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한 마리로 세금을 걷어 들인 우복룡(禹伏龍)


닭 한 마리로 세금을 걷어 들인 우복룡(禹伏龍)

 

조경이 지은 우복룡의 비명(碑銘)이 <국조인물고>에 실려 있는데 우복룡이 성균관 유생이었을 적의 일화를 소개한다. 젊은 시절 우복룡의 기개가 잘 드러난다.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였다. 관례에 대과시(大課試) 때는 삼공(三公)이 육조 당상을 이끌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으면 제생들이 뜰아래에서 절을 올렸다. 공은 홀로 읍(揖)만 하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앞이 아닌데 선비가 뜰에서 절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수상(首相) 인재(忍齋) 홍섬(洪暹)이 종백(宗伯, 예조판서)을 시켜 공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까닭을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옛날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께서 일찍이 수상(首相)이 벽옹(辟雍, 성균관)에 임할 때는 인신(人臣)들과 차별을 두고자 제생(諸生)으로 하여금 뜰아래에서 절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예가 아니라고 하여 바로 고쳤는데,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에 이르러 사림(士林)을 원수처럼 보아서 다시 배례(拜禮)를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평소 이를 통한(痛恨)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였다. 좌상(左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이 유생의 소견이 옳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다.”

하고는 인하여 제재(諸宰)와 의논하여 절하는 것을 읍만 하는 것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 날에 복례부(復禮賦)란 제목으로 출제하여 제생을 시험했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했으며 얼마 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국자장(國子長)이 되어 유자부(儒字賦)란 제목으로 출제하여 제생을 시험했는데 공이 또 수석을 차지하였다. 고봉이 공을 앞으로 나와 자리에 앉게 하면서 이르기를,

‘후일 사문(斯文)이 자네에게 의탁하게 될 것이다.’

하니, 이때부터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아울러 조경은 우복룡이 언론과 풍채만이 아니라 정사에도 능한 유자임을 밝혔다.

“공은 약관(弱冠)에 행촌(涬村, 민순)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 배우려는 자들이 성대하게 모여들었으나 선생이 유독 공을 칭찬하여 호걸스러운 선비로 허여하니, 일시의 동배(同輩)들 역시 이의가 없었다. 조정에 서서는 언론과 풍채가 모두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족했으며, 더군다나 임진왜란 시기에는 정사(政事)를 안동(安東) 수령으로 시작하여 강화(江華)에서 마쳤는데 그 설시하고 조치한 바와 임기응변이 모두 사람들의 의표(意表)를 벗어났으니, 호걸스러운 선비가 아니라면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우복룡이 임기응변에 능한 호걸스러운 선비임을 <연려실기술>은 <자해필담(紫海筆談)>을 인용하여 보여준다.

 

“공은 지혜가 많고 유학을 겸하여, 관에 있을 때 엄하게 하지 않아도 일이 이루어졌다. 한번은 촌백성 하나가 조세(租稅)를 체납하고도 너무 가난해서 갚지 못하고 있으니, 공이 말하기를,

‘너가 아무리 가난해도 나라의 곡물을 어찌 납입하지 않을 수 있느냐. 네 집에 있는 물건으로 대신 바칠 수 있겠느냐?’

하자, 백성이 말하기를,

‘가난하여 다른 물건은 없고 다만 닭 한 마리가 있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닭을 삶아 오너라. 내가 먹고 네가 갚을 곡식을 감해주마.’

하였다. 백성이 이 말을 믿고, 다음 날 닭을 삶아 바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장난한 것이었다. 어찌 원으로서 백성의 닭을 먹고 국가의 곡식을 축내는 자가 있단 말이냐. 속히 가거라.’

하여 백성이 문밖으로 나가니, 여러 아전들이 모두 나누어 먹어버렸다. 조금 있다가 공이 백성을 불러 말하기를,

‘다시 생각하니, 이미 너로 하여금 닭을 잡아오게 하고 또 받지도 않는다면 이는 너를 속이는 것이니, 네 닭을 도로 가져오면 마땅히 약속대로 하겠다.’

하니, 백성이 사실대로 고하자 공이 드디어 여러 아전의 성명 밑에 분배하여 그 조세를 징수하니 즉시 모였다. 이에 여러 아전이 놀라서 굴복하고 속이지 못하였다.”

 

<자해필담>은 다른 일화도 소개한다.

“공이 안동(安東)에 있을 때에 명나라 장수가 대군을 인솔하고 부중(府中)에 들어와서, 어떤 일로 공에게 노하여 공을 욕보이려고 불시에 태평소(太平簫) 30개로 전도(前導)하라고 하였다. 이에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공은 걱정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부민(富民)의 집에 가서 작은 촛대 수십 개를 빌려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퉁소를 잡는 형상과 같이 가지게 하고 사이사이에 태평소를 끼어서 행진하도록 하니, 퉁소소리가 요란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보고 모두 퉁소인 줄 알고 횡포를 부리지 못하고 갔으니, 공이 급한 일을 당하여 군색하지 않게 변통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그런데 우복룡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사건이 있으니 의병들을 반란군으로 몰아 학살했다는 내용이다.

“(경북 예천) 용궁 현감 우복룡이 고을 군대를 거느리고 가던 중 (경북) 영천 길가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하양 (의병) 군사 수백 명이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군사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우복룡이 괘씸히 여겨 ‘너희들은 반란군이로구나’ 하고 꾸짖었다. 하양 군사들은 권응수 방어사에게 가라는 박진 병사의 공문을 내보였다. 하지만 우복룡은 자기 군사를 시켜 그들을 포위한 다음 모두 쳐 죽여 시체가 들에 가득했다.

그러나 김수 순찰사는 도리어 우복룡에게 공이 있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그래서 우복룡은 정희적을 대신하여 안동 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하양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 과부들은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을 만나기만 하면 말머리를 가로막고 울면서 원통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우복룡은 이미 이름이 높던 터라 아무도 그들을 위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복룡 사건을 기록으로 전하는 진원지는 <징비록>이다. 이 사건은 조경남(1570∼1641)의 <난중잡록>과 신경(1613∼1653)의 <재조번방지>에도 전하지만, 특히 유성룡(1542∼1607)의 <징비록>에 실려 있다.

한편 조경이 이 일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지만 우복룡을 신원하는 내용을 적어두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과 동래가 먼저 함락되고 다른 여러 군(郡)이 차례로 무너져 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패배한 군졸들이 모여서 도둑이 되어 관군(官軍)을 침탈하였다. 공이 안동(安東)ㆍ영주(榮州)ㆍ비안(比安)ㆍ군위(軍威)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급히 경주로 달려가다가 반졸(叛卒)을 만나자 염탐하여 수창(首倡)한 자 3인을 찾아 죽이고 그 나머지는 석방하여 스스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하였다.

경주 30리 못 미쳐서 영주 군대와 함께 대치하여 진을 쳤는데 밤중에 또 반졸이 떠들썩하게 외치며 일어났다. 영주의 대장(代將)이 화살을 맞아 즉사하였으나 공은 다행히 기강(紀綱)이 있는 종복(從僕)에게 힘입어 겨우 면하였다. 날이 밝자 공은 부오(部伍)를 정돈하여 부대를 재촉해 나아가니, 반졸들이 모두 흩어졌다. 마침내 경주성(慶州城)으로 들어가 군사를 주장에게 소속시키고 즉시 용궁현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모두 조수(鳥獸)처럼 흩어져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은 부로(父老)와 자제(子弟)들을 불러 충의심으로 격려하여 군사 3천여 명을 모아 곧장 왜적과 충돌해서 수십 합(合)을 싸우니, 왜구들이 전진하지 못해 용궁현만은 온전하였다. 강좌(江左) 인사들이 공이 힘껏 싸운 형상을 행재소(行在所)에 상소하여 알리니, 붉은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후에 유언비어(流言蜚語)로 중산(中山)의 모함을 입었으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공이 영남을 체찰하면서 당시의 일을 조사하여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에 힘입어 공의 일이 크게 신원(伸寃)되었다.”

임란 초기에 우복룡이 용궁 현감으로 고을을 지킨 일은 조정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이후로 조선군은 연전연패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선조실록>에는 승리를 뜻하는 ‘승(勝)’ 또는 ‘첩(捷)’이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복룡이 용궁 현감으로 고을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비변사는 선조에게

“용궁(경북 예천군 용궁면) 현감 우복룡(禹伏龍)은 여러 고을이 무너질 때 유일하게 자기 고을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나가서 싸우기까지 하였으니 그 공로가 적지 않습니다, 특별히 크게 가자(加資, 벼슬의 등급을 올림)하여 다른 사람들의 모범을 삼으소서”

하고 건의한다. 그리고 선조가 이를 허락했다.

조경의 글에 의하자면 우복룡 사건은 신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서애의 <징비록>에 소위 우복룡 사건이 기록되어 현재에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진위를 반드시 따져야겠지만 기록의 무서움을 새삼 알려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
국역 국조인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