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가 총애한 서예가 한호


선조가 총애한 서예가 한호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선조조의 명신’ 조에 유신과 무신 외에도 서예가들을 다수 배치하였다. 한호가 글씨로는 조선을 대표하는 서예가임에는 틀림없지만 조선시대 품인(品人) 기준으로 본다면 특별한 부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이긍익이 한호가 이룩한 서도 경지에 근거하여 ‘선조조의 명신’ 조에 넣은 데서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을 편집한 방침을 엿볼 수 있겠다.

한호는 자가 경홍(景洪)이며, 호는 석봉(石峰)이요,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군수 대기(大基)의 5대 손으로서 계묘년(1543)에 나서 정묘년 나이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삼조(三曹)의 낭관과 가평ㆍ흡곡(歙谷) 두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을사년(1605)에 죽었다.

한호는 선조의 총애를 입어 그 명성과 부귀가 더해졌다. 사실 선조 또한 역대 조선의 왕 중에서 상당한 명필로 인정받는다.

“임금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총애가 융숭하였으며 하사품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히 가평 군수(加平郡守)를 제수하였는데, 몇 년 후에 사헌부에서 탄핵하였으나 추고만을 명하였다. 그가 공조 낭관이 되어서 의례 바치는 것을 규식대로 하지 않아 응당 파직되어야 하는 것을 임금이 다스리지 말라고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빨리 어의에게 약을 싸가지고 가서 구하도록 명하였다. 죽은 뒤에 임금이 오랫동안 애도 하였다.”

“일찍이 당지(唐紙)에다 이태백(李太白)의 시를 써서 5권으로 만들었는데, 각체(各體)를 모두 갖추었다. 또 큰 종이에 <동서당집고첩(東書堂集古帖)>을 썼는데, 임금이 듣고 급이 내시에게 명하여 가서 찾아가지고 대궐로 들여오도록 하고, 다음 날 비단, 포목, 소금, 쌀, 종이, 먹, 지필묵, 향, 어연(御硯), 옷, 신 등 물건을 매우 후하게 내려주면서 그것으로 집을 사서 살도록 하였다.”

한호 글씨에 대한 당시 조선과 중국 사대부들의 애호와 평가를 이정귀가 지은 한호의 묘갈명에서 대략을 소개했다.

“임신년에 정유길(鄭惟吉)ㆍ임오년에 이이(李珥), 신축년에 이정귀(李廷龜)의 세 차례 빈사(儐使) 행차와 신사년과 계사년의 주청사(奏請使)가 갈 때에 모두 명필로서 참여하였다. 중국의 이여송(李如松)과 마귀(麻貴)와 북해(北海)의 등계달(鄧季達)과 유구(琉球)의 사신 양찬(梁燦)이 모두 글씨를 요구하여 갔다. 왕감주 새정(王弇州世貞)이 글씨를 평하기를,

‘성난 사자가 돌을 헤치는 것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물로 달려가는 것 같다.’

하였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마땅히 왕우군과 안로공(安魯公 안진경(安眞卿))과 우열을 다툴 만하다.’

하였다.”

 

“선조가 공의 대자(大字)를 보고 탄복하기를,

‘기이하고 장대하기가 측량할 수 없다.’

하고 하사하는 어선(御膳)과 법주(法酒)가 길에 끊이지 않았으며, 또 내시를 보내어 그의 집으로 잔치를 내리는 한편 한가로운 고을을 재수하도록 명하였다. 또 어필로

‘취한 속에 천지에서 붓으로 조화를 뺏았다.
[醉裏乾坤 筆奪造化]’

라는 여덟 자를 써서 주었으며, 병이 나자 어의(御醫)와 약이 길에 연이어졌다. 나이 63세에 죽으니 부고를 듣고 부의를 매우 후하게 내렸으며, 관에서 상장(喪葬)을 돌보아 주었다.”

이광사가 <원교필결>에서 조선의 서예가들을 평하는 마당에 한호를 논했는데 한호의 학문과 서도를 평함에 대략을 얻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필법을 안평(安平 용(瑢)), 자암(自庵 김구(金絿)),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석봉으로써 4대로 가르쳤는데, 정론(定論)은 석봉을 우리나라의 제일로 꼽았다. 석봉은 재질과 학문은 높지 못하였으나 연습을 쌓아 공을 이루어서 비록 옛사람의 획법(畫法)을 알지 못해도 또한 자연히 서로 합하는 곳이 있었다.

가문이 미천했기 때문에 관가에서 쓰는 정식(程式)에 국한되어 진서(眞書)는 더욱 비루하였으나, 또한 필력에 볼 만한 것이 있었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의 득의한 곳에 이르러서는 규모가 크고 깊으며 질박하고 힘차 송(宋)ㆍ원(元)에서 높이 나와 손색이 없다고 할 만하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