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량(申湸: 1596 ∼ 1663)


신량(申湸: 1596 ∼ 1663)                                 PDF Download

 

신량은 본관이 고령(高靈)이고 자는 양지(湸之)이며 호는 호은(湖隱)이다.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신벌(申橃)이고 아버지는 좌부승지 응구(申應榘)로 학문과 덕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 세상에서 만퇴 선생(晩退先生)으로 불렸다. 신량의 아들이 숙종때 노론의 영수의 담당했던 성재 신익상이다.

어렸을 때 온화하고 순수하며 총명하여 보는 사람들이 옥 같은 사람이라 일컬었다. 이를 갈 무렵에 조수륜의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기특히 여겨 사랑하였다. 그때 마침 예조(禮曹)에서 강경(講經)의 시험을 보였는데 외우고 행동하는 바가 엄연히 성인과 같았다. 온 예조의 사람들이 경이롭게 여겨 너나없이 혀를 내둘렀으며 강이 끝나자 대학(大學)을 주었다.

조금 장성하여 글을 저술할 적에 재주와 격식이 출중하였으므로 창랑 성문준이 독서할 때 일곱 가지의 비결을 써서 주었다. 성문준은 우계 성혼의 아들이다.

1605년(15세) 사마시에 합격하자 명성이 더욱 더 드러났다. 자신을 귀중히 보호하는 데 힘쓰고 한 가지 기예를 가지고 자긍심을 가지지 않았다.

일찍이 시험을 보러갔을 적에 초고를 미처 다 쓰기도 전에 해가 저물어지자 종이를 접어 행낭에다 넣었다. 어떤 사람이 신량을 위해 써주려고 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무릎을 치며 비범한 선비인 줄 알았다.

약관에 더불어 노니는 사람들이 모두 당시의 유명한 선배였다. 큰 외숙인 추탄 오윤겸과 상촌 신흠이 깊이 기대하고 허여하였다.

1623년(33세) 인조 1년 부친상을 당했다. 상복을 벗자 사산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그만두었다. 그 뒤 우수운 판관, 한성부 참군, 공조 좌랑, 구례 현감을 역임하고 몇 년 있다가 버리고 돌아왔다.

조정에서 누차 익위사 익위, 금산 군수, 호조 정랑, 태안 군수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혹시 애써 부임하였다가도 좋지 않은 일을 만나면 또한 하루가 가지 않아 그만두었다. 항상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벼슬을 한 것은 제사를 지내어 소급해 봉양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처자를 돌아보겠는가.” 했다.

청음 김상헌이 평소 애지중지하여 이조에 있을 적에 발탁하여 쓰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효종 초기에 조정에 있는 두세 명의 원로들이 번갈아 추천하여 대성(臺省)에 두려고 하자, 좋아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는 또다시 나를 가지고 세상을 기만하려고 한단 말인가?”했다. 그 뒤 영천 군수, 안산 군수에 임명되자 모두 사양하지 않고 부임함으로써 명예를 회피하였다.

1657년(61세) 효종 6년 해주 목사, 담양 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일찍이 윤순거(尹舜擧)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이제부터 성남의 골목에서 문 닫고 있으니 엊그제 육십 년이 잘못된 걸 깨달았네[從今閉戶城南巷 六十年來悟昨非]”라고 했다. 그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 뒤로 군기시 정, 제용감 정, 군자감 정, 예빈시 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얼마 안 되어 사직했다. 재차 제용감 정에 임명되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지금 나이 칠순에 가까운데 다시 관록에 얽매어 만년의 수치를 증가시킨단 말인가?” 하고 사양했다.

박세채가 쓴 비명이 신량의 위인을 잘 설명했다. 그 내용을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

“공의 위인이 청명하고 단아하며 행동이 단정하였다. 젊어서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받아 동정에 배어들었고 마음을 간직하고 몸을 가다듬어 시종 쉬지 않았다. 스스로 말하기를 ‘아이 때 성균관에 들어가 우연히 손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어떤 어른이 불러서 말하기를 단정히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걷는 것이 바로 너의 가문 법도이다 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깨달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했다.

만년에 도성으로 돌아와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하고 앉아 시끄러운 일을 사절한 채 심신과 성정을 함양하며 항상 무슨 일을 하는 사람처럼 좌우에 도서와 사서를 놔두고 위아래를 훑어보며 스스로 즐기었다. 그리고 소나무와 화훼를 심어 놓고 그 사이에 학 한 마리를 기르는 등 경관이 청정하여 초연한 산림(山林)의 취향이 있었으니, 여기에서 공의 고상한 풍치를 알 수 있다. ……

벼슬살이하며 일을 처리할 적에 명예에 가까운 것을 경계하였고 부임하는 곳마다 좋은 정사를 펼쳤다. 출처)와 거취를 한결같이 의리에 맞추어 하였고 좋아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매우 분명하였다. 남의 선행을 들으면 나의 선행이나 다름없이 여기고 남의 악행을 보면 나를 더럽힐까 염려하였으며 심술이 나쁜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더욱 더 통렬히 배척하였다.

시대를 걱정하고 풍속을 민망히 여기는 바가 늙을수록 더욱 더 간절하여 말하기를, ‘조정의 기강이 문란 되었고 사대부의 염치가 상실되었으니,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했다. 일찍이 아들들에게 훈계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나는 너희들이 힘쓰기를 원한다. 과거는 급한 것이 아니다.’ 했다.

또 말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마음을 곧고 진실하게 세우고 행실을 구차스럽게 하지 않아야 한다. 정말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게 되어 결국에는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했다. 아들 익상이 과거에 합격해도 기뻐하지 않고 자상하게 더욱 더 권면하였다.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가끔 풍악(楓岳)을 유람하여 평소에 계획한 것을 실천하였으나 저 멀리 천석(泉石)의 사이에서 소요(逍遙)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었다.

젊어서부터 고시(古詩)와 율시(律詩)에 능하여 석주 권필과 구원 이춘원 등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러나 평생 동안 벗들에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드물었으니,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훌륭하다고 하겠다.”

<참고 자료>

국역 국조인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