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李潑)


이발(李潑)                                                             PDF Download

1544(중종 39)~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이발의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菴)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 이중호(李仲虎)는 예조참판․전라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어머니 해남윤씨는 최산두(崔山斗)․유성춘(柳成春)과 더불어 호남 3걸이라고 불리는 윤구(尹衢)의 딸이다. 1544년(중종 39)에 해남의 백련동 외가에서 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윤의중(尹毅中)의 사위이며,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고모부이다. 이발의 처조카인 윤선도는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음에도 연루되어 온 가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에 서인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을 품게 된다. 정여립 옥사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도 부른다. 기축옥사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발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 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1568년(선조 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9월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호당은 독서당으로, 조선시대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건립한 전문 독서연구기구이다. 그 뒤 이조정랑․대사간․대사성․부제학 등을 역임한다. 경학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아 선비들의 여론을 주도하고, 임금이 공부하는 곳인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왕도정치를 제창하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한다.
왕도정치는 맹자(孟子)가 주장한 정치사상이다. 무력이나 강압과 같은 물리적 강제력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도덕적 교화를 중시하는 정치를 말한다. 맹자는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게 되고,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진심으로 따르게 되니, 덕에 의한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유가들이 가장 이상으로 삼았던 정치사상이다.
조광조의 지치주의란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조광조가 추구한 이상적 정치이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치’란 『서경』「군진(君陳)」편 ‘지치형향 감우신명(至治馨香 感于神明)’에서 따온 것이다.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신명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지치’가 조광조에 의해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실천운동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유가에서의 이상사회는 하나라․은나라․주나라의 삼대를 가리킨다. 따라서 지치주의란 이상적 정치이념으로써 당시의 백성들을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삼대의 백성들로 만들려는 이상정치의 현실적 실천운동이다. 『서경』은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이다. 사서삼경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데, 사서는 『대학』․『논어』․『맹자』․『중용』을 말하며, 삼경은 『시경』․『서경』․『주역』을 이른다.
이조전랑으로 있을 때에는 자파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발은 1589년(선조 22)에 기축옥사로 교외에서 ‘죄를 기다리던’ 중 잡혀서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그해 12월에 매에 맞아 죽었다. 동생 이급(李洁)도 연좌되어 죽었고, 그의 82세 노모와 10세의 아들도 이때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이발과 이길의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이들의 죽음은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더욱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죄를 기다리는 것’은 보통 석고대죄(席藁待罪)라고 부른다. ‘석고대죄’는 죄지은 사람이 거적에 꿇어앉아 윗사람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처벌을 자청하는 것이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저놈에게 곤장 백 대를 쳐라.” 이런 처분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석고대죄는 보통 속옷 차림에 가깝도록 의관을 벗고 하는데, 몹시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큰 벌이다. 죄를 처분할 사람이 결단할 때까지 밤이 깊든, 눈비가 오든 그대로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 정조의 아버지이고, 회고록인 ‘한중록’을 남긴 혜경궁 홍씨의 남편이며, 아버지(영조)와의 갈등으로 뒤주에서 굶어죽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석고대죄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인조 2년(1624) 동생인 이길과 함께 죄가 면해지고 관작이 복원되었으며, 몰수한 재산은 되돌려졌다. 숙종 26년(1694)에는 이발과 이길의 절개와 행실을 기려 그 옛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정문’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다.

여기서는 이발의 학문경향을 동인과 서인의 분당, 나아가 남인과 북인의 분당을 둘러싼 논점을 통하여 소개하겠다. 즉 성종(成宗)대 이래 비교적 단일한 색채를 유지하던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다시 동인이 각각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원인이 무엇인지를 이들의 학문경향과 연결시키겠다는 것이다.
분당의 원인은 야사(野史)에서 전해지듯, 단순히 서로 간의 사사로운 감정 대립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파와 학파 사이의 갈등과 투쟁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각각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거나 또는 학문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16세기는 주자학에 입각한 유교적 가치관과 도덕규범이 보편화되는 시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자학 이외에 다양한 학문경향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즉 주자학적 사유체계의 정착과 함께 새로운 사유체계의 모색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시기가 주자학의 강경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사회․경제의 발전과 시대상황이 변동됨에 따라, 주자학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대응방법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비(非)주자학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대응방법에 대한 지식인들 내부에 이견이 생기는데, 이것이 결국 정치입장과 정치이념의 차이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 학문의 공통분모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이었다. 그러나 학자와 학파에 따라 이기설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달리하고, 궁극적으로 주자학과 비주자학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학문경향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서인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그 중심으로 하였으며, 동인은 이들에서 제외된 다양한 학파의 집합체였다. 동인 내부에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그리고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이들이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다. 때문에 이황과 조식 또는 이황과 서경덕의 사상적 차이가 제자들에 이르러 표면화되고, 급기야 중앙정계에서 남인과 북인이라는 두 세력으로 갈라지게 된다.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인’의 동질성은 더 이상 부각되지 않게 된다.
북인의 학문적 연원이라 할 서경덕과 조식은 기적(氣的) 사유에 기초하여 정치․사회의 운영론을 모색한다. 서경덕은 성리학 이해에 있어서 주희의 입장보다는 소옹(邵雍)과 장재(張載) 등 북송 성리학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여 세계의 시원과 운동의 원리를 ‘기’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 세계관을 체계화한다. 이것은 당시 조선학계에 존재하고 있던 다양한 형태의 기적인 사유를 종합하고 체계화한 것으로서, 이선기후(理先氣後)․이본기말(理本氣末)에 입각하여 ‘리’를 사상의 중심에 세우는 주자학(=이학)과는 그 근본에서부터 성격을 달리하는 사유이다. 이에 바탕하여 서경덕과 그의 후학들은 다양한 형태의 기론적 사유를 수용하는데, 이들이 대부분 소옹의 상수학(象數學)에 밝으며, 노장사상이나 양명학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조식의 학문도 서경덕의 학문과 유사한 면모를 지닌다. 그가 노장학을 숭상한다거나 양명학을 수용하였다는 세간의 평가는 ‘기’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사상적 면모를 부각시킨 것이라 하겠다.
북인은 대체로 서경덕과 조식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서울․호남과 경상우도 지역을 근거지로 학문 활동을 펼친다. 이들은 서경덕과 조식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들이거나 혹은 재전 제자들이다. 호남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발은 모두 서경덕의 학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발은 서경덕의 학문에 연원을 둔 김근공(金謹恭)․민순(閔純)의 문하에서 배웠고, 부친인 이중호 또한 민순에게서 배웠다. 이발의 친구이자 사돈인 홍가신(洪可臣) 또한 민순의 제자였다. 또한 이발은 조식의 고제인 최영경(崔永慶)과 가장 친하였으며, 직접 최영경과 정여립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이발과 사승관계나 친교를 맺는 인물 중 김근공․민순․홍가신은 서경덕 문인이며, 최영경․김우옹은 조식 문인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발은 비록 조식과 직접적인 사승관계에 있지는 않았지만, 조식의 문인들과 학문적 교류가 왕성하다. 이렇듯 이발은 서경덕 문인과 조식 문인과 고르게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이발의 학문이 서경덕과 조식 학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서인들이 정여립 역모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은 북인계의 주요 인물을 처벌하여 그들의 정치력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인 내부에 존재하는 비주자학적 학문경향을 척결하는데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남인들은 서인의 옥사처리를 관망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북인세력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발이 정여립을 이조전랑으로 추천하였을 때, 이황의 문인인 이경중(李敬中)은 정여립의 사람됨을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시킨 일이 그것이다. 예컨대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 역모에 대해, 유성룡 등 남인은 정여립이 일찍부터 ‘훌륭한 선비(善士)’가 아님을 알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반면 정여립을 ‘아름다운 선비(佳士)’로 추대했던 이발․정인홍․정언신․백유양 등 북인은 역모가 조작된 모함이라는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
정여립을 둘러싼 학자들 간의 상반된 평가는 남인과 북인 붕당의 중요한 빌미가 된다. 서인들은 정여립을 역모 혐의와 별개로 사상적으로 주자학을 벗어난 이단(異端)적 인물로 평가한다. 또한 남인들도 정여립을 ‘훌륭한 선비’가 아닌 인물로 경시한다. 이처럼 정여립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친화적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마도 조식․서경덕 학파에 비해 이황학파가 이이․성혼학파의 주자학적 정치론을 공유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볼 때, 북인과 서인, 북인과 남인이 서로 대립하는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정여립을 둘러싼 정치적․학문적 견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기축옥사에서 북인이 많이 죽은 것은 정여립이 북인이었기 때문이다”라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여립은 북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때문에 정여립에 대한 상반된 입장은 단순히 정여립 개인에 대한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내포하는 북인의 학문이나 정치사상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인은 학문방법, 정치론, 현실인식 등에서 서인은 물론 남인과도 서로 대비되는 모습을 강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이로써 기축옥사는 북인과 서인뿐만 아니라, 북인과 남인 간의 정치적․학문적 특성을 명확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서경덕․조식의 기론적 사고에 근거한 정여립의 사상과 그 사상에 동조하는 북인은 이이학파의 서인이나 이황학파의 남인과는 달리, 주자학과는 다른 정치성향을 모색한다. 이발의 학문 또한 이러한 ‘기’를 중심으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주자학 이외의 다른 학문까지도 폭넓게 포용하는 비주자학적 학풍을 견지한 북인의 학문적 전통 속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이발은 서경덕․조식의 학풍 속에서 당시 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정국의 실천방안을 모색하였던 북인의 대표적인 학자요 관료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동암 이발의 학문경향과 정치활동-청신정치의 청산을 둘러싼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심으로-」(김정신, 『호남문화연구』46, 호남학연구원,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