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장(宋斗章: 1634 ∼ 1671)


송두장(宋斗章: 1634 ∼ 1671)                                 PDF Download

 

송두장은 진천 송씨로 조부 송영준(宋英俊)은 진사로 시에 능하여 명성이 있었으나 일찍 졸했다. 부친 송방지(宋方知)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어 호방하여 얽매이지 않았으나 재주가 뛰어났으므로 식자들이 많이 칭송했다. 모친은 영월 엄씨(寧越嚴氏)로 군수(郡守) 엄열(嚴悅)의 딸이다.

1636년(3세)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슬퍼할 줄 알았다. 어머니가 곡하는 것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지 않았으므로 사람마다 기특하게 여기었다.

송두장이 겨우 10세에 생각하는 바가 깊어 도량이 있었다. 어머니가 ‘아들이 외롭게 의지할 데가 없는데다가 시골의 풍속이 무지 몽매하여 오래도록 살 수 없다’ 여기고 나머지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참의 송시철(宋時喆)과 판관 송명규(宋明奎)에게 글을 배웠다. 모두 송두장의 친척이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공부가 날과 달로 진취되었다.

1656년(23세) 효종 7년, 노서 윤선거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송두장이 장성하자, 개연(慨然)히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 말하기를, “군자가 덕을 수립하는 것은 자신의 몸에 달려 있으므로 고원하여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세속의 무리들은 모두 과거 공부에 골몰하여 다른 도리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으니, 이게 두려운 일이다.” 하고 윤선거의 문하에 나갔다.

송두장이 글을 널리 읽지는 못하였으나 견식이 이미 통달하여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었으므로 윤선거가 기특하게 여기고 그의 아들 윤증과 함께 거처하며 공부하도록 했다. 윤선거가 말하길, “자네는 다른 형제도 없이 편친(偏親)을 모시고 있으므로 매양 편친의 곁을 떠나 먼 곳에 가서 유학할 수 없다. 그러나 학문이 중간에 끊긴다면 또한 애석하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자네가 화숙 박세채와 같은 마을에 산다고 하니, 찾아가 강론하여 자신보다 나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소학(小學), 가례(家禮),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네 가지 글은 선비로서 일찍부터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이 네 가지 글 속에 있다.” 면려했다.

조석으로 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리고 박세채를 찾아 학문을 강론했다. 또한 해마다 윤서거 강학처에 와서는 동류들과 함께 교유하며 산방(山房)이나 원재(院齋)에 같이 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조정에서 유학을 숭상하자 선비들이 모두 바라보고 흥기하여 선배들의 문하에서 노니는 자로서 왕왕 내실은 기하지 않고 외식만 일삼아 곧바로 세상에 나갔다. 송두장은 그들을 비루하게 여기고 외부의 사물을 마음속에 두지 않은 채 오로지 들은 바를 귀중히 여기고 아는 바를 실행하는 데 힘썼다.

1669년(37세) 현종 10년 스승 윤선거가 졸하자 빈소(殯所)를 지켰고 발인(發靷)할 무렵에 가을장마가 연일 져서 진흙탕으로 뒤범벅이 된 길에 나서서 친히 상여 줄을 잡고 따라갔으며, 장사지내는 갖가지 일까지 시종 주관하였는가 하면 반혼(返魂)할 때 또 따라와서 졸곡(卒哭)이 지난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정성을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었다.

1671년(39세) 5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윤증이 도반이었던 송두장을 기리며 쓴 행장의 말미에 쓴 총평을 전재한다.

“아! 송 군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취향이 고매하였다. 학문을 할 적에 먼저 큰 뜻을 얻었기 때문에 중심에 주관이 있어 외부의 사물에 매혹되지 않았다. 기개가 높아 세속의 무리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으며, 과장하고 허당스런 세상 사람을 보면 대뜸 비루하게 여겨 배척하면서 심지어 같이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사람을 살펴보고 말을 듣고서는 진위(眞僞)와 허실(虛實)을 분변하여 취사(取捨)를 결정하였는데, 실정에 안 맞은 적이 드물었다.

아! 하늘이 수명을 더 주지 않아 송 군으로 하여금 함양의 공부를 쌓아 뜻한 바를 성취하지 못하게 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아! 운명인가 싶다.

내가 송 군과 사귈 적에 비록 글을 강습(講習)한 공부는 내가 조금 나았으나 견식과 기획에 있어서는 그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으므로 항상 두렵게 생각하였다.

또 만년에 동거(同居)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중간에 서로 헤어져 나로 하여금 서글프게 의지할 데가 없게 되었으므로 마무리 짓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송군을 생각하며 개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송문수가 나에게 송 군의 행장(行狀)을 써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내가 노쇠하고 병든 바람에 정신이 혼미하여 평생의 말을 다 쓰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나중에 죽은 사람이 해야 할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이에 화숙(和叔)에게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였으니, 마땅히 발휘(發揮)한 바가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국역 국조인물고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