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규렴(宋奎濂: 1630 ~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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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규렴은 본관이 은진(恩津)이고 자는 도원(道源)이며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다. 할아버지는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송희원(宋希遠)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송국전(宋國詮)이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였는데, 상을 잘 보는 절강(浙江) 사람이 송규렴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아주 귀한 인물이 될 것이다.”고 했다. 안동 김씨 동지(同知) 김광찬(金光燦)의 딸과 혼인하니 청음 김상헌의 손녀이다.

송준길 문하에서 수업할 때 상서(尙書) 기삼백(朞三百)에 이르러 한번 가르침을 받고 막힘없이 통달하였다. 또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주는 가장 읽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몇 번 읽자 외워버렸으므로 재주를 극구 칭찬했다. 송준길이 늘 말하기를, “이 아이의 명성과 지위가 내 밑에 있진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648년(19세)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4년(25세)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예속되었다가 곧바로 사관(史館)에 추천되어 검열(檢閱)로부터 시작하여 봉교(奉敎)에 이르렀다. 출입할 때마다 풍채가 사람을 움직였고 기사(記事)를 민첩하게 하였으므로 효종(孝宗)이 여러 번 가상히 여겼다.

1667년(38세, 현종 8) 사헌부집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홍문관교리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

1674년(45세)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복상문제를 두고 남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고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귀양을 가게 되자 이들의 신원(伸寃)을 주장했다가 파면 당했다.

1680년(51세, 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다시 기용되었다. 이후 사간·수찬·대사간·승지·이조참의·부제학·대사성 등을 거쳐 대사간이 되어 시폐(時弊) 4조를 올렸다. 그 뒤 안변부사·강양도관찰사(江襄道觀察使)·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60세, 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때 이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굳게 눌러 앉아 육정(六丁)도 만회할 수 없는 확고한 용맹을 지니고 영욕과 득실을 초월하여 세상의 때에 물들지 않음으로써 나이가 높을수록 덕도 높아지고 즐겁게 살다가 좋게 세상을 떠났으니, 아니 옛날에 이른바 ‘명철하게 자신을 보존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1694년(65세) 갑술옥사로 정국이 다시 바뀌게 되자 다시 부제학·대사간·대사헌·우참찬·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을 지내고 1699년(70세, 숙종 25)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당시 아들 송상기(宋尙琦)가 주상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었으므로 특별히 몇 단계 초월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 지중추부사·우참찬·예조판서·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80세 때에는 지돈녕부사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송규렴은 만년에는 담담하게 조용히 산데다가 자신을 성찰하여 마음을 간직하고 함양하는 공부를 폐지하지 않았다. 소식(消息)과 영허(盈虛)의 이치와 길흉(吉凶)과 성쇠(盛衰)의 도리에 대해 인사(人事)로 추측하여 사람들이 보지 못한 바를 가끔 혼자 보았다. 대개 소강절의 역수(易數)에서 얻은 바가 깊었다. 송규렴이 말하기를, “나를 쓰면 실행하고 나를 버리면 은둔하는 것은 공자와 안자나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비록 쉽게 말할 수는 없으나 사대부는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했다. 벼슬길에 나간 지 60년 사이에 물러난 때가 많았고 나간 때는 적었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 이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굳게 눌러 앉아 육정(六丁)도 만회할 수 없는 확고한 용맹을 지니고 득실(得失) 영욕(榮辱)의 길을 초월하여 세상의 때에 물들지 않음으로써 나이가 높을수록 덕도 높아지고 즐겁게 살다가 좋게 세상을 떠났다. ‘명철하게 자신을 보존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서적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였으며 특히 사서 오경(四書五經)에 관해 찾아와 물어본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막힘없이 줄줄 대답하여 마치 자신의 말처럼 외웠다. 고금의 사변(事變) 득실(得失)과 문장(文章) 학술(學術)에 대해 시원스럽게 평론하여 꿰어놓은 구슬처럼 정연하였다. 학문이 뛰어나 송시열·송준길 등과 동종(同宗)이자 동향(同鄕)으로 함께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졌다. 전서(篆書)와 주서(籒書)에 능했다.

도암 이재가 지은 묘갈명을 통해 송규렴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 그 대강을 전재하면 이렇다.

‘효종(孝宗)의 시대는 밝고 화목하였다. 공이 그때 벼슬길에 나서니 아름다운 인품이 옥과 같았도다. 사필(史筆)을 날듯이 발휘하자 누차 효종이 눈을 경동했다. 영리(營利)의 길을 뭇사람이 좇아갔으나 도리어 천천히 나아갔다. 초야에서 즐겁게 지내자 임명의 글을 빈번하게 내렸다. 어머니가 있어 늙고 병환이 많다고 사정(私情)을 호소하여 끝까지 봉양하기를 청원했다.

가끔 지방 고을의 인장을 찾으나 벼슬길에 나갔어도 나가지 않은 것과 같았다. 해는 길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는가 하면 시대는 험악할 때도 있고 태평할 때도 있었지만, 한결같이 조정의 표상이 되었기에 정말로 노성인(老成人)이 되었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중전이 폐위되자, 공이 서슴치 않고 조정을 떠나 다시금 돌아오지 않았다. 천운은 다시 회복되었으나 신하의 마음은 철석과 같아, 나의 거문고를 퉁기고 나의 책을 읽는가 하면 나의 논에 벼를 심고 나의 논에 벼를 수확했으니, 자유롭게 소요하면서 영원히 고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나가는 것과 들어가는 것이 고인과 똑같았다.

이미 앞에서 찬란하였고 막판에는 독실했다. 공은 학문이 심오하였으니, 조그만 견해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사라지고 자라는 것과 차고 기우는 것을 혼자 주역(周易)에서 터득했다. 세 조정을 거쳤으나 덕이 온전하고 명예가 완벽했다.’

<참고 문헌>

국역 국조인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