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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두산(蘇斗山, 1627-1693)


소두산(蘇斗山, 1627-1693)                                  PDF Download
소두산의 위패를 모신 익산의 화산서원 사진
소두산의 위패를 모신 익산의 화산서원

 

두산(蘇斗山, 1627-1693)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춘추⌋를 배우고 크게 될 인물로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하는 중에 임금에게 올린 직언을 싫어하는 권신들의 견제를 받고서 천군수, 나주목사, 강릉부사, 동래부사등 외직으로 돌았다. 외직에 있을 때도 탐관오리이며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중시하였던 점,  궁중의 문제점을 자주 지적했던 점,  백성들의 입장에서 제도개혁을 하고자 했던 점, 강릉 부사 시절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비판은 신중하게 평가해 볼 필요가있다.

1627년(1세, 인조5년) 11월 19일에 익산의 제산(濟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月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소건(蘇建), 할아버지는 소억선(蘇億善),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소동명(蘇東鳴)이다.
송시열에게 학문을 배웠다.

1643년(17세, 인조21년) 약관이 되어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예식을 하였다.  향시에 잇달아 합격하였으며 이즈음 ⌈춘추 ⌋를 공부하였다.

1646년(20세, 인조24년) 창신교위(彰信校尉) 권식(權植)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결혼하였다.  2년뒤,  모친상을 당하여 탄곡(炭谷)에 장사를지냈다.

1652년(26세,효종3년) 증광(增廣) 진사초시(進士初試)와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다음해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춘추 ⌋를 배웠다.  송준길과 송시열에게 대기(大器, 크게될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1657년(31세,효종8년)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갔다.  2년후,  서울에 머물던 스승 송시열에게 매일 ⌈춘추⌋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1660년(34세,현종1년) 1월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율곡(栗谷) 이이,우계(牛溪) 성혼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청했다. 4월,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6월, 감찰에 임명되었다가 곧 공조좌랑이 되어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다. 8월에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다음달, 병조정랑겸 춘추관 기주관이 되었다.

1662년(36세,현종3년) 6월,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정언이 되었다.  궁궐왕족의 폐단을 논하고, 충청수영(忠淸水營)의 소금과 쌀의 지가(紙價) 폐단을 들추어내 개혁했다.  7월, 외직인충청(忠淸) 도사(都事)로임명되었다.

1663년(37세,현종4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정언으로있을때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의 잘못을 임금에게 직언해 해임시켰다.  또송 시열을 비방한 홍우원(洪宇遠)의 잘못을 임금에게 고했다. 이러한 일들로 권력을 가진 고위관료들의 미움을 받았다.  9월에서천(舒川) 군수가 되었고, 이후 주로 외직으로 돌았다.  다음해 서천군 수직에서 파직되었다.  그 다음해(1665년) 다시 지평으로
임명되었다.

1666년(40세,현종7년) 임금의 온천 행차시 수행하는 여러 신하들과 내시(內侍)들에게 내리는 품계 승진을 줄이도록 청하였다. 유세철(柳世哲)을 논계하고,  강석빈(姜碩賓) 파직을 청하였다. 7월에 장령이 되었다가 9월에 다시 정언으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이숙(李䎘) 등 일곱간신(諫臣)의 소환을 요청 했다가 해직되었다.  다시장령으로 임명되었는데 내시의 잘못을 간언하다 또 해직되어 전라도 장성(長城)의
부사로 나갔다가 다시 나주목사로 나갔다.

1672년(46세,현종13년)  나주목사로 재임하고 있을때, 백성 구제활동을 잘하여 상을 받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임명되었다.  8월에부친의 노환을 이유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 2월에 송준길(宋浚吉)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1675년(49세,숙종1년) 아들을 보내 송시열의 무고(誣告)를 변론하게하였다.  제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9월, 장기(長鬐)송시열에게 약재(藥材)를 보냈다.  12월에 홍우원(洪宇遠)의 대계(臺啓, 관리들의 잘못을 임금에게 보고 하는글)로 관직이 박탈되었다.

1676년(50세,숙종2년) 귀향하여 시를 지으며 가슴에 담긴 답답함을 풀었다. 거처의 이름을 거백옥(蘧伯玉)의 고사에서 따와 ‘사구당(四九堂)’이라고 지었다.  2년 뒤,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가 송시열에 대한 죄목 추가가 논의되면서 다시 관직이 박탈되고 금고형에 처해졌다.

1680년(54세,숙종6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정세가 다시 바뀌었다.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고 서인들이 복권되었다. 소두산은 강릉 부사에 임명되고 임금으로 부터 ⌈고문진보(古文眞寶) ⌋를 하사받았다. 강릉 부사시절에 는근면하고,  이속(吏屬)을 엄하게 다스리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이후 의주 부윤(義州府尹), 상주 목사(尙州牧使) 등에 잇달아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3년(57세,숙종9년)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왜관에 사는 일본인들의 규율 준수와 밀무역 금지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약조를 대마도(對馬藩) 도주와 체결하는데 관여하였다.  또 춘분과 추분 그리고 백중에 초량 왜관의 왜인들이 두모포 왜관으로 성묘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장계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1684년(58세,숙종10년) 공홍도(公洪道)  관찰사(觀察使), 공홍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688년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외직을 돌면서 그는 시를 많이썼다.  그의 문집, ⌈월주집(月洲集) ⌋에는 병사들의 해상훈련을 노래한 ⌈수조후차최진사운(水操後次崔進士韻)⌋, 육상훈련을 주제로 노래한 ⌈육조후호운
(陸操後呼韻)⌋ 등이 들어있다.  또 ⌈등통군정(登統軍亭)⌋ 등 변경지대의 모습을 담은 시도 적지 않다.  부인 권씨가 이해에 사망하였다.  다음해 경주 최씨와 재혼하였다.

1689년(63세,숙종15년) 소의(昭儀) 장씨가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삼는 문제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숙종은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고 이에 반대한 서인들을 관직에서 쫓아냈다. (기사환국己巳換局) 또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 시켰다가 사약을 내려 사형에 처했다.  김수항(金壽恒), 민유중(閔維重)도 귀양을 갔다.  남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소두산은 4월에 무고(誣告)를 당해, 낙향하였다. 6월에 송시열의 발인에 참석하였으며,  이해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출향(黜享, 배향했던 위패를 거두어 치우는일) 소식을 듣고 아들과 동생을 시켜 무고를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하였다. 다음해 무고를 받아 조사를 받고 금고형에 처해졌다.
그가 지은 시문 중에 이러한 것이 있다.

草綠江潭雨  초록빛 강가에 비가 내리니
騷人萬古愁  시인의 마음은 만고의 수심.
停杯誰問月  술잔 멈추고 누가 달에게 물었을까?
撫跡客登舟  옛 자취 더듬어 나그네는 배에 올라
日落欺山面  해가 지니 산길 찾기 어렵고
潮來失渡頭  조수가 밀려오니 나루터를 잃었네.
長安何處是  한양은 어디에 있을까?
歸思獨憑樓  돌아가고 싶은 마음, 홀로 누각에 기댄다.

1693년(67세,숙종19년) 남인들의 모함을 많이 받아 울분으로 병사하였다. 4월에 진산 천비산(天秘山)에 장사 지냈다가 나중에 전주 지둔산(智屯山) 선영으로 이장되었다.  묘는 전북 완주군 봉동읍 둔산리620-12에 있다. 둔산리 870번지 완주 공단 옆에 신도비가 있다.
1968년에 화산서원(華山書院, 전라북도익산시금마면용순신기길44-76)에배향되었다.  이 서원은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57년에 창건 되었는데, 김장생, 송시열 등이 배향되어있다. 문집으로 『월주집(月洲集)』이 있다.
그는 외직(外職)에 재직할 때 자주 남인들로부터,

“권신들에게 부탁하여 여러번 고을을 다스리며 탐학(貪虐)을 자행하였다.”

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곤 했었다.  서인이 집권할 때에도 대간으로 부터 처신이 신중하지 못하다고 하여 비판을 받았으며, 재임할 때는 탐관오리라는 비난을 받거나 권세를 등에 업고 함부로 시비를 판단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들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좀 더 깊이 조사를 해봐야 할 것이다.  지배계층들이 자행한 횡포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 궁중의 권력자들이 산이나 바다를 독점한 뒤 시장(柴場), 어장(漁場) 등을 만들어 놓고 농어민을 착취하는 횡포를 근절해 달라는 상소문도 있다.  그외에도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태인, 고부 등에서 궁노(宮奴)돌려 주라는 문장도 보인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 어염(魚鹽), 노비(奴婢), 환곡(還穀) 등의 문제를 다룬 문장도 많다.
그가 지은 시는 오래도록 한시 애호가나 서예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특히 다음과 같은 그의 격양가(擊壤歌)는 요즘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있다.

百年身世生涯足
길어야백년사는신세, 이생애로만족하네.

長作堯衢擊壤翁
오래도록격양가를부르는노인으로살리라.

<참고자료>
⌈월주집 ⌋
⌈소두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소두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광후(朴光後, 1637~1678)


 

박광후(朴光後, 1637~1678)                              PDF Download

 

광후(朴光後, 1637~1678)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도(道)를 행할 때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늘 나라에 도가 없음을 개탄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상소를 하거나,  궐문(闕門)에 가서 항의를 하였다. 혹독한 형벌을 받기도 하였으나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마음씀이 공명정대 하고불의에 굴하지 않아 생전에 호남의 대표적인 선비로 인정을 받았으나 42세가 되던해 갑자기 사망하였다.

우암송시열이지은박광후의묘갈명
우암송시열이지은박광후의묘갈명

1637년(1세, 인조15년) 6월 2일에 광주(光州)의 아산리(지금의비아도천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士述),호는 안촌(安村)이다.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박창우(朴昌禹)이며,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이다.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모친은 남씨(南氏)이다. 할아버지 박창우는 호가 칠졸재(七拙齋)인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의병을 일으켜 북으로 올라가 출정(出征)한 적이 있다.  송시열은 박광후의 묘갈명에이렇게 적었다.

“박사술의 본관은 평양(平陽, 즉순천順天)이며 10대조 박석명(朴錫命)은 본조(本朝)의 훈신(勳臣)인데, 아마도 인수(仁叟, 박팽년朴彭年의자字) 선생과 같은 집안일 것이다. 할아버지 박창우(朴昌禹)는 진사(進士)이고 아버지 박천용(朴天用)은 학문이 있었으나 일찍 별세하였으며, 어머니 남씨(南氏)는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다.
박사술은 홍씨(洪氏)를 아내로 맞아 한 아들과 여섯 딸을 낳았는데, 아들 박중회(朴重繪)는 사리에 밝고 재주가 뛰어나서 사우(士友)들이 칭찬하며, 네딸은 다사인(士人)의 아내가 되고 두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1650년(14세,효종1년) 남양홍씨(南陽洪氏)를 아내로 맞이 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어머니를 섬겼다.

1651년(15세,효종2년) 향교에 다녔다.

1656년(20세,효종7년)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학식(學識)이 높았으며,  마음이 정대(正大)하고 조금도 불의(不義)에 굴하지않아, 호남 선비들 의사표가 되었다.  그를따라 남도에서 정상용, 박치도, 박상현, 박상진, 박광일, 박광원, 박광오, 박광선, 박광윤, 박중회, 박상지, 민사하등많은학자들이 일어나 학통(學統)을 계승하였다.

1660년(24세,현종1년) 서울에 가서 윤휴(尹鑴)를 만났다 . 고향으로 돌아가 주위사람들에게 윤휴를 평하기를 “길인(吉人, 좋은사람)이아니다.” 라고 하였다.

1666년(30세,현종7년)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학문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연연하지 않고 자기 실천을 위한 학문에 힘썼다.

1675년(39세,숙종1년)스승 송시열이 유배를 당하자 박광후는 광주, 나주, 장성 등 고을 유생들과 연대하여 구명운동을 펼쳤다.  이 일로 옥고를 치르게 되었으나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스승을 따랐다.  이즈음세상의 상황이 크게 변하여 출세할 생각을 접었다. 혹시 권하는 자가있으면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도(道)를 행할 때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늘나라에 도가 없음을 개탄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상소를 하기도 하고, 궐문(闕門)에 가서 호소하여 잘못된 일에 대해 극진히 말하여 항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동료들과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기도 하였으나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1677년(41세,숙종3년) 장기해변(지금의포항부근)에 유배중인 스승송시열을 찾아가 위문하고, 순천박씨(順天朴氏)의족보(族譜) 서문을청했다.

1678년(42세,숙종4년)에 갑자기 안청동 외성당(畏省堂)에서 별세하였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와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으며,  광주(光州) 진곡리(晉谷里)에 장사를 지냈다. 스승 송시열은 1680년 8월에 부탁 받은 족보 서문과 묘갈명을 보내왔다.  묘갈명에서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아! 박사술(박광후의자)은 이제 죽었거니와, 지금 세상에 다시 이런사람이 있겠는가?  그는 어버이에게 효성하고 뭇사람에게 자상하고 벗에게 성실하였으며 늦게는 학문에만 종사하였으니,  그 진취는 장차 한이 없었을것이다. 아!운기(運氣)가 좋지 않으니, 그가 어찌 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매우 고루하여 그와  전혀 친분이 없었는데,  하루는 천리 길을 찾아 왔으므로 그 용모를 대하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히 마음을 각성하게 하였다.  내가 제주(濟州)에 있을 때에 그가 또 사우(士友) 몇 사람과 함께 보러 왔는데, 변을 겪고 험한고 난을 겪은 것이 이처럼 지극한데도 기개와 언론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내가 이 사람은 장차은 산철벽(銀山鐵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갑자기 이지경이 되었으니, 귀신이 어찌 어질지 못한가?”

송시열은 10여년이 지난 1689년 2월 18일, 기사사화(己巳士禍) 때에제주도로 유배가는 길에 광주의 안청동 부근을 지나게 되자 박광후가세상을 떠난 고택 외성당을 찾아 그 감회를 적고 애절한 시 한수를 남기고 길을 떠났다.  약200년 후인 1879년 면암 최익현도 유배지 흑산도에서 풀려 나와  상경할 때 외성당을 방문하여 외성당 방문기(訪問記)와 시 한수를 남겼다.
박광후는 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을 남겼는데, 4권 2책으로 목활자본이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존 되어있다. 기정진(奇正鎭)이 서문을 작성했으며,  송시열의 충절을 노래한 시가 많고,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배향해 달라는 상소문, 기축옥사에서 정철이 최영경(崔永慶), 이발(李潑) 등을 죽이지 않았다는 상소문, 옥중에서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실려있다.  또1677년 유배지에서 송시열의 말을 기록한 어록도 이 문집에 실려 있다.

<참고자료>
송시열, 박광후묘갈명,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조인물고 ⌋, 1999
이미선, 박광후,<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상현(朴尙玄, 1629-1693)


박상현(朴尙玄, 1629-1693)                                 PDF Download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은 조선시대 중기의 유학자다. 우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시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조정이 청나라 만주족을 두려워하여,  중국 남부에서 표류해 온 명나라 유민들을 청나라로 압송한 것을 보고 세상에 나갈 뜻을 버렸다.  조용한시골에 은둔하며 주희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아 경전 연구에 매진하였는데, 특히 ⌈대학 ⌋에 정통했다.  아들들과 조카를 송시열 문하에서 학문을 하도록하여 ,호남노론의 핵심이 되었다.

1629년(1세, 인조7년) 음력 5월 9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초(景初), 호는우헌(寓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언침(朴彦琛),  할아버지는 박진정(朴震挺), 아버지는 박수림(朴遂林), 어머니는봉산 이씨(鳳山李氏)로 이사숙(李思淑)의 딸이다.  부인은 장택 고씨(長澤高氏) 고부민(高傅敏)의 딸이자,  군수 고성후(高成厚)의 손녀이다.

1643년(15세, 인조21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3년 동안 나물국을 먹지않고 제사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글 공부를 시작한 뒤에는 자기 수양에 힘쓰고 경전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특히 ⌈대학 ⌋에 공을 들여 공부를 하고,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
주희(朱熹)를 본받고자 하였으며,  산림의 깊은 골짜기(전라도광주光州의 진곡眞谷)에서 평정을 지키고 살며,  부귀와 화려한 것에 대해서욕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를 침범한 청나라를 극도로 싫어하여 책력 속에 있는 청나라의 연호를 모두 지워버렸다. 우헌(寓軒)이라 호를 지었다.

1663년(35세,현종4년) 이즈음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갔다 . 서인이 노론파와 소론파로 대립하게 될 때 그는 노론을 선택하여 송시열과 더욱 가깝게 지내고 집안의 아들,  조카들을 송시열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정이, 주희(朱熹), 퇴계이황(李滉), 율곡이이(李珥)를 높이 받들고, ⌈태극도설(太極圖說) ⌋, ⌈통서(通書) , ⌈황극경세(皇極經世) ⌋, ⌈역학계몽(易學啓蒙) ⌋, ⌈정몽(正蒙) ⌋등 성리학 서적을 깊이 연구하였다.
특히 성명(性命), 이기(理氣), 도기(道器), 태극 등의 개념에 관심이 많았다. 스승 송시열과 이런 문제에 대해서 대화한 내용이 그의 문집에들어있다.

1667년(39세,현종8년) 제주도에 표류해 온 임인관(林寅觀) 등 중국인 95명을 청나라에 압송하였다.  그들은 청나라 만주족에 대항하던 복건성(福建省)의 명나라 유민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일본으로가던 상인인데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며 일본으로 보내 주든지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들은 그들이 가진 물건으로 보아 평범한 상인이 아니라 중국 남부지방에 명나라의 잔존세력들이 세운 남명(南明)의 관리들이라고 판단하였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후환이 두려워 그들을 강제로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명나라 유민들을 결국 청나라에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박상현은 명나라를 섬기는 충정으로 조정의 결정에 분개하였다. 이에 세상에 나갈 뜻을 끊고 두문불출하며 경전연구에 힘썼다.
명나라 유민들 송환 사건은 130여 년이 지난 정조때 다시 문제가 제기 되었다.

1797년(정조21년)에 정조는 임인관 등95인이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명나라를 섬긴 절개가 가상한데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청나라에모두 강제 압송한 일은 잘못된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정조의평가에 따라 그들은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었다.

1677년(49세,숙종3년) 9월 27일 큰 아들 박광일(朴光一)과 집안 조카 박광후(朴光後)를 송시열이 유배가 있는 장기(長鬐)로 보냈다.  두 사람은 박상현의 편지를 전하고 예물을 올리며,  송시열의 문인(門人)이 되는 의식을 행하였다.

1684년(56세,숙종10) 두아들 박광일과 박광원(朴光元)을 회덕(懷德)의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다. 아들 박광일은자는 사원(士元), 호는 손재(遜齋)로, 1701년 천거를 받아 내시 교관(內侍敎官), 시강원 자의(侍講院咨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권상하(權尙夏), 정호(鄭澔) 등과 교류하며 학문연구에 힘썼다. ⌈손재문집 ⌋은 그의 작품이다.  둘째 아들 박광원은 자는 사선(士善)이며, 호는 백야당(白野堂)이다.  1712년에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묘봉사(宗廟奉事)·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좌랑, 정랑, 청암도찰방(靑巖道察訪) 등을 역임하고, 1738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689년(61세,숙종15년) 1월, 제주도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전송하였다.  6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곡을하였다.

1690년(62세,숙종16년) 6월, 송시열의 제문(祭文)을 지었다. 이즈음박상현의 모습은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갈명에 잘 묘사되어 있다.

“공(박상현)은 기상과 용모가 장엄하고 중후하며 정신과 풍채가 조용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말이 간결하고 걸음걸이가 조용하며 간사하고 문란한 소리나 일들은 화살처럼 멀리피하였다.  집안에서는 삼가고 부드러워서 친척을 접대하면 각각 그들의 환심을 얻고, 멋대로 구는 것을 보면 더불어 겨루지 않았다. 옛 사람이 구별하여 밝히지 않은 말을 늘 외우면서 되새겼다.  그러므로 향리 사람들이 감복하여 우헌 선생(寓軒先生)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墓碣銘 ⌋)

1693년(65세,숙종19년) 암행어사가 된 교리(校理) 김만길(金萬吉)이임금에게 박상현을 추천하였다.  1월 12일에 사망하였다.  3월에 광주(光州) 북쪽 태산(台山)에 장사를 지냈다. 숙종40년(1714년)에 사헌부장령 (掌令) 에  추증(追贈) 되었다.  권상하(權尙夏)가 묘갈명을 짓고, 이희조(李喜朝)가 묘지명을 지었다.  문집으로 ⌈우헌선생문집(寓軒先生文集) ⌋ 이 있다.  그는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은 율곡이이의 설을 따랐으며, 예학은 김장생(金長生)을 따랐다.  천문역법에도 밝아<음양소장도(陰陽消長圖)>와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기도 했다.

⌈우헌선생문집 ⌋은 4권 2책으로 1898년에 간행 되었으며, 규장각에그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스승인 우암 송시열과의 편지문, 시문 그리고 제문(祭文) 등이 다수 실려있다. 시문 중에는 제주도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전송하는 시, 송시열을 곡하는 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이설(理說)⌋, ⌈성설(性說)⌋,
⌈성리문답(性理問答)⌋, ⌈잡설(雜說)⌋, ⌈권경변(權經辨)⌋ 등의 문장이실려 있다.
<참고자료>
⌈송자대전⌋ 제 16권 어록3,  박광일(朴光一)의 기록
권상하, ⌈박상현의 묘갈명⌋, ⌈국역국조인물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