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록보다 ⌈논어⌋를 중시한 이언적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

역사기록보다 ⌈논어⌋를 중시한 이언적

 

곡(1536-1584)이 외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나 아직 어머니 신사임당 품속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중종 33년 (1538)년 1월 21일, 율곡이 세 살되던 때인 당시 임금은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이었는데, 조정에서 임금이 신하들과 유교 경전을 읽고 있었다. 이 때 임금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이언적(李彦迪)이 왕세자의 교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을 끄집어냈다.

“조정의 잘잘못을 아뢰려고 하지만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의 급선무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세자를 잘 보호하고 가르치는 것이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세자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예민(銳敏)하여 학문이 통달(通達)하였으니, 종묘·사직과 백성들의 복(福)입니다.”

당시 세자는 중종의 장남으로 나중에 12대 국왕이 되는 인종이다. 인종은 1544년에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병으로 8개월 만에 승하한 불운의 왕이었다. 이언적이 세자의 자질이 총명하고 학문이 훌륭하여 종묘·사직의 복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종묘·사직이란 국가라는 뜻이다. 종묘란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신 사당이며,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말하는데, 둘을 합쳐서 ‘국가’, 즉 조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했다.

이언적은 이날 임금의 교육을 맡은 ‘시강관(侍講官)’으로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독(講讀)하고 있었다. 시강관이란 임금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문관을 말한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란 중국 명나라의 학자 구준(邱濬)이 1487년에 ⌈대학연의(大學衍義)⌋라는 책을 보충하여 지은 서적으로, 유교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의 여덟 조목 가운데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일)에 중점을 두어 논한 책이다.

이언적(1491년-1553년)은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는데, 151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1539년에는 전주부윤을 역임한 적도 있는 유학자였다. 그는 특히 주자가례에 정통하였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퇴계 이황의 학문에 큰 영향을 준 학자로 유명하다. 이날 임금을 가르치는 경연(經筵)은 그가 전주부윤에 나가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세자를 보호하고 기르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배움에는 근간이 되는 부분과 지엽적인 부분, 즉 아주 중요한 것과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앞선 성현(성인과 현자, 즉 지혜로운 자)들이 남긴 경전(經傳)을 반복해서 깊이 생각하고 성리(性理)를 연구하는 것이 근본적이며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역사 기록을 훑어보면서 앞선 시대의 정치를 고찰하여 오늘날의 귀감과 경계로 삼는 것은, 비록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기는 하나, 지엽적이며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일에 속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앞 선 시대의 정치에 대해서 배우는 것 보다는 유교 경전의 사상을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성현들의 경전인 유교 경전에 나오는 성리(性理), 즉 인간의 본성과 그 이치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이는 결국 송나라 주자가 집대성한 주자학, 즉 성리학을 철저히 배우는 것이 몹시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인직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제가 들으니, 요즘 왕세자를 가르치는데, 아침에는 ⌈자치통감강목⌋을 가르치고, 낮에는⌈논어⌋를 가르친다고 하는데, 이것은 역사서적을 우선으로 삼고 경전(經傳)을 나중으로 삼는 것입니다. 대체로 해가 뜨는 아침에는 사람의 마음과 기운이 맑고 깨끗하여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가 환하게 드러나므로 마땅히 ⌈논어⌋를 아침에 진강하고 역사서적인 자치통감강목은 낮에 가르치는 것이 옳습니다.”

세자는 당시 23살이었는데 요즘으로 말하자면 대학에 다니는 학생과도 같은 나이다. 그런 세자에게 역사과목을 아침에 먼저 가르치고, 낮에 도덕 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마땅히 도덕을 가르치는 논어를 먼저 듣게 하고 역사를 가르치는 자치통감강목은 나중에, 즉 낮에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과목을 먼저 듣고 나중에 듣고 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이언적에게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자치통감강목⌋은 송나라 주희, 즉 주자가 집필한 중국의 역사서로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에 대해서 큰 제목은 강(綱)으로 세우고, 역사적 사실은 목(目)으로 구별하여, 즉 ‘강목’의 형식으로 편찬한 서적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오대 십국 시대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이언적은 그 이유에 대해서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임금이 통치하던 당(唐)나라와 순임금이 통치하였던 우(虞)나라 그리고 삼대인 하상주(夏商周)의 삼대(三代) 이전에 어찌 역사 기록이 있었겠습니까? 심학(心學)이 있었을 뿐입니다.”

당우와 하상주, 즉 하은주(夏殷周) 삼대는 중국에서 이상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태평성대의 시기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평화의 시기 이전에 역사 기록은 없었으며 오직 심학(心學)이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심학이란 마음의 학문, 즉 도덕 수양의 학문인 논어 등 경학이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이언적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당시 사회가 태평성대의 시대였고 임금들이 모두 성인이며 성군들이었기 때문에 혼란한 사회와 정치를 기록한 역사 서적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며, 우리가 보는 역사서적은 그 뒤에 어지러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이언적은

“하상주 삼대 이후에는 본받을 만한 것은 적고 어지러운 것이 많습니다. ⌈자치통감강목⌋을 진강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비록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겠으나, 왕을 가르치는 제왕(帝王)의 학문에서 너무나 그 차례를 잃었습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중종은 시강관인 이언적의 가르침을 듣고 “이러한 주장이 매우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언적의 의견은 유학자로서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에서 우리는 적어도 중종 시대까지는 왕세자의 교육에 역사 서적이 전하는 흥망성쇠의 가르침을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개국한지 150여년이 지나면서 역사적인 가르침 보다는 유교 경전의 도덕적 가르침을 점점 더 중시하게 되었다. 율곡 이이는 성리학의 주리(主理)적 측면이 더 강조되는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유교를 배웠으며 과거시험을 준비하여 나중에는 장원 급제를 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율곡의 사상은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