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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李承龜:1865~1931)


이승구(李承龜:1865~1931)                                 PDF Download

 

북 괴산(槐山) 사람이다.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군자금(軍資金)을 지원하고,  의병 대장 이강년(李康䄵)이 순국(殉國)하였을 때 제문을 지었다.
1895년에 일제는 국모(國母)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더니,  이어서 친일정권(親日政權)을 사주하여 단발령(斷髮令)과 복제개혁(服制改革)을 강행하였다.  이에 우리의 민중과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친일정권에 항거하였다.
그 가운데도 유인석 의진은 다른 의병진과는 달리 전투력을 갖춘 의병으로 가장 활발하게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승구는 유인석 의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뒤에서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지원하여 의병들이 대일 항전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을미의병이 해체되고 유인석 의진이 만주로 망명하였을 때에도 그는 계속해서 유인석과 연계를 맺고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후 일제는 1904년 2월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여 침략을 본격화 하였으며,  마침내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자주적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듬해 1월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우리나라를 준식민지 상황으로 몰고 갔다.

이에 격분한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항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7년 7월에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에 따라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우리 군대는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은 급기야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 되어 갔다.  그때 이승구는 유인석과 이강년 등과 함께 거의를 하고자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부모의 병환이 위중하여 동참하지 못하였다.  의병대장 이강년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지금의 일은 먼저 내적(內賊)을 토멸한 후에 타적(他賊)을 의논해야할 때 입니다.…중략…
형은 거상(居喪) 중이라 감히 같이 고생할 것을 바랄 수는 없지만 참진(參陣)한 것이나 그 요체는 한가지입니다.”

라고 하면서 의거에 동참하지 못한 그를 위로하였다.

이는 그들의 친분 관계가 각별 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거니와,  그 뒤 1908년에 이강년이 순국(殉國)하자 그가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의병장의 업적을 기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친분 관계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생사를 함께하겠다는 의기가 투합된 나머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높이 사서 정부에서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다.

<참고자료>
군자금기부자명단
위당선생삼세록(박한설편, 1983) 177면
의암문하동문록
벽진이씨대동보(1962) 2편108면
운강이강년의서신(1907.6월)
치당이승구유고(간행년도미상) 하권57·77면
국가보훈처자료(http://www.mpva.go.kr/narasarang/)

이병운(李柄運: 1858∼1937)


 

이병운(李柄運: 1858∼1937)                               PDF Download

 

관은인천(仁川), 자(字)는 덕칠(德七), 호(號)는 긍재(兢齋) 또는 창계(蒼溪)이며, 이억상(李億祥)의 아들로 고려조(高麗朝)의 소성백(邵城伯)을 지낸 이허겸(李許謙)의 후손이다.   그는 기호학(畿湖學)의 적전(嫡傳)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형제에게 사사하여 긍재(兢齋)란 호를 받았다.

1888년(고종25)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경학(經學)으로 도천(道遷)을 입어 관직에 올랐으나 당시 사회적인 변란으로 시사(時事)가 불길(不吉)하자 낙향(落鄕)하였다.
1896년에 도백(道伯)이 참서관(參書官)의 직첩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집간행(文集刊行)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만년에 채국정(採菊亭)을 짓고 후진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서신(書信)의 왕래는 서찬규(徐贊奎), 장승택(張升澤), 민영환(閔泳煥), 최익현(崔益鉉), 박해규(朴海奎), 우성규(禹成圭) 등과 주로 하였으며,  문집으로는《긍재집(兢齋集)》14권 4책이 있다.
이 문집은 목활자본(木活字本)으로 되어있으며,  1942년 그의 동생 병선(柄選)이 편집하여 간행한 것으로, 서문과 발문은 없고,  끝에 간기(刊記)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시(詩) 작품은 대부분 자연과 인생을 소재로 읊은 것과 차운한 것이 많다. <춘우후음(春雨後吟)>은 도연명(陶淵明)의 의경(意境)을 본떠서 지은 은일적(隱逸的)인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 밖에 최익현(崔益鉉)을 따라 전국의 유적지를 다니며 차운(次韻)한 시와 황재찬(黃在瓚)과 안효제(安孝濟)등 명사들에 대한 만사(輓詞)도 주목해 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청오현승무소(請五賢陞廡疏)>는 1888년에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으로 있을 때 올린 것으로, 김정(金淨), 김상헌(金尙憲), 민진원(閔鎭遠), 권상하(權尙夏), 이재(李縡) 등의 문묘배향을 요청하는 상소이다.  그는 이 상소문에서 도학(道學)은 사문(斯文)의 준칙이요, 유현(儒賢)은 국가의 원기(元氣)라고 지적하면서,  다섯 유현의 도학과 덕업과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여 소상히 밝혔다.   그런가하면 그의 작품 중에 <등명(燈銘)>과 같은 글도 있어 살펴보기로 한다.

밝혀 놓은 등불 하나가                一點燈火
내 책상 위에 놓여있어                在我案頭
밝은 빛이 환히 비추니                 光明炯澈
마치 태양이 비춘 듯하네           若太陽流
이것을 가지고 비추면                 以之爲燭
어둠을 죄다 밝히리니                可破黑窣
너의 지시를 따라서 가면           賴爾指南
앞서간 자취를  찾게 되리라     得尋前轍
어찌 하면 남은 빛을 빌려와     安借餘光
사방에 두루 미치게 할까           遍及四方
시절을 어찌할 수 없으니           時也無奈
외롭게 임당만 비출 뿐이네      孤照林堂
성현의 책을 대하고 있으니      對越聖賢
해는 저물고 밤만 깊어가네      歲晏夜長

등불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어둠을 밝히는 데 있다.  그러나 작자는 이작품을 통해 단순히 등불을 밝혀 놓고 글 공부를 하려는게 아니다.  작자는 이 작품을 통해 현실과 자신과의 괴리현상을 잔잔한 목소리로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시운이 그러하고 시절이 그러한 현실을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하지 못하니 그저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그저 바람만 가진 채 긴 긴밤을 조용히 보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그런 작품이다.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작품이기도 하다.

서(書)에는 송병선(宋秉璿), 송병순(宋秉珣), 서찬규(徐贊奎), 장승택(張升澤)등의 선배 학자들에게 사칠론(四七論)과 이기설(理氣說)과 예설(禮說)에 관하여 질문한 것과 김유연(金有淵), 민영목(閔泳穆), 민영환(閔泳煥) 등 당시 정부의 고위 관리에게 보낸 것, 기타 김두한(金斗漢), 서건수(徐健洙) 등에게 경의(經義)와 예설에 관하여 답한 것 등 그 분량이 방대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특기 할 만한 것은 외손자 구자덕(具滋德)에게 답한 짧은 편지가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린데 혹시라도 덧없이 들떠서 지낼까 염려되어 곁에 두고 진보가 있기를 바라고자 하였다.  그런데 지금 장산(獐山)으로 가서 글을 읽겠다고 하니 너는 또한 이 학문에 뜻을 오로지 두려하느냐?  한결같이 여기에 마음을 붙이고 공부해 간다면 무슨 이치인들 뚫지 못 할 것이며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느냐?  다만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지 못할까 염려 되니,  세상이 변했다 고조금도 저상 되지 말고,  도가 어긋 났다고 혹시라도 해이 하지 말거라!  공자의 말씀에
“도가 사람에게서 먼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으니, 다만 일용사물(日用事物)의 사이에 있을 뿐이다.  또 “죽은 뒤에야 그친다.” 하였으니 어찌 잠시라도 머뭇거리며 동요 할 수 있겠느냐?  이를 생각도록 하여라.

길지 않은 짧은 편지를 외손자에게 답장으로 보낸 것이다.  이 글에서도 시대의 변화에 대하여 흔들리지 말고 글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타이르는 자상스런 말속에 애정 어린 충고가 담겨 있기도 하지만 , 그 보다도 시대가 변해가고 있는 현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에 항상 긴장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다보니 나이 어린 손자가 세상 모르고 들떠서 지낼까봐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말의 유학자들이 대부분 이러한 정서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한통의 편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잡저(雜著)의 <계상어록(溪上語錄)>과 <채국정만록(採菊亭漫錄)>은 경의(經義)와 이기(理氣), 심성(心性),  기질(氣質)  인물성(人物性) 등 성리학에 관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회유 대구유림문(回諭大邱儒林文)>은 대구의 유림들에게 알리는 글이다. 또 그가 쓴 경인계첩(庚寅契帖)의 서문은 1916년에 대구 출신 유학자인 우재악(禹載岳)을 기리기 위하여 지역 유림들이 결성한 계첩에 대한 서문으로,  계원들이 그의 학문을 배우고 도를 본받는데 게을리 하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이 글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시대까지 대구지역의 유림의 동향과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國譯兢齋文集》, 彩菊亭刊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嶺南鄕約資料集成》, 嶺南大學校出版部.

이현익(李顯益: 1678∼1717)


이현익(李顯益: 1678∼1717)                             PDF Download

 

의 자는 중겸(仲謙), 호는 천산재(天山齋)· 낙오헌(樂吾軒)· 정암(正菴)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조부는 이시휘(李時輝)이며 부친은 이홍(李泓)이다.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주부(主簿)인 박선(朴銑)의 딸이다.  그는 반남 박씨(潘南朴氏)인 박태하(朴泰夏)의 딸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그가 활동 했던 조선 후기는 호락논쟁(湖洛論爭)이 한창이었다. 호락논쟁은 노론(老論) 계통의 학자들 사이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벌였던 논쟁이다.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韓元震:1682∼1751)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湖西:지금의충청도일대) 지방에 거주하였고,  사람과 사물의 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李柬:1677∼1727)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낙하(洛下:지금의서울일대) 지방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호서와 낙하의 논쟁’ 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이현익은 노론에 속하는 유학자로서 송시열(宋時烈:1607∼1689), 김창협(金昌協:1651∼1708),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계통을 이어 예론(禮論) 등 에서도 송시열을 적극 변호하였고 호락논쟁에서도 스승인 김창협을 이어 호론을 지지하였다.

우선 그가 평소에 추구해 온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의 호(號)가 주목된다.  그의 문집인《정암집(正菴集)》7권에는 <정암기(正菴記)>가 실려있는데,  자신의 호를‘ 정암(正菴)’ 이라 지은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람의  한 몸은 마음이 주인이 되니, 이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법칙이 공허하게 된다. 의(意), 지(志), 식(識) 또한 이 마음속의 물(物)이니 마음이 더욱 바르지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자사(子思)가 말한 존덕성(尊德性) 존덕성(尊德性): 《중용장구(中庸章句)》 27장에 보이는 구절이다. 주자의  주(註)에 의하면, “하늘로부터 받은바른 이치가 덕성(德性)이고, 이를 공경하고 받들어서 지키는 것이 존(尊)이다.”라고 하였다.이며, 맹자(孟子)가 말한 존심양성(存心養性) 존심양성(存心養性): 존양이라고도 한다. 《맹자 》 <진심(盡心)상(上)>에서 “자기의 본심을 간직하고 자신의본성을 기르는 것이 바로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비롯하였다. 여기서 심은 측은·수오·사양·시비의4가지 마음으로 사단이라 하며, 성은 천부의 선한 성을 가리킨다. 존심양성이란 인간의 본심인 사단의 보존을통해 인간이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본성인 인의예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말한 거경(居敬) 거경(居敬):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덕성을 닦음을 이른다.   공부가 이것이다. …중략…

지금 심(心)을 근본으로 삼고 의(意)를 긴요하고 절실하게 하며 지(志)와 식(識)을 입문하는 곳[入門處]으로 삼아서 공부를 하여 매일 새롭게 한다면 몸도 역시 자연스럽게 바르게 될 것이고 언행도 한결같이 바른 데에서 나올 것이니, 이와같이 한다면 성인(聖人)과 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몸이 위주가 되고 의(意)와 지(志)와 식(識)을 포괄하는 심(心)을 바르게하여성인의경지에이르겠다는의지를‘정(正)’이란한글자에담고있으니,이를통해그가평소에무엇을추구해왔는지를충분히짐작할수 있겠다.
그리고 그는 40세의 짧은 삶을 사는 동안 관직(官職) 생활보다는 학행(學行)으로 더 이름이 알려졌으며,  문장(文章) 보다는 경술(經術)에 더 명성이 있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영조 34년 11월  6일조의 기록에 보인다.

“지금 강(講)하는 《대학(大學)》은 바로 임진년에 사부(師傅)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7년 동안 시탕(侍湯)하다가 신축년에 저군(儲君)이 되어서비로소 강을 끝마치게 되었다.” …중략…

또 하교하기를,

“옛날에 이곳에서 내가 가르침을 받은 것은 바로 고인이 된 사부 이현익(李顯益)으로부터였는데, 오늘 일어나는 감회때문에 내 마음이 서글프다. 그 아들을 해조(該曹)에서 특별히 채용하도록 하라.”

영조(英祖)가 동궁시절에 이현익으로부터 《대학(大學)》을 배우던 때를 잊지 않고 그의 자식에게까지 벼슬을 내려주도록 명한 것은 대단한 은전(恩典)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현익이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호(驪湖) 이양행(金亮行:1715∼1779)이 쓴《정암집(正菴集)》의 서문에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선생이 삼주(三洲)에서 강학 하실 때 따르던 선비가 매우 많았으나,  선생의 설(說)을 독실하게 믿어 목표로 삼고 정성을 다하여 생각하고 혼신을 다해 실천[精思力踐]우뚝 명가(名家)를 이룬 자로는 정암이 최고였다.”

라는 평을 보아도 그의 학문적 성취가 어떠 했는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겠다.  다시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1673∼1744)  이덕수(李德壽): 이덕수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인로(仁老), 호는 벽계(蘗溪) 또는서당(西堂)이다. 참판 징명(徵明)의 아들이며 김창흡과 박세당의 문인이다. 가 남긴 그에 대한 만시(輓詩)를 살펴보기로 한다.  제목은 <이중겸을 애도하는 만시[李仲謙挽]>로 되어 있다.

그대 같이 호학한 이 세상에 누가 있으랴
好學如君世孰方

삼주노자 그댈 보고 승당을 허여하셨네
三洲老子許升堂

분석해온 의리들은 명주실처럼 세밀하고 주자의 화상을 그려놓고 <회암선생 주문공 화상찬(晦庵先生朱文公畵像讚)>을 지었다. 이 화상찬에서 주자의 학문을 기리면서 “현묘하고 은미한 의리는, 누에실과 소털처럼 자세히 분석했네. 마음은 넓고 넓어서,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았네. 호걸스런 재주요, 성현의 학문이었도다. 경성과 상서로운 구름이요, 태산과 교악이셨네.
[義理玄微, 蠶絲牛毛. 心胸恢廓, 海闊天高. 豪傑之才, 聖賢之學. 景星慶雲, 泰山喬嶽.]”라고 찬양한 것에 전거를 둔 표현이다.

柝來義理蚕絲細

강학하던 곳 풍류는 고비 고비(皐比): 범의 가죽. 강석(講席). 옛날에 스승이 앉는 자리에는 반드시 호피(虎皮)를 깔았으므로 강석(講席)을일컫는 말로 쓰인다. 가 향기롭네
講處風流臯比香

백리 밖의 현악 현악(絃樂): 노(魯)나라의 자유(子遊)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어 예악(禮樂)을 가르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현(絃)을 뜯으며 노래하였다고 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보인다. 소리 무성마을 재상인지
百里絃歌武城宰

오랜 세월 믿기 힘든 수문랑 수문(脩文): 수문은 전장제도(典章制度), 예악교화(禮樂敎化) 등의 문교를 닦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 되더니만
千秋疑信脩文郞

선유동의 하늘에 뜬 마음 아픈 저 달만이
屳遊洞裡傷心月

밤이 되면 맑은 빛이 옥량 위를 비춰주네
夜夜淸輝滿屋梁  《서당사재(西堂私載)》 1권에 실려 있다.

시의 수련(首聯)에서는 이현익이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김창협이 그의 학문적 성취를 인정하여 준 것을 묘사하였다.  함련(頷聯)에서는 주자(朱子)와  같이 의(義)와 리(理)를 치밀하게 고증하였으며 훌륭한 강의(講義)를 하였다고 했다.  또한 경련(頸聯)에서는 그가 예악(禮樂)을 숭상하였음을 언급하고,  미련(尾聯)에서는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나 슬픈 작자의 심정을 달에 투영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생애와 업적·있겠다.

<참고문헌>
이현익, 《정암집(正菴集)》.
이덕수, 《서당사재(西堂私載)》.
전재동, 『正菴李顯益의論語 해석연구』자료소개와 「論語說」분석
을중심으로」,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18,2011.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이존중(李存中: 1703∼1761)


이존중(李存中: 1703∼1761)                               PDF Download

 

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이(敬以), 호는 척재(惕齋) 또는 하당(荷堂)이며, 이중휘(李重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유(李濡)이고,  아버지는 서윤 이현숭(李顯崇)이며, 외조부는 홍수헌(洪受瀗)이다.  그리고 그는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이다.

그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진사가 되고,  정릉참봉(貞陵參奉)을거쳐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를 역임 하였으며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에 출입하여 자주 의견을 진술하였다.  1750년 (영조26)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있으면서 다시 식년문과(式年文科)과에서 삼장원(三壯元: 초시·복시·전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함)을 석권하고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여주목사(驪州牧使),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751년 (영조27)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권신 김상로(金尙魯)형제를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의 적당(賊黨)으로 지목하여 탄핵했다가 대신을 능욕했다는 죄명을 입어 거제도(巨濟島)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굽히지 않고

“신은 국가의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서 나라의 일이 날로 비뚤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그냥 있을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립니다.”

라고 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여 투철한 애국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때 부제학 윤급(尹汲)이 차자를 올려,

“이존중(李存中)은 젊어서부터 명망을 짊어진 선비로서 대단(臺端)의 우두머리가 되어, 우직한 충성심에 북받쳐 숨김 없이 말을 다하였으니,  강직한 기풍이 존중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고 용서해서 퇴패한 세도(世道)를 부지해야 될 것인데,  대조(大朝)의 처분이 지나치게 엄중하여 불러서 힐책하고 즉시 먼 바다로 귀양을 보내시니,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의 세상에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아, 언로(言路)의 열리고 닫힘은 실로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결단코 가볍게 꺾어서 국맥(國脈)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며,  이렇게 하는 것은 사기(士氣)를 위축시키는 처사이므로 권장 할 일이 못된다고 극력 구원하자, 특별히 파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4개월 뒤에 다시 정의현(㫌義縣)으로 옮겨졌다가 1753년(영조29) 풀려난 뒤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落鄕)하여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면서 강직한 삶을 추구하였다. 오원(吳瑗) 등과 사귀는 한편 특히 윤심형(尹心衡), 이태중(李太重) 등과는 더욱 친밀하게 지냈다.

그는 평소에 강직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져 사색당파(四色黨派)의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김상로(金尙魯)형제의 비위를 힘써 탄핵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사후 정조 때에 와서 이조판서(吏曹判書) 겸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다.
이와 관련한 기사로 《일성록(日省錄)》의 정조 즉위년 4월 13일조에 보면 ‘고(故) 대사간 이존중(李存中)에게 특별히 문형(文衡)을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참찬관 홍국영이,

“고 대사간 이존중은 흉적 김상로(金尙魯)가 정권을 훔친 때를 당하여 한 통의 소를 장하게 진달하여 힘써 흉적을 토죄하다가,  결국 두번 이나 험한 바다를 건너 10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으니,  선대왕께서 뒤늦게 안타까워하시는 하교가 여러 차례 연석에서 나왔습니다. 지금은 흉적 김상로의 죄상이 드러나 주벌이 행해졌으니,  조정에서 포장(褒獎)하는 도리로 보아 의당 특이한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하였다.

정조가 하교하기를,

“참찬관의 말이 옳다.  내가 매우 비통해 하고 있다. 언로(言路)를 장려하고 사대부의 기풍을 수립하는 도리에 있어 의당 포증(褒贈)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는 문형에 준점(準點)된 자이니, 대제학을 특별히 증직하라.”

하여 내려진 증직이 었다.

그 뒤 1768년(영조44)에는 그의 아들인 문학 이상악(李商岳)이 부친의 일에 대하여 상소하여 아뢰기를 ,

“신이 지극히 애통한 마음이 있는데, 어찌 관직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아! 신의 망부(亡父)인 신(臣) 이존중(李存中)이 간관(諫官)의 이름을 가졌으니,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숨기자 않는 것은 충성[忠]을 위한 한 가지 일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네번이나 바다의 험한 파도를 건너고 아홉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으면서도 후회함이 없었으며,  몰(沒)함에 임해서는 심장을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만 지만 너는 힘쓸지어다.’

라고 하였으니, 아비와 아들이 죽고 살 즈음에 그 말이 몹시 슬픕니다.”

라 고호소 하였다.  결국 영조는 나이 젊은 신진(新進)의 무리가 ‘충(忠)’자를 함부로 거들먹 거리며 아비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였다고 지목하여 이를 억제하고 윤허해 주지 않았다.

이 기록들을 통하여 이존중이 강직한 삶을 살았던 것을 본받아 그 아들 역시 그러한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글을 보면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이라는 말이 새삼 다가오는 것을 느껴보았다.
저서에는《척재집(惕齋集)》,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등이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일성록(日省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척재집(惕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의철(李宜哲: 1703~1778)


이의철(李宜哲: 1703~1778)                               PDF Download

 

관은 용인(龍仁),  자는 원명(原明), 호는 문암(文庵)이며,  아버지는형조좌랑(刑曹佐郎) 이세운(李世運)이고,  외조부는 성집(成鏶)이다. 조여벽(趙汝璧)의 사위이며, 이재(李縡)의 문인이기도 하다.

1727년(영조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장릉참봉(長陵參奉)과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등을 역임하고, 1748년(영조24)에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었다.
1752년(영조28)에 정언(正言)이 되어, 임금이 대각(臺閣)의 진언(進言)을 지나치게 척벌하여 언로(言路)가 막혔다고 상소했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정(大靜)으로 귀양을 갔다.

1753년(영조29)에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정언이 되고, 그 후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 지평(持平), 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회양부사(淮陽府使)를 역임하였다. 1769년(영조45)에 영조가 홍봉한(洪鳳漢)에게

“이철이 고서를 많이 읽고 성격 또한 침착하고 깨끗한데 너무 오랫동안 침체시켜 두었다.”

고 말하여 발탁 할 뜻을 보이고 이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제수하였다.

그는 또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기로문무과(耆老文武科)의 시험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그가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발탁 된 뒤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대사성(大司成)으로 재직 할 당시에 전라도 광주 유생유적(柳迪) 등이 박세채(朴世采)의 문묘종향(文廟從享)을 방출(放黜)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적 등은 청금안(靑衿案)에서 삭제되고 호남 유생으로 관학(館學) 및 경성(京城)에 있는자는 쫓겨나게 되었다.  이때 그가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니 관용을 베풀것”

을 청하였다가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1775(영조51)년에 유배지에서 풀려나 다시 승지(承旨)가 되고, 1776년(영조52)에 영조가 승하하자,  찬집청당상(纂輯廳堂上)이 되어 채제공(蔡濟恭) 등과 함께 영조의 행장(行狀)과 시장(諡狀)의 찬술을 주관하였다.  그 뒤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예조참판(禮曹參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문암집(文庵集)》이있다.

그리고《조선왕조실록》의 영조 25년조의 기사를 보면, 영조(英祖)가 직접 <임문휼민의(臨門恤民儀)>를 짓고 경조(京兆)의 관원에게 명하여 궁민(窮民)을 선발하여 아뢰도록 한 일이 있다.  그리고 다시 의주(儀註)를 지어 예조(禮曹)에 내리면서

“사민(士民) 가운데 사부(士夫)의 과녀(寡女) 및 그 밖에 받게하라.”

하고, 승지 윤광의(尹光毅)에게 이르기를,

“조사(朝士)서파직되어 가난한 자도 마땅히 구휼하여야 할 것인데,  그들이 스스로 와서 받겠는가?”

하자, 윤광의는 임금이 내리는 물건을 어찌 직접 받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이의철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임금이 내리시는 것이 비록 소중하기는 하나, 신하의 염의(廉義)도 또한 가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고,  윤광의가 다시 반박을 하자, 그는

“선비의 처신에 어찌 지위의 고하(高下)가 있다하여 스스로 그 몸을 가볍게 행동 하겠습니까?”

라고 물러서지 않고 강력히 주장을 하자, 영조는

“좋다.  내가 이로 인하여 조사를 욕 되게 할까 두렵다.”

하고, 이어영갑(令甲)을 밝혀 전의조관(朝官)은 종들로 하여금 대신 받도록 한 일이 있다.  이는 이의철이 평소에 선비의 정신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그 뿐만 아니라 《국조보감(國朝寶鑑)》제 69권, 정조(正祖) 1년조에는 의철(李宜哲)이 상소하여,

“예경(禮經)에 ‘장례 지내기 전에는 상례(喪禮)에 관한 글을 읽는다.’ 고 하였고, 열 조(列朝)의 고사에는 또 산릉(山陵)을 마치기 전이라도 강연(講筵)을 폐지하지 않은 규례가 있습니다.”

라고 하자,  정조가, 비답하기를,

“이미 경의 박학함에 대해서 듣고 경을 시강관(侍講官)으로 삼고자 하였었다.  경이 상소하여 청한 바가 옳다.”

하고, 이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예기》의 상례에 관한 편(篇)을 초록하여 진강하게 한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이의철이 예설(禮說)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 는사례 이기도 하며,  그가 《의례주(儀禮註)》를 낸 것과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갑산부사(甲山府使)로 재임 할 당시인 1751년(영조 27)에 백두산을 유람하면서 그 일정과 감회를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글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그것이 곧 <백두산기(白頭山記)>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이 산의 형태는 두루뭉술한데 오직 한 곳에 돌산이 솟아 그 꼭대기가 열려서 사방의 일곱 봉우리가 에워 싼 가운데 큰 못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천지라는 곳이다.”

라고하였다.

이의철의 <백두산기>가 알려지기 전까지는 1764년(영조 40)  박종(朴琮)의 <백두산 유록(白頭山遊錄)>이 최초의 백두산 기행문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의철은 그보다 10여년 이전에 이미 백두산을 다녀와서 기행문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학계에서는 현재 이의철의<백두산기>가 박종의<백두산유록>과 함께 250여년 전의 백두산 정황을 기록으로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승학(李承鶴:1857~1928)


이승학(李承鶴:1857~1928)                                 PDF Download

 

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인데,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하였지만 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친을 여의고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12세에 처음으로 입학하였는데 총명하여《중용(中庸)》한 권을 9일만에 다 외우고, 《상서(尙書)》<요전(堯典)>을 하루 아침에 뜻을 알고 다음 날 아침에 외우는데, 집주(集注)까지 한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고 그의 부친이

“재주가 너와 같으면 누가 배우기가 어렵다고 하겠느냐.”

했다는 말도 있다.   관례(冠禮)를 치른 뒤에는 기정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부친인 진사 이최선(李最善) 역시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위태로운국 가의 안녕과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해소하기 위해 1862년 그의 나이 38세 때에《삼정책(三政策)》을 지어

“기강의해이와염치의상실은삼정의폐단보다더욱심하다.”

고 역설 하였으나 담양 부사(潭陽府使)에 의해 기각되어 조정에 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삼정책》을 본 기정진은 그의 경륜이 주도면밀하고 재능이 우수하여 세상에 쓰일 만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  서울에 친척 한 분이 과거(科擧)를 주선 하겠다고 하였다.  자신의 외숙(外叔)이 시험을 주관하니 300금만 주면 목적한 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고 주지 않아서 불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고종 19년 임오년에 조정에서 현량한 선비를 뽑으려고 하자,  그가 책문(策問)을 지어 올려 선발되었고,  그것이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84년 동학 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당시에 그를 지명하여 죽이려하자,  방장산(方丈山)으로 피신하여 있었는데,  그 이듬해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기정진의 손자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장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학은 한 필의 말을 달려서 팔도에격 문(檄文)을 보내었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답장이 오고 발송하는 일이 수 백건 이었으나,  그는 조금도 막 없이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금성산(錦城山)에 제사를 지내면서 국조(國祚)의 융성을 빌고,  진(陣)을 광주(光州)로 옮겨 서울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보내어 임금의 명령으로 타이르기를,

“의병이 일어나면 도리어 화가 커지는 것이니,  즉 일로 해산하라.”

고 하여,  그날로 군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부친이 별세한 후에 집안에 불이 나서 5천 여권의 책과 가산(家産)이 불에 타버리자,  다시 외당을 짓고 전답을 팔아서 서적을 모으느라 가산이 기울었다.  식솔을 거느리고 살기가 곤란하여 50세에 농사에 힘쓰기 시작하여 종을 데리고 들에 나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8년만에 남의 곡식을 빌리지 않게 되자,  이후에는 들에 나가지 않았고, 회갑을 맞이한 이후부터는 집안일을 아들에게 맡기고서,

“글을 읽는 종자(宗子)가 끊어지면 10대의 집안이 맥이 끊기는 법이니 마음에 두고 새기도록하라.”

고 하였다.

담양군(潭陽郡) 창평면에 ‘문일정(聞一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그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책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며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의 실천적 의식과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지도록 하였다.  그는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에 기우만(奇宇萬)이 이끄는 장성의병(長城義兵)에 가담하였으며 아관파천(俄館播遷) 때에도 의거(義擧)했던 인물이다.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를 지낸 손자 옥산(玉山) 이광수(李光秀)는 이기(李沂), 윤주찬(尹柱瓚), 민형식(閔衡植)등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라는 조직에 가담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 받기도 하였다.

이승학은 당시에 성행하던 이기설(理氣說)의 학문보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청고집(靑皐集)》 4권이 있고, 《종사유록(宗事遺錄)》을 간행한 바 있다.  그가 후손에게 이르기를,

“후일에 아름다움이 넘치는 말로 행장(行狀)을 청하여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지 말라.  이는 내가부 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실천을 중시하고 위기지학을 강조하기보다는 열인찬기(悅人讚己)로 외형만 추구하며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요즘 세태를 바라보면서 이승학과 같은 인물은 더욱더 발굴하여 작게나마 세인의 본보기로 삼아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참고문헌>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상(李翔:1620~1690)


이상(李翔:1620~1690)                                           PDF Download

 

관은 우봉(牛峯), 자는 운거(雲擧) 또는 숙우(叔羽),  호는 타우(打寓),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송시열(宋時烈)을 통해 김집(金集)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유겸(李有謙)의 아들로,  젊어서부터 송시열의 문생이 되어 송시열의 기대와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과거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지조와 행실이 독실하였다.

1697년(정축,숙종24) 이후로는 사진(仕進)을 단념한 채 문을 닫고 들어 앉아 도리(道理)를 추구하였다.  선생의 천거로 한때 대직(臺職)에 제수 되었으나 1658년(효종9)에 산림(山林)이 진출할 때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과 함께 유일(遺逸) 유일(遺逸):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 이들을 과거시험 없이 발탁하는 인재등용 방법 중의 하나이다.  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그는 학문적 정치적으로 송시열을 따랐다.
현종(顯宗) 말년의 예송(禮訟)에서는 남인(南人)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실세하였고,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의 집권이 시작되자,  다시 기용되어 사업(司業), 형조참의(刑曹參議), 우윤(右尹),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분기될 때도 송시열을 따라 소론의 남인 등용론을 반대하였다.

1688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그가 계모(繼母)와 근친상간의 혐의가 있는 먼 친적 유두성(柳斗星)을 조사하여 처리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려고 할때, 송시열이 글을 보내어 말렸으나,  그는 유두성의 음행 사건을 고발하였다.  서인이 실세한 후에는 그 범죄에 관한 조서 내용이 뒤바뀌어서 증인을 교사하고 재산을 탐냈다는 죄로 처벌을 받았으며, 기사환국(己巳換局) 뒤에 옥중에서 심한 이질로 생을 마감하였다.

1717년에 복관(復官)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받았다. 그는만년에 현재의 세종 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에 사관정(四觀亭)사관정(四觀亭): 관산(觀山)·관농(觀農)·관수(觀水)·관어(觀魚)를 하는 정자라 하여 사관정(四觀亭)이라는 이름을지었다고도 하고, 동쪽으로 운주산(雲住山), 남쪽으로 운점산(雲霑山), 서쪽으로 증산(甑山), 북쪽으로 월조산(月照山)을 바라본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이라는 정자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1699년(숙종25) 그 지역의 향유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뇌암서원(雷巖書院)을 건립하고 그곳에 모셨다.  이후 서원을 재건하면서 그의 시호를 따서 문목사(文穆祠)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 숙종 16년 1월 19일 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개 이상은 평소에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았는데,  서로 관계되지 않은 일을 상소하여 증거로 삼았으므로,  마침내 뜻밖의 화를 당하였다.  유두성은 바로 이상의 이성(異姓)인 먼 친족이므로 유두성이 죽더라도 그 재산은 이상에게 돌아갈 리가 없는데,  이것을 죄로 삼았으니,  참으로 심한 날조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내용이《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16년 경오(1690) 1월19일조에는 <이상의졸기>라는 제목하에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은 글을 잘 지었으나 어리석고 학식이 없었으며, 재물을 탐내고 이익을 좋아하였다.  고향에 있을 때에는 오로지 무력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일삼고,  무릇 자기땅에 가까운 남의 땅은 반드시 온갖 계책으로 꾀하여 차지하였으므로,  모 바른 밭에 곧바른 논이라는 속담이 있었는데,  대개 남의 땅이 혹 자기 땅과 엇갈려 섞여 있으면 자기 것에 갈라 넣어서 모 바르고 곧바르게 만든 것을 말한 것이다.  송시열에게 아부하고 또 제 아우 이숙, 이익의 세력을 끼고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유일(遺逸)로 몸을 일으켜, 외람 되게 임금의 부름에 끼어 재상 반열에까지 올랐다.

전후의 말은 다 그 시대의 흐름을 붙좇는 것이었으며,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다툼은 이상이 실로 사이를 벌려 놓은 것이고,  송시열의 잘못도 그가 권하여서 된 것이 많다.  간통과 관련된 옥사를 밝힌 것은 그 사실이 어떠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이나 행동이 방자하고 정실이 드러나서 그 마음은 길가는 사람들도 아는 바인데,  박태만의 소(疏)에 상세히 있으므로,  갖추어 논하지 않는다.  기사년 이후에 잡아와 준비를 마쳤는데,  장차 형을 받으려 할때에 약을 먹고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숙종(보궐실록) 16년1월19일)

그리고 죽은 스승 이상(李翔)의 추탈(追奪)된 관직을 회복해 주기를 청하는 전 현감 서행원(徐行遠) 등의 상소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영조1년을사(1725,옹정3) 2월 13일(신사)조에 보이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죽은 스승은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문인이 고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노닐었던 인물로,  본래부터 연원이 있고 조예가 정밀하고 깊어 한 시대의 기대를 받고 세 조정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집안에 있다고 해서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고,  도를 지키는 정성은 근력이 약하다고 해서 꺾이지 않았습니다.  간사한 허적(許積)을 한번 배척한 일로 인해 윤휴(尹鑴)의 독수(毒手)에 심하게 당해 6년 동안 바닷가에서 고생하다가 겨우 살아서 돌아와 있던 중,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하는 변고가 동문(同門)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죽은 스승은 너무나 분하고 미운 마음에 편지를 보내 절교를 통고하였는데,  담긴 뜻이 매섭도록 엄격하였습니다.  이때문에 윤증의 당이 크게 질시하여 함정에 밀어 넣어 해치려는 손길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옥중에서 고생하다 죽도록 만들었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추탈(追奪)의 재앙이 다시 저승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신들이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사림이 억울해하며 한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위의 두《실록》의 내용과《승정원일기》의 내용을 놓고 보면 시각차가
현격하며 그의 행적에 대한 견해가 판이하게 서로 다름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당시에 정치적으로 숱한 파란을 격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늘날도 역시 이러한 경향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두 경우의 시각에 의한 기록을 인용하여 살펴보았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숙종개수실록(肅宗改修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이담(李湛:1652∼1716)


 

이담(李湛:1652∼1716)                                           PDF Download

 

담의 자 는경화(景和), 호는성재(醒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10세손으로,  증조부는 첨추 이후재(李厚載)이고 조부는 장령 이형(李逈)이다.

아버지는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지낸 이중휘(李重輝)이며 어머니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녀인데, 후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그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이담의 부인은 광주 안씨(廣州安氏)인데 시호가 익헌공(翼憲公)인 안윤덕(安潤德)의 후손이다.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좇는다는 삼종(三從)의 도리를 존중하였으며,  않게 하였다.

이담이 별세한 뒤에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아들 현윤(顯允)에게 권유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 것만 봐도 부인의 출처의리(出處義理)에 대한 식견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1724년 9월 15일에 향년7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고 공의 묘소 오른쪽에 부장(祔葬)하였다.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1669∼1745)이 쓴 묘갈명(墓碣銘)에 의하면,  이담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단아하고 깨끗하며 성품이 온순하고 진실하여 자연히 도(道)에 가까웠으며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우암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날로 발전함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스승에게 극진하여 숙종(肅宗)때에 우암이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곧 남쪽 변방으로 옮겨가자, 그가 여러 유생들과 함께 대궐앞에서 소리 높여 변호하였고, 이어서 천리 먼길의 유배지로 그를 따라갔다.  뒤에 우암이 제주도 로유배되자,  또 다시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때 외숙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이미 화를 당하였고, 우암은 체포되어 상황이 다급하였는데,  이담이 틈을 타서 김수항의 묘도문(墓道文)을 우암에게 청하였다.   묘도문이 완성됨과 동시에 우암에게 후명(後命) 후명(後命):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죄인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는 일을 이른다. 이 이르니 우암에게······이르니: 1689년 1월 숙의 장씨(張氏)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을 부여하는문제로기사환국이일어나서인이축출되고남인이재집권하였는데,이때송시열은  책봉을반대하는소를오렸다가제주도로 유배되었다.그러다가그해 6우로압송되어오던중정읍에서사약을받고죽었다.
바로 이 글이 우암 선생의 절필(絶筆)이 되었고 이담은 김수항(金壽恒)이 사사되자 그의 묘도문을 계기로 더 이상 글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이담은 광주(廣州)에 은거하여 세상과 왕래하지 않고 도서(圖書)와 역사책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1694년 정국이 바뀌어 조정에서 사산감역(四山監役)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駱山)의 성곽과 숲을 지키던 무관 벼슬 이름이다. 을 제수하니, 이담은 마지못해 나아갔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아산현감(牙山縣監)과 임천군수(林川郡守)를 지내기도 하였다.  아산에는 겨우 13개월 동안 부임하여 있었는데 고을이 잘 다스려져서 유애비(遺愛碑) 유애비(遺愛碑): 지방관의 선정을 칭송하여 세운 송덕비를 이른다. 가 있으며,  활과 갑옷을 잘 수선하여 포상 하였으나 적극 사양하여 면하였다.

뒤에 임천에 있을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임천에는 토호(土豪)들이많았는데, 이담이 강력히 제재하여 간악한 짓을 못하게하니,  백성들이

“백년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다.”

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어사(御史)는 토호들의 말을 듣고 이담을 탄핵하였다.  취조하여 변론함에 털끝만한 문제가 없었는데도 다른 일로 얽어 면직되었다.

이담은 이에 식솔을 모두 데리고 광주로 돌아와서 벼슬길을 단념한 채 남을 원망하는 말이 없이 지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중풍을 앓게 되어 하는 수 없이 도성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1715년에 모부인(母夫人)이 별세하자 그 이듬해까지 그리워하여 눈물을 흘리며 몇 달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피로가 누적되어 마침내 9월 19일에 향년6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담은 지방관(地方官)으로서의 선정(善政)을 베푼 일 말고도 그의 효성(孝誠)과 청렴함을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그가 지극한 효성과 순수한 행실이 있어 5세에 어머니를 잃고 계비(繼妣) 부인을 섬길적에 정성과 효도를 다하였다.  또한 부친이 말질 (末疾: 고치지 어려운병)에 걸려 여러해를 고생하였는데,  그가 좌우에서 간호하여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喪)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여 몸이 상할 지경이 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예문(禮文)보다도 더한 슬픔을 표출하였다.

또한 형을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정성을 다하여 모셨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물뿌리고 청소하는 예절을 지켰다.

또한 형 이재상(宰相)의 지위에 오르자,  간혹이 일로 요구하고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나무라고 물리쳐 용서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청렴한 것을 좋아하여, 옛 친구 중에 고위관직(高位官職)에 오른자가 있으면 일체 찾아가지 않았으며, 외직(外職) 한자에게는 반드시 생략 하였다고한다.  그의 이종 동생인 옥오재(玉吾齋)송상기(宋琦:1657∼1723)가 지은 만시(挽詩)에서도 그들이 평소에 얼마나 친분을 쌓으면서 살아 왔는 지가 잘 드러나 있다.
제목은 <이종형 임천 군수 이경화를 기린 만시 [姨兄李林川景和挽]>로 되어 있다.

이종사촌 종형제가 누구인들 없으리오만
兩姨群從世誰無
우리들의 깊은 정은 친형제와 같았다오
吾輩深情卽友于
시는 외숙 인해 접었어도 눈물 외려 마르잖고
詩廢渭陽餘淚在
애통한 맘 풍수에 어려 그 한몸이 고단했지요
痛纏風樹一身孤
영고성쇠 진작부터 부운처럼 여겼건만
榮枯久作浮雲看
오늘 와서 유명 달리 할 줄 어찌 알았겠소
存沒那知此日殊
어이하리 큰 형님은 홀로인 걸 슬퍼하니
何况長公悲隻影
한밤 외기러기 울음소리견 디지못 하리다
不堪中夜斷鴻呼

이담의 아버지 이중휘(李重輝)가 김광찬(金光燦)의 딸과 혼인하였으므로, 송상기와는 이종 형제가 된다.  원문의 ‘우우(友于)’는 형제 간의 우애를 말하는 것으로, 《서경》 〈군진(君陳)〉의 “형제 간에 우애한다.〔友于兄弟〕” 라는 말을 줄여 인용한것이다.  3구의 뜻은 이담이 외숙(外叔) 김수항(金壽恒)의 사사(賜死)를 계기로 시 짓기를 그만 두었지만 외숙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말을 묘사한 말이며, ‘위양(渭陽)’은 외숙을 의미한다.

《시경》〈위양(渭陽)〉에

“외삼촌을 배웅하러 위수까지 나왔는데, 무엇을 드릴까요. 수레랑 말을 드리지요.
[我送舅氏, 曰至渭陽. 何以贈之, 路車乘黃.]”

라고하였다.  4구의 뜻은 이담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말을 묘사한 것으로,  그가 다섯 살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역시 도곡(陶谷)이 지은 묘갈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4구의 ‘풍수(風樹)’는 풍수지탄(風樹之嘆)으로,  부모 잃은 자식의 아픔을 말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않는다.
[夫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라고 하였다.  7구는 이담의 백씨(伯氏) 이유(李濡:1645∼1721)가 홀로 생존하여 슬픔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이며, ‘장공(長公)’은 맏형을 의미한다.  소식(蘇軾)이 소순(蘇洵)의 맏 아들이고,  그의 문학이 뛰어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장공이라고 불렀던 데에서 연유한다.‘ 단홍(斷鴻)’은 무리를 떠난 외로운 기러기라는 말이다.
 <참고문헌>
이의현, 《도곡집(陶谷集)》.
송상기, 《옥오재집(玉吾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송(李淞: 생년 미상)


이송(李淞: 생년 미상)                                               PDF Download

 

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무백(茂伯)  또는 고청(孤靑), 호는 노초(老樵) 또는 서림(西林)이다.  그는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지낸 이민곤(李敏坤)의 아들이며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의 문하생이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1756년(영조32)이민곤이 조영국(趙榮國)을 탄핵하다가 북도(北道)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에 금성(金城)의 역사(驛舍)에서 불에 타죽는 참상을 보고,  벼슬에 나아갈 뜻을 단념한 채 서산(西山)에 은거하며 오로지 학문 연마에만 전념하였다. 이송의 그러한 정서와 처절한 심정을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국역일성록》 정조 20년 12월  29일조(條)를 보면 예조(禮曹)에서 충신(忠臣), 효자, 열녀의 별단(別單)에 고쳐서 부표(付標)한 내용이 수록 되어있다.  그 중에 이송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계모를 섬기고 봉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일찍이 그의 아비의 귀양살이를 따라갈 적에 금성(金城)의 역사(驛舍)에 이르러 한밤중에 불이 났는데 그의 아비는 이미 손쓸 수가 없게 되었다.  있었다.  관을 옮겨 장사 지내게 되어서는 묘를 지키면서 울부짖고 옷깃이 다 해졌으며 나물과 과일을 3년간 한번도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상기(祥期)가 끝날 때가 되어도 빗질을 하지 않자 머리털과 살갗에 구더기가 생겼고 성묘할 때울 부짖으며 발을 구르자 사나운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소년의 귀밑머리가 일시에 백색으로 변하고 몸이 점점 쇠약해지더니 병에 걸려 그수명을 더 연장 시키지 못하였다.”

나라에서 충신과 효자와 열녀를 장려하기 위하여 올리는 별단의 내용이니, 없다.

이는 아마도 당시에 효자의 한 표본으로 삼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던 듯하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그의 시문(詩文)  역시 주로 부친 의 글을 차운(次韻)하거나 부친을 그리는 마음을 애절하게 묘사한 내용이 많은 것도 주지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송은 특히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대체로 이이(李珥)의 이기묘합설(理氣妙合說)을 존중하였으며, 실학의 대가인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과도 폭넓게 교류하였는데,  박지원, 홍대용과는 동갑 나이로 우의(友誼)가 두터웠다.  그리하여 이송은 실학을 깊이 연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현실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정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않고 저술과 연구에만 평생을 바쳤다.

저서로는《노초집(老樵集)》이 있으며, 박지원과 함께 홍대용을 위한〈담헌묘지(湛軒墓誌)〉를 지은 바 있다.

정인보(鄭寅普)가 이송이 지은 담헌의묘표(墓表)를 읽고,

“아 이 글이야 말로 바로 소위 고문(古文)의 전아(典雅)함을 훌륭히 다하였다.”

고 하였다.  그리고 정인보는 <담헌홍덕보묘표(湛軒洪德保墓表)>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긴 글을 남겼다.

“연암(燕巖)이 지은 묘지명과 비교하면 연암은 탕일(宕逸)하며 기이(奇異)한 데가 보이지만,  서림(西林) 은순실(醇實)하고 깊고 아름다우며 그 꽃다운 향내가 멀리 풍긴다.  내가 감히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는 것을 속단하여 평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글을 볼때 담헌을 아는 면은 서림이 더 깊은 듯하다.  그리고 또 서림의 글은 곡절이 있을 뿐만 아니니 그 홀로 아는데 이르러서는 연암과 어찌 그 우열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서림은 자신이 이미 당시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세속에는 글을 아는 이가 드물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 이름을 들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이 묘표는 다행히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지만,  그가 고심담사(苦心覃思)하여 유현하고 오묘한 것을 끌어내어 놓은 것이 또 이루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 일텐데,  이것들이 이미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만 것인가?  혹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 버려져 있다가 바람에 날리고 서리에 젖어 찢기고 좀먹고 쥐가 물고가서 굴러다니다가 없어지고 만 것인가?  서림은 세상에서 고매한 선비이니, 응당 사후의 영예(榮譽)에 대해 기뻐하고 슬퍼하는 그런 관심은 없겠지만 그의 화려한 유문(遺文)은 다만 일인일가(一人一家)의 정화(精華)를 이루었을 뿐만이 아닌데,  가려져 드러나지 않고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슬픈 일이다.  지금 인보가 종합해 본 서림의 시문(詩文)은 비록 이것 밖에 안 되지만 세상에 글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응당 농암(農巖) 이후 4~5명의 문장가에 서림이 그 사이에 들어감을 알 것이다.  그의 법(義法)이 근엄(謹嚴)하고 운용이 급박하거나 번거로움이 없으며,  또 음절이 잘 어울리고 문장이 빛나서 그 뛰어남이 다른이 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 글에서 정인보는 이송에 대하여 농암 이후의 문장가로 손꼽을 정도로 극찬을 하고 있다.  또한 담헌에 대해서는 이송이 오히려 연암 보다 더 깊이 알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아마도 이송이 1770년(영조46)에 금강산에서 홍대용을 처음 만나 알게 된 후,  늘 함께 다녔던 그런 친분에서 표출된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들은 또 동해(東海) 지역의 유람도 함께 하며 다수의 시 작품을 남겼다.  그 뒤 홍대용이 이송과 산사(山寺)에 같이 가기로 하였는데,  열흘이 못되어 갑자기 홍대용이 죽었다.  그리하여 이송은 그를 애도하며 담헌 묘지(湛軒墓誌)를 지었던 것이다.

그의 저서《노초집(老樵集)》에는 홍대용(洪大容)이 중국에 가는 사신의 일행을 따라 북경에 가서 머물며 교제하였던 중국의 학자 엄성(嚴誠)의 시작품에 대한 서문(序文)이 있고,  논(論)과 잡저(雜著)에는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명쾌하고 조리있는 평론을 가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정인보는 그의 유문(遺文)이 흩어져 버리고 빛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듯하다.

<참고문헌>
《노초집(老樵集)》
《조선고금명현전(朝鮮古今名賢傳)》
《호보(號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광원(朴光元, 1659~1741)



박광원(朴光元, 1659~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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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원(朴光元, 1659년~1741년)은 조선시대 중기에 활동하였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형조정랑(刑曹正郞), 종묘봉사(宗廟奉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부친의 소개로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갔다.  주자를 특별히 추앙한 그는 유생들을 모아 상소문을 올려 최석정(崔錫鼎)이 『예기류편(禮記類編)』를 편찬하면서 주자가 ⌈대학⌋과 ⌈중용⌋을 독립시킨 의도를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주자, 이황, 이이 등의 단점을 들춰내고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다.

1659년(1세, 효종10년)에 증장령(贈掌令)인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의 둘째 아들로 광주(光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라도 순천(順天)이며,  자는 사선(士善), 호는 백야당(白野堂)이다. 형으로 박광일(朴光一)이 있으며,  동생으로 박광선(朴光善)이 있다.  부친 박상현은 명나라를 숭배하는 사상이 철저하였으며,  주희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고 경전에 널리 밝은 학자였다.

1684년(26세, 숙종10)에 형 박광일과 함께 회덕(懷德)에 있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방문하여 가르침을 청했다.  그의 문집에 들어있는 회천문답(懷川問答) 은 당시 송시열과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유림이 어지럽게 된 세태를 개탄하면서,  당시 송시열과 대립하고 있던 윤휴(尹鑴, 1617-1680)를 비판하고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  유학의 교리를 혼란하게 만든 도적놈)이요,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를 비판하고 이황(李滉),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의 단점을 끄집어내 비웃는데서 유림 사회가 혼탁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1699년(41세, 숙종25년)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생원1등으로 합격하였다. 나중에 벼슬이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이르렀으며, 권상하(權尙夏, 1641-1721), 이희조(李喜朝, 1655-1724) 등과 교류하고 예(禮)와 경학, 성리학등에 대해서 논했다.

1701년(43세, 숙종27)형 박광일이 천거를 받아 내시교관(內侍敎官),시강원자의(侍講院咨議) 등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않았다.

1709년(51세,숙종35년) 3천 여명에 이르는 유생들과 함께, 그는 최석정(崔錫鼎,1646-1715)이 지은『예기유편(禮記類編)』이 체계적이지못하다고 상소(배척예기류편소排斥禮記類編疏)를 올렸다.  『예기유편』은 총 18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례(家禮)·방국례(邦國禮)·학례(學禮)·길례(吉禮)·흉례(凶禮)·가례(嘉禮)·빈례(賓禮)의 순서로 편집되었다.  최석정은 본래『예기』 속에 들어 있던 ⌈대학⌋ 과 ⌈중용⌋ 을 복원하여 다시 ⌈예기⌋ 에옮겨놓고자한것이다. ⌈대학⌋과 ⌈중용⌋ 은 주자가 사서(四書)로 한권으로 독립시킨 것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 높게 평가를 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최석정은 기존의 선현들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자신의 사색을 통해 『예기』의 착간들을 찾아내고 수정보완하려 했다. 그는 주자와 진호(陳澔) 그리고 고려말 조선초의 권근(權近) 등 기존의 『예기』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사실은 그의주석은 중국에서 조차 연구하지 못했던 과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논리적이고 수학적인 그의 명민한 예지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희재의논문 「최석정의『예기유편』에서 본 학례」참조)

박광원이 다른 유생들과 함께 올린 상소문은 주자의 학설을 무시한 ⌊예기유편」이란 글이 당시 화복(禍福)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슈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 책을 ‘배척하다가 화를 만나게 된 사람이 얼마이고,  두둔하다가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이 또한 얼마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리고 만약에

“그의 글( ⌊예기유편 」)을 불태워버리지 않고 그 사람(최석정)을 내치지 않는다면 주자(朱子)를 위해 스스로 재앙의 자리로 들어가기를 달갑게 여기는 사람들이 장차 꼬리를 물게 되어 그 수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경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얼마 후 ⌈예기유편 ⌋을 없애도록 하였다.

1712년(54세, 숙종38년)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이 임명되었다. 이어 강릉침랑(康陵寢郞), 종묘봉사(宗廟奉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등을 역임했다.

1721년(63세, 경종1년) 몸이 약한 경종을 대신하여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로 조정 안팎이 시끄러워졌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노론파와 소론파가 서로 얽혀 싸움이 시작되자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1725년(67세, 영조1년)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4월에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7월에 형조정랑으로 임명되었다가 이조정랑, 청암도찰방(靑巖道察訪) 등에 임명되었다.

1738년(80세, 영조14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741년(83세, 영조17년)에 사망하였다. 시문집으로『백야당문집(白野堂文集)』 4권 2책이 있다. 이 문집은 1873년(고종10년)에 간행된 것으로, 5 대손 박제유(朴濟裕)가 편집하고,  그의 아들들이 간행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집 가운데에는 인간의 본심이 원래 착하지만 수양하지 않으면 어리석거나 간악하게 된다는 것을 시로 표현한 「논심성정(論心性情)」, 윤선거와 윤증부자에 대해 비판을 가한「왕형공론(王荊公論)」, 당쟁의 상황을 기록한「뇌정문답(雷霆問答)」등이 있다.

<참고자료>
⌈숙종실록⌋

이미선, 박광원,<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동술, ⌈백야당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희재, ⌈최석정(崔錫鼎)의『예기유편(禮記類編)』에서 본 학례(學禮)⌋, ⌈공자학⌋ 22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