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율곡학 인물들

이귀(李貴)-1


이귀(李貴)-1                                                        PDF Download

1557(명종 12)~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옥여(玉汝)이며, 호는 묵재(默齋)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아명은 영용(盈龍)이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조정에서는 연평(延平)이라는 호칭을 많이 썼는데, 이는 연평부원군이라는 그의 직책에서 나온 것이다. 1557년 3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에 추증된 이정화(李廷華)인데, 아버지는 아들 이귀와 손자 이시백(李時白)의 영화롭고 높은 지위를 가짐에 따라 영의정에 증직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귀가 출생한 다음 해,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청송부사 권용(權鎔)의 딸이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이귀가 막내아들이다.
이귀의 아명이 영룡인 것은 그의 어머니 태몽에 하얀 용이 물 항아리에 들어있는 것을 본 것에 따른다. 이귀가 2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전라도 익산으로 가게 된다. 이정귀(李廷龜)가 쓴 신도비문을 보면, 어머니 안동 권씨는 아버지를 잘 모르는 이귀에게 다음과 같이 아버지상을 기억시키려한 노력을 읽을 수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외할머니)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집은 원래 훌륭한 집안이다. 너의 할아버지 목사공이 기묘명인(기묘사화 때에 피해를 입은 사림들을 기묘명인이라 부른다)으로 매우 어지셨고, 모든 자식과 조카들이 다 바른 가르침을 삼가 지켜서 사람들이 ‘너의 집을 모범적 집안’으로 여겼다. 너의 아버지는 총명하여 보통 자식과 달랐으며,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여 할아버지 목사공께서 매우 소중히 대하시고, 너의 아버지 또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오직 판서 오상과 승지 유희림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처럼 이귀는 할아버지 양주목사와 아버지의 훌륭함을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익히 듣게 된다. 이것으로 보면, 이귀의 어머니 안동권씨는 상당히 총명하고 부덕이 높은 분으로써, 자녀들의 교육과 훈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14세에 이르자, 시골 익산에서 학업을 위하여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상경한다. 14세 소년으로 서울에 온 이후,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을 만나 같이 공부하며 평생을 같이하는 친구가 된다. 특히 이항복과는 밤새워 놀다가 이별을 아쉬워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된다. 그리하여 선조 말에서 광해군 때에 걸친 정치적 풍랑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는 동지적 관계를 유지한다. 또한 이덕형과는 어려서 윤우신(尹又新) 문하에서 같이 배우면서 절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이 또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사이가 된다. 이들과의 이러한 관계는 이귀가 스승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동인의 공격으로부터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정치적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대로 유지된다.
여기에서 잠시 오성과 한음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항복과 이덕형을 소개한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눈 수많은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덕형의 문집인 『한음문고』와 그의 후손 이명교가 밝혔듯이, 둘은 과거장에서 처음 만났다. 특히 이덕형의 문집을 보면, 이덕형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총 110여 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이항복에게 보낸 편지만 무려 77통에 이른다. 특히 이덕형은 이항복을 ‘형’이라는 매우 격식 없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으며, “형도 내 마음 몰라요”라고 징징대는 편지도 남아 있다. 그런데 정작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에는 다만 이덕홍을 위해 지어준 시가 몇 수 남아있을 뿐, 이덕형에게 보낸 편지는 한 통도 실려 있지 않다. 20세가 되어 일생의 스승이 되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이 된다. 당대의 대학자인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둔 것이다. 아마도 이귀의 넓고 해박한 지식과 지혜는 두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박세채(朴世采)는 이귀를 이이의 고제자(高弟子)라고 말한다. 그는 초기에 과거시험보다 학문에 뜻을 둔 공부를 하다가, 어머니의 권고로 과거공부를 하여 26세 되던 해에 생원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당시의 문과시험에는 사마시(司馬試) 혹은 생진과(生進科)라고 하는 소과시험과 문과라고 하는 대과시험이 있다. 또한 생진과는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작문과 작시를 위주로 한 합격자는 진사(進仕)라고 하고, 경서 위주의 합격자는 생원(生員)이라 한다. 생원과 진사는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을 갖추게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하급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귀는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후에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던 도중에 다시 대과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1590년 34세에 강릉참봉으로 처음 벼슬길에 오른다. 강릉은 선조의 선왕인 명종의 능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능의 제기 등 모든 기물을 묻고, 의병을 모집하여 평양 행재소로 달려간다. 그의 큰형 이보(李寶)는 400명의 익산 의병장으로 진산전투에서 순절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귀는 삼도소모관․삼도선유관․상서원직장․공조좌랑․유성룡의 종사관․장성현감․도총검찰관 등으로 맹활약한다. 왜란이 끝나고 김제군수․군기판관․체찰사소모관․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찰방․백천군수․함흥판관 등으로 선조 때에 18년간 벼슬한다. 특히 정인홍(鄭仁弘)의 죄 10조목을 선조에게 상소하여 정인홍의 대사헌 임명에 반대한다.
1608년 선조가 서거하고 광해군이 집권할 때에도 함흥판관 차사원으로 서울에 있었으며, 이어서 당상관으로 숙천부사에 임명된다. 1612년 모친상으로 경기도 고양 원당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한다. 여묘는 부모가 죽은 후에 무덤 근처에 초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무덤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여막을 지어 여묘하는 풍습은 중국의 장례제도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전통사회의 여막의 규모나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예고(禮考)」 <사상례조(私喪禮條)>를 보면,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이미 부모 및 남편이 죽으면 3년간 상복을 입도록 법제화하였다고 한다. 여막의 풍속은 고려 말부터 배출된 주자학자들의 생활에서 더욱 두드러져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는 사대부가에서 효행의 상징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여묘살이를 한 자에게 특별히 정려표가 주어졌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일반 상민들은 물론 사대부가에서조차도 보편적으로 실행된 것은 아닌 듯하다. 다만 부모나 남편의 죽음을 당하여 탈상하는 3년간 상복을 입은 채 일상음식을 피하면서 묘 옆의 초가에서 죽은 자의 무덤을 지키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효도를 다한다는 이상적 규범으로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귀는 경기도 고양 농가에서 3만자에 이르는 「갑인함사(甲寅緘辭)」라는 장문의 상소를 광해군한테 올린다. 「갑인함사」는 1614년(광해군 6)에 정인홍 등이 그를 죽이려고 이이첨(李爾瞻)․박재(朴梓) 등을 사주하여 그의 관직을 삭탈하자고 도모하였는데, 그에 대해 함사로써 임금에게 변명한 내용이다. ‘함사’는 조선시대 관아에 직접 출두할 수 없는 경우 서면으로 진술하는 문서를 말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듣지 않는다.
1616년 친구인 해주목사 최기(崔沂)가 모함을 받아 재판이 진행 중인데, 친구의 의리로 만난 것이 화근이 되어 강원도 이천에 유배된다. 1622년 유배와 연금에서 해제된 이귀는 평산부사겸 방어사로 임명된다. 또한 1623년 3월 12일 새벽 2시 홍제원에 집결한 1,000여명의 반란군은 ‘강상윤리를 밝힌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에 성공한다. 이것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킨다. 인조반정은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명분삼아 서인 김류․김자점․이귀․이괄․심기원 등은 반정을 일으켰다. 반란 후 이귀는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 된다. 경성호위대장․이조참판․동지의금부사․대사헌․개성유수․어영사․세자좌빈객․세자이사․지경연사․3차에 걸친 병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우찬성․좌찬성․연평부원군 등의 직책을 수행한다.
1633년 2월 후금 침략에 대비책을 논의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1633년 2월 5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영의정에 증직되고 인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연평부원군 이귀의 졸기(卒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던 것이다.

“연평부원군 이귀가 졸하였다. 이귀는 강개한 성품에다 큰 뜻을 품어 벼슬에 오르기 전부터 자주 글을 올려 국사를 말하였는데, 그 말이 수천마디나 되었다. 광해군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서 정사훈(靖社勳: 인조 때 반란을 평정한 공적) 1등에 포상되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고, 충정(忠定)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귀는 조정에 있을 때 알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간혹 흥분하여 임금 바로 아래의 최고 대신들을 꾸짖다가 여러 차례 임금의 꾸지람을 받기도 하였으나 고치지 못하였다. 마침내 죽자, 임금이 비통해하며 특별히 하교하기를 ‘연평부원군 이귀는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도왔다. 그 충직함이 세상에 비할 데가 없으므로 내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 장례에 쓰이는 물건을 평소의 수량보다 특별히 더 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묵재 이귀의 생애와 사상 연구」(이기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의정(金義貞)


김의정(金義貞)                                                        PDF Download

1495(연산군 1)~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
자는 공직(公直), 호는 잠암(潛庵) 또는 유경당(幽敬堂)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서울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조참판 김양진(金楊震)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허서(許瑞)의 딸이다.
22세(15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고, 32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래 홍문관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청요직’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사헌부의 장령 1인, 홍문관 당하관 12인, 이조전랑 6인, 예문관 한림 8인을 지칭한다. 이들은 결코 품계가 높지는 않았으나 고위직 관리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었다. 이 자부심의 배경에는 탐관오리의 자손이 후에 혹 사면을 받더라도 절대로 오를 수 없는 관직이라는 점도 한몫을 하였다. 그래서 2품(육조판서)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해도 청요직을 제대로 수행한 조상이 있다면, 그 가문은 명문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백성과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김안국(金安國), 이행(李荇)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때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김안로(金安老)와의 악연으로 인해 정치적 좌절을 겪었으며, 심정(沈貞)의 집안과 혼인한 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심정은 당시 신진사류들과 대립하던 훈구세력이었다. 심정이 1515년 이조판서에까지 승진하였으나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삼사’는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하여 부른 말로, 언론삼사(言論三司)라고도 한다. 또한 1518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들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어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인 정국공신(靖國功臣)도 삭탈되었다.
이에 심정은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던 중 1519년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말을 퍼트리며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사류들을 숙청했다. 1527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나, 복성군(福城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강서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이항(李沆)․김극핍(金克)과 함께 신묘3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김의정은 인종(仁宗)의 동궁 시절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지낸 것을 인연으로 인종이 즉위하자,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종이 즉위한지 7개월 만에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하여 스스로 ‘잠암’ 또는 ‘유경당’이라는 호를 하며 지내다가 병을 얻어 삶을 마쳤다. 경상도 예천군 광석산 선영에 묻혔다.
김의정은 조선 중기 뛰어난 문장과 의로운 삶의 행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훈고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네 차례의 사화(士禍)가 일어났던 혼란기였다. 사림들이 화를 당한 사건이라는 뜻으로 ‘사화’라고 부른다. 연산군 대부터 명종 대에 이르는 60여 년간의 기간은 사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김의정은 『소학(小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학문에 힘썼으며, 평생 의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창작한 문학작품에는 이러한 그의 학문과 의리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김의정의 삶과 문학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남곤(南袞, 1471~1527)은 김의정의 뛰어난 재주를 후진 문학자들 가운데 제일로 꼽았으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김의정의 문장과 절의는 세상에 영원히 전해져야 할 것이라고 칭송하였으며,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김의정을 상서로운 세상에 높이 나는 봉황에 비유하였다. 아울러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김의정의 「천형부(踐形賦)」에 대해 문장과 논리가 모두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였으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은 「기강부(紀綱賦)」에 대해 작품의 논리가 매우 훌륭하니 평소 실천의 독실함을 볼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여기서는 김의정이 특히 부(賦)의 창작에 탁월했다는 평가에 근거하여, 그의 ‘부’ 작품을 소개한다.
김의정의 ‘부’ 작품에는 유가적 도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곳곳에 드러난다. 김의정의 부 작품에 나타나는 유가적 도리의 실천의지는 쉼 없는 공부를 통해 축적한 학문적 소양이 그의 작품 속에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의정의 부를 ‘수신(修身)의 의지’라는 주제에 기초하여 살펴본다.
‘수신’은 유가적 실천항목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고, 『대학』의 팔조목에 의하면 수신을 위해 이루어야 할 공부가 격물․치지․정의․정심이다. 『대학』은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로, 그 내용은 크게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으로 나눌 수 있다. 삼강령은 밝은 덕을 밝히고(明明德), 백성을 친애하며(親民), 최고의 선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을 말한다. 또한 팔조목은 사물에 나아가는 격물(格物), 지식을 이루는 치지(致知), 뜻을 진실하게 하는 성의(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正心), 몸을 닦는 수신(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제가(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治國),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김의정은 이 항목들의 중요성과 실천의지에 대해 여러 작품에서 언급하였다. 「환우부(寰宇賦)」에서는 우주의 진실하고 쉼 없는 운행을 본받아 인간도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 자강불식의 자세로 마음을 수양하여 중화(中和)를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중화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써, 감정이나 성격 등이 지나치거나 치우치지 아니함을 말한다. 희로애락(喜怒哀樂), 즉 기쁜․성냄․슬픔․즐거움의 감정이 아직 사람의 행동에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 하며, ‘화’는 그러한 것이 이미 행동으로 나타나 절도에 맞음을 말한다. 이러한 중화의 덕이 지극히 이루어지면, 세상이 안정되고 만물이 모두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또한 「뇌전부(雷電賦)」에서는 번개나 우레와 같은 외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동요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의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는 것에서 비롯함을 피력하였다. 「방예부(放麑賦)」에서는 선행을 베풂에 시비판단이 명확하게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격물․치지와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검각부(劒閣賦)」․「무광지자황부(務廣地者荒賦)」 등에서는 통치자가 수신을 이루어 덕치(德治)를 시행해야만 국가를 온전하게 통치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천형부(踐形賦)」는 『맹자』「진심(盡心)」에 보이는 “사람이 지닌 형색(形色)은 천성(天性)이니, 오직 성인의 경지에 이른 뒤라야 형색을 실천할 수 있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可以踐形.)라는 말에 착안하여 창작한 것이다. 조광조의 논평을 참고하면, 이 작품의 창작 시기는 그의 나이 19세 이전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음양의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을 그대로 품부 받은 인간은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이지만, 각자 자신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품부받은 대로 살아가지 못함을 개탄하며, 동시에 천형(踐形)을 실현할 것과 나아가 정심(正心) 공부를 통해 본성을 보존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형색이 바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니,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각자의 형색을 발현하는 것이다. 우리 몸에 있는 눈․코․입․귀는 각각 나름의 기능이 있으니, 어느 하나 헛되이 있는 것은 없고, 그것 자체가 바로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도덕적 준칙이다. 그러므로 나의 형색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의정은 맹자가 언급한 ‘천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천형’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 하여 본성을 보전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컨대 스스로 법도를 다해야 하니, 어찌 꼭 형체를 실천할 필요가 있으랴? 진실로 나의 이 본성을 다한다면, 형체가 저절로 따라서 드러나리라. 형체는 드러나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이치는 묘하게 숨었으니 마음으로 터득해야 한다오. 마음에서 찾지 않고 형체에서 찾는다면 또한 덕을 다할 수 없다네. 천(踐)이라는 한 글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 아니네. 이것은 없는 것을 책하여 있기를 바라고, 고요한 것을 두드려 소리를 얻음과 같다오. 돌아보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 뜻이 더욱 깊다네. 실천하면 참다운 내가 있고, 실천하지 않으면 참다운 내가 없다네. 마음을 따라 사지(四肢)를 관장하여야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한 뒤에야 터럭 하나와 머리칼 한 올도 혼연하여 나의 마음을 막지 않으리니. 저 신령한 혼(魂)이 백(魄)을 떠나면 마음이 멋대로 날아가 방종하고, 오직 육체만이 홀로 남아서 마치 빈산의 말라죽은 나무와 같네. 비록 귀와 눈으로 보고 듣더라도 모든 이들은 그것이 빈껍데기 인줄 안다네. 나는 이를 슬퍼하고 두려워하여 이 가르침을 지켜 날마다 살피노라.”

사람이 타고난 형색(품성)을 실천하고 본성을 지극히 해야 함을 강조한 부분이다.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보존한다면, 형색은 저절로 발현될 수 있다. 마음을 보존하지 못한 형색은 방종하게 되고, 그것은 마치 텅 빈 산의 말라죽은 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비록 사람의 형체는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 실상은 한 덩어리 혈기로 이루어진 몸뚱이일 뿐이요, 물건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바로 하지 못하여 본성을 보존하지 못하게 됨은 그 무엇보다 애통한 일이다. 때문에 김의정은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자신을 성찰할 것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김의정의 부는 어려운 시어를 구사하지 않고, 경전의 내용을 쉽게 풀이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광조는 이 작품의 문장과 논리를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한 것이다.

[참고문헌]: 「잠암 김의정 賦문학 연구-작품에 형상화된 주제 의상을 중심으로-」(김진경, 『우리어문연구』38, 우리어문학회,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발(李潑)


이발(李潑)                                                             PDF Download

1544(중종 39)~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이발의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菴)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 이중호(李仲虎)는 예조참판․전라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어머니 해남윤씨는 최산두(崔山斗)․유성춘(柳成春)과 더불어 호남 3걸이라고 불리는 윤구(尹衢)의 딸이다. 1544년(중종 39)에 해남의 백련동 외가에서 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윤의중(尹毅中)의 사위이며,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고모부이다. 이발의 처조카인 윤선도는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음에도 연루되어 온 가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에 서인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을 품게 된다. 정여립 옥사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도 부른다. 기축옥사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발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 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1568년(선조 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9월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호당은 독서당으로, 조선시대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건립한 전문 독서연구기구이다. 그 뒤 이조정랑․대사간․대사성․부제학 등을 역임한다. 경학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아 선비들의 여론을 주도하고, 임금이 공부하는 곳인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왕도정치를 제창하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한다.
왕도정치는 맹자(孟子)가 주장한 정치사상이다. 무력이나 강압과 같은 물리적 강제력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도덕적 교화를 중시하는 정치를 말한다. 맹자는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게 되고,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진심으로 따르게 되니, 덕에 의한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유가들이 가장 이상으로 삼았던 정치사상이다.
조광조의 지치주의란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조광조가 추구한 이상적 정치이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치’란 『서경』「군진(君陳)」편 ‘지치형향 감우신명(至治馨香 感于神明)’에서 따온 것이다.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신명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지치’가 조광조에 의해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실천운동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유가에서의 이상사회는 하나라․은나라․주나라의 삼대를 가리킨다. 따라서 지치주의란 이상적 정치이념으로써 당시의 백성들을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삼대의 백성들로 만들려는 이상정치의 현실적 실천운동이다. 『서경』은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이다. 사서삼경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데, 사서는 『대학』․『논어』․『맹자』․『중용』을 말하며, 삼경은 『시경』․『서경』․『주역』을 이른다.
이조전랑으로 있을 때에는 자파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발은 1589년(선조 22)에 기축옥사로 교외에서 ‘죄를 기다리던’ 중 잡혀서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그해 12월에 매에 맞아 죽었다. 동생 이급(李洁)도 연좌되어 죽었고, 그의 82세 노모와 10세의 아들도 이때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이발과 이길의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이들의 죽음은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더욱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죄를 기다리는 것’은 보통 석고대죄(席藁待罪)라고 부른다. ‘석고대죄’는 죄지은 사람이 거적에 꿇어앉아 윗사람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처벌을 자청하는 것이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저놈에게 곤장 백 대를 쳐라.” 이런 처분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석고대죄는 보통 속옷 차림에 가깝도록 의관을 벗고 하는데, 몹시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큰 벌이다. 죄를 처분할 사람이 결단할 때까지 밤이 깊든, 눈비가 오든 그대로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 정조의 아버지이고, 회고록인 ‘한중록’을 남긴 혜경궁 홍씨의 남편이며, 아버지(영조)와의 갈등으로 뒤주에서 굶어죽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석고대죄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인조 2년(1624) 동생인 이길과 함께 죄가 면해지고 관작이 복원되었으며, 몰수한 재산은 되돌려졌다. 숙종 26년(1694)에는 이발과 이길의 절개와 행실을 기려 그 옛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정문’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다.

여기서는 이발의 학문경향을 동인과 서인의 분당, 나아가 남인과 북인의 분당을 둘러싼 논점을 통하여 소개하겠다. 즉 성종(成宗)대 이래 비교적 단일한 색채를 유지하던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다시 동인이 각각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원인이 무엇인지를 이들의 학문경향과 연결시키겠다는 것이다.
분당의 원인은 야사(野史)에서 전해지듯, 단순히 서로 간의 사사로운 감정 대립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파와 학파 사이의 갈등과 투쟁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각각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거나 또는 학문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16세기는 주자학에 입각한 유교적 가치관과 도덕규범이 보편화되는 시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자학 이외에 다양한 학문경향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즉 주자학적 사유체계의 정착과 함께 새로운 사유체계의 모색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시기가 주자학의 강경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사회․경제의 발전과 시대상황이 변동됨에 따라, 주자학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대응방법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비(非)주자학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대응방법에 대한 지식인들 내부에 이견이 생기는데, 이것이 결국 정치입장과 정치이념의 차이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 학문의 공통분모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이었다. 그러나 학자와 학파에 따라 이기설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달리하고, 궁극적으로 주자학과 비주자학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학문경향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서인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그 중심으로 하였으며, 동인은 이들에서 제외된 다양한 학파의 집합체였다. 동인 내부에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그리고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이들이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다. 때문에 이황과 조식 또는 이황과 서경덕의 사상적 차이가 제자들에 이르러 표면화되고, 급기야 중앙정계에서 남인과 북인이라는 두 세력으로 갈라지게 된다.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인’의 동질성은 더 이상 부각되지 않게 된다.
북인의 학문적 연원이라 할 서경덕과 조식은 기적(氣的) 사유에 기초하여 정치․사회의 운영론을 모색한다. 서경덕은 성리학 이해에 있어서 주희의 입장보다는 소옹(邵雍)과 장재(張載) 등 북송 성리학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여 세계의 시원과 운동의 원리를 ‘기’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 세계관을 체계화한다. 이것은 당시 조선학계에 존재하고 있던 다양한 형태의 기적인 사유를 종합하고 체계화한 것으로서, 이선기후(理先氣後)․이본기말(理本氣末)에 입각하여 ‘리’를 사상의 중심에 세우는 주자학(=이학)과는 그 근본에서부터 성격을 달리하는 사유이다. 이에 바탕하여 서경덕과 그의 후학들은 다양한 형태의 기론적 사유를 수용하는데, 이들이 대부분 소옹의 상수학(象數學)에 밝으며, 노장사상이나 양명학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조식의 학문도 서경덕의 학문과 유사한 면모를 지닌다. 그가 노장학을 숭상한다거나 양명학을 수용하였다는 세간의 평가는 ‘기’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사상적 면모를 부각시킨 것이라 하겠다.
북인은 대체로 서경덕과 조식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서울․호남과 경상우도 지역을 근거지로 학문 활동을 펼친다. 이들은 서경덕과 조식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들이거나 혹은 재전 제자들이다. 호남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발은 모두 서경덕의 학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발은 서경덕의 학문에 연원을 둔 김근공(金謹恭)․민순(閔純)의 문하에서 배웠고, 부친인 이중호 또한 민순에게서 배웠다. 이발의 친구이자 사돈인 홍가신(洪可臣) 또한 민순의 제자였다. 또한 이발은 조식의 고제인 최영경(崔永慶)과 가장 친하였으며, 직접 최영경과 정여립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이발과 사승관계나 친교를 맺는 인물 중 김근공․민순․홍가신은 서경덕 문인이며, 최영경․김우옹은 조식 문인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발은 비록 조식과 직접적인 사승관계에 있지는 않았지만, 조식의 문인들과 학문적 교류가 왕성하다. 이렇듯 이발은 서경덕 문인과 조식 문인과 고르게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이발의 학문이 서경덕과 조식 학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서인들이 정여립 역모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은 북인계의 주요 인물을 처벌하여 그들의 정치력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인 내부에 존재하는 비주자학적 학문경향을 척결하는데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남인들은 서인의 옥사처리를 관망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북인세력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발이 정여립을 이조전랑으로 추천하였을 때, 이황의 문인인 이경중(李敬中)은 정여립의 사람됨을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시킨 일이 그것이다. 예컨대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 역모에 대해, 유성룡 등 남인은 정여립이 일찍부터 ‘훌륭한 선비(善士)’가 아님을 알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반면 정여립을 ‘아름다운 선비(佳士)’로 추대했던 이발․정인홍․정언신․백유양 등 북인은 역모가 조작된 모함이라는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
정여립을 둘러싼 학자들 간의 상반된 평가는 남인과 북인 붕당의 중요한 빌미가 된다. 서인들은 정여립을 역모 혐의와 별개로 사상적으로 주자학을 벗어난 이단(異端)적 인물로 평가한다. 또한 남인들도 정여립을 ‘훌륭한 선비’가 아닌 인물로 경시한다. 이처럼 정여립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친화적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마도 조식․서경덕 학파에 비해 이황학파가 이이․성혼학파의 주자학적 정치론을 공유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볼 때, 북인과 서인, 북인과 남인이 서로 대립하는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정여립을 둘러싼 정치적․학문적 견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기축옥사에서 북인이 많이 죽은 것은 정여립이 북인이었기 때문이다”라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여립은 북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때문에 정여립에 대한 상반된 입장은 단순히 정여립 개인에 대한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내포하는 북인의 학문이나 정치사상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인은 학문방법, 정치론, 현실인식 등에서 서인은 물론 남인과도 서로 대비되는 모습을 강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이로써 기축옥사는 북인과 서인뿐만 아니라, 북인과 남인 간의 정치적․학문적 특성을 명확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서경덕․조식의 기론적 사고에 근거한 정여립의 사상과 그 사상에 동조하는 북인은 이이학파의 서인이나 이황학파의 남인과는 달리, 주자학과는 다른 정치성향을 모색한다. 이발의 학문 또한 이러한 ‘기’를 중심으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주자학 이외의 다른 학문까지도 폭넓게 포용하는 비주자학적 학풍을 견지한 북인의 학문적 전통 속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이발은 서경덕․조식의 학풍 속에서 당시 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정국의 실천방안을 모색하였던 북인의 대표적인 학자요 관료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동암 이발의 학문경향과 정치활동-청신정치의 청산을 둘러싼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심으로-」(김정신, 『호남문화연구』46, 호남학연구원,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임성주(任聖周, 1711-1788)-2

임성주(任聖周)-2                                                  PDF Download

임성주는 본관은 풍천(豐川)이며 자는 중사(仲思)이고 호는 녹문(鹿門)이다. 충북 청풍(淸風)에서 태어나고 만년에는 공주의 녹문에서 살았다. 조부 임의백(任義伯)은 송시열과 동문이다. 부친은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지낸 임적(任適)이며 모친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호조정랑(戶曹正郎)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이다. 5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아우인 임정주(任靖周), 임경주(任敬周)와 함께 낙론의 대표자인 이재(李縡)에게 배웠다. 누이 윤지당(允摯堂) 임씨도 여류학자로 유명하다.

3세(1712) 사랑채 벽에다 “임사동임사동(任獅同: 사동은 임성주의 아명이다) 뱃속에 글자 오백 자가 들어있다.[任獅同腹中書五百字入]” 썼다.

16세(1726) 이율곡의 글을 읽고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자서(自序)〉를 썼다. “열여섯 살 때 율곡의 글을 보고 깨달음이 있었고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합치하는 묘리를 알았으며 큰 뜻을 세웠다.”

17세(1727) 이재의 문하에 나가 수학했다. 임성주가 이재와 20세부터 24세까지 약 5년 동안 함께 질문하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한천어록(寒泉語錄)>이다. 학문의 자세와 사서삼경에 대한 부분적 토론과 <심경(心經)>의 칠정(七情)에 관한 견해 등이 실려 있다.

18세(1728) 봄에 부친상을 당하고 19세에 백씨와 함께 모친을 모시고 청주(淸州) 옥화대(玉華臺)로 들어가 학업에 힘썼다.

22세(1733) 모친의 뜻에 따라 형 임명주(任命周)와 함께 사마시에 응시하여, 〈대귀신문(對鬼神問)〉으로 입격하였다. 당시 고관(考官) 조명리(趙明履)가 “큰 선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칭찬했다.

25세(1736) 겨울에 회덕(懷德)의 옥류각(玉溜閣)에서 송문흠(宋文欽) 등과 <대학>을 강했다. 이때의 논의를 〈玉溜講錄〉으로 남겼다.

26세(1737) 겨울에 모친을 모시고 여강(驪江)으로 거처를 옮기고, 여주에 살던 민우수(閔遇洙), 김원행(金元行) 등과 강학하며 도의를 연마했다.

32세(1743) 여강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39세(1750) 처음으로 세자익위사세마를 제수 받고, 41세에는 익위사 시직(侍直)에 올랐고 이듬해 종부시로 자리를 옮겨 종 6품의 주부를 맡았다.

44세(1754) 임실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46세 동생, 47세 형을 잇달아 여의자 사직하고, 48세에 공주 근방의 녹문(鹿門)에 은거하였다. 이 해 겨울에 모친상을 당했다.

49세(1759) 김원행에게 편지하여 이제까지 주장해 오던 낙론의 인물성변이 잘못되었음을 설파하고, 〈녹려잡지(鹿廬雜識)〉를 지어 자신의 바뀐 생각을 기술했다.

58세(1768)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여 임성주 외대(外臺: 도사(都事)의 별칭으로, 도사는 외관직(外官職)으로서 경관직(京官職) 대관(臺官)인 사헌부(司憲府)의 직임을 수행한다는 뜻으로 이 말이 생겼다.)로 추천하였다.

63세(1773) 전주 판관이 되었으나 정사에 서툴다는 이유로 체임(遞任)되어 영천 군수로 옮기고, 이듬해 사도시 첨정과 군자감 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64세(1774) 성천 부사가 되었을 때 문장은 잘하지만 사무에 서툴고 병치레만 한다는 무소(誣疏)로 체직되었다. 장령 경재관(慶再觀)이 아뢰기를, “성천 부사(成川府使) 임성주(任聖周)는 경학은 참으로 잘하지만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본래부터 잘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지난번 전주로 제수되어서도 대신이 체직을 청하기에 이른 적이 있으니, 그가 사무에 서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지에 간 뒤부터는 관아를 닫아걸고 병치레만하여 고을의 일이 쌓였으니,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일 후에 대사간 이석재(李碩載)가 아뢰기를, “며칠 전 장령 경재관(慶再觀)이 임성주를 논하면서 경학은 잘한다고 하면서 수령의 직책은 맡길 수 없다고 하니,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또 성천은 본래 사무가 많은 고을이 아닌데도 부임한 지 10여 일도 지나지 아니하여 공무를 폐지하는 폐단이 있다는 따위의 말은 모두 여기저기서 주워 모아 나온 것이니, 경재관을 파직하시기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2세(1782) 봄에 온 집안이 여동생 임윤지당(任允摯堂)이 있는 원주(原州)의 산호(山湖)로 이사했다.

78세(1788) 녹문동에서 졸했다.

사후 1845년(헌종 11년) 좌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주청에 따라 대사헌 겸 성균관좨주(大司憲兼成均館祭酒)를 추증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녹문집>은 동생 임정주(任靖周)가 주도하여 녹문 사후 6년인 1794년(정조 18년에 간행하였다. 위의 저작들 가운데 <서연강의(書筵講義)>는 녹문이 경연관의 임무를 수행할 때 강연한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한 책이고, <녹려잡지(鹿廬雜識)>는 녹문이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서 상이론(相異論)으로 관점을 바꾼 뒤 저술한 책이다. 여기에는 성리학의 중심 이기심성론이 들어있다.

<소학>의 본주(本註)는 하씨(何氏)의 집성(集成)으로 나타나 있는데도 읽는 사람들이 살피지 못하여 주자가 쓴 것임을 모르고 있었는데, 임성주가 송문흠과 더불어 고증하고 점검하여 그것을 새롭게 정리하여 세상에 유포시켰다. 주자의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 <소학>의 본주를 여씨본(呂氏本)에 따라, 고경(古經)의 12편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런데 <영락대전(永樂大全)>에는 왕필본(王弼本)과 합쳐서 전의(傳義)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임성주는 후학들이 주자의 참뜻을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주자의 여러 학설을 고증하여 다시 이를 바로잡았다.
<주서차의(朱書箚疑)>는 송시열의 저작이나 그 초고가 아직 손질되지 않았는데, 권상하 등이 미처 수정하여 완성하지 못한 것을 녹문이 손수 <송자대전(宋子大全)>에서 본차(本箚)를 베껴 미비한 내용을 보충하고 미진한 것을 바로잡아 10여 년 동안 공을 들인 끝에 제목을 <차의보(箚疑補)>라고 했다.

참고자료

<녹문집(鹿門集)>
<임성주의 생의 철학>(한길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해제 고전번역서: 녹문집>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최석정(崔錫鼎, 1646-1715)- 2

최석정(崔錫鼎)-2                                                  PDF Download

최석정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초명은 석만(錫萬)이며 자는 여시(汝時), 여화(汝和)이고 호는 존와(存窩), 명곡(明谷)이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을 주장했던 최명길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한성좌윤 완릉군(完陵君) 최후량(崔後亮)이다. 어머니는 안헌징(安獻徵)의 딸이다. 응교 최후상(崔後尙)에게 입양되었다.

9세(1654) <시경>과 <서경>을 암송했다.

12세(1657) <주역>을 도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신동으로 인정받았다. 남구만(南九萬), 이경억(李慶億)의 문인이고 박세채(朴世采)와 종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7세(1662) 감시(監試) 초시에 장원을 했고 21세(1666) 진사시에 장원했으며 동시에 생원시도 합격하였다.

26세(167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30세(1675, 숙종 1년) 의정부에서 홍문록(弘文錄)을 선발한 17인 중에 최석정이 뽑혔다.

31세(1676) 응지소에서 윤휴를 비난하고 송시열, 김수항을 옹호하는 소를 올렸다. 양사와 옥당이 일제히 최석정을 멀리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하자, 숙종이 허락하지 않다가 열여섯 차례나 아뢰어서 관직을 박탈하고 ‘문외 출송(門外出送, 문밖, 즉 한양바깥으로 쫓아 내보내라)’하라는 명을 내렸다.

34세(1680) 경신환국 이후 병조정랑, 승정원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양부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39세(1685) 사학 유학생들이 이른바 <명재의서(明齋疑書)>가 이이를 모함하여 욕했다고 비난하자 최석정이 대제학으로서 윤증을 신구하는 소를 올렸다. “김성대(金盛大) 등이 윤증의 서찰 한 구절의 말을 따가지고 선현을 무욕하였다고 일러서 죄를 성토하는 글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윤증은 문간공 성혼의 외손자이고, 문성공 이이는 실로 성혼과는 덕을 이웃하여서 외롭지 아니합니다. 윤증이 두 분의 선현을 높여 사모한지 여러 해가 되었은즉 이제 이이를 모욕하였다는 것이 과연 이치에 가깝겠습니까? 하물며 그의 편지는 선현을 끌어다가 그의 아비의 일을 인증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일분인들 날조한 것에 근사한 말이 있었겠습니까?” 했다.

41세(1687) 부제학으로서 나양좌(羅良佐)를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로(大老: 송시열)의 상소의 말이 절박하게 윤선거(尹宣擧)를 몰아세웠으니, 문생들의 마음에 몹시 박절하게 여겨 한 번 변명해 보려고 함은 천리와 인정에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말을 해가는 사이에 실로 화평한 면은 없고 거의 과격한 말이 많았으니 진실로 잘못한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서서히 따져보지 않고 무거운 율을 내리어 위엄과 노여움의 진동이 겹치게 되면 몰골이 수참하게 됩니다. 오도일(吳道一)에게 있어서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주달하는 일을 한 것인데 죄를 주었으니, 이 이후로는 비록 지나친 일이 있으시더라도 다시는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될 듯합니다.” 했다. 앞서 송시열이 윤선거를 책망하는 상소로 인한 파장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였는데, 우의정 이단하(李端夏)가 윤선거의 문생들의 상소를 받지 말도록 하면 좋겠다는 안을 내놓자, 최석정이 “대신이 진달한 말은 비록 진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바치지도 않은 상소를 앞질러 받지 말라는 영을 내림은 과연 일의 대체에 합당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42세(1688) 상소하여 진계(陳戒)하고 짤막한 잠언(箴言) 6편을 올렸다. “군주의 마음은 온갖 변화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먼저 단정한 것으로 근본을 삼고, 다스리는 도는 공평한 것보다 큰 것이 없기 때문에 극을 세우는 것이 그 다음이 되며, 군주의 덕은 마음을 비워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간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다음이 되고, 진덕수업(進德修業)은 반드시 학문을 강론하는 데에 의뢰하기 때문에 학문에 항상 종사하는 것이 그 다음이 되며, 안일한 것은 군주의 큰 경계가 되기 때문에 정사에 부지런히 하는 것이 그 다음이 되고, 백성은 나라를 보유하는 근본이 되므로 나라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매였기 때문에 백성을 무휼하는 것으로 끝을 삼는 것입니다. 했다. 숙종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호피를 하사했다.

42세(1688) 5월에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완성했다. 현종(顯宗) 때에 이민철(李敏哲)로 하여금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게 하였으나 중간에 폐지하여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최석정이 수리할 것을 건의해서 숙종이 이민철에게 명하여 다시 수리하게 하고 최석정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게 했다. 완성된 선기옥형을 희정당(熙政堂) 남쪽에 있는 제정각(齊政閣)에 두었다.

50세(1696) 이조판서로 관제를 논하는 차자를 올렸다. 그중 인재를 구하는 것으로 서얼의 폐해를 지적했다. “우리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는, 오로지 문벌을 숭상하여 서울 사람을 앞세우고 시골 사람을 뒤로 미루니, 이미 어진 사람을 세우는 데에는 일정한 방도가 없다는 의리에 어그러지며, 서류(庶流)를 막는 데 이르러서는 진실로 옛 제도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송익필(宋翼弼)의 학술로도 포의로 마치고, 신희계(申喜季)의 문장과 우경석(禹敬錫), 유시번(柳時蕃)의 재지가 모두 그 뛰어난 재능을 펴지 못하였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52세(1698) 숙종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을 적에 최석정이 우의정으로 중국에서 보낸 쌀[호미胡米]로 서울의 위급함을 먼저 구제할 것을 청하자, 예조판서 신완(申琓)이 “금번에 곡식을 청한 것은 오로지 관서 지방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만약 서울 백성들을 먼저 구제한다면 관서 지방의 백성들이 반드시 실망할 것입니다.” 하자, 숙종이 “이는 까닭 없이 공연히 빼앗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마땅히 대체하여 지급할 것이다.” 하고, 본도(本道)에 다시 물어본 뒤에 그 수량(數量)을 의논하여 확정하자는 최석정의 말을 옳게 여겼다.

59세(1705) 왜인이 공작미(公作米): 공무(公貿)하는 면포의 대가로 대마도에다 바꾸어 지급하던 쌀)를 허락받는 일 때문에 떠나지 않으므로 동래 부사가 계문했는데, 최석정은 말하길, “왜인에게 공급하는 면포를 쌀로 대신 주는 것은 왜인의 간청에서 나온 것이고 당초에 약조한 것이 아니니 구습대로 번번이 주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린(交隣)하는 도리는 처치를 마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마도의 살길은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미곡에 의지하므로 전에 와서 청하였을 때에 사리에 의거하여 엄준하게 막을 줄 몰랐던 것은 아니나 허락했습니다. 그 뒤 다시 청하였을 때에도 막지 않았던 것은 실로 후의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 굳게 지키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왜인이 절망하여 유감을 품는 것은 형세상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특별히 헤아려 허락하되 수년이 넘지 않게 연한을 작정하고 그 뒤에는 다시 청하지 말도록 엄하게 약속하여 한편으로는 먼 곳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장래의 폐단을 막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했다.

60세(1706) 영의정으로 조부(祖父) 최명길(崔鳴吉)의 일을 신원했다. “신의 조부가 화친을 주장한 의논은 스스로 본말이 있어, 정묘년의 일은 뜻이 싸움을 그치게 하는 데 있고, 병자년 봄의 일은 근심이 흔단(釁端)을 도발하는 데 있었으니, 남한산성의 일에 이르러서 어찌 그만두어도 될 일을 하였겠습니까? 그 때의 청론(淸論)이 혹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는 의리로만 주장을 하였으나 신의 조부는 ‘명나라에 진실로 망극한 은혜가 있으나 이미 사직과 백성이 있는데 어떻게 필부의 양지(諒知)만을 변통성 없이 굳게 지키겠는가?’ 하고 명나라가 거의 망하게 된 것을 민망히 여겨 일신의 이해를 돌아보는 데 겨를이 없었으며 황폐한 땅에 조정을 세우고 잿더미에서 국력을 수습하여 안으로는 여러 가지 일을 종합하고 밖으로는 대의를 신장시키며 굴절주선하는 데 마음이 피로하고 힘이 다하였으니 인인군자(仁人君子)는 마땅히 측연(惻然)한 마음으로 그 뜻을 슬퍼했을 것입니다.” 하고, 여러 번 징병(徵兵)을 거절하고 자문(咨文)을 갖추어 중[僧]을 보내다가 북옥(北獄)에 잡혀 들어간 일 등을 나열했다.

62세(1708) 영의정으로 시무4조의 책자를 올렸다. “첫째 인족(隣族: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으로 지방의 백성이 공금(公金)과 관곡(官穀)을 갚지 못하거나 군정(軍丁)이 도망 사망하여 군포세(軍布稅)를 내지 못할 때 이를 억지로 그 인인(隣人)에게나 일족(一族)에게 대신 징수하는 일이다.)을 혁파하여 민원(民怨)을 제거하는 것이고, 둘째 전폐(錢弊)를 교정(矯正)하여 민곤(民困)을 풀어주는 것이고, 셋째 교포(校布: 향교(鄕校)의 교생(校生)이 내는 군포(軍布)다.) 를 거두어 들여서 한민(閑民)을 처치(處置)하는 것이고, 넷째 보미(保米: 군보(軍保)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쌀이다.)를 제정하여서 속오군(束伍軍)을 너그럽게 하는 것이었다.”

1715년 기사(耆社: 기로소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고, 이 해 사망하였다. <숙종실록> 41년 11월 기사에 졸기가 있다. “최석정은 성품이 바르지 못하고 공교하며 경솔하고 천박하였으나, 젊어서부터 문명이 있어 여러 서책을 널리 섭렵했는데, 스스로 경술에 가장 깊다고 하면서 주자가 편집한 <경서(經書)>를 취하여 변란(變亂)시켜 삭제하였으니, 이로써 더욱 사론에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번 태사(台司) 에 올랐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전도되고 망령된 일이 많았다. 남구만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그의 언론을 조술하여 명분과 의리를 함부로 전도시켰다. 경인년에 시약(侍藥)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엄지(嚴旨)를 받았는데, 임금의 권애(眷愛)가 갑자기 쇠미해져서 그 뒤부터는 교외(郊外)에 물러가 살다가 졸하니, 나이는 70세이다. 뒤에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사관의 평이 박하다.

직업 관료의 성격이 강해 의리·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또한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야승(野乘)』을 집대성하려고 노력하여 찬수청을 설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편저에 <전록통고(典錄通考)>가 있고, 저서로 <예기유편>과 <명곡집(明谷集)> 36권이 전한다.

참고자료

<국역조선왕조실록>
<명곡집(明谷集)>

최징후(崔徵厚, 미상-1715)

최징후(崔徵厚)                                                       PDF Download

최징후는 자가 성중(成仲)이고 호는 매봉(梅峯)으로 권상하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전거마다 명단이 조금씩 다르지만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현상벽, 성만징, 한홍조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로 불린다.

1705년 한원진과 함께 오서산(烏棲山) 정암사(淨巖寺)에서 독서하고 강학했다.

1709년 3월, 호락논쟁의 발단에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 한원진이 1705년에 <동지에게 알리는 글示同志說>을 썼고, 이후 <율곡 선생 별집에 의견을 덧붙임栗谷別集付籖>,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논설本然之性氣質之性說>, 〈인심도심에 대한 논설人心道心說>, 퇴계 선생 문집의 의문점에 대한 해설退溪集箚疑>을 잇달아 내놓는다. 이를 통해 최징후와 한원진 사이에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1707년 권상하의 제자가 된 이간은 한원진의 견해를 접하고 자신과 절친했던 최징후에게 편지를 보낸다. “저는 덕소(한원진)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친구들에게 듣자니 대개 우리 문하에서 의지할 만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소 그를 흠모하여 한 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그가 논설한 것을 보니 제 생각과 잘 맞는 부분이 없지 않아 아주 다행입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설에 대한 제 견해는 주제넘지나 않았는지 생각되니, 직접 찾아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형이 이 뜻을 전하여 주선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1709년 4월에 이간, 한원진, 한홍조, 윤혼, 현상벽 등과 함께 홍주(洪州) 한산사(寒山寺)에서 회강했다. 앞서 이간이 보낸 편지를 받아본 한원진이 회신하길, “공거(이간) 형의 편지를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학식이 얕아 아는 바가 없는데도 여러 학형들께서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매양 의리로 판별하여 혼매한 저를 깨우쳐 주시고 또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니 정말로 큰 우정입니다. 지금 공거 형의 편지가 저의 잘못을 정밀하게 증명하셨는데 그분과 더불어 마땅한 결론에 이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한산사 회합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1711년 한원진과 함께 홍주(洪州) 벽제산(碧蹄山)에서 회강했다.

1715년 최징후가 졸했다. 한원진이 최성중이 지은 <가례의소>에 해설을 달아 〈崔成仲家禮疏義付籖〉을 지었다. 권상하가 한원진에게 보낸 편지에 “성중(최징후)은 사우들의 기대가 매우 중하였는데 뜻밖에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모두 우리들 운기(運氣)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슬프기 그지없네.” 했다.

참고자료

<남당집(南塘集)>
<한수재집(寒水齋집)>
<관봉유고(冠峯遺稿)>

이이근(李頤根, 1668-1730)

이이근(李頤根)                                                         PDF Download

이이근은 본관은 전주이며, 자가 가구(可久)이고 호는 화암(華巖)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고, 이성진(李聖眞)의 아들이다. 권상하의 문인이다.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현상벽, 최징후, 성만징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로 불린다.

39세(1706, 숙종 32년) 학문이 뛰어나다는 명목으로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천거를 받았다. 당시 비국(備局)에서 학술(學術)이 정심(精深)하고 행의(行誼)가 순고(純固)하며 재식(才識)이 통련(通練)한 세 조항으로 명목(名目)을 삼아서 대신(大臣), 육경(六卿), 삼사장관(三司長官)으로 하여금 각각 두 사람을 천거하고, 방백(方伯)도 또한 도내(道內)의 사람을 천거할 것을 청하였다. 최석정(崔錫鼎)이 학술(學術)로 윤동수(尹東洙)를 천거하고, 재식(才識)으로 남학명(南鶴鳴)을 천거하였으며, 또 차자(箚子)로써 학술로는 윤명좌(尹明佐), 한영기(韓永箕), 박필창(朴弼昌), 이이근(李頤根), 이만부(李萬敷)를 천거했다.

50세(1717) 숙종이 “지난번에 승지의 말을 듣건대, 호중(湖中)에 학문에 뜻을 둔 선비가 많이 있다 하므로 드러난 사람을 찬선(贊善)에게 물으려 하였으나 행궁(行宮)에서 인견(引見)하였을 때에 갑자기 잊어서 아직도 묻지 못하였으니, 따로 사관(史官)을 보내어 찬선에게 묻도록 하라.” 했다. 권상하가 이이근이 도신(道臣)의 천거에서 빠졌다고 대답하였는데, 임금이 이이근에게 벼슬을 제수하라고 명했다.

54세(1721, 경종 1년)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8세(1725, 영조 1년) 세자시강원자의를 제수했다.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길, “이간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도목정(都目政: 관원의 치적을 종합 심사하여 그 결과에 따라 영전·좌천 또는 파면을 시키는 일이다. 해마다 음력 6월과 12월에 실시했으며 앞의 것을 권무정(權務政), 뒤의 것을 대정(大政)이라 한다.)을 행하여 박필주(朴弼周), 이간, 윤봉구, 한원진, 채지홍, 이이근을 경연관(經筵官)으로 초계(抄啓)했다.

왕자 사부(王子師傅) 이이근(李頤根)을 징소(徵召)하였으나, 이이근이 상소하여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60세(1727) 이이근을 왕자 사부(王子師傅)로 불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인신(人臣)의 진퇴는 양재(量材), 양분(量分), 양의(量義)하는 세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의 미숙한 학문이 얕음은 본시 재주가 없어서이고, 보통 백성으로서 어리석음은 신분이 본래 미천해서이며, 스승에 대한 모함을 아직도 통쾌하게 씻지 못했으니 의리에 있어 조정에 나아가 항안(抗顔)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옛적에 법진(法眞)이 소지(素志)를 지키기 원했음은 자신의 재주를 헤아려 본 것이요, 정경(程瓊)이 당시의 세상에 바라는 바가 없었음은 자신의 분수를 헤아려 본 것이고, 연원(淵源)이 같은 사람을 물리치다가 오히려 당시의 임금에게 용납되어 걸신(乞身)하여 한가한 몸이 되었음은 주자가 의리를 헤아려 보고 한 일이었습니다. 옛사람들은 이 중에 한 가지만 있게 되어도 오히려 모진(冒進)하지 않았었는데, 하물며 신(臣)은 이 세 가지에 있어 어느 하나도 자신을 안정할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했다.

산림으로서의 중망이 있어 누차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성만징(成晩徵, 1659-1711)2

성만징(成晩徵)-2                                                  PDF Download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달경(達卿)이고 호는 추담(秋潭), 환성당(喚醒堂)이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문경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성호영(成虎英)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로 통덕랑(通德郎) 이동야(李東野)의 딸이다. 권상하의 문인이다.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이이근, 현상벽, 최징후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로 불린다.

8세(1666)에 시재를 보였다. 계단에 백일화가 핀 것을 보고 “백일화라 백일 동안 붉나니, 십일 동안 붉은 꽃이 없다더니 여기 백일 동안 붉게 피었네. [百日花, 百日紅。花無十日紅, 今有百日紅。]

16세(1672) 큰형에게 <대학>을 배울 적에 거경공부를 배우고 몸소 실천하여 수개월 후에 깨달은 바가 있어 시로 지었다.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것이 무엇인고 물으면 만 가지 달라도 이원으로 통한다네.[無上亦無下, 無始亦無終。若人問此物, 萬殊一源通。] 큰형이 체용일원의 묘리를 대체로 알았다고 칭찬했다.

24세(1680) 화양동의 송시열을 찾아뵙고 큰 감화를 받아 입문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병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35세(1691) 황강으로 권상하를 찾아뵙고 사제의 연을 맺다.

40세(1696)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합향하는 것으로 이제억(李濟億), 정시한(丁時翰) 등이 반대의 소를 올렸는데, 성만징이 주장하여 변무의 소를 올렸다. 그 안이 대체로 성만징의 손에서 나왔다.

45세(1703)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과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시 숙종이 왕자(王子)가 스승에게 글을 배울 때가 되었다고 하여 사부(師傅)를 아주 잘 고르라고 명한 뒤 성만징(成晩徵)을 왕자 사부(王子師傅)로 삼았다. 사관이 성만징은 영남의 명망 있는 선비라고 기록했다.

1704년 만동묘(萬東廟)의 향사(享祀)를 둘러싼 논쟁 때 「만동사시비변(萬東祠是非辨)」을 지어 송시열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성만징은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친명배청사상(親明排淸思想)이 남달리 강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성은 곧 이이다(性卽理).”라는 설과 “이기가 혼융(混融)하다.”는 설을 지지하여, 낙론(洛論)에 접근한 경향을 보였다.

예설(禮說)에 밝아 권상하, 이세필(李世弼) 등과는 상당히 깊이 있는 이론적 문답을 주고받았다. 또한 <학성도(學聖圖)>를 만들어 후학들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문경의 한천사(寒泉祠)에 봉향되었다. 시문집인 <추담문집>이 있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추담문집(秋潭文集)>

윤혼(尹焜, 1676-1725)

윤혼(尹焜 )                                                                 PDF Download

윤혼은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회이(晦爾), 호는 천서(泉西)이다. 관찰사 윤희길(尹希吉)의 5대손이며, 윤헌징(尹獻徵)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윤침(尹琛)이고, 아버지는 윤동명(尹東鳴)이다. 어머니는 한성(韓宬)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열 살에 이미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다.

32세(1707) 권상하의 문하에 들어가 <대학>의 의의(疑義)를 논하니 권상하로부터 학문이 높음을 인정받았다. 신경(申敬), 한원진, 현상벽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강문팔학사의 한 명이다. 전거마다 명단이 조금씩 다른데,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한홍조, 현상벽, 윤혼 등을 칭한다. 책에 따라서는 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 화암(華巖) 이이근(李頤根), 매봉(梅峰) 최징후(崔徵厚)를 넣고, 윤봉구와 한홍조, 윤혼을 빼기도 한다.

34세(1709) 권상하를 따라 신경, 한원진, 현상벽 등과 함께 화양동에 들어가 만동묘(萬東廟) 건립에 참여하였다.

39세(1714) 사마시에 합격했다.

44세(1719) 학행(學行, 학문과 행실)으로 천거를 받아 명릉참봉(明陵參奉)이 되었다. 이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정언·지평에 이르렀다.

50세(1725, 영조 1년) 스승 권상하를 배척한 신치운(申致雲)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신의 스승인 선정신 권상하가 을미년에 올린 상소는 사도를 천명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친 그런 내용이었는데, 저 윤증(尹拯)의 무리들이 원한을 깊이 품고 막된 소리로 욕설을 한 것이 한이 없었습니다. 신치운(申致雲)이 무고한데 이르러서는 그것이 아주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났으므로 곧 하나의 고변서였습니다만, 다행히도 성명(聖明)께서 맨 처음에 누명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신의 스승을 추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치운을 극진히 용호(容護)하여 귀양 보내기를 청한 아룀을 여러 달이 되도록 윤허하지 않고 계시니 전하께서 신의 스승을 추숭하여 주신 보답이 끝내 성실하지 않은 것이 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좌의정 민진원이(閔鎭遠)이 삼사의 합계로 공박을 받은 사헌부 지평 윤혼을 두둔하는 글을 올렸다. “근래 윤혼(尹焜)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군부(君父)를 경시한다는 분부가 계셨는데, 이는 이미 실언(失言)인 것입니다. 그런데 윤혼은 엄중한 분부를 받으면서도 끝내 좌절하고 동요되지 않았으므로 그의 정직한 기개는 칭찬해야 할 만한데, 성상께서는 의심하여 승부를 다투는 것으로 여기시니, 이런 등류의 하교는 참으로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삼가 이로부터 강직한 선비가 조정에 서기를 원치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깊이 헤아려 생각하시어 언로를 열게 하소서.” 하니, 영조가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현상벽(玄尙璧, 1673-1731)

현상벽(玄尙璧)                                                       PDF Download

본관은 연주(延州)이고 자는 언명(彦明)이며 호는 관봉(冠峯)이다. 권상하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38세(1710) 스승 권상하에게 편지하여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반박했다.

39세(1711) 권상하에게 편지하여 권상하와 이간의 오상(五常) 문답에 대한 의문을 밝혔다. 〈오상변(五常辨)〉을 지어 권상하, 한원진 등에게 보냈다.

42세(1714) 봄, 윤봉구에게 편지하여 호락논쟁의 논점들을 논했다.

49세(1721) 10월, 권상하의 장례에 참석하러 충주에 다녀온 후 〈소양대질록(昭陽戴絰錄)〉을 지어 장례 과정을 정리했다.

53세(1725, 영조 1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5세(1727) 유일로 천거되어 장릉참봉이 되었다. 당시 함께 채지홍은 빙고별제로 천거되었는데, 사관이 채지홍과 현상벽은 모두 권상하의 문인이라고 밝혀두었다.

이간과 함께 낙론에 속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간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동조하면서도 세부 이론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하고 양론의 절충과 화합을 지향하였다.

시에 뛰어났으며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문집에 <관봉문답(冠峯問答)>, <관봉유집(冠峯遺集)>이 있다.

<관봉유집> 2~6은 書(114)이다. 권상하, 정호, 권상유, 김간, 최징후, 윤혼, 한원진, 윤봉구, 채지홍, 등 스승과 사우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1709년 이후 본격화된 인물성동이론의 논쟁과 관련된 내용,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을 환영하는 내용, 1723년의 스승 권상하를 위한 변무소(辨誣疏) 문제, 영조 초 저자와 사우들의 관직 진출 문제, 기타 상례 문답 등을 주제로 지은 편지들이다.

특히 스승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인물성이론을 찬동하는 권상하의 입장을 반박하고, 이간의 오상문목에 대한 권상하의 가르침을 논란하는 내용이 있다. 이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중용> 주 ‘불편불의(不偏不倚)’의 편의(偏倚)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맹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은 기질지성(氣質之性)인지, ‘천명지성(天命之性)’은 인물본연지성(人物本然之性)인지, ‘천명(天命)’의 천 자가 이기를 뜻인지 등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세세히 설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한원진에게 보낸 편지는 ‘생지위성(生之謂性)’의 해석에 관한 의문을 적은 별지 1편이 실려 있다. 한원진의 <남당집(南塘集)>」에 현상벽 편지에 대한 답장, 〈오상변〉을 읽고 보낸 답장 등이 실려 있다. 가장 절친하였던 윤봉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인물성동이론 논점들을 논한 내용이 주로 실려 있다.

권7~9는 잡저 23편으로 대부분 인물성론(人物性論)과 예학(禮學)에 대한 내용이다. 권7은 오상(五常), 심(心)과 기질(氣質), 미발설(未發說) 등 주요 논쟁거리들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한 글이다. 특히 〈오상변(五常辨)〉은 1711년에 지은 저자의 대표작으로 한원진 중심의 인물성이론을 반박하고 여러 문인들이 서로 논의한 결말로써 화합하기를 바란다는 취지로 지어 권상하와 한원진 등에게 보인 글이다. 이에 대한 한원진의 답장이 <남당집>에 실려 있다. 〈심여기질변(心與氣質辨)〉과 〈심여기질동이문답(心與氣質同異問答)〉 또한 한원진의 이론을 비판하며 심과 기질을 분별하여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다.

참고문헌

<병계집(屛溪集)>
<연주현시대동보(延州玄氏大同譜)>
<한국문집총간해제: 관봉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