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정(金義貞)


김의정(金義貞)                                                        PDF Download

1495(연산군 1)~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
자는 공직(公直), 호는 잠암(潛庵) 또는 유경당(幽敬堂)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서울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조참판 김양진(金楊震)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허서(許瑞)의 딸이다.
22세(15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고, 32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래 홍문관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청요직’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사헌부의 장령 1인, 홍문관 당하관 12인, 이조전랑 6인, 예문관 한림 8인을 지칭한다. 이들은 결코 품계가 높지는 않았으나 고위직 관리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었다. 이 자부심의 배경에는 탐관오리의 자손이 후에 혹 사면을 받더라도 절대로 오를 수 없는 관직이라는 점도 한몫을 하였다. 그래서 2품(육조판서)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해도 청요직을 제대로 수행한 조상이 있다면, 그 가문은 명문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백성과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김안국(金安國), 이행(李荇)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때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김안로(金安老)와의 악연으로 인해 정치적 좌절을 겪었으며, 심정(沈貞)의 집안과 혼인한 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심정은 당시 신진사류들과 대립하던 훈구세력이었다. 심정이 1515년 이조판서에까지 승진하였으나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삼사’는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하여 부른 말로, 언론삼사(言論三司)라고도 한다. 또한 1518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들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어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인 정국공신(靖國功臣)도 삭탈되었다.
이에 심정은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던 중 1519년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말을 퍼트리며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사류들을 숙청했다. 1527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나, 복성군(福城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강서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이항(李沆)․김극핍(金克)과 함께 신묘3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김의정은 인종(仁宗)의 동궁 시절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지낸 것을 인연으로 인종이 즉위하자,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종이 즉위한지 7개월 만에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하여 스스로 ‘잠암’ 또는 ‘유경당’이라는 호를 하며 지내다가 병을 얻어 삶을 마쳤다. 경상도 예천군 광석산 선영에 묻혔다.
김의정은 조선 중기 뛰어난 문장과 의로운 삶의 행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훈고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네 차례의 사화(士禍)가 일어났던 혼란기였다. 사림들이 화를 당한 사건이라는 뜻으로 ‘사화’라고 부른다. 연산군 대부터 명종 대에 이르는 60여 년간의 기간은 사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김의정은 『소학(小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학문에 힘썼으며, 평생 의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창작한 문학작품에는 이러한 그의 학문과 의리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김의정의 삶과 문학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남곤(南袞, 1471~1527)은 김의정의 뛰어난 재주를 후진 문학자들 가운데 제일로 꼽았으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김의정의 문장과 절의는 세상에 영원히 전해져야 할 것이라고 칭송하였으며,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김의정을 상서로운 세상에 높이 나는 봉황에 비유하였다. 아울러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김의정의 「천형부(踐形賦)」에 대해 문장과 논리가 모두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였으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은 「기강부(紀綱賦)」에 대해 작품의 논리가 매우 훌륭하니 평소 실천의 독실함을 볼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여기서는 김의정이 특히 부(賦)의 창작에 탁월했다는 평가에 근거하여, 그의 ‘부’ 작품을 소개한다.
김의정의 ‘부’ 작품에는 유가적 도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곳곳에 드러난다. 김의정의 부 작품에 나타나는 유가적 도리의 실천의지는 쉼 없는 공부를 통해 축적한 학문적 소양이 그의 작품 속에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의정의 부를 ‘수신(修身)의 의지’라는 주제에 기초하여 살펴본다.
‘수신’은 유가적 실천항목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고, 『대학』의 팔조목에 의하면 수신을 위해 이루어야 할 공부가 격물․치지․정의․정심이다. 『대학』은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로, 그 내용은 크게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으로 나눌 수 있다. 삼강령은 밝은 덕을 밝히고(明明德), 백성을 친애하며(親民), 최고의 선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을 말한다. 또한 팔조목은 사물에 나아가는 격물(格物), 지식을 이루는 치지(致知), 뜻을 진실하게 하는 성의(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正心), 몸을 닦는 수신(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제가(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治國),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김의정은 이 항목들의 중요성과 실천의지에 대해 여러 작품에서 언급하였다. 「환우부(寰宇賦)」에서는 우주의 진실하고 쉼 없는 운행을 본받아 인간도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 자강불식의 자세로 마음을 수양하여 중화(中和)를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중화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써, 감정이나 성격 등이 지나치거나 치우치지 아니함을 말한다. 희로애락(喜怒哀樂), 즉 기쁜․성냄․슬픔․즐거움의 감정이 아직 사람의 행동에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 하며, ‘화’는 그러한 것이 이미 행동으로 나타나 절도에 맞음을 말한다. 이러한 중화의 덕이 지극히 이루어지면, 세상이 안정되고 만물이 모두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또한 「뇌전부(雷電賦)」에서는 번개나 우레와 같은 외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동요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의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는 것에서 비롯함을 피력하였다. 「방예부(放麑賦)」에서는 선행을 베풂에 시비판단이 명확하게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격물․치지와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검각부(劒閣賦)」․「무광지자황부(務廣地者荒賦)」 등에서는 통치자가 수신을 이루어 덕치(德治)를 시행해야만 국가를 온전하게 통치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천형부(踐形賦)」는 『맹자』「진심(盡心)」에 보이는 “사람이 지닌 형색(形色)은 천성(天性)이니, 오직 성인의 경지에 이른 뒤라야 형색을 실천할 수 있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可以踐形.)라는 말에 착안하여 창작한 것이다. 조광조의 논평을 참고하면, 이 작품의 창작 시기는 그의 나이 19세 이전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음양의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을 그대로 품부 받은 인간은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이지만, 각자 자신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품부받은 대로 살아가지 못함을 개탄하며, 동시에 천형(踐形)을 실현할 것과 나아가 정심(正心) 공부를 통해 본성을 보존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형색이 바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니,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각자의 형색을 발현하는 것이다. 우리 몸에 있는 눈․코․입․귀는 각각 나름의 기능이 있으니, 어느 하나 헛되이 있는 것은 없고, 그것 자체가 바로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도덕적 준칙이다. 그러므로 나의 형색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의정은 맹자가 언급한 ‘천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천형’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 하여 본성을 보전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컨대 스스로 법도를 다해야 하니, 어찌 꼭 형체를 실천할 필요가 있으랴? 진실로 나의 이 본성을 다한다면, 형체가 저절로 따라서 드러나리라. 형체는 드러나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이치는 묘하게 숨었으니 마음으로 터득해야 한다오. 마음에서 찾지 않고 형체에서 찾는다면 또한 덕을 다할 수 없다네. 천(踐)이라는 한 글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 아니네. 이것은 없는 것을 책하여 있기를 바라고, 고요한 것을 두드려 소리를 얻음과 같다오. 돌아보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 뜻이 더욱 깊다네. 실천하면 참다운 내가 있고, 실천하지 않으면 참다운 내가 없다네. 마음을 따라 사지(四肢)를 관장하여야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한 뒤에야 터럭 하나와 머리칼 한 올도 혼연하여 나의 마음을 막지 않으리니. 저 신령한 혼(魂)이 백(魄)을 떠나면 마음이 멋대로 날아가 방종하고, 오직 육체만이 홀로 남아서 마치 빈산의 말라죽은 나무와 같네. 비록 귀와 눈으로 보고 듣더라도 모든 이들은 그것이 빈껍데기 인줄 안다네. 나는 이를 슬퍼하고 두려워하여 이 가르침을 지켜 날마다 살피노라.”

사람이 타고난 형색(품성)을 실천하고 본성을 지극히 해야 함을 강조한 부분이다.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보존한다면, 형색은 저절로 발현될 수 있다. 마음을 보존하지 못한 형색은 방종하게 되고, 그것은 마치 텅 빈 산의 말라죽은 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비록 사람의 형체는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 실상은 한 덩어리 혈기로 이루어진 몸뚱이일 뿐이요, 물건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바로 하지 못하여 본성을 보존하지 못하게 됨은 그 무엇보다 애통한 일이다. 때문에 김의정은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자신을 성찰할 것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김의정의 부는 어려운 시어를 구사하지 않고, 경전의 내용을 쉽게 풀이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광조는 이 작품의 문장과 논리를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한 것이다.

[참고문헌]: 「잠암 김의정 賦문학 연구-작품에 형상화된 주제 의상을 중심으로-」(김진경, 『우리어문연구』38, 우리어문학회,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