심으로⌋, ⌈한국어문학국제학술포럼학술대회 ⌋, 2007.6

명나라 사신과 ⌈시경⌋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2

명나라 사신과 ⌈시경⌋

 

교 경전 중에 ⌈시경⌋이 있다. ‘시(詩)의 경전’이라는 뜻의 ⌈시경⌋은 ⌈예기⌋,⌈춘추⌋,⌈역경⌋, ⌈서경⌋과 함께 오경(五經) 중 하나로 꼽는다. 이는 중국 최초의 시가집 혹은 민요집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제자 교육용으로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당나라 때 ‘오경’에 포함되어 ⌈시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시경⌋은 원래 ⌈제시(齊詩)⌋,⌈노시(魯詩)⌋, ⌈한시(韓詩)⌋, ⌈모시(毛詩)⌋의 네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지만 ⌈모시⌋만 남고 모두 멸실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경⌋은 모시로 불리기도 한다. 주나라의 시(詩)라는 뜻에서 ⌈주시(周詩)⌋라고 불리기도 한다.

시경⌋에 실려 있는 시는 모두 311편인데 이중 6편은 제목만 있고 가사가 없다. 전체는 풍(風), 아(雅), 송(頌)의 노래로 분류되어 있는데 ‘풍’은 각지에서 수집된 민요로 사랑의 노래나 일을 하면서 하는 노래가 많다. ‘아’는 연회 때 사용된 노래 가사이며, ‘송’은 제사 지낼 때 사용된 노래 가사다. ‘아’와 ‘송’은 주 왕조를 찬양하는 노래가 많다. 이러한 ⌈시경⌋의 노래 가사를 통해서 우리는 주나라의 사회와 풍속, 나아가 그 시대의 정치와 사상,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노래가 이른 것으로는 서주시대, 즉 주나라 초기의 것도 있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시경⌋에 보이는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

(⌈논어⌋<위정>)

라고 하였는데, 시를 쓰고 읽는 마음에는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의 고대 때부터 외교 현장에서는 적절한 ⌈시경⌋의 글귀를 사용한 외교적 교류가 적지 않았다. 율곡의 생존시대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현장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보인다.

1537년 중종 32년, 율곡이 태어난 다음 해의 이야기다. 중종(中宗, 1488-1544)은 연산군의 뒤를 이어 반정으로 임금이 된 왕이다.

그해 3월,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파견되어 궁중에 들어왔다. 3월 10일(음력)에 왕이 경복궁의 태평관에서 하마연을 베풀어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하였다. 이 때 중종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경(詩經)⌋에 ‘즐겁구나, 우리 님은. 나라의 빛이로다[樂只君子, 邦家之光]’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대인 같은 훌륭한 분을 모셨는데 만일 어질고 지혜로우신 명나라 황제의 고마우신 분부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뵙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명나라 황상의 은덕이 망극합니다.”

라고 하였다.

당시 환영 만찬에서는 우리나라 전통의 토속악이 배경 음악으로 흐르고 있었다. 원래 중중이 인용한 ⌈시경⌋의 「남산유대(南山有臺)」는 중국 고대에 손님을 접대하는 연회에서 자주 사용되던 노래였다. 그 시경의 구절을 이용하여 중국측 사신들에게 조선의 문화적 수준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명나라 사신들을 이미 조선의 예법이 섬세하고 수준이 높다는 점을 인식하고 조선의 국왕에게 이미 다음과 같이 감탄의 인사를 한차례 전한 차였다.

“저희들이 처음 명나라 조정을 떠나올 적에 어찌 귀국의 예의가 이와 같이 아름다울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곳에 와서 보니 온 각지의 고을 관원들은 일마다 예를 다하여 온갖 법도가 참신하였으니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사신의 한사람인 부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국왕께서 신민들을 잘 가르쳐 하는 일이 모두 법도에 들어맞으니 대단히 감탄스럽습니다.”

 

외국 사신에 대하여 ‘예의가 아름답다’거나 ‘예를 다한다’는 개념은, 국가 간에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현대적인 외교 관례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당시의 국제질서 아래에서는 격식을 잘 갖춘 외교적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국왕의 ⌈시경⌋ 글귀를 전해들은 명나라 사신의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께서 대국을 섬기는 정성이 이러하시니 이는 반드시 황천(皇天)이 도와주어 우리 대명(大明)과 기쁘고 슬픈 일을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만세토록 무한한 복입니다.”

이어서 명나라 부사(副使) 역시 시경의 문구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경⌋에 ‘울타리가 되시고 담 기둥이 되시니, 모든 제후들이 본받으시네.[立屛之翰, 百辟爲憲]’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전하의 위엄과 권위를 직접 뵙고 보니 참으로 훌륭한 임금이십니다.”

중국의 천자를 지극한 마음으로 섬기는 조선의 국왕의 모습이 다른 모든 제후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는 말은 요즘의 국가 관념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측면도 있지만, 천하주의적이며 중화주의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살았던 전통시대에는 자연스러운 외교적 수사로 이해할 수 있다.

명나라 사신이 인용한 ⌈시경⌋의 문구 바로 뒤에는 ‘굽은 쇠 뿔잔에 맛있는 술을 부어 올린다.’라는 문장이 이어지고 있어 당시 술을 주고받는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워주는 의미도 있었다. 연회가 끝나는 순간에는 또 ⌈시경⌋의 문구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갔다.

 

임금: “흐뭇한 술자리가 밤에 벌어졌으니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명나라 사신 :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

임금: “내게 맛있는 술 있어 좋은 손님 잔치하며 즐기시네…마음으로 사랑하거늘 어찌 말하지 않으리. 마음속에 품고 있거늘 어찌 하루라도 그대를 잊으리.”

 

외교적인 수사가 가득 담긴 ⌈시경⌋의 문구를 적절히 사용하여 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즐겁게 만드는 광경이다. 당시는 ⌈시경⌋ 속에 들어있는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또 그것을 한자도 틀림없이 외우고 있어야 국제적인 교류가 가능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조선시대의 궁중에서 유교 경전의 위상이 어찌하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달환(1851~1938)


문달환(1851~1938)                                                PDF Download

 

문달환(1911년, 채용신그림)
문달환(1911년, 채용신그림)
달환(1851~1938)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의 제자이다.  그는 스승이 1906년 태인에서 을사조약에 항의하여 의병을 일으키자 지원하여 종군하였으며,순창에서 관군들과 대치하였을 때 마지막까지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체포된 뒤 일본군사령부에서 가혹한 고문으로 다리가 불편해진 그는 석방된 뒤에 귀향하여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1851년(1세, 철종2년)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부곡리(富谷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는 덕경(德卿), 호는 둔재(遯齋)이다.  심암(心庵)  문봉후(文鳳休)의 아들이며,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의 제자다.

1880년(30세, 고종17년) 이즈음에 화순(和順)  한천면 모산리에 거주하다 부곡리(富谷里) 부춘동 마을로 옮겨 살았다.  화순군지에 따르면 그는 “기상(氣像)이 준엄(峻嚴)하고 기개가 강개(慷慨)하여 영웅열(英雄烈士)의 전기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05년(55세, 광무9년) 매국노 이완용 등이 어전회의에서 고종을 협박하여 일본과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 강탈 당했다.  당시 스승  최익현은 각 지방의 유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고위 관료들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1906년(56세, 광무10년) 최익현이 6월에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태인에는 임병찬(林炳瓚)이 살고 있었다.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개설하고 유생들을 모았는데,  문달환은 이때 참여 하였다.
의병들은 약 80여명이 대오를 짜서 태인 본읍으로 진군하였다.  군수는 저항을 못하고 도망쳤으며,  의병들은 무혈로 태인을 점령하였다. 그곳에서 무기를 접수하고 의병을 모아 다시 30여리를 행군하여 정읍으로 진격하였다.  정읍에서 관군과 대결하여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다시 내장사(內藏寺)와  구암사(龜岩寺)로 가 그곳을 점령하였다.  다음날 순창으로 진군하여 순창 군수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전주와 남원에 있던 관병이,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순창 군수이건용(李建鎔)의 지휘 하에 일제히 공격해왔다.  조선 사람들끼리의 전투를 피하려고 하였던 의병들은 저항하지 않고 전장을 피하거나 최익현 주변에 남아 체포되었다.  마지막까지 최익현과 함께한 의병들은 문달환,  임병찬(林炳瓚) 등을 포함하여 12명이었다.  이 12명은 순창 12의사로 불린다.

6월 말에 체포된 의병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 사령부에 감금당해 심문을 받고 재판결과, 문달환은 태형 100대에 처해졌다.  약2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8월에 석방되었다.  당시 가혹한 고문으로 문달환은다리가 불편해졌다.  그의 병오일기丙午日記) 에는 이해 1월 16일부터 7월 7일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8월 하순에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대마도에서 최익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글공부 하는사람은 나라를 방위할 책임도 없고,  80이란 나이는 종군할 때도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상한 시기를 당하여 위로는 조정에서 아래로는 농촌에 이르기까지 벙어리ㆍ장님ㆍ앉은뱅이를 제외하고 모두가 말하기를, ‘제 집안에만 숨어있고 나랏일을 모르는척 하는 사람은 결코 인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한다.  내가 저지른 죄로 여러분에게 화가 미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미
안한 마음이 적지않다.  글자의 고상함이나 시의 품격을 보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그 사실만을 서술하여 각자에게 오언 절구1절을 주니, 뒷날에 참고 하거라.”

최익현은 13명의 제자들에게 오언절구 1절씩을 주었는데 문달환 에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절구를 주었다.

재난의 그물에서도 이미 벗어났고
(禍網尙可脫)
병세가 좋아진 것은 신이 도운 것같네.
(損疾神佑然)
나는 알겠네,  자네가 고향에 가는날
(深知還鄕日)
맨 먼저 조상의 묘에 절하겠지.
(藉手拜先阡)

제자가 자신 때문에 온갖 고초를 당하고 다리를 다친 것을 미안해 하면서 그러한 아픔이 어느 정도 아문 것을 기뻐하는 모습이 표현되어있다.  그리고 제자의 마음이 되어 고향인 화순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마치 자신도 같이 따라나서는 듯이 노래한 것이다.  최익현 자신은 이해 겨울 일본측의 온갖 협박과 회유를 뿌리 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1907년(57세, 광무11년) 1월 1일, 스승 최익현이 옥중에서 단식으로 순절하였다. 화순에서 부산까지 나가 스승의 영구(靈柩)를 모셔와 청양에 안장하였다.  귀향 한 뒤에는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1909년(59세, 융희2년)에 이완용이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사법권을 일본제국에 넘겼다.  그 이듬해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1911년(61세, 일제시대)에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와서 전신 초상화 2점과 반신 초상화1점을 그려주었다.  채용신은 궁정에서 역대왕들의 어진과 고종의 어진을 그린 유명한 초상화가로, 1906년에 충청남도 정산군 군수직을 사직하고 전라도로 낙향해 있었다.

1914년까지그는 여러 지역을 떠돌아 다니면서 항일투쟁을 하였던 사람들이나 우국지사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이때 그린 문달환의 초상화는 현재 화순군 춘양면 부곡리249번지에 있는 춘산사(春山祠)에 보관되어있는데, 2011년에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제314호로 지정되었다.

1927년(77세) 제자들에 의해서 춘산사(春山祠)가 건립되었다. 나중에 부춘사(富春祠), 부춘정사(富春精舍)라고 불린 이곳은 1937년에훼손되었다가 1945년에 다시 복구되었으며 춘산사로 개칭되었다. 정식명칭은 ‘충의영당및춘산사’이다.  춘산사가 지어진 때 감회를 문달환은 이렇게노래했다. ( ⌈둔재집 ⌋寄富春齋講所)

산속에서 당을 만들고 규약을 정했다는 말을 들으니
(比聞山塾講規成)
의리를 살피고,  글 공부하는 일을 가볍게 할수 없겠네.
(硏義攻文自不輕)
그곳은 천리와  인륜을 밝히는 진실한 곳이니,
(天理人倫眞實地)
공자와  주자의 지극한 뜻이 책속에서 밝아지네
(孔朱至意卷中明)

부춘정사(富春精舍)는 문달환이 만년에 제자들을 양성하고 자신의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아울러 화순 지역 문인들이 조용히 수양하면서 서로 소통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는데,  문달환은 또 이런 시를 지었다.

조그맣고 깨끗한 오두막이 푸른산 가까이 있네.
(弊廬瀟灑近靑山)
책을 보며 이곳에서 살기가 딱좋겠구나.
(祗合看書住此間)
나라 위한 영웅들은 모두 백발이 되었지만,
(公道英雄皆白髮)
좋은 시절 그 뜻은 붉은 얼굴에 남아 있네.
(好時志業在紅顔)

1938년(88세)에 사망했다.  문집으로 ⌈둔재집(遯齋集) ⌋8권이 있으며, 화순군 능주의 춘산사에 최익현 등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1990년,  그의 공훈을 기리어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자료>
⌈면암집(勉菴集) ⌋
문달환,<독립유공자공훈록>, 국가보훈처(http://www.mpva.go.kr)
오인교, 南道정자기행(1807)-화순부춘정사(富春精舍),<한국매일>, 2014.12.18
유치석, 문달환(文達煥),<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화순문달환 초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사기록보다 ⌈논어⌋를 중시한 이언적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

역사기록보다 ⌈논어⌋를 중시한 이언적

 

곡(1536-1584)이 외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나 아직 어머니 신사임당 품속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중종 33년 (1538)년 1월 21일, 율곡이 세 살되던 때인 당시 임금은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이었는데, 조정에서 임금이 신하들과 유교 경전을 읽고 있었다. 이 때 임금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이언적(李彦迪)이 왕세자의 교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을 끄집어냈다.

“조정의 잘잘못을 아뢰려고 하지만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의 급선무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세자를 잘 보호하고 가르치는 것이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세자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예민(銳敏)하여 학문이 통달(通達)하였으니, 종묘·사직과 백성들의 복(福)입니다.”

당시 세자는 중종의 장남으로 나중에 12대 국왕이 되는 인종이다. 인종은 1544년에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병으로 8개월 만에 승하한 불운의 왕이었다. 이언적이 세자의 자질이 총명하고 학문이 훌륭하여 종묘·사직의 복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종묘·사직이란 국가라는 뜻이다. 종묘란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신 사당이며,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말하는데, 둘을 합쳐서 ‘국가’, 즉 조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했다.

이언적은 이날 임금의 교육을 맡은 ‘시강관(侍講官)’으로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독(講讀)하고 있었다. 시강관이란 임금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문관을 말한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란 중국 명나라의 학자 구준(邱濬)이 1487년에 ⌈대학연의(大學衍義)⌋라는 책을 보충하여 지은 서적으로, 유교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의 여덟 조목 가운데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일)에 중점을 두어 논한 책이다.

이언적(1491년-1553년)은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는데, 151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1539년에는 전주부윤을 역임한 적도 있는 유학자였다. 그는 특히 주자가례에 정통하였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퇴계 이황의 학문에 큰 영향을 준 학자로 유명하다. 이날 임금을 가르치는 경연(經筵)은 그가 전주부윤에 나가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세자를 보호하고 기르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배움에는 근간이 되는 부분과 지엽적인 부분, 즉 아주 중요한 것과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앞선 성현(성인과 현자, 즉 지혜로운 자)들이 남긴 경전(經傳)을 반복해서 깊이 생각하고 성리(性理)를 연구하는 것이 근본적이며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역사 기록을 훑어보면서 앞선 시대의 정치를 고찰하여 오늘날의 귀감과 경계로 삼는 것은, 비록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기는 하나, 지엽적이며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일에 속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앞 선 시대의 정치에 대해서 배우는 것 보다는 유교 경전의 사상을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성현들의 경전인 유교 경전에 나오는 성리(性理), 즉 인간의 본성과 그 이치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이는 결국 송나라 주자가 집대성한 주자학, 즉 성리학을 철저히 배우는 것이 몹시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인직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제가 들으니, 요즘 왕세자를 가르치는데, 아침에는 ⌈자치통감강목⌋을 가르치고, 낮에는⌈논어⌋를 가르친다고 하는데, 이것은 역사서적을 우선으로 삼고 경전(經傳)을 나중으로 삼는 것입니다. 대체로 해가 뜨는 아침에는 사람의 마음과 기운이 맑고 깨끗하여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가 환하게 드러나므로 마땅히 ⌈논어⌋를 아침에 진강하고 역사서적인 자치통감강목은 낮에 가르치는 것이 옳습니다.”

세자는 당시 23살이었는데 요즘으로 말하자면 대학에 다니는 학생과도 같은 나이다. 그런 세자에게 역사과목을 아침에 먼저 가르치고, 낮에 도덕 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마땅히 도덕을 가르치는 논어를 먼저 듣게 하고 역사를 가르치는 자치통감강목은 나중에, 즉 낮에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과목을 먼저 듣고 나중에 듣고 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이언적에게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자치통감강목⌋은 송나라 주희, 즉 주자가 집필한 중국의 역사서로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에 대해서 큰 제목은 강(綱)으로 세우고, 역사적 사실은 목(目)으로 구별하여, 즉 ‘강목’의 형식으로 편찬한 서적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오대 십국 시대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이언적은 그 이유에 대해서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임금이 통치하던 당(唐)나라와 순임금이 통치하였던 우(虞)나라 그리고 삼대인 하상주(夏商周)의 삼대(三代) 이전에 어찌 역사 기록이 있었겠습니까? 심학(心學)이 있었을 뿐입니다.”

당우와 하상주, 즉 하은주(夏殷周) 삼대는 중국에서 이상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태평성대의 시기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평화의 시기 이전에 역사 기록은 없었으며 오직 심학(心學)이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심학이란 마음의 학문, 즉 도덕 수양의 학문인 논어 등 경학이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이언적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당시 사회가 태평성대의 시대였고 임금들이 모두 성인이며 성군들이었기 때문에 혼란한 사회와 정치를 기록한 역사 서적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며, 우리가 보는 역사서적은 그 뒤에 어지러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이언적은

“하상주 삼대 이후에는 본받을 만한 것은 적고 어지러운 것이 많습니다. ⌈자치통감강목⌋을 진강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비록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겠으나, 왕을 가르치는 제왕(帝王)의 학문에서 너무나 그 차례를 잃었습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중종은 시강관인 이언적의 가르침을 듣고 “이러한 주장이 매우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언적의 의견은 유학자로서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에서 우리는 적어도 중종 시대까지는 왕세자의 교육에 역사 서적이 전하는 흥망성쇠의 가르침을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개국한지 150여년이 지나면서 역사적인 가르침 보다는 유교 경전의 도덕적 가르침을 점점 더 중시하게 되었다. 율곡 이이는 성리학의 주리(主理)적 측면이 더 강조되는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유교를 배웠으며 과거시험을 준비하여 나중에는 장원 급제를 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율곡의 사상은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전상무(田相武, 1851~1924)


 

전상무(田相武, 1851~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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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田相武, 1851~1924)는 간재 전우의 제자로 1896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5년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후 한일합방으로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일제가 제공한 은사금을 거부하고,  독립을 위해서 최후의 1인까지 혈전을 불사한다는 의친왕 이강의 33인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리고 국권회복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1851년(1세, 철종2년)에태어났다. 본관은 담양(潭陽) 전씨(田氏)이며, 자는순도(舜道)이고 호는우경(寓耕)혹은 율산(栗山)을 사용했다.

1895년(45세, 고종32년) 을미사변이일어났다. 명성황후가 일본군에의해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국제적으로 일본을 규탄하는 여론이크게 일어나고,  국내에서도 그 행위에 분노한 백성들이 전국에서 의을 일으켰다.  고종황제는 팔도에 비밀칙서를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명을 내려,  각 고을 마다 의병이 봉기하였다.

1896년(46세, 고종33년)에 전상무도이청로(李淸魯)와  함께음력1월 17일 의령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아울러 1월 부터 3월까지 영남지방에서 일어난 의병 봉기인 병신창의(丙申倡義)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의문집인『율산집』에 실린「적원일기(赤猿日記)」가 그 기록이다.  일기에는 병신창의가 일어나게 된 원인과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 말기에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내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1905년(55세, 광무9년) 일본의 불법적이고도 강압적인 을사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전상무는 도굴산에 집을 짓고 은거하였다.

1910년(60세, 융희4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는 각 지역의 유지들과 지도자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은사금(恩賜金)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돈을 뿌렸다. 전상무에게도 여러 차례 그런 제안이 있었다.  이에 그는 이렇게 사절하는 편지를 보냈다.

“나는 대한(大韓)의 유민(遺民)으로 나라가 망했는데도 따라 죽지 못하고 미련스럽게 이지경에 이르렀다.  어찌 나라 잃은 죄를 감히 피하려하겠는가? 그래서 궁벽한 산속으로 들어와 스스로 말라 죽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며칠 전에 면장(面長)이 이른바 ‘일본은사금(日本恩賜金) ’이란 것을 들고와 병들어 있는 나를 깜짝 놀라게하였다.  이에 내가 강한 어조로 거절했는데 지금 또 주재소(駐在所)에서 그것을 보내왔다.  내 스스로 돌이켜 볼 때 일본이 주는 물건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이에 또 다시 되돌려 보내니 잘 헤아려 처리하오.”

일제 담당자는 이런 편지를 무시하고 또 은사금 명목의 돈을 보내왔다.  전상무는 다시 이런글을 써보냈다.

“주고 받는 도리는 언제나 의리(義理)에 비추어 보아야 하는데,  내가받지 않는것은 바로 그 의리에서 발현된 것이다. 오직 그 의리에 의한것이라 면형벌을 받고죽을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국가를 빼앗기는 쉬어도 그 사람의 뜻까지 빼앗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비록 천 만번 보내오더라도 죽기를 맹세하고 받지 않을것이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말라.”

1913년(63세, 일제시대) 서행일록(西行日錄)을지었다.  계화도로 가서 간재전 우가 은거하고 있는 곳을 방문하여 난세를 살아가는 선비의 처신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다.  전상무는 천성이 효성스럽고,  키가 크며 위풍당당한 체격을 가지고있었다 . 전우는 수천명의 제자 중에서도 기절(氣節)과 충의(忠義)가 남다르다고 전상무를 칭찬하기도 하였다.

1914년(64세) 고종황제로부터 비밀칙서를 받았다. 황제는 나라가 다시 부흥할 수 있도록 힘을 다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한양,  송경,  기성등지를 유람하고, 수찬 안효제,  정언 노상익,  참봉 이승희등을 청나라에서 만났다.

1915년(65세) 팔회시(八悔詩) 등을 지어 간재 전우에게 보냈다.  이해부터 간재를 스승으로 모셨다.  총독부가묘적(墓籍)을 만들도록 강제하자,“호적에 등록하지 않으면 무덤을 강제로 파내버리겠다고 한다. 백성을 보호한다는 행정이 진정 이런것인가?” 라고 항의 편지를 보냈다. 그의 판단으로 묘적을 만드는 문제는 일본의 호적제도에 편입되는 것으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은 결의를 나타냈다.

“비록 나 상무는 몸이 망가지고 뼈가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맹세코불 충(不忠)하고 불효(不孝)한 경우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중략) 삼군(三軍)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어도 필부(匹夫)의 뜻은 빼앗을수 없는 법이다.  정의로운 마음이 끓어 오르고 있는데 어찌 법률을 위반 했다는 처벌 따위가 두려워서 머리를 숙이고 명령에 따르겠는가?  나 상무는 조상을 위하여 한번 죽을 뿐이니,  명교(名敎)의 죄인이 되는것을 원하지않는다.”

1916년(66세) 안중근의사를 애도하는 시를 지었다.

1918년(68세) 가을에, 임진왜란때 군대를 파견하여 도와주었던 명나라 황제 신종을 기리는 만동묘를 철폐되자, 여러 동료들과 복구운동을 하다체 포되었다.

1919년(69세) 대한제국광무황제(고종)의 둘째 아들 의친왕 이강(李堈)이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강은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향하던 길이었다.  11월에이강이 당시 들고 있던 33인의독립선언서가 독립신문에 발표되었다. 전상무도33인의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린 선언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2천만 민중의 충정에 의지하여 우리 국가가 독립국이며 우리 민족이 자유 민임을 천하만국에 선언하며 또 증언한다.  무궁화가 만발하며, 신선들이 모여 사 는이 동방의 푸른 언덕은 다른 민족의 식민지가 아니며, 단군의 자손이며 아름다운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의 노예  종족이 아니다.”

선언서는 계속해서 우리는 3월 1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세웠는데도 일본이 아직 우리 민중을 크게 압하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이렇게 선언했다.

“일본이 만약에 끝내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 공약한 바와 같이 최후의 1인까지 최대한의 성의와  최대한의 노력으로 혈전을 불사한다.”

1922년(72세) 스승 간재가 별세하였다.
1924년(74세)에 사망하였다.  문집으로 ⌈율산집(栗山集) ⌋이있다.

<참고자료>
조동영,  栗山田相武의詩世界에대한一考察, 南冥學硏究 37, 2013.
김진봉, 선언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최명희(崔命喜, 1851~1921)


 

최명희(崔命喜, 1851~1921)                               PDF Download

 

최명희 초상
최명희 초상
명희(崔命喜, 1851~1921)는 조선시대 말엽에 전라북도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기호학파 성리학자 간재(艮齊) 전우(田愚)와 사제 관계를 맺고 그의 학문 전통을 이었다. 그는 특히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손수 경작하면서 꾸준히 독서를 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생활을 실천하였는데, 한일합방이라고 하는 국치를 당하여 궁핍하고 나약한 조선의 청년들에게 대장부의 기상을 불어넣고자 노력하였다.

1851년(1세, 철종 2년)에 태안군 근흥면 율현(栗峴) 석전리(石田里)에서 아버지 최원병(崔元炳)과 어머니 경주 이씨(李氏) 사이에서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자는 성범(性範), 호는 노백(老栢)이다. 경주 최씨인 최명희의 집안은 서산, 태안 지역의 전통 있는 집안으로 근흥면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부친 최원병은 간재 전우가 이름을 써준 만수재(晩修齋)에서 기거하며 학문을 탐구하였다.

1859년(9세, 철종 10년)에 서당에 나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어려서부터 생활이 어려워, 나무심기를 좋아하였는데, 권력으로 인명을 구하거나 살릴 수는 없지만 초목을 배양하면 그것에 의지하여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자신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서당에 갔다가 늦은 저녁에 돌아오면, 굶주림이 심하고 추위도 극하여 얼어버린 발이 갈라지는 듯하였고, 현기증이 나 엎어질 정도가 되어도 여전히 배움을 향한 마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매양 솔잎으로 굶주림을 헤아리고, 몽당 붓으로 나뭇잎에 글자를 썼다.”(⌈노백집․행록⌋)

1863년(13세, 철종 14년), 증조 외할머니의 상을 당했다. 이즈음부터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였는데,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하고 힘들었다.
1865년(15세, 고종 2년), 이언식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얼마 뒤 바로 할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1868년(18세, 고종 5년), 이수사(李水使)의 문하에 들어가 과거 공부를 하였다. 이즈음 두 번째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갔다.

1876년(26세, 고종 13년), 송명옥(宋明玉)에게 가서 과거공부를 하였다. 이윽고 당시 이름이 높았던 임헌회(林憲晦, 1811-1876)를 찾아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당시 충청도 아산, 공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임헌회는 송치규(宋穉圭)와 홍직필(洪直弼)에게 배웠고, 율곡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한 유학자였다. 임헌회 제자 중에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도 있었는데, 전우는 부친과 함께 공주로 이사하여 매일 스승을 모시고 배움에 매진하고 있었다. 임헌회는 새로 배움을 청하러 온 최명희에게 ‘본래 마음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불실본심(不失本心)’이란 글자를 써주며 격려하였다. 이후 귀향하면서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10년 객지살이 포부가 원대하였으나 (十年爲客經營大)
한걸음으로 귀향하니 부귀가 가볍네. (一步還山富貴輕)

1877년(27세, 고종 14년), 지난 해 11월에 스승 임헌회가 사망하였다. 이에 스승의 제자 간재 전우를 찾아가 스승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전우는 당시 최명희보다 10살 많은 37세였는데, 노백재(老柏齋)란 호를 지어 주었다.

1881년(31세, 고종 18년), 부인 이씨가 하직하였다. 집안 살림이 너무 어려웠는데, 외숙부가 논을 주어 생활이 다소 여유롭게 되었다. 그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독서를 하는 등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생활을 지속하였다. 다음해 안좌익(安佐益)의 딸과 재혼하였다.

1884년(34세, 고종 21년), 스승 전우와 함께 옥량(玉梁), 선유(仙遊), 대야(大冶) 등 여러 곳을 유람하고 속리산 화양동에 있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왔다.

1896년(46세, 고종 33년), 스승 전우가 태안으로 옮겨 안면도 연천서당에 기거하였다. 최명희는 수창리에 서당을 세워 스승에게 강학을 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전우는 태안군 근흥면 수룡리(당시 수창동)에 5년 동안 머물면서 제자를 양성해 현지에서 유풍을 크게 일으켰다. 나중에 전우가 천안으로 이사하자, 최명희는 다시 그곳에 서재를 마련해주었다. 2년 뒤,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1901년(51세, 광무 5년)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이 무렵부터 같은 성씨인 최익현(崔益鉉, 1833-1868)과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최익현은 이항로에게 배웠는데 그보다 18세 연장자였다. 최익현과 경주 최씨의 족보에 대해서 논하고,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904년(54세, 광무 8년) 최익현이 난세에 처하는 방법을 물었다. 최명희는 주경야독하면서 몸을 닦고 죽음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난세를 당하여 무조건 상황을 개혁하려는 자세보다는 하나의 이념으로 응집할 수 있는 힘을 배양한 다음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스승 전우의 입장도 그런 것이었다. 다음해 최명희는 미국으로 유학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57세, 광무 11년) 일본이 고종을 퇴위시키고, 강제로 조선 군대를 해산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였다. 최익현은 그 전 해에 의병을 일으켜 무성서원에서 궐기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체포되어 경성주재 일본군 사령부에 감금당하였다가 대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이해 최명희의 아들 최흠이 스승 전우를 태안으로 모셨는데,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이 밀고하였다. 최명희는 관청으로 불려가, 다음과 같은 심문을 받았다.

왜군 : 우리는 시민들을 보호하는데 그대는 오히려 우리를
토벌하고자 하여 민정(民情)을 혼란시키니 무엇 때문인가?
최명희 : 그런 일은 없다.
왜군 : 간재가 태안에 있으니, 사사로이 거병을 의논한 것이 아닌가?
최명희 : 내가 간재선생을 태안에 오도록 한 것은 단지 옛 도를 토론하며 종교적인 모임을 갖고자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의병을 일으키려고 해도, 군대 통솔에 익숙하지 않고, 병사를 모집하기도 어렵고, 무기가 구비된 것도 없으며, 양식을 모아둔 것도 없다. 그러므로 조용하게 도(道)를 간직하여 산으로 들어가거나 바닷가로 가서 한 해를 마칠 계획뿐이었다.
왜군 : 삼고초려를 하면 나가서 의병을 일으키겠는가?
최명희 : 만약 유비가 삼고 초려하여 좌우에 관우와 장비 같은 장군이 있을 것 같으면 어찌 할 뿐이었겠는가?

이러한 대화를 끝내고, 최명희는 석방되었다. 왜군은 최명희에 대해서 의병 궐기의 의도를 의심하기는 했지만 최명희가 의병궐기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으며, 또 장차 그럴 위험은 없다고 파악한 것이다.

1910년(60세, 융희 3년) 경술국치를 당하였다. 이후로 그는 연회에 나가지 않고 망국의 백성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하고, 오직 통곡만을 일삼았다. 둘째 부인 안씨도 이즈음에 사망하여 슬픔이 컸다. 하지만 학문 공부는 매일 그치지 않았다. 종일토록 책을 몸에 지니고 있었으며, 저녁에는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입으로는 경전을 읽고 마음으로는 그것을 해석하면서 새벽을 맞이하였다.
이 당시 한일합방 소식을 들은 스승 전우는 대성통곡 한 후 다시는 육지를 밟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그는 전북 계화도(繼華島)에 머물렀는데, 망국의 슬픔을 가슴에 담은 선비들로 붐볐다. 10여 채의 서재에 200여명의 선비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최명희도 가끔 노구를 이끌고 그곳까지 가서 스승의 강학을 들었다.

1921년(71세, 일제시대) 10월 22일에 사망하였다. 스승 전우가 사망하면 그를 위해 사당을 지어주리라 결심을 하였지만 스승 보다 먼저 세상을 하직하였다. 유고집으로 노백재유고(老柏齋遺稿)가 있다. 이 문집은 필사본으로 2권으로 되어 있는데, 1937년에 오진영(吳震泳)이 편찬하였다.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 안양사(安陽祠)에서는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스승 간재 전우와 함께 노백 최명희를 기리는 제사를 올린다.

<참고자료>
이형성, 「노백재 최명희의 학문과 사상」, 「간재학논총」9집, 2009.
윤기창, 「태안 안양사서 전우·최명희 선생 추모 춘향제」, 「금강일보」, 2013.4.15
작자미상, 「안기리 안양사」, 태안군 유형자료-유교문화, <도서문화연구원>

임영(林泳, 1649-1696)


임영(林泳, 1649-1696)                                            PDF Download

 

영(林泳, 1649-1696)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대사간, 부제학, 황해감사,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제자백가의 글에도 밝았으며,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정통하였다. 이단상(李端相),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체(朴世楷) 등에게 배워 학문의 폭이 넓었다. 학맥으로 보면 대체로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하였으나, 이기론(理氣論)은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의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율곡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는 찬성하고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에는 반대하였다.

1649(1세, 인조 27년)에 전라도 나주 다시면 회진리 동촌(東村)마을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임일유(林一儒, 1611-1684)이며, 어머니는 임천조씨(林川趙氏)로 조석형(趙錫馨)의 딸이다.

1656(8세, 효종 7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큰 빗방울이 연잎에 떨어지니, (大雨落蓮葉)

하얀 옥구슬 푸른 쟁반에 구르네. (白璧轉靑盤)

1665(17세, 현종 6)에 호남에서 서울로 올라가 유학을 하였다. 부친의 명에 따라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문하에 들어가 과거 공부를 하였다. 그는 원래 사장학(詞章學)만을 좋아하였는데, 사장학이란 문장과 시문, 즉 문학을 중시한 학문으로, 자연과 인간의 도나 이치를 중시한 도학(道學)과 대응되는 학문이다. 스승 이단상은 이러한 그를 보고 한 가지 학문만 고루하게 집념하지 말라고 권장하여 그의 학문은 도학까지 포함하여 폭이 넓어졌다. 나중에 스승의 아들인 이희조(李喜朝)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형 임영의 뜻은 원대하였다. 성현의 학문에 밝았으며, 조그만 것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격물궁리(格物窮理)에 힘썼다.” 이후 임영은 사마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이해에 임영은 통덕랑(通德郞) 조건주(曺建周)의 딸을 맞이하여 결혼을 하였다. 부인 조씨는 6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임영은 자신의 부인에 대해서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극진하게 섬겼으며, 남편이 싫어하는 것은 삼갔고, 하고자하는 것은 자신의 이해 고락(苦樂)을 가리지 않고 따랐다.’(⌈창계집⌋)고 하였다.

1671(23세, 현종 12년), 정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다. 호당이란 조정에서 설치한 독서당에서 공부만 하는 사람을 말한다. 문신 중에서 글과 학문이 뛰어난 사람에게 휴가를 주어, 오로지 학업(學業)을 닦게 하였던 제도이다. 대제학은 이 호당을 거친 자만 가능할 정도로 우대하였다. 임영은 그 뒤 이조정랑, 부제학, 대사헌,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나중에 그의 지위는 참판까지 이르렀다.

1674(26세, 현종 15년), 부인 조씨(1651-1674)가 24살의 갑자기 사망하였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바로 죽었고, 다시 자신이 사망하기 이틀 전에 딸을 낳았으나 딸 역시 곧 죽었다. 임영은 자식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은 부인을 위해서 행장(行狀)을 지어 슬픔을 표현하였다.

1694(46세, 숙종 20), 대사간, 개성부유수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는 가끔 지인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여행을 하고 시문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물새가 점점 친해지면, 학을 기르기를 그만두겠네.
(沙鳥漸親休養鶴)

소나무 바람 조용히 들으니, 그야말로 거문고 소리네.
(松風竊淸當鳴琴)

이러한 아름다운 정취 어찌 혼자만 누리는가?
(箇中佳趣那專享)

조만간 그대를 다시 찾아오겠네.
(早晩煩君復見尋)

1695(47세, 숙종 21),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병이 들었는데, 약물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1696(48세, 숙종 22년)에 사망하였다. 유고집으로 「창계집」이 있다. 나주의 창계서원(滄溪書院), 함평의 수산사(水山祠)에 배향되어 있다. 「창계집」은 청도군수를 역임한 동생 임정(林淨)이 1708년(숙종 34)에 청도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모두 1177판으로 27권 14책에 이르는데, 현재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문집에는 경연록(經筵錄), 각종 서적을 읽고 남긴 메모인 「독서차록(讀書箚錄)」과 「일록(日錄)」 등이 실려 있다. 「경연록」은 1680년(숙종 6년)에 숙종과 경연을 하면서 「서경」 등 경전을 강론한 일기다. 「일록」은 그가 관직에 취임한 때부터 거의 끝마칠 때까지, 즉 1666년(현종 7년)부터 1691년(숙종 17년)까지 자신이 한 일, 찾아온 손님들과 나눈 이야기, 느낌 등을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다.

또, 경연을 열지 않는 것은 군주의 큰 잘못임을 지적하는 상소문 「물이국옥정강차(勿以鞫獄停講箚)」, 우리나라 군주가 중국 사신을 나아가 맞이하는 것은 나라의 체면과 관계되니 나가지 말 것을 청한 「청물친출영칙소(請勿親出迎勅疏)」, 호포법(戶布法)의 문제점과 궁중에서 내수사(內需司)를 내세워 저지르는 온갖 비행, 국방의 문제점 등을 지적한 「응지언사소(應旨言事疏)」 등이 실려 있다.

그는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고문의 경전 주해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문집 「독서차록」을 보면 사서(四書), 「성리대전」, 「근사록」 등 서적 이외에도 「예기」, 「의례」, 「가례」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남겼다. 이러한 경학관을 바탕으로 성리설을 전개한 것도 그의 학문의 특징이다. 나아가 오종일의 지적에 따르면 그는 “성리학의 이론에만 집착하지 아니하고 박학적인 방법을 통하여 고대 경전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였고, 주자의 이론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보완하여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그는 이단상(李端相) 외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에게도 배웠는데, 이기설(理氣說)에 대한 견해는 율곡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는 찬성하고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에는 반대하였다. 그는 대체로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하였으나, 이기론(理氣論)에서 이황(李滉)과 이이의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가 남긴 시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계곡 물을 따라 돌아가니 골짜기가 깊구나.
(溪路縈回一壑深)

세상에 누가 알까, 구름에 덮힌 이 숲을.
(世間誰識此雲林)

처마에 비친 차가운 달빛, 강산의 빛깔을 바꾸네.
(寒簷月動江山色)

조용한 밤에 읽는 책, 우주의 마음을 여는 구나.
(靜夜書開宇宙心)

<참고자료>
조준하, 「임영」, 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오종일, 「창계 임영의 학문과 성리설」, 「동양철학연구」 22, 2000김은희, 「南道 정자기행(787)-정자詩로 만난 인물-임영」, <한국매일>,201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