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향교 율곡학 순회강연 행사


 

2017년 9월 20일 강릉향교에서 일반인 대상으로 윤사순 교수님과 황의동 교수님의 율곡학 순회강연(주제: 제4차 산업과 인본사상)을 진행하였습니다.

2017년 7월 21일 강원도민일보 기사


2017년 7월 21일 강원도민일보 기사

 

2017년 신사임당 초충도 퍼즐 제작

율곡학 사업단에서 2017년 사업으로「신사임당 초충도 퍼즐」(8종 1세트, A5 size/35pcs)을 제작하였다.

「신사임당 초충도 퍼즐」의 구성은 초충도의 오이와 나비, 석죽화와 잠자리, 수박과 여치,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양귀비와 풀거미, 봉숭아와 메뚜기, 원추리와 벌 등 8가지로 되어있고, 이를 여덟 종류의 퍼즐로 제작하여 각 퍼즐을 맞추면서 자연스럽게 초충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

「신사임당 초충도 퍼즐」을 인성교육 자료로 활용하고자 하는 유치원 및 초등학교는 율곡평생교육원(전화: 642-4982)으로 연락하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2017 미국 LA 포럼

>>2017년 미국LA 포럼 <International Conference onYulgok Studies>

선조가 총애한 서예가 한호


선조가 총애한 서예가 한호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선조조의 명신’ 조에 유신과 무신 외에도 서예가들을 다수 배치하였다. 한호가 글씨로는 조선을 대표하는 서예가임에는 틀림없지만 조선시대 품인(品人) 기준으로 본다면 특별한 부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이긍익이 한호가 이룩한 서도 경지에 근거하여 ‘선조조의 명신’ 조에 넣은 데서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을 편집한 방침을 엿볼 수 있겠다.

한호는 자가 경홍(景洪)이며, 호는 석봉(石峰)이요,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군수 대기(大基)의 5대 손으로서 계묘년(1543)에 나서 정묘년 나이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삼조(三曹)의 낭관과 가평ㆍ흡곡(歙谷) 두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을사년(1605)에 죽었다.

한호는 선조의 총애를 입어 그 명성과 부귀가 더해졌다. 사실 선조 또한 역대 조선의 왕 중에서 상당한 명필로 인정받는다.

“임금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총애가 융숭하였으며 하사품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히 가평 군수(加平郡守)를 제수하였는데, 몇 년 후에 사헌부에서 탄핵하였으나 추고만을 명하였다. 그가 공조 낭관이 되어서 의례 바치는 것을 규식대로 하지 않아 응당 파직되어야 하는 것을 임금이 다스리지 말라고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빨리 어의에게 약을 싸가지고 가서 구하도록 명하였다. 죽은 뒤에 임금이 오랫동안 애도 하였다.”

“일찍이 당지(唐紙)에다 이태백(李太白)의 시를 써서 5권으로 만들었는데, 각체(各體)를 모두 갖추었다. 또 큰 종이에 <동서당집고첩(東書堂集古帖)>을 썼는데, 임금이 듣고 급이 내시에게 명하여 가서 찾아가지고 대궐로 들여오도록 하고, 다음 날 비단, 포목, 소금, 쌀, 종이, 먹, 지필묵, 향, 어연(御硯), 옷, 신 등 물건을 매우 후하게 내려주면서 그것으로 집을 사서 살도록 하였다.”

한호 글씨에 대한 당시 조선과 중국 사대부들의 애호와 평가를 이정귀가 지은 한호의 묘갈명에서 대략을 소개했다.

“임신년에 정유길(鄭惟吉)ㆍ임오년에 이이(李珥), 신축년에 이정귀(李廷龜)의 세 차례 빈사(儐使) 행차와 신사년과 계사년의 주청사(奏請使)가 갈 때에 모두 명필로서 참여하였다. 중국의 이여송(李如松)과 마귀(麻貴)와 북해(北海)의 등계달(鄧季達)과 유구(琉球)의 사신 양찬(梁燦)이 모두 글씨를 요구하여 갔다. 왕감주 새정(王弇州世貞)이 글씨를 평하기를,

‘성난 사자가 돌을 헤치는 것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물로 달려가는 것 같다.’

하였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마땅히 왕우군과 안로공(安魯公 안진경(安眞卿))과 우열을 다툴 만하다.’

하였다.”

 

“선조가 공의 대자(大字)를 보고 탄복하기를,

‘기이하고 장대하기가 측량할 수 없다.’

하고 하사하는 어선(御膳)과 법주(法酒)가 길에 끊이지 않았으며, 또 내시를 보내어 그의 집으로 잔치를 내리는 한편 한가로운 고을을 재수하도록 명하였다. 또 어필로

‘취한 속에 천지에서 붓으로 조화를 뺏았다.
[醉裏乾坤 筆奪造化]’

라는 여덟 자를 써서 주었으며, 병이 나자 어의(御醫)와 약이 길에 연이어졌다. 나이 63세에 죽으니 부고를 듣고 부의를 매우 후하게 내렸으며, 관에서 상장(喪葬)을 돌보아 주었다.”

이광사가 <원교필결>에서 조선의 서예가들을 평하는 마당에 한호를 논했는데 한호의 학문과 서도를 평함에 대략을 얻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필법을 안평(安平 용(瑢)), 자암(自庵 김구(金絿)),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석봉으로써 4대로 가르쳤는데, 정론(定論)은 석봉을 우리나라의 제일로 꼽았다. 석봉은 재질과 학문은 높지 못하였으나 연습을 쌓아 공을 이루어서 비록 옛사람의 획법(畫法)을 알지 못해도 또한 자연히 서로 합하는 곳이 있었다.

가문이 미천했기 때문에 관가에서 쓰는 정식(程式)에 국한되어 진서(眞書)는 더욱 비루하였으나, 또한 필력에 볼 만한 것이 있었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의 득의한 곳에 이르러서는 규모가 크고 깊으며 질박하고 힘차 송(宋)ㆍ원(元)에서 높이 나와 손색이 없다고 할 만하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이순신이 허여한 유형(柳珩)


이순신이 허여한 유형(柳珩)

 

잘 알려지지 않은 출중한 인물들이 많다. 유형도 그중 한 명이다. 유형은 이순신의 신임이 두터웠던 무장이다. 이긍익이 <연려실기술> ‘선조조의 명신’ 조에 유형을 두었다.

유형은 자가 사온(士溫)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병인년(1566)에 나서 갑오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년에 해남 현감(海南縣監)이 되었고, 정유년에 부산 첨사(釜山僉使)로 발탁되어 부임하기도 전에 경상도 우병사(右兵使)에 임명되었다. 북병사(北兵使)ㆍ평안 병사를 역임하고, 황해 병사로 재임 중 을묘년(1615)에 죽으니, 나이 50세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강화에서 활동하다가,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 선조의 친유(親諭)를 받고 감격하여,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은혜를 갚겠다는 ‘진충보국(盡忠報國)’ 네 자를 등에 새겨 스스로 맹세하였다. 신설된 훈련도감에서 군사조련에 힘쓰다가 해남현감으로 나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막료가 되어 수군재건에 노력하였다. 남해 앞바다에서의 전투에서는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의 곤경을 구하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도,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발탁되었다. 유형은 이순신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로 1600년에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며, 1602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충청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함경도병마절도사로 회령부사를 겸하였다. 이어서 경상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재임 중에 죽었다. 용병(用兵)에 능하고, 특히 통제영(統制營)의 기계설비와 회령·경성의 축성 등 적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의 확립에 주력하였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타고난 기질이 장대하고 성질이 호탕하여 어려서 구속받기를 싫어했던 유형이 무장으로 거듭나는 일화를 <연려실기술>이 적어 두었다.

“사람됨이 용모가 장대하고 어려서부터 성질이 호탕하여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말달리기와 검술을 좋아하고 산업을 일삼지 않았다. 어머니가 울며 이르기를,

‘내가 죽지 않고 사는 것은 오직 네가 있기 때문인데, 네가 이제 이같이 방탕하게 노니 누구를 믿고 산단 말이냐?’

하니, 공이 말하기를,

‘제가 마침내 성공하여 어머니를 영화롭게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소서.’

하였다. 물러나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태어나서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또 어머니로 하여금 잡수시는 것도 어렵게 하였으니 사람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가산을 다스려서 축적해 놓고, 또 스승을 찾아 수학하였다. 조금 뒤에 탄식하기를,

‘대장부가 재주를 보이지 못할 데가 없거늘 하필 서책의 장구(章句)와 구두(句讀)를 일삼겠는가.’

하였다. 아침에는 활을 쏘고 저녁에는 글을 읽었다. 임진왜란에 칼을 잡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을 좇아 평안도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선전관에 임명되고 무과에 올랐다. 임금이 일찍이 무신들의 활쏘기를 구경하다가 공의 차림새가 출중함을 보고 주목하던 중에 화살 한 개로 정곡을 맞추니, 상이 불러다가 공의 아버지와 조부의 이름을 물었다. 상이 이르기를,

‘국사에 힘써 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욕되게 하지 말라.’

공의 할아버지 진동(辰仝)은 벼슬이 공조판서로서 장상(將相)의 재주가 있었고, 아버지 용(溶)은 무과에 급제하여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지냈다. 하고 특별히 말을 하사하여 권장하였다. 공이 이로부터 감격하여 울고 드디어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 네 자를 먹물로 새겼다.”

이순신이 진충보국의 일념으로 전쟁에 임하는 유형을 평한 내용이 있다.

“이덕형(李德馨)이 일찍이 이순신(李舜臣)에게 묻기를,

‘누가 그대를 대신할 수 있느냐?’

하니 순신이 말하기를,

‘충후(忠厚)하고 담략(膽略) 있기가 이 세상에서 유형한테 견줄 사람이 없습니다. 벼슬은 비록 낮으나 크게 쓸 만합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조정에 아뢰어 드디어 우수사에 제수하였다.”

유형이 회령(會寧)ㆍ경성(鏡城)ㆍ창성(昌城)ㆍ삭주(朔州) 등의 성지(城地)를 모두 세웠고 특히 황주(黃州) 성은 더욱 장대했다. 여러 번 큰 병영의 장수를 역임하였으나, 관직에서 물러나는 날에는 쓸쓸히 행장 속에 이불뿐이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청백애민(淸白愛民) 한 김덕함(金德諴)


청백애민(淸白愛民) 한 김덕함(金德諴)

 

경기도 여주에 여주목사를 지냈던 김덕함의 청렴함을 기리는 비문이 있다. 당시 군청의 정문이었던 영월루 주위에 역대 여주목사들의 공덕비들이 있다. 그중 김덕함 공적비가 있는데, ‘청백애민비’라고 새겨져 있다. 고을 수령으로서 김덕함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덕함(金德諴, 1562~1636)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성옹(醒翁),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으나 홀로 공부에 힘써 27세인 1588년(선조 21)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연안(延安)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였으며, 1594년 군공청의 도청(都廳)이 되어 큰 공을 세웠다. 광해군 시절인 1617년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성·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뒤 여주목사 ·춘천부사 등을 지냈고, 1636년 청백리에 녹선되고 대사헌에 올랐다.

이항복이 일찍이 김덕함이 큰 인물임을 알아보았는데,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28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보직되고 신묘년에 학유(學諭)에 임명되었다. 이항복(李恒福)이, 장만(張晩)ㆍ이시발(李時發) 및 공 등 3명은 모두 국사를 맡길 만하다고 누차 조정에 말하였다. 임진년에 연안(延安)으로 들어가 이정암(李廷馣)의 종사(從事)가 되어 인근 고을에게 군량을 독촉하여 내게 하였다.”

이항복이 예견한 바는 그의 <행장>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는데, <연려실기술>에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갑오년(1594)에 조정에서 군공청(軍功廳)을 설치하고 전공(戰功)을 사정(査定) 할 때에 청탁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상하에서 서로 부탁하므로 사람들이 피하였는데, 우의정 김응남(金應南),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아뢰어 공을 도청(道廳)으로 삼아 사정을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하루는 김응남이 비변사에 말하기를,

‘군공의 중대한 일을 김덕함이 혼자 맡고 있으므로 내가 매일 사대문으로 사람을 보내어 그의 훼예(毁譽)를 살펴보았는데, 사람들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로써 청촉이 감히 그 사람에 대해 범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하였다.”

“정유년(1597)에 조정이 강화(江華)에 분호조(分戶曹)를 설치하어 삼남(三南) 지방에 조운(漕運)의 길을 열어 군량을 공급하도록 하였는데, 김응남이 아뢰기를, ‘김덕함의 재능이 강화 유수와 병조분의 양 장관을 겸할 만하며, 이제 분호조의 임무가 극히 중대하니 이 사람이 아니면 일을 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비변사 당상도 필요 없이 단지 이 사람만 차임해도 괜찮습니다.’ 하였다.”

김덕함이 소임을 처리하는 바가 능수능란하고 요령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김덕함이 지방관으로서 이룬 치적을 평한 어사 최현의 장계가 볼 만하다.

“기유년에 체찰사 이항복이 계청(啓請)하여 특별히 공을 안주 목삼(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어사(御史) 최현(崔睍)의 장계에,

‘맑기는 백이(伯夷)와 같고 정사는 공수(龔遂)와 황패(黃覇) 한 나라 때의 지방 명관) 같으며, 겸하여 봉공(奉公)하는 정성이 있어 정치와 교화가 서도에서 제일입니다.’

하였다.”

최현의 장계를 보자면 김덕함이 청령하면서도 유능한 관료임을 알 수 있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우공일기> 또한 이를 잘 보여준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모친이 93세에 죽었는데, 공이 매양 모시고 자면서 매사에 몸소 시중을 들어 하룻밤에 간혹 10차례나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곱 고을을 역임하였으나 돌아와서는 반드시 양식이 떨어졌다. 집사람이 간혹 식량이 떨어졌다고 하면 문득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하늘이 반드시 살리는 도리가 있게 마련이다.’

하였다. 평생을 남의 집을 빌려 살았으며 책상과 기물의 먼지를 털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제 몸의 먼지도 또한 깨끗이 털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밖에 있는 물건이랴.’ 하였다.”

“광해 때에 집이 가난하여 생활할 길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권하기를, ‘종을 궁궐 역사에 내보내서 삯을 받아서라도 자급(自給)하는 것이 어떠냐?’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남의 집에 기와나 석물(石物)을 도둑질 해다가 나라에 바쳐서 대가를 받아 생활을 도모하는 짓은 내가 차마 못하는 바이다.’ 하였다.”

고위직에 올라서도 청렴한 바는 원칙을 준수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광해군 시절에 이항복과 함께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되었을 적의 일화다.

“당시에 귀양살이 하는 자들은 모두 처자식과 함께 갔는데 공이 ‘위리(圍籬)는 사체(事體)가 옥과 같으므로 처자식과 더불어 뒤섞여 거처할 수 없다.’ 하였다. 다음 해에 부인 이씨가 가족을 데리고 갔으나 각기 딴 집에서 살게 한 것이 5년이었는데, 계해년에 이르러 특사를 받고 비로소 서로 모여 살았다.”

김덕함은 형 덕겸과 더불어 청렴으로 유명했다. 이 또한 부친의 삶에서 보고 배운 것으로 사료된다. 김덕함의 부친 김홍의 묘지의 한 대목이다.

“처음에 공의 5대조인 호군 승부(承富)가 죽자 아내 유씨(柳氏)가 외아들을 데리고 상주에서 백천(白川)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살았는데, 공의 아버지 홍(洪)에 이르러 스스로 집안이 대대로 부진(不振)한 것을 상심하여 아우 택(澤)과 더불어 꾀하기를, ‘형제가 모두 학업에만 종사하고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으니 살 수가 없다.’ 하여 마침내 그 아우를 면려시켜 문학에 전념하게 하고 홍은 힘써 농사지어 두 집 생활을 하였다. 김택은 과거에 올라 홍문관 정자가 되고 벼슬이 감찰에 이르렀으며 김홍의 두 아들 덕겸(德謙)은 과거에 오르고 또 중시(重試)에 뽑혀 벼슬이 도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그 다음이 공이니, 사람들이 조상의 음덕의 갚음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화로 알아보는 이순신


일화로 알아보는 이순신

 

이긍익이 <연려실기술> ‘선조조의 명신’ 조에 이순신을 두었다. 요즘에는 이순신을 주제로 한 소설이나 영화 등도 있고 해서 이순신에 대해 많이 알려진 바가 있지만 <연려실기술>은 1차 자료 격이다.

이순신은 자가 여해(汝諧)이고 본관은 덕수(德水)로 정정공(貞靖公) 변(邊)의 현손(玄孫)이다. 을사년(1545)에 나서 병자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를 역임하고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무공(忠武公)이다. 무술년(1598)에 죽으니 나이 54세였다.

“젊어서부터 똑똑하고 깨끗하여 얽매이지 않았고, 여러 아이들과 놀 때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네 안에서 놀다가 뜻에 거스르는 자를 만나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그 문 앞을 다니지 못하였다. 장성함에 이르러 유학에 종사하니 더욱 글씨에 능하였고, 20세에 무예(武藝)를 배웠다.”

동네 안에서 놀다가 뜻을 거스르는 자를 만나면 그 눈을 쏘려고 해서 어른들도 모두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는 섬뜩하기도 하지만 신체에서 가장 예민하면서도 치명적인 손상을 받을 수 있는 눈을 공격하려 했다니 무장의 기재가 드러난다.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에게 서녀(庶女)가 있는데 이순신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려고 하니, 이순신이 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내가 벼슬길에 나와서 어찌 감히 권문(權門)에 종적을 의탁해서 출세를 매개하리요.’

하였다.”

“이순신이 일찍이 과거(武科)에 응시하여 강(講)에 나갔을 때, 장량전(張良傳)에 이르러 시험관이 말하기를, ‘장량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았다 하니 진짜 죽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강목(綱目>에 유후(留侯) 장량이 죽었다고 썼으니, 장량의 뜻이 어찌 신선이 되려고 했습니까.‘ 하자 온 좌중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이순신이 유학을 겸비한 무장이었음은 그의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이런 일화를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이순신이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되어 정해년(1587)에 조정에서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는데, 그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 지역이 너무 멀고 병정이 적었기 때문에 누차 군사를 증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8월에 비적(匪賊)이 전채(田寨 둔전 목책)를 습격하여 포위하자 이순신 선두에 있는 붉은 털옷을 입은 자 수 명을 연속해서 사살(射殺)하고, 추격하여 잡혀가는 남녀 60여 명을 탈환하였다. 한창 교전하다가 공이 화살에 맞았는데 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으면서 안색을 변하지 않아 온 군중에 아는 자가 없었다.”

생사가 교차하는 전장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는 장수로서 이순신의 위엄이 느껴진다. 이런 기개와 강인함이 있었기에 국난에 처한 조선을 구해내는 중임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전쟁에 승리할 때마다 장수들을 경계하기를, ‘승리를 거듭하면 반드시 교만해지는 법이니 여러 장수들은 근신하라.’ 하였다.”

“이순신이 군중에 있은 지 6년에 본도의 군량 저축이 줄어들어 공급할 수 없음을 보고 드디어 어전(魚箭)과 염전(鹽田)을 크게 개설하고 둔전(屯田)을 널리 설치하는 등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대를 돕는 것에 용감하게 나갈 뿐 주저하지 않기를 마치 기욕(嗜慾)처럼 하여 조금도 빠뜨림이 없었기 때문에 군량의 여유가 있어 일찍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이순신이 발포만호(鉢浦萬戶)가 되어서도 공은 기질이 곧아서 아부하지 않았다. 주장이 사람을 보내어 성[堡]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고 하자 공은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관가의 나무이다. 심은 사람이 뜻이 있었을 것인데 베는 사람은 또 무슨 뜻이냐.’ 하니, 주장이 노하여 공을 중상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공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아주 적은 죄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장수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지휘해야 하는데, 병졸들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여 상하가 일치단결하는 것이 제일 첫 번째 조건이다. 부하들이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서는 장수가 부하들로부터 믿음을 얻어야 한다. 그 믿음은 공정함에서 나온다. 이 공정함은 어떤 위세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강직함에서 나온다. 오동나무를 베는 것과 관련된 사소한 일화처럼 보이지만 이순신이 절대 수세의 국면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끈 힘을 엿볼 수 있다.

“이순신이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게 되면 국가에 목숨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밭을 가는 것도 족하다. 만약 권귀(權貴)에게 아첨하여 한때의 영화를 훔친다면 나는 몹시 부끄러워 할 것이다.’

하였다. 장수가 됨에 이르러서도 이 도를 지키고 변하지 않았다. 사람을 응접할 때 화평하고 친절하며 경계가 없었으나, 일을 당해서는 과감하게 판단하고 조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군에 있는 7년 동안 몸과 마음이 몹시 고통스러워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상을 얻으면 반드시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겨 두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원균(元均)과 더불어 오랫동안 서로 화목하지 않았는데, 이순신이 일찍이 그 자제에게 경계하기를,

‘마땅히 저들에게 공이 있다고 말하고 잘못은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순신이 죽자 그 죽음을 비밀에 붙였는데, 진린이 배 위에서 조선 군사들이 적의 머리를 베려고 다투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통제사가 죽었구나.’ 하니, 좌우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자, 진린이 말하기를, ‘내가 통제사를 보니 군율(軍律)이 몹시 엄했는데, 이제 그 배에서 머리를 베려고 다투느라 어지러운 것을 보니, 이는 호령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조정에서 우의정에 추증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명나라의 장수 형개(形玠)가 말하기를, ‘마땅히 바닷가에 사당을 세워 충혼(忠魂)을 표창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자 해변 사람들이 서로 힘을 모아 사당을 세워 충민(忠愍)이라고 이름하고 좌수영(左水營)에 있다. 군졸들이 또한 비석을 세우고 타루비(墮淚碑)라고 이름하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닭 한 마리로 세금을 걷어 들인 우복룡(禹伏龍)


닭 한 마리로 세금을 걷어 들인 우복룡(禹伏龍)

 

조경이 지은 우복룡의 비명(碑銘)이 <국조인물고>에 실려 있는데 우복룡이 성균관 유생이었을 적의 일화를 소개한다. 젊은 시절 우복룡의 기개가 잘 드러난다.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였다. 관례에 대과시(大課試) 때는 삼공(三公)이 육조 당상을 이끌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으면 제생들이 뜰아래에서 절을 올렸다. 공은 홀로 읍(揖)만 하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앞이 아닌데 선비가 뜰에서 절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수상(首相) 인재(忍齋) 홍섬(洪暹)이 종백(宗伯, 예조판서)을 시켜 공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까닭을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옛날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께서 일찍이 수상(首相)이 벽옹(辟雍, 성균관)에 임할 때는 인신(人臣)들과 차별을 두고자 제생(諸生)으로 하여금 뜰아래에서 절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예가 아니라고 하여 바로 고쳤는데,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에 이르러 사림(士林)을 원수처럼 보아서 다시 배례(拜禮)를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평소 이를 통한(痛恨)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였다. 좌상(左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이 유생의 소견이 옳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다.”

하고는 인하여 제재(諸宰)와 의논하여 절하는 것을 읍만 하는 것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 날에 복례부(復禮賦)란 제목으로 출제하여 제생을 시험했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했으며 얼마 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국자장(國子長)이 되어 유자부(儒字賦)란 제목으로 출제하여 제생을 시험했는데 공이 또 수석을 차지하였다. 고봉이 공을 앞으로 나와 자리에 앉게 하면서 이르기를,

‘후일 사문(斯文)이 자네에게 의탁하게 될 것이다.’

하니, 이때부터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아울러 조경은 우복룡이 언론과 풍채만이 아니라 정사에도 능한 유자임을 밝혔다.

“공은 약관(弱冠)에 행촌(涬村, 민순)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 배우려는 자들이 성대하게 모여들었으나 선생이 유독 공을 칭찬하여 호걸스러운 선비로 허여하니, 일시의 동배(同輩)들 역시 이의가 없었다. 조정에 서서는 언론과 풍채가 모두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족했으며, 더군다나 임진왜란 시기에는 정사(政事)를 안동(安東) 수령으로 시작하여 강화(江華)에서 마쳤는데 그 설시하고 조치한 바와 임기응변이 모두 사람들의 의표(意表)를 벗어났으니, 호걸스러운 선비가 아니라면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우복룡이 임기응변에 능한 호걸스러운 선비임을 <연려실기술>은 <자해필담(紫海筆談)>을 인용하여 보여준다.

 

“공은 지혜가 많고 유학을 겸하여, 관에 있을 때 엄하게 하지 않아도 일이 이루어졌다. 한번은 촌백성 하나가 조세(租稅)를 체납하고도 너무 가난해서 갚지 못하고 있으니, 공이 말하기를,

‘너가 아무리 가난해도 나라의 곡물을 어찌 납입하지 않을 수 있느냐. 네 집에 있는 물건으로 대신 바칠 수 있겠느냐?’

하자, 백성이 말하기를,

‘가난하여 다른 물건은 없고 다만 닭 한 마리가 있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닭을 삶아 오너라. 내가 먹고 네가 갚을 곡식을 감해주마.’

하였다. 백성이 이 말을 믿고, 다음 날 닭을 삶아 바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장난한 것이었다. 어찌 원으로서 백성의 닭을 먹고 국가의 곡식을 축내는 자가 있단 말이냐. 속히 가거라.’

하여 백성이 문밖으로 나가니, 여러 아전들이 모두 나누어 먹어버렸다. 조금 있다가 공이 백성을 불러 말하기를,

‘다시 생각하니, 이미 너로 하여금 닭을 잡아오게 하고 또 받지도 않는다면 이는 너를 속이는 것이니, 네 닭을 도로 가져오면 마땅히 약속대로 하겠다.’

하니, 백성이 사실대로 고하자 공이 드디어 여러 아전의 성명 밑에 분배하여 그 조세를 징수하니 즉시 모였다. 이에 여러 아전이 놀라서 굴복하고 속이지 못하였다.”

 

<자해필담>은 다른 일화도 소개한다.

“공이 안동(安東)에 있을 때에 명나라 장수가 대군을 인솔하고 부중(府中)에 들어와서, 어떤 일로 공에게 노하여 공을 욕보이려고 불시에 태평소(太平簫) 30개로 전도(前導)하라고 하였다. 이에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공은 걱정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부민(富民)의 집에 가서 작은 촛대 수십 개를 빌려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퉁소를 잡는 형상과 같이 가지게 하고 사이사이에 태평소를 끼어서 행진하도록 하니, 퉁소소리가 요란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보고 모두 퉁소인 줄 알고 횡포를 부리지 못하고 갔으니, 공이 급한 일을 당하여 군색하지 않게 변통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그런데 우복룡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사건이 있으니 의병들을 반란군으로 몰아 학살했다는 내용이다.

“(경북 예천) 용궁 현감 우복룡이 고을 군대를 거느리고 가던 중 (경북) 영천 길가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하양 (의병) 군사 수백 명이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군사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우복룡이 괘씸히 여겨 ‘너희들은 반란군이로구나’ 하고 꾸짖었다. 하양 군사들은 권응수 방어사에게 가라는 박진 병사의 공문을 내보였다. 하지만 우복룡은 자기 군사를 시켜 그들을 포위한 다음 모두 쳐 죽여 시체가 들에 가득했다.

그러나 김수 순찰사는 도리어 우복룡에게 공이 있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그래서 우복룡은 정희적을 대신하여 안동 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하양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 과부들은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을 만나기만 하면 말머리를 가로막고 울면서 원통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우복룡은 이미 이름이 높던 터라 아무도 그들을 위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복룡 사건을 기록으로 전하는 진원지는 <징비록>이다. 이 사건은 조경남(1570∼1641)의 <난중잡록>과 신경(1613∼1653)의 <재조번방지>에도 전하지만, 특히 유성룡(1542∼1607)의 <징비록>에 실려 있다.

한편 조경이 이 일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지만 우복룡을 신원하는 내용을 적어두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과 동래가 먼저 함락되고 다른 여러 군(郡)이 차례로 무너져 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패배한 군졸들이 모여서 도둑이 되어 관군(官軍)을 침탈하였다. 공이 안동(安東)ㆍ영주(榮州)ㆍ비안(比安)ㆍ군위(軍威)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급히 경주로 달려가다가 반졸(叛卒)을 만나자 염탐하여 수창(首倡)한 자 3인을 찾아 죽이고 그 나머지는 석방하여 스스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하였다.

경주 30리 못 미쳐서 영주 군대와 함께 대치하여 진을 쳤는데 밤중에 또 반졸이 떠들썩하게 외치며 일어났다. 영주의 대장(代將)이 화살을 맞아 즉사하였으나 공은 다행히 기강(紀綱)이 있는 종복(從僕)에게 힘입어 겨우 면하였다. 날이 밝자 공은 부오(部伍)를 정돈하여 부대를 재촉해 나아가니, 반졸들이 모두 흩어졌다. 마침내 경주성(慶州城)으로 들어가 군사를 주장에게 소속시키고 즉시 용궁현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모두 조수(鳥獸)처럼 흩어져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은 부로(父老)와 자제(子弟)들을 불러 충의심으로 격려하여 군사 3천여 명을 모아 곧장 왜적과 충돌해서 수십 합(合)을 싸우니, 왜구들이 전진하지 못해 용궁현만은 온전하였다. 강좌(江左) 인사들이 공이 힘껏 싸운 형상을 행재소(行在所)에 상소하여 알리니, 붉은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후에 유언비어(流言蜚語)로 중산(中山)의 모함을 입었으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공이 영남을 체찰하면서 당시의 일을 조사하여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에 힘입어 공의 일이 크게 신원(伸寃)되었다.”

임란 초기에 우복룡이 용궁 현감으로 고을을 지킨 일은 조정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이후로 조선군은 연전연패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선조실록>에는 승리를 뜻하는 ‘승(勝)’ 또는 ‘첩(捷)’이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복룡이 용궁 현감으로 고을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비변사는 선조에게

“용궁(경북 예천군 용궁면) 현감 우복룡(禹伏龍)은 여러 고을이 무너질 때 유일하게 자기 고을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나가서 싸우기까지 하였으니 그 공로가 적지 않습니다, 특별히 크게 가자(加資, 벼슬의 등급을 올림)하여 다른 사람들의 모범을 삼으소서”

하고 건의한다. 그리고 선조가 이를 허락했다.

조경의 글에 의하자면 우복룡 사건은 신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서애의 <징비록>에 소위 우복룡 사건이 기록되어 현재에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진위를 반드시 따져야겠지만 기록의 무서움을 새삼 알려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국역 국조인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