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애민(淸白愛民) 한 김덕함(金德諴)


청백애민(淸白愛民) 한 김덕함(金德諴)

 

경기도 여주에 여주목사를 지냈던 김덕함의 청렴함을 기리는 비문이 있다. 당시 군청의 정문이었던 영월루 주위에 역대 여주목사들의 공덕비들이 있다. 그중 김덕함 공적비가 있는데, ‘청백애민비’라고 새겨져 있다. 고을 수령으로서 김덕함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덕함(金德諴, 1562~1636)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성옹(醒翁),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으나 홀로 공부에 힘써 27세인 1588년(선조 21)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연안(延安)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였으며, 1594년 군공청의 도청(都廳)이 되어 큰 공을 세웠다. 광해군 시절인 1617년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성·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뒤 여주목사 ·춘천부사 등을 지냈고, 1636년 청백리에 녹선되고 대사헌에 올랐다.

이항복이 일찍이 김덕함이 큰 인물임을 알아보았는데,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28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보직되고 신묘년에 학유(學諭)에 임명되었다. 이항복(李恒福)이, 장만(張晩)ㆍ이시발(李時發) 및 공 등 3명은 모두 국사를 맡길 만하다고 누차 조정에 말하였다. 임진년에 연안(延安)으로 들어가 이정암(李廷馣)의 종사(從事)가 되어 인근 고을에게 군량을 독촉하여 내게 하였다.”

이항복이 예견한 바는 그의 <행장>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는데, <연려실기술>에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갑오년(1594)에 조정에서 군공청(軍功廳)을 설치하고 전공(戰功)을 사정(査定) 할 때에 청탁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상하에서 서로 부탁하므로 사람들이 피하였는데, 우의정 김응남(金應南),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아뢰어 공을 도청(道廳)으로 삼아 사정을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하루는 김응남이 비변사에 말하기를,

‘군공의 중대한 일을 김덕함이 혼자 맡고 있으므로 내가 매일 사대문으로 사람을 보내어 그의 훼예(毁譽)를 살펴보았는데, 사람들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로써 청촉이 감히 그 사람에 대해 범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하였다.”

“정유년(1597)에 조정이 강화(江華)에 분호조(分戶曹)를 설치하어 삼남(三南) 지방에 조운(漕運)의 길을 열어 군량을 공급하도록 하였는데, 김응남이 아뢰기를, ‘김덕함의 재능이 강화 유수와 병조분의 양 장관을 겸할 만하며, 이제 분호조의 임무가 극히 중대하니 이 사람이 아니면 일을 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비변사 당상도 필요 없이 단지 이 사람만 차임해도 괜찮습니다.’ 하였다.”

김덕함이 소임을 처리하는 바가 능수능란하고 요령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김덕함이 지방관으로서 이룬 치적을 평한 어사 최현의 장계가 볼 만하다.

“기유년에 체찰사 이항복이 계청(啓請)하여 특별히 공을 안주 목삼(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어사(御史) 최현(崔睍)의 장계에,

‘맑기는 백이(伯夷)와 같고 정사는 공수(龔遂)와 황패(黃覇) 한 나라 때의 지방 명관) 같으며, 겸하여 봉공(奉公)하는 정성이 있어 정치와 교화가 서도에서 제일입니다.’

하였다.”

최현의 장계를 보자면 김덕함이 청령하면서도 유능한 관료임을 알 수 있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우공일기> 또한 이를 잘 보여준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모친이 93세에 죽었는데, 공이 매양 모시고 자면서 매사에 몸소 시중을 들어 하룻밤에 간혹 10차례나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곱 고을을 역임하였으나 돌아와서는 반드시 양식이 떨어졌다. 집사람이 간혹 식량이 떨어졌다고 하면 문득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하늘이 반드시 살리는 도리가 있게 마련이다.’

하였다. 평생을 남의 집을 빌려 살았으며 책상과 기물의 먼지를 털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제 몸의 먼지도 또한 깨끗이 털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밖에 있는 물건이랴.’ 하였다.”

“광해 때에 집이 가난하여 생활할 길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권하기를, ‘종을 궁궐 역사에 내보내서 삯을 받아서라도 자급(自給)하는 것이 어떠냐?’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남의 집에 기와나 석물(石物)을 도둑질 해다가 나라에 바쳐서 대가를 받아 생활을 도모하는 짓은 내가 차마 못하는 바이다.’ 하였다.”

고위직에 올라서도 청렴한 바는 원칙을 준수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광해군 시절에 이항복과 함께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되었을 적의 일화다.

“당시에 귀양살이 하는 자들은 모두 처자식과 함께 갔는데 공이 ‘위리(圍籬)는 사체(事體)가 옥과 같으므로 처자식과 더불어 뒤섞여 거처할 수 없다.’ 하였다. 다음 해에 부인 이씨가 가족을 데리고 갔으나 각기 딴 집에서 살게 한 것이 5년이었는데, 계해년에 이르러 특사를 받고 비로소 서로 모여 살았다.”

김덕함은 형 덕겸과 더불어 청렴으로 유명했다. 이 또한 부친의 삶에서 보고 배운 것으로 사료된다. 김덕함의 부친 김홍의 묘지의 한 대목이다.

“처음에 공의 5대조인 호군 승부(承富)가 죽자 아내 유씨(柳氏)가 외아들을 데리고 상주에서 백천(白川)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살았는데, 공의 아버지 홍(洪)에 이르러 스스로 집안이 대대로 부진(不振)한 것을 상심하여 아우 택(澤)과 더불어 꾀하기를, ‘형제가 모두 학업에만 종사하고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으니 살 수가 없다.’ 하여 마침내 그 아우를 면려시켜 문학에 전념하게 하고 홍은 힘써 농사지어 두 집 생활을 하였다. 김택은 과거에 올라 홍문관 정자가 되고 벼슬이 감찰에 이르렀으며 김홍의 두 아들 덕겸(德謙)은 과거에 오르고 또 중시(重試)에 뽑혀 벼슬이 도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그 다음이 공이니, 사람들이 조상의 음덕의 갚음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