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과거시험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3>

율곡과 과거시험

 

율곡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즉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한 사람’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한차례 과거에 합격하기도 어려운 데 아홉 번이나 과거에 합격했다는 것은 율곡이 그만큼 열심히 유교 공부를 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시자 파주 자운산에 있는 어머니 묘소 옆에서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율곡에게는 이 시기가 조용히 학문에 침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묘살이를 끝내고 그는 갑자기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불교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였지만 환속하여 과거시험에 도전하여 잇달아 장원 급제를 하였다.

율곡은 이미 1548년, 13세 때 진사 초시에서 장원 급제를 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1556년 21세 때, 한성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1558년 23세 때 행해진 별시(別試)에서는 「천도책(天道策)」이라는 문장으로 장원하고, 그 뒤에 있었던 생원진사시(1564년)에 합격하고, 다시 한달 뒤에 시행된 명경시(明經試)에 급제하였다.

이러한 장원 급제를 발판으로 그는 곧 호조좌랑, 예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거쳐서 홍문관 부교리, 춘추관 기사관, 홍문관 교리, 청주 목사,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아홉 차례나 과거에 급제하였던 성과가 그의 화려한 관직생활의 배경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공무원 시험이었던 과거시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시험은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는데 문과는 3년마다 치르는 식년시와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별시, 알성시 등 시험이 있었다. 시험 단계별로는 먼저 초시를 보고, 거기에 합격하면 복시를 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전에 들어가 왕 앞에서 보는 전시가 있었다. 복시에서는 33명을 뽑았는데 전시에서 그 순위를 결정하였다.

중종 32년, 즉 율곡이 탄생한 다음해인 1537년에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의 관리들이 문장을 중시하고 궁궐이나 관청에서 문헌을 매우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감탄하면서 조선의 관리들은 도대체 어떤 단계를 거쳐 선발되는지 몹시 궁금해 하였다. 마침 경복궁을 방문하여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중종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명나라 사신 : 저희들이 외람하게 천은을 입어 조서를 받들고 문헌(文獻)의 나라에 와서, 예의와 제도가 모두 갖추어져 참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껏 보고 매우 탄복했습니다. 한 가지 일을 묻겠습니다. 귀국에서는 관리를 뽑는데 어떤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까?

조선의 임금 : 향시(鄕試)는 인·신·사·해(寅申巳亥)의 해에 시행하고 회시(會試)는 자·오·묘·유(子午卯酉)의 해에 시행합니다.

명나라 사신 : 인원수는 몇 명이나 됩니까?

조선의 임금 : 회시에서는 33명을 뽑습니다.

명나라 사신 : 과거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까?

조선의 임금 : 있습니다.

명나라 사신 : 그렇다면 그 기록을 한 번 보았으면 합니다.

조선의 임금 : 그렇게 하시지요.

 

율곡이 과거시험에 여러 차례 장원을 한 성과를 보면 그런 일이 너무도 쉬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이었다. 조선시대에 보통 양반집 자제들은 5살 정도가 되는 때부터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서당이나 자기 집에서 천자문 공부를 하고, 동몽선습과 같은 초급용 학습교재를 사용하여 한문 읽기와 쓰기 기초를 세웠다.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도 나중에는 중요한 초급 학습교재로 활용되었다.

기초과정을 마치면 아이들은 그 뒤에 유교경전인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 삼경(三經, 시경·서경·역경)을 교과서로 삼아 철저한 경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과거 시험의 기본텍스트가 바로 사서삼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뒤 보통은 20년에서 30여년 간을 그러한 공부에 매진한 뒤에 비로소 과거합격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합격자들은 유학의 경학공부와 함께 한문으로 시문과 문장을 짓는 능력을 배양하게 되고, 국가가 현재 처해 있는 중요한 일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잘 정리하여 어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시험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당시 현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책문(策文) 시험이 있었다. 율곡이 별시에서 장원할 때 지었던 「천도책」은 바로 그러한 시험의 답안이었다.

결국 과거에 합격한 조선의 관리들은 사서삼경의 문장을 거의 완벽하게 외우고, 한문 고전의 멋진 글귀들을 활용하여 자신의 문장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알았으며, 국가의 시급한 과제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식견을 갖춘 인재였다. 사서 삼경은 특히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읽고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하는 인문학적 철학사상을 기본 소양으로 갖춘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왜 이러한 지식인들을 관리로 채용하였을까? 우선은 당시 외교나 국방과 같이 국가적인 대사를 추진하기 위해서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한문과 한자에 대한 소양이 필요했다. 국가의 중요한 기록이나 문헌이 모두 한자와 한문으로 되어 있었고,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했던 중국이 그러한 문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성리학적인 이유를 들 수 있는데, 그것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의 성품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공평무사하여야 하는데, 장기적으로 성리학 공부를 하고 수양을 한 지식인은 그러한 품성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불교나 도교를 공부한 사람들 보다는 주자학에 기초한 유학 공부를 한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데 더 적합할 것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 경전을 중요 교과서로 삼고 그것을 과거시험으로 테스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