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임진왜란


『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임진왜란.

 

광해군일기』 선조 행장을 읽으면서 서인과 동인의 갈등에 관심을 가지고 읽다보니 중요한 핵심을 놓쳤다. 선조 행장의 절반이상은 사실 임진왜란과 관련된다. 선조시대의 가장 큰 사건은 일본의 침략, 즉 임진왜란이다. 이정귀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신하여 도망하는 길을 자신의 가족을 이끌고 따라갔다. 이러한 그의 경험이 상세하게 담겨있다. 일본군이 침략해 들어오던 급박한 상황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임진년간에 왜적이 온 나라의 군대를 죄다 동원하여 가지고 와서 마구 쳐들어와 유린하였는데 그 형세가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았다. 이들이 상국(명나라)을 침범하려는 흉계를 세운 것이 진실로 하루 이틀에 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오래 전부터 흉계를 품고 있다가 기회를 노려 발동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태평을 누려 왔으므로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고 지내오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미친 왜구를 만났다. 반격을 가하였으나 지탱하지 못하고 남쪽 지방의 마을들이 서로 잇따라 함몰되었다.”

선조는 동인(남인, 북인)과 서인이라고 불리는 유교 지식인들을 데리고 ‘정권 놀음’을 하면서 나라 바깥에서 준비되고 있는 큰 재앙을 대비하지 못했다. 여기서 정권 놀음이라는 것은 국가의 통치자로서 대국적인 정치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과 권위만을 앞세워 정치를 하였다는 뜻이다.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보낸 사신들조차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정확한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일부 사신들이 정확한 보고를 했는데도 선조는 그들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상황판단을 그르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정귀가 지은 선조의 행장은 당시 시대의 가치관과 상황에 따라 지은 것이다. 선조의 업적을 치하하고 왕으로서 그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시점으로 읽어보면 한심한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면 이정귀는 서울이 일본군 손에서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4월에 관군(官軍)이 서울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이 임금에게 축하의 말씀을 해주실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위로해야 할 일이요, 축하할 일이 아니다. 신민(臣民)들을 거느리고 망궐례(왕이 왕세자 등을 거느리고 중국 황제가 있는 쪽을 향하여 예를 올리는 의식)를 행하여 황은(皇恩, 중국 황제의 은혜)에 사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 기로(耆老, 육십세 이상의 노인)와 백성들로 하여금 동시에 망궐례를 행하게 하여 함께 황은에 감격해 하는 의리를 알게 하였다.”

선조가 보기에는 명나라가 도와서 서울을 수복한 것이다. 이순신의 공로나, 왕세자로서 전장을 누빈 광해군의 공로, 혹은 수많은 의병장들 그리고 백성들의 고생은 선조로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나라가 망해도 자신은 중국으로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한 군주로서는 당연한 논리일지도 모른다.

선조는 신하들을 데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 도성으로 들어오면서 생각한 바를 그는 이렇게 칙명으로 내렸다.

“예조에 하명하기를 ‘상란(喪亂)를 당한 뒤로 도성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를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살아남은 백성의 과반이 흰 상복(喪服)을 입었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에 살펴보니, 도성 백성들이 거리를 꽉 메웠는데도 상복을 입은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이는 필시 난리를 겪은 뒤 윤기(綸紀, 도덕과 기강)가 느슨해져서 그런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다. 각부(各部)로 하여금 규검(糾檢,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들추어내어 자세히 살피고 조사함)하게 하라.’ 하였다.”

임진왜란(1592년)은 조선이 건국(1392년)하고 꼭 300년 지난 뒤에 일어났다. 사실은 일본이 침략을 하지 않았어도 조선은 이미 그 수명이 다하고 있었다. 율곡이 개혁의 필요성을 외친 것은 그런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조선은 다시 건국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조선’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완전히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금도 바뀌지 않았고, 임금을 둘러싼 정치 세력도 바뀌지 않았고, 그 전체를 움직여가는 이념, 즉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도 바뀌지 않았다.

선조는 서울로 돌아와서 영리하게 움직였다. 백성들의 윤리 도덕의식을 다시 강조하고 예절을 통제하여 유교적인 통치 체제를 더욱 강력하게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후에 예학이 크게 일어난 것은 그의 이러한 생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신하들이 “성전(聖殿, 문묘나 종묘)이 모두 소각되었고 또한 위판(位版)도 없으니, 제사를 지낼 장소가 없습니다.”고 신하들이 보고하자, 선조는 간이 제단을 축조하고 몸소 나아가 문묘 제사를 지냈다.

또 그는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다. 우리나라는 인재가 적은데다 수용하는 방법도 과거에만 달려 있다. 글을 지어 올리게 하는 과거보는 마당에서 어떻게 사람의 재능을 다 발휘하게 할 수 있겠으며 따라서 호걸스런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 넓은 세상에 우뚝한 재능과 특이한 행실이 있는 선비가 임하(林下)에서 속절없이 늙어가는 일이 어찌 없겠는가?”하면서 “발탁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각기 천거하도록 하라.”고 하명하였다. 전쟁 전에도 항상 하던 말이었다.

그가 새로운 인재를 선발한다고 정치가 새로워질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부지런히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면서 조선을 임진왜란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런 노력 덕분에 조선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