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여흥(高汝興: 1617-1678)


고여흥(高汝興: 1617-1678)                                 PDF Download

 

고여흥은 본관이 제주이고 자는 빈거(賓擧)이며 호는 요은(鬧隱)이다. 아버지는 고수겸(高守謙)이다. 학문이 깊고 행실이 올곧아 존경을 받았다.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학문연구에만 바쳤다. 호남(湖南)의 흥덕(興德)에서 살았다.

1625년(9세) 인조 3년 내장사에 들어가 학승 계묵(戒默)에게 글을 배웠다. 당시 하루에 겨우 두서너 줄을 배웠는데, 종일 단정히 앉아 글을 읽으므로 계묵이 크게 기특히 여기고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뒷날 반드시 큰 선비가 되겠구나.” 하였다.

소년이었을 때에 여력(膂力, 육체적인 힘 혹은 근육의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더러 무술을 배우도록 권하자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1628년(12세) 어머니가 죽자 어른같이 슬퍼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이후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마을 서당에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등을 배웠다.

후에 아버지가 다시 조씨(趙氏)에게 장가들어 자식이 많았으므로 이르기를, “너는 이미 내실(內室, 아내)이 있으니 형세로 보아 모름지기 분가하여 살아야겠다.” 하자, 민망스럽게 여겨 울먹였지만 감히 어기지 못하고 1리 밖의 별서(別墅)에 살게 되었다. 닭이 우는 새벽이면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달려가서 두 손을 마주잡고 문 밖에 서서 부모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밤사이의 안부를 묻고 침구를 정돈한 뒤에 부엌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살펴보다가 부모가 식사를 끝낸 뒤에 곧장 자기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식사가 끝나면 또 달려갔다. 저녁에 이르러서는 부모가 굳이 물러가라고 명하면 잠깐 뜰 아래로 내려가 부모가 잠이 든 것을 안 연후에야 감히 돌아왔는데, 수십 년 동안을 이렇게 하면서 혹독한 추위나 무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으니 원근(遠近)에서 보고 듣는 자로 부러워하며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636년(20세) 계묵이 죽자 여러 해 글을 배운 정리로 심상 3년을 지내며 나물 반찬만으로 식사를 했다. 재일(齋日)에는 매번 공양하는 기구를 소매에다 넣어 가지고 직접 가서 재를 도우니 식견이 있는 이들도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 여겼다.

1659년(43세) 효종이 승하하자 심상 3년을 하며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이 감탄하며 “심복하였다.” 했다.

1662년(46세) 현종 3년 아버지가 죽자 죽만 먹고 가례에 따라 장사를 지내고,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슬피 울면서 3년 동안 성묘를 계속했다. 상기(喪期)가 끝난 뒤에 여러 동생들과 재산을 나누었다.

고여흥이 어머니를 여윈 뒤에 외할머니의 양육을 받았는데, 외할머니가 공을 위하여 재산을 증식하여 못 아래의 좋은 논을 사서 준 것이 있었다. 이때에 여러 동생에게 나누어 주자 새어머니 조씨가 크게 놀라며 즐겁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조씨를 섬기고 여러 동생들에 대한 우애는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어서 조씨가 감동하며 기뻐하여 자애로운 애정이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지나쳤다.

1665년(49세) 노서 윤선거가 노성(魯城: 논산)에서 강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짊어지고 가서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성리서를 읽으며 그 뜻을 속속들이 파고들어 깊게 연구하므로 윤선거가 감탄하며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먼 시골에서 태어나 스승이나 벗의 도움이 전혀 없었지만 스스로 분발하여 성현을 우러러 사모했다. 윤서거를 찾아 뵌 뒤로 더욱 이 학문을 즐길만하다고 믿고서 오로지 자신에게 필요한 실천을 업무로 삼았다.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두 책을 즐겨 읽으며 그 뜻을 연구하기를 힘써서 행동으로 옮기려고 했다. 입으로만 읽으며 마음으로 체득하지 않아 한갓 앵무새처럼 말만 늘어놓는다는 비난을 받은 자와는 같지 않았다.
동문인 명재 윤증을 비롯하여 매당 서봉령, 서촌 백문옥, 임사가, 권덕수, 김덕중, 최사중, 이수약 등과 교유하며 학덕을 높였다.

1666년(50세)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심상 3년으로 양육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1669년(53세) 윤선거가 세상을 떠나자 삼 띠를 두르고 기년복을 입었다. 그 뒤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고여홍은 비록 산림에 묻혀 세상에 쓰이지 않았으나, 안빈낙도하며 학문에 전념하여 「오경대지도(五經大旨圖)」,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천인이기도(天人理氣圖)」, 「대학지도(大學之圖)」, 「중용지도(中庸之圖)」 등을 그림으로 체계화하고 그 깊은 내용을 설명하였으니, 그가 성리학에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명재 윤증이 위인의 실상을 잘 설한 묘비명을 남겼다. 중간의 내용을 전재하면 이렇다.

“공의 용모는 돈후하고 질박하며 타고난 성품은 순박하고 확실하여, 내용이 외관보다 낫고 행실이 말보다 초과하니 아마 성인(聖人)이 일컬은 바 선인(善人)인 듯하다. ……

평소 기거에 조용히 생각하는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앉아 말과 웃음이 때가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규정이 늙어서도 엄격했다. 가난을 달갑게 여기고 깨끗함을 지키면서 그 일생을 마쳤다.

그의 가슴속은 맑고 욕심이 없었으며 평소에 수석(水石)을 좋아하여 거닐면서 시를 읊고 휘파람 불며 속세를 멀리 벗어나려는 뜻이 있었다.

만년에 덕행과 기국이 이룩되고 안정되었으며 행동거지가 온화하고 여유가 있었다. 기거하는 곳에 현인(賢人)이나 어리석은 이 할 것 없이 모두 공경하며 친애했다. 그가 이르는 것을 보고는 모두 기뻐하면서 받들어 영접하면서 다투어 인정을 다 펴려고 하였었다.

일찍이 학생들과 홰나무 아래 앉아 홰나무 가지를 쳐다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달라지는 이치가 이와 같다.’ 하였으니, 그의 말이 사물에 연관을 둠이 이런 등류였다.

공에게 종유(從游)하는 자 역시 듣고 말만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실제 행동하는 것을 숭상할 줄 알았으니, 이는 공이 마음속으로 체득하여 겉으로 나타내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고을 사람이 여러 차례 공의 대단히 애를 쓰며 돈독히 한 전후의 지극히 훌륭한 행실을 가지고 방백(方伯)에게 추천하고 알렸지만 가장 낮은 벼슬도 끝내 이르지 않았으니, 아! 이것이 어찌 공에게 보탬이 되거나 손상이 되겠는가? ……

아! 빈거는 옛날의 학자와 같도다. 덕행과 의리 안으로 채웠고 기호와 욕심 밖으로 줄였네. 평생토록 분수를 지켜 구함도 탐냄도 없었도다. 아! 이런 사람이여 누가 장차 짝할 것인가? 선한 이에게 꼭 상서가 있다는 자연의 이치 어긋나지 않을 걸세. 내가 그의 묘에다 명을 지어 후세 사람에게 힘쓰게 하노라.”

<참고 문헌>

국역 국조인물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