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량(閔晉亮: 1602-1671)


민진량(閔晉亮: 1602-1671)                                 PDF Download

 

1635년(34세) 인조 13년 진사가 되었다.

1636년(35세) 목릉 참봉(穆陵參奉)으로 등용되었다. 그 뒤 기린도 찰방, 직장, 의금부 도사를 맡았다.

1646년(45세) 인조 24년 석성 현감(石城縣監)이 되었다.

그때 호서 지방에 도둑이 많아 양민들이 괴로움을 당하던 것을 토벌하였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특진되었다.

난을 일으킨 자가 은진(恩津), 연산(連山), 이산(尼山) 세 고을 사이에 많이 있었으므로 조정에서 드디어 세 고을을 없애고 그 땅과 백성을 합하여 특별히 은산 현감(殷山縣監)을 두니, 그때의 의논이 신구(新舊)를 어루만져 어거하는 데에는 민진량보다 나은 자가 없다 하여 제수하였다.

이 지역에 신독재 김집, 백분 윤원거, 여망 윤문거, 길보 윤선거 등이 있었으므로 문하에 출입하여 충분히 수양되어 순량(循良)할 뿐이 아니었다.

아버지 민성휘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관소(館所)에서 작고했다. 김집이 가서 곡조(哭弔)하고 변례(變禮)에 분상(奔喪)하는 것을 지도했는데, 성실하게 이행했다. 상이 끝나자 성천도호 부사가 되었다.

성천에 있을 때에 청나라 사신 정명수는 본디 우리나라 사람인데, 민진량에게 성내어 군졸을 시켜 구속해서 그 앞에 데려오게 했다. 종전에 이런 일을 당하면 으레 달아났고 조정에서는 그 직임을 파면하여 미봉했었다. 민진량이 말하기를 “달아나는 것은 용감한 짓이 아니다.” 하고 군졸을 꾸짖어 물리치고 곧바로 들어가 꼿꼿이 서서 눈을 부릅떠서 정명수를 보았다. 정명수가 놀라서 말하기를 “이는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는 자가 말하기를, “작고한 판서 민성휘의 아들입니다.” 했다. 정명수가 말하기를 “그는 일찍이 나를 죽일 뻔한 자인데 그 아들도 이러하다.” 하고 마침내 감히 욕보이지 못했다. 듣는 자가 다 놀랐다.

파주 군수로 나아가 황폐된 율곡 이이의 사당을 보수하는 등 선정을 베푸니 군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공덕을 기렸다.

당시 이 고을에 사나운 아전이 있었다. 민진량이 강직하고 명석한 것을 꺼려서 그 무리와 약속하고 함께 흩어져서 일을 못하게 했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촌민(村民)과 사령(使令)을 불러서 말하기를, “달아난 자의 전토(田土)는 장차 관가에서 걷어 들여 품삯으로 충당하겠다.” 하니, 열흘이 못되어 도로 모여왔다. 죄를 묻지 않고 안정시켰다. 이임한 후에 군민(軍民)이 각각 비석을 세워서 덕을 기렸다.

그 뒤 양주군수를 거쳐 태안군수가 되어 힘을 기울여 황정(荒政)을 극복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내직인 첨지(僉知)·위장(衛長) 등을 거쳐 재령·한산의 지방관이 되어 청렴한 수령으로 널리 알려졌다.

죽산·남양·봉산 등의 수령으로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만년에 선영이 있는 곳에 움막을 짓고 벽에다 ‘爛柯齋(난가재)’라는 편액을 걸어놓고 시서(詩書)를 탐구하였다.

송시열이 지은 비문에 위인을 설하고 있다. 그 중 한 대목이다.

“공은 성품이 깨끗하여 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벼슬살이는 주로 청렴하고 엄숙하게 하였으므로, 갈려서 돌아올 때에는 행낭이 씻은 듯이 비어 있었다. 곤궁한 사람을 돌보고 구제하는 데에는 아끼는 것이 없었으며, 혹 노비나 토전(土田)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다 주며 말하기를, ‘산업 때문에 남과 다투는 것은 내 수치이다.’ 하였다.”

<참고 문헌>

국역 국조인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