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후(金鍾厚, 1721-1780)-2


김종후(金鍾厚, 1721-1780)-2                            PDF Download

 

김종후는 자는 자정(子靜)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호는 본암(本庵) 또는 진재(眞齋)이다. 할아버지는 참판 김희로(金希魯, 1673-1753)이고, 아버지는 시직(侍直) 김치만(金致萬, 1697- 1753)이며, 동생이 김종수(金鍾秀, 1728-1799)이다.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문인이다.

조부 김희로는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04년 빙고별검(氷庫別檢)·경력(經歷) 등을 지냈다. 경종이 다병무자(多病無子)함을 들어 왕세제(王世弟: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형 김재로(金在魯)와 함께 파직당하여 위원(渭原)에 유배당하였다. 그러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세력을 얻게 되자 공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호조참판·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김치만은 1720년(경종 즉위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강릉참봉이 되었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 등을 역임하였다. 1736년(영조 12)에 자신의 딸과 영조의 조카 낙천군(洛天君) 이온(李縕)과의 혼인을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투옥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글씨로는 이도곡묘갈명(李陶谷墓碣銘)을 남겼다.

 

스승 정암(貞庵) 민우수는 김창협과 권상하의 문인이다. 20세 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21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후에 1743년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750년 통정(通政)으로 승차(陞差)하면서 공조참의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었다. 1751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성균관좨주·세자찬선(世子贊善)·원손보양관 등을 역임하였다.

동생 김종수는 1768년(영조 4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조정랑, 부수찬(副修撰)을 지내고, 왕세손 필선(弼善)으로 성실히 보좌하였다. 이 때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

 

영조가 죽자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그 뒤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제학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 대제학에 올랐고, 그 뒤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789년 우의정에 올랐다. 임성주(任聖周)·윤시동(尹蓍東)·김상묵(金尙默) 등과 친하게 교유했다. 정조는 윤시동·채제공과 더불어 3인을 자신의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의 기둥으로 지적하였다.

김종후는 어려서부터 사부(詞賦)에 능하여 문명이 있었고, 1741년(영조 17) 생원이 된 뒤부터는 성리학자로 알려졌다. 1776년 지평(持平)에 이어 장령(掌令)·경연관을 역임하였다. 이에 17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령이 되고 경연관을 거쳐 자의(諮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장헌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김구주(金龜柱)와 입장을 같이 하였다. 그 뒤 김구주(金龜柱, 1740-1786)가 제거되자 원빈(元嬪)의 오빠인 세도가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을 따랐다. 다시 원빈이 죽고 홍국영이 물러나자 소를 올려, 그에게 기만당하였다고 변명하였다.

 

김구주는 영조의 계비로 선조 초년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시파를 대거 숙청한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오빠다. 누이가 영조의 계비(繼妃)가 됨에 따라 음보에 의하여 벼슬에 올라 궁중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1762년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무고하여 죽게 하였으며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76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으며 강원도관찰사·좌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의 외조 홍봉한(洪鳳漢)을 모함하여 왕세손의 지위를 위협하였다. 이때부터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대립이 싹트기 시작하여 벽파의 영수(領袖)로서의 지위에 올랐다. 정조가 즉위하자 흑산도에 유배되었고, 1779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784년 왕세자 책봉 때 특사령으로 나주에 옮겨졌으나 병사했다.

 

홍국영은 1771년(영조 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설서가 되었다. 이 때 영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그 소생인 손자(뒤의 정조)를 후계로 정하였다. 영조 말년 벽파의 횡포 속에서 세손을 보호한 공로로 세손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홍인한·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해 실각시켰다. 정조가 즉위하자 곧 동부승지로 특진하였다.

그 뒤 날랜 군사를 뽑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해 숙위대장을 겸직하는 등 왕궁호위를 전담하고 도승지에 올랐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조정 백관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도 그의 말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모든 관리들이 그의 명령을 얻어야 행동할 수 있어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1778년(정조 2)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바쳐 원빈(元嬪)으로 삼아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원빈이 20세도 못 된 나이로 1년 만에 병들어 죽는다.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1780년 음식에 독약을 섞어 왕비를 독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집권 4년 만에 축출 당했다.

 

정조 4년(1780)에 김종후의 졸기가 기록되어 있다.

“장령 김종후(金鍾厚)가 졸하였다. 김종후의 자는 백고(伯高)인데,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曾孫)이며 김종수(金鍾秀)의 형이다. 영조 때 경학과 품행으로 천거되었고 지금 주상이 즉위하여 경연관으로 누차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항상 명의(名義)를 가지고 스스로 자랑하였었는데, 홍국영(洪國榮)이 축출될 적에 상소하여 보류하기를 요청하면서 몹시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하였으므로 식자들이 그의 창피함을 비웃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특별히 은전을 베풀 것을 명하였다. 그에게 본암집(本庵集)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문행(金文行, 1701-1754)-2


김문행(金文行, 1701-1754)-2                            PDF Download

 

김문행은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사빈(士彬), 호는 화음(華陰)이다. 증조부는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고, 조부는 김창국(金昌國)이며, 부친은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낸 김치겸(金致謙)이다.

증조부 김수증은 1670년(현종 11)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리에 복거(卜居 : 살만한 곳을 가려져 정함)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이때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이름 짓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였다.

그 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김수항 등이 죽자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했다.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조부 김창국은 숙종의 후궁인 영빈김씨(寧嬪金氏)의 아버지이다. 1681년(숙종 7)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빙고별감(氷庫別監)이 되었다. 장악원주부·첨정·의금부도사·공조좌랑(工曹左郞) 등을 지냈으며, 이후 동궁의 시위를 담당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찬(翊贊)이 되었다. 또 익위(翊衛)·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등을 지냈으며, 이후 외직으로 나가 여러 고을의 현감과 군수를 지냈다. 1707년(숙종 33)에는 관직이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천부사(成川副使)에 이르렀다

 

부친 김치겸은 김창흡의 아들인데, 김창국(金昌國)이 두 딸을 낳고 아들이 없으므로 종제(從弟) 김창흡(金昌翕)의 아들인 김치겸(金致謙)을 후사로 삼았다.

김문행은 1726년(영조 2)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 1746년(영조 2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다음해인 1747년 수찬(修撰), 겸사서(兼司書), 겸문학(兼文學), 부교리, 응교(應敎)를 역임했다. 1748년에는 사간(司諫), 보덕(輔德), 익선(翊善) 및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을 역임했다. 1753년에는 승지(承旨)에 올랐고, 좌승지(左承旨)와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문행과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인연도 언급할 만하다. 황윤석은 자는 영수(永叟)이고 호는 이재(頤齋)로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배워 널리 백가에 통하였다. 특히 수학과 천문에 당대 제일의 학자로 평가받았다. 『이재유고(頤齋遺稿)』·『이재속고(頤齋續稿)』·『이수신편(理藪新編)』·『자지록(恣知錄)』이 있다. 이 중 『이재유고』에 「자모변(字母辨)」·「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 등이 있어 국어학사의 연구대상이 되며, 운학에 대한 연구는 『이수신편』에 실려 있다.

처음 황윤석이 김문행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과거에 전념할 것이 아닌 것을 알고 경학을 공부한다면 재종제인 김원행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소개하여 황윤석이 김원행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곳에서 만난 홍대용과 절친한 우정을 나눈다.

 

구한말에 대원군이 ⌈이수신편(理藪新編)⌋을 구한 적이 있었다. 대원군이 이 책을 수소문한다는 소문을 접한 황윤석(黃胤錫)의 6대 후손은 집에 보관되어 있던 ⌈이수신편(理藪新編)⌋을 가지고 서울 운현궁으로 찾아가 바쳤다. 대원군이

“네 소원이 무엇이냐?”

라고 하자,

“전라도 순창 회문산(回文山)에 있는 명당인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에 묘를 한자리 쓰는 것이 소원입니다.”

라고 했다. 다섯 신선이 모여 바둑을 두고 있는 형상이라고 알려진 이 묏자리는 당시 호남 최고의 음택지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는 만일사(萬日寺)라고 하는 절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만일사(萬日寺)는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위하여 기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이성계가 무학을 만나러 만일사(萬日寺)에 왔다가 절 아래의 동네에서 고추장을 맛보았는데 이 고추장이 바로 오늘날 순창이 고추장의 명소로 알려지게 된 계기이다. 결국 대원군의 명에 의하여 만일사(萬日寺)는 산 아래쪽으로 이전해야만 했고, 원래 있던 절 자리에 황씨 집안이 묘를 쓰게 되었다.

 

<참고자료>

국역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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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수(徐逈修, 1725-17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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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수는 자는 사의(士毅), 호는 직재(直齋)이고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할아버지는 서종대(徐宗大)이고, 아버지는 현령 서명훈(徐命勳)이다. 이재(李縡)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김원행의 딸을 배필로 맞이했고, 대사성 서유망(徐有望)이 아들이다.

스승 이재는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다.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했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스승 김원행은 이재의 수제자로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이재(李縡)의 문인이고 조선 후기 집권 계층인 노론 가문의 후손으로 학통을 잇는 존재로서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였다. 당시 유수한 산림(山林)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다.

서형수는 1751년(영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척신(戚臣) 홍계희(洪啓禧) 등 요인들이 교유를 청해온 것을 거절하여 관계의 진출이 늦어졌다.

 

1771년 교리로서 척신의 자제가 대거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폐단의 시정을 촉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승지로서 국가 대훈자(大勳者)의 특전이 너무 지나침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였다. 그 해 벽파(僻派)를 탄핵하였다가 면직당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1773년 승지로 재기용된 뒤 대사간·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776년(정조 즉위년) 공조참의에 이르러 홍인한(洪麟漢)·이득신(李得臣) 일파의 전횡을 바로잡을 것을 계속 주장하였고, 그 뒤 대사간·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서형수의 딸인 영수합(令壽閤) 서씨는 조선 후기의 여성시인으로서 학문이 뛰어나고 겸손한 인품에 승지 홍인모(洪仁謨)에게 출가하여 자식들까지 훌륭하게 키웠다.

 

조모가 “여자가 글을 잘하면 명이 짧다.”고 하여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하여 형제들 곁에서 외우는 것을 듣고 깨우쳐 경적(經籍)을 널리 섭렵하였다. 출가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홍석주(洪奭周), 홍길주(洪吉周), 홍현주(洪顯周), 유한당(幽閑堂) 홍원주(洪原周) 모두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들이었다. 문집으로 ⌈영수합고(令壽閤稿)⌋가 있다.

 

영수합고(令壽閤稿)는 1권으로 된 목활자본이다. 서씨의 남편 홍인모(洪仁謨)의 유고집인 『족수당집(足睡堂集)』 6권에 부록으로 편록 되었다. 영수합 서씨가 죽은 이듬해 아들들이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1824년(순조 24)에 쓴 홍길주(洪吉周)의 발문과 홍현주(洪顯周)의 후기가 있다.

 

오언과 칠언의 절구 및 율시가 192수 실려 있으며, 1813년에 쓴 홍석주(洪奭周)의 묘표와 정경부인행장(貞敬夫人行狀)이 있다.

“선비성정은 똑바르다[先妣性情正].”

고 아들들이 평하였던 바와 같이 수록작품은 대체로 규범적이요, 윤리·도덕적인 내용을 많이 썼고, 중국문장가들의 시문을 차운한 것이 많다.

 

맨 처음 실린 「기장아부연행중(寄長兒赴燕行中)」에는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주요작품으로 「차이백추하형문(次李白秋下荊門)」과 「차당인방은자불우(次唐人訪隱者不遇)」·「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 등이 있는데, 대부분 당시(唐詩)에 차운한 것이다.

 

<참고문헌>

국영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언호(兪彦鎬, 1730-1796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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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호는 자는 사경(士京)이고 호는 칙지헌(則止軒)으로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아버지는 우윤 유직기(兪直基)이다. 형이 은일로 이조참의에 천거된 유언집(兪彦鏶, 1714-1783)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교분이 깊었다.

박지원은 서울 명문가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박필균이고 박지원보다 12세 위의 팔촌 형 박명원(朴明源)은 영조의 사위였다. 영조는 가장 귀여워했던 딸을 박명원에게 시집보냈다. 딸이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위를 총애했다.

 

박지원은 1778년에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금천군 연암골로 숨어들었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홍국영의 눈 밖에 났던 게 화근이었다. 박지원을 아꼈던 유언호는 서울을 떠나 있을 것을 권유하였고 박지원은 그의 말대로 연암골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이 바로 박지원의 서재 연암산방(燕岩山房)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아주 길지는 않았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박지원은 죽을 때까지 연암이란 호를 썼다.

그로부터 2년 뒤,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고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쓰게 된다. 이 책이 등장하자 젊은이들은 그의 문체를 따라 썼고 박지원의 명성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유언호의 형 유언집은 자는 사호(士鎬)이고 호는 대재(大齋)로 권상하(權尙夏)·이재(李縡)의 문인이다. 부친 유직기가 『소학』의 「가언」과 「선행」편의 내용을 정리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유언집이 『대동가언선행』을 편집했다. 『대동가언선행』은 아동 교육서이긴 하지만 누구나 본받을만한 훌륭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은 대체로 『격몽요결(擊蒙要訣)』·『성학집요(聖學輯要)』·『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 등에서 해당 내용을 뽑아 정리하였다.

유언집은 학행이 있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정조 1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1778년(정조 2) 경연관이 되었으며, 1783년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어 원자를 보도(輔導)하였다. 그 뒤 이조참의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 해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었다. 이후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이라 공격해 이를 배척하는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을 만들자 권진응(權震應)·김문순(金文淳) 등과 함께 상소해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다.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에 대한 내용은 ⌈영조실록⌋40년 조에 그 대략이 나온다.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인정전 월대에서 지영하였다.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다. 고금 당론(黨論)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이유에 대해 두루 서술하고 또 어진 사람과 사특한 사람이 진퇴하는 의의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무릇 1백여 글자가 되었다.

이는 대체로 신경의 상소에 조화시켜 보려는 신하를 배척하여 산림의 선비가 또 하나의 당을 이루고 있다고 여겨 만약 근원을 통렬히 깨뜨리지 않으면 그 해가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를 책자로 만들어 《엄제방유곤록(嚴隄防裕昆錄)》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간행하여 사고에 넣어두라고 명하였다.”

 

유언집은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했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자신의 이름이 ⌈명의록⌋에 올라 있기도 하다. 본 편찬사업은 정조 1년 3월에 마무리되었는데, 김치인(金致仁) 등이 올린 차자(箚子)에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신 등은 명을 받고 삼가 두려워하여 주야로 편찬하면서 먼저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를 권수(卷首)에 드러내어 그 체단(體段)을 높였고 다음에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의하여 일·월(日月)을 차서(次序)하였으며 사실을 뽑고 문자(文字)를 조절하여 시종(始終)을 다 실었으며 금오(金吾)의 문안(文案)을 참고하여 국정(鞫情)을 다 실었고 간간이 조정의 계사(啓辭)와 소장(疏章)을 실어 국론(國論)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단락(段落)마다 번번이 논단(論斷)을 붙여 옛날 사신(史臣)의 주폄(誅貶)한 뜻을 모방하였습니다. 편집(編輯)한 규모는 한결같이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의거하였고 범례(凡例)와 대의(大義)는 모두 예재(睿栽)의 품지(稟旨)를 거쳤습니다. 국(局)을 설치한 지 4개월 만에 비로소 끝마쳤는데 책이 모두 3편(編)입니다. 신 등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봉진(封進)합니다.”

 

그 뒤 이조참의·개성유수·규장각직제학·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정조 11)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과 희빈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향리에 칩거했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정조 즉위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또, 영조 때 탕평책 하에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고 개정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해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는 ⌈칙지헌집⌋이 있다. 1802년(순조 2)에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원행(金元行, 1702-1772)-2


김원행(金元行, 1702-1772)-2                            PDF Download

 

김원행은 자가 백춘(伯春)이고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미호(渼湖)다. 아버지는 승지 김제겸(金濟謙)이다. 당숙인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어 종조부 김창협(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김창협의 수제자인 이재(李縡)의 문인이고 조선 후기 집권 계층인 노론 가문의 후손으로 학통을 잇는 존재로서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자였다. 당시 유수한 산림(山林)의 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다.

당시는 율곡학파 학맥을 계승한 송시열(宋時烈)의 주제자인 권상하(權尙夏) 문하에서 발생한 호락논쟁이 뜨거웠다.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李柬)은 김창협의 학설을 이어 이재와 함께 낙론의 중심이 되고,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韓元震)은 권상하의 학설을 이어 호론의 중심이 되었다. 김창협의 손자이자 이재의 문인인 김원행은 자연히 낙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활동하였다.

 

김원행의 인물성론(人物性論)을 비롯하여 심설과 명덕설 등은 그의 문인 박윤원(朴胤源, 1734-1799)을 거쳐 19세기 초반 낙론을 주도한 오희상(吳熙常, 1763-1833), 홍직필(洪直弼, 1776-1852)에게 이어졌고, 20세기 초반 낙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전우(田愚, 1841-1922)에게 계승되었다. 또한 몇 사람의 실학자도 일부 배출되었는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대표적이다.

홍대용은 어려서 김원행이 주석하고 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석실서원은 안동 김씨 세거지에 있던 서원으로 김상헌(金尙憲)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홍대용이 석실서원에서 수학한 기간은 12세부터 35세까지 23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엄격한 학풍을 내면화하면서 성리학자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아울러 이 무렵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를 형성했던 인물들과 교유했다. 부친이 나주목사를 하던 시기에는 나주의 실학자인 나경적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기도 했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한 뒤 1774년(영조 50)에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1775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1776년 사헌부감찰, 1777년 태인현감, 1780년 영천군수를 지냈다. 홍대용의 학문적 업적은 1765년 초 북경(北京)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담헌서(湛軒書)』는 약간의 시·서를 제외하면 거의가 북경에서 돌아온 뒤 10여 년 사이에 쓴 것이다.

 

김원행은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옥사 때 조부 김창집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생부 김제겸과 친형인 김성행(金省行), 김탄행(金坦行) 등이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 조부·생부·형 등이 신원된 후에도 시골에 묻혀 살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후 여러 중책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740년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 받고 1750년 위솔(衛率)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1751년 익찬(翊贊) ·지평(持平), 1754년 서연관(書筵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759년 왕세손(王世孫: 正祖)이 책봉되자 세손의 교육을 위하여 영조가 그를 불러들였으나 상소를 올려 사퇴하고 응하지 않았다. 1761년 공조참의(工曹參議)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세손유선(諭善)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문집에 ⌈미호집(渼湖集)⌋이 있고 독서차록(讀書箚錄)과 미상경의(渼上經義) 등은 김원행의 경학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미호집⌋은 20권 10책으로 된 활자본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영조실록』 48년 임진(壬辰) 12월조에 ‘미호집약간권장우가(渼湖集若干卷藏于家)’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72년(영조 48) 저자 생존 시에 이미 『미호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書)에는 김시관(金時觀)과 성리설(性理說)에 관해 논란한 것, 유척기(兪拓基)와 예설에 대해 논한 것, 송명흠(宋明欽)·임성주(任聖周)·김종후(金鍾厚)·이완(李浣)·홍대용(洪大容) 등 당시의 많은 학자·문인들과 주고받은 서한들이 있다. 이 서한들에는 경의(經義)·심성(心性)·이기(理氣)·예설·사론(史論) 등에 관한 내용이 많아, 훈고학(訓詁學) 및 성리학에 관한 저자의 학문적인 영역이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잡저 가운데 「잡기(雜記)」·「도곡수기(陶谷隨記)」 등은 독서를 하다가 학문에 관해 생각나는 대로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다. 「명덕설의문(明德說疑問)」·「중용귀신설(中庸鬼神說)」·「심성기질설시이민철(心性氣質說示李敏哲)」 등은 유가의 경전이나 성리설에 관해 논변한 내용들이다.

독서차록(讀書箚錄)』은 김원행이 『중용』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책으로,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 및 전(傳) 1장부터 33장까지 장별로 각 구절의 논리적 맥락을 분석하고 이를 풀이하였다. 김원행의 경학과 관련된 저술은 대부분 『중용』관련 저술에 집중되어 있다.

독서차록』과 함께 『중용문답(中庸問答)』·『중용강설(中庸講說)』이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미호강의(渼湖講義)』·『미상경의(渼上經義)』에서도 『중용』의 비중이 역시 크다.

 

미상경의(渼上經義)는 김원행이 동료 학자나 문인과 도학(道學)의 중요 경전과 문헌에 대해 논의한 서신을 경전별로 분류한 저서이다. 이 책의 구성은 우선 『소학』에서 시작하여 사서(四書)·삼경(三經)을 거쳐 「태극도(太極圖)」·『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에서 끝난다. 노론 낙론계의 주요인물인 김원행의 경학사상이 경전별로 분류되어 있어서 18세기 낙론계의 사상적 쟁점과 문제의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재(李縡, 1680-1746)-2


이재(李縡, 1680-1746)-2                                      PDF Download

 

이재는 김창협의 수제자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다.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이다. 영조 연간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에서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다.

김창협은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에 출사하였다. 이어서 병조좌랑·사헌부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좌랑·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이조정랑·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었으며,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김숭겸표(金崇謙表)」·「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의 작품을 남겼다.

이재는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그의 문하에 김원행, 송명흠, 임성주 등 출중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재는 숙종 경신년(1680) 9월 28일에 태어났다. 임신 중에 민 부인이 달이 수중에 드는 꿈을 꾸었는데 광채가 방에 가득하였다. 5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작은아버지인 충숙공이 열성적으로 지도하였고 안으로는 민 부인의 인도가 또한 엄격하였다.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 ⌈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부교리·응교·필선·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 1715년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을 때 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신축년(1721) 겨울에 경종이 왕세제인 연잉군(훗날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소론 측에서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대신들이 백료를 이끌고 명을 거두기를 정청(庭請)했는데 참여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신임옥사에서 중부 충숙공 이만성(李晩成)이 조옥(詔獄)에 유폐되어 죽자 예로써 염장(斂葬)하고 인제 골짜기로 들어가 더욱 경전에 힘써 날마다 과정을 두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해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 되었다.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예학(禮學)에 밝아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사례편람⌋은 예학에 관한 깊은 조예를 토대로 편술되었다. 당시 거의 맹목적으로 시행하던 주자 ⌈가례⌋의 허점을 보완하면서 이를 현실적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요령 있게 엮었다. ⌈가례⌋는 원칙만의 편술이기 때문에 사용할 적에 어려움이 있었다.

상례(喪禮)는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주로 참고하고 현실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관행을 많이 수용하였다. 제례(祭禮) 역시 시속(時俗)의 예제(禮制)를 도외시하지 않았다. 관례(冠禮)와 혼례(婚禮)의 경우는 마땅한 준칙이 별로 없어서 ⌈가례⌋의 고례(古禮)와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대폭 보충하여 서로의 차이점을 찾고 그 옳고 잘못됨을 그 나름으로 고석(考釋)하여 판별하였다.

사례편람⌋은 이재가 죽은 뒤 그 자손들에 의해서 다시 수정되고 정사되어 비로소 완벽한 체제가 이루어졌지만 바로 간행되지 못했다. 이재의 증손인 광정(光正)이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있던 1844년(헌종 10)에 간행되었다. 이때 도록을 부록으로 붙였다. 그 뒤 황필수(黃泌秀)·지송욱(池松旭) 등이 ⌈사례편람⌋에 보정을 더해서 ⌈증보사례편람⌋이라 하여 1900년에 다시 간행하였다.

사례편람⌋은 편술자인 이재의 명성도 있었겠지만 특색 있는 편술방법, 그리고 요령 있게 꾸며진 여러 학자들 주장의 이동(異同)과 그 고정(考正)이 있어서 사례를 행용하는 데 도움이 컸다. ⌈가례⌋의 원칙을 지키되 시속과의 묘미 있는 절충과 예의 보편성의 추구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기 마련인 예속의 당위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되고 세상에 보급된 후에 편술된 많은 사례관계의 예서는 거의 이 책에 기준하여 편술되었고, 사회에서 시용되는 예속 역시 여기에 기준하여 행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되고 이용된 예서 가운데 ⌈사례편람⌋의 이용도가 가장 영향력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실록⌋ 22년 조에 이재의 졸기가 실려 있다. 사관의 기록을 통해 그 대강을 살필 수 있다.

“지중추부사 이재(李縡)가 졸(卒)하였다. 이재의 자는 희경(熙卿)이요, 본관은 우봉(牛峯)이니, 고 상신(相臣) 이숙(李䎘)의 손자였다. 품성이 맑고 순수하며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인망이 당대에 뛰어났었다. 신축년·임인년의 화가 일어났을 적에 그의 숙부인 판서 이만성(李晩成)이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죽자 어머니를 모시고 인제(麟蹄)의 설악산으로 은퇴하여 벼슬길에 생각을 끊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을사년 경화(更化, 바꾸고 새롭게 함) 이후에는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단 한 번 서울에 들어와서 임금을 뵙고 만언(萬言)의 봉사(封事)를 올려 입을 다물고 어물어물하기만 하는 시론(時論)의 폐단을 진술하였다. 하지만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탕평책에 뜻을 기울이고 있는 참이어서 그의 말을 등한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자 드디어 용인(龍仁)으로 물러나 살았다.

이에 사방에서 배우러 찾아온 자가 매우 많았고 근세의 모든 선비들이 그를 종장(宗匠)으로 삼았다. 한원진(韓元震)은 선정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인데 그가 심성(心性)을 논한 말이 이재의 말과 합치되지 않아서 이재가 시를 지어 변론하기도 하였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나이 67세였다. 학자들이 도암 선생(陶菴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병순(田秉淳,1816-1890)


전병순(田秉淳,1816-1890)                                  PDF Download

 

전병순은 본관은 담양(潭陽)이고 자는 이숙(彛叔), 호는 부계(扶溪) 또는 겸와(謙窩)이다. 전석채(田錫采)의 아들이다.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 조병덕(趙秉德)‧전우(田愚) 등과 교유하였다.

 

스승 홍직필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출중하여 7세 때 이미 문장을 지었다. 그리고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오랜 교유를 나눈 오희상(吳熙常)은 유종(儒宗: 유학자의 으뜸)이라 고 평했다.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을 반대하고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

고 한 주장에도 반대하였는데, 주리(主理)적 입장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홍직필의 권유로 벼슬할 기회를 가졌으나 사양하고 성리설(性理說)‧심설(心說)에 몰두하였다. 문인으로는 임철규(林哲奎)‧김낙종(金洛鍾) 등이 있다.

 

전병순은 이기(理氣)의 선후 문제는 주리(主理)‧주기(主氣)의 어떠한 시각에 입각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였다. 또한 심(心)에 갖추어진 이치를 성(性), 성이 모아진 기(器)를 심, 심성이 발한 곳을 정(情)이라 규정하였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정(情)이 발한 것으로 볼 때 주리의 입장은 사단이고, 주기의 입장은 칠정이라고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또 인심(人心)‧도심(道心)은 그 발하는 곳에 근거하여 말한 것으로서 성명(性命)에 근원하면 도심이 되고 형기(形氣)에서 생기는 것은 인심이 된다고 하였다.

대학(大學)의 명덕(明德)이 심통성정(心統性情)을 말한 것이기는 하나 심과 성은 자체로서 구별되기 때문에 심‧성을 나누어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적 배경에는 정자(程子)의 학설이 주를 이루었다. 저서에 『부계집(扶溪集)』이 있다.

 

부계집은 8권 5책으로 목활자본이다. 1913년 손자 범진(凡鎭)·익진(翼鎭)과 임철규(林哲圭)·김낙종(金洛種)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전우(田愚)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김복경(金復經)의 발문이 있다.

젊은 나이에 벼슬을 단념하고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고, 뒤에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 40여 년 간 강학에 힘써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따라서 시나 문장에서도 성리학자로서 도(道)를 추구하는 의식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자연을 노래한 시에서도 단순한 자연의 묘사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원리의 탐구와 유교적 이념에 대한 지향이 깔려 있다.

 

<참고문헌>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임헌회(任憲晦, 1811-1876)


임헌회(任憲晦, 1811-1876)                                 PDF Download

 

임헌회는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아버지는 천모(天模)이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다.

송치규는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으로 김정묵(金正默)의 문인이다. 학문은 독서궁리(讀書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반궁실천(反窮實踐)을 목표로 삼았다. 평생을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송시열의 전통을 이어받아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1798년(정조 22) 경상도관찰사 한용화(韓用和)의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원자궁강학청료(元子宮講學請僚), 1800년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와 호조좌랑, 1801년(순조 1) 사헌부지평 등에 잇따라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1804년 군자감정(軍資監正), 이듬해 사헌부집의, 1812년 세자시강원진선·공조참의, 1815년 시강원찬선·공조참판, 1816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당대의 거유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평생을 두고 벼슬을 사양한 것은 스승 김정묵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유적(儒籍)에서 제적되었기 때문으로 전한다.

 

홍직필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세 때 이미 문장을 지었다.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 유학자의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을 반대하고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고 한 주장에도 반대하였다.

임헌회는 1858년(철종 9)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장악정(掌樂正)이 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 때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 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고산문집(鼓山文集)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고제 전우는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당시의 거유(巨儒)인 신응조(申應朝)의 권고로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에게서 20년 간 배웠다. 윤치중(尹致中)ㆍ서정순(徐廷淳)과 함께 임헌회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학풍은 철저히 이이(李珥)ㆍ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1882년(고종 19) 문벌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ㆍ장령(掌令), 1906년(광무 10)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 등 보직이 있었으나 다 사퇴하고 말년에는 자손들도 버리고 서해의 계화도(界火島)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고산문집⌋은 20권 10책, 속집 4권 3책, 부록 3권 3책, 합 27권 16책으로 목활자본이다. 1883년(고종 20) 임헌회의 문인 전우(田愚) 등이 편집하여 행했으며 부록은 1932년 김종학(金鍾學)이 간행하였다. 1937년 이인구(李仁矩)가 『전재문집(全齋文集)』이라는 제목으로 석판본 20권 10책을 간행했는데, 내용은 『고산문집』과 대동소이하며, 다만 편차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書)는 그의 스승인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을 위시하여 김매순(金邁淳)·홍석주(洪奭周) 및 사우(士友) 조병덕(趙秉悳)·신응조(申應朝)·홍일순(洪一純)·김평묵(金平默)·이응진(李應辰)·소휘면(蘇輝冕), 그리고 문인 전우·서정순(徐政淳)·윤치중(尹致中)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주로 경전·예설(禮說)·성리설·태극·심성(心性)·이기(理氣) 등에 관한 논술이 많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김평묵과 왕래한 서한은 ‘명덕(明德)’에 대한 기본적 견해가 명덕주기설(明德主氣說)과 명덕주리설(明德主理說)로 차이를 나타내면서 새로운 학파적 논변으로 발전되었다.

임헌회가 명덕을 심(心)으로 파악한 점은 화서학파와 같은 입장이었지만,

“명덕이 중리(衆理)를 갖추고 있으며 만사(萬事)에 응한다.”

는 점을 심(心)의 체(體)와 용(用)으로 파악하였다. 명덕은 비록 형이하(形而下)이지만, 갖추어져 있는 바의 이(理)는 곧 형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심(心)은 형이하라고 말할 수 있지만, 갖추어져 있는바 소이연(所以然)으로 말한다면 형이상으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명덕주리·주기의 분별은 명덕의 유위(有爲)·무위(無爲)의 여부를 관찰하여보면 알 수 있는데, 이(理)가 정의(情意)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관찰하여보면, 명덕은 정의가 있고 지각(知覺)이 있는 물사(物事)이며 이(理)는 단지 정의와 지각이 없는 물사이다. 따라서 명덕은 주기적인 입장에서 파악해야 하며, 주기적인 입장이라고 하여 이(理)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임헌회는 심(心)을 이(理)로 파악하는 김평묵 등의 논의는 기(氣) 위에 나아가 이(理)를 파악하지 않고 오로지 명덕에 갖추어져 있는 이(理)와 명덕의 허령불매(虛靈不昧: 마음이 거울같이 맑고 영묘하여 무엇이나 뚜렷이 비추어 일체의 대상을 명찰함)한 상태를 함께 이(理)로 파악하는 모순을 범했다고 지적하였다.

 

조병덕에게 답한 서한에서는 「맹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에 대해

“생한 것을 성(性)이라고 이른다는 말은 대체로 생하기 전에는 성을 말할 수 없으며, 생이 있는 후에야 비로소 성이라 말할 수 있다.”

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잡저 가운데 「이계(二誡)」는 부모의 상례(喪禮)를 성경(誠敬)으로 하고, 내외(內外)를 엄하게 해서 가도(家道)를 바르게 하라는 가법을 전하고 있다. 「예의쇄록(禮儀瑣錄)」은 당시 시행되고 있던 상제례(喪祭禮)의 불합리한 점을 논한 것이며, 「제찬도설(祭饌圖說)」·「거상의(居喪議)」·「조주체봉의(祧主遞奉儀)」·「조주매안의(祧主埋安儀)」 등에서는 상제의식(喪祭儀式)에 관한 해설과 도식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간서잡록(看書雜錄)」·「경의쇄록(經義瑣錄)」은 경전상의 난해한 어구에 대하여 제현의 설을 인용하고 고증·분석하였다. 「매산선생어록(梅山先生語錄)」은 홍직필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평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전 가운데 「화망건선생전(畫網巾先生傳)」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 춘추대의를 지켜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망건선생의 일화를 기록한 글로 조선 후기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의 대명관(對明觀)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여기서 임헌회가 대명유민(大明遺民)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전재문집(全齋文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지수(李趾秀, 1779-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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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수는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계린(季麟), 호는 중산재(重山齋)이다. 형신(衡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보(熙輔)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명원(命源)이다.

19세에 서울로 올라가 족부(族父) 병원(秉源)에게 수학하였다. 병원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으로 아들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1809년(순조 9) 사마시에 합격하고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좌랑·시강원사서가 되고, 1825년 옥구현감으로 나갔다. 1831년 동부승지가 되고 1840년(헌종 6) 회양부사 등을 지내고 1842년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

옥구현감으로 있을 때는 민폐를 없애고 백성을 구휼하는 한편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다. 동부승지가 되어서는 여러 차례 소대(召對 : 왕의 부름에 의한 대좌)에 응하여 국가기본정책을 건의하였다. 만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중산재를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중산재집(重山齋集)』 8권이 있다.

 

중산재집⌋은 8권 4책으로 활자본이다. 1858년(철종 9) 손자가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달수(宋達洙)의 서문이 있다.

시에는 영회(詠懷), 또는 자연을 주제로 한 시가 많다. 「해인사유회고운(海印寺有懷孤雲)」은 해인사를 찾아가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을 돌아보고 옛일을 회고하는 시다. 「해금강(海金剛)」은 해금강의 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서경의 표현 기교가 수준 높다.

소차는 「사승선환향겸진면학소(辭承宣還鄕兼陳勉學疏)」 등 사직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며, 연설은 『맹자』 제3권 등을 경연에서 강의한 내용이다.

서(書)의 「상재상(上宰相)」과 「여이판서광정(與李判書光正)」에는 회양의 삼정 문란(三政紊亂), 특히 환곡의 폐단과 읍민의 비참한 실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밖의 글들에는 정도(正道)와 문법(文法) 등에 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잡저의 「황정십조(荒政十條)」는 당시의 시정 개혁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진심(盡心)·택인(擇人)·서력(紓力)·예비(豫備)·정초(精抄)·진급(賑給)·즙간(戢奸)·금도(禁盜)·상벌(賞罰)·고적(古蹟) 등을 열거하고 있다.

또한, 「가녀계사(家女戒辭)」는 여자가 출가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행동 규범을 상세히 기술한 것이고, 「책제(策題)」는 군자와 소인의 구별 방법, 인재 등용, 목민의 중요성 등을 기술한 내용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병문(李秉文, 1826-1888)


이병문(李秉文, 1826-1888)                                 PDF Download

 

이병문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덕여(德汝)다. 이장현(李章顯)의 손자이며 이헌도(李憲度)의 아들로 좌의정 이헌구(李憲球)에게 입양되었다. 외할아버지는 김복순(金復淳)이다.

외할아버지 김복순은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의 4세손이자 부사를 지낸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권문세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다진 김조순(金祖淳)과 친형제간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황주목사, 광주목사를 지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친 이헌구는 1816년(순조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29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그 뒤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836년(헌종 2)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고, 1841년 한성부판윤·공조판서·대사헌을, 이듬해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44년 사헌부대사헌으로 김유근(金逌根)·김홍근(金弘根)의 추죄를 주장하다가 덕원부에 유배, 이듬해 석방되어 사은 겸 동지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7년 형조판서·대사헌·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849년(철종 즉위년) 이조판서, 이듬해 예조판서·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852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 때 나이 69세로 치사(致仕)하기를 연이어 간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바로 좌의정이 되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판중추부사·광주유수(廣州留守)를 역임하는 등 치정(治政)에 힘썼다. 70세가 되어 국가로부터 궤장(几杖)을 수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청검(淸儉)하며 근면하기로 이름났다.

이병문은 1848년(헌종 14) 5월 증광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갔다. 1864년(고종 1) 충청도감사를 지내고 1867년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같은 해 9월에 예방승지를 거쳐 1870년 대사헌에 올랐다. 1874년에는 도총부도총관이 되었고 그해 12월에 형조판서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4월에 진위 겸 진향정사(陳慰兼進香正使)로 부사 조인희(趙寅熙), 서장관 정원화(鄭元和)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지의금부사·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876년 재차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에 『선원보(璿源譜)』 수정에 감인위원(監印委員)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879년 다시 형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의정부우참찬·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그해 12월 외직인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2년의 임기를 마친 뒤 1882년에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이듬해 전라도관찰사 재직 시의 장물을 취득한 일로 인하여 원악도(遠惡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아 고금도에 유폐되었다가 1884년 2월에 향리로 돌아왔고, 그해 말에 풀려났다.

 

1885년에 복직이 되어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이해에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가 그해 5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판의금부사·이조판서를 거쳐 그 해 10월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1886년 약원제조(藥院提調)를 지내고 1888년에 의정부좌참찬·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참고문헌>

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