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알아보는 이순신


일화로 알아보는 이순신

 

이긍익이 <연려실기술> ‘선조조의 명신’ 조에 이순신을 두었다. 요즘에는 이순신을 주제로 한 소설이나 영화 등도 있고 해서 이순신에 대해 많이 알려진 바가 있지만 <연려실기술>은 1차 자료 격이다.

이순신은 자가 여해(汝諧)이고 본관은 덕수(德水)로 정정공(貞靖公) 변(邊)의 현손(玄孫)이다. 을사년(1545)에 나서 병자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를 역임하고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무공(忠武公)이다. 무술년(1598)에 죽으니 나이 54세였다.

“젊어서부터 똑똑하고 깨끗하여 얽매이지 않았고, 여러 아이들과 놀 때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네 안에서 놀다가 뜻에 거스르는 자를 만나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그 문 앞을 다니지 못하였다. 장성함에 이르러 유학에 종사하니 더욱 글씨에 능하였고, 20세에 무예(武藝)를 배웠다.”

동네 안에서 놀다가 뜻을 거스르는 자를 만나면 그 눈을 쏘려고 해서 어른들도 모두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는 섬뜩하기도 하지만 신체에서 가장 예민하면서도 치명적인 손상을 받을 수 있는 눈을 공격하려 했다니 무장의 기재가 드러난다.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에게 서녀(庶女)가 있는데 이순신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려고 하니, 이순신이 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내가 벼슬길에 나와서 어찌 감히 권문(權門)에 종적을 의탁해서 출세를 매개하리요.’

하였다.”

“이순신이 일찍이 과거(武科)에 응시하여 강(講)에 나갔을 때, 장량전(張良傳)에 이르러 시험관이 말하기를, ‘장량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았다 하니 진짜 죽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강목(綱目>에 유후(留侯) 장량이 죽었다고 썼으니, 장량의 뜻이 어찌 신선이 되려고 했습니까.‘ 하자 온 좌중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이순신이 유학을 겸비한 무장이었음은 그의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이런 일화를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이순신이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되어 정해년(1587)에 조정에서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는데, 그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 지역이 너무 멀고 병정이 적었기 때문에 누차 군사를 증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8월에 비적(匪賊)이 전채(田寨 둔전 목책)를 습격하여 포위하자 이순신 선두에 있는 붉은 털옷을 입은 자 수 명을 연속해서 사살(射殺)하고, 추격하여 잡혀가는 남녀 60여 명을 탈환하였다. 한창 교전하다가 공이 화살에 맞았는데 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으면서 안색을 변하지 않아 온 군중에 아는 자가 없었다.”

생사가 교차하는 전장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는 장수로서 이순신의 위엄이 느껴진다. 이런 기개와 강인함이 있었기에 국난에 처한 조선을 구해내는 중임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전쟁에 승리할 때마다 장수들을 경계하기를, ‘승리를 거듭하면 반드시 교만해지는 법이니 여러 장수들은 근신하라.’ 하였다.”

“이순신이 군중에 있은 지 6년에 본도의 군량 저축이 줄어들어 공급할 수 없음을 보고 드디어 어전(魚箭)과 염전(鹽田)을 크게 개설하고 둔전(屯田)을 널리 설치하는 등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대를 돕는 것에 용감하게 나갈 뿐 주저하지 않기를 마치 기욕(嗜慾)처럼 하여 조금도 빠뜨림이 없었기 때문에 군량의 여유가 있어 일찍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이순신이 발포만호(鉢浦萬戶)가 되어서도 공은 기질이 곧아서 아부하지 않았다. 주장이 사람을 보내어 성[堡]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고 하자 공은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관가의 나무이다. 심은 사람이 뜻이 있었을 것인데 베는 사람은 또 무슨 뜻이냐.’ 하니, 주장이 노하여 공을 중상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공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아주 적은 죄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장수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지휘해야 하는데, 병졸들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여 상하가 일치단결하는 것이 제일 첫 번째 조건이다. 부하들이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서는 장수가 부하들로부터 믿음을 얻어야 한다. 그 믿음은 공정함에서 나온다. 이 공정함은 어떤 위세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강직함에서 나온다. 오동나무를 베는 것과 관련된 사소한 일화처럼 보이지만 이순신이 절대 수세의 국면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끈 힘을 엿볼 수 있다.

“이순신이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게 되면 국가에 목숨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밭을 가는 것도 족하다. 만약 권귀(權貴)에게 아첨하여 한때의 영화를 훔친다면 나는 몹시 부끄러워 할 것이다.’

하였다. 장수가 됨에 이르러서도 이 도를 지키고 변하지 않았다. 사람을 응접할 때 화평하고 친절하며 경계가 없었으나, 일을 당해서는 과감하게 판단하고 조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군에 있는 7년 동안 몸과 마음이 몹시 고통스러워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상을 얻으면 반드시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겨 두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원균(元均)과 더불어 오랫동안 서로 화목하지 않았는데, 이순신이 일찍이 그 자제에게 경계하기를,

‘마땅히 저들에게 공이 있다고 말하고 잘못은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순신이 죽자 그 죽음을 비밀에 붙였는데, 진린이 배 위에서 조선 군사들이 적의 머리를 베려고 다투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통제사가 죽었구나.’ 하니, 좌우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자, 진린이 말하기를, ‘내가 통제사를 보니 군율(軍律)이 몹시 엄했는데, 이제 그 배에서 머리를 베려고 다투느라 어지러운 것을 보니, 이는 호령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조정에서 우의정에 추증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명나라의 장수 형개(形玠)가 말하기를, ‘마땅히 바닷가에 사당을 세워 충혼(忠魂)을 표창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자 해변 사람들이 서로 힘을 모아 사당을 세워 충민(忠愍)이라고 이름하고 좌수영(左水營)에 있다. 군졸들이 또한 비석을 세우고 타루비(墮淚碑)라고 이름하였다.”

<참고문헌>

이긍익,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