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엽 광해군 시대


17세기 초엽 광해군 시대.

 

해군(1575년∼1641년)은 조선후기의 제15대 임금으로 등극하였으나 궁정에서 발생한 구데타에 의해 끌어내려져 국왕의 칭호를 빼앗기고 왕자 때 받은 ‘광해군’이라 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어 북쪽으로 피난을 가버린 선조를 대신하여 전장에 나가 국난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광해군이 집권한 뒤인 1616년에 후금(뒤의 청나라)이 건국되었다. 이에 그는 명나라와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이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였다. 또 대동법을 실시하고(1608년) 농지조사를 통해 경작지를 넓혀 재정을 충실히 하였으며(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고(1609년), 경희궁(1619년)과 인경궁(1621년)을 중건하는 등 정치적 업적을 쌓기도 하였으나 서인과 남인이 주도한 반란에 의해서 국왕의 지위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1392년∼1897년) 600년은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14세기부터 16세기말까지 약 300년, 후기는 17세기부터 19세기말까지 약 300년이다.
율곡은 1537년부터 1584년까지 살았으니 전기의 말엽에 산 사람이다. 그는 당시 선조 임금을 향하여 줄곧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1582년(선조 15년),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에 올린 상소문 중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지금 전하께서는 폐단이 오랫동안 쌓인 뒤에 나라를 이어받았으니 경장(更張, 낡은 제도 등을 새롭게 고침)할 대책을 강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매번 제도를 개혁하는 일을 어렵게 여기시고 변통(變通, 형편에 따라서 일을 융통성 있게 잘 처리함)해야 한다는 말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계십니다. 비유하자면 오래 묵은 집의 재목이 썩어서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데도, 서까래 하나 갈지 않고 기둥 하나도 고치지 않고서 앉아서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진시폐소(陳時弊疏)」, 『율곡전서』권7)

율곡은 당시 조선의 상황이 “폐단이 오랫동안 쌓인 뒤”이며,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데”, “앉아서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선조가 개혁의 정치를 추진하려고 하지 않으니 다소 과장하여 이러한 건의를 하였겠지만, 사실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너무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바로 10년 뒤에 일본의 침략상황을 염두에 두면 그렇다.
일본의 침략이 오직 일본만의 책임일까? 침략을 하도록 수많은 허점을 조선은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외국의 침략을 경계하지 않고 내부의 당파싸움에만 몰두하고, 군대의 정비나 개선은 멀리하고 국민들의 삶은 피폐한 채로 놔두고 외면하고 있지 않았는가? 조선은 건국된 이후 300여년 가까이 지나면서 금방이라도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이 율곡의 상소문에 절절히 드러나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비록 막대한 손실과 피해를 보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율곡의 건의처럼 철저하게 개혁하고 묵은 집을 다시 고칠 수 있는 기회였다. 만약 잘 개혁을 한다면 강력하고 부유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즉 1600년대 초엽(1608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를 이어 인조(1623년∼1649년), 효종(1649년∼1659년), 현종(1659년∼1674년), 숙종(1674년∼1720년)이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들이 왕위에 있었을 때가 대략 17세기이며, 이 시기는 조선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역사의 긴 흐름을 염두에 두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18세기, 19세기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계기로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1618년∼1924년)로 정권이 바뀌었다. 쇠퇴한 명나라가 몰락하고 강력한 군대를 지닌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것이다. 일본은 중세시대(1192년∼1603년)에서 근세시대(1603년∼1868년)로 바뀌었다. 즉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기(1467년∼1603년)를 거쳐서 에도의 막부정권(1603년∼1868년)으로 전환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보면 17세기 초엽은 새로운 국가나 정권이 등장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발전을 꾀한 시기였다. 직접적으로 전쟁의 참화를 가장 심각하게 겪었던 조선 역시 그런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조선은 정권도 변하지 않았고 조선이라는 국가도 그대로였다. 그래도 시대적으로는 철저한 개혁을 통해서 국가 전체의 조직이나 제도를 재정비해 나가야하는 시기였다. 머지않아 서구에서 근대문명이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문명이 밀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시대(1608년∼1623년)는 그런 점에서 조선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시기였다. 광해군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였으나 반대파 지식인들을 설득하지 못하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사망한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약 15년간 재위하였다. 그가 재위한 시기에 유학자들 사이에 붕당(학문이나 정치적 입장을 함께하는 유학자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 매우 극심하였다. 선조 시기인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을 계기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의 두 파로 나뉘었다. 광해군이 집권할 때는 이산해, 이발, 정인홍 등 반대파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는 강경파인 북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 초에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선조시기 말엽에 반란의 주모자로 몰린 정여립은 예조좌랑,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한 인물로 원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제자였다. 서인 측에 속했던 그는 나중에 동인이 권력을 잡자 율곡을 비판하고 동인 쪽에 섰다. 이러한 그를 임금이던 선조가 비판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나중에 그는 반란의 의심을 받다가 자살하였는데, 서인들의 고발과 정철의 과도한 수사로 그와 관계를 맺고 있던 동인들이 많이 희생이 되었다. 광해군 재위 초기에 동인 중 북인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반대쪽인 서인과 남인은 비주류였다.
광해군은 1612년에는 김직재(金直哉)에 대한 잘못된 고발을 빌미로 100여명의 소북파(북인의 일파)를 처단하였으며, 1613년에는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여 죽였다. 광해군은 서자, 즉 첩의 아들이었고, 영창대군은 선조의 본처인 인목왕후의 아들, 즉 적자였다. 1618년에는 자신의 작은 어머니이자, 영창대군의 친어머니 인목왕후(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 이러한 사건들은 대부분 대북파(북인의 일파)의 책동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1623년 서인세력이 남인의 지원을 받아 능양군(인조)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인조반정) 이후 그들은 광해군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유배형에 처했는데, 광해군은 강화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1641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