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 신응구가 성혼의 원통함을 호소하다


『광해군일기』 : 신응구가 성혼의 원통함을 호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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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구(申應榘, 1553년∼1623년)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제자로 직산현감, 형조정랑, 이천부사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춘천부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1582년(선조 1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추천을 받아 장원(掌苑)이 되었다. 1588년 직산현감(稷山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임실·함열 등의 현감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7년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조정에 들어가 형조정랑·한성부서윤·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2년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가 다시 충주목사·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그는 광주 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 광해군 2년인 1610년에는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대비 폐모를 주장하자 벼슬을 버리고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한 적이 있다. 그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에 서인이 집권하자 형조참의, 동부승지 등을 거쳐 장례원판결사, 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만퇴집(晩退集)』이 있다.
『인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사망 기록)를 보면 다음과 같이 사관의 평가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춘천 부사 신응구가 사망하였다. 신응구는 젊어서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부터 큰 명망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그런데 폐조(광해군 왕조) 때 임해군(臨海君, 광해군의 친형)의 옥사(獄事, 중대한 범죄를 다스림)을 당하여 조진(趙振) 등과 함께 정훈(正勳) 공신이 되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집에 있으면서 국가를 걱정한 공신이라고 모두 비웃었다. 뒤에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어서도 행실을 삼가지 못하였다는 비난이 많았으니, 스승들을 욕되게 하였다 하겠다.”(『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11월 2일)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임해군이 옥사를 당하였을 때 익사공신(翼社功臣, 1613년에 임해군의 역모를 제보한 사람과 취조를 담당하였던 48명의 신하들에게 내린 공훈 호칭)을 등록하면서 조정에서 그를 훈적(勳籍)에 넣자는 의견이 있어서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의 문무관)에 올라 영천군(靈川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신응구 본인은 이를 수치로 여겨 여러차례 상소를 올려 훈적에서 삭제해 주기를 청한 적이 있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0권(광해 즉위년 11월 22일)에 그가 스승 성혼을 위해 상소문을 올렸다는 기사(「광주 목사 신응구가 스승 성혼의 원통함을 상소하다」)가 실려 있다. 이 기사에는 성혼과 관련된 당시의 상세한 사정이 언급되어 있다.

성혼(成渾, 1535년∼1598년)은 호가 묵암(默庵) 또는 우계(牛溪)이며,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공조좌랑, 지평, 사헌부장령, 이조참판 등을 지낸 문신이다. 율곡보다는 두 살 위로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성혼과 율곡은 1554년경부터 같은 고을에 살면서 서로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성혼은 1551년(명종 6년)에 생원과 진사의 시험에 합격했으나 관리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1568년(선조 1)에 이황(李滉)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고 사숙하였다.
신응구는 먼저 상소문을 올리게 된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삼가 생각건대, 어리석고 천한 소신(신응구 본인)이 외람되게 옛날에 아는 사이라고 하여 큰 고을에 발탁 제수되었으니, 실로 분수에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경기의 고을로 옮겨 제수해 주심으로써 부모를 봉양하는 데 편리하도록 해주셨으니, 신의 영화와 다행은 한 몸에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신하 성혼(成渾)이 아직도 죄인의 명단에 올라 있어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화복(禍福)을 다르게 받고 있습니다.(자신은 임금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나 자신의 스승 성혼은 화를 받았다는 의미-필자주) 그러므로 당연히 성혼이 무함당한 곡절을 낱낱이 말씀드렸어야 하는데도, 상을 당해 애통 속에 황황히 지내어서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윽고 들으니, 해서(海西) 유생 이선장(李善長) 등이 상소를 올려 성혼의 원통함을 말씀드리자, 성상의 비답에, ‘자기가 좋아하는 데 빠져 대의를 잊고 있다.’라는 말씀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상께서 성혼을 이처럼 의심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습니다.”

이어서 신응구는 성혼이 비난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신이 삼가 성혼을 공격하는 자들의 말들을 살펴보니, 첫째는 ‘간악한 자의 당이다.’는 것이고, 둘째는 ‘임금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혼은 선왕조에서 세상에 없는 대우를 거듭 입어 거의 거르는 해가 없이 부름과 제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가난한 생활을 분수에 달게 받아드리며 평소의 지조를 변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계미년(1583년, 선조 16년)에 이이(李珥)를 신구(伸救,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히고 누명을 벗겨 남을 구원함)하면서부터 크게 여론에 거슬려 헐뜯는 말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계미년은 율곡이 1584년 정월에 병으로 사망하기 직전의 해이다. 율곡은 당시 병조판서로 임명되었는데 조정의 관리들, 특히 삼사의 관원들은 율곡이 시행한 조치나 조정에서의 처신을 빌미삼아 집요하고도 가혹하고 탄핵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탄핵에 대해서 성혼이 변호를 한 것이 비난을 받게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주장하였다.

“성혼이 간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은 다름이 아닙니다. 정철이 최영경을 얽어 죽인 것으로 여기는데, 그것은 성혼과 정철이 서로 친하였기 때문입니다. 성혼이 정철과는 비록 친하고 두텁게 지냈으나, 본디부터 조정에 서서 일을 함께 하려는 뜻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최영경을 끝까지 두둔한 사실이 있는데, 말할 게 있겠습니까?”

최영경(崔永慶, 1529년∼1590년)은 본관은 화순(和順)이며,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으로 서울 출생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조식의 제자들은 이황의 제자들과 함께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나중에 남인, 북인으로 나뉠 때, 북인을 형성하였다. 최영경은 벼슬이 지평 사축에 이르렀으나,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신응구는 성혼과 정철은 서로 친하게 지내기는 하였으나 동인 최영경이 감옥에 끌려가도록 뒤에서 조종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최영경을 두둔한 사실이 있는데 억지 주장을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다음과 같이 성혼의 아들이 찾아낸 성혼의 서신을 들었다.

“성혼의 아들 성문준(成文濬)이 아버지가 무고당한 것을 애통해 하여 집안에 묵은 종이들을 들추어 보다가 집안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며 사람들과 주고받은 서찰들 중 우연히 병화를 피한 것들을 찾아냈는데, 단지 최영경의 일에 대해 통탄해 마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연루된 정언신(鄭彦信)·유몽정(柳夢井)·윤기신(尹起莘)·조대중(曺大中)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도 놀라고 애달파하며 원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성혼은 최영경 외에도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피해를 받은 정언신, 유몽정, 윤기신 등에 대해서도 원통한 마음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집안에 보존되어 있던 성혼의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신(성혼)이 옛날의 역사를 보니, 반역자들과 친하고 파당을 지은 사람을 다스릴 때 사대부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기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역적(정여립)과 깊이 사귄 자들 중에서 참으로 역모에 참여한 자가 아니면 관작을 삭탈시켜 한가로이 살게 하는 것도 허물을 반성시키는 데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배의 형률을 적용시켰으니 너무나 중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평일에 서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어찌 모두 형벌을 줄 수 있겠습니까? 정언신은 벼슬이 정승에 올라 팔다리 역할을 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하루아침에 하옥되어 형구(刑具)를 직접 차고 있어야 하니, 상하와 도읍과 저자(시장) 사이에 군신이 존엄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신은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러한 상소문은 성혼이 준비를 하였으나 정언신 등의 일이 이미 처리되어버렸기 때문에 올리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사람들은 성혼이 ‘겉으로는 구원해 주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빠뜨렸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선조 임금에게 직접 호소한 사실도 이렇게 들었다.

“그 당시에 성혼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와서 당파를 없애고 형벌을 완화하란 말을 거듭 아뢰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끝내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그가 최영경의 옥사에서 위관(委官, 심판관)에게 편지를 급히 띄운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넉넉히 볼 수 있습니다. 어찌 감히 자신이 말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돌아보지 않고 함부로 자신의 분수에서 벗어나는 상소를 올릴 수 있었겠습니까?”

성혼은 또 임진왜란 초기 때 임금을 잘 수행하지 못했다고 하는 비난에 시달렸다. 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변호를 하였다.

“임진년에 주상을 미처 맞이하고 수행하지 못했던 연유는, 당시 논의들이 바야흐로 성혼을 정철의 당(서인)이라고 하였으므로 성혼이 시골에서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스스로 대궐에 나올 수 없었고, 주상께서 의주로 떠나실 때에는 창졸간에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날 파주 수령이 허둥지둥하다가 미처 먼 마을까지 부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혼이 사는 곳은 그 고을의 소재와 30리나 떨어져 있었으므로 어가가 이미 임진강을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 또 소문에 배를 철거시켜 나루가 불통되었고 어가가 건넌 뒤에 거리에 이미 난병(亂兵, 문란한 군대)이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적을 피해 마을들이 모두 비었다고 하자, 성혼이 병든 몸을 이끌고 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어가가 송도에 머무르리라고는 실로 성혼이 예상하지 못했던 바입니다. 성혼의 집이 산중에 외따로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말하는 자들은 어가가 그의 집 가까이 지나가는데도 피하고 나와 보지 않았다며 임금을 버렸다고 지목하였으니, 인정과 도리로 따져보아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말입니다. 이 점을 전하의 밝으심으로 살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성혼은 임진왜란 당시 파주를 지나쳐서 피난 가는 선조 일행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것은 신응구가 말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즉시 임금을 수행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논하고 처벌을 기다렸다. 그리고 상소문을 올려 “이제 마땅히 큰 뜻을 분발하시어 통렬히 자책하며,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일과 궁인(宮人)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단서를 끊고, 정직한 선비를 등용하여 이목(耳目, 듣고 보는 역할)의 임무를 맡기신다면 인심이 크게 기뻐하고 복종하여 원수인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임금이 속히 행해야할 계책에 대해서 건의하였다.
그러나 임금 주변의 신하들은 그러한 상소를 변명으로 평하고 오히려 그를 논박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의정부우참찬, 사헌부대사헌 등에 그를 임명하였다. 그는 이천에 머물렀던 광해군(세자)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와 경기 지역의 의병장들을 도왔다. 또 검찰사(檢察使)로 부임하여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조정으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 좌참찬등에 임명되었으며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그러나 의정부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주장하다가 동인 강경파로부터 매국노로 규탄을 받고 관직을 물러났다. 그 이후에도 줄곧 조정의 화평론을 변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경기도 파주로 낙향하였다.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제자로 조헌(趙憲), 정엽(鄭曄), 윤황(尹煌), 윤전(尹烇), 이귀(李貴), 김자점, 김장생, 강황, 윤훤, 황신(黃愼), 김류, 김덕령 등이 있다.

신응구는 성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정여립과 성혼의 관계를 논하면서, 성혼이 정여립을 키웠는데 왜 그는 죄를 받지 않는가하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호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또 말하기를, ‘역적(정여립)이 한때 중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모두 성혼이 길러 부추긴 것으로 말미암았는데, 그(성혼)만이 역적과 어울린 죄를 면했다.’고 합니다. 당초 역적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물러가 글을 읽기로 명분을 내세우고서는 이이와 성혼이 한 시대 유림의 어른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학문을 물었습니다. 이이와 성혼이 그의 기질이 거친 것을 단점으로 여기었으나, 벼슬을 버린 점을 취해 벗들에게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이이와 성혼이 학문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역적이 학문을 묻는 것으로 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럴싸한 방법으로 속인다는 것입니다. 이이가 죽자 역적이 수찬이 되어 서울에 들어왔었는데, 당시 의논이 크게 변해 이이를 공격하는 것이 이로웠기 때문에, 그가 더없이 미워하고 헐뜯으며 아울러 성혼까지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선왕(선조)께서 그는 형서(邢恕, 송나라 관리이며 정호程顥의 제자로, 상황이 변하자 스승을 배반하고 공격한 인물)와 같다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임금께서 그의 사특함을 배척하신 것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성혼과 이이도 정여립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 임금이 정여립을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꾸짖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당시 서인과 대립하여 성혼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성혼이 산촌에 은거하면서 뒤에서 조정의 일을 꾸미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변호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또 말하기를, ‘성혼이 초야에 자취를 숨기고 문도들을 모아 스승과 제자라 칭하면서, 날마다 경박한 무리들과 당시의 정사를 논하고 인물의 시비를 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 성혼은 본디 산중의 한 선비입니다. 그의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趙光祖)의 문하 출신으로 높은 풍도와 아름다운 덕이 한 시대에 존경을 받았으나 파주에 은거하면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는데, 학자들이 그를 청송 선생(聽松先生)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성혼의 학문은 대체로 집에서 성취된 것인데, 효도·우애·충성·신의와 자신을 반성하여 간절히 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쇠붙이도 녹인다는 비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신은 애닯고 애석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광해군은 이러한 상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모두 잘 알았다. 스승을 높이려는 정성에 대하여 참으로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였다. 다만 이는 선왕조에 있었던 일이므로 3년 안에는 가벼이 의논할 수가 없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3년 동안 부모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할 수 있다는 『논어』(학이편)의 가르침에 근거한 말이다. 선조 임금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신응구의 호소에 수긍한 듯하다. “참으로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였다.”는 말이 그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