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04>

정치가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치에 뜻을 둔 사람들은 대개 ‘학력’ 관리에 힘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학력 관리가 아니라 ‘학교 간판’ 관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여 좋은 학연을 만들려고 한다. 그것이 동문들의 표를 얻을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고, 또 투표자들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과시할 수 있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가는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569년 선조 2년 때의 이야기다.

율곡은 당시 34세로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였다. 홍문관은 성종 때(1470년) 설치된 기관으로 집현전의 성격을 계승한 것이다. 업무는 주로 문서에 관련된 일을 하였는데, 간언(諫言)의 임무도 있었다. 간언이란 임금이 국정을 행할 때 잘못 판단을 하거나 국가대사를 추진하는데 문제가 있을 경우 그 잘못을 지적하고, 직언을 하는 것이다.

8월 16일(음력), 율곡은 왕에게 맹자를 강의하였다. 왕조실록 기사 「홍문관 교리 이이(李珥, 율곡)가 맹자를 강의하고 인심(人心)의 진작과 성학(聖學)의 정진을 말하다」라는 기록의 이야기다. 인심이란 요즘으로 말하자면 ‘민심’이며, ‘성학’이란 대통령의 수양 공부다. 율곡은 맹자 문장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각 시대마다 각기 숭상한 바가 있었습니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숭상한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있었습니다. 전쟁에 이기고 공략하여 탈취하는 데 그쳤습니다. 서한(西漢) 때는 순박함을 중시하고, 동한(東漢) 때는 절의(節義)를, 서진(西晉) 즉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청담(淸談)을 중시했습니다.”

 

중국의 전국시대는 주나라 때로 동주(東周)의 후반에 속한 시기다. 전반기는 춘추(春秋)시대라고 불린다. 공자가 살았던 때는 춘추시대 말엽이며, 맹자가 살았던 때는 전국시대 초기다. 전국시대는 특히 약육강식의 시대로 상하의 관계가 흐트러지고 힘 있는 자가 득세하는 시기였다. 율곡은 ‘부국강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력하게 만들어 전쟁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율곡의 설명에 따르면, ‘부국강병’의 정책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단지 전쟁에 이기고 남을 공격하고 탈취하는 일을 중시할 뿐이다. 그는 한나라 때는 순박함이나 절의를 중시하였다고 하면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청담사상을 중시하였음을 지적한 뒤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된 사람은 백성들이 중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그 것이 잘못되었으면 마땅히 그 폐단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권력과 세력을 가진 간사한 신하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그 뒤를 이어서 관리들의 기상이 쇠약해지고 나태해져 한갓 녹(祿)을 받아먹고 자기 한 몸 살찌울 줄만 알지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설령 한두 사람 뜻을 가진 이가 있어도 모두 속된 시류에 휩쓸려 감히 기력을 발휘하여 국세를 진작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태가 이러하니 임금께서는 마땅히 크게 일을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가지시고 관리들의 기풍을 진작시켜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잘못된 시류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율곡이 중국 고대의 역사, 엄밀히 말하면 문화사를 언급하면서 이런 말은 한 것은 정치 지도자는 백성들에게 이상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고, 시류를 파악하고, 백성들과 관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정치지도자 스스로의 ‘공부’를 통해서만 그런 것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율곡은 “국세를 진작시키라”, “임금이 마땅히 일을 크게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가져라”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미래에 대한 비전의 제시다.

젊은 나이의 율곡은 당시 선조 2년의 시류와 세태에 대해서 몹시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특히 권세를 가진 관료들이 나태하고 대의를 보지 못하며 사적인 이익 추구에 몰두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원문에서 ‘사기(士氣)’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를 ‘선비의 기풍’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관리들의 기풍’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당시 율곡이 비판하고 있는 점은 국정과 관련된 잘못이지, 초야에서 글을 읽는 선비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어서 율곡은 맹자의 공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임금의 책임을 언급하였다.

 

“옛날에 맹자는 필부의 힘으로 단지 언어(言語)로 사람들을 가르쳤는데도 사악한 논의를 종식시키고 바른 도(道)를 넓히어 우(禹)임금과 같은 공을 이루었습니다. 임금께서는 백성을 다스릴 책임을 맡고 있으니 이 도로써 제대로 백성들을 가르치기만 하면 후세에 교화를 드리울 뿐만 아니라 당대에 교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니 그 공이 어찌 맹자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잘못된 일에 빠져들어 홍수의 재해와 양묵(楊墨)의 피해보다 심하니, 임금께서는 다만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교화를 세상에 널리 펴시어, 군주의 책임을 다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율곡이 맹자를 예로 든 것은 당시 강연에 사용한 책자가 맹자였기 때문이다. 맹자는 권력도 없었고, 임금의 위치에 있지도 않았으나 글을 쓰고 가르침을 통하여 큰 공을 이룩하였다고 보고 임금이 된 지 2년차인 선조에게 맹자의 가르침을 받들고 따르면 어찌 그보다 못하겠는가하고 분발을 촉구하였다.

맹자에도 언급되어 있는 ‘양묵’의 피해란 양주(楊朱)와 묵가의 피해를 말한다. ⌈맹자⌋ (「진심장구」)에 이런 말이 있다.

“양주는 ‘나를 위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나의 한 오라기 털을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에 묵자는 겸애(兼愛)를 주장하여 머리에서 발꿈치까지 모든 털이 다 닮아 없어지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고 한다.”

어느 주장이나 그것은 세상에 피해를 주는 것이다. 그 출발은 임금이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교화를 세상에 널리 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교화’란 어떤 의미일까? 당시 율곡은 유학자의 입장에서 공자가 설파한 인의(仁義)의 가르침만이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의미한 ‘교화’는 공맹의 사상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말로 이러한 ‘교화’의 뜻을 바꿔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비전을 정치 지도자가 제시하고, 그것을 일반 시민들과 공유해나가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가 그런 것을 할 수 있으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