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율곡학 인물들

이정립(李廷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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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립(李廷立, 1556년∼1595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동부승지, 형조 참의, 인천 부사, 한성부 좌윤, 대사성 등을 지냈다. 이덕형과 이이첨의 일족이며, 과거 합격 동기인 이덕형, 이항복과 함께 경연에서 임금에게 통사강목을 강의하여 ‘3학사’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최립(崔岦), 박순(朴淳),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기축옥사 때에는 사건을 처리하는데 공을 세우고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임금을 호위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보존하는데 큰 공을 세워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56년(1세)
명종 11년에 판결사(判決事) 이시무(李時茂)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정립의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좌랑 이수겸(李守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찰방(察訪, 역에서 근무하는 관리)을 지냈던 이이건(李以乾)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 의원군(義原君) 이억(李億)의 딸이다.

1566년(11세)
최립(崔岦)에게 한서(漢書)를 배웠다.

1569년(14세)
박순(朴淳)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문공부를 하였다.

1576년(21세)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다.

1580년(25세)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 예조 좌랑, 정언, 병조 좌랑,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문과 별시에 을과 1위로 급제한 사람이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었는데 이덕형은 친척으로 집안 동생이었다. 이덕형은 나중에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백사 이항복도 이때 문과에 급제하여 과거 합격 동기가 되었다.

1581년(26세)
선능(宣陵)의 제관(祭官)에 임명되었다.

1582년(27세)
6월, 수찬의 직위에 있었을 때, 대제학이었던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오억령(吳億齡) 등과 함께 임금의 <통감강목(通鑑綱目)> 강독을 맡게 되었다. 이정립은 이때부터 이덕형, 이항복과 함께 삼학사(三學士)로 주위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이즈음 사관(史官)이 되고, 예조좌랑, 정언에 임명되었다. 또 율곡의 추천을 받아 이항복, 이덕형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이 되어 호당(湖堂)에 들어가 독서에 전념하였다.

1583년(28세)
이조 좌랑, 경상우도 점마관(點馬官) 등에 임명되었다.

1584년(29세)
호남 규황어사(救荒御史)에 임명되었다.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하고 조치하였다. 이후 복귀하여 병조 좌랑이 되었다.

1585년(30세)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587년(32세)
경상도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금산 군수(金山郡守) 김협, 풍기 군수(豊基郡守) 김대명(金大鳴)은 불법 문서(不法文書)를 포착하여 파직시켰고, 개령 현감(開寧縣監) 박무(朴懋)는 탐욕이 많고 백성을 학대했기 때문에 파직하였다. 3월 2일(음력) 서울로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하니 선조는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적과 맞서 응변할 적에는 마땅히 적의 용병(用兵)하는 형세를 잘 알아 대응해야 한다. 적(왜군)은 이미 손죽도(損竹島)에서 승리하고 또 선산도(仙山島)에서 약탈하였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타고 바로 변경의 성을 침범하기는 그 형세가 매우 용이하다. 그런데도 바깥 바다에 계속 체류하고 여러 섬에 나누어 정박하면서 오래도록 쳐들어오지 않아 그 실정을 측량하기가 어려우니, 이를 참작하여 아뢸 것을 비변사에 이르라. 그리고 계속적으로 정병(精兵)을 보내 주고 적을 방어할 모든 기구들이 이미 정리되어 있는지의 여부도 병조에 이르라.”
이에 이정립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지금의 왜변(倭變, 왜군들의 변고)은 우연히 변경을 침범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전선(戰船)을 넉넉히 준비하여 대거 침입했습니다. 고풍손(高風孫)이 전한 대로 사을화동(沙乙火同)의 소행이란 것이 이미 빈 말이 아닙니다. 한 번 교전하고서 선박을 불태우고 장수를 죽였으니 곧바로 침범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날을 지체하면서 진격도 후퇴도 않기 때문에 그 실정을 가늠하지 못할 듯 하지만 어찌 심원(深遠)하여 알기 어려운 계책이야 있겠습니까. 전선을 나누어 정박시켜 의심스럽게 만들어서 우리 측이 한 곳에 병력을 집중토록 한 다음 가만히 다른 변경을 치려는 것이 하나요, 먼 곳에 있는 섬으로 물러나 숨었다가 우리가 원병을 계속 보내는 것을 기다려 일시에 거사하며 멀리 떨어진 변경에 출몰하면서 진보(鎭堡)의 형세를 살펴 허술한 틈을 타 갑자기 공격하려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적과 대응하는 곳은 방어가 그다지 허술하지는 않은데 본도(本道)에서 우려할 만한 곳은 가리포(加里浦)ㆍ진도(珍島)ㆍ제주(濟州) 등 3읍과 법성창(法聖倉)ㆍ군산창(群山倉)입니다. 그러나 본도의 방책(方策)에 진작 정해진 규칙이 있으니, 반드시 이미 조치하였을 것입니다. 정병은 현재 당상(堂上)ㆍ당하(堂下)의 무신(武臣)과 녹명인(錄名人) 및 잡류(雜類)ㆍ공ㆍ사천(公私賤)으로 활쏘기에 능한 사람을 벌써 선발해서 대오를 나누고 짐을 꾸려 명을 기다리게 하였으며, 궁시(弓矢)와 총통(銃筒)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부족한 것은 철갑(鐵甲)과 철환(鐵丸)이나 현재 만들고 있습니다.”
임금은 이에 알았다고 답하였다.

1589년(34세)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 사간(司諫)자격으로 활동하였다.

1590년(35세)
장령이 되었으며, 여름에 기축옥사를 처리한 공으로 공신(平難功臣, 평난공신)이 되었다.

1591년(36세)
집의, 직제학, 동부승지, 형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인천 부사(府使)로 나가 부모를 봉양하였다.

1592년(37세)
4월 13일(음력, 양력으로는 5월 23일), 왜란이 발생하였다. 700여척의 함선에 2여명의 왜군들이 부산진으로 밀려들어왔다. 이윽고 그 숫자는 5만이 되었고, 나중에는 20만 대군으로 불어났다. 이정립은 예조참의로 왕을 호위하는데 참여하여 개성까지 갔다. 임금의 행차가 개성을 지나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와 사직의 위패(廟社主)’가 개성에 남아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선조가 크게 놀라 즉시 모셔 오라고 명하였다. 개성에는 이미 적군이 들어와 있어서 위험하였으나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에 들어가 종묘사직의 위판을 모시고 나와 일행이 있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중전(中殿)과 동궁(東宮, 왕세자)을 모시고 곡산(谷山)으로 갔다. 이즈음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나있었다.

1594년(39세)
한성부 우윤, 좌윤, 승문원 제조 등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부임하였다. 12월에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95년(40세)
병으로 사직하였다. 4월, 명나라 사신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으나 부임을 지체한 죄로 비판을 받았다. 이해 가을, 휴가를 얻어 장인을 이장하였다. 이 직후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유족으로 부인 전의(全義)이씨(승지 이순인李純仁의 딸)가 있으며 세 아들이 있다. 광주(廣州) 구천리 선영에 장사를 지냈다. 1601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현종 11년인 1670년에 ‘문희(文僖)’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계은집』이 있다. 「계은집에 대한 서(敍)」가 이항복의 백사집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자정(子政) 이정립(李廷立)이 작고한 지 벌써 23년이 되었다. 그 동안에 두 번이나 병화(兵火)를 겪었는데도 그의 유문(遺文)이 점차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국가의 모든 중요한 전적들도 잿더미가 되어 버렸는데, 유독 이 글만은 없어지지 않았으니, 비유하자면 진시황(秦始皇)이 천하의 서적들을 불태우고 난 뒤에 공자의 구택(舊宅) 벽 속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가 나온 것과 같다.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한 번 보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다. 일찍이 듣건대, 정이(程頤)의 말에, “사람들은 말을 글로 아름답게 꾸미고자 한다. 글로 꾸며 놓으면 사랑스럽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전해지는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이 틀림없구나.
하루는 그의 아들 이진담(李眞聃)이 와서 나에게 그 유문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와 오랫동안 종유하시고 또 서로 잘 아는 분으로는 의당 장인(丈人)만한 분이 없으니, 저를 위하여 문집을 간행하게 해 주시고, 또 한 마디 말을 첫머리에 얹어서 후세에 빛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마침내 받아서 읽어 보니, 그가 언론(言論)을 세운 것이나 문사(文辭)를 발한 것이 모두 우리 친구들 사이에 서로 술을 마시며 흥겹게 읊조린 유적(遺迹)들이다. 그런데 그 때의 사람과 일이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건만,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외로이 홀로 남아 있어, 마치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백 번 바뀌어도 노선(老仙, 이정립을 의미함)은 죽지 않고 웃으며 금적(金狄, 금으로 만든 동상)을 어루만지면서 오랜 세월을 상기하여 감탄을 일으킨 일과 같으니,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정(이정립)이 물건(物)은 좋아하는 것이 없어, 성색(聲色)ㆍ완호(玩好)와 생산 작업에 대해서는 마치 어린애와 같다. 그러나 유독 서책은 기욕(嗜欲, 즐기고 좋아하는 것)처럼 즐기어, 날마다 자시(子時) 이후에는 반드시 일어나 의복을 정제하고 글을 송독(誦讀)하면서 날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평생에 저술한 글이 매우 많았으므로,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옛 사람 중에 글을 많이 저술한 이도 나와 같이 많은 사람은 없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백분의 일에 불과하니, 다만 대롱 구멍으로 표범의 무늬 하나를 보는 셈일 뿐이다. 아!

<참고자료>
선조실록 선조 20년 3월 2일 기사
이항복, 백사집 제2권 서(敍), <한국고전종합DB, 고전번역서>
「이정립 행력」,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콘텐츠>
이재범, 「이정립(李廷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안민학(安敏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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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학(安敏學, 1542년〜1601년)은 서울 남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풍애(楓崖)다. 19세 때 향시에 장원을 한 뒤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 공부에 뜻을 두었으나 율곡 이이의 눈에 띄어 추천을 받아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 대흥·아산·현풍·태인 등지의 현감을 두루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소모사(召募使)에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에서 군량과 말, 군사 등을 모집하여 북쪽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아산 근방에서 병을 얻어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고 유성룡(柳成龍)에게 병사들과 군량을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문장이 뛰어난 그는 저서 풍애집(楓崖集)을 남겼다. 일찍이 그는 30대에 부인과 사별하였는데 당시 한글로 쓴 애도문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충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애도문은 구어체의 산문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한글 연구와 조선시대 한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542년(1세)
안민학은 중종 37년 9월 17일,(음력) 서울 남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습지(習之) 혹은 이습(而習)이고, 호는 풍애(楓崖)이다. 안민학의 부친은 찰방 안담(安曇)이다. 안담의 자는 태허(太虛), 호는 송애(松厓)이다. 안민학은 9세 경 때부터 소학, 효경 등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의 모습은 기골이 장대하고 의연하여 쉽게 범접하지 못할 바가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또래와 노는 것을 즐기지 않고 항상 독서에 침잠하여 의젓한 모습이었다.
어려서 박사엄(朴思奄)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다.

1560년(19세)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였다. 하지만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고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그는 과거시험 공부가 학자들의 병폐라고 우습게 여기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대신 역사서, 제자백가 서적을 비롯하여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학 관련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화려하고 담백한 그의 문장은 일가를 이루었으며 필법 역시 훌륭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류하기를 원했다.

1561년(20세)
이즈음 학행(學行)이 주변에 알려져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원릉참봉(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해 현풍(玄風)의 곽씨(郭氏)와 결혼하였다.(문집총간인물연표 「안민학 행력」) 다른 기록에 따르면 1567년(명종 22)에 결혼하였다고 한다.(구수영 「안민학의 애도문 고」와 최웅환의 논문 「16세기『안민학 애도문』의 판독과 구문분석」 참조) 곽씨 부인은 1554년 생으로 신랑보다는 12살 아래이며, 할아버지는 승지 안방(安邦)이고, 아버지는 곽개(郭凱)이다. 일찍 부친과 사별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1564년(23세)
부친상을 당하였다.

1566년(25세)
사암(思菴) 박순(朴淳)을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 율곡 이이,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년〜1598년)을 비롯하여 정철(鄭澈), 이지함(李之菡), 고경명(高敬命) 등과 교류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학문은 대체로 율곡 이이와 성혼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또 필법이 뛰어났다.

1571년(30세)
우계 성혼과 함께 천마산을 유람하고 영통사에 머물렀다. 화담(花潭)을 방문하여 서경덕(徐敬德)의 묘를 참배하였다.

1573년(32세)
주변의 추천을 받아 건원능(健元陵)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율곡 이이가 재차 천거하여 희능(禧陵) 참봉이 되었다. 그러나 몇 개월 뒤 벼슬을 버리고 파주로 돌아왔다. 이해에 사직 참봉에 임명되었다.

1576년(35세)
이해 3월,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는 율곡을 배웅하였다. 5월 8일에 부인 곽씨가 지난해 유산을 한 뒤 중병을 얻어 끝내 회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향년 23세였다. 곽씨 부인과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부인의 시신은 부인의 유언대로 파주의 친정 선산에 안장하였다. 이때 한글로 쓴 애도문이 최근에 백자 명기류(明器類, 장사지낼 때 죽은 사람과 함께 무덤 속에 묻는 그릇)와 함께 발굴되어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243호로 지정되었다. 부인 곽씨의 무덤에서 발굴된 이 애도문에서 안민학은 곽씨가 편모슬하에서 자라다 자신과 결혼하여 함께 생활했던 일들을 회상하고 어려운 형편 탓에 아내를 잘 챙겨주지 못한 지아비로서의 자책과 회한, 그리고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하였다.
안민학이 곽씨 부인의 시신을 옆에 두고 한글로 써내려간 애도문은 다음과 같다.(최웅환의 번역문 참고. 일부 단어는 쉬운 말로 고침)

늙은이 안민학은 아내 곽씨 영전에 고하노라.
나는 임인생(1542년)이고 자네는 갑인생(1554년)으로 정묘년(1567년) 열엿셋날(16일) 합궁하니 그 때가 나는 스물다섯이고 자네는 나이 열 셋일 적에, 나도 아비 없는 궁핍한 과부의 자식이고 자네도 궁핍한 과부의 자식으로서 서로 만나니 자네는 아이요 나는 어른이오나 뜻이 어려서부터 독실하지 못한 유학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므로 부부유별(夫婦有別)이 사람의 도에 중요하므로 너무 친하거나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여 자네와 내가 함께 친하게 말인들 하며 밝은 곳에서 밥을 먹은 때인들 있었던가.
내가 자네에게 밤이나 낮이나 매번 가르치되, 어머님께 봉양을 지성으로 하고 지아비에게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부인네 도리라고 하여 이르던 시간이 십년을 함께 살아서 바라는 것이었네. 그대가 내 뜻을 아니 받들고자 할까마는 궁한 집에 과부 어머님 위에 있고 나는 항상 오활하고 옹졸하여 가사 쪽으로는 아주 챙기지 못하였으나 외로운 시어머님께 봉양하고 하는 정이 지극하였도다. 이것을 어찌할까. 자기 입을 의복도 못하고 행여 실을 뽑아도 나를 해줄 것이라 하고 그대는 겨울이라도 아무런 저고리 하나 하고 검은 겉옷 하나나 하고 눕덥(누더기) 치마만 하고 바지도 벗고 차가운 구들에서 너절한 자리하고서 견디니 인내가 독하기야 이 위에 있을까. 그대 점점 자라 키도 커가니 내가 그대 외양을 희롱하였구나. 내 말하되 나라서 그대를 길러 내었으니 나를 더욱이 공경하라고 한 시간이 그대라고 해서 넋이 된들 잊을 것인가.
내 벗도 있어서 서울에 있으니 내 어머니를 번거롭게 하여 헛이름을 얻어 두 번에 이르기까지 공도(公道)로 참봉을 하니 내가 내 몸을 돌아보니 너무도 부끄러워 다니고자 하는 뜻이 없는 줄을 그대가 사뭇 알기 때문에 조금도 그것으로 기뻐하는 뜻이 없고 내 매번 그대에게 말하되, 어머님이 하도 내가 그리 하기를 바라시니 마지못하여도 나중이면 파주나 아무데나 산수 있는데 가서 새집을 짓고 대나무를 이을망정 붕천(崩天, 하늘이 무너짐)을 시름하고 수석간(水石間)에 가서 살다가 죽자하니, 그대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들으니 내가 매번 그랬지.
물욕이 적은 사람은 그대 같은 사람이었도다. 그리하여 매양 살 땅을 못 얻고 하더니 어찌하여 내 몸에 죄앙이 쌓여서 병을 든 나는 살았고 병 없던 그대는 백년해로 할 언약을 저버리고 홀연히 하루아침에 어디로 가신 것인고. 이 말을 이르건데 천지가 무궁하고 우주가 공활할 따름이로세. 차라리 죽어 가서 그대와 넋이나 함께 다녀 이 언약을 이루고자 하나 홀어머니 공경하여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내 서러운 뜻을 이룰까.
그대 오륙년 전부터 매번 심열이 있어 봄이면 자다가도 코가 시린 냉수를 달라하고 혓바늘 돋고 하니 그대 명은 되게 박하여 모자간에 변도 만나고 나도 성질이 사나워 그것으로 그대 마음 쓰게 한 것이 많았네. 그것도 너무 성정을 몰라 조그마한 일이라도 그냥 두어라고 하지 않으니 그리하여 병이 많이 들고 겨울이면 의복도 그리 너절하니 아이를 구월에 낳은 후 부터는 조리도 잘못하니 더욱 병이 들어 나중에는 을축년 유월부터는 아랫 자식(셋째 아이)이 들어서 다시 기운이 편치 아니하니 누울락 일어날락 하고 음식도 데면데면히 먹고 하니 나나 그대 어머님이 다 태기라고 하여 또 아들일까 하여 기뻐 말하니 그렇다고 하더니, 그러므로 나 믿어서 약 끝끝내 못하고 그해 (자네가) 팔월 추석 때 홍주의 아버지 묘제 하러 가서 그로 인하여 유산하고 구월 스무날 후에야 온 그대 병이 중하여 있으니 그 때부터야 진짜 병인 줄 알아 의약을 시작하였으나 그대가 약을 아니 먹으니 가까스로 인삼과 형개산을 설흔 복 넘게 먹었으나 벌써 병이 깊어 있고 그대 명이 그만한 것도 인력으로 어찌 할까.
그렇게 병들게 한 것은 내가 남편이 되어서 그런 것이니 다시 이 한 넋이 대답할까. 자식이 둘이 있으니 딸이 집안을 다스릴 것이거니와 아들이나 제 목숨이 길어 살아나면 이는 그대 비록 죽어도 그대 이어가고 우리 다 죽은 후라고 해도 자손이 있어 제사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지겠지. 울적하네. 죽지 아니하여 살아 있으면 사나이 일생을 무얼 서러워하면서 그저 살까.
내 뜻은 자식이 있으니 그대 삼년을 지내고 양첩(양인의 딸을 첩으로 삼음)이나 하여 그대 자식을 후에 어려운 일 없게 하고자 하네마는 노친이 계시니 일을 마침내 어머니 마음대로 몰아 갈 것이나 반드시 내 뜻대로 삼년 째 기다리마. 장가인들 반드시 아니 들리라 할까하네. 그대 위해서 한 해를 상복을 입네. 첩이나 장가나 해도 기다렸다하지 상복을 벗은 후에 바로 할까. 아들이 살아나면 그대 조상 봉사를 전부 맡기고 그대의 기물을 전부 두 자식에게 나누어주고 나는 쓰지 말고자 하네.
그대 죽을 때에 그대 파주 그대 아버님 분묘 근처에다가 묻으라 하니. 이는 나 죽은 후에 부디 내가 홍주(안씨 집안) 선영에 갈 것이니. 이제 그대를 시랑 아버님(장인어른) 곁에다가 묻을 것이로되 내 죽기 전에는 외로운 혼이 될 것이오. 파주도 아주 버릴 것이니 그대 임종에 이르던 말을 쫒아 파주로 하려 하니 내가 거기에 들기 어렵네. 내 곧 (죽어서) 홍주로 가 들면 아들은 부모를 각기 묻는 것이 되며 우린들 죽어서나 한 곳에 갈까. 이 일 이제 필치 못할 것이네. 내가 병든 것이 이리 한없는 절망을 보고 얼마나 오래되어서 죽을꼬. 아니 죽을 적에는 꿈에나 자주 보이고 서러운 뜻 말하소.
나는 그대 어머님 향하여 그대 (사정을) 주지하고 조금은 내 (일을) 덜까. 다른 자식들이 봉양하면 자네가 사뢸 일을 (내가) 아니할까. 그대 어머님과 자식들은 내가 살이 있으니 어련히 할까. 잊고 가셨음이 망망하고 서럽고 그리운 정이야 평생을 잇는다 한들 끝이 있을까. 이제 처리하는 일만 하네. 죽었다 한들 정령이 있으면 모를까.
너무너무 한없이 슬프고 슬퍼서 붓 잡아 쓴다고 하나 정신이 없어 글자도 틀리고 떨어지며 말도 차서 없으니 자세히 보소. 집안일은 승지 아주버님과 장령 아주버님이 하여 주시네. 벗들도 진정하여 돌아보네. (여기부터는 한문으로 씀) 말이 여기에 이르니 오랫동안 서럽게 울고 죽고 싶네. 병자 오월초십일. 입관시 함께 묻네.

1577년(36세)
전주 이씨(李氏)와 재혼을 하였다. 이씨 부인과는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1580년(39세)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다.

1582년(41세)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또 갑자기 청양(靑陽)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대흥 현감에 임명되었다.

1583년(42세)
이해 여름 사헌부가 임금 선조에게 안민학에 대한 파면을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대흥 현감(大興縣監) 안민학은 불효(不孝)하고, 부제(不悌, 윗사람을 존중하지 않음)한 사람으로서 감히 헛된 욕심을 가져 내심을 속이고 거짓을 행하여 과거에 응할 재주도 없는 주제에 과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또 말재주로 사람들을 헐뜯되 날로 그것이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것이라 여기며, 권세가들을 쫓아다니면서 요즘의 정치를 평론하는 등 그의 평소의 마음 씀씀이와 행한 짓들이 극히 예의가 없습니다. 그가 처음에는 재주와 행실로 벼슬을 취득하였고 나중에는 부지런히 주선을 행하여 높은 벼슬까지 올랐으므로 세상의 여론이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선조는 “아뢴 대로 하되 안민학에 대하여는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그 후 임금이 대신에게 물었는데 대신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직위 교체만을 명하였다.
당시 사헌부는 서인을 배척하는 관료들이 장악한 것으로 보이며 율곡과 성혼 등을 따랐던 안민학은 그들의 눈엣가시가 되었던 것 같다. 안민학은 특히 정여립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아산현감으로 옮기게 되었다.

1584년(43세)
1월, 율곡이 사망하여 곡(哭)을 하였다. 2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 다음해 의주목사(義州牧使) 서익(徐益)이 상소를 올렸는데, 안민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전에 (동인들이) 이이를 공격할 때 안민학(安敏學)과 이배달(李培達)이 이이의 문하에 왕래하였다는 이유로 부도(不道)라는 명목을 붙여 공격하더니, 이번에도 이 수단을 쓰고 있습니다. 안민학과 이배달의 사람됨에 대해서 신은 사실 잘 모르지만 이산보와 같은 경우는 하늘이 부여한 품성을 온전히 지니고 있으며 충후(忠厚)하고 조심스러운 것이 그 집안의 법도입니다. 그의 계부(季父)인 이지함(李之涵)도 일찍이 경외 받던 사람이었으니, 이와 같은 어진 선비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말을 더듬는 병이 있어 말에 문채(文彩)가 없기 때문에 남에게 말을 듣고 있으니,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합니다. 신은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살피소서.”

1586년(45세)
현풍 현감이 되었다.

1590년(49세)
태인 현감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11월, 견책을 받아 전주로 돌아갔다.

1592년(51세)
3월에 전주에서 홍주의 신평(新平, 지금의 당진시 신평면)으로 갔다. 이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성(金城, 지금의 담양) 산곡(山谷)으로 피난하였다. 임금이 피난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소(行在所, 임금의 임시거처)로 달려갔다. 일설에는 세자 진영으로 들어가 사어(司禦)가 되어 수개월을 머물렀다고 한다. 이윽고 소모사(召募使, 의병을 모으는 임시 관직)에 임명되어 양호(兩湖, 충청과 전라)로 내려갔다.

1593년(52세)
광주(光州)로 내려가 먼저 사람을 보내 고경명(高敬命)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후 인근지역에서 군량 수천석과 말 수백필, 그리고 수천명의 병사들을 모집하여 북상하여 아산에 진을 쳤으나 병으로 더 이상 진군할 수가 없었다. 이에 조정의 명령에 따라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에게 이들을 맡기고 행재소로 가서 임금을 모셨다. 당시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정철(鄭澈)을 전송하였다. 5월경, 병으로 사직을 하고 홍주(洪州)의 신평으로 돌아갔다.
이해 가을, 양주(閬州) 성안에서 살았다. 10월에 조헌(趙憲)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1594년(53세)
1월, 소무관(召撫官)으로 여러 지방을 돌아보고 홍주 신평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해 10월, 정철이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다음해 봄에 송익필과 함께 고산(高山) 이영원(李榮元)을 방문하였다.

1596년(55세)
이해 가을부터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1601년(60세)
8월 13일, 병으로 홍주 신평 호월당(湖月堂)에서 사망하였다. 홍주 대진(大津, 당진군 송옥면 고대리)의 선영에 장사 지냈다. 다음해 그는 이조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1910년에 규장각 제학(提學)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풍애집(楓崖集, 楓崖先生集)이 있다. 풍애집은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38년(영조 14)에 후손 안세광(安世光)이 편집, 간행하였다. 제1권에는 시 91수가 실렸으며, 제2권에는 제문, 잡저, 기(記), 서(書) 등이 실려 있다. 잡저 중에는 「심학론(心學論)」, 「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 「근사록설문(近思錄設問)」, 「대학서절해(大學序節解)」등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 1책에는 안민학의 연보, 행장, 비문 등이 실려 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선조 16년(1583) 8월 3일자 기사, 선조 18년(1585) 5월 28일 기사
이태진, 「안민학(安敏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년
「안민학 행력」,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 콘텐츠>
이동술, 「풍애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년
천기영, 「죽음도 막지 못한 사랑, 시간을 거슬러 활짝」, 디트뉴스24(http://www.dtnews24.com/), 2018.08.23.
구수영, 「안민학의 애도문 고」, 백제연구10, 1979
최웅환, 「16세기『안민학 애도문』의 판독과 구문분석」, 국어교육연구31, 1999

서성(徐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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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徐渻, 1558〜1631)은 조선시대에 경상우도 감사, 평안감사,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위고 시각장애인 홀어머니 고성 이씨의 손에서 자랐다. 서성은 어릴 때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글을 배웠으며 율곡 이이를 존경하여 율곡이 탄핵 당했을 때는 적극적으로 변호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모시고 북으로 피난을 갔으며 이괄이 반란을 일으킬 때는 인조를 모시고 공주까지 피신을 하였다. 정묘호란 때는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그는 특히 문장과 그림 그리고 역학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인기(李麟奇), 이귀(李貴) 등과 교류를 하였다. 저서로 『약봉집(藥峯集)이 있다. 기울어져 가는 서성의 집안은 어머니 이씨와 서성의 비범한 노력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번창하였는데 100명이 넘는 과거 합격자와 수많은 고위 관리가 서성의 후손에서 배출되었다.

1558년(1세)
명종 13년에 외가가 있는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대구(大丘)이다.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이다. 언양현감(彦陽縣監) 서거광(徐居廣)의 현손(손자의 손자, 즉 증손자의 아들)이며,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서팽소(徐彭召)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서고(徐固)이고, 아버지는 퇴계 이황의 문인 서해(徐嶰, 1537〜1559)이다. 어머니는 청풍군수(淸風郡守) 이고(李股)의 외동딸이다. 어머니 이씨는 15세 즈음부터 시력을 상실한 여성이었다.
서성이 태어난 해에 부친 서해가 사망하였다.(향년 22세) 어머니는 서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작은 아버지 서엄(徐崦, 1529∼1573)의 지도를 받게 하였다. 서엄의 자는 진지(鎭之), 호는 춘헌(春軒)이다. 서엄 역시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다. 1555년(명종10년)에 서엄은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1560년(32세) 별시(別試) 문과에서 급제하였다. 승문원 주서(注書), 예조 낭관(郎官), 함경도도사(咸慶道都事, 1566년) 등을 역임하였으며, 1568년(선조1년)에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는 사신을 접대하는 역관(驛館)의 관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어 유생(儒生)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역임하다가 1573년(선조6년, 45세)에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였다. 서성이 15살 때였다.
서성은 어릴 때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글을 배웠다. 또 율곡 이이(李珥)를 스승으로 모셨다. 구봉 송익필은 1580년대에 과거를 단념하고 고양의 구봉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서성 외에도 김장생(金長生), 정엽(鄭曄), 정홍명(鄭弘溟) 등이 함께 글을 배웠다.

1583년(25세)
이해에 율곡 이이가 탄핵을 당했다. 서성은 율곡을 위하여 항소를 하고 변호하였다. 율곡은 다음해 1월14일(음력) 세상을 떠났다.

1586년(28세)
알성문과에 합격하였다.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에 임명되었다가 인천 향학훈도(鄕學訓導)로 차출되었다.

1590년(32세)
예문관의 검열, 봉교를 거쳐 홍문관의 전적(典籍)에 올랐다. 이후 감찰, 예조 좌랑, 병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과거시험 정시(庭試) 때 수석을 차지하여 선조 임금으로부터 말을 하사받았다.

1592년(34세)
이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병조의 낭관, 경기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북쪽으로 피난 가는 선조를 호위하다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다. 이 후 함경도로 길을 바꿔 왕자를 모시고 가는 일행에 참여하였다가 회령에서 그곳 주민인 국경인(鞠敬仁, ? 〜 1592년)의 반란으로 붙잡혔다. 국경인은 전주에 살다가 회령으로 유배당한 뒤에 회령부의 아전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조정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당시 상황을 함경도 사람 장복중(張福重)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선조실록 25년 9월 25일 기사)
“나는 병조 좌랑 서성(徐渻)을 따라다니며 강원도 지방에서 군사를 모으다가 왜적에게 쫓겨 함경도 함흥부(咸興府)로 들어갔다. 이때 왜적이 대거 공격해 왔기 때문에 원임(原任) 의정부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황정욱(黃廷彧), 원임 승정원 우부승지 황혁(黃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허명(許銘) 등이 제1왕자(임해군臨海君)와 제5왕자(순화군順和君. 실재로는 선조의 여섯 번째 아들)를 받들고 북도의 회령진(會寧鎭)으로 피난하여 들어갔다. 북도 절도사 한극함(韓克諴)과 남도 절도사 이영(李瑛) 등은 만령(蔓嶺) 싸움에서 패하여 종적을 모르게 되었다. 적군의 기세는 점점 극성하게 되어 7월 26일 회령진을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왕자들과 김귀영 등이 한꺼번에 사로잡혔다.”

회령지방에서 국경인 등이 조선의 왕자들과 관리들을 사로잡아 왜군에 넘긴 것은 군대를 모집하러 나온 왕자들이 현지 백성들에게 이유 없이 횡포를 부리고 잔혹한 행동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13세의 어린 나이였던 순화군은 성격이 아주 나빠 평소에도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는 사이코패스 기질을 가진 인물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불법을 저질러 나중에 조정 관리의 탄핵을 받았다. 1601년에 그는 조정 관리들의 건의로 ‘순화군’이라는 군호(君號)까지 박탈당하였다.
서성도 임해군·순화군·황정욱 등과 함께 왜적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졌다. 하지만 그는 홀로 왜군들의 진영에서 탈출하여 경성(鏡城)으로 들어갔다. 이후 현지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함경도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도와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 등을 잡아 죽이고 길주에 주둔한 왜적을 물리쳤다. 또 명천(明川)으로 진격하여 적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이 공로로 전적에 제수되고 사병을 모집하는 소모어사(召募御史)로 임명되었다.
당시 구원병으로 조선에 들어온 명군(明軍)이 군사 전략을 세우기 위해서 자세한 조선 지도를 요구하였는데, 접반관(接伴官)의 임무를 맡고 있던 서성은 명군에게 조선의 지도를 제공하여 왜군과의 전투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후 지평, 병조 정랑, 성균직강 지제교 등에 임명되었다. 이해 자신을 키워준 숙모 송부인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594년(36세)
봄, 지평, 직강, 내섬시 등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그는 병조 정랑에 임명되어, 군대의 병사들과 군량미를 관리하였다. 또 순안어사(巡按御史)에 임명되어 삼남(三南) 지방을 순찰하였다.

1595년(37세)
경상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삼가현(三嘉縣)에 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여 민심을 진정시키고, 쌍충묘(雙忠廟)를 세웠다.

1596년(38세)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병조 참의, 승문원 부제조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강원 감사(監司)가 되었다.
이해 조정의 간신들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7년〜1596년)의 공을 시기하여 김덕령이 반역할지 모른다고 무고를 하여 선조는 조정에 김덕령을 잡아 오도록 명하였다. 이 때 동부승지의 관직에 있었던 서성이 그 책임을 맡았다. 서성이 전주에 도달하여 살펴보니 도원수 권율이 이미 김덕령을 진주의 감옥에 가두어 둔 상태였다. 이때 서성은 임금에게 보고서를 올렸는데, 거기에 김덕령이 이몽학의 난 때 토벌의 명령을 받고도 ‘나흘 동안 머뭇거리며 성패를 바라보았다.’(四日遲留, 觀望成敗)라는 취지의 보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선조 임금이 직접 국문에 참여한 이 사건으로 김덕령은 사형을 당하였다. 그런데 서성이 보고한 내용이 김덕령의 죄를 확정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비난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김덕령은 성혼(成渾)의 제자로, 서인계열에 속했으며, 서인의 주류였던 정철(鄭澈)의 동향인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동인출신 고관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1597년(39세)
병조 참의, 좌부승지, 도승지, 첨지중추를 역임하고 다시 병조로 돌아왔다. 황해도 감사가 되었다.

1599년(41세)
이해, 함경도 감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사임했다. 가을에 호조 참판, 평안도 감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도승지, 한성부 판윤, 형조 판서 등에 임명되었다. 이 즈음 도승지 자격으로 경연에서 선조 임금에게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비난하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비판하다 임금의 미움을 받았다.

1600년(42세)
이해 서성은 평안도 감사로 있으면서 우리나라에 기자의 화상(畫像)이 없다는 이유로 중국 원나라의 화가 조맹부(趙孟頫)가 그린 <기자대무왕진홍범도(箕子對武王陳洪範圖)>를 구매하여 평양의 인현서원(仁賢書院)에 보관하도록 조치하였다.

1603년(45세)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다시 함경 감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북방의 여진족들이 갑자기 침입하여 첨사 김백옥(金伯玉) 등을 살해하였다. 서정은 그들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고 나가 싸웠다. 이때의 토벌작전에서 특별한 전공이 없이 패배하였기 때문에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1607년(49세)
경기도 감사(監司)에 임명되었다.

1608년(50세)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동인에서 분파된 대북파 관리들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상대적으로 서인과 동인 중 남인계열의 관리들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서성은 추부(樞府, 이전의 중추원)에 임명되었다. 이 해 산능(山陵, 임금의 무덤) 건설을 감독하였는데 나중에 견고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 파직되었다.

1609년(51세)
공조 판서, 참찬에 임명되었다. 개성부 유수(留守, 정이품의 외관직)에 임명되었다.

1611년(53세)
참찬에 임명되었다.

1612년(54세)
김직재(金直哉, 1554년〜1612년)의 모함으로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김직재는 아들 김백함(金白緘)이 왕을 제거하고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일으켰다고 하여 부자가 사지를 찢는 형벌을 받아 사망하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던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무고 사건이었다.

1613년(55세)
이해에 광해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대북파가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켰다. 이들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여 역모하였다는 이유로 유교칠신(遺敎七臣, 선조가 승하하면서 어린 영창 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유명을 내린 일곱 명의 신하)으로 지목된 한응인(韓應寅), 신흠(申欽) 등을 체포하여 유배시켰다. 서성도 이때 연루되어 단양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서성은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고초를 받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까지 11년간의 귀양살이를 하였다.

1615년(57세)
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다음해 영해로 유배되었다.

1618년(60세)
어머니의 3년상을 마쳤다. 유배지가 원주로 바뀌었다.

1622년(64세)
부인상을 당하였다.

1623년(65세)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서인 일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인조)을 임금으로 옹립하였다. 관직에 복귀되어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관리들을 이끌고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한효순(韓孝純)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참찬이 되었다.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을 때는 북인 정인홍 일파를 처벌하는데 공을 세워 포상을 받았다.

1624년(66세)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봄에 임진강을 건너 한양으로 진격했다. 인조 임금은 수원을 거쳐 천안, 공주까지 피신을 하였다. 이때 서성은 임금 일행을 호위하면서 같이 이동하였다. 이 공으로 그는 나중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한양이 수복되었을 때 복귀하여 판중추부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김장생, 정엽 등과 함께 스승 송익필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1627년(69세)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기로사는 연로한 고위 관직자들을 예우하기 위해서 설치된 부서였다. 이해에 후금이 침입해 왔다.(정묘호란) 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종묘 제조(提調)의 자격으로 묘주(廟主,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1628년(70세)
유효립(柳孝立)의 옥사(獄事)사건을 처리하다 견책을 받아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후 참찬으로 복직되었다가, 장악원, 혜민서의 제조로 임명되었다.

1629년(71세)
6월 5일(음력) 숭례문 바깥 남지(南池) 부근 홍사효 집에서 열린 기로회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때 참석자들은 홍사효(洪思斅, 1555∼?)를 비롯하여 강인(姜絪), 이귀(李貴), 서성(徐渻) 등 원로들이었다. 이 기로회 모임은 사적인 것이었으나 기록으로 남겨 그 그림이 현재까지 전해져 온다. 화가는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기룡(李起龍, 1600∼?)이다. 당시 이 같은 노인들의 기로회 모임이 민간사회에 널리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631년(73세)
인조 9년 4월에 사망하였다. 포천 설운리에 장사를 지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봉집(藥峯集, 약봉유고藥峯遺稿)』이 있다. 이 책에는 170여 수의 시가 실려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경험을 서술한 시, 단양 유배 때 지은 시, 중국 사신의 접반관이 되었을 때의 시 등이 실려 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선조 25년 9월 25일 기사
정조실록 정조 5년 7월 23일 기사
이장희, 「서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1997
반윤홍, 「순화군(順和君)」,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서성 행력」,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 콘텐츠>(https://www.krpia.co.kr/)
안휘준 집필(1996), 조인수 개정(2013), 「이기룡필 남지기로회도(李起龍筆南池耆老會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서정욱, 「강원도 관찰사만 10명을 배출한 한국 최고의 명문가」, <프레시안>, 2019.6.19.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인문학으로 보는 장애인 ‘고성 이씨 부인’ 남편과 사별 후 음식사업으로 집안 일으켜」, <에이블뉴스>, 2017.4.10

서성이 71세 때 참석한 기로회 모습. <남지기로회도(李起龍筆南池耆老會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1호). 기로회 장소는 남대문 바깥 남지의 홍사효 집이다. 아래쪽 정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서면 양쪽에 두 쌍의 버드나무가 보이고 중앙 연못에 연꽃이 가득하다. 그 안쪽에서 12명의 노인들이 음식 대접을 받고 있다.

박광옥(朴光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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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년(중종 21)~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박광옥의 자는 경원(景瑗)이고, 호는 회재(懷齋)이며,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박곤(朴鯤)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아버지 박곤이 전라도 광주 선도면 개산리(지금의 서구 매월동 회산)에 터를 잡고 살면서,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에서 1526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며 품행이 단정하였다. 10세 때에 조광조의 문인인 정황(丁潢)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에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30세 때 향리에서 동지들과 선도향약(船道鄕約)을 정하여 실행하였다. 향약은 조선시대 향촌에서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자치 규약이다. 사회적 공동체인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교화․선도하기 위하여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는 4대 강목을 가지고 지역민들을 통제하고 교화해나가던 것이다.
1565년 가을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살면서 몸이 쇠약해져 죽을 지경에 이르자, 광주목사 최응룡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약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삼년상을 마치고, 1568년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수월정(水月亭)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박광옥은 개산송당(蓋山松堂)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아버지 박곤이 이곳에 터를 잡고 기반을 다져 비교적 넉넉한 살림을 한 것으로 보인다. 43세 때에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기 위해 방죽을 막고, 방죽 위에 수월당이란 정자를 짓고, 이 정자에서 기대승과 성리학을 담론하고, 박순․고경명․이이․노진․성세장․김언거․이만인 등이 모여 시를 짓거나 시에 대한 토론·감상 등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고 회재집 연보에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박광옥이 이 곳에서 살면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명망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고, 당시에 방죽을 막은 동기를 선도면 향약 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선도향약」 서문에 따르면, “땅이 메마르고 물이 낮아서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지면 모두 재앙을 입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박광옥은 이 재앙을 막기 위해 방죽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마을 주민들의 협조로 방죽을 만들었다. 이렇게 볼 때 수월당은 이 지역 문학의 산실이요, 나라를 걱정하는 원근 선비들의 교유 장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방죽에는 지금도 작은 섬이 있고, 방죽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놓아 서구청에서 관리하고 있어 풍치가 아름답고, 연꽃이 피면 방문객들이 붐비곤 한다. 이 기회에 이 섬이 아담한 정자를 복원하여 박광옥 선생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한다.
1574년 49세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고, 운봉현감이 되어서는 태조 대왕이 왜구와 싸워 크게 이긴 황산에 황산비대첩을 세웠다. 1578년 53세에 전라도․충청도의 도사를 거쳐 1579년 예조정랑, 1580년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그 뒤 성균관직강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1586년 61세에 광주 교수 겸 제독에 임명되고, 다시 사섬시정 지제교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질병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왜구의 침입 소식을 듣고 바로 광주목사 정윤우(丁允祐)를 찾아가 의병을 모집할 계책을 의논하고,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1차로 고준봉(高準峰) 형제에게 의병을 거느리고 수원으로가 권율과 합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도내에 다시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광주관문 앞에 모인 의병을 이끌고 출병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의 몸이 늙고 병이 들어 장수의 직책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소모접제(召募接濟) 책임자로 추대하고, 소집된 병사들은 고경명에게 예속시켰다. 이에 담양에서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금산으로 출병하게 되었다. 이때 김천일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어 선생의 의병출병을 만류하였다.

“전장에 참여한 것도 국가를 위한 것이요. 고향에 남아 지방을 방위하는 것도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 더구나 지방에서 근본이 한번 흔들리면 국사는 장차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의병의 승패는 오로지 선생의 뜻에 달렸습니다.”

이에 새로 광주목사에 부임한 권율과 의병 수 천 명을 모아 권율이 출전하게 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박광옥은 계속해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수집․보급하면서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려는 왜군을 막았다. 그리고 승병으로 처영(處英)을 독산에 있는 권율에게 보내어 도왔다. 1592년 7월 21일 의병활동의 공로로 나주목사로 임명되었다. 부임 관아에 의병청을 세우고, 각 읍에 격문을 보내고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군량과 무기를 준비하여 12월 11일을 출병일로 정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준비하였으나, 갑자기 병세가 위독하여 출병할 수 없게 되었다. 의병 도청에 모인 사람들이 출병을 잠시 멈추고자 하는 요청에 따라, 의병과 군량미를 권율과 김천일 두 장군의 진영으로 나누어 보내고, 자신은 질병으로 사직소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1593년(선조 26) 3월 권율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서울을 수복한 다음 서신으로 문병을 하였다. 그해 10월 26일 나라의 중흥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1602년(선조 35) 지방의 유림들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벽진촌에 사우를 세워 벽진서원이라 하였다. 1681년(숙종 7)에 선생을 도승지에 증직하고, 사우는 ‘의열사’라 사액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운봉의 용암서원에도 배향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을 철거하라는 명령에 의해 훼철되어, 유집목판과 영정은 운리영당에 모셔오다가, 1999년에 운리사(雲裏祠)를 복원하고 봄가을로 향사하고 있다. 그리고 선생의 유집목판은 1996년 3월 19일에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저술의 일부가 『회재유집』에 전한다.
광주에 회재로(懷齋路)라는 가로명이 있다. 회재 박광옥을 기리기 위한 가로명으로 광주광역시에 의해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의병의 호남의 진원지인 담양과 나주의 의병을 회재선생이 주도하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살았던 지역을 통과하게 되어 더욱 의미가 크다 하겠다.
박광옥의 작품은 모두 한문문학으로, 이를 망라하여 전하는 문헌은 『회재집』이다. 박광옥의 학문은 유사경이 쓴 행장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그의 반평생의 학문은 전적으로 성리학에 있었다. 만년에는 더욱 『주역』․『계몽』․『가례』 등의 글이 힘써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천문산수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구하여 학문이 쌓이고 쌓였다. 일찍이 문장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글귀의 내용이 무게가 있고 아름다워 옛 분들의 정취가 담겨 있으며, 편지사연이 특히 좋았는가 하면 필법이 또한 굳세고 자유분방하였다.”

박광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큰 사위 유사경의 방광옥 학문에 대한 언급이다. 항상 문하생들에게 말하기를 “인(仁)을 좋아하고 불인(不仁)을 미워한 뒤에 가히 인의(仁義)의 도리를 다 실천하였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훌륭한 인품과 학문에 대한 명망으로 당대 유명했던 사람들과 두터운 교분을 갖게 되었다. 박순(朴淳)․노진(盧禛)․성세장(成世章) 등과 서로 덕으로 깊이 사귀었고, 기대승(奇大升)과는 어려서부터 왕래하며 절차탁마하는 사이였다. 따라서 『대동풍토기』에는 기대승․박상(朴祥)․박순․박광옥을 광주의 도학군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유경심(柳景深)이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향교를 중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박광옥은 자신의 토지를 내어 향교의 재정을 도왔으며, 향교의 제도를 확충하고 그 규범을 정비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이에 고을의 선비들이 향교의 중건을 기념할 때에도 전면에는 기대승의 글을, 후면에는 박광옥의 글을 새기는 것을 보아도 그의 학문을 짐작할 수 있다. 『회재집』 발문에서는 “회재 선생은 도학과 문장에서 한 시대의 사표가 되었으니, 선현들의 훌륭한 점을 본받아 후학에게 큰 공을 끼쳤다”라고 적고 있다.

[참고문헌]: 「회재 박광옥의 생애와 학문」(이종일, 『향토문화』23,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변이중(邊以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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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년(명종 1)~1611년(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변이중의 자는 언시(彦時)이며, 호는 망암(望庵)이다. 변택(邊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함풍이씨로, 1546년 전라도 장성현 장안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황주(黃州)이다.
어려서는 향리에서 학문을 배우다가, 20세 때에 우계 성혼에게 나아가 학문을 탐구하고, 21세 때 율곡 이이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로 벼슬에 들어갔다. 변이중이 이이의 문하에서 있을 당시 사계 김장생과 교류하였다. 변이중은 그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문이란 체득하여 행하고 궁구하고 터득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반드시 장진(長進)의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배우는 사람들은 가까운 데서 착수하지 않지만, 그들의 외면적 문장을 보면 공자나 주자와 같은 성인이 아님이 없다. 이것이 배우는 사람들의 큰 병폐입니다.”

이를 보면, 그의 학문은 체득과 실천을 우선하는 경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옳다고 하지 않는 것은 덕에 나아가는 긴요한 법이고, 모든 것이 그르다고 하지 않는 것은 선을 취하는 긴요한 방법이다”라고 하여, 모든 것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항상 잘못을 고쳐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벼슬하는 동안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으려 하였으나, 당시 동인들은 그가 이이의 문인이라 하여 배척함으로써 벼슬 생활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1576년(선조 9) 변이중은 모친상 1년 만에 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는 상복을 입음에 예를 다하였는데, 특히 묘소 봉우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서쪽 대 위로 나가 묘소를 바라보며 통곡을 하였다. 그 암자를 망암(望菴)이라 이름하였고, 또한 자신의 호로 사용하였다. 그가 상을 마칠 때까지 철저하게 『주자가례』에 의거하였다.
『주자가례』는 중국 남송 시대 주자(朱熹)의 저서로, 사대부 집안의 예법과 의례에 관한 책이다. 본래 책 제목은 『가례』인데, 주자가 저술하였다 하여 통상 『주자가례』라고 부른다. 주자는 남송 때 사람으로 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였는데, 그의 성리학에서 예와 의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사대부들이 준수할 의례를 정리할 목적으로 편찬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고려 말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주자가례』도 함께 들어왔다. 조선 건국 이후 일반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왕실의 국가 의례를 만들 때에도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특히 17세기 후반 조선에서 예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주석서가 출간되었다. 책의 체제는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의 네 가지 의례로 편성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보통 4례라고 하면 가정에서 지켜야 할 의례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도 상례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주자가례』의 상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전통적인 상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변이중은 예학을 치밀하게 탐구하여 1579년 34세 때에는 『가례고증(家禮考證)』 4권을 저술하였다. 윤두수(尹斗壽)에 의하면, 조정의 관리들이 예법을 아는 사람은 변이중과 김장생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35세 때 교서관부정자에 제수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황해도 아사 벼슬에 있을 때 이이가 세상을 뜨자, 스승의 집을 후하게 돌보아 주었다. 이것을 빌미로 이이를 비판하던 무리들로부터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1591년 어천찰발에 제수되고 재임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사․조도어사․도어사 등 여러 직임을 받고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세 차례를 상소를 올렸는데, 강화 수비책에 대한 상소는 도성의 보전을 위한 현명한 주장이었다. 그는 모병과 군량 등에 힘쓰면서 “군량을 조달하면서 흩어진 선박을 효과적으로 소집하여 수송에 임하도록 하였고, 이로써 명군과 조선 관군에 군량 공급을 제때에 함으로써 장병들이 허기지지 않고 전쟁에 임하도록 조치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우차(牛車), 그리고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에 의거하여 화차 300량을 만들어 전투에 만전을 기하였다. 행주산성 전투에 화차 40량을 권율에게 보내 대첩에 크게 기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1603년 함안군수가 되었다가 1605년 사직하고, 그 다음해 겨울 향리로 돌아와 벗들과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특히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따서 향헌(鄕憲) 10여 조를 만들어 봄가을로 시범을 보이면서 향약보급과 실천에 앞장섰다. 여씨향약은 11세기 초의 중국 북송(北宋) 때에 향촌을 교화 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자치적인 규약이다. 협서성남전현 여씨 문중에서 도학(道學)으로 이름 높던 여대충(呂大忠)․여대방(呂大防)․여대균(呂大鈞)․여대림(呂大臨) 4형제가 문중과 향리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둘째, 잘못을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 셋째, 서로 사귐에 있어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넷째,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患難相恤).
이 향약은 그 뒤 주자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서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1517년(중종 12)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각 지방장관에 의해 여씨향약이 널리 공포되었고, 이를 토대로 퇴계 이황은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율곡 이이는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었다.
1611년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현재 장성 봉암성원에 배향되어 있다.
여기서는 변이중의 신무기 화차와 총통의 발명이 임진왜란을 타개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공헌을 소개한다.
조선은 일본의 침입, 즉 임진왜란을 당하여 초기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는데 매우 어려웠다. 조선은 정상적 국정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뜻있는 선각자들의 의병과 승병 조직에 의한 대응이 약간의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였으나, 전세의 역전을 가져온 것은 행주대첩이었다. 행주대첩은 선조 26년(1593) 2월 12일 수장 권율이 2,300명의 병력으로 왜군 3만의 병사와 싸워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리하여 행주대첩의 공이 권율에게 돌아가는 것은 그가 수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신무기 화차와 총통의 활용이 있었다. 그 신무기의 발명자가 바로 변이중이었다.
변이중은 행주대첩 이전 1593년 1월 30일 죽산전투에서 우차(牛車)를 이용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패전하자 여러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 패전을 병가지상사로 여겨 자숙하면서 행주 인근 양천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당시 권율은 그의 실책에 적극 변호하였다. 권율은 한양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이동하자, 일본군 역시 그 이동을 막고자 하였다. 권율은 은밀히 행주산성으로 옮겨 진을 쳤다. 양천에 주둔한 변이중은 신속하게 화차를 제조하였는데, 10여 일 동안 40량을 만들어 권율에게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모사 변이중이 만든 화차가 왜적과 싸워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변이중이 만든 화차는 수레 속에 40군데 총구멍을 내어 구멍마다 승자총(勝字銃)을 장전하고 그 심지를 서로 이어놓아, 한 번 심지에 불을 붙이면 차례로 포가 발사되는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이 화차 한 대를 끌고 다니면서 총포를 마음대로 쏠 수가 있어, 이리저리 화차의 방향을 바꾸어 여러 각도에서 왜적과 대응하여 싸울 수가 있었다. 그보다 앞서서는 고려 말엽 1380년(우왕 6)에 최무선(崔茂宣)이 금강(錦江) 입구 진포(鎭浦) 싸움에서 처음으로 연속 발사되는 화포로 왜구의 선박 5백여 척을 폭파하여 대승을 거둔 일이 있다. 또 『세종실록오례의(世宗實錄五禮儀)』의 「군례(軍禮)」에 보이는 ‘사전총통(四箭銃筒)’․‘팔전총통(八箭銃筒)’이라는 화전(火箭)은 화차(火車)의 개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변이중의 화차는 고려 말엽부터 세종 시대를 거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온 화차를 이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보면, “임진왜란 때에 호남지방 소모사 변이중이 처음으로 화차 3백 대를 만들어 순찰사 권율에게 보내어 행주대첩을 도왔다. 그 원리는 한 화차에 40개의 구멍을 내고 승자총 40개를 끼워 넣어서 심지에 불을 붙여 연속으로 끊이지 않고 발사하도록 하니 그 소리가 산악을 진동하여 왜군들이 크게 놀라서 도망갔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화차가 비록 널리 쓰인 것은 아니었으나, 권율의 행주대첩에 사용되어 큰 성과를 내었다. 뿐만 아니라 박진(朴晉)이 경주를 탈환하는 때에도 이 화차를 써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의 화차 실효성에 대해 김병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변이중 화차가 행주대첩에 투입되었을 때, 모두 40대가 사용되었고, 각 화차가 40문의 승자총통을 탑재했으므로 동시에 사격 가능한 승자총통은 모두 1,600문이고, 승자총통 1문은 최대 15발의 철환을 동시에 발사하므로 최대 24,000발에 육박하는 탄환을 적에게 쏟아 부을 수 있다. 이것을 개별 병사가 운용하자면 모두 1,600명의 운용인원이 필요하지만, 화차의 경우 최대 운용인원을 4명이라고 봐도 160명이면 운용이 가능하다.”

이를 보면, 분명 변이중의 화차는 행주대첩 승리에서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화차와 총통 등의 발명은 전세를 역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특히 화차의 발명은 우리나라 과학사의 지대한 공헌이자 전쟁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공헌이었다. 그 공헌은 수전에서 활약한 이순신의 거북선과 상응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서에는 『망암집(望庵集)』이 있다.

[참고문헌]: 「망암 변이중 선생의 업적과 공헌」(송재운, 『공자학』21, 한국공자학회, 20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실록사전』

최전(崔澱)


최전(崔澱)                                                             PDF Download

1567년(명종 22)~1588년(선조 21). 조선 중기의 시인.
서울 출신으로 자는 언침(彦沈), 호는 양포(楊浦),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아버지는 군수 최여우(崔汝雨)이고, 어머니는 상주 이씨다. 이이의 문인으로, 18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2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최전은 시문 및 글씨와 그림, 그리고 음악에까지 천부적 재주를 드러내었다. 이항복(李恒福)은 그의 「양포묘갈명(楊浦墓碣銘)」에서 최전을 처음 봤을 때 그의 첫인상과 느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예전에 선조(宣祖)께서 서쪽 교외(서울의 서대문 밖)를 검열하실 때에 나도 가서 보았는데, 날이 저물어서야 보기를 그만두었다. 가서 이웃집에 머물렀는데, 앞서 어린 아이 몇 십 명이 와서 평상복을 입은 채 앉아 있었다. 마침 그 사이에 별처럼 빛나는 봉황의 눈을 갖고 있는 한 아이가 무리에서 나와 나에게 절하였다. 나와 동행한 친구가 곁눈질을 하고 이야기를 할 때에 아이에게 공손하게 천천히 말하였는데, 마치 도(道)가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하였다. 내가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겨 팔꿈치로 치며 누구냐고 물었다. 친구가 말하기를 ‘자네는 알지 못하는가?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신동으로 최씨 집안의 자제 전(澱)이라네’라고 하였다.”

최전은 6세에 부모를 여의고, 맏형인 최서(崔湑: 자는 彦盛, 호는 秋浦)에게서 가르침을 받다가 9세에 집을 떠나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시와 역사를 배웠다. 최전이 어린 나이에 이이의 문하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단아한 모습과 학문에 전념하는 태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뛰어난 시적 재능을 이이가 ‘천부탁절 덕업불가량(天賦卓絶 德業不可量: 하늘이 탁월함을 부여하여 덕업을 헤아릴 수가 없다)’이라고 칭찬한 까닭에 이이의 문하에서는 나이 많은 문생들도 그와 사귀려고 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흠(申欽) 역시 서문에서 1585년에 두 살 연하인 최전과 함께 진사가 되어 태학에 들어갔는데 “방향도 같고 학업도 같았으므로 눈으로 보자마자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한편 최전이 회시(會試)에 응시했을 때의 일화도 여러 글에 나타나 있다. 시험장에 들어가서야 시험 성적을 매기는 감독원이 이이인 것을 알게 된 최전은, 스승과 제자 관계 때문에 혐의를 받을까봐 시를 쓰고도 내지 않은 채 시험장에서 나왔는데, 이 일화는 사람들에게 최전의 인간됨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항복이 쓴 묘갈명과 임숙영이 쓴 행장에서는 최전의 뛰어난 재능과 아울러 그의 어진 심성과 성실한 태도를 언급하였다. 유가의 경전을 탐독하여 경건하거나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였고, 여색에 관심을 두거나 세속에 영합한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집안사람들이 닭을 잡을 때 들린 닭의 소리로 마음이 아파 차마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최전은 결국 독서를 위해 절에 들어갔다가, 과도하게 열중한 나머지 병이 들어 세상을 뜨게 된다. 그이 묘갈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가 죽던 해 문경 양산사(陽山寺)에 들어가 문을 닫고 칩거하며 다시 『주역』을 읽기로 하였는데, 이 때문에 병이 들었다. 손수 주자(朱子)의 책을 썼으며, ‘가부좌를 틀고 정좌하여 묵묵히 코끝을 바라보며 잡념을 없애면 가히 병을 고칠 만하다’라는 등의 말로 수련을 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때 나이가 스물 둘이었으니 아아, 얼마나 짧은가?”

임종 직전에 쓴 듯한 <주역잡설(周易雜說)>에는 『주역』을 읽으면서 느낀 단편적인 생각들이 기술되어 있는데, 주로 성정(性情)과 학문의 자세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최전의 시 몇 편을 소개한다. 최전이 남긴 시의 상당수는 10대에 지어졌다. 아래에 제시하는 두 편의 시는 모두 최전이 시로 명성을 떨치게 한 유년의 작품이다.

늙은 말이 솔뿌리를 베고 누워 老馬枕松根
꿈결에 천리 길을 가네. 夢行千里路
가을바람 지는 잎 소리에 秋風落葉聲
놀라 깨니 해질 무렵. 驚起斜陽暮

이 시는 8세 때에 지은 <노마(老馬)>라는 작품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 시를 입에서 입으로 전송하며 신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늙은 말이지만 꿈속에서는 천리 길을 달리고 싶은 포부를 가진다는 대조적인 내용이다. 따라서 이 시는 시의 제목인 늙은 말에서 연상되는 어두운 분위기 대신 꿈결에서도 천리 길을 달리고 싶어하는 늙은 말이 사소한 낙엽 소리에 놀라 깨는 시상으로 전개됨으로써 재기발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 시는 늙은 말에서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도 고려하고 있다. 천리 길을 질주하는 것은 꿈속에서만 가능할 뿐이고, 현실에서는 소나무의 밑둥을 베고 있을 정도로 노쇠한 말이다. 꿈에서 깬 늙은 말의 주변에 감도는 것은 가을 낙엽과 황혼 무렵이고, 이러한 시적 결말은 다시 늙은 말의 모습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 시는 늙은 말을 형상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대신, 정조와 분위기 면에서 다가가고 있으면서도 늙은 말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눈앞에 그려내고 있다.
<노마>와 함께 최전에게 신동이라는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으로는 윤두수(尹斗壽)가 연안군수로 부임할 때 전송하면서 지은 <별해고졸오음(別海皐倅梧陰)>을 들 수 있다. 이 시는 최전이 12세 때 이이에게 수업을 받으러 연안(延安)을 지날 때 지은 시로, 이후 이이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이 이 시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아득히 길은 서로 뻗어 있고 遙遙路向西
바라보고 바라봐도 산천이 드넓네. 望望山川豁
예전엔 이 곳의 길손이었건만 宿昔此爲客
오늘 아침엔 여기서 이별하노라. 今朝此爲別
광풍은 내 가는 길로 불어오고 狂風吹我行
멀리 호해(湖海)에서 만날 기약을 할 뿐. 遠作湖海期
기로에서 다시 고개 돌리니 臨岐更回首
유유히 내 마음 아프구나. 悠悠傷我思

이 시는 각 연에 다양한 구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시에 사용된 첩어 요요(遙遙)․망망(望望)․유유(悠悠)가 모두 비슷한 표현이라는 점에 유념한다면, 이 단어들은 아득한 여로와 함께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의 감정을 드러내는 시어라고 할 수 있다. 이별의 기로에서 불어오는 광풍(狂風)과 먼 훗날을 기약하는 원(遠), 기로에서 재차 고개 돌리는 심정을 강조한 갱(更)은 각각 상황과 미래에 대한 불확신,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의 첫 부분에서 서로가 가야할 아득한 길이 제시된 것은 헤어지는 슬픔과 기약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불안함을 투사한 것이고, 갱(更)이라는 부사를 등장시켜 이별의 슬픔을 극대화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 아득히 가는 길을 강조함으로써 이별의 아쉬움과 불안감이 교차하는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어서 그의 대표작인 <제경포이수(題鏡浦二首)>를 소개한다.

봉래산은 한 바탕 삼천 년이 지나면 蓬壺一入三千年
은빛 바다 아득하고 물은 맑고 얕아지네. 銀海茫茫水淸淺
난세 타고 오늘 홀로 날아왔건만 驂鸞今日獨飛來
벽도화 꽃 아래엔 아무도 보이지 않네. 碧桃花下無人見

조원(老子)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건만 朝元何處去不知
옥동(玉洞)엔 아득하게 복숭아가 가득하네. 玉洞渺渺桃千樹
밝은 달 비치는 요단(瑤壇)엔 한기 돌아 잠 못 이루는데 瑤壇明月寒無眠
만리 천풍에 향기가 경포에 가득하네. 萬里天風香滿浦

이 시는 많은 문인들이 경포대를 지날 때 즉각적으로 떠올렸으며, 최전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동지방을 유람하면서 뛰어난 경치를 구경한 체험은 최전에게 있어서 신선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경포이수>에는 최전이 생각하는 이상향이 그려져 있다. 금강산은 삼천년이라는 시간과 은빛 동해바다의 이미지를 통해 절대공간으로 떠오르고 있다. 3구에서 화자가 난새를 타고 선인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이 곳에 홀로 온다는 시적 설정 역시 이상세계를 표현한 것이라 보이는 대목이다. 제2수에서 다시 등장하는 도화 꽃의 정경과 청량한 기운, 바람이 드리우는 향취 등으로 경포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 모습은 삶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비현실적이고도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이처럼 최전은 시문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음악에도 천부적 재질을 발휘하였다. 특히 그림은 매화와 조류를 잘 그렸으며, 글씨는 예서와 초서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양포유고(楊浦遺稿)』 1책이 있다.

[참고문헌]: 「양포 최전의 시세계-16세기 唐詩風의 한 경향-」(이은주, 『한국한시작가연구』, 한국한시학회, 2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신(黃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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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년(명종 15)~1617년(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여기서는 1596년 일본에 파견되었던 통신사 황신의 일본에 대한 시각을 그의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황신은 1562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본관은 창원(昌原),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아버지는 정랑 황대수(黃大受)이며, 어머니는 내섬시정 곽회영(郭懷英)의 딸이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2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588년 알성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는 임진왜란 중 심유경의 배신으로 일본군 진영에 1년 여간 머물렀으며, 1596년 명나라 사신과 함께 일본을 다녀왔다.
황신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진행될 때에 명나라 사람들과 함께 협상 현장에 있었고, 조선을 대표하여 일본을 직접 방문했던 인물이다. 일본의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에 따라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통신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황신은 통신사 파견 이전 강화(講和)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일본의 재침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때문에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가 구체화되면서 조선의 장수들 대부분이 강화를 통해 전쟁이 끝날 것으로 믿는 분위기를 경계하며, 일본의 재침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1596년 7월 17일 조선 정부는 일본에 서신과 예물을 보냈다. 8월 2일 박홍장은 서신과 예물을 가지고 부산에 도착했고, 8일 조선 사신 일행은 일본을 향해 출발하였다. 조선 사신은 쓰시마(對馬島)․잇키(一岐島)․나고야(名古屋)․아이노시마(藍島)․아카노미세케(赤間關) 등을 거쳐 사카이하마(界濱)에 이르렀다.
1596년 9월 히데요시는 일본의 왕자 방환에 대한 조선의 사례가 없었다는 점, 고관을 사신으로 파견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이유로 조선 정부가 보낸 선물도 받지 않았다. 이에 황신은 히데요시가 조선 사신의 접견을 거부한 사실과 함께 일본의 재침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선조에게 알렸다.
1596년 12월 일본에서 돌아온 후 황신은 이듬해 봄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선조에게 알렸다. 구체적으로는 1~2월 일본의 선발대가 침략할 것이며, 3~4월에는 일본군 전부가 부산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였다. 더 구체적으로 일본군이 조선의 수군을 격파한 후 육군과 합세하여 먼저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일본의 수군은 야간 기습작전으로 조선의 전선을 5~6척 내지 7~8척으로 포위하여 일시에 공격하여 돌진할 것이라며 일본군의 구체적 전략까지 알렸다. 황신은 일본에서 직접 자신이 보고 들은 바에 따라 일본의 재침을 예상했던 것이다.
황신은 조선에 주둔 중인 일본군 진영을 ‘늑대와 범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그가 일본을 믿을 수 없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신은 일본 사신행차 중 일본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중과 상인 외의 남자는 길고 짧은 두 가지 칼을 차며, 3~4개의 칼을 찬 자도 있다. 원통한 일이 있으면 칼로 배를 십자로 갈라 스스로 해명하고, 원수를 지게 되면 반드시 칼을 빼어 갚는다.”

이러한 모습을 목격한 만큼 일본은 모든 문제를 대화가 아닌 칼로 해결하려 한다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일본의 재침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들이 가장 알고 싶었던 정보는 히데요시에 관한 것이다. 그 이유는 히데요시가 바로 조선을 침략한 원흉이기 때문이다. 황신은 히데요시가 아랫사람에게 포악하며, 남의 수고는 생각지 않아 일본인 모두에게 원한이 사무쳤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황신은 일본의 정치체제에 대해 천황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과, 실제 정치는 간파쿠에 의해 행해지며 국왕전(國王殿)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히데요시의 집권과정과 일본의 정치체제에 대한 황신의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다.
조선인들은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히데요시와 함께 쓰시마에 주목했다. 그 이유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쓰시마의 책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에 전쟁과 관련된 쓰시마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황신이 일본의 조선 침략에 쓰시마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을 다녀온 이후의 일이지만, 1598년 12월 황신은 전쟁의 주역으로 쓰시마를 지목하고, 쓰시마 정벌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을 다녀온 직후, 선조가 쓰시마를 공격할 경우 승산이 있는지를 묻자, 쓰시마는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비축된 식량이 없는 만큼 조선이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대답한 바 있다. 때문에 자신이 선봉이 되어 쓰시마를 공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던 것이다.
황신은 일본인들은 “부자형제간에 친애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일본의 가정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또 일본인들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 목욕하고 희롱한다며, 남녀유별의 분수를 모르는 야만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또 남성 간에 동성연애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기록하였다. 일본에서 오누이 간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사실, 부자가 한 여성과 간음한 사실 등을 금수의 풍속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일본 여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음란하다고 이해하였다.

“부녀자들은 경쾌하고 영리하며 얼굴이 훤칠하지만, 성질이 음탕하여 비록 지체가 있는 좋은 집안의 여자라도 대개 딴 마음이 있고, 장사치의 여성 역시 몰래 사사로이 지내는 자가 있으며, 승려 역시 부녀자를 데리고 사찰에서 사는 자가 있다.”

황신은 성리학적 윤리규범에 입각하여 일본의 풍속을 바라보았다. 때문에 조선의 성리학적 풍속과 다른 일본의 모습을 야만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에 1596년 7월 13일 새벽에 발생한 후시미(伏見) 지진에 대해,

“일본국의 각처에 지진이 크게 일어나서 집들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사람이 거의 만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라고 하며, 지진으로 인한 피해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귀국 후 선조에게 복명할 때에도 일본에 지진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로 보아 그는 일본의 지진을 매우 특이한 경험으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일본에 지진이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통해 일본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황신은 일본에는 진귀한 생선이나 특이한 것이 없다고 설명하였다.

“숭어는 뼈가 많고, 은어는 기름이 적으며, 송이버섯은 향기가 없고, 소는 누린내가 나고 힘줄이 많으며, 닭은 발에도 털이 났고 고기가 굳으며, 꿩은 털이 검고 고기에 비린내가 나며, 생물(生物)의 성질이 이와 같이 달랐다.”

이러한 평가 역시 일본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며, 일본에 있는 동물과 식물 역시 조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그의 일본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황신이 일본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그가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일본을 오랑캐로 본 것만은 아니었다. 화이론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준말로,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물론 일본 역시 오랑캐로 간주되었다. 그는 일본의 풍속은 간소하여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긍정적인 면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 일본인들의 성격은 경박하지만 영리하고 솔직하여 남의 말을 잘 믿는다고 하여, 일본인에게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점도 있음을 인정하였다. 황신은 일본의 농민에 대한 세금제도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농민에게 전답마다 절반을 거두고, 그 외에는 다른 부역이 없으며, 수송하는 일은 모두 품삯을 주기 때문에 폐단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농민들에게 전세(田稅) 외에 별도로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조선의 농민들은 조세(租稅)나 지대(地代) 외에 역(役)과 공납(貢納) 등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또 인신적 구속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황신이 농민에게 어떤 강제적 부담도 지우지 않는 일본의 세제를 소개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부분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황신은 일본의 면적이 조선보다 넓다는 점을 지적했다. 조선은 일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영토 역시 조선보다 작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일본을 조선의 1개 도(道) 정도의 크기로 표시하고 있음은,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을 직접 방문한 후 일본이 조선보다 국토가 작다는 인식이 잘못된 사실임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황신이 일본 사신행차를 통해 일본의 실상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의 일본에 대한 시각 역시 사신행차 전과는 달리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황신은 1596년 8월 8일 일본으로 향했고, 11월 23일 부산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그가 일본에 머무른 기간은 130일 정도로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다. 그는 히데요시를 직접 만나지 못했던 만큼, 그가 입수한 대일정보의 대부분은 명나라 사신을 통해 입수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제공한 일본 정보는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황신은 전쟁 중 일본을 다녀왔고, 그가 제공한 정보는 조선이 일본과의 전쟁 수행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전후에도 일본과 관련된 정책 수립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면서 일본의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의 일본인식은 당시 사람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추포 황신의 대일인식」(방기철, 『한국사상과 문화』74, 한국사상문화학회, 20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인(魯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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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년(명종 21)~1622년(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장수.
노인의 자는 공식(公識), 호는 금계(錦溪), 본관은 함풍(咸豐)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 아버지는 증이조참의 노사증(魯師曾)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이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외종숙부인 이나항(李羅恒)에게서 수학하였다. 7세에 아버지로부터 김인후(金麟厚)의 학행을 흠모하는 정을 갖게 되었다. 이에 김인후를 흠모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맑은 달이 쌓인 눈을 비치니
빛이 나의 창문에 비치는 도다.
누구와 이 광경을 함께 하리요
김가는 세상에 둘도 없도다.

14세 때에는 이정구(李廷龜)와 김광운(金光運)을 따르고 섬겼으며, 정개청(鄭介淸)을 스승으로 모셨다. 백광훈(白光勳)과 임억형(林億齡)과는 금성선사에서 함께 수학한 친구 간이었다. 그는 향리에서 고경명(高敬命)․기대승(奇大升)․나세찬(羅世纘)․나덕준(羅德峻) 등과 교유하였다. 당시 기대승에게 보낸 시가 전한다.

사람들이 모두 이익을 쫓아 힘쓰는데
고봉의 숨은 마음만 천성을 보전한다.
고요한 가을 강에 낚싯대 드리우고
싸늘한 촌락에서 십 년 공부를 쌓으니.

그는 명리를 쫓지 않는 기대승을 흠모하였고, 그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 17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다. 그는 진사에 급제한 뒤에 이이를 찾아가 가례(家禮)를 묻기도 하였다. 이때 이이에게 올린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낮은 사람을 사랑하는 이가 없는데
선생은 나를 멀리하지 않는다.
작은 자리에 앉아 글을 논하니
학업에 힘써 집안을 일으켜라 하신다.

20세 때 이정구를 만나 ‘도의지교(道義之交: 도의로써의 사귐)’를 맺고, 23세 되던 해에 이정구와 ‘성정체용(性情體用)의 설’을 주고받았다. 이로써 그가 성리학에 많은 공부를 할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노인은 당대의 이름 있는 이수광(李睟光)․이춘영(李春英)․이덕형(李德馨)․강항(姜沆) 등과 교유하였다. 노인은 1612년(선조 45) 그의 나이 47세 때에 사례집설(四禮集說)을 지어 조위한(趙緯韓)과 이를 토론하였고, 그리고 당대 예학의 최고 권위자인 김장생(金長生)에게 문의하여 수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유성룡은 노인을 평가하여 “명나라를 견문하고 주자서원에 있는 양현사(兩賢祠)에서 엄격히 학업을 닦았으며, 시서(詩書)에 능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후일 정조 때 이굉택(李宏宅)이 노인을 평하여 “문무를 겸비한 군자이다”라고 한 것과, 오시학(吳時學)의 “도학과 절의가 빛났다” 등의 기록은 비록 후인들의 추모라고 하더라도 노인의 사림정신과 학문정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성리학이나 논설 등의 글을 남기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무인으로 활동한 그 이면에는 그의 성리학적 의리와 심성론의 바탕이 깔려있어 그것이 가능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노인이 활약한 청․장년기는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란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노인도 임진왜란 의병의 선봉이 되어 국난 타개에 투신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 20여만이 바다를 건어와 동래를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경상도와 충청도를 유린하고 도성으로 진군하였다. 백성은 피난가기에 바빴다. 이때에 광주목사 권율(權慄)이 노인에게 “국가가 전란을 만났으니, 신하된 자는 마땅히 죽음으로 갚을지라. 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는 것이 어떠하리요”라는 글을 보내 의병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노인은 임금과 신하가 생사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의리임을 설파하고, 의병에 동참하였다. 이때 노인의 나이가 27세였다. 노인이 권율의 진영으로 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 세상에 당하여
월왕의 부끄러움을 늘 생각한다.
우주에 창칼이 가득하니
시서(詩書)의 뜻을 그만두려 하노라.

그는 약 100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권율의 진영에 도착하였다. 이에 권율은 모의(募義)라는 깃발을 만들어 노인에게 주었다. 노인은 권율의 휘하에서 남원성을 검문하고 방어하는 참모가 되었다. 1592년 7월 8일에 왜군이 진산(오늘날 금산) 지역으로 남하하자, 노인도 군대를 이끌고 진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왜군 900명이 사살되었으며, 조선인 포로 50명을 구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진산대첩’이었다. 이 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함으로써 호남은 왜군의 진출이 저지되었고, 후방 병참기지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592년 12월 27일 왜군 5천명이 다시 진산을 침략하였다. 노인 부대도 대응하여 왜군을 크게 토벌하였다. 승전보를 전해들은 권율은 “노인이 있는 한 적이 두렵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 후 노인의 이름은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날은 해상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서 승리하였다. 이로써 전세가 조선에 유리하게 되었다. 조선이 승기를 잡은 것이다.
1593년 정월에 노인은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군졸을 인솔하여 권율과 합류하였다. 행주대첩에서 노인은 권율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노인은 선봉에 서서 싸워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내는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일본군 사상자는 1만 여명에 이르렀다. 이후 권율이 선조에게 노인의 전공에 대해 포상을 건의하려하자, 그는 죽을힘을 다하는 것이 군자로서의 직분이라 하고 이를 사양하였다.
1593년(선조 26) 초 명나라와 일본 간의 화의(和議)가 진행되면서 4월경에 일본군대는 영남으로 후퇴하였다. 이들은 다시 상주․선산․안동․대구 등에 잔류하고 있다가, 그 외 울산․동래․거제․김해의 잔류 왜군들과 합류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13만의 규모를 자랑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1593년 6월 22일부터 대접전이 시작되었으며, 29일 진주성이 함락되고 김시민 장군 이하 최경회 등 많은 병사들이 순절하였다. 1593년 6월 왜군이 진주성을 총공격할 때 노인은 모의사(募義使)가 되어 경상도 의령 방면으로 가서 잔류 왜군을 협공하였다. 이때 모의 깃발을 날리며 왜적들을 추적하자 “진산의 승전장이 또 왔다”라고 하며 왜군들이 도망하였다.
1595년(선조 28)이 되자, 노인은 정월 초하루 도원수 권율을 찾아가서 명나라 장군 진운학(陳雲鶴)과 함께 시국을 논하였다. 6월에 영남으로 왜군이 침투하여 부산이 함락되었다. 그해 3월 권율과 함께 순천진으로 옮기고 항시전투 중 선봉에 나섰으며, 권율의 참모로 협력하였다.
1597년(선조 30) 7월 7일 노인은 도원수 권율과 함께 하동 진지로 이동하였다. 그 후 각처에 왜군이 창궐하자, 양친을 피난시키기 위하여 권율의 진지를 나와 고향인 금성으로 돌아왔다. 1597년 7월 21일 부모양친을 모시고 연고가 있는 의령을 향해 출발하려고 금성산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왜군이 나타났다. 대검과 창을 든 왜적이 사면을 포위하였다. 노인은 손을 벌려 양친을 감싸 안았다. 이에 왜적들이 효성에 감동하여 ‘물해효자(勿害孝子)’, 즉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글을 써 놓고 물러갔다. 이 상황에서 두 아들을 노탄회(魯坦回)와 노참(魯參)을 잃어 행방을 알지 못하였다.
8월 10일 왜군들이 남원으로 이동한다고 하는 정보가 있자, 권율은 노인에게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원군을 이끌고 남원성으로 갔다. 그러나 왜군들은 남원성의 사면을 완전히 포위하고 15일 야간을 이용하여 성으로 올라왔다. 이에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이때 노인은 역전하며 왜적들을 무찌르고,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려 돌아가려 하였으나, 갑자기 수많은 복병을 만나 포위되고 말았다. 노인은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맞고 쓰러져 왜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1597년 8월 15일이었다. 그는 순천의 왜군 진지로 이송되었다. 이로부터 노인은 약 19개월간의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1599년 3월 15일 일본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갔다. 이후 중국의 남쪽 복건성과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때가 1599년 12월이었다. 그의 나이 34세이었다.
그 후 노인은 1604년(선조 37) 당포(통영)해전에서 진용교위(進勇校尉)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는 왜구의 선단을 완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 해전의 통제사는 이경준(李慶濬)이었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이후 국지전이지만, 일본이 침략한데 따른 응전의 성격으로 조선이 큰 승리를 하였다. 선조는 이 해전의 승리를 기념할 수 있도록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를 그리도록 하여 참전 장수 28명에게 하나씩 하사하였다.
1605년(선조 38) 겨울 노인은 『소오책(沼吳策)』이라고 하는 조선이 일본을 멸망시킬 계책을 적은 복수책을 선조에게 올렸다. ‘소오(沼吳)’는 복수의 뜻으로 궁전이 연못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오나라 오원(伍員)이 죽으면서 20년 뒤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켜 오나라 궁터가 연못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월나라 왕인 구천(句賤)이 오나라 왕인 부차(夫差)에게 원수를 갚게 된다는 말이다. 이 고사와 같이 조선이 일본을 멸망시킬 계책을 말한 것이다.
이듬해 봄 선조는 이를 받아보고 “신하가 사직을 지키기 위한 특별한 계책”이라 하고, “마음과 몸가짐이 언제나 깨끗하고 근면한 생각을 가졌다”라고 치하하였다. 선조는 노인에게 수원부사를 제수하였다. 1607년 그는 황해수사 겸 옹진도호부사가 되었다. 노인은 군무를 잘 다스리고 청렴하게 근무하였다.
1608년(선조 41)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노인은 북인정권 하에서 홀대를 당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대북파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과의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이 명나라에서 귀국할 때 중국의 황제 신종(神宗)이 내린 소승마(小乘馬)가 있었다. 귀국 길에 타고 가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정인홍이 이 말을 사고자 하였고, 노인은 “이 말은 황제가 준 것이기 때문에 팔 수 없다”고 거절하였던 일이 있었던 것이다. 정인홍은 노인을 군산의 만호(萬戶)로 좌천시켰다. 그래도 노인은 군무에 충실하게 일하였다. 그러다가 광해군 때의 정국이 점차 혼란해지자 병을 이유로 귀향하였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 행방불명된 두 아들 노탄회와 노참을 슬퍼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1622년(광해군 14) 5월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금산의 금곡사(金谷祠)와 나주의 거평사(居平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 6권 2책 외에, 일본에서 포로생활과 명나라 체류기간 동안 그가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남긴 『금계일기(錦溪日記』와 『간양록(看羊錄)』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금계 노인 연구」(노기욱, 조선대학교 석사논문, 20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계집』

윤방(尹昉)


윤방(尹昉)                                                           PDF Download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윤방의 자는 가회(可晦), 호는 치천(稚川) 또는 치천(穉川), 본관은 해평이다.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윤방의 아버지인 윤두수는 정철과 함께 서인(西人)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정승이 되어 서인을 위한 정책을 펴나갔다. 1591년(선조 24) ‘건저문제’로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정철과 윤두수의 원한을 풀어주었고, 김장생을 조정에 초빙하여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노론(老論)이 뿌리가 내리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건저문제’는 1591년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다. 건저(建儲)는 ‘세자를 세운다’는 뜻이니, 세자 책봉을 의미하는 한자어이다.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으로도 불린다. 왕위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동인과 서인 간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나타났던 사건이다.
윤방은 어릴 적에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윤방은 경전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고 종합한 것을 가지고 가끔씩 두 분 선생이 계시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물었는데, 그때마다 두 분 선생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문장은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법도가 있었으며, 화려하면서도 질박한 표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전후로 명문 출신의 작품과 비교해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문장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시문학으로 남과 서로 주고받거나 담론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시문학을 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윤방은 1582년(선조 15)에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급제 후 승문원정자 등을 지냈다. 1591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과 예문관 봉교, 이후 예조좌랑․사헌부지평 등을 거쳐 1591년 아버지 윤두수가 동인과의 정쟁으로 유배당하자 사직했다가 다시 복귀하여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윤두수가 다시 재상으로 기용되자, 예조정랑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선조 임금의 어가를 모시고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따라갔다. 병조판서 이양원(李陽元)의 인사 부정을 탄핵하다가 성균관전적으로 전임되었다. 이양원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조식에게 부임 인사를 하며 “무겁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뭐가 무겁겠소. 내 생각에는 그대 허리춤의 금대(돈주머니)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라고 답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것은 조식의 허리에 검명(劍銘)이 새겨진 칼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바로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義)이다.”(義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것이다.
이후 예조정랑․호조정랑․호조좌랑을 거쳐 병조정랑으로 있을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동생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그해 7월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선조 임금은 상중(喪中)이던 윤방을 특별히 벼슬에 나오게 하여 사헌부지평에 임명하였다.
어머니의 상과 관련하여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윤방은 아버지와 함께 선조 임금을 호위하여 의주까지 모셨는데, 도중에 길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이때 이미 왜적이 사방에서 들끓고 있었으므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몰래 길을 달려가서 마침내 빈소에 이르러 소리를 내어 슬프게 울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가 어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몇 번이나 왜적을 만났지만, 다행히 몸을 피해서 빠져 나온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의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하였다.”

그 후 성균관직강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형조판서․영의정 등을 두루 지냈다. 당시 왜적의 만행이 극심한 중에도 몰래 숨어서 어머니 빈소에 다녀오는 효성을 보였다. 그의 효성과 가족 사랑에 관한 일화를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집안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항상 부모의 안색을 살펴가면서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일찍이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때에 거의 1년간 옷을 그대로 입고 허리띠를 풀지 않은 채 지냈다. 그의 집안은 형제들로부터 친척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번성하였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치우침 없이 두루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모두가 그에게 의지하였다.”

부인 청주 한씨는 판관 한의(韓漪)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 윤이지(尹履之)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고, 차남 윤신지(尹新之)는 선조의 둘째 옹주 정혜옹주와 혼인하여 해숭위에 봉해졌다. 정혜옹주는 선조와 김인빈(金仁嬪) 사이에서 태어난 4남 5녀 중에서 둘째딸이다. 김인빈의 둘째 아들이 처음에 선조가 세자로 세우고자 하였던 신성군(信城君)이고, 셋째 아들이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이다. 정혜옹주는 인조의 고모였으므로, 인조는 윤방․윤신지와 특별한 인척관계였다.
또한 윤방은 의학에 대한 지식이 많아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겸직하였다. 내의원도제조는 의약에 밝고 고관 가운데 겸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궁중에서 임금의 약을 담당하는 내의원을 중요하게 여긴 탓이다. 내의원은 왕실의 의약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승정원일기』의 인조 연간 기록에는 한 명의 내의원도제조가 등장한다. 바로 문관이었던 윤방이다.
윤방은 영의정 윤두수의 아들이다. 윤두수는 1555년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한 후에, 이조정랑․의정부검상․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사복시정 등을 역임했다. 이렇듯 높은 관직에 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학문에 정진하여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로 인조 때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는 의약에 대한 지식이 많았던 문관으로서 내의원도제조의 자리에서 최명길․이경석 등과 함께 의약을 논하였다.
특히 인조 연간에 내의원도제조를 하면서 인목대비의 폐상증(肺傷證: 폐가 손상된 증상), 두통, 담성해수흉번(痰盛咳嗽胸煩: 가래가 차올라 기침을 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등의 증상에 각종 처방을 투약한 기록들은 의학에 대한 그의 깊은 학식을 가늠하게 해준다. 그는 인목대비의 폐상증에 대하여 청금강화탕(淸金降火湯: 열로 인하여 생긴 기침에 쓰는 처방), 두통에 대하여 천궁다조산(川芎茶調散)을 처방하고 있다. 또한 인조의 한열왕래(寒熱往來: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하는 증상)에 대하여 소시호탕가감방(小柴胡湯加減方)을 투약하고, 침구치료에 의해 생겨난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는 평소부터 인목대비와 인조가 지니고 있었던 질환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특히 차를 마시거나 침구를 시술받아 생겨난 문제점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처럼 문관 출신으로서 의학에 깊은 학식을 가지고 있었던 윤방은 조선중기 유의(儒醫)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유의’는 유학자로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을 총괄하여 말한다. 그들 중에는 문과 출신으로서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의료행정을 겸하였으며, 왕실에 질환이 있을 때에 다른 의관과 함께 들어가서 진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의원(內醫院)을 비롯한 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고관의 권신들은 비록 의학에 대한 지식이 정통하더라도 실제로는 ‘유의’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한편 문과 출신이면서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전문적이 아닌 틈틈이 취미로 의학을 연구하여 그 지식을 가지고 의서의 편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서 선조 때의 좌랑을 지낸 정작(鄭碏)이 유의로서 『동의보감』의 편찬에 참가하였다. 또 전의감․혜민서에서 의학 교수관이 되어 의학교육과 연구에만 힘쓸 뿐이고, 의술에는 직접 종사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니, 유의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이 계급에 속하였다.
1640년 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8월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 오음리(梧陰里)의 선영에 안장되어 있고, 이식(李植)이 지은 「신도비명」이 남아있다. 조익(趙翼)이 윤방의 시장(諡狀)을 썼는데, 그가 윤방을 지나치게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비난을 받고 파면되기도 하였다. 조익은 윤방의 아버지인 윤두수의 형 윤춘수(尹春壽)의 외손자였으며, 윤방의 장남 윤이지(尹履之)와 동갑이자 죽마고우였다.
여기에서 ‘시장’은 임금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건의할 때 살아있을 때의 그의 행적을 적은 글을 말한다. 『경국대전』에는 종친 및 문무관 실직 정2품 이상과 직위는 낮더라도 친공신에게 시호를 주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 밖에 대제학을 지낸 자는 종2품이라도 시호를 주었으며, 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선비나 절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로서 세상에 드러난 자는 정2품이 아니라도 특별히 시호를 주었다.
봉작(封爵)은 해창군(海昌君)이며, 문익(文翼)의 시호가 내려졌다. 문집에는 『치천집』이 있다.
『인조실록』에서는 윤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얼굴이 넓적하고 체구가 우람한 데다 온몸에서 후덕한 기운이 흘러 넘쳤다. 인품이 중후하고 성품이 지극히 유순하고 근면하여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없었다. 또한 사람됨이 너그럽고 후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덕망이 있었다.”
또한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윤방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일을 처리할 때 허심탄회하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되 경계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기준과 척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소리에 결코 현혹되는 법이 없었다. 그는 풍채가 중후하고 심원하였으며, 기뻐하고 성내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그를 옆에서 모신 측근도 그가 급하게 말을 하거나 야비한 언사를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비록 느닷없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이 항상 평소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그의 인품과 기량을 우러러 사모하였다.”

[참고문헌]: 『위키 실록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귀(李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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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이귀의 정묘호란 때에 후금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主和論)의 내용을 소개한다. 정묘호란은 1627년(인조 5)에 후금(後金)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이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10일도 지나지 않아서,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적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모문룡(毛文龍)과 협력하여 후금을 칠 것을 약속한다. 모문룡은 후금의 요동 공격으로 인해 조선으로 도망쳐온 명나라 무장이다. 모문룡은 후금과 싸운다는 명분으로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머무르며, 정묘호란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자이기도 한다.
후금과의 전면전을 두고, 이귀는 조선의 임금 인조(仁祖)와 보는 시각이 달랐다. 정묘호란이 있기 4년 전에 이귀는 서변정세의 급박함을 알고 매우 구체적인 방어책을 내놓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이것은 스승 율곡 이이가 임진왜란 9년 전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지만 거부된 것과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5년이 지난 후, 이귀가 눈앞에 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몸을 던져 외쳤으나 허사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이가 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10만 대군을 양성하자고 했으나, 정적이었던 유성룡이 반대해 무산되었다’는 말은 다들 한 번 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인데, 실제로 이이가 직접 쓴 글에서는 ‘십만 대군을 양성하자!’는 식의 주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유사한 기록으로는 「만언봉사」에 나와 있는, 즉 “지금 사회가 썩어 있어서 사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10년 뒤에 화가 미칠 것이다”라는 정도이다. 하지만 ‘사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10년 뒤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라는 주장은 당대에 김성일(金誠一)․이언적(李彦迪) 등도 이미 주장한 바가 있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의 출처는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율곡행장」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율곡행장」에는 “이이가 일전에 십만 양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라고만 나와 있을 뿐,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는 언급되어 있지 않아 신뢰도가 떨어진다.
또한 이귀는 정묘호란 이전에 다섯 차례에 걸쳐 호패법을 시행하여 환란에 대비할 것을 임금에게 상소한다. 이후 많은 논란 끝에 호패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호패법은 조선시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주어졌던 오늘날의 민증(주민등록증)에 해당한다. 호패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양반과 노비 모두에게 골고루 발행하는데, 이를 실시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인구수 조사와 병력 기피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호패로 인하여 국방의 의무를 강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정계의 원로였던 이원익(李元翼)과 산림의 영수인 김장생(金長生) 등은 호패법을 끝까지 반대하였는데, 반대한 이유로는 민심을 거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조 역시 처음에는 호패법을 거부하다가 윤방․신흠 등 대신이 거듭 청하고 장유․이식 등도 시행을 촉구하자, 마침내 호패법 시행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귀는 호패법의 시행으로 16세기 이래의 고질적인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여 군사력을 증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정묘호란이 반발한다. 정묘호란 당시 서로(西路)의 방어체제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하였으며, 상황은 이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방향으로 치달았다. 의주성과 안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곽산의 능한산성은 산성임에도 불구하고 함락된다. 산성으로서 방어에 성공한 것은 의주의 용골산성뿐이었고, 그것도 의병에 의해서였다. 평안도 지역의 백성들이 조직한 의병에 의해 간헐적으로나마 후금 군대에 타격을 줄 뿐이었다. 평안감사와 황해병사는 이미 후금 군대를 피하여 각각 평양성과 황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후금의 침입 소식을 듣자, 조선의 임금 인조는 평안도는 지킬 수 없다고 보고 황해도에 병력을 동원하는 방안을 논의한다. 그러나 이귀는 황해도 역시 지킬 수 없다고 보고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청하지만, 인조로부터 ‘그런 논의는 천천히 하라’는 핀잔을 듣게 된다. 이때 후금의 군대가 황해도 중동부의 평산(平山)에 주둔하자, 강홍립 등은 후금 사신들과 강화(講和)를 맺어 전쟁을 완화시킬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화를 주장했다는 훗날의 비난을 피하려고 조정에 모인 대신들은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이때 후금과 싸울 것을 주장한 자들을 척화(斥和)라고 부르고, 후금과 화친을 해서 나라의 힘을 키우자고 주장한 자들을 주화(主和)라고 부른다. 척화파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김상헌(金尙憲)이 있고, 주화파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최명길(崔鳴吉)이 있다.
그러나 이귀는 “일에는 권(權)과 경(經)이 있고, 때에는 완(緩)과 급(急)이 있다. 지금 나라를 보존하느냐 망하느냐의 절박한 형편이니 한갓 헛된 이름만 지키고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미책(覊縻策)을 써서 적의 칼날을 늦추는 것이 낫다”라고 하고서, 여러 대신들과 교린(交隣)의 의리로써 강화를 맺을 것을 약속한다.
기미책은 광해군이 여진족에 대하여 쓴 정책이기도 하고,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 변방의 오랑캐를 다루기 위해 오래 전부터 써오던 정책이기도 하다. ‘기(羈)’는 말의 얼굴에 씌우는 굴레를 뜻하고, ‘미(縻)’는 소를 붙잡아 매는 고삐를 뜻한다. 그러므로 ‘기미’는 변변치 못한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은 피하는 것이다. 또한 ‘교린’은 조선시대에 일본 및 여진에 대한 외교 정책이다. ‘적국항례(敵國抗禮)’, 즉 적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예를 행한다는 뜻으로써, 상대의 나라와 대등한 의례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조선 초기 교린의 대상으로는 일본․유구․여진․동남아시아 국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 사간 윤황(尹煌)은 이름만 화친(和親)이지 사실상 항복과 다름없다면서, 후금의 사신을 참하고, 주화를 주도하여 나라를 잘못되게 만드는 이귀와 최명길의 목을 벨 것과 패전한 장수를 참하여 군율을 진작할 것을 주장한다. 이때 71세의 이귀는 “오늘의 일은 광명정대하다”고 말한다.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자들은 도성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피난한 것, 임진강을 사수하지지 않은 것, 이서가 남한산성에 대군을 주둔시키고 군사를 움직이지 않는 것 등을 모두 주화론자들의 책임으로 돌렸다. 국가가 망하더라도 강화조약을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 계속된다.
이귀는 화친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신하들에게 “일에는 권도(權道)가 있는데, 어찌 작은 절개에 구애될 것인가”라는 권도론을 내세운다. 이어 신하들이 군대의 일에 어두워서 척화를 주장한다고 한다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일을 망치는 것이다”라고 비난한다.
‘권도’는 경도(經道) 또는 정도(正道)를 불규칙한 상황에 임시로 맞추는 행위규범을 말한다. 권도는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일정하고 불변적인 행위규범을 가지지 못하며, 그때마다 다른 행위양식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가진다. 유학에서 권도는 불변의 정도에 대해 상대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된다. 정도가 항상 지켜야 하는 것과 달리, 권도는 현실에 따라 응용하는 것을 말한다. 원칙을 지키되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원칙만 찾지 말고 화급(火急)을 다투는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불이 났는데 양반의 도리만 찾고 있어선 안 된다. 우선 불부터 끄고 봐야 한다. 천하의 일이 그 본질은 같아도 형세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형세에 따라 처신을 달리 해야 하는 것이다. 평화롭고 무사할 때에는 정도(經)를 지켜야 하지만, 위태롭고 다급할 때에는 권도(權)를 행해야 한다. 집중무권(執中無權)이란 말이 있다. 오직 중만 고집하고 권도를 모른다는 말이다. 융통성 없는 고집불통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정도만을 고집해서도 안되지만, 권도를 남용해서도 안된다. 상황에 따라 처신하고 행동해야 한다.상황에 따라 응용한다고 모두 권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권도는 정도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변통론이다. 그 기준은 선(善)에 있다. 선을 따르는 변통이 곧 권도이다. 권도를 따르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변통하되 악(惡)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악을 따르는 변통은 교활하고 사악함만 낳기 때문이다. 악을 따르는 변통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이고, 권도를 남용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장자방(張子房)이나 유비(劉備)의 책사인 제갈량(諸葛亮)은 권도를 행하면서도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전 세계가 경제위기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권도의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런데 고집불통의 우리 국회는 거꾸로 위기극복 노력의 발목만 잡고 있어 많은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지금의 선택이 선(善)의 변통인지 악(惡)의 변통인지는 훗날의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과감하게 권도를 선택해 위기 타개에 앞장서는 큰 정치인의 모습이 그리운 오늘이다. 누가 이 나라의 장자방이나 제갈량이 되어 줄 것인가? 이귀는 국가를 위한 방도에 대하여 “국가를 도모하는 방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經)도 있고 권(權)도 있는데, 형세가 있는 곳에서는 권도가 변해서 정도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권(權)은 원래 저울질하는 것을 말한다. 저울질할 때 저울추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는 물건의 무게에 따라 늘 이동하는 것처럼,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상황에 맞게 임시변통할 수 있는 것이 권도이다. 맹자도 “남자와 여자가 직접 주고받지 않는 것이 예이지만,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에 건져주는 것은 권도이다”라고 말하였다.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지 않아야 하지만(경도), 물에 빠진 것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손을 잡아 구해야 한다(권도)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귀는 척화를 주장하는 장유 등에게 “오로지 당당한 정론(正論)만을 고집할 뿐 변화에 대처하는 권도(權道)의 마땅함을 모른다”고 비판한다. 장유의 주장은 국가의 존망은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 듣기에 좋게만 큰 소리를 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귀는 강화가 국가의 존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부모된 자로써 적군이 우리의 어린 자식들을 양떼를 몰고 다니듯이 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있겠느냐”면서, 백성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지키는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이귀는 자신의 주화론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임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처럼 이귀의 주화론 사상은 이념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정치가로서의 책임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주장한 주화론의 밑바탕은 이념보다 국가와 국민을 우선하는 사고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묵재 이귀의 생애와 사상 연구」(이기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