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율곡학사업

검신(檢身) –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

 

학교모범』의 두 번째 주제는 몸가짐을 단속하는 검신(檢身)이다. 이 내용은 선생의 아동교육의 입문인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지신장(持身章)의 내용과 중복되는 것이 많다.

그런데 현대의 청소년들에도 몸가짐이 중요한가? 기껏해야 건강을 위해 바른 자세를 갖도록 하는 일만 강조하지 않는가? 두발이나 복장이나 얼굴의 화장을 비롯하여 행동을 강제하는 것은 일종의 인권침해(?)로 간주하여 학생들의 자율적인 의사에 맡긴 듯하다.

학교 내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학생들을 보노라면 그런 느낌이 든다. 심지어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멘 어린 남녀학생들이 백주대낮에 남이 보건말건 상관없이 포옹하고 심지어 입 맞추는 일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니, 옛날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을 부끄럽게 만든다. 더 나아가 이제 성인사회나 직장에서도 일의 능률을 높이고 업무에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복장이나 몸가짐을 자유롭게 하는 추세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옛 사람들이 말한 바른 몸가짐이란 게 케케묵고 시대에 맞지 않는 유교적 잔재라 여길 법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 그 가운데 자칭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마저도 잘못된 일이 있으면 다짜고짜 유교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가령 남녀차별은 물론이요, 잘못된 관습 심지어 한국축구가 세계수준에 못 미치는 것도 유교 탓이라는 연구도 있다. 어떤 지역 어떤 문명이든 나름의 폐단이 있다. 그 폐단의 원인을 모두 전적으로 그곳의 전통문화의 탓으로만 여길 수 있을까? 과거 서양인들이 아프리카의 노예를 사냥하여 팔아먹은 것이 그리스도교의 탓이 아니듯 어떤 폐단에는 분명히 다른 요인도 있을 것이다.

자, 어쨌든 백문불여일견이라 했으니 율곡 선생이 말한 바른 몸가짐이 어떤 것인지 보자.

 

평상시에는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고, 의관을 정제하며 용모를 장중하게 하고 보고 듣는 일을 단정하게 해야 한다.

거처할 때는 공손하고 걷거나 서 있을 때는 똑바르게 하고 음식은 절제해야 한다. 또 글씨는 조심해서 쓰고 책상주변을 정리정돈하며 집과 실내는 청결하게 해야 한다.

 

우선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는 일은 요즘 청소년들도 잘 하고 있다. 비록 대학입시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 배움에 좋다. 또 책상주변을 정리정돈하고 집과 실내를 청결하게 하는 것도 지당한 말씀이다. 문제라면 입시공부를 위해서 부모가 집안청소를 안 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적어도 자기방 청소는 본인이 해야 좋다. 윤리·도덕적 문제에 앞서 청소를 자주 하다보면 일하는 요령도 생기고 깨닫는 것도 있게 된다.

집안일도 마찬가지다. 또 걷거나 서 있을 때 똑바르게 하는 것도 굳이 패션모델의 워킹을 배우지 않더라도 건강이나 바른 자세 유지를 위해 도움이 된다. 필자 또한 젊었을 때 어릴 때의 습관 탓으로 팔자걸음을 걸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단히 노력하여 이제는 똑바로 걷게 되었다. 더구나 음식 절제는 오늘날 딱 어울리는 말이다. 율곡 선생이 신통력이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탐욕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겠지만, 오늘날은 음식물 과다섭취 때문에 생기는 비만이나 그에 따른 성인병 예방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글씨를 조심해서 쓰라는 것은 당시는 연필이나 볼펜 또는 글자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먹물을 찍어 붓으로 써야 했으니 얼마나 조심성이 필요했겠는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단정하게 앉아서 집중해서 보고 듣는 것이 학습효과에 좋다. 또 거처할 때 곧 일상생활 속에서는 공손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보편적으로 통한다. 남에게 좋은 인상과 태도를 보여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살아가면서 남으로부터 배울 때도 크게 도움이 된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고전과 종교적 경전 내용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를 말하라면 필자는 겸손 또는 공손이라고 본다. 왜 이것을 강조했을까? 대부분의 고전이나 경전의 저자들이 나이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겸손하거나 공손하지 않으면 남으로부터 배울 수 없어 자기발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공손하지 않는 자에게 가르쳐 주고 싶지도 않지만, 정작 본인이 존경 또는 공경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제대로 배우겠는가? 특히 한창 배우는 청소년들에게 공손이 필요한 것임은 두말한 필요가 없겠다.

그렇다면 의관을 정제하라는 주장은 어떠한가?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의관정제란 복장을 단정하게 하는 일이다. 대체로 교복은 물론이요 평상복도 단정하게 입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 가운데서 헤어스타일이 특별하고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교복을 변형시켜 입는 모습을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다. 사복을 입으면 성인과 구별이 안 될 때도 있다. 사실이지 필자가 청소년 시절에도 이와 유사했다. 그 때도 교복을 입었고 남학생들은 모자를 썼다. 게다가 학교규칙도 엄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규칙을 비웃듯이 모자를 짓이겨 쓰거나 단추를 풀어 헤치거나 교복을 변형시켜서 연예인의 흉내를 내는 학생들이 당시에도 있었다. 대개는 한 때의 반항심이나 호기심 또는 치기어린 마음에서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불량배들도 섞여 있었다. 케이블 티비 덕문에 옛날 영화 속의 그런 장면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이렇듯 청소년들의 복장이 성인의 시각에서 삐딱하게 보이는 일은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젊은 연예인을 닮고 싶어서 모방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볼 때 전혀 어울리지 않고 우스꽝스럽지만, 아니 청소년 자신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스스로 그렇다고 여길 테지만, 이 시기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을 성인이나 학교의 입장에서 막는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필자 또한 단지 단정하게 입으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단정하게 입어야 할 논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청소년들에게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용모를 장중하게 하라는 주장이다. 장중으로 옮긴 한자 원문은 장(莊)이다. 이 한자가 지닌 뜻은 상당히 넓다. 인간의 행동과 관련된 뜻에는

씩씩하다, [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단정하다, 바르다, 엄격하다, 장중하다, 정중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어서, 옮긴이가 ‘장중하다’

라는 말만 편의상 대표로 삼았는데, 이렇게 뜻이 넓다. 하나하나 살펴보아도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말들이다. 다만 시대적 간극을 고려한다면 이것 외에 상냥하다, 친절하다 등이 포함되면 더 좋겠다. 왜냐 하면 인간의 행동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형편 또는 자신의 내적인 감정에 따라 제각기 적절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율곡 선생이 말한 몸가짐을 현대적 상황에서 분석해 보았다. 그때와 지금의 시대적 차이가 꽤 있으나 오늘날 도덕적으로나 실용적인 면에서 볼 때도 대체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들이다. 다만 그 대상이 자아가 완전히 확립되지 못한 미성숙한 청소년들이기 때문에 성인의 입장에서는 그 적용에 아량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하지 못한 구용(九容: 원래 『예기』에 나오는 9가지 용모) 등은 『격몽요결』에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본 누리집의 “인성교육교재-『격몽요결』-초급편(하)-3.아홉가지 생각”을 참조바람). 그러나 몸가짐의 주체가 성인이라면 전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항상 조심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입지(立志) – 어떤 꿈을 꾸는가?


어떤 꿈을 꾸는가?

 

꿈이 없는 사람은 대체로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 특히 청소년의 경우에는 꿈이 없으면 자신의 욕망을 따라 또래들과 어울려 함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거나 때로는 탈선하기도 한다. 이처럼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항해하는 선박의 지피에스(GPS)와 깜깜한 밤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이런 청소년들 또는 청년들이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지, 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태도가 필요하고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는지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학교모범(學校模範)』을 통해 현대적 의미를 살피려고 한다.

이 책은 1582년(선조15) 율곡 선생이 왕의 명에 의하여 지은 책으로 당시 교육제도의 미비한 점을 보충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청년과 청소년 교육을 새롭게 하기 위한 여러 주장들이 들어 있다. 총16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이글은 그 순서에 따라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면서, 다만 내용상 유사한 독서와 그 방법의 항목만 통합하여 총15개의 내용으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당시 교육기관으로 지방의 향교와 서울의 4학, 그리고 성균관이 있었다.

아무튼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 수준의 꿈은 대개 그 사회에서 인정받거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 직업을 꿈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가령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대개 판사·검사·의사·과학자 등이 인기였고, 2000년대부터는 여기에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 등이 추가 되었다. 그러다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2010년대 이후부터는 교사나 공무원도 거기에 끼어들었으나 순수한 과학자가 되겠다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 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거나 인기를 끌며 돈을 많이 벌거나 생존에 유리한 그런 직종이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모두가 이런 꿈을 꾸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자신의 학교성적이 뒷받침되지 못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그런 것이 아니어서, 또 학부모의 경제력이 받쳐주지 못해서 꿈을 접어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이다.

종합하면 청소년기의 꿈은 생존을 위해서나 출세와 야망을 위해서 가지게 되며, 드물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주변의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종교의 영향으로 그 나이 또래들이 생각지 못한 꿈을 갖기도 한다. 가령 예술가와 학자나 성직자 또는 사회에 봉사하는 직업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꿈을 접고 생계만을 위한 직업을 택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집안의 재력으로 바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그 나머지는 생계와 꿈을 병행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는 경우는 세 번째였다.

그런데 문제는 제4차 산업혁명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잘나가던 직업도 장래성이 불투명해지는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게다가 많은 직업들은 기계가 대신하면서 대량 실직이라는 사태를 예고하고 있다. 이제 청소년들은 장래의 꿈조차 제대로 꿀 수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이런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율곡 선생은 이 책의 첫 번째 입지(立志)를 다루는 주제에서 성인(聖人)이 되기를 꿈꾸라고 한다.

첫째는 입지(立志)이니 … 분발하고 힘써서 꼭 성인이 되어야 하겠다고 한 뒤에 그친다.

 

비록 옛날 말이라 해도 요즘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생뚱맞은 일이라 모두 놀라 자빠질 일이 분명하다. 조선시대 당시에도 이렇게 말하면 놀라울 일인데, 하물며 제4차 산업을 눈앞에 둔 오늘이겠는가? 그러니 율곡 선생의 이런 주장을 옛날 사람의 케케묵은 주장으로 여기고 무시해 버리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할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유학에서 말하는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 그리고 공자(孔子)님과 같은 성인이 된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너무 높은 목표 같기도 하다.

과연 그럴까? 우선 율곡 선생의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생이 공부했던 학문을 이해해야 한다. 그 학문은 중국 남송 때 주자(朱子)라는 분이 완성한 성리학(性理學)이다.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孟子)로 이어지는 유학(儒學)을 송나라 때 새롭게 해석한 학문이다. 그리고 성리학은 인간이 착하게 태어났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이었다. 맹자는 인간이 모두 착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다.”

 

고 하여, 율곡 선생도 맹자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믿어 배우는 사람은 이렇게 성인이 되는 것을 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사람이 착하게 태어났다면 어째서 현실에서는 나쁜 사람도 있는가? 이것을 성리학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의 마음은 착한 이치를 갖추고 태어났지만, 그 착한 이치를 가리고 막는 것은 기질 때문이라고 한다. 좋은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본성대로 바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으나, 나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비록 본성은 착하지만 그 나쁜 기질의 방해를 받아 착한 본성이 발휘될 수 없어 나쁜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란 착한 본성을 덮어 가리는 기질을 변화시켜 본래의 착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성리학은 이렇게 공부를 통해 기질을 변화시키면 부모 된 자는 자식을 당연히 사랑하며, 자식 된 자는 부모를 마땅히 효도하는 등 사람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천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까 이런 성인이란 자신이 자연적으로 타고난 착한 본성이 기질의 방해를 받지 않게 완벽하게 발휘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실제적으로 어떻든 간에 원리적으로 보면 매우 명쾌하고 쉽다. 물론 성인으로서 인류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그렇지 못하다면야 또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선생이 누구나 성인이 되기를 꿈꾸라는 말은 대단한 자기 긍정이다. 고작 교과 성적 따위가 나쁘다고 자기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여기거나 남보다 외모가 뛰어나지 못하다고 하여 열등감을 갖는다면, 이것은 이런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망치는 일이다.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이렇게 말한다.

“학문이란 게 별다른 일이 아니다. 평상시 생활하고 행

동하는 동안에 일에 따라 마땅함을 얻도록 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런 학문을 통해 각자의 직업이 농부든 의사든 공무원이든 환경미화원이든 또 무엇이든 간에 매사에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고 바르게 처신하면 성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청소년들이 비록 각자 다른 꿈을 가지더라도 결코 성인을 꿈꾸는 데 방해되는 일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것이 올바르냐 하는 점이다. 그래서 공부가 더 필요하지만 전통적으로 유학은 각자의 사적인 욕심보다는 모두를 위하는 공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올바르다 보았다. 물론 당연이 나의 몫으로 돌아올 것을 챙기는 것을 사사로운 욕심이라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몫과 분수를 넘어 남의 것이나 공공의 것을 탐내는 것이야 말로 사사로운 욕심이다.

그러니 사사로운 욕심에서 나온 헛된 명예나 권력이나 재물이나 입신양명 따위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어떤 직업을 갖든 천부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착한 본성을 잘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현대판 성인이 아닐까? 사실 사람이 착하게 또는 나쁘게 태어났는지 증명할 길은 없지만, 착하게 태어났다고 믿고 그렇게 사는 것인 훨씬 보람된 삶이 아닐지? 청소년들이 이점을 깨닫기는 아직 이르지만, 부모나 주변의 성인(成人)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자랄 것이다.

아무튼 공부를 시작할 때 꿈을 잘 가져야겠다. 선생처럼 성인이 되겠다는 꿈도 소박하게 생각하면 매사에 각자의 위치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지?

조유선(趙有善:1731~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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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은 직산(稷山), 자는 자순(子淳), 호는 나산(蘿山). 개성(開城)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 조창유(趙昌愈)이며, 아버지는 조성제(趙聖躋)이다.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1771년(영조4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어 개성(開城) 나산(蘿山)에 의숙(義塾)을 세우고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유학(儒學)을 공부하였다.

1788년(정조12)에 57세 나이로 혜릉 참봉(惠陵參奉)이 된 뒤에 서부봉사(西部奉事), 청하현감(淸河縣監),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역임하고, 1797년에 진산군수(珍山郡守) 등을 거치면서 학문을 장려하고 예의를 가르쳤으며 관리가 지켜야할 법도의 확립을 위해 힘썼다.

그는 스승인 김원행(金元行)의 학설을 이어받아, 명덕(明德)과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대하여 낙론(洛論)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호론(湖論)을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서경(西京)의 수백년 이래 1인이다.’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많은 학도들을 가르쳤다. 그의 사후 15년이 지난 1824년(순조24)에 영돈녕 김조순(金祖淳)의 상소에 의거하여 그를 승지(承旨)에 추증하였다.

저서에는 《나산집(蘿山集)》이 있고, 스승인 김원행의 명을 받아 지은 《고정유사(考亭遺事)》, 《사우연원록(師友淵源錄)》 등이 있다. 사시(賜諡)는 문간(文簡)이다. 그가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로 있을 때, 조정에서 윤대(輪對)를 거행한 직후에 성삼문(成三問)의 옛집을 보상해주기를 청하기를,

“본서(本署)는 바로 고 충신 성삼문(成三問)의 옛집이니, 드러나게 표창하여 주는 방도가 있는 것이 합당합니다.”

라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충정공(忠正公)의 집도, 위(魏)나라 정공(鄭公)의 옛집을 보상해 돌려준 고사에 따라 선조(先朝)에서 특명으로 해사(該司)에게 사서 주도록 하셨다. 하물며 충문공(忠文公)의 집이겠는가. 지난번에 이 일로 경연관에게 물었더니, 배상하여 돌려줄 만한 곳이 없다고 하여 아직 논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의 말은 자기가 맡은 직책을 가지고 간언(諫言)하는 원칙에서 나온 것이니, 물러가 제거(提擧)와 상의하여 우선 그 옛 사실을 기록해서 청사에다 현판으로 내걸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정조실록》의 15년 6월 11일의 기사내용이다. 이와 같이 충신을 기리는 그의 평소 생각을 진달한 것인데, 다행스럽게도 임금은 이를 직임을 다한 건의로 간주하여 수용하였다. 위에서도 언급하였거니와, 영돈녕 김조순(金祖淳)이 조유선 형제에게 포증(褒贈)해 줄 것을 아뢴 내용이 《순조실록(純祖實錄)》의 24년 9월7일조에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어 다시 그 전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연전에 송경(松京) 유생(儒生)의 무리들이 고 군수(郡守) 조유선(趙有善), 고 참봉(參奉) 조유헌(趙有憲) 형제가 학문에 독실하고 조행(操行)에 힘썼다는 것으로 포증(褒贈)해 주기를 우러러 청하였기에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라는 명이 계셨으나 아직껏 회계(回啓)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서쪽에서 올라올 때에 본부의 인사들이 떼를 지어 와서 만나보고는 다시 전의 말을 거듭해 전해 아뢰기를 바랐었습니다. 대개 이 두 사람의 실상(實狀)은 과연 그 상소와 같았으니, 포미(褒美)하는 아름다운 은전(恩典)이 있어야 합당합니다. 특별히 즉시 회계(回啓)하기를 명하여 한 고장 인사들로 하여금 보고 흥기하도록 함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우러러 품달하오니, 이 모두를 대신에게 물으소서.”

이 글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는 아우 조유헌과 함께 학문에 독실하고 조행(操行)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그를 포증해 줄 것을 간청하고, 이를 영돈녕 김조순이 수용하여 임금에게 상소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조유선에게는 승지(承旨)를 증직하였고, 그의 아우 조유헌에게는 참의(參議)를 증직하였으니, 그의 행적에 관한 것은 확연히 입증된 셈이다. 실제로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측면에서 그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에 요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적잖은 교훈을 주는 글이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세간에 바보스럽고 무식한 이들이 처자를 사랑할 줄만 알고 부모는 잊고 지낸다.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처자와 나누면서 집에 계신 부모는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여도 돌보아 염려하지 않는다. 이러고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까마귀는 미물이지만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성의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효도하고 봉양하는 도리에 힘쓰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패악한 말까지 하니, 이는 새만도 못한 것이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옛말에 이르기를,

“자식을 키워 봐야 비로소 부모의 은혜를 안다.”

하였다. 지금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자식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는 없다. 그런데, 이를 돌이켜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처자만 먹일 줄 알고 부모는 춥고 굶주려도 내버려둔다.
대체로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는, 설령 먹고 입는 것을 넉넉하게 해 드리더라도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지 못하면 불효가 되는 법인데, 더구나 의복과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마저 정성을 다하지 않는 자의 경우이겠는가. 3천 가지 죄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극명하게 전달해 주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이 몇 가지 사실로 조유선이 어떤 사람인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이 글을 계기로 삼아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다시 한 번 부모에 대한 효도를 어찌해야 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어린이의 인성교육 차원에서 이러한 부분이 심도 있게 논의되어 교육전반에 반영이 되어야 할 줄로 믿는다.

<참고문헌>
– 《나산집(蘿山集)》
– 《매산집(梅山集)》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찬선(朴燦璿)(1735~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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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자는 순옥(舜玉)이고, 호는 운영정(雲影亭)이며 본관은 진원(珍原)이다. 3,4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천자문》을 읽었으며, 유년기(幼年期)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책를 읽고 문리(文理)를 깨쳤다는 소문이 나자, 고을 현감인 한만경이 그 소문을 듣고 와서 보고는 문방지구(文房之具)를 넉넉히 선사하였다. 문장(文章)뿐만이 아니라 서예(書藝)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남다른 효성이 있었다.

1765년(영조41)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입격하였고, 동궁책례일(東宮冊禮日)에 실시한 어제연구(御製聯句)에 참여하여 장원한 부상으로 병풍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종제인 찬영과 함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독서와 자질(子姪)의 교육에 힘썼다.

김원행의 아들 삼산재(三山齋) 김이안(金履安),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등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와 예문(禮文)에 대하여 많은 논의를 거쳐 학문을 연마하였다. 치산(治産)의 근검(勤儉)으로 흉년에 대비하여 걱정을 덜게 하였고, 고향 마을에 무너져 내린 효자의 정려(旌閭)를 극력 보수하여 수축하였고, 향약(鄕約)을 제정하여 풍속을 교화하고자 하였다. 1796년(정조20)에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의 문집 《운영정유고(雲影亭遺稿)》 1권 1책은 신연활자본으로 1954년 고흥에서 출간되었다.

<참고문헌>
– 《미호집(渼湖集)》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이재유고(履齋遺稿)》 해제

박윤원(朴胤源:1734∼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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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영숙(永叔)이고, 호는 근재(近齋)이다. 공주판관(公州判官) 박사석(朴師錫)의 아들인 그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 가까운 집안사람으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책을 한 번에 수십 줄씩 읽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김원행과 김지행(金砥行)의 문하에서 공부를 깊이 하여 학자들로부터 크게 추앙을 받았다. 특히 정조 임금이 당대의 저명한 학자였던 그와 지속적으로 서신을 교환하며 경전(經傳)을 그 중에 《주역(周易)》의 의미에 대하여 묻고 답한 어찰이 현존하여 당시의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다.

1792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사퇴하였고, 1798년에 원자(元子)를 위하여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자, 서연관(書筵官)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노년에 삼청동(三淸洞)의 교하정(晈霞亭)을 매입하여 그 곳에서 살았는데, 사방에 창을 내어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운치 있는 삶을 영위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 소개되던 서학(西學)의 폐해가 도교(道敎)나 불교(佛敎)보다도 크다고 하여 배척하고, 오직 경전의 훈고(訓誥)와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김창협(金昌協)과, 이재(李縡), 김원행(金元行)의 학통을 계승한 적전(嫡傳)으로, 다시 문하(門下)의 홍직필(洪直弼)에게 전수하여 신응조(申應朝), 임헌회(任憲晦), 조병덕(趙秉德)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요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평생 성리학을 연구하던 학자로 거처에 문을 제외한 세 방향의 창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글을 적어 두고 살았다 한다. 그의 동문인 오윤상(吳允常)과는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서로 만나면 학문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는 일이 많았다 한다.

그는 심설(心說)에서 ‘심(心)은 기(氣)’라고 하였다. 《대학(大學)》 장구(章句)의 ‘허령불매조(虛靈不昧條)’의 경의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허령’의 ‘기’가 ‘심’이 된다고 하여 ‘심시기(心是氣)’의 주기적(主氣的) 입장을 취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이가 기에 앞서 존재한다(理在氣先).’고 생각하여 주리적(主理的)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예학(禮學)에 관해서도 깊은 연구와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그의 문인으로는 홍직필을 비롯하여, 이재의(李載毅), 정도일(丁道一), 어석중(魚錫中) 등 다수가 있다. 생을 마감한 뒤에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근재집(近齋集)》과 《근재예설(近齋禮說)》이 있다.

<참고자료>
– 《근재집(近齋集)》
– 《매산집(梅山集)》
– 《전고문헌(典考文獻)》
–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이안(金履安:1722~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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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원례(元禮), 호는 삼산재(三山齋)이고,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이다.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으로, 김창협(昌協)의 증손자이며 김원행(金元行)김원행(김元行): 낙론(洛論)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그의 문하에서는 순수 성리학자들과 일부 실학자가 배출되었다. 그는 신분이나 지역, 직업에 차별을 두지 않고 학생을 받아들였다. 그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 아들인 이안(履安)과 박윤원(朴胤源), 오윤상(吳允常), 홍대용(洪大容), 황윤석(黃胤錫) 등이 있다.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집권계층인 노론(老論)의 후손이자 당대의 학자였던 아버지에게서 글공부를 하여 1762년(영조38)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았다. 그리하여 민이현(閔彝顯),김두묵(金斗默), 조림(曺霖) 등과 함께 경연관(經筵官)에 기용되었고, 1781년(정조5) 에는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지냈으며, 1784년(정조8)에는 지평(持平), 보덕(輔德), 찬선(贊善) 등을 거쳐 1786년(정조10)에는 좨주(祭酒)가 되었다.

당시 북학파(北學派) 학자 홍대용(洪大容)과 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유를 맺어 실학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홍대용과는 같은 연배로서 교우관계가 두터웠다. 그는 또 아버지 김원행의 문하에 출입하던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 이직보(李直輔), 오윤상(吳允常) 등과 교유하여 성리학자로도 명망이 있었으며, 예설(禮說)과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37권에는 당시 지평이었던 김이안에게 내린 돈유문(敦諭文)이 수록되어 있다. 명문가의 후손인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이는 정조의 정성어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다. 이 글을 통해서 그가 당시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대가 유현(儒賢)으로 천거 받은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지난날 내가 세손으로 있을 때에 그대의 부친이 나의 찬선(贊善)이 되었는데, 우리 선대왕께서 주연(胄筵)에다 두고 나의 부족함을 채우게 하고자 구원(丘園)으로 여러 차례 초치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나를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영원히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일어난다.

아, 현자(賢者)의 태어남은 세덕(世德)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서 공사장에서 등용한 사람도 있고 밭두렁에서 일으킨 사람도 있지만, 시례(詩禮)의 업을 이어받고 가정의 가르침에 물든 것으로 말하자면 또한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 호명중(胡明仲)에게는 문정(文定)이 있었고, 사마강(司馬康)에게는 단명(端明)이 있었으니, 이러한 아비 밑에 이러한 아들이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도 유문(儒門)의 성대한 일로 전해 오고 있다.

지금 그대는 명문대가의 유예(遺裔)로서 지행(志行)과 경술(經術)을 보면 물어보지 않아도 고 찬선의 아들임을 알 수가 있다. 여론을 조사해 본 결과 의견이 한결같아 다른 말이 없었으니, 그대가 비록 음직(蔭職)에 머물러 있고자 하더라도 이렇게 은연중에 드러나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더구나 문정공(文正公),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시호이다. 문충공(文忠公),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시호이다. 충헌공(忠獻公),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시호이다.
문간공(文簡公)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의 시호이다.의 도덕과 명절(名節)은 대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기쁨과 슬픔을 나라와 함께하였으니, 그대가 비록 은거하며 곤궁하게 지내고자 하여도 대대로 국록(國祿)을 먹어온 의리를 어찌하겠는가.

유술(儒術)을 높이 장려하고 풍교(風敎)를 도타이 숭상하는 것은 열성조(列聖朝)에 전해 내려온 가법(家法)이다. 돌아보건대 내가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한 생각은 오직 선조(先祖)의 뜻을 계승하는 데 있다. 그러나 내 정성이 부족한 탓에 한 번도 현사(賢士)를 초치하여 우리 조정을 빛내본 적이 없었는데, 작년에 유유현(兪儒賢)유유현(兪儒賢): 유언집(兪彦鏶)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또 서거하니 현자의 거처가 마침내 비어버렸다.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정부와 전조(銓曹)에 명하여 회의하여 선비를 추천하게 하였더니, 그대가 과연 가장 먼저 이 선발에 들었으므로 내가 실로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대는 빠른 시일 안에 길에 올라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이 내용은 《일성록(日省錄)》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임금이 신하를 예우하여 초치하는 한 사례로 볼 수 있는 정성어린 글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그가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가학(家學)을 통하여 몸에 익힌 학술(學術)을 기반으로 삼아 조정에 나와서 임금의 선정(善政)을 펴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루어진 한편의 글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저서에는 《의례경전기의(儀禮經傳記疑)》, 《계몽기의(啓蒙記疑)》, 《삼산재집(三山齋集)》 12권이 있다. 그의 문집인 《삼산재집》에는 시(詩) 158수와 서(書) 130여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상원답교기(上元踏橋記)〉는 정월 보름날의 답교 풍습에 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의 저술 중에 〈화이변 華夷辨〉은, 화이란 주거지역이 아니라 인물과 종족으로 논해야 하므로 우리나라를 이(夷)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산의생론(散宜生論)〉, 〈낙로설(落鹵設)〉, 〈미발기질설(未發氣質說)〉, 〈계몽기의(啓蒙記疑)〉, 〈중용기의(中庸記疑)〉 등 13편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의례경전기의(儀禮經傳記疑)〉는 1767년 6월 6일부터 10월 6일까지 〈의례(儀禮)〉를 읽고 의심나는 부분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적은 글이다. 이 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장서각 등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삼산재집(三山齋集)》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김매순(金邁淳:1776년~18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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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후기의 학자이며 문신으로,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참봉 이수(履鏽)이며, 어머니는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종주(宗周)의 딸이다. 1795년(정조19)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그 뒤에 검열(檢閱)과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쳐 초계문신(抄啟文臣)에 선발되었다. 이어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자(陞資)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하고 외직인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를 지냈다. 그의 사후, 고종 때에 판서(判書)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덕행(德行)으로 저명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나서 김택영(金澤榮)이 꼽은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에 들었다. 그리고 성리설(性理說)이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의 대립의 양상을 보일 때 그는 한원진(韓元震)의 호론을 지지하였다. 저서로는 《대산문집(大山文集)》, 《전여일록(篆餘日錄)》, 《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 《주자대전차문목표보(朱子大全箚問目標補)》, 《궐여산필(闕餘散筆)》,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등이 있다.

그는 평소에

“글은 바르고 간결하고 진실해야 하지만, 마음의 미묘한 양상을 남에게 알리자면 번거로워지고 비유를 하게 되고 뜻을 돌려서 나타내게 된다.”

라고 하여 창작의 어려움을 말한 바 있으며, 문장(文章)에 있어서도 정통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그는 또 김직보(金直甫)김직보(金直甫:1732~1785): 직보는 대산의 문인인 김종경(金宗敬)의 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구재(苟齋)이다. 1774년(영조5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산과 함께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를 편찬하였다.《高山及門錄 卷1》에게 보낸 장문의 답서에서 학문적인 견지에서 신랄하게 토론을 벌이곤 하였는데 그 중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어 깊이 생각하고 조용히 수양하면 도리는 단지 평이하고 실질적인 곳에 있으니 무슨 헛되이 과장할 것이 있겠는가. 학문하는 것은 단지 본분이니 어찌 차이를 귀하게 여기겠는가. 일상생활 속에서 부지런히 노력하여 오직 의리가 무궁하다는 것을 알아 중단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아 더욱 매진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내면의 성찰이 깊으면 저절로 외면을 추구할 겨를이 없을 것이고 자신을 다스림이 세밀할수록 남을 대함에 있어 더 많은 여지가 있게 되어, 말과 일에 드러나는 것이 진실되어 헛됨이 없을 것이고 중후하여 깊은 맛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교유하고 강론할 때에는 곧고 성실한 사람을 친구로 삼고 아첨을 잘하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아야 할 것이며, 덕과 의를 소중히 여기고 사사로운 고식(姑息)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는 내면을 깊이 성찰하다보면 자연히 외면을 추구할 겨를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자신의 수양을 세밀하게 해야만 남을 대할 때 여유가 있게 되어 말이나 일에 나타는 것이 중후해지고 깊은 맛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실질적인 학문하는 자제를 설파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박하고 진실되게 마음을 쓰며 차츰차츰 진행해 가면 의지할 만한 실제의 터전이 있게 되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된다.”

라고 하였다.
이는 단지 이론만으로 언급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체험에서 울어난 수양의 일면을 가감이 없이 전달한 것으로 여겨진다. 진지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렇듯 학문에 관한 것만 언급한 한 것이 아니라 민간의 풍습에 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의 저작 중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가 바로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관련한 내용으로 떡국에 관한 것을 잠시 정리해 보기로 한다.

떡을 뽑는 기계가 없던 당시에는 사람들이 손으로 비비고 뽑아 떡을 길게 늘여서 만들었다. 떡메로 마구 쳐서 그 덩어리가 무르고 부드러워지게 한 다음, 비벼가며 길게 뽑는 방식이었다. 이런 손동작으로 만든 긴 가래떡을 ‘비벼 만든 떡[拳模]’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만든 떡을 잘게 썰어 끓인 떡국의 국물 또한 다양한 재료를 썼다. 이러한 내용을 그의 저서 《열양세시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먼저 장국을 끓이다가 국물이 펄펄 끓을 때 떡을 동전처럼 얇게 썰어 장국에 집어넣는다. 떡이 끈적이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으면 잘 된 것이다. 그런데 돼지고기, 소고기, 꿩고기, 닭고기 등으로 맛을 내기도 한다.”

이처럼 떡국에는 장국을 기본으로 하되 다양한 육수를 썼다. 그리고 여기에 반드시 풍미를 북돋는 향신료를 더했다. 같은 시기의 사람 홍석모(洪錫謨:1781~1857)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1781~1857)가 한국의 열두 달 행사와 그 풍속을 설명한 책이다. 모두 22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 민속의 유래를 고증을 통해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뒤에 이 필사본을 홍승경(洪承敬)이 광문회(光文會)에 기증하여, 광문회에서는 1911년에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와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 京都雜志≫를 합본하여 1책의 활자본으로 발행하였다. 그 뒤 이 3책은 합본으로 여러 곳에서 간행되었으며, 우리나라 세시풍속연구의 중요한 기본문헌으로서 활용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함께 제시해본다.

 

“멥쌀가루를 쪄 큰 떡판 위에 놓고 떡메로 수없이 쳐 길게 뽑은 떡을 흰 떡(白餠)이라고 한다. 이를 얇게 엽전 두께로 썰어 장국에다 넣고 끓인 다음 쇠고기나 꿩고기를 더하고 번초설(蕃椒屑)을 쳐 조리한 것을 떡국(餠湯)이라고 한다.”

 

학문과 수양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처럼 우리의 풍습에 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일일이 적어서 소중한 기록으로 남겨 놓은 세심함을 보였다.

다시 언급하거니와, 김매순은 김창흡(金昌翕)의 후손으로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학자이며, 홍석주(洪奭周)와 함께 가장 높은 수준의 고문(古文)을 시범한 작가이기도 하다. 파란 많은 생애를 살다가 65세의 노경에 병마(病魔)에 시달렸던 그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한강을 건너 화장사(華藏寺)를 찾은 것은 이생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아들과 제자 유신환(兪莘煥)과 김상현(金尙鉉)만을 데리고 간 단출한 나들이였던 이곳이 지금은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라 불리우는 절로 남아 있다. 그가 이 사찰을 유람하고 나서 기록을 남겼는데, 문장가답게 잘 정리되어 있는 필치로

“이번 여행에서 세 가지를 얻은 것이 있다.”

라고 하여 그 세 가지를 기문(記文)의 말미에다 열거해 놓았다. 번역한 전문을 옮겨보기로 한다.

첫째, 사찰과 산수는 모두 빼어난 볼거리라 할 만하다. 어떤 짐승은 이빨만 뛰어나고 어떤 짐승은 뿔만 뛰어나니 이 둘을 겸할 수는 없는 법이다. 땅이 너무 드러나 있으면 닭과 개 울음소리가 가까운 것이 싫고, 땅이 너무 궁벽지면 수레나 말을 타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치러야 한다. 이 산은 그다지 깊지도 얕지도 않아서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너면 바로 왁자지껄한 속세와 멀어질 수 있다. 산을 오르거나 물을 건너기에 모두 딱 적당한 곳을 찾자면 바로 여기라 하겠다.

둘째, 그저 너무 적막한 것을 면하려고 여러 사람을 불러 모으다가는 다툼이 일어나기 쉽다. 두 명의 벗과 아이 한 명이면 충분한 성원이다. 경형(景衡) 경형(景衡): 대산의 제자 유신환(俞莘煥)의 자이다.
은 뜻이 굳고 마음이 고요하여 겹겹의 관문을 뚫을 만한 공력을 지녔다. 위사(渭師) 위사(渭師): 대산의 제자 김상현(金尙鉉)의 자이다.
는 정신이 탁 트이고 칼날처럼 날카로워 만 리 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기상이 있으며 봄빛에 꽃이 만발하여 겨울이 되어도 시들지 않을 듯하다. 인아(寅兒) 인아(寅兒): 대산이 김정순(金鼎淳)의 아들 선근(善根)을 후사로 들였는데, 인아는 그의 아명인 듯하다.
는 어린 새가 지저귐을 배우는 듯 또한 수창(酬唱)에 참여하였다. 일행 모두가 제대로 되었다 하겠다.

셋째, 임금이 편안하고 신하가 수고로우면 막힌 것이 뚫리고 더러운 것이 제거되듯 어려운 일이 술술 풀리고, 잠자리가 아름답고 음식이 맛나면 심신이 조화롭게 되는 법이니, 어찌 천운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꼭 그렇다고 단언을 할 수는 없겠지만, 어찌 이러한 공을 아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물이 찬지 뜨거운지는 직접 마셔봐야 아는 법인데, 위사는 무슨 걱정을 그리 지나치게 하였던가? 이 모두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기술한 이 세 가지 중에 첫 번째는 장소의 알맞음을 말하였고, 둘째는 구성원의 적합함을 언급하였고, 세 번째는 신하로서의 임금에 대한 은혜를 언급하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임금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 여러 가지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는 인생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30대 초반에 정치권으로부터 소외되어 양주(楊州) 미음(渼陰)에 은거하며 지내야만 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20년에 가까운 재야생활이 그에게는 학문과 작품활동에 몰두할 수 있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시기였는지 모른다. 이 기간 동안에 그의 대표적인 학술서인 《주자대전차의문목표보(朱子大全箚疑問目標補)》와 당시 우리 풍속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민간의 풍습을 절기별로 정리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등 훌륭한 문학작품들은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후 50대부터 복권되어 차츰 관직에 나아가긴 하였으나, 외직(外職)으로만 돌았을 뿐 내정(內政)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 《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은10여 년에 걸친 지방관의 행정 경험을 문헌으로 정리한 것이며, 《궐여산필(闕餘散筆)》은 말년에 물러나 평생 동안 공부한 내공을 정리한 것이다. 그는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 《대산집(臺山集)》
– 《헌종실록(憲宗實錄)》
– 《민족문화대백과》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