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으로 본 율곡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율곡.

 

율곡’이라는 키워드로 <조선왕조실록>(국역본)을 검색해보았다. (사이트 주소 : http://sillok.history.go.kr/, 검색일 : 2019년 11월 3일) 검색 결과는 총 63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전체시기에 해당한 기록이다.
율곡은 1537년에 태어나 1584년에 사망하였다. 즉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1488∼1544) 연간에 태어나 선조(1552∼1608) 연간에 사망하였다. 여기서는 선조 이후의 결과만, 즉 1600년대 이후를 살펴보기로 한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1600년대:
『광해군일기 중초본』 2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1건
『인조실록』 3건
『효종실록』 1건
『현종개수』 2건
『숙종실록』 14건
『숙종실록 보궐정오』 1건
이상 총 24건.

1700년대:
『경종실록』 2건
『영조실록』 6건
『정조실록』 8건
이상 총 16건.

1800년대:
『순조실록』 5건
『철종실록』 2건
『고종실록』 2건
이상 총 9건. 전체적으로 총 49건이다.

‘율곡’은 율곡 이이의 호(號)다. 이 호는 전통시대에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따로 지어 부른 이름이었다. ‘율곡’으로 검색하면 말하자면 율곡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담긴 문장만 검색된다. 그래서 율곡의 본명인 ‘李珥(이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검색해보았다. 그랬더니 앞서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보다 훨씬 더 많이 검색 되었다.

1600년대:
『광해군일기 중초본』 22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18건
(여기서 『광해군일기 중초본』이란 두 번째로 수정한 원고본라는 뜻이고 『정초본』이란 마지막으로 완성된 원고, 즉 최종본이란 뜻이다. )

『인조실록』 63건
『효종실록』 32건
『현종실록』 57건
『현종개수실록』 96건
(여기서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이란 『현종실록』을 다시 수정한 실록이라는 뜻이다.)

『숙종실록』 192건
『숙종실록 보궐정오』 17건
(『숙종실록 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란 『숙종실록』의 일부를 수정하여 바로 잡은 실록이라는 뜻이다.)
이상 총 497건이다.

앞서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는 1600년대에 24건이었는데 ‘이이’로 검색한 결과는 497건이니 무려 20배 이상 더 많다. <왕조실록>에서는 호 보다는 본명으로 불리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600년대에 ‘이이’를 가장 많이 언급한 시기는 숙종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가 전체의 39%정도를 점하고 있다. 숙종시대에 율곡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1700년대:
『경종실록』 7건
『경종수정실록』 4건
『영조실록』 76건
『정조실록』 55건
이상 총 142건.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보다 8배 이상 더 많다.

이 1700년대에는 영조, 정조시대에 ‘이이’가 압도적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특히 영조시대가 전체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영조는 조선 사회를 개혁한 임금, 계몽군주, 혹은 조선의 후기 르네상스를 연 임금 등으로 불린다. 이런 영조의 이미지와 율곡의 개혁정신이 잘 어울린다. 아마도 이 시대에 율곡에 대한 언급은 사회 개혁과 관련될 것이다.

1800년대:
『순조실록』 23건
『헌종실록』 2건
『철종실록』 8건
『고종실록』 30건
『순종실록』 1건
이상 총 64건. 1600년부터 1800년대 까지 전체 총 703건이다.

이런 결과는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보다 7배 이상 더 많다.
1800년대 즉 19세기에 율곡은 고종 시대에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 고종 시대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시대였다. 그만큼 위기의식이 특히 강한 시대였다. 율곡이 살아생전에 모시던 임금인 선조에게 호소하였던 위기의식이 고종시대에 다시 재음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에서 율곡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데 1600년대는 497번, 1700년대는 142번, 1800년대는 64번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율곡에 대한 언급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곡 사상의 핵심은 개혁 정신이고 변혁의 정신이다. 조정에서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율곡의 이야기가 이렇게 줄었다는 것은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정신이 줄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조선 사회가 몰락해가면서, 1800년대에 이르면 ‘개혁’만 가지고는 나라를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사회를 완전히 변혁시킬 ‘혁명’이 필요했으며, ‘동학 혁명’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에서 더 가슴에 다가온다. ‘동학혁명’은 1800년대 말, 즉 19세기 말엽의 조선 사회의 절박함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동학혁명’이라는 단어는 당시 사람들의 표현이 아니고 그때는 ‘개벽’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서 ‘李滉(이황)’을 검색해보았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1600년대:
『광해군일기 중초본』 38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35건
『인조실록』 24건
『효종실록』 22건
『현종실록』 19건
『현종개수』 34건
『숙종실록』 67건
『숙종실록 보궐정오』 6건
이상 총 245건.
율곡 이이에 대한 검색 결과가 총 497건이었으니 그것의 1/2정도에 불과하다.

1700년대:
『경종실록』 8건
『경종수정실록』 4건
『영조실록』 47건
『정조실록』 47건
이상 총 106건이다. 율곡의 경우는 총 142건이었다.

1800년대:
『순조실록』 12건
『철종실록』 3건
『고종실록』 15건
『순종실록』 1건
이상 총 31건이다. 율곡은 총 64건 이었다. 약 1/2정도이다.
전체적으로 1600년부터 1900년까지 율곡은 총 703건, 퇴계는 385이 언급되었다. 율곡이 2배정도 더 많이 논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의 사상은 율곡 사상과 비교해보면 정통 주자학에 더 가깝다. 개혁적이라기보다는 보수에 가까우며 변화보다는 전통 유지에 가깝다. 퇴계는 성리학 사상과 수양에 더욱 침잠하였기 때문에 이상주의자에 가깝고, 율곡은 거기에 비하면 현실주의자였다. 그래서 퇴계는 리(理, 이치 또는 원리)를 더 강조한 편이었고, 율곡은 기(氣, 기질 또는 현상)를 더 주목한 편이었다.
그리고 퇴계는 1502년부터 1571년까지 70년을 살고 사망하였다. 이에 비하면 율곡은 1537년부터 1584년까지 겨우 48년을 살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요절에 가까운 율곡의 짧은 생애를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였는데 그런 마음이 율곡을 더욱 그리워하고 회상하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율곡은 또 조정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관리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상이나 언행에 정치적인 것과 관련이 많았다. 그 점이 후대의 조정에서도 관리들의 입에 오르내릴 소재가 많았을 것이다. 퇴계의 경우는 일찍부터 관직을 단념하고(퇴계는 당시 빈번하게 발생한 사화士禍의 위험을 절감하고 있었다.) 고향에 내려가 산림에서 살면서, 학자로서의 삶을 더 중시하였기 때문에 조정 사람들의 대화 주제에 거론되는 일이 율곡 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검색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광해군일기』부터 살펴보면서 <조선왕조실록>에 율곡이 어떻게 기억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말하자면 율곡에 대한 이미지의 변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