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 나덕윤의 상소문과 사관의 핀잔


『광해군일기』 : 나덕윤의 상소문과 사관의 핀잔.

 

광해군일기』 중초본의 광해 즉위년 11월 12일에 「의금부 경력 나덕윤의 상소문」이 실려있다. 이 상소문에도 율곡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 상소문은 정초본(10권)에도 올라있다.
나덕윤은 죄인을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의금부 소속 관리였다. “신처럼 보잘것없이 천한 사람도 일찍이 나라의 은혜를 입어 요행히 임금을 모시는 말석에 끼었습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타고난 성품에 근원한 것이므로, 감히 평소에 조금 깨닫고 있던 견해를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하면서 당시 지식인들의 세태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지금의 세도(世道, 세상에서 행해지는 도리)를 보건대 어찌해 볼 수가 없습니다. 수십 년 이래로 여러 차례의 변고를 겪자, 인심은 흩어지고 사론(士論, 선비·유생들의 의견)은 분열되어 어느 한 사람도 사도(斯道, 유교)로서 이 세상을 이끌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단지 재주와 기백만을 취하고 도의는 하찮게 여기며, 늘어놓는 말만을 믿고 덕행은 살피려 하지 않은 채 하나같이 총애와 영화, 명예와 이익에만 마음이 팔려 일생의 좋은 꾀로 생각하면서 오직 ‘어떻게 하면 내 몸에 이로울까.’, ‘어떻게 하면 우리 집안에 이로울까.’, ‘어떻게 해서 내 원한을 갚을까.’, ‘어떻게 해서 내가 싫어하는 뜻을 펴볼까.’ 할 따름입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황, 조식, 노수신, 박순 등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세도가 융성하여 볼만하다고 하였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선비의 기상이 상실되고 인도(人道, 인간의 도리)가 거의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황과 조식이 그 사이에 배출되어 학문과 기절(氣節, 기개와 절도)로 한 시대에 앞장서서 부르짖자, 그 소문을 듣고 일어난 자들이 대체로 훌륭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선왕께서 선비를 존중하고 도를 소중하게 여겨 거두어 부르시고 뽑아 등용시켜, 대간이나 시종의 자리에 발탁해 두셨습니다. 또 그들로 하여금 탁한 무리를 공격하고 청류(淸流)를 드러내도록 함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켰습니다. 대신 중에는 또 노수신(盧守愼)과 박순(朴淳) 같은 사람을 얻어 오랫동안 정승 자리에 앉혀 두고서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사랑하게 하여 여러 어진 사람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는데, 벼슬을 처음으로 얻는 자들이 모두 고을 시험과 마을 선발 속에서 배출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때에는 인심이 크게 변하고 선비의 취향도 분명하였으므로 세도가 융성하여 볼만하였습니다.”

앞서 소개한 이정귀의 스승 윤근수는 퇴계의 제자이면서도 서인의 편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대개 동인은 조식이나 퇴계를 따르고 율곡과 성혼을 비판하였으며, 서인은 율곡과 성혼을 따르고 조식이나 퇴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앞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나덕윤은 이황과 조식(曺植, 1501∼1571), 노수신(盧守愼)과 박순(朴淳)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은 동인 쪽의 인물들이 따르고 있었고, 퇴계보다 1살 위인 조식은 본관이 창녕 조씨이며, 경상남도 합천군 출신이었다. 소위 남명학파를 창시한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이며, 벼슬에 나서지 않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지내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학문을 닦았다.
조식의 제자들은 나중에 조정에 나아가 다수가 북인에 참여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정인홍, 곽재우 등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참전하였다. 동인의 우두머리였던 김효원이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김효원은 퇴계 문하에서도 배웠다.) 이 때문에 동서 분당이 일어났을 때 조식의 제자들이 동인으로 몰려 서인측과 대립하였다. 또 동인이 남북으로 나뉠 때 강경론을 주장했던 북인에 그의 학맥 제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퇴계 이황과 친분이 있었으며 ‘인심도심(人心道心)’과 관련하여 퇴계와 논쟁을 하기도 하였다. 1587년 기축옥사 때에는 정여립을 추천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노수신은 율곡과도 친분이 있었다.
박순(朴淳, 1523년∼1589년)은 조식과 이황의 문하생으로 이조판사, 한성부 판윤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특히 훈구파와 신진 사림의 교체기에 왕의 외삼촌이자 훈구파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덕분에 훈구파는 완전히 몰락하여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 그의 동문들이나 제자들은 모두 동인이 되었는데, 그는 당시 율곡이나 성혼과도 교류가 빈번하여 서인으로 지목을 받아 탄핵을 당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이 나덕윤이 예로든 인물들은 비교적 동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당시 동인, 서인의 구별은 어떤 것이었을까?
『선조수정실록』(21권, 선조 20년 3월 1일) 기사(성균 진사 조광현·이귀 등이 스승 이이가 무함당한 정상을 논한 상소문)에 ‘서인(西人)’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옛날에 이른바 동인이란 사람들은 심의겸(서인의 영수)을 배척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사람이 동인이 되었다. 옛날에 이른바 서인이란 사람들은 심의겸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오늘날은 이이와 성혼을 높이는 사람이 서인이 되었다. (중략)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 출세하는 자본이 되었으므로 동인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공격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으며 외척(서인의 영수 심의겸)을 배척하는 것이 실로 사림 청류(淸流,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사람)의 논의이므로 선비로서 심의겸을 배척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 이것이 동서의 이름이 옛날과 달라서 분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아, 동서의 말이 있은 이래로 서인의 명목은 그 말이 네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심의겸의 친구와 제배(儕輩, 나이나 신분이 서로 비슷한 사람들)를 서인이라 하였다. 삼윤(三尹,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윤현尹晛)과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이다. 다음에는 서인을 돕거나 구해주는 자를 서인이라 하였으니 정철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이다. 또 그 다음에는 동인도 아니고 서인도 아니며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였다. 이이와 같은 무리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림으로서 이이와 성혼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을 서인이라 하니 오늘날 조야(朝野, 조정과 민간)에서 공론을 펴는 사람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과연 사실에 의거한 말이겠는가.
이러므로 공론이 가라앉지 않고, 따라서 이른바 서인이란 자가 오늘날에 와서 더욱 많아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면 이이는 공론을 하다가 간사한 사람에게 한쪽 당파에 치우친다는 이름을 얻었고 성혼은 이이를 구원하다가 사적으로 구호한다는 이름을 얻었으며, 중외(中外)의 수많은 선비들은 이이와 성혼을 구원하다가 서인의 이름을 얻었다.”

‘서인’이란 무엇인가를 서인 쪽에서 정의한 내용이다.
나덕윤은 이황, 조식과 비교적 동인쪽에 가까운 인물들인 노수신과 박순을 소개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붕당의 폐해를 논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심의겸(沈義謙, 서인의 영수)과 김효원(金孝元, 동인의 영수)은 단지 명예와 이익이나 따지며 노는 인물들이었는데도 감히 기치를 내세우고 당을 나눔으로써, 조정이 마침내 조용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이(李珥) 같은 사람은 선비로 자처하여 세상의 도리를 담당하고서도 선배와 후배에게 양시(兩是, 둘 다 옳다)와 양비(兩非, 둘 다 그르다)가 있다는 말만을 꺼냈을 뿐, 끝내 진정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계미년에 이르러서는 이미 심해져 선비들이 이리저리 파당을 이루면서 그 해악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고 기축의 변고(1589년 정여립 사건으로 인한 옥사 사건)는 천만 뜻밖에 터져 나왔습니다. 간악한 자(동인 1000여명이 처벌을 받게 한 정철을 지칭함)가 또 그 사이에 화를 빚어내 한 떼의 명류들이 모두 반역의 깊은 구렁에 빠지고 말았으니, 참혹하다 하겠습니다.”

나덕윤은 율곡이 책임 있는 관리로서 붕당을 진정시키지 못하였다고 비판하고 기축옥사 사건을 통해 많은 훌륭한 유학자들(동인 유학자를 지칭함)이 반역의 죄를 뒤집어 쓰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이어서 그는 당파싸움의 폐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깨지고 집안이 망한 재앙도 계미년에 싹이 터서 기축년에 격화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라 안에 싸움이 크게 일어나고 왜구의 화를 이처럼 참혹하게 당하도록 한 것이니, 통탄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이 후부터 조정의 기강이 확립되지 않고 선비들의 논의가 분명치 못해 말만 숭상하고 덕행은 숭상하지 않으며, 이익만을 알고 의리는 모름으로 인해 어진 이와 사악한 자가 뒤섞이어 벼슬길에 진출하고 변론과 아부의 풍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벼슬을 얻을까 걱정하고, 얻은 벼슬을 행여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오직 관작이 좋은 줄만 알아 한 때의 여론에 따르는 것을 옳은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임금의 뜻을 맞추려는 버릇과 권력 있는 자들을 추종하고 빌붙는 태도들이 쌓여 한 시대의 고질병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주장한 나덕윤은 정여립과 정철, 그리고 정개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했다.

“정여립은 애초부터 불을 지른다거나 사람을 겁탈하는 도적이 아닙니다. 사실은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인 간악한 자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에 지식이 해박하고 견문이 많은 인물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이이와 성혼(成渾)이 맨 처음 그와 교류해 보고 나서 그를 추켜세우고 칭찬하였는데, 그가 청요직에 천거되어 등용된 것은 사실 이이가 이끌어준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계미년에 심하게 당론이 나뉘어지고 이이와 성혼이 세력을 잃은 뒤로부터 비로소 안면을 싹 바꾸어 이른바 동인(東人)들에게 빌붙었습니다. 동인들에게 앞날을 예견하는 지혜가 이미 없었고 한갓 한 시대에 난 헛된 명성만을 믿고 배척하지 못했으니, 이는 사람을 가려서 사귀지 못한 죄입니다. (중략) 그러나 만일 그 실정을 따져 그 죄질의 경중을 매긴다면, 교류하고 인정한 죄는 자연히 제일 큰 형벌을 받아야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당연히 죄를 낮추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정여립(鄭汝立, 1546년∼1589년)은 이이와 성혼의 제자로 1570년(선조 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낸 인물이다. 원래는 서인에 속했다가 동인으로 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또 스승이었던 이이를 비판한 일로 서인의 반발을 샀으며, 동인이 집권하던 시기에 동인 편에 서서 성혼, 박순 등을 비판하였다. 임금 선조도 그가 그렇게 율곡을 배반한 점에 대해서 불쾌히 여겼다. 이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는데, 그 뒤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왜구 토벌에 앞장섰으나, 반역을 획책한다는 고발을 당하였다. 그는 그 길로 피신하여 자살을 하였다. 서인 쪽에서는 그를 반역죄로 몰았는데, 기축옥사 사건으로 확대되어 관련자 천여 명(주로 동인)이 처벌을 받았다.
나덕윤은 정여립을 논하면서 맨 처음 그를 사귀고 인정하여 이끌어준 이이와 성혼이 가장 큰 죄를 받아야하는데, 왜 동인들이 더 큰 벌을 받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조사하여 수많은 동인들을 연루자로 몰아간 정철에 대해서도 이렇게 묘사하였다.

“정철(鄭澈)은 본래 괴팍한 성미로 날조하여 얽어 넣으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음험한 함정을 파서 무고한 자를 빠뜨리고 공법(公法)을 빙자해 사적인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러자 한때 그가 품은 뜻에 휩쓸려서 상소를 올려 옭아매려는 자들이 상소문을 받는 관청 앞에 줄을 섰습니다.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선비까지 발만 움직이고 머리만 흔들어도 거의 다 지목 대상에 들어갔고, 대수롭지 않은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반드시 돕고 지원했다는 죄목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3년의 큰 옥사(獄事)에서 원통한 죄수가 갖가지였고, 심지어는 80된 노모와 일곱 살 난 어린 아이까지도 함께 나란히 사형장으로 끌려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안방에서 나누는 말이나 거리의 여론들이 가엾어 하고 분통해 하였으나, 한랑(寒朗, 26년∼109년, 동한의 청하태수)처럼 초옥(楚獄, 후한 초왕 영의 옥사로 수천명이 애매하게 연좌된 사건)을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랑의 초옥이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의 일을 말한다. 안충(顔忠), 왕평(王平) 등이 모반한 사건에 연루된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한랑이 공정하게 처리하여 죄가 없는 많은 사람을 풀어주었다.(『후한서』 현종효명제기(顯宗孝明帝紀)·한랑전)
정철은 서인 쪽에 속한 인물로 정여립 사건의 조사 책임을 맡았는데 그의 조사를 통해서 1000여명 가까운 동인 쪽 사람들이 처벌을 받았다.
나덕윤은 이어서 정개청(鄭介淸)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정개청은 정여립 반란사건과 연루되었다고 지목을 받아 평안도로 유배된 인물이다.

“정개청(鄭介淸) 같은 사람에 있어서는, 애당초부터 조정에 나오지 않았고 단지 산중에 숨어서 몸을 닦는 한 사람의 선비였습니다. 사람됨이, 품성이 순수하고 도타우며 지조와 행실이 맑고 확실한데다 도학(道學)을 천명해 세상의 큰 선비가 되었으며, 자신을 엄숙히 다스려 후생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제멋대로 방종을 즐기면서 구속과 검소를 싫어하는 자들이 늘 비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중략) 정개청의 학문은 언제나 정(程, 정자)·주(朱, 주자)를 으뜸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간악한 자들이 세상을 그르치는 꼴을 보면서 후학의 폐단이 될까 염려하여 정(程), 장(張, 장재)의 말을 부연(敷衍, 알기 쉽게 자세히 설명)하고 한(漢)과 진(晉)이 숭상했던 바를 대략 서술했는데, 그의 뜻은 단지 선유들이 이미 정한 논의에 근거해 은연중 스스로를 그르치고 남을 그르치는 정철의 죄상을 꺾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노간(老奸, 늙은 간신) 정철이 마침내 중상하려는 꾀를 내어 개청이 지은 논설 제목 위에 교묘하게 배(排) 자를 덧붙여서 ‘절의를 배척했다.(排節義)’고 지목한 다음, 그의 설이 홍수와 맹수의 피해와 같다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 사방에 방을 돌려 보이고 역당(逆黨)의 이름을 덮어씌워 외떨어진 변경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 원통함이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 상소문을 나덕윤이 짓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정개창의 억울한 죽음을 임금에게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개창(1529년∼1590년)은 북부참봉, 전생서주부, 곡성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때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평안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함경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박순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의 제자로 이 상소문의 저자 나덕윤(羅德潤)을 비롯하여 나덕준(羅德峻), 나덕현(羅德顯), 나덕원(羅德元), 안중묵(安重默), 정지함(鄭之諴) 등 근 400여명에 달하였다. 이중에는 당시 호남의 유력가문 출신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제자들은 그가 사망한 뒤에 신원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이 상소문도 그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다.
나덕윤은 이 상소문의 말미에 이렇게 호소하였다.

“생각건대 전하께서 왕위를 물려받은 초기에 한 지아비, 한 지어미라도 만일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고 밝히지를 못한다면, 울적한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의 화기(和氣)를 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개청은 초야에서 고고한 행실을 지닌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은전이 늦어지고 있으니, 사실 국가 형정(刑政) 중 하나의 큰 잘못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특별히 원통한 실상을 굽어 살피시고 빨리 억울함을 풀어 주시되 선왕조에서 최영경(崔永慶)을 표창했던 일과 같이 밝혀 씻어 주신다면, 어찌 요(堯)임금이 남긴 뜻을 순(舜)임금이 아름답게 이루어준 것과 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중략) 감히 마음을 다 털어놓아 전하를 번거롭게 하였으니, 그 실없고 참람하여 스스로를 알지 못한 데 대한 벌을 마다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최영경(崔永慶, 1529년∼1590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이고,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그는 지평 사축을 역임하였는데,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옥에서 사망하였다. 조식의 문인이라는 것은 동인 쪽에 지인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정여립과 친한 관리로 지목되고 모반세력으로 몰려 사망한 것이다. 조사를 받으면서 관작이 삭탈되었으나 사망한 뒤 1591년(선조 24년)에 복권되었으며, 1602년(선조 35년)에는 최영경의 동생인 최여경에게 관직이 내려졌다.
나덕윤의 상소문을 읽고 광해군은 이같이 답하였다.

“상소를 보니, 충성심을 충분히 볼 수 있었으므로 참으로 가상히 여긴다. 정개청의 억울함에 이르러서는 나 또한 일찍이 대강 들었다. 그러나 선왕조 때에 있었던 일이므로 감히 경솔히 논의할 수 없다. 마땅히 대신들과 논의하여 조처하겠다.”

임금은 이와 같이 말하고, “이 상소를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하명을 내렸다. 그러나 『광해군 일기』 집필에 참여한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기축년 옥사에서 여러 역적들의 공초(죄인이 자신의 범죄 사실을 자세히 설명한 것)가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았다.(즉 모두 동일하였다.) 그 옥사에 연루된 자들은 모두 역적의 입으로 정확하게 말한 사람들이었다. 심문하는 관리가 어떻게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을 개입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정여립의 무리만이 이를 갈며 분통해 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또 임진왜란의 변란에 심문 기록들이 없어져 버리자 나덕윤(羅德潤)처럼 음흉하고 사악한 자들이 때를 틈타 일어나 날조하였다.”

이러한 기록 뒤에는 추기로 보이는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살펴보건대 나덕윤은 본디 호남의 호족으로 향리에 살며 불법을 많이 저질렀고 김우성(金佑成)과 한패가 되었다. 처음에 유영경(柳永慶)에게 빌붙었다가 유영경이 쓰러지자 다시 이이첨에게 빌붙었고, 뒤에 김우성과 사이가 벌어졌다. 그의 논의가 대체로 수시로 반복되었다.” 이 역시 나덕윤을 비난하는 문장이다.

나덕윤이 위와 같은 상소문을 올린 시기는 광해군이 막 즉위할 때였다. 이 당시는 북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였다. 그러므로 나덕윤의 글은 조정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덕윤의 글이 전체적으로 서인을 비판하고 동인(북인)을 추겨 세운 것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광해군의 답변에서 보인다. 그러나 이 글, 즉 「광해군일기」 중초본을 정리할 즈음에, 즉 인조시대 초기에는 서인들이 인조반정으로 집권하던 시기였다. 서인들로서는 서인의 행위(율곡이나 성혼, 혹은 정철)를 비판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상소문 마지막에 덧붙여진 말들이 험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