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사신과 ⌈시경⌋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2

명나라 사신과 ⌈시경⌋

 

교 경전 중에 ⌈시경⌋이 있다. ‘시(詩)의 경전’이라는 뜻의 ⌈시경⌋은 ⌈예기⌋,⌈춘추⌋,⌈역경⌋, ⌈서경⌋과 함께 오경(五經) 중 하나로 꼽는다. 이는 중국 최초의 시가집 혹은 민요집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제자 교육용으로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당나라 때 ‘오경’에 포함되어 ⌈시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시경⌋은 원래 ⌈제시(齊詩)⌋,⌈노시(魯詩)⌋, ⌈한시(韓詩)⌋, ⌈모시(毛詩)⌋의 네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지만 ⌈모시⌋만 남고 모두 멸실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경⌋은 모시로 불리기도 한다. 주나라의 시(詩)라는 뜻에서 ⌈주시(周詩)⌋라고 불리기도 한다.

시경⌋에 실려 있는 시는 모두 311편인데 이중 6편은 제목만 있고 가사가 없다. 전체는 풍(風), 아(雅), 송(頌)의 노래로 분류되어 있는데 ‘풍’은 각지에서 수집된 민요로 사랑의 노래나 일을 하면서 하는 노래가 많다. ‘아’는 연회 때 사용된 노래 가사이며, ‘송’은 제사 지낼 때 사용된 노래 가사다. ‘아’와 ‘송’은 주 왕조를 찬양하는 노래가 많다. 이러한 ⌈시경⌋의 노래 가사를 통해서 우리는 주나라의 사회와 풍속, 나아가 그 시대의 정치와 사상,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노래가 이른 것으로는 서주시대, 즉 주나라 초기의 것도 있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시경⌋에 보이는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

(⌈논어⌋<위정>)

라고 하였는데, 시를 쓰고 읽는 마음에는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의 고대 때부터 외교 현장에서는 적절한 ⌈시경⌋의 글귀를 사용한 외교적 교류가 적지 않았다. 율곡의 생존시대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현장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보인다.

1537년 중종 32년, 율곡이 태어난 다음 해의 이야기다. 중종(中宗, 1488-1544)은 연산군의 뒤를 이어 반정으로 임금이 된 왕이다.

그해 3월,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파견되어 궁중에 들어왔다. 3월 10일(음력)에 왕이 경복궁의 태평관에서 하마연을 베풀어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하였다. 이 때 중종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경(詩經)⌋에 ‘즐겁구나, 우리 님은. 나라의 빛이로다[樂只君子, 邦家之光]’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대인 같은 훌륭한 분을 모셨는데 만일 어질고 지혜로우신 명나라 황제의 고마우신 분부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뵙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명나라 황상의 은덕이 망극합니다.”

라고 하였다.

당시 환영 만찬에서는 우리나라 전통의 토속악이 배경 음악으로 흐르고 있었다. 원래 중중이 인용한 ⌈시경⌋의 「남산유대(南山有臺)」는 중국 고대에 손님을 접대하는 연회에서 자주 사용되던 노래였다. 그 시경의 구절을 이용하여 중국측 사신들에게 조선의 문화적 수준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명나라 사신들을 이미 조선의 예법이 섬세하고 수준이 높다는 점을 인식하고 조선의 국왕에게 이미 다음과 같이 감탄의 인사를 한차례 전한 차였다.

“저희들이 처음 명나라 조정을 떠나올 적에 어찌 귀국의 예의가 이와 같이 아름다울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곳에 와서 보니 온 각지의 고을 관원들은 일마다 예를 다하여 온갖 법도가 참신하였으니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사신의 한사람인 부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국왕께서 신민들을 잘 가르쳐 하는 일이 모두 법도에 들어맞으니 대단히 감탄스럽습니다.”

 

외국 사신에 대하여 ‘예의가 아름답다’거나 ‘예를 다한다’는 개념은, 국가 간에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현대적인 외교 관례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당시의 국제질서 아래에서는 격식을 잘 갖춘 외교적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국왕의 ⌈시경⌋ 글귀를 전해들은 명나라 사신의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께서 대국을 섬기는 정성이 이러하시니 이는 반드시 황천(皇天)이 도와주어 우리 대명(大明)과 기쁘고 슬픈 일을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만세토록 무한한 복입니다.”

이어서 명나라 부사(副使) 역시 시경의 문구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경⌋에 ‘울타리가 되시고 담 기둥이 되시니, 모든 제후들이 본받으시네.[立屛之翰, 百辟爲憲]’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전하의 위엄과 권위를 직접 뵙고 보니 참으로 훌륭한 임금이십니다.”

중국의 천자를 지극한 마음으로 섬기는 조선의 국왕의 모습이 다른 모든 제후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는 말은 요즘의 국가 관념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측면도 있지만, 천하주의적이며 중화주의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살았던 전통시대에는 자연스러운 외교적 수사로 이해할 수 있다.

명나라 사신이 인용한 ⌈시경⌋의 문구 바로 뒤에는 ‘굽은 쇠 뿔잔에 맛있는 술을 부어 올린다.’라는 문장이 이어지고 있어 당시 술을 주고받는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워주는 의미도 있었다. 연회가 끝나는 순간에는 또 ⌈시경⌋의 문구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갔다.

 

임금: “흐뭇한 술자리가 밤에 벌어졌으니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명나라 사신 :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

임금: “내게 맛있는 술 있어 좋은 손님 잔치하며 즐기시네…마음으로 사랑하거늘 어찌 말하지 않으리. 마음속에 품고 있거늘 어찌 하루라도 그대를 잊으리.”

 

외교적인 수사가 가득 담긴 ⌈시경⌋의 문구를 적절히 사용하여 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즐겁게 만드는 광경이다. 당시는 ⌈시경⌋ 속에 들어있는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또 그것을 한자도 틀림없이 외우고 있어야 국제적인 교류가 가능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조선시대의 궁중에서 유교 경전의 위상이 어찌하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