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진(李起振:1869~1908)


이기진(李起振:1869~1908)                                PDF Download

 

관은 전주(全州). 자는 한여(翰汝) 또는 효백(孝伯), 호는명와(明窩)이다.
그는 충주의 하곡, 오늘날의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에 유중교(柳重敎)의 가르침을 받아 화서학파(華西學派)에 입문하였고,  유중교 사후에는 유인석(柳麟錫)에게 배웠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군에게 피살되고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유인석이 이끌던 의병진에 참가하였다.

을미의병 당시 홍선표(洪選杓)·정화용(鄭華鎔)등과 함께 유인석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충주성(忠州城) 전투와 제천(堤川)에서 패한 후 서행할 때 그의 활약상이 전한다. 소모대장(召募大將) 서상렬(徐相烈)의 시신을 수습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는데, 후에 병고로 의병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국권 침탈의 시국을 개탄하면서 《화서집(華西集)》의 발간을 위한 기금마련에 주력하였고,  향리의 후진(後進)들을 교육하면서 족계적(族系的) 성향을 지닌 동약(洞約)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문집으로는《명와집(明窩集)》이 있다.  이상이 그의 대략적인 생애와 관련된 기록이다.

위의 내용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가 유인석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그 무렵은 시대의 격변기였다.  이때 민심이 격앙되어 사방에서 의병(義兵)이 봉기(蜂起)하고,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는 제천 의병이 출범하게 되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사실상 1894년에 동학 농민군이 일어난 것을 빌미로 삼아 일본군이 개입하면서 서울을 장악했다는 소문이나 돌고,  그 이듬해 여름에는 일본군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실시 되었다는 사실이 널리 유포된 데에 있었다는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때 이기진은 병든 몸을 이끌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유인석의 종사관으로서 활약하면서 충주성 수성전(守城戰)에 참전하였다.
한편 조선말기 정직과 지조있는 선비상을 지닌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선생은 나라의 위기 앞에 도의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한 선비였다.  그의 학통을 계승하여 온 사람들을 역사에서는 화서학파(華西學派)로 규명한다.
화서는 의병봉기 계획을 추진하면서 유인석에게 주선해 줄 것을 권유하였고,  유인석으로 하여금 의병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유인석 문하에 있었던 이기진도 자연스럽게 의병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국의 병항전을 선도한 화서학파는 사실상 의병활동 의실천적 사상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기진은 또 충주성 전투에서 포수들을 독려하고,  빗발치는 포탄에 뺨이 문드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의병진이 근거지인 제천을 빼앗기고 서북지방으로 이동할 때 그는 신병으로 뒤에 남아 있었는데 이때 소모대장 서상렬이 전사하자,  다행스럽게도 그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일에 대한 기록이 의암(毅菴) 유선생(柳先生)의‘서행행략(西行略)’에,

“선생이 주현구(朱鉉九)이기진을 보내 경암(敬庵)의 사실을 탐지하고 시신을 거두어 오게 했는데, 현구(鉉九)는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이기진은 병으로 낙향한 이후에도 산봉우리에 진지를 구축하여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지금도 그 진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이 크게 일어났을 때,  일본군의 위세를 보고 포도대장을 만나서 일본군을 토벌할 계책을 물었으나, 무기력한 답변만을 들었다.  단발령 이후에 병든 몸으로 의병진에 가담하여 활동 할 당시 그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람을 맞으며 먹고 자는 고통,  부대 내의 갈등을 어루 만지는것,  마을마다 부역을 고르게 하는 것 등이 어려웠다.”

그는 말년에 병고로의병에 합류하지 못하고 고향에 남아서 시국을 개탄하면서 후학 양성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향리에서 직접적인 교육과 향약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또 후손들에게 남긴 가훈에서암울한 현실에 대해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왜국 공사관이 우리 주상을 위협하고 우리 조정의 신하를 강제하여장차 백성을 옮겨 바다에 빠뜨리고자 하니 우리 인종을 모멸하는 화가 조석간에 박두하였다.”

고종(高宗)의 강제 퇴위 이후에 수많 은인민들이 봉기하였다 는소식을 듣고, 이기진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이를 위하여 격문(檄文)을 짓기도 하였다. 이기진이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보낸 격문에서는 일본은 금수와 같은 나라라고 하면서

“아는 것이라고는 식색(食色)을 탐하는것 뿐이요 숭상하는 것이라고는 빼앗으려는 욕심 뿐”

이다고 질타한 바 있다.  그는 1908년 향년4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거니와 기울어 가는 나라에 대한 탄식과 실천운동을 강조하였던 진정한 조선인의 한 사람이었음을 우리는 자랑으로 삼아야하겠다.

이기지(李器之:1690∼1722)


이기지(李器之:1690∼1722)                               PDF Download

 

의본관은전주(全州), 자는사안(士安),호는일암(一庵)이다. 조선경종(景宗) 때노론(老論)의영수(領袖)였던좌의정이이명(李頤命)의아들이며판서김만중(金萬重)의외손이다. 1715년(숙종41)에26세의나이로진사시(進士試)에합격하였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에4대신의한사람이었던그의아버지이이명이연잉군(延礽君)시절의영조(英祖)를세제(世弟)로책봉(冊封)할것을주장하다가목호룡(睦虎龍)의무고(誣告)를받아거제도(巨濟島)로유배되었으며, 이기지역시이사건에연루되어남원(南原)으로유배되었다가다시서울로압송되었는데심문을받던중고문으로인하여옥사하였다.
그뒤1725년(영조1)에비로소신원(伸冤)되고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추증(追贈)되었다.

1720 고부사행(告訃使行) (왕의 승하를 알리는 사신) 으로 북경에 갈 때 함께 자제군관(사신을 호위하며 보좌하는 군관의 신분이었으나 실제는 문인 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의자격으로수행하였다.  이때 서양 문물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일기 형식을 빌어 기록으로 남겼는데 섬세한 관찰력이 수반되어 여느 기록들에 비하여 변별력을 갖는다《이기지의 일암연기 연구》. 김동건. 22p~23p)

그의 아버지가 처음에는 연행에 대한 체험을 자세히 적어 보려 했다가 아들이 쓴 기록을 보고 더이상 쓰지 않고 접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하루에 수십리, 수백리를 가는 일정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또 북경에서 천주당(天主堂)을 방문하고 서양 선교사들과 처음으로 만났다.

후대의 다른 연행록의 저자들 보다도 천주당을 빈번하게 방문하며 선교사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당시 천주당은 서양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서양 선교사들과 친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며 서양의 음식을 처음 맛보기도하고,  그림과 천문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문물을 보고서 양선교사들과 필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보고들은 것을 자신의 연행록에 남겼다.  그의 연행록인 《일암연기(一庵燕記)》에는 서양화(西洋畵)에 대한 관심과 천문(天文), 역법(曆法), 북경 선교사 들과의 교류 내용 등 다른 연행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자료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북경에 머무는동안 이기지는 천주당을 방문했던 일을 표로 작성하여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에는 방문한 날짜와 선물로 받은 물건, 대화 내용 등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서양 선교사들이 대접하기 위해 내온 음식들에 대해서도 먹어 본 맛과 느낌을 적고,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했던 내용도 적혀 있다.  빵을 먹어 본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드럽고 달았으며 입에 들어 가자마자 녹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맛이었다.  만드는 방법을 묻자, 사탕과 계란, 밀가루로 만든다 고했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경이로운 느낌이 그대로 전해 오는 듯하다.  따라서 그는 빵을 맛 본 최초의 조선인 이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청나라때에 명·청대의 유명한 서화(書畵)가 활발하게 거래 되었다.  그러다보니 모사품도 적지 않았고,  검증되지 않은 채로 무분별하게 연행한 사신들을 통해 조선으로 유입된 것들도 상당수 있었던 듯하다.  그는 서화에 대한 안목도 여느 중국인보다 뛰어났다.  지인이 어느날 상당한 수의 서화를 가지고 와서 그에게 보이자 그 서화들이 모두 모사 작품임을 식별해 냈다는 일화도있다.
이처럼 서화에 뛰어난 식견을 지녔던 그는 서양그림에도 특별한 관심을가졌다. 서양그림을 보고 서양화법(西洋畫法)의 사실적 묘사에 주목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가 처음 대했던 서양화는 종교적인 내용의 그림이었다.  천주당 벽화의 정밀한 묘사와  입체적인 구도는 그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화법이 었던것이다.

그는 서양 화첩을 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책을 펼치면 갑자기 벌레와  물고기가꿈 틀거리며 움직이거나 날아 올라 마치 손에 잡힐 듯 했으며, 원근과고저의 형상을 볼 수 있게했다.  솜씨의 교묘함이 조물주를 능가할 만하다.”

라고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교회 병풍에 그려진“두 날개가 있는것” 에 대해 물어 “천신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이 신이 몸을 지켜 준다.”는 대답을 듣기도 했다. 이는 모두 그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기록들을 통하여 서화에 대한 뛰어난 안목을 지녔던 이기지를 새삼 떠올려 보게 된다.

그는 이것 말고도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천주당(天主堂)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들과 천문, 과학에 대하여 나눈 대화의 내용 또한 주목해 볼만하다. 특히 혼천의(渾天儀)를 보고 선교사와  나눈 대화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폭넓은 식견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른 역법(曆法)의 우월성에 대하여 토론을 하면서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동양의 역법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의 기록을 잠시 보면,

“내가 물었다.‘ 서양의 북쪽 끝에 하지(夏至)에는 낮만있고 밤이 없으며,  동지(冬至)에는 밤만 있고 낮이 없습니까?’ 하자,  그 사람이 깜짝 놀라 말이 없다가 연달아 명확하다며 칭찬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서양 선교사가 내어준 종이로 만든 혼천의를 돌려 보면서 그 원리를 이해한 이기지는 동양 천문 우주관의 결점을 파악하고 확인한 후 그 느낌을

“비로소 만고의 비루함을 씻게 되었다.”

라고적어놓았다.

이기지는 연행하는 내내 천주당을 자주 방문코자 하였다. 그가 천주당에서 서양문물을 살펴보면서 단순한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 사신 일행이 묵는 처소를 방문하고 자명종을 예물로 선물했다.  그는 자명종에 쓰인 서양숫자(로마자)에 대하여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4일 후에는 선교사들 앞에서 써 보이자,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모두 놀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의문점이 있으면 직접방문하여 묻기도하고,  서양화 책을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는가 하면 자신의 관소에 선교사들을 초대하기도 하였다.  이기지는 이와  같이 서양 학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열정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던 인물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채지홍(蔡之洪, 1683~1741)


채지홍(蔡之洪, 1683~1741)                               PDF Download

 

지홍(蔡之洪, 1683~1741)은 조선시대 중기에 활동한 유학자로 권상하(權尙夏)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스승의 영향으로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동문인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이간(李柬), 윤혼(尹焜) 등과 함께 교류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경학,예학을 비롯하여, 역사·천문·지리·상수(象數) 등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실천적인 수양에 힘썼다.

황강영당과 수암사
채지홍의 노력으로 세워진 충북 제천의 황강서원(황강영당과 수암사)

 1683년(1세,숙종9년) 1월 14일, 청주(淸州) 금천리(金川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군범(君範), 호는 봉암(鳳巖)ㆍ삼환재(三患齋)ㆍ봉계(鳳溪)ㆍ사장와(舍藏窩)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첨지 중추부사 채영용(蔡領用)이며, 어머니는 유승주(柳承胄)의 딸이다.

1694년(12세,숙종20년) 소과(小科)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공도시(公都試, 지방에서 열린 과거시험)에서 장원하였다.

1698년(16세,숙종24년) 식년시(式年試) 생원과에 합격하다. 다음해 상주 박씨(尙州朴氏) 박이경(朴履慶)의 딸과 결혼하였다.

1701년(19세,숙종27년) 가을에 청풍(淸風)의 황강(黃江)에 사는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1641-1721)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해11월,  큰 아들 채복휴(蔡復休)가 출생하였다.

1703년(21세,숙종29년) 속리산(俗離山)을 유람했다. 다음 해 둘째 아들 채익휴(蔡益休)가 태어났다.

1708년(26세,숙종34년) 9월, 스승 권상하를 모시고 화양동(華陽洞)에 가서 우암 송시열을 원향(院享, 서원에 사당을 모셔 놓고 제향 드리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해 12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1711년(29세,숙종37년) 과거 공부를 하여 출세할 뜻을 버리고 그 뜻을 담아 시( 歎詩)를 지었다.  가을에 스승 권상하로부터 삼환재(三患齋)라는 호를 받았다.
10월에, 권상하의 제자이자 동문인 한원진(韓元震)을 만나 교분을 맺었다. 친구들과 속리산을 유람하며 시를 짓고 이에 대한 글을 남겼다.

1712년(30세,숙종38년) 그간 과거 공부를 위해서 지은 습작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 가을에 서재를 새로 짓고 사장와(舍藏窩)로 호를 삼았다. 다음 해 가을 동문 윤봉구(尹鳳九)와  교분을 맺고 호서(湖西, 충청도) 지방을 유람하였다.  도중에 이간(李柬), 윤혼(尹焜) 등을 만나 동물들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가졌는지 하는 금수오상설(禽獸五常說)에 관해서 논하였다.

1715년(33세,숙종41년) 가을, 충청도 충주의 누암(樓巖, 지금의 충주시 가금면창동)에 가 서정호(鄭澔)를 만났다.  함께 ⌈중용⌋에 있는

‘치우치지 않고 기대지 않아,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음
(不偏不倚無過不及)’

이라는 문장에 관해서 논했다. 다음해 아들 채백휴(蔡百休)가 태어났다.  ⌈주서차의(朱書箚疑)⌋를 교정하고, ⌈화양행(華陽行)⌋ 을 지었다.  이해 암행어사 황구하(黃龜河)와  관찰사가 학문과 수행이 뛰어난 선비로 조정에 추천하였다.

1718년(36세,숙종44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나 바로 사직서를 올려 사양하였다.

1721년(39세, 경종1년) 1월, 부친과 함께 송호(松湖)로 이사하였다 . 8월, 스승 권상하가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9월, 시강원(侍講院) 자의(諮議)에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이해 경종의 몸이 약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로 조정 안 팎이 시끄러웠는데, 신임사화가 발생하여 노론파가 실각하였다.  채지홍은 소론파의 죄를 논하여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다음해 사헌부의 관리들(소론파)이 채지홍을 비난하는 건의 문을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올렸다.

“자의(諮議) 채지홍(蔡之洪)은 본래 시골 구석의 보잘것 없는 무리로서,  이름을 훔친 상신(相臣, 정승)의 문하에 아첨하고 빌붙어 인연(彙緣)을 맺은 뒤,  천거를 받아 발탁된 뒤 외람되 게궁궐의 관료에 끼게된 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 한 것이 오래 되었어도 그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  죄가 있는 낮은 벼슬 아치를 그 직무에 서쫓아냄)하소서.”

1723년(41세, 경종3년) 1월, 구운산(九雲山)으로 이사하여 은거하면서 후학의 양성에 힘썼다.  봄에 황강(黃江)으로 가서 스승 권상하의 연보를 정리하였다.  겨울,신치운(申致雲)이 근거없이 스승 권상하를 모함하여 스승의 관작이 박탈되었다.  이에 모함에 대응하는 상소문을 올리기 위해서 제자들이 함께 모여 논하였다.  다음해 2월 보령(保寧)에서 이간(李柬), 윤봉구(尹鳳九), 한원진(韓元震), 헌상벽(玄尙璧) 등을 만났다.

1725년(43세,영조1년) 부인 박씨(朴氏)의 상을 당하였다.  3월에,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겨울에,  민진원(閔鎭遠)의 요청으로 경연관(經筵官)으로 임명 되었으나 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몇 개월 뒤 부여 현감으로 임명 되었으나 역시 사퇴하였다.

1726년(44세,영조2년) 2월, 임금이 특명으로 불렀으나 사직 을희망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아울러 스승 권상하에 관해 무고함을 변호하였다.  이해 12월, 황강서원(黃江書院)이 준공되자, 동문들의 요청으로 서원의 일을 맡았다.  서원에는 스승 권상하와 스승의 스승인 송시열(1607∼1689)을 모셨다.
나중에 권상하의 제자인 한원진(1682∼1751), 윤봉구(1681∼1767), 권욱 등도 이곳에 모셔졌다.  권상하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그의 유품을 거두고,  유언에 따라 화양동에 만동비와 명나라 신종황제의 은혜를 기리는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숙종이 나중에 권상하를 우의정과 좌의정을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관직에 취임하지 않았다.

1727년(45세,영조3년) 5월에 부여 현감(縣監)에 임명되었다.  그러나곧바로 사직을 청하고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서 영조 임금을 알현하였다.  그 자리에서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성인(聖人)이 이르기를,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은 어른이 되어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산 속에서 유학을 공부하 는사람이 또 어찌 세상을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듣기에 경연관(채지홍)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임한다 하는데, 외읍이 서울 안보다 못하니 반드시 아비를 모시고 와서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경연에 출입하도록 하라.”

채지홍은 자신의 학문이 보잘것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어 마음을 바르게 하여 뜻을 성실히 하는 일이 중요함을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임금은 기쁜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임금이 다시 불러서 궁궐에 들어갔다.  경연의 자리에서 ⌈심경(心經)⌋을 읽고 있었는데, 특별히 채지홍을 불러 함께 하도록 한 것이다. 임금이 글뜻을 아뢰도록하니,  채지홍이 대답하였다.
그리고 다시 채지홍이 간언을 받아들이고 사사로움을 없애시라는 당부의 말을 올리니, 임금이 그 뜻이 절실하다고 칭찬하였다.  채지홍은 뒤에 ⌈효경(孝經)⌋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8월, 황산(黃山)을 유람하고 죽림서원(竹林書院)에 가서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의 영전에 인사를 올렸다.

1728년(46세,영조4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련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반란이었다.  반란이 일어난 주요 지역이 경상도(영남) 이었기 때문에 영남 란(嶺南亂) 이라고도 불렸다.  채지홍은 고을 선비들과 함께 격문( 상당산성격문(上黨山城檄文))을 붙여 반란자들을 회유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6월에 청산(靑山) 현감(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731년(49세,영조7년)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에 진천(鎭川)에 투숙한 사실을 듣고도 보고하지 않았다고 정언(正言) 민정(閔珽)의 탄핵을 받았다.

1733년(51세,영조9년) 3월, 도명산사(道明山寺)에 머물면서 조용히 책을 읽었다.

1735년(53세,영조11년) 2월에진천(鎭川)의봉암(鳳巖)으로이주하였다. 다음해역학십이도(易學十二圖)와 세심요결(洗心要訣) 을지었다. 가을에, 정호(鄭澔)가사망하여곡을하였다.

1739년(57세,영조15년)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 1694~1756)를 만나 성리학에 대해서 강론하였다.  민우수는 당시 46세로 은거하다 형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740년(58세,영조16년) 2월, 호서지방의 여러명 승지를 유람하고 1백 여편의 시를 남겼다.  3월에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문을 올려 사양하고,  교체를 요청하였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동유록(東遊錄) 을지었다.  6월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다음달 다시 공홍도(公洪道, 충청도)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는데,  취임한 뒤 다시  사퇴하였다.

1741년(59세,영조17년) 7월에 화양(華陽)의 채운암(綵雲菴)에 머물면서 ⌈독학전보(讀學塡補)⌋, ⌈성리관규(性理管窺) ⌋를 정리, 마무리했다. ⌈독학전보⌋는 35권 18책으로 자신이 40여 년간 여러 서적을 읽으면서 ⌈대학⌋의  3강령 8조목과 상통하는 문장을 골라 편찬 한 것이다.  이는 주희가 ⌈대학⌋을 잘 읽고 다른 경전으로 보완한다면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한 말에 따른 것이다.
이해 10월 6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1755년 윤봉구(尹鳳九)가 묘지(墓誌)를 짓고, 이후 김원행(金元行)이 행장을 지었다. 1783년 아들 채백휴(蔡百休)가 상산(常山, 진천鎭川) 지장사(地藏寺)에서 ⌈성리관규(性理管窺)⌋ 4권, 문집15권( ⌈봉암집(鳳巖集)⌋), 연보 등 2권 총합 21권을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참고자료>
⌈국조보감⌋ 권58.
채지홍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콘텐츠(www.krpia.co.kr.)
이순두, ⌈독학전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민식, ⌈채지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조 임금과 경연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2>

선조 임금과 경연

 

1575년 6월 24일(음력)의 일이다. 이 해는 선조 8년으로 율곡은 40세가 되던 해였다. 이 해 3월 병 때문에 잠시 고향인 파주 율곡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가 임금의 유교 경전 공부인 경연(經筵)에 참가하였다.

당시 부제학의 자리에 있었던 율곡은 김우옹, 정언지 등과 함께 선조 임금을 모시고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교과서는 상서(尙書) 강고편(康誥篇)이었다.

상서는 서경(書經)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유교의 다섯 경전(五經) 중 하나로 꼽힌다.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진 이 책은 요순시대,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이 중에서 요순시대는 신화의 시대다. 실지로 중국 역사는 하나라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전통시대에 지식인들은 요순시대가 실지로 존재했고 이상적인 통치자인 요임금과 순임금도 실재하였다고 믿었다.

은나라는 상나라라고도 불린다. 이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 ~ 1046년경에 존재한 중국 최초의 왕조로 알려져 있다. 이 나라의 마지막 수도가 은(殷)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로 불리는데, 은의 유적지에서 갑골문이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집중한바 있다. 상나라는 중국 중원지방의 동쪽 지역에 근거하였는데, 서쪽지방에 주나라가 등장하여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켰다. 주나라 무왕은 상나라를 물리친 뒤에 그 땅을 나누어 자기 친족과 부하들에게 분배하였다.

예를 들면 제나라 지역은 건국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강태공에게 주고, 노나라 지역은 주나라 천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에게 주었다. 이렇듯 점령지 땅의 일부를 떼어 부하나 친족에게 통치를 맡기는 제도를 분봉(分封)제도라고 한다. 그 땅은 봉토(封土)라고 하며, 그 땅을 통치하는 자를 제후(諸侯)라고 한다. ‘후’라는 글자가 임금을 뜻하므로 ‘제후(諸侯)’란 여러 임금, 혹은 임금들이라는 뜻이다. 봉토를 천자로부터 하사 받아 그 땅을 임금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통치하는 제도를 봉건제도(封建制度)라고 한다.

이러한 제도는 종법제도라는 혈연 기반의 제도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다. 종법제도는 천하와 그 소속 국가들의 관계를 종갓집, 즉 큰집과 작은 집의 관계로 규정한다. 모든 나라는 큰집인 천자국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작은 집의 역할을 한다. 큰집에 경사가 있을 경우는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고,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지키는 것이다.

 

선조 임금이 율곡 등과 그날 같이 읽은 상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봉아, 너는 잘 생각하라. 이제 백성들은 너의 부친 문왕을 공경하고 따르는데 달렸으니 들은 바를 계승하고 덕이 될 말을 실행하라. 가서 은나라의 옛 어진 왕들에게 널리 도움을 구하고 백성들을 다스려라. 그대는 멀리 은나라의 늙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마음을 정하고 교훈을 삼아라. 옛 어진 왕들에 대해서 널리 듣기를 구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보호하며 하늘같이 크게 되게 하라.”

 

여기서 봉은 주나라 첫 번째 왕의 마지막 아들로 송나라에 책봉된 인물이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장악하였는데 은나라 유민들이 많은 송나라 지역에 봉을 새 임금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래서 유민들인 은나라 사람들에게 도움을 널리 구하라고 한 것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덕이 풍부해지면 임금의 명령을 지키고 져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임금(주나라 천자)께서 이르시길, 오호라 봉아! 내 몸에 병을 앓듯이 하여 공경할지어다. 하늘은 두렵지만 진실로 도우려하고, 백성들의 정은 대략 알 수가 있느니라. 내가 듣건대 원망은 큰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곳에도 있는 것이니, 따르지 않는 이는 따르게 하고 힘쓰지 않은 이는 힘쓰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니 그대여! 일 할 때에 임금의 뜻을 넓히고 은나라 백성들을 받아들여 보호하라. 또 오직 임금을 도와 하늘의 명을 안정시키며 백성들을 새롭게 하라.”

이러한 문장을 선조 임금과 함께 읽고 율곡과 김우옹, 정언지 등 신하 선생님들의 설명이 있었다. 이렇게 임금을 모시고 신하들이 유교 경전이나 역사 서적을 읽고 임금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는 제도를 경연(經筵)제도라 한다. 고려시대에 처음 시작된 이 제도는 조선시대에 그 제도가 정비되고, 강화되어 소위 경연정치가 활성화되었다. 경연정치라 함은 경연을 하는 장소에서 정부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검토와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율곡이 사망한 뒤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경연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1594년(선조 27년) 7월 9일에 대사헌 김우옹(金宇顒)등이 경연을 열자고 다음과 같이 건의를 하였다.

“생각하건대 옛날에 지혜로운 군주는 전쟁과 혼란한 세상을 만나더라도 마음을 두어 계속 학문을 힘썼습니다. 이는 옛날 일을 거울삼아 근본을 배워서 국가사업에 활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경연을 열지 않은 지가 이미 3년입니다. 전하의 학문이 이미 고명하고 전하의 인덕(人德)이 이미 넓다고 하라도 마음의 은미한 곳이 어찌 다 도리에 부합되고 호령과 시행이 어찌 다 적절하겠습니까? 그리고 궁중에서의 사사로운 자리가 어찌 다 올바르고, 관직의 임명과 파면의 상벌에 어찌 다 사심이 없겠습니까? 그 중에 하나라도 잘못이 있다면 학문을 하는 공이 중단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하늘의 뜻을 누리고 인심에 보답하겠습니까?”

그동안 삼년 동안이나 경연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그 때문에 궁중에서 이루어진 정치, 예를 들면 관직의 임명이나 파면 등에 사사로운 결정이 없었는지 묻었다. 그동안의 결정에 하나라도 잘못은 없었는지, 있었다면 경연정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닌지 반문하였다. 이렇듯 경연은 대궐에서 이루어진 사사로운 결정에서부터 관리의 임면,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 등에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김우옹 등은 계속해서 이렇게 요청하였다.

“앞으로는 부디 편전(便殿)에 나오셔서 경연을 열고 공경(公卿)에서부터 유신(儒臣)까지 날마다 돌아가면서 모시게 허락해 주십시오. 서로의 생각을 물어 의리(義理)가 정밀해지게 하고, 또한 정령(政令)의 득실, 민간의 고통, 군무(軍務)의 결함에 대해서도 모두 터놓고 말하게 하고 서로 의견을 절충한다면 많은 계책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국내의 정치가 새로워 질 것이니 왜구의 환난을 해결하지 못할까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민본정치란 민본(民本), 즉 백성을 근본으로 섬기는 정치를 말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혹은 민주정치와는 다른 것이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나름대로 백성을 중시하는 정치제도를 발전시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경연제도였다. 경연의 목적은 임금을 공부시키는 것이었지만, 임금과 그를 둘러싼 궁중 측근들의 정책과 결정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 평가하며, 여러 가지 의견을 제안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나라를 부흥시키려면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1>

나라를 부흥시키려면

 

라가 잘 되려면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자 주변에 모여야 한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나라의 먼 장래를 설계하고 계획하여 차근차근하게 일을 추진해야한다.

논어⌋의 「요왈편」에

“가까운 친척보다도 현명한 사람이 더 낫다”

는 말이 있다. 일가친척이나 혈연 지연으로 주위 참모들을 모을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국가를 경영하는 것이 나라를 부흥시키는 첩경이다.

그런데 훌륭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들이 제시한 의견을 듣지 않는다면 어떠할까? 그래서는 당연히 나라가 잘 다스려질 수 없을 것이다.

율곡은 어느 날 선조 임금을 모시고 맹자를 강의하였다. 그 자리에서 율곡은 임금이 훌륭한 사람들을 등용해 놓고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은 분명히 그렇다. 나도 그 점은 잘 안다. 때문에 지난번에 현명한 사람을 쓰자고 말한 것은 진실로 좋았다. 그러나 사람이 좋기만 하고 일의 경험이 없을 경우에 일을 중도에 너무 지나치게 할까 염려되었다.”

일을 맡겼을 경우, 경험이 없으면 일 추진이 너무 편협하거나 외골수로 지나쳐 그 결과가 어그러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율곡이 존경하던 조광조(趙光祖, 1482-1520)가 바로 그런 사례였다. 조광조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이상 정치를 꿈꾸고 중종의 총애를 받아, 미신을 타파하고 향약을 실시하도록 하였으며, 각종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를 지지한 중종마저 그를 미워하여 결국 유배지 화순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선조는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섣불리 일을 맡겼다가 실패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전하께서 번번이 일이 너무 과하게 지나칠 것만을 근심하십니다. 오늘날 신하들이 전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중도에 지나친 일이 생길 경우, 위에서 제재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일을 시키고 나서는 그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잘 지켜봐야 한다. 그러다 지나침이 있으면 제동을 걸면 되는 것이다. 율곡의 생각은 일을 추진하는 편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선조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다. 고집하는 사람이 제재를 듣지 않고 반드시 제 멋대로 일을 추진해버리면 어찌 하겠는가?”

율곡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어찌 일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게 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하여 많은 선비들이 과거급제 만을 출세하는 길로 여기고 있으나 첫째가는 인물들은 반드시 과거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과거로 사람을 쓰는 것은 말세의 관습으로 어찌 성세(盛世)의 일이겠습니까? 혹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자가 대관이 되면 좋지 못한 자도 섞여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시겠지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공론이 크게 행해진다면 반드시 마땅한 사람이 선발될 것입니다. 공론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문사(文士) 중에도 선하지 못한 자가 많이 있어 중요 직책을 맡게 될 것입니다. 어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자에 대해서만 근심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을 등용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선조에 대해서 율곡은 과거 제도 자체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율곡은 자신이 과거를 통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관직을 얻고 왕과 가까이 할 수 있었지만, 국가에서 인재를 채용할 때 과거급제자만 우대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이 있으며 과감히 일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선조는 아무래도 뒷감당을 하지 못할 경우가 발생하는 것을 걱정하였다.

사실 선조 대왕은 지금 율곡의 따끔한 충언에 요리조리 변명을 하면서 곤란한 상황을 면하려고 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신하가 멋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선조 자신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율곡이 맨 처음에 지적한 것처럼 선조는 사람을 임명해놓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이 쓴 ⌈만언봉사(萬言封事)⌋에 이런 말이 나온다.

“전하께서 명철하심에는 남음이 있으나 덕을 베푸심은 넓지 못하며, 선(善)을 좋아하심은 얕지 않으나 의심이 많으신 점은 버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 중에 올바른 의견을 아뢰기에 힘쓰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치고 외람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남보다 빼어나려 애쓰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여러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면 그들이 당파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죄짓고 잘못한 것을 공격하면 그들이 편파적으로 모함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계십니다.”

(황의동 저, ⌈율곡 이이⌋, 152쪽)

 

선조 7년(1574년) 정초에 나라에 재난이 심하였다. 그래서 선조는 조정의 관리들부터 초야(草野)의 선비들에게 이르기까지 널리 국난 극복을 위한 직언(直言)을 구하였다. 그때 우부승지(右副承旨)의 직책에 있었던 율곡(당시 39세)은 장문의 상소문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는데 그것이 만언봉사다. 거기에서 율곡은 선조의 문제점 중 하나로 마음이 좁고 의심이 많아 신하들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율곡이 임금에게, 훌륭한 사람들을 등용해 놓고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자 선조 임금은 요리조리 말을 돌리면서 율곡의 비판을 피해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왕의 변명에 율곡도 지지 않고 끈질기게 왕의 말을 따라가면서 비판을 하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지 않을까?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좋은 말이 있어도 그것을 채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익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사가 신하가 되었어도 노나라 목공의 영토가 줄어드는 것이 더욱 심하기만 하였고, 맹자가 경이 되었어도 제나라 선왕의 왕업은 흥성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진언하는 사람들이란 자사나 맹자 같은 사람들도 아니려니와, 그 말을 채택하였다는 실상에 대해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데 어떠하겠습니다.”(황의동 저, ⌈율곡 이이⌋, 153쪽)

좋은 참모만 있으면 뭐하겠는가? 그 참모를 활용하여 국가 대사를 운용하여야 나라가 흥성하는 것이다. 퇴계와 율곡과 같이 훌륭한 사람들을 곁에 두었던 선조 시대에 왜 그렇게 정치가 무기력하였는지 율곡의 글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나라에 기강이 없는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0

나라에 기강이 없는 이유

 

선의 14대 국왕 선조(1552년~1608년, 재위 1567년 ~ 1608년)는 서자 출신의 임금이었다.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중종의 서자였다. 서자란 정실부인이 아닌 첩에게서 난 아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차별의 대상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선조는 서자 콤플렉스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선조는 특히 유교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성리학을 장려하였으며, 대유학자를 존경하는 한편, 사림들을 널리 등용하였다. 성종 때부터 조선의 정치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 즉 유학자들은 선조의 지원을 받아 정치계의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선조는 퇴계 이황(1501-1570), 율곡 이이(1536-1584), 그리고 우계 성혼(1535-1598) 등 대유학자들과 경연을 하고 학문과 역사를 논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퇴계 이황을 깊이 신뢰하였는데 퇴계가 사망하고 난 뒤에는 율곡을 가까이하고 그의 학문과 사상을 경청하였다. 이 때문에 율곡은 선조를 만나 경연을 할 때는 정성을 다하여 임금에게 도움이 되는 말과 충언을 거듭하였다. 경연할 때의 모습을 기록한 사료에는 그의 그러한 정성과 충정이 절절히 베어져있다.

경연이 있던 어느 날 율곡이 선조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기강이 없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구습을 답습한다면 우리나라는 다시 기대할 것이 없게 됩니다. 반드시 임금께서 큰 뜻을 분발하여 지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대신들과 관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일시에 그들이 발분할 수 있도록 하고 기강을 세워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선조시대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시대이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인들에게 능멸을 당한 시대의 임금이 바로 선조이다. 이 시대에 율곡이 살고 있었으니 율곡의 눈에 조선은 얼마나 걱정스럽게 보였을지 짐작이 간다. 임금 앞에서 나라에 기강이 없다는 그의 말은 바로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다는 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기강은 법령이나 형벌로 억지로 확립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조정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공정(公正)하게 집행되고 사사로운 정(情)이 행해지지 않아야 기강이 서는 것입니다. 지금은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正)이 사(邪)를 이기지 못하니 기강이 무엇으로 서겠습니까?”

조정의 관리들과 왕족들이 공정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행동을 하고, 사악한 행위들이 만연하니 국가의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한탄한 것이다.

옆에 같이 있던 김우옹이 율곡의 충언을 거들었다.

“오늘날의 폐단은 정말 그 말과 같습니다.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고 사의(私意)가 횡행하여 세워진 법을 고치려 하면 법이 세워지자마자 폐단이 또 생깁니다. 반드시 임금께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시어 마음에 천리(天理)가 유행하고 인욕(人欲)이 없어져서 크게 공변되고 지극히 바른 도리만이 행해지게 하신다면, 사람들이 다 감동 분발하여 명령이 나오면 반드시 행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뜻을 세워 정심·성의에 힘쓰신다면 사업이 요(堯)·순(舜)·탕(湯)·무(武)를 기약할 것이니, 초 장왕·제 위왕은 말할 것도 못될 것입니다.”

임금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헛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堯)·순(舜)·탕(湯)·무(武)는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정치가들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 시대에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왕들이다. 이들처럼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임금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학에서는 통치자의 마음은 그가 펴는 정치와 별개의 것이다. 통치자의 마음 보다 중요한 것은 통치자를 둘러싼 정치제도이며, 국가를 경영하는 데 도구가 되고, 지침이 되는 법률이다. 통치자는 제도에 따라 그리고 법에 따라 성실하게 권력을 행사하면 된다.

그렇다면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하는 제도와 법률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국민에게서 나온다. 법률과 제도를 만드는 입법자들은 국민이 뽑고, 그 집행을 감시하는 사법자들 역시 국민이 선임한다. 통치자 역시 국민들이 뽑는다. 민주주의, 즉 백성이 주인인 정치 체제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이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입장에서 과거 유학자들의 정치 이야기는 너무도 수동적이고 통치자 의존적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정치였던 것이다. 소위 유교의 왕도정치이며, 민본정치다.

 

율곡이 또 이어서 이렇게 왕에게 아뢰었다.

“오직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정치가 참으로 본받을 만합니다. 그 때에는 사람을 쓸 때, 통상적인 사례에 얽매이지 않고 어진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재능 있는 사람을 부려서 각각 그 능력에 맞게 했습니다.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분수는 정해져 있으니, 오늘날에도 반드시 사람을 가려서 벼슬을 주고 책임을 맡겨 성취를 요구해야 모든 공적이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묘년에 조광조(趙光祖)가 중종의 지지를 받아 큰일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는 선비로 일을 체계적으로 하지 못하여 소란사태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덕분에 소인들이 틈을 타서 사림(士林)을 해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일을 맡은 자들이 기묘년의 일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기묘년의 사람들이 일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었으나 어찌 오늘날 전혀 일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왕에게 율곡은 세종대왕 때의 관리 등용 방법, 그리고 조광조 개혁이 실패로 끝난 이유 등을 들었다. 조광조(趙光祖, 1482∼1520)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사림파의 정계진출을 확립한 인물이다. 중종의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관료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전파하고 성리학적인 도학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훈구파의 반발로 실패하고, 반란 주모자로 몰려 전라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하였다.

율곡은 계속하여, 방법이나 절차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임금의 마음과 의지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임금께서 큰일을 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몸소 행하여 근본이 맑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일이 순조롭게 추진되어 많은 신하들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먼저 자기를 닦고 나서 반드시 어진 사람을 높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은 벼슬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말을 듣고 거기에 따라 일을 시행해야 만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이 됩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어진 사람을 좋아하십니다만 불러서 벼슬만 시키실 뿐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참으로 도리를 지키는 선비라면 어찌 그런 허례허식을 위해서 벼슬을 하겠습니까?”

당시 선조가 행한 정치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직설적으로 언급하였다. 어진사람들을 채용하는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끈질기게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율곡도 대단하지만 신하의 따끔한 충고를 진지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듣고 있는 선조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이 시대의 정치가들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천하의 일은 임금의 마음에 달려있다”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09>

천하의 일은 임금의 마음에 달려있다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통치자인 대통령의 마음에 달려있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 나라는 독재국가일 가능성이 크다. 민주국가에서 통치자의 권한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국가의 세 권력, 즉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나뉘어 있는 것은 최고 권력자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제도이다.

 

고대 때부터 훌륭한 정치는 백성들이 그 통치자의 존재를 모르도록 하라는 말이 있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훌륭한 통치자는 그가 있는지 조차 모르게 하는 사람이다. 그 다음은 사람들이 그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를 칭찬하는 사람이다.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통치자다. 가장 좋지 못한 통치자는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이다. 통치자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는다. 훌륭한 통치자는 말을 삼간다. 통치자가 훌륭하여 정치가 잘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노자의 말을 빌린다면, 날마다 저녁 아홉시 골든타임 뉴스에 통치자의 뉴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방송된다면 그런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유교에서 바라는 훌륭한 통치자는 누구일까? 선조 6년(1573년) 10월 어느 날 율곡이 김우옹 등과 함께 선조임금을 모시고 인심도심설 강의를 할 때의 이야기이다.

선조 임금이 갑자기 이렇게 하소연을 하였다.

“우리나라 일은 참으로 하기 어렵구나. 한 가지 폐단을 고치려 하면 다른 한 가지 폐단이 또 생겨, 그 한 가지 폐단이 고쳐지기도 전에 그 폐단을 더하게 되니, 손발을 쓸 수 없구나.”

이이가 이를 듣고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일이 그렇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국가에 기강이 서지 않아서 인심이 많이 해이해졌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주어 구차하게 자리만 채운 자가 많습니다. 이들은 먹고 지내는 것만을 알 뿐 나랏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폐단을 고치라는 명령이 한번 내려지면, 먼저 꺼리는 마음을 품고서 받들지 않을 뿐더러 고의로 폐단이 생기게 합니다. 이것이 공을 들여도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율곡이 진단한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다. 첫째 기강이 서지 않았다는 점, 둘째 사람을 잘 가리지 않고 벼슬을 주었다는 점, 셋째, 일부러 폐단을 고치지 않는 개혁 반대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율곡이 선조에게 제시한 처방약은 다음과 같았다.

“위에서 임금이 먼저 스스로 뜻[聖志]을 정하여 반드시 다스려지기를 기원하며, 호오(好惡)·시비(是非)를 한결같이 천칙(天則)을 따라서 공정하게 하여 어지럽지 않게 되면 기강이 확립될 것입니다.”

 

율곡은 두 가지 사항을 요청했다. 먼저 임금이 개혁하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세울 것. 그리고 변함없는 원칙에 따라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할 것.

임금 자신이 개혁할 뜻은 없으면서 신하들 앞에서 입으로만 백번 개혁을 외쳐본들 궁궐 안 밖의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또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으니 국가의 기강이 헤이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을 듣고 옆에 있던 김우옹이 이렇게 거들었다.

“학문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많으나 옛사람의 말을 듣고 배워 그 진의를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몸과 마음에 꼭 필요한 공부를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옛글에 해박하더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선조 임금은 옛글을 읽기만 했지 자신이 몸소 실천하는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제가 보건대, 삼가 임금의 학문이 고명하여 아는 것이 매우 광범위하지만 정사 일에서는 그 보람을 보지 못하니,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인 병폐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정심(正心)·성의(誠意)의 설에 대해 옛사람이 이미 극진하게 말하였는데 이제는 도리어 절실하지 않게 여깁니다.”

선조 임금이 경전 공부를 많이 하여 박식은 하지만 정치에는 그것이 잘 활용되지 못하니 필시 그가 배운 공부에 문제가 있거나 임금 자신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신랄한 비판을 한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뜻을 정성스럽게 하라고 옛사람들은 말했으나, 임금은 이 말을 절실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일은 다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성의·정심에서 힘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잘 다스려지기를 기대하여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옛사람의 천만 가지 말이 모두가 매우 절실하나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敬)자 하나입니다. ‘경’자는 온갖 선이 있는 곳인데, 경을 논한 말은 매우 많으나 그 가운데에서 이른바 ‘정제(整齊)하고 엄숙(嚴肅)히 하면 마음이 곧 전일(專一)해지고 마음이 전일해지면 그르고 편벽된 것이 절로 없어지므로 이것을 간직하면 천리(天理)가 밝아진다.’는 말이 치밀하고 친절하니,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다 여기에 착수해야 합니다.”

뜻을 정성껏 가지고, 마음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경건한 마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였다.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편벽된 마음을 잘 다스린다면 천리가 밝아진다고 까지 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임금의 마음이 교만해지고 자만해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러한 말을 듣고 선조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옳다. 마음을 정제하고 엄숙히 하는 것을 어찌하여 착수할 곳이라고 하느냐 하면, 정제 엄숙은 외면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힘쓰기 쉽기 때문이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은 내면을 말한 것이어서 착수하기 어렵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이란 성리학에서 ‘경(敬)’자를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여 바깥의 사물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을 뜻한다. 선조는 이렇듯 아주 깊이 있는 성리학의 가르침을 술술 풀어낼 정도로 박식한 군주였다.

율곡은 이러한 선조 임금에 대해 다시 한번 따끔하게 충고를 하였다.

“마음을 정제하고 엄숙히 하는 것은 겉으로만, 즉 외모만을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의 모습만 그렇게 가지고, 실질적인 정치는 천리(天理)와 다르게 행하신다면 마음 자체가 원래부터 정제하고 엄숙한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성제(成帝)는 조정에 임하면 아주 조심스러운 모습을 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존엄하기가 신(神)과 같았으나 정치가 엉망이었으니 어찌 그 마음 상태를 경(敬)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를 듣고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 성제의 경우는 마음이 정제하고 엄숙한 것이 아니요. 그의 행동을 기록한 사관(史官)이 그 태도를 잘 수식하여 말하였을 뿐이오.”

선조 임금의 말을 듣고 있으면 잘 배운 학생과 같다. 또박또박 자기 할 말을 다하고, 또 조리에 맞게 말한다. 하지만 율곡이 보기에는 그것뿐이었다. 율곡은 실질적으로 정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목격하면서 선조의 부족함을 힘껏 지적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당시는 천하의 모든 일이 임금의 마음에 달려있는 시대였으니 그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도자는 겸손해야한다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08>

지도자는 겸손해야 한다

 

곡은 모두 네 사람의 임금을 모셨다. 중종, 인종, 명종, 선조이다. 그가 과거에 아홉 차례나 장원급제를 한 때는 명종 때였다. 명종 3년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명종 11년에 한성시에 수석합격을 하였으며, 19년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명경시에 또 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아홉차례나 장원 급제를 한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다.

율곡이 장원 급제를 한 시험을 보면 진사 초시, 한성시, 별시, 식년 문과초시, 전시, 복시 등 화려하다. 명종 때 그는 호조좌랑,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등에 임명되어 화려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젊고 똑똑한 율곡을 더욱 가까이 두고 국가의 큰 정치에 관여토록 한 것은 선조 대왕이었다. 선조는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33세 된 율곡을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에 임명하였다. 이 직책은 사헌부의 정5품 관직인데 보통 젊고 기개가 있는 인재들이 임명된다. 특히 문과 급제자 중에서 청렴 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굽히지 않고 직언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발탁되었다. 새로 맞이한 선조 시대의 대표적인 젊은 관료이자 학자로 율곡이 선택된 것이다.

선조는 반년쯤 뒤에 율곡을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로 임명하였다. 홍문관은 집현전과 같은 곳으로 임금에게 간언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겸직으로 임명된 경연시독관은 정5품 관직으로 임금의 공부에 참여하여 임금에게 책을 읽어주고 설명을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임금의 선생님이 된 것이다. 경연시독관은 경연이 끝나면 경연에 참석한 대신들과 국가 대사에 대해서 논의도 하고, 자문에 응하는 등 중요한 직책이었다. 선조의 율곡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임금의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또 율곡 자신의 임무가 임금을 가르치고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것이었으므로, 율곡은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직언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조 6년, 1573년 10월 12일 경연 때의 일이다.

임금이 경연의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인심(人心, 인간적인 마음)과 도심(道心, 도덕적인 마음)은 두 가지 마음이 아니다. 다만 마음이 생길 적에 도의(道義)로 나타나면 도심이라 하고 식색(食色)과 같은 욕망으로 나타나면 인심이라 하는데, 욕망이 절도에 맞는 것도 곧 도심이다.”

율곡이 이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의리에 대하여 소견이 정밀하신데 어찌하여 이 마음을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옮기지 않으십니까. 요즈음 보건대, 천시(天時)·인사(人事)가 날로 점점 어그러져서 천재지변이 거듭 나타나도 예사로 여겨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강이 풀리고 인심이 흩어져서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이니, 임금께서 큰 뜻을 분발하여 퇴폐를 정돈하지 않으신다면 흙더미가 무너지는 형세가 얼마 안 가서 올 것입니다.”

임금이 그동안 배웠던 것을 정리하고, 나름대로 생각해서 인심과 도심에 대해서 한마디 하였는데, 젊은 율곡은 그것에 대해서 오히려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모습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왕 앞에서 다소 지나친 발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율곡은 당시 조정의 안팎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삼품의 홍문관 직제학으로 자신의 맡은 바 임무가 바로 그러한 직언이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선조 1년 때(1568년)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된 뒤에 외할머니의 병환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강릉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선조 3년 때(1570년) 신병으로 사퇴하고 해주(海州)에 가 있었다. 선조 4년 때 홍문관 교리,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이조 정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퇴하고 해주로 돌아가 거기에서 은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선조는 재임 5년차 되던 때(1572년) 그를 다시 사간원 사관, 홍문관 응교, 홍문관 전한 등에 임명하였다. 율곡이 이들 관직을 모두 사퇴하였으나 그 다음해(1573년, 선조 6년) 선조는 다시 그를 직제학으로 임명하여 궁중에 가까이 그를 불러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선조의 신임이 이러하였으므로 거기에 부응하여 나라를 위하고 선조 대왕을 돕는 절실한 마음으로 궁궐 내외부의 사정을 위기 상황으로 진단하고 간언을 한 것이다.

율곡은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성인(聖人)에게도 스승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반드시 자기보다 어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한마디 선한 말로써 스승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꼴 베고 나무하는 자의 말도 성인이 취택하였던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반드시 탕(湯) 임금의 훌륭한 스승인 이윤(伊尹)과 같아야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임금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만족하게 여긴다면 선한 말이 어디로부터 들어오겠습니까. 반드시 널리 널리 들어서 선한 말을 가려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신하들이 다 나의 스승이 되고 선한 말들이 임금의 몸에 모여서 덕업이 높고 넓어지게 됩니다. 이제 전하께서 겸허하고 퇴양(退讓)하시는 것이 하교(下敎)에 나타났으니, 신은 감격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율곡은 임금의 신분이면서 선조가 자신의 직언을 듣고 싶어 하고 겸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다만 겸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스스로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르면 이는 선을 행할 근본이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 물러서서 일을 맡기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또 분발하여 떨쳐 일어날 뜻이 없으면 겸양이 도리어 병폐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의 말씀은 겸허하시지만 공론을 따르지 아니하며, 스스로 옳게 여기고 남을 그르게 여기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도리어 남을 나만 못하게 여기는 병폐가 있는 것이니, 신은 답답합니다.”

선조가 겸허하고 겸손하기는 하지만 공론을 따르지 않고 자신은 옳고 남은 그르다고 판단하며,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궁중의 병폐가 생기고 나아가 백성들의 고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율곡은 임금의 마음가짐이 이러하니 그것이 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조정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설명하였다.

“오늘날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세 정승)은 다 인망이 있으니 어찌 자신들의 의견이 전혀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봉록만 받아먹고자 하겠습니까. 의견을 개진하려고 하여도 임금님의 뜻에 거슬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도리어 임금의 덕에 누가 될까 염려하므로 아무 말 없이 답답하게 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임금님의 뜻이 나라가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면 대신들도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하고 조정의 신하들도 각각 품은 뜻을 아뢸 것입니다.”

왕 되는 사람이 신하들의 의견을 잘 들어주지 않으니 모두 답답하게 입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최고위 관료들인 정승들도 입을 닫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임금이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만약 대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자신의 생각을 각각 다 말한다면 율곡이 이렇게까지 나서서 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율곡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그가 맡은 역할과 임무가 바로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400여년 전, 왕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던 왕조시대의 일이지만 요즘 되새겨 읽어도 그의 발언은 신선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순서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07>

나라를 다스리는 순서

 

슨 일에나 순서가 있는 법이다. 먼저 해야 할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일에도 본질적인 부분이 있고 지엽적인 부분이 있다. 본질을 잘 꿰뚫어 추진하고 그것을 잘 완수하게 되면 지엽적인 것들은 자연히 잘 정리가 된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일의 본질을 잘 파악해서 처리한다. 잘못하는 사람은 두서없이 일을 하다 지엽적인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정작 중요한 부분은 미숙한 채로 일을 끝낸다.

조그마한 일도 이러한데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어떻겠는가? 율곡이 선조 대왕에게 성학(聖學, 통치를 위한 임금의 학문)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대해서 강론할 때(1573년 10월 12일)의 이야기다.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내 성품이 어리석고 둔하여 감히 큰일을 할 수가 없다.“

율곡이 말했다.

“대왕의 성품이 원래부터 영리하고 총명하지 못하신다면 저도 절망하겠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영리하고 총명하시지만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큰 뜻을 분발(奮發)하지 못하시니, 이것이 신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필부(匹夫)가 글을 읽고 몸소 행하는 것도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뜻이 있는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한 나라의 백성을 맡아서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가졌고 할 수 있는 자질을 타고나셨으니 어찌 스스로 분발할 뜻이 없겠습니까?”

율곡은 먼저 임금님을 추겨 세웠다. 임금님의 자질도 충분하고 정치를 잘 하고자 하는 의욕도 강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향약(鄕約)은 삼대(三代)의 법인데 전하께서 거행하라고 명하셨으니 참으로 근대에 없던 경사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삼대의 법’이란 중국 ‘하은주’ 시대의 법이라는 뜻으로 이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졌던 시대에 실시하였던 법, 즉 훌륭한 제도라는 의미다.

향약이란 향촌 사회의 약속, 즉 자치 규약을 말한다. 율곡은 이러한 대화가 이루어지기 2년 전에 청주목사로 부임했었다. 그 때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토대로 서원향약(西原鄕約)을 제정하여 청주 지방 백성들의 자치 능력을 키워주고자 하였다. 그 다음해 병으로 청주에 계속 있지 못하고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가 뜻했던 향약의 실시는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율곡은 자신이 추진했던 향약을 이야기 하면서 “모든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다”고 하였다. 본질적이면서 우선시해야 할 부분이 있고, 지엽적이며 나중에 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한 뒤에 만민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향약은 만민을 바르게 하는 법입니다. 조정과 백관이 아직 바르게 되지 않았는데 먼저 만민을 바르게 하려 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어서 일이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향촌의 자치 규약이라고 할 수 있는 향약의 기본 정신은 유교 사상에 바탕을 깔고 있다. 서로 덕업을 권하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며, 예속으로 서로 사귀며, 환난을 당해서 서로 도와서 구하자는 내용이다. 율곡도 충주목사를 하면서 서원향약을 만들어 추진하였는데, 향약은 백성들을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도덕적으로 이끄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나쁜 의미로 말한다면 ‘자치’라기 보다는 관주도형의 농촌 계몽운동, 혹은 시민 계몽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부에서 주도를 하게 되면 자칫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고, 추진하는 자에 따라서는 민간 탄압의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율곡은 이 점을 분명히 경계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정과 백관이 아직 바르게 되지 않았는데 먼저 만민을 바르게 하려 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어서 일이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한 것이다. 윗물이 흐린데 어찌 아랫물이 맑게 되기를 바라겠는가?

“임금이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한 뒤에 만민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곡의 한마디 한마디가 일의 순서와 본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기본이 안 갖추어져 있는데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율곡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미 성전(盛典, 즉 향약)을 거행하였으니 중지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시어 조정에 시행함으로써 정령(政令)이 다 올바른 데에서 나오게 한 뒤에야 백성이 감동되어 흥기하게 될 것입니다.”

‘성전’이란 향약의 실시를 말한다. 기왕에 추진한 향약을 중지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임금이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도록 건의하였다. 백성들에게 펴고자 한 ‘향약’의 규정을 임금부터 스스로 힘껏 실천을 한 뒤에 조정에서 시행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 뒤에 정부의 정책과 명령이 올바른 데에서 나오게 한다면 백성들도 감동하여 즐거이 향약을 실천할 것이라고 한다.

요즘의 정치 상황에도 잘 맞는 말이다. 어떤 정치가들은 국민을 계몽하고 가르치고 훈계하려고 한다. 율곡에 따르면 국민을 가르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국회의원, 정치가, 고위직 공무원부터, 가장 위에는 대통령부터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한 뒤에 만민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조정과 백관이 아직 바르게 되지 않았는데 먼저 만민을 바르게 하려 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어서 일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려면, 본질적인 부분이 우선적으로 잘 다스려진 뒤에야 나라 전체가 잘 다스려진다고 역설한 442년 전 율곡의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06>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이유

 

‘나라를 다스린다’라는 말은 요즘 보통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쓰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을 한자말로 바꿔보면 ‘치국(治國)’이다. ‘치국’이란 전통시대 지식인들에게는 흔히 쓰는 말이었다.

특히 중국의 고대 문헌에는 매우 빈번하게 이 ‘치국’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당시에는 ‘국가를 다스린다’는 치국의 개념이 매우 중요했다. ‘지식’이란 국가 통치를 위한 지식이었고, ‘지식인’이란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 글을 배운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유교사상에서 ‘치국’은 대개 ‘평천하(平天下)’와 함께 어울려 등장한다.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 혹은 ‘천하를 평정한다’는 뜻의 ‘평천하’는 사실상 ‘치국’과 같은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라 ‘국(國)’자는 우리나라를 통째로 지칭할 수 있는 글자이지만 중국에서는 한 지방을 뜻하는 의미가 강하다. ‘천하(天下)’라는 말이 비로소 중국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평천하’는 ‘중국 전체를 평화롭게 한다’는 뜻이며, 그것은 바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와도 바꿔 쓸 수 있는 것이다.

유교에서 사서(四書)의 한 권인 대학에 ‘치국, 평천하(治國, 平天下)’라는 문장이 나온다. 두 단어를 나란히 이어서 쓰면서 ‘나라를 잘 다스려야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정치가란 어떤 한 지방을 잘 다스려야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전통시대 유교 지식인은 유학 공부를 시작하면 우선 맨 처음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 평천하’라는 말부터 배운다. ‘치국 평천하’ 앞에 ‘수신제가’라는 말이 붙어 있다. ‘수신’이란 자기 몸을 닦는 것, 즉 도덕적인 수양을 하는 것이다. ‘제가’란 집을 가지런히 한다, 즉 집안을 잘 다스린다는 의미다. 요즘은 ‘집’이란 뜻이 한 가정의 의미가 강하지만, 고대에, 특히 중국에서 ‘가(家)’란 ‘국(國)’이나 마찬가지로 한 지방을 가리키는 의미가 강했다. 작은 지방은 ‘가’, 큰 지방은 ‘국’이었다. 고대의 농경시대에 가족은 보통 대가족을 이루어 수 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살았다.

우리나라 시골에도 옛날에는 하나의 성씨를 가진 일가친족이 모여서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그런 마을이 더 커서, 마치 하나의 정치 공동체처럼 집단을 이룬 경우가 많았다. 그런 집단을 ‘가(家)’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가’란 역시 ‘치국’이나 ‘평천하’의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조그마한 집단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란 그러므로 ‘자기 몸을 잘 다스리고 수양을 하면, 작은 집단을 잘 다스리고, 나아가 더 큰 집단도 잘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중요한 포인트는 ‘자기 몸을 잘 다스리라는 것이다.’

유교적 교양을 가진 전통시대 지식인은 어떤 집단을 다스리는데 문제가 있을 경우, ‘수신’의 문제를 따진다. 자기 몸을 잘 다스리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가정이나 어떤 지방이나 나아가 국가 전체를 잘 다스리겠냐는 것이다.

과거에 수차례나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한 율곡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정치 문제를 파악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유학자들과는 좀 더 다른 혜안이 있었다.

선조 대왕 때(6년, 1573년, 10월 12일) 경연의 자리에서 임금이 율곡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물러가서는 오지 않았는가?”

율곡이 병을 핑계대고 관직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던 일을 생각하고 묻는 것이었다.

율곡이 말했다.

“신은 병이 깊고 재주가 없어 스스로 돌아봄에 큰일을 할 수가 없는데 나라의 봉록만을 먹는 것은 참으로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므로 물러가서 죄를 면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감히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그대의 죄는 내가 아는 것이니 지나치게 겸양하는 말을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다시 물러가지 말도록 하라. 그대는 물러가 있어도 자주 소장(疏章)을 올렸으니 나랏일을 잊지 않는 것을 알 만하다.”

율곡은 초야에 있을 때도 국가의 일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임금에게 올렸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깊은 것을 확인하고 선조 대왕에게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냈다.

“신은 초야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임금님의 학문성과가 얼마나 성취되셨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임금이 깊은 궁궐에 깊이 있으면서도 참다운 덕이 있다면, 백성들이 보고 느껴서 사방이 감동하는 법입니다. 헌데 오늘날 백성들이 초췌하고 풍속이 퇴패한 것이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율곡이 본 초야의 백성들은 태평성대의 시대에 볼 수 있는 백성들이 아니었다. 폭군이나 무능한 임금의 시대에나 볼 수 있는 백성들이었다.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莫此爲甚]’고 하였으니 얼마나 실망스러운 상황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구절에 친숙한 보통의 유학자라면, 백성들의 고통은 임금의 수양 부족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거기에서 그친다. 율곡도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좀 더 발전된 진단을 내놓는다.

“신은 성학(聖學, 임금의 수양공부)이 날로 밝아지기를 기대했었으나 끝내 보람을 보지 못하니, 신은 참으로 괴상하게 여깁니다. 성질(聖質, 임금의 성품)이 영명(英明)하시어 참으로 큰일을 하실 수 있는 자질이신데, 즉위하신 처음에 높은 신하들이 잘못 보좌하여, 매번 비근한 사례를 끌어대어 선비들의 말을 물리치고 억눌렀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도록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임금님이 수양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나 그 보람이 없었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로 조정의 높은 대신들이 하급 공무원들, 혹은 재야의 선비들이나 지식인들의 좋은 의견을 무시하고 억눌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원문을 보면 율곡은 이들을 ‘유자(儒者)’, 즉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요즘 말로 바꾼다면 궁중에서 지식인들의 자유스러운 의견을 대신들이 막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바꿔 말하자면 정부에서 언론 통제를 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선조 대왕 자신이 막은 것은 아니겠지만, 대신들이 막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결국은 백성들이 임금의 마음과는 달리 생활이 궁핍하고 행동이 퇴폐해지게 된 것이다.

아직 삼권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민주’나 ‘자유’, ‘인권’의 개념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이야기이지만, 정치에 있어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율곡은 지적하고 있다.

지금은 민주주의의 시대이며 인권과 자유가 시민들이 향유하는 삶의 최고의 가치로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요즘 일부 정치인들은 그러한 것을 무시하고 표현 통제, 언론 통제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정치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정치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율곡에게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