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심(崔秉心, 1874-1957)


 

최병심(崔秉心, 1874-1957)                                  PDF Download

 

병심(崔秉心, 1874-1957)은 전라북도 전주 출신으로 이병우(李炳宇)에게 배웠으며 간재 전우(田愚, 1841-1922)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전주 지역에서 널리 ‘최학사’ 혹은 ‘최학자’로 불리던 최병심은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 등과 함께 전북 유학의 삼재(三齋)로 꼽힌다. 스승인 간재 전우가 사망한 뒤에는 옥류동(지금의 한옥마을이 있는 교동)에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제자들에게 유교의 도학정신과 함께 항일정신을 심어주었던 그는 국가가 무너져도 도를 지키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고 하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요즘은 전주한옥마을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1874(1세, 고종 11년)에 전라도 전주에서 벽계(碧溪) 최우홍(崔宇洪)과 이천서씨(利川徐氏) 서학문(徐鶴聞)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존(敬存), 호는 금재(欽齋)이다. ‘欽齋’는 보통 흠재로 읽히나 최병심은 ‘흠’자를 옛날 음인 ‘금’으로 읽었다.

1889(16세, 고종 26년),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 때부터는 청하(靑下) 이병우(李炳宇)의 문하에 들어가 사서(四書) 및 주역(周易), 춘추(春秋), 서경(書經) 등을 배웠다.

1897(24세, 광무 1년), 태안 안면도의 연천서당(蓮泉書堂)으로 가서 간재 전우의 제자가 되었다. 전우는 그에게 서경의 ‘흠명문사(欽明文思)’에서 ‘흠(欽)’자를 따서 ‘흠재’라고 호를 지어 주었다. 최병심은 ‘흠’자를 옛 음인 ‘금’자로 읽어 자신의 호를 ‘금재’라고 하였다. ‘흠명문사’란 중국 고대 요임금의 덕을 칭송하는 말로 그의 공덕은 무척커서 이르지 않는바가 없고 문장과 생각이 밝고 심원함을 뜻한다.

1904(31세, 광무 8년)에 명릉참봉(明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이해 6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 무렵 옥류동(玉流洞, 지금의 전주 교동)에 서당 염수당(念修堂)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제자들에게 유교의 도학정신과 함께 항일정신을 심어주는데 힘썼다.

1910(37세, 광무 14년),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였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된 치욕을 당하여 그는 발산(鉢山)에 올라가 하루 종일 통곡하였다. 발산은 태조 이성계의 선조 일가가 모여 살던 자만동에 있던 산으로 조선 왕조의 발상지였다. 이후에 그는 자신이 기거하던 옥류동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옥류동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수양산에 비유하였다.

1912(39세, 일제시대), 항일의병대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의 전주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17(44세, 일제시대), 당시 도지사 이진호가 일제의 지침에 따라 옥류정사 일대 1800여평에 잠업시험장을 조성한다는 구실로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땅을 팔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최병심은 단식으로 항의하였으나, 경찰은 토지수용령을 발동하여 순경 30여명, 소방서원 90명 등 120여명을 최병심의 집으로 보내 강제로 가옥을 철거하고, 불태웠다. 불속에서 저항하던 그는 강제로 구출되고, 항의하던 가족들은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였는데 부인 통천 김씨는 이 일로 중상을 입어 1919년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강탈당한 땅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 사건은 나중에 한전(韓田)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땅을 빼앗긴 사건이란 뜻이다. 비록 조그마한 개인의 땅이지만 조상들이 더불어 살았던 조선의 강토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이 일은 ⌈염재야록(念齋野錄)⌋에 기록되어 있다.

1918(45세),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제향을 그만둘 수 없다고 주장하다 괴산경찰서에서 7일 간 구속당하였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원군을 파병해준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었다. 오늘날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있었다.

1922(49세), 부모 섬기듯이 모시던 스승 전우(田愚)가 사망하였다. 간재는 선비가 난세에 처했을 때는 수의(守義)를 하든지, 창의(倡義)를 해야한다고 하였는데, 최병심은 ‘수의’의 길을 택하여 평생 동안 근신하고 일제에 항의하였다.

1925(52세), 전라선의 철교 개설로 한벽당이 철거 위기에 처하자 항의하여, 터널로 개통하도록 하였다. 한벽당은 조선왕조의 개국 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이 별장으로 건립한 곳으로 전주 8경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었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교동)에 위치하며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이다.

1937(64세)에 모친상을 당했다. 11월에 조희제(趙熙濟)의 『염재야록(念齋野錄)』에 서문을 쓴 일로 경찰서에서 저자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렀다. 「염재야록」은 한말 독립투사들의 비사(秘史)를 엮은 책으로 최병심은 거기에 민족자존의 의지를 밝힌 서문을 썼다.

1941(68세), 24년 전에 일제에 빼앗겼던 땅을 되돌려 받았다. 소위 ‘한전사건’이 매듭지어졌다.

1948(75세), 해방이 된 뒤, 성균관 부관장에 추대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강학에 힘썼다.

1957(84세) 옥류동 염수당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저서로 『흠재문집(欽齋文集)』 30권 14책이 있다. 그는 태극(太極), 심성(心性), 이기(理氣), 의리론(義理論) 등 많은 문장을 지었으며, 사람이 음양, 흑백을 분별할 줄 모르면 소인·난적이 되기 쉽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또 간재학을 계승하고 더욱 발전시켰는데, 지극히 높은 것은 성(性)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영묘한 것은 마음(心)이지만, 마음은 때때로 욕망에 흐르기 쉬우니 경계해야한다고 하였다. 또 성을 높여 도(道)를 스승으로 삼고 성경(誠敬)으로 마음을 조절하면, 성과 마음이 일치되어 사람이 곧 천리(天理)에 부합된다고 강조하였다.

1980년에 국민훈장 애족훈장을 추서 받았다. 2007년에는 전북대 박물관의 ‘전주한옥마을 재발견’ 특별전에서 유물이 공개되어 관심을 모았다. 이를 계기로 그의 유물관을 한옥마을에 건립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참고자료>

조기대, 「최병심」,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명엽, 「한옥마을의 새로운 발견-최학자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열린전북」, 2008년 7월호

이화정, 「‘최병심 유물관’ 한옥마을 건립을」, <전북일보>, 2008.7.27

이상호, 「금재 최병심의 학문과 사상」, 「동양철학연구」61권, 2010

조의곤(曺毅坤, 1832-1893)


 

조의곤(曺毅坤, 1832-1893)                                  PDF Download

 

의곤(曺毅坤, 1832-1893)은 본관이 창녕, 호가 동오(東塢)로 조현위(曺玹瑋)의 아들이다. 기정진(奇正鎭)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거주지 근처 언덕에 조그마한 정자 동오정(東塢亭)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짓고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1832(1세, 순조 32년)에 검암리(지금의 고창읍 월암리)에서 태어났다. 본(本)은 창녕(昌寧), 자(字)는 사홍(士弘), 호(號)는 동오(東塢)이다. 아버지는 조현위(曺炫瑋), 어머니는 죽산 안씨 안광영(安光暎)의 딸이다. 그는 효자로 널리 알려졌는데, 나중에 노사 기정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특히 경학에 조예가 깊었다.

1860(29세, 철종 11년), 사찰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스승 기정진으로부터 격려의 서찰을 받았다. 서신에는 전염병이 나돌고 있어서 걱정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1871(40세, 고종 8년), 스승 기정진으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스승은 뒤늦은 나이에 학문의 기반을 닦은 자신을 거울삼으라고 조언하였다. 아울러 낙담하지 말고 학문에 정진하라는 격려의 말도 담겨 있었다. 이후로도 기정진은 조의곤에게 여러 통의 서신을 보냈다. 그 중에는 동강(東岡, 동쪽 언덕)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것을 축하하는 서신, 위통과 설사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신의 근황을 적은 서신, 어려운 살림살이를 걱정하며 격려하는 내용의 서신 등이 있다. 모두 기정진의 문집에 실려 있다.

1873(42세, 고종 10년), 손자 조덕승(曺悳承)이 태어났다. 덕승이 4살 때부터 글을 가르쳤다. 나중에 그는 할아버지가 사망한 뒤 23세 때(1895년)부터 기우만(奇宇萬)과 최익현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할아버지 조의곤의 묘갈명은 그가 25세 때 충북 청양에 살던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가 부탁하였고, 1899년 『노사집(蘆沙集)』 간행에도 힘썼다. 할아버지의 유집인 『동오유고(東塢遺稿)』를 간행한 것도 그였다.

1876(45세, 고종 13년), 2월 일본과 강화도 조약, 즉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가 체결되었다. 강압에 이루어진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이로써 조선은 개국을 하고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다. 이해에 스승 기정진(1798-1876)이 사망하였다. 조의곤은 노사의 고제로 스승에게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스승의 초상을 치르고 귀향하여 마을의 동쪽 언덕 위에 동오정을 지었다. 당시 주변의 유림과 제자들뿐만 아니라, 타성의 문중에서도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거두어 정자를 짓는 경비로 충당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열의와 열망이 담긴 건물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하고자 하였다. 동오정은 나중에 대원군이 현판을 써준 정자로도 유명하였다.

동오정이 지어진 곳은 물과 돌과 숲이 어우러지고, 오른쪽의 높은 바위에서 폭포가 흐르는 곳이었다. 앞에는 작은 연못도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정자의 모습은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앞이 4칸이고, 옆이 2칸이었다. 동오정은 ‘동오정사’라고도 불렸는데 원래는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에 세워졌다. 현재 위치(월산리)는 최근에 옮겨진 것이다.

그는 동오정을 지은 뒤 친구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水石東岡正侈奢
수석으로 치장한 동쪽 언덕은 정말 멋지다네

如今最恨故人遐
하지만 지금은 옛 친구들과 멀어진 것이 제일 한스럽구나.

他日相尋方丈下
언젠가 이곳 방장산 아래를 찾아오거든

竹林缺處是吾家
대나무 숲속 비어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라네.

또 이런 시를 써서 자신의 생활 모습을 그렸다.

千古良朋時對籍
천고의 좋은 벗은 때때로 대하는 서적이로다.

十年活計晩栽桑
장차 10년의 생활 계획은 늦게 심은 뽕나무라네.

家人休說田無穫
집안사람들아 밭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秋熟園林果蓏香
가을 깊어가는 원림에는 과일 향기가 향기롭구나.

원림은 담을 둘러친 정원에 숲을 가꾸어 논 것을 뜻한다. 스승이 사망한 뒤 정자를 짓고 조용히 자연과 책을 벗 삼으며 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동오정은 나중에 그의 손자인 조덕승(曺悳承)이 후진 양성에 사용하였다.

1893(62세, 고종 30년)에 사망하였다. 나중에 기정진의 제자인 정재규(鄭載圭), 조성가(趙性家), 김녹휴(金祿休) 등과 함께 고산서원(高山書院,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고산마을 소재)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시문집 「동오유고(東塢遺稿)「가 있다. 이 시문집은 목활자본으로 1899년에 제작되었는데 총 6권 2책으로 아들 조석휴(曺錫休)가 발간한 것이다. 서문은 기정진의 손자 기우만(奇宇萬)이 썼다. 발문은 조석일(曺錫一)이 쓴 것이다.

제1권에는 시 7수, 제2권에는 서(書) 39편, 제3권은 제문 5편, 축문 5편, 잠 1편, 잡저 5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4권은 「강산차록(江上箚錄)」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학문과 사상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자료로, 여기에는 스승 기정진과의 학술적인 문답이 정리되어 있다. 부록 2권에는 제문, 행장, 묘갈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잡저에는 5편의 문장이 들어있는데, 「지도론(止盜論)」, 「송족제병삼서행설(送族弟昞三西行說)」, 「과눌설봉정기상사우만(寡訥說奉呈奇上舍宇萬)」, 「서증족질석일(書贈族姪錫一)」, 「기몽설(記夢說)」등이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자료>

「노사집」 ,「동오유고」권호기, 「동오유고(東塢遺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권수용, 「노사학파의 누정 건립운동 연구」, 「석당논총」 제49집, 2011.3오인교, 「南道 정자기행(2617)-고창 동오정(東塢亭)」, <한국매일>, 2015.10.27

정재규(鄭載圭, 1843-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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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규의 <노백헌집>
정재규의 <노백헌집>

 

재규(鄭載圭, 1843-1911)는 조선시대 말기의 유학자로 경상도 합천 삼가현에서 출생하였다. 전주에서 활동한 유학자 기정진의 제자가 되어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였다. 그는 유교 부흥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는데, 특히 나라가 망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성리학의 가르침을 버리지 않고 그것으로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1843년(1세, 헌종 9년) 11월 11일에 삼가현 물계리(勿溪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초계(草溪,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이며, 자는 영오(英五), 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 애산(艾山), 청계(淸溪) 등을 사용하였다. 정방훈(鄭邦勳)의 아들이다.

1850년(5세, 철종 1년)에 서당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다. 다음해부터 ⌈논어⌋, ⌈맹자⌋ 등 사서(四書)와⌈소학⌋을 읽기 시작했다. 16세(1858년) 때 여양진씨(驪陽陳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1860년(18세, 철종 11년), 개화를 반대하고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다. 당시 김홍집(金弘集)이 청나라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근거로 개화를 주장하자 적극 반대하였다.

1864년(22세, 고종 1년), 주위 사람들의 소개로 400리나 멀리 떨어져있는 장성 하사리의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을 찾아갔다. 당시 기정진은 67세의 나이로 학문적으로 완숙한 시기였다. 정재규는 그의 가르침을 받기로 하고, 다음해 귀향하여 소학과 사서를 읽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867년(25세, 고종 4년), 겨울에 달성에서 거행된 향시에 응시하였다. 대과 시험을 볼 때 숙부와 친분이 있던 정승 정병시가 한번 보고자 하였다. 숙부의 부탁으로 그를 만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이때부터 나라일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870년(28세, 고종 7년), 과거시험 공부를 중지하였다. 이후 스승이 사망할 때(1879년)까지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전해인 1869년 2월에는 진주와 사천, 통영 등지를 여행하고 이순신을 모신 충무사(忠武祠)에 참배하였다.

1873년(31세, 고종 10년) 5월 부친상을 당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오랫동안 병수발을 하였다. 그로 인해 잠을 못자고 먹는 것도 부족하여 상을 당했을 때는 기절할 정도였다. 엄격하게 상례를 집행하고 3년 동안 부인을 보지 않았다. 이렇듯 그는 항상 예를 강조하고 실천을 중시했다. 그는 “주자가 평소에 논한 것이 매우 많은데, 마땅히 그대로 이행해야한다. 망령되게 자기 견해를 함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예를 모르면 선비가 아니며, 예를 알고 익힌 뒤에야 심안(心眼)이 분명해지고,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하였다.

1876년(34세, 고종 13년) 4월 스승 기정진을 찾아가 뵈었다. 전해에 전해 받은 스승의 『납량사의(納凉私議)』를 주위 사람들에게 강의하였다. 12월에 황매산 아래로 이사하였다. 이후로도 정재규는 생활이 어려워 수시로 이사를 하였다. 당시 그의 집안 사정은 몹시 궁핍하였다. 흉년까지 겹쳤으나 찾아오는 손님들은 많아 소금이나 나물로 대접하였다.

1877년(35세, 고종 14년), 다시 스승이 사는 곳을 방문하여, 기질성(氣質性), 인물성(人物性), 명덕(明德) 등에 대한 문답을 나누었다. 5월에 부인 진씨가 사망했다. 큰비가 내리고 전염의 두려움 때문에 주위 친척들이 한사람도 오지 않았다. 혼자서 부어오른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겨울에 다시 방동(芳洞)으로 이사를 하였다. 다음해 5월, 밀양박씨(密陽朴氏)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1879년(37세, 고종 16년) 정월에 사촌 동생 정면규(鄭冕圭), 제자 권운환 등과 함께 스승 기정진을 찾아갔다. 김대곡(金大谷)·정일신(鄭日新), 조성가(趙性家) 등 제자들과 함께『외필(猥筆)』을 받아서 읽었다. 기정진은 그동안 감추어두었던 자신의 글을 이때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외필』은 율곡 이이의 견해에서는 다소 벗어나 리를 매우 강조한 것으로 이후 율곡을 따른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정재규는 이러한 스승의 학설에 대해서 초지일관하여 지지를 표하였다. 이해 말에 스승 기정진이 사망하였다.

1889년(47세, 고종 26년) 들에 굶어죽은 시체가 가득했다. 관직에 있는 지인에게 임금의 은혜를 펴고, 백성의 어려움을 불쌍히 여기도록 훈계의 편지를 보냈다. 이 해에 어머니가 별세하여 부친의 상례와 똑같이 하였다.

1892년(50세, 고종 29년) 아들이 태어났다. 5월에 최계남, 김산석, 정면규 등에게 『태극도설』과 『외필』을 강론하였다. 8월에 『남명집(南冥集)』을 교감하였다. 다음해(1893년) 봄에 호남을 유람하고, 가을에는 경모정(敬慕亭)에서 『대학』을 강론하였다.

1894년(52세, 고종 31년), 봄에 동학교도들의 숫자가 늘어나 우매한 사람들이 날로 빠져들었다. 정재규는 사람들이 거기에 빠져들지 않도록 유도하고 행동을 조심하여 사람들 스스로가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김홍집 내각에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임시 합의기관을 설치하고 행정제도, 사법제도, 교육제도 등에 대해 각종 개혁을 추진하자, 통문(通文)을 돌리고 적극 반대했다. 그는 정통 유학을 고수하고, 천주교나 신식 학문을 적극 반대하였다. 서양의 학문이 전해지는 것에 대해서 “그것은 오랑캐나 금수가 되는 전초다. 강상과 윤리가 완전히 끊겼으며, 오천년 동안 내려오는 성현의 도리를 강론할 곳이 없다.”고 탄식하였다. 다음해(1895년) 여름 명성황후가 사망하였다. 나중에 소식을 들은 정재규는

“국모가 바깥에서 들어온 도둑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조정의 신하는 높건 낮건 한 사람도 복수할 생각이 없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는가?”

라며 한탄하였다.

1900년(58세, 광무 4년), 4월에 제자들과 함께 국사봉(國師峯)에 올랐다. 여름에 신안정사(新安精舍), 대원암(大源菴) 등지로 피서를 가 그곳에서 여러 제자들에게 『대학』, 『근사록』 등을 강론하였다.
1903년(61세, 광무 7년) 회갑을 맞이하였다. 정월 초하루에 자손들이 잔을 들어 장수를 빌려고 하였으나,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여 그치게 하고 하루 종일 즐거워하지 않았다. 여름에 『외필변』을 지었다. 조경묘(肇慶廟)의 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조경묘는 전주 이씨 시조와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전주에 세워져 있었다.

1905년(63세, 광무 9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해 망국의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이에 정재규는 호남과 영남에 포고문을 내서 일본과 다시 담판할 것을 촉구하였다. 아울러 노성(魯城, 논산)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최익현(崔益鉉)과 궐기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0년(68세, 융희 4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하고, 지역의 유지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은사금을 뿌렸다. 정재규에게도 제안이 있었는데 수령을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은사라는 말 자체가 가증스럽다. 이것은 나의 항복을 강요하는 것이다. 선비는 죽음을 당할 지언정 모욕은 당할 수 없다. (중략) 차라리 내 목을 베어가라.”

1911년(69세, 일제시대) 2월 11일 전 해에 지은 노백서사(老柏書舍)에서 갑자기 병이 들었다. 다음날 지인이 찾아와 같이 술을 나누며 나라의 앞날과 유교의 쇠퇴를 걱정하면서 북받쳐 울었다. 13일 사촌동생인 정면규에게일제의 점진적인 침략 정책에 당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물계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친구와 제자들 130여명이 상복을 입고, 장례 때는 수천명이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 1925년에 장성의 고산사에 배향되었다.
노백서사(老柏書舍) 기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어진 사람은 도덕을 잘 간직하고 있으므로 불행한 세상을 당하였을 때는 온 세상을 화기로운 봄바람처럼 구제하여 만물이 발육하게 하는데 뜻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등지고 궁벽한 산 속의 골짜기로 들어가 자기 혼자 지조를 지키는 것이 어찌 하고 싶은 일이었겠는가?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수십 년전에 그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으나 선생은 그 뜻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름이 자욱한 창가에서 혼자 괴로워하시며 어느 곳에도 의지할 수 없었으므로 이 노백서사를 신축하는 것은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이었다.”

문집으로 노백헌집(老柏軒集)이 있다. 이 문집은 1912년에 활자로 인쇄되었는데, 49권 25책, 부록 5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집에는 스승 기정진의 저작 외필(猥筆)에 대해서 논한 외필변변(猥筆辨辨은 제29권에 들어있으며, 전우(田愚, 간재)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논박한 「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납량사의기의추록해(納凉私議記疑追錄解)」등은 제28권에 수록되어 있다. 성리학, 유교 경전, 그리고 예에 관한 내용이 많다. 정재규와 관련된 학계의 연구는 그의 학문세계, 대학론, 남명학 계승 등과 관련하여 여러 편의 논문이 발표되어 있다.

<참고자료>
김성환, 「정재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양홍열, 「노백헌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자미상, 「노백헌 정재규」, 초계정씨종친회(http://m.cafe.daum.net/narajungssi)

정면규(鄭冕奎, 1850-1916)


 

정면규(鄭冕奎, 1850-1916)                                  PDF Download

 

면규(鄭冕奎, 1850-1916)는 경상도 합천의 삼가현 출신으로 유학자 노사 기정진의 제자이며, 기정진에게 성리학을 배운 정재규(鄭載圭)의 사촌 동생이기도 하다. 그는 사촌 형인 정재규로부터 기정진의 학문을 이어받아 주리설(主理說)을 더욱 발전시키고, 한주학파(寒洲學派)의 학자들과도 폭넓게 교류를 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1850년(1세, 철종1년)에 합천의 삼가현 묵동마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주윤(周允) 호는 농산(農山)이다. 아버지는 정방찬(鄭邦纘)이며, 사촌 형 정재규(鄭載圭, 호 노백헌老栢軒, 1843-1910)는 대유학자 노사 기정진의 대표적인 제자였다. 기정진은 순창(전라북도) 출신의 성리학자로 리일원론적(理一元論的) 세계관에 입각하여 리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한 학자이다. 그는 특히 태극(太極)의 본래 모습은 오상(五常)의 리(理)에 불과하다고 보고, 인성(人性)을 초월하여 따로 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기정진의 제자인 노포(老圃) 정면규(鄭冕奎, 1804-1868)와 초계 정면규(鄭冕奎)는 한자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이다. 노포 정면규는 본관은 진주이고 삼태(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下古里)에서 태어났다.

1855(6세, 철종6)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어린 정면규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려서 부친을 잃었지만, 네 어머니가 살아계시니 참으로 다행이다. 나는 네 어머니가 너를 반드시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네 어머니처럼 정숙하면서도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부지런하며 효성이 깊고 자애로운 사람은 본적이 없다. 너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어라.”(⌈농산문집⌋15권「先妣孺人密陽朴氏遺事」)

어린 정면규는 그러한 할아버지의 말씀을 항상 잊지 않았다. 가족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커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사촌 형 정재규를 따라 학문에 정진했다. 그가 목표로 삼은 ‘위기지학’이란 ‘위인지학(爲人之學)’ 즉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과 구별되는 것으로, 자기 수양을 위주로 한다는 뜻이다. 대인관계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며, 선현의 학문을 스스로 실천해나간다는 뜻이다.

학문이 깊어지자 사촌형 정재규는 정면규를 데리고 장성으로 가 기정진에게 소개시켰다. 정재규의 학문 정도를 살펴본 기정진은 “좋은 재주를 가진 선비다.”라고 칭찬하였다. 그곳에서 수일을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온 정재규는 더욱 학문에 정진하고 기정진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강학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6(47세, 고종 33), 단발령이 실시되었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형 정재규가 “이는 우리 선비들을 모두 죽이려는 징조다. 죽어야 된다면 차라리 한 곳에 모여서 죽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정면규가 그 뜻을 받아 실행하려고 하였으나 단발령 실시가 느슨해져 포기했다.

1901(52세, 광무 5), ⌈노사문집⌋이 간행되자 일부 제자들이 노사 기정진의 학설이 율곡의 학설과 다르다고 ⌈노사문집⌋ 폐기를 주장했다. 기정진은 말년에 「외필(猥筆)」 등의 문장을 써서 자신의 주리설(主理說)을 더욱 강하게 발전시켰다. 율곡은 ‘이기묘합(理氣妙合)’을 주장했으나 주기론적인 경향이 강했다. 정면규는 이러한 기정진의 학설을 옹호했다.

1905(57세, 광무 9), 11월 17일 일본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당시 ‘한일협상조약’이라고 불린 이 조약은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불평등조약이었다.

정면규는 “편하게 앉아서 관망하는 것은 의리에 맞지 않다.”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고 사촌형 정재규와 함께 주변 선비들을 이끌고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가 막을 방법을 논의했다. 최익현은 당시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나중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거병하여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정면규도 충남 노성(魯城)에서 의거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외부의 방해로 실행하지 못했다. 이후 장성으로 가 스승 기정진 묘소에 참배하고, 산중에 은거하면서 ⌈노사집⌋을 읽으며 성리학 연구에 몰두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그는 주자의 학문만이 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최익현은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된 뒤 그곳에서 사망했다.

1911(63세, 일제시대), 항상 곁에 모시고 따랐던 사촌형 정재규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였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억누르고 정해진 예법에 따라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렀다.

1916(67세, 일제시대)에 사망했다. 경덕서원(景德書院)에 배향되어 있으며 ⌈농산문집(農山文集)⌋ 15권 8책이 전한다. 이 문집은 1920년에 제자 남정우(南廷瑀)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농산문집(農山文集)⌋에는 시 121수, 문장 397편, 잡저 17편 등이 수록되어 있고, 제문 26편, 묘지명 20편, 묘표 10편, 묘갈명 22편, 기타 행장, 유사 등 많은 분량의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시문은 한말의 격변기에 민족적 주체의식을 드러낸 작품이 많다. 또 기정진(奇正鎭), 정재규(鄭載圭),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 등 300여명과 주고받은 서신이 수록되어 있고, 서(書)에는 스승 기정진과 주고받은 문답을 적은 글, 사촌형 정재규와 주고받은 문답을 적은 글 등이 있고, 경전·이기설·인물성론(人物性論)·예설(禮說)·역리(易理)·시사(時事) 등에 관한 논술이 많다. 그는 스승 기정진의 주리론을 계승하여, 모든 기의 작용이 결국은 리(理)로부터 명령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고, 오직 리만이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유리론(唯理論)을 적극 천명하였다. 그는 기정진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촌형 정재규로부터 리를 중시하는 학풍의 영향을 받았으나 또 한편으로는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 1818-1886)을 따르는 한주학파(寒洲學派)의 학자들, 예를 들면 곽종석(郭鍾錫, 1846-1919), 허유(許愈, 1833-1904) 등과도 폭넓게 교류를 하였다.

<참고자료>

강동욱, 「농산 정면규」, <경남일보>, 2006.08.18

이희석(李僖錫, 1804-1889)


 

이희석(李僖錫, 1804-1889)                                  PDF Download

 

희석(李僖錫, 1804-1889)은 전라도 장흥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수많은 한문 고전을 섭렵하고 기정진의 문하에서 성리학 공부를 했다. 젊어서는 과거 합격의 기회를 놓쳤는데, 77세(1880) 되던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특별히 우로(優老, 덕이 고상한 노인)의 대우를 하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수여하였다.

1804(1세, 순조 4) 5월 15일 전라남도 장흥(長興)에서 이중즙(李重楫)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평강 채씨(平康蔡氏) 채석후(蔡錫垕)의 딸이다. 이희석의 자는 효일(孝一)이고, 호는 남파(南坡)이며,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원래 이희석의 집안은 인천에 거주하였으나 1550년경에 율정공(栗亭公) 이두우(李斗宇) 때에 장흥으로 내려왔다.

1814(11세, 순조 14). 이 무렵 그는 이미 수많은 한문 고전을 섭렵하였다. 특히 사서오경(⌈논어⌋․⌈맹자⌋․⌈대학⌋․⌈중용⌋․⌈시경⌋․⌈서경⌋․⌈역경⌋․⌈춘주⌋․⌈예기⌋)은 주석도 암기할 정도가 되었다.

그 뒤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공부했다. 이희석의 나이는 기정진보다 6살이나 어렸으나 기정진은 그를 친구로 대하였다. 하지만 이희석은 스승으로 섬겼다. 중년이 되어서는 나주로 거처를 옮기고 장성을 왕래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자주 받았다. 후배들이 의심나거나 어려운 곳을 질문하면 세심하고도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1866(63세, 고종 3). 정월에 전국에 천주교 탄압령이 내려졌다. 천주교도 8천여 명이 학살되고, 프랑스 선교사 9명도 함께 처형되었다. 이해 9월에 프랑스 선박 3척이 인천항에 들어와 조선 정부에 항의하고 강화도를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소위 병인양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기정진은 이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7월에 척사위정(斥邪衛正), 즉 ‘사악한 천주교를 배척하고 올바른 유교를 지키자’는 논리를 설파한 상소를 올렸다.

이희석은 당시 3월 2일부터 6월 13일까지 서울, 강화, 금강산, 대구를 거쳐 진주 일대를 여행하였다. 이 때 4개월간, 약 3,360리에 달하는 여행기록은 그의 문집인 남파집에 들어있다. 그는 당시 대구의 서계서원(西溪書院)과 토동(兎洞)의 뇌룡정(雷龍亭)을 방문하였으며, 진주에서는 10여일을 머무르면서 동료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 하달홍(河達弘) 등과 시문을 주고받았다. 조성가는 진주 출신으로 일찍이 그가 28세 되던 1851년에 기정진이 강학활동을 하고 있던 전라도 장성까지 300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달려가 당시 기호학파의 영수격인 기정진을 스승으로 모셨다. 기정진은 그런 조성가를 남달리 아끼고 지도했는데, 날로 그의 학문이 성장하여 동료들 사이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이희석은 이러한 조성가에 대해서 20살이나 어렸지만 동문으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진주를 방문한 것이다.

1880(77세, 고종 17),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나이 들어 과거에 합격한 점을 높이 평가해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임명되었다. 통정대부는 정삼품 당상관의 문관에게 수여하는 품계로, 사간원의 대사간, 홍문관의 부제학, 성균관의 대사상, 승정원의 도승지 등 고위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과거 합격 후 8월 28일, 4년 전에 사망한 스승 기정진(奇正鎭)의 묘소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제사를 모시고 영전 앞에서 애도를 표한 뒤 제문을 올렸다. 이 때 올린 제문은 현재 장성의 고산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이희석은 제문에서 젊어서 망령되게 입신양명하는 일에 뜻을 두었는데,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한 부끄러움에 과거를 포기하려고 한 일을 회상했다. 그때 스승은 그에게 ‘내게 있는 도를 다할 뿐이다’라고 격려하였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라는 스승의 격려에 힘을 얻고 다시 과거에 도전을 하게 되었으며, 결국 70이 훨씬 넘은 나이에 병든 몸을 이끌고 과거 시험장에 나가 합격하였다. 그리고 지금 스승의 영전에 절하고도 차마 길을 떠나지 못하고 황산(凰山)에 들어가서도 떠나지 못하는 애통함을 표현하였다. 황산은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의 황산(凰山)마을로, 기정진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1889(86세, 고종 26) 7월 17일 묵동의 집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장흥군 관산읍에 위치한 천관산(天冠山, 723m) 자락 선영들의 무덤에 묻혔다. 용산면(蓉山面) 어산리(語山里) 당곡사(唐谷祠)에 배향되어 있다. 유시(遺詩)로 432개의 시가 있으며 유집으로 남파집(南坡集, 南坡先生集)이 있다.

⌈남파집⌋은 목활자본으로 8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희석이 사망한 뒤 손자 이선원(李善遠) 등이 이희석의 시문을 모아 편집하고, 기정진과 이항로의 제자들로부터 행장이나 발문을 받아 1898년에 간행하였다. 서문은 1897년에 스승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썼다. 기우만은 화순에서 출생하여 참봉 벼슬 까지 올랐는데, 1895년 민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의하여 장성향교에서 의병을 이끌고 궐기하였다. 서문은 그로부터 2년 뒤에 쓴 것이다.

이 문집에는 430여수의 시와 34편의 문장이 실려 있다. 문장은 스승인 기정진과 주고 받은 글, 기타 동문이나 장흥 지역의 인물 혹은 지방 관리들과 주고받은 글들이다. 아울러 누추하게 살더라도 뜻은 커야 한다는 「거려설(蘧廬說)」 등 주위 사람들을 경계하거나 스스로를 경계한 글이 8편 정도 실려 있다. 또 생활과 관련되는 여러 문장과 행장, 묘지명, 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 문집의 제8권에는 기우만(奇宇萬)이 쓴 행장, 기삼연(奇參衍)이 서술한 「남파이선생전(南坡李先生傳)」, 이승욱(李承旭)이 지은 묘지명, 그리고 김평묵(金平默), 최익현(崔益鉉), 송기로(宋綺老), 조성가(趙性家) 등의 발문이 들어있다. 이 문집은 현재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김봉곤, 「이희석의 남파집」, 한국학중앙연구원

권수용, 「1880년 이희석의 제문」,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치량(閔致亮, 1844-1932)


 

민치량(閔致亮, 1844-1932)                                  PDF Download

 

치량(閔致亮, 1844-1932)은 경남 산청 사람으로 종9품의 문관이었던 민재규(閔在圭)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정진에게 배우고, 27세 때 과거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관직생활 2년 만에 사퇴를 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성리학 공부를 하면서 친구들과 교류를 하고, 강원도와 서해안 지방을 유람하여 여행기를 써서 남겼다.

1844(1세, 헌종 10)에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山淸)에서 민재규(閔在圭)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민재규는 종9품 문관인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 어머니는 남원 양씨(南原梁氏) 양천민(梁天民)의 딸이다. 조부(祖父)는 민이주(閔以珠), 증조부(曾祖父)는 민일(閔鎰)이다. 형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의주부관찰사(義州府觀察使) 등을 지낸 민치완(閔致完, 1838-1911)이다. 본관(本貫)은 여흥(驪興), 자는 주현(周賢), 호(號) 계초(稽樵)이다.

1850(7세, 철종 1)에 큰아버지 회정공(晦亭公)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품성이 온화하고 어질었으며 공손하였다. 후에 성리학자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을 찾아가 그동안 품고 있는 의문점을 질문하였다. 의리(義理)와 왕패(王覇)에 대한 기정진의 설명을 듣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기정진은 순창(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아 향리에서 제자들을 키우고 있었다. 나중에 서경덕, 이황, 이이, 이진상, 임성주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이름을 떨친 기정진은 당시 52세였다. 기정진의 노사집(蘆沙集)에는 민치량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민치량의 문집에는 스승에게 보낸 3건의 서신(「상노사선생서(上蘆沙先生書)」 등)이 실려 있다. 그 서신에서 민치량은 스승에게 처세와 예설에 관한 질문을 하기도 하였다.

1870(27세, 고종 7), 식년 전시(殿試)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다. ⌈고종실록⌋ 7년 4월 28일 기록에 고종이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식년 문무과 전시(式年文武科殿試)를 행하였다. 문과에서 민치량(閔致亮) 등 33인을 뽑고, 무과에서 오순영(吳順泳) 등 28인을 뽑았다.’라고 하였다. 장원 급제하였기 때문에 대표로 그의 이름이 실록에 오른 것이다.

민치량은 이해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임명되었다. 전적의 업무는 각종 문헌과 도서의 수장(收藏)과 출납‧관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사직을 신청하였다. 당시 조정의 업무를 총괄하고 관리의 인사와 봉록을 담당하던 이조(吏曹)에서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승정원일기․고종7년⌋, 6월 20일자) “성균관 전적 민치량(閔致亮), 선공감 가감역관 정현행(鄭顯行), 심노면(沈魯冕), 신항(申杭)이 모두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신청하였으니 모두 새로운 관료로 교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은 이러한 보고에 허락을 하였다. 하지만 그해 8월 2일에 민치량은 다시 감찰에 임명되어 관직을 떠날 수 없었다.

1872(29세, 고종 9)에 장령(掌令)에 임명되고, 이어서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으로 임명되었다. 장령으로 있을 때에 헌납(獻納) 김진휴(金震休)와 함께 연명으로,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선동한 해주사람 김응봉(金應鳳)과 김준문(金俊文)에 대해서 유배 이상의 극형을 처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유배형으로 사건을 마무리 하려고 하였다. 민치량 등은 이러한 결정에 반발한 것이다. 임금은 “끝까지 잘 살피고서 결정을 내린 만큼 따지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느슨한 결정에 조정의 관료들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후에도 김응봉 등을 국역죄로 엄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당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등이 일어나 시국이 어수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신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를 분개하여 민치량은 당시 상황을 비상시국으로 간주하고 엄정히 대처해야 한다는 소(疏)를 올린 뒤에 낙향하였다. 소의 내용은 그의 문집인 ⌈계초집⌋에 실려 있다.

낙향 후에 동문이자 친구 사이인 조성가(趙性家)와 정재규(鄭載圭) 등과 교류하면서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당시 이들과 왕래한 편지에는 유교 경전(經典)이나 이기설(理氣說)에 관한 논의가 담겨있다. 민치량은 이기설에서 기정진의 설에 따라, 이선기후(理先氣後, 리가 기보다 앞선다)가 원칙이지만, 유행(流行)함에 따라서는 ‘기형이구(氣形理具)’ 즉 기는 형체로 나타나고 리가 거기에 구비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기정진은 리일원론적(理一元論的) 세계관에 입각하여 리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하였다.

1876(33세, 고종 13). 전 해(1875) 9월 20일경에 강화도에 일본 군함 운양호가 측량을 구실로 불법으로 들어와 조선 수비대와 전투가 있었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2월 3일(음력) 조선과 불평등 수호조약 체결하였다. 민치량은 2월에 한양을 출발하여 포천, 철원, 김성(金城), 회양(淮陽)을 거쳐 단발령(斷髮嶺)을 넘어 금강산을 구경하였다. 다시 고성(高城), 통천(通川), 강릉을 거쳐 한양으로 돌아왔다. 모두 47일이 소요된 이 여행에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관동기행략(關東紀行略)」(⌈계초집⌋)에 소상이 기록하고 있다.

1888(45세, 고종 25) 4월 다시 한양을 출발해 운봉(雲峰), 대방성(帶方城), 적성강(赤城江), 담양 등지를 거쳐 부안 앞 바다에 있는 위도(蝟島)로 갔다. 계초집 잡저에 실려 있는 「위해기행(蝟海紀行)」은 이러한 여정에서 그가 겪은 여러 가지 일과 아름다운 풍물을 묘사한 기록이다.

1932(89세, 일제시대)에 사망하였다. 문집(文集) 12권 5책이 전한다. 「계초집」은 1934년에 민달호가 편집하여 간행하였는데 12권 5책으로 되어 있다. 현재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등에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승정원일기」,「문과방목」

권오호, 「계초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도규(羅燾圭, 1826-1885)


나도규(羅燾圭, 1826-1885)                                  PDF Download

 

도규(羅燾圭, 1826-1885)는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석정동에서 태어났다. 기정진으로부터 성리학과 예학 등에 대해서 배웠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유교 경전과 예학, 음양의 이치 등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1826(1세, 순조 26)에 나주(羅州) 계촌면(桂村面) 내동리(内洞里)에서 태어났다. 봉황산(鳳凰山) 아래에 위치한 이곳은 나중에 광산군(光山郡) 대촌(大村)으로 지명이 바뀌었는데,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석정동에 속한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치문(致文), 호는 덕암(德巖)이다. 증조부는 나필은(羅弼殷), 조부는 나석증(羅錫曾)이며, 부친은 나희집(羅禧集)이다. 모친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현임(李鉉臨)의 딸이다.

1841(16세, 헌종 7), 부친이 사망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상례에 따라 그대로 시행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후 기정진(奇正鎭)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교 경전과 예학 등을 배우고 과거공부를 하였다. 예학과 의리 등에 대해서도 모른 것이 없을 정도로 정통했으며, 시문을 잘 지었다.

1851(26세, 철종 2)에 「항검자설(恒儉字說)」을 지었다.

1852(27세, 철종 3), 「촌자설(村字說)」을 지었다.

1853(28세, 철종 4), 「심학도설(心學圖說)」을 지었다.

1860(35세, 철종 11)에 한양에서 열리는 정시(庭試)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2월 28일에 동생 나도룡, 고제일, 유호근 등과 함께 한양으로 향했다. 정시는 수시로 보는 부정기적인 시험이었는데 1차례의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일행은 담양, 순창, 원평, 금구, 금강, 성환, 오산, 화성, 그리고 한강을 건너 숭례문(남대문)으로 들어갔다. 3월 9일에 도착하여 12일에 시험에 참가하였다. 철종이 친히 참석하여 ‘만세토록 태평을 열라(爲萬歲開太平)’는 주제를 시험 책문(策問)으로 내걸었다. 그에게는 완전히 익숙한 제목은 아니었으나 평소에 제자들에게 설명한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지어 제출하였다. 시험 합격에 대한 자신은 없었다. 이튿날에도 삼일제(三日製)라는 특별 과거시험이 거행되었다. 시험 제목은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나아가다(東漸于海)’였다. 나도규는 ‘곧 태평시대가 열리면 어찌 바다까지 이르도록 적셔주는 은택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전날에 본 시험 제목과 합쳐서 보면 철종이 그러한 제목으로 과제를 낸 의도를 알 것만 같았다. 임금의 그런 의중에 감탄하고 경의를 표하였다. 그는 이러한 두 차례의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단지 다음날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공자의 대성전에 배알하는 알성례(謁聖禮)를 가까이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썼다. “나는 백면 유신(儒臣, 유학을 공부한 신하)으로 외람되이 한양으로 올라와 전하의 용안을 지척에서 뵙고서 예전부터 우러러 보았던 마음을 펴게 되었으나 작은 충성도 바칠 수 없으니 재주가 없음을 한탄할 뿐이다.”

그는 나중에 관직을 포기하고 성리학과 태극 및 음양의 이치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한번은 어떤 재상이 나도규에 대해서 듣고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시험 보기 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낙방하지 않았을 텐데.” 나도규는 이 말을 듣고 정색을 하며 “과거 시험을 보기도 전에 찾아가 뵙는 것은 진정한 선비의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1864(39세, 고종 1)에 집터에 휴양소 겸 강학을 위한 정자 남덕정(覽德亭)를 세웠다. 육영제(育英齋)라고도 불린 이곳에서 그는 성리학과 도덕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키웠다. 정자는 원래 초가였으나 나중에 나도규의 손자와 그 제자들이 협력하여 중건하고 그 후에도 계속 보수해오고 있다.

1868(43세, 고종 5)에 무등산(서석산)에 올라 등산을 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신발을 매고 길을 나서 광주읍을 향하여 떠났다. 정오에 발길을 재촉하여 증심사에 이르렀다. 증심사 계곡입구에 흐르는 물이 자갈 깔린 개울을 이루었다. 벼랑과 암반을 도는 여울이 우렛소리를 낸다. 최치원의 시에 ‘돌무더기 사이를 치달리며 깊은 골짜기를 울리네’라는 구절은 바로 이곳을 위해 준비해둔 시가 아닐까? 나무다리를 밟고 골짜기를 건너면 곧바로 절(증심사)이다. 절은 무성한 숲과 쭉쭉 뻗은 대나무 사이에 있다. 절이 비록 고찰이나 담은 무너지고 벽은 기울어져 모양새가 나오지 않는다.”
(⌈서석록(瑞石錄)⌋ 8월 3일 기록)

이때 깊은 인상을 받아 그는 2년 후인 1870년 4월에도 1박 2일 동안 가족을 데리고 무등산 산행을 하였다.

“집안 아저씨와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등산 도구를 준비하고 나주에서부터 화순의 남산을 거쳐 갔다. (중략) 4월 4일. 어제 저녁에 비가 조금 내렸으나 날이 밝기 전에 개였다. 서석산을 향하였다. 광치를 거쳐 사동을 지나가는데 철쭉꽃이 일제히 만개하니 온통 자주색과 붉은색 세상이라고 할 만하니 황홀하게 비단에 수놓은 장막 속에서 등산하는 것 같았다. 돌아보건대 행장에 다 구비되니 너무 사치한 것은 아닌가? 팔다리를 편히 하고 숲으로 들어가 크게 외치고 봄을 실컷 만끽하니 진정 별천지 가운데 즐거움이리라.”
(⌈서석속록(瑞石續錄)⌋)


1879
(54세, 고종 16), 12월에 스승 기정진의 상을 당하였다. 그의 문장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통유문(通諭文)」과 「집상제문(執喪諸文)」 등을 지었다. 초상을 치루고 「성기잠(誠幾箴)」을 지었다.

1883(58세, 고종 20)에 「자경사(自警辭)」를 지었다.

1885(60세, 고종 22), 3월에 고내상(古內廂) 도산촌(道山村)에서 세상을 떠났다. 9월 복룡산(伏龍山)에 장사지냈다가 나중에 석정(石亭)으로 이장하였다.

저서로 시문집인 ⌈덕암만록(德巖漫錄)⌋이 있다. 이 시집은 아들 나정근(羅楨瑾)과 손자 나종우(羅鍾宇)가 유고를 정리한 것이다. 그 내용은 시 302수, 서 88편, 설 10편, 서 20편, 기 34편, 기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철, 기정진, 최익현, 기대승 등과 같은 인물을 다룬 시가 있는가 하면 사물과 사건, 풍정과 서경, 감회 등을 묘사한 시가 있다. 화순에서 출생하여 나중에 의병장을 지내기도 한 기우만(奇宇萬)은 나도규에 대해 “그의 재주는 세상에 쓰일 만하고 그의 문장은 나라를 빛낼 만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내용 중에 「삼정책(三政策)」은 전부(田賦)·군적(軍籍)·환곡(還穀) 등 삼정이 문란한 것에 대해 논하고 그 대책을 밝힌 것이다. 「문장책(文章策)」은 사장학(詞章學)을 버리고 경전 연구를 중시하라는 글이다. 또 무등산을 유람하고 지은 ⌈서석록(瑞石錄)⌋과 ⌈서석속록(瑞石續錄)⌋ 등이 있다.

<참고자료>

김성환, 「덕암만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은희, 「南道 정자기행(413) – 향리의 기품이 광주 남덕정」, 한국매일 뉴스

이미선, 「나도규에 대하여」,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명희, 「나도규(羅燾圭)의⌈덕암만록(德巖漫錄)⌋」, 한국학자료DB

「나도규의 서행일기」, 호남기록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