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율곡학사업

수의(守義) – 정의롭게 행동하라


정의롭게 행동하라

 

어느 설문조사에서 돈 10억 원을 얻을 수 있다면 교도소에서 1년간 갇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고등학생들의 응답이 2012년 44%에서 2015년 56%로 올랐다고 하여, 적잖은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이익이 크다면 불명예나 불이익을 감수해서라도 차지하고 싶은 현대사회 보통사람들의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만약 이 경우 1년이 아니라 20년의 감옥생활을 제안했더라면 어떤 응답이 나올지 궁금하다.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응답률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불이익이 더 크다면 대개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가 하는 철학적 물음을 하게 된다. 이 이익을 달리 인간의 욕망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인간인 이상 누구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비록 그 욕망이 기본적인 욕구 수준일수도 있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과욕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인간도 동물적인 몸을 지닌 이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따라서 욕망의 추구는 생물적 인간 본성의 실현과 상당한 관련이 있고, 남을 해칠 정도로 과도하지 않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전통적으로 유학은 이런 욕망과 관련된 이익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義)를 내세웠는데, 보통 의리라고 부르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로서 윤리도덕에 부합하는 행동준칙이다. 의의 원초적 의미는 ‘일이 알맞고 마땅한 것’으로 오늘날 국가나 사회적으로 말하는 정의 개념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흔히 조직폭력배들이 말하는 그런 의리가 아니다.

 

일찍이 공자는

“이득을 보거든 의에 맞는지 생각하라
(見得思義).”

고 말하였고, 맹자 또한

“오직 인(仁)과 의(義)만 있을 따름입니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라고 하여, 의와 이익이 서로 상반되는 것임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더 나아가 송대의 성리학은 맹자의 이론을 계승하여 인(仁)·예(禮)·지(智)와 함께 의는 천리(天理)로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본성인 의리를 어떻게 잘 발휘할 것인지 고민하였다. 대신 이익은 인욕(人欲)이라 일컫는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천리인 의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율곡 또한 기본적으로 이런 견해를 따랐다. 『학교모범』의 열두 번째 주제는 이런 의리를 지키라는 수의(守義)이다.

 

배우는 자에게는 의와 이익을 구분하는 일이 매우 시급한 일이다.

의란 그 자체 외에 무엇을 의도하는 것이 없으면서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것 외에 의도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이익을 도모하는 도둑의 무리이니, 경계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선한 일을 하면서도 명예를 구하는 것 또한 이익을 도모하는 마음이니, 군자가 볼 때 이것은 남의 집 담장을 뚫어 도둑질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하물며 나쁜 짓을 하면서까지 이익을 취하는 자이겠는가? 배우는 자는 한 터럭만큼의 이익을 위한 마음을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된다.

 

선생 또한 이렇게 이익과 의가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특히 나라의 정의 그 자체보다 겉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이 속한 정당과 기득권을 지닌 부자들 그리고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며, 국민이 아닌 자신을 공천해준 권력자의 눈치만 보았던 작금의 우리나라 일부 정치가들은 도둑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또 현대의 정치가들은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이러한 선생의 주장이 현실에 맞지 않는 말인가?

또한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과도 멀지 않는 일이며, 특히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고 추구하는 체제인데, 그것을 부정하고 오로지 의리만을 어떻게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생업을 가지고 이익을 추구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데, 어떻게 이익을 멀리 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서 선생이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오늘날에 적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현대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그렇다면 애초에 맹자가 양혜왕(梁惠王)에게 이익과 의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 논리에 되돌아 가 보자.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다. 우선 의와 이익 가운데 무엇을 앞세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우선순위가 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의를 취하면 모두에게 좋을 수 있지만, 이익을 앞세우면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게 되어 사회가 더욱 혼란스럽게 된다는 우려가 그것이다. 이익의 본질이 그렇다고 날카롭게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의는 공유(共有)할 수 있지만, 이익은 공유하기가 쉽지 않고 되레 독점하기 쉽다. 이런 이익만 인간행위의 동력이 된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렇듯이 사회는 삭막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이익을 추구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군자는 그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여 이익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이익만 너무 앞세우면 사회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또 하나 이익과 의가 양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점은 지도자의 역할에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전근대적 사회에서 지도자는 만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사적인 이익을 앞세우거나 사사로이 이익을 챙기기보다 나라의 정의를 앞세워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유지되고 다스려진다.

마찬가지로 최근에 우리나라의 최고지도자가 정의보다 사적 친구의 이익을 도와주다가 어떻게 되었는가? 본인도 불행하고 나라의 정의도 사라지지 않았는가? 기업의 지도자인 최고 경영자도 마찬가지이다. 기업이 비록 이익을 추구하는 기관이기는 하지만, 그 마저도 기업의 이익을 추구해야지 기업가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적인 이익은 기업의 이익 가운데서 극히 일부이고 그것마저도 정당하게 취해야 한다. 또 직장에서 부서장이나 기관장이 자신의 안위와 승진에만 신경 쓰고 조직의 발전에 힘쓰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우리들의 경험으로 봐서 그 조직이 절대로 잘될 리 없다.

그렇다면 지도자가 아닌 일개 자연인으로서 사적인 이익 추구는 멀리해야 할 일일까?

 

선생은 앞에서

“배우는 자는 한 터럭만큼의 이익을 위한 마음을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된다.”

 

고 했는데, 오늘날 맞지 않는 말일까? 선생이 살았을 당시의 다수의 사대부들과 백성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 별다른 이익을 바라지 않더라도 땅이 내주는 대로 정직하게 먹고 만족하며 살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런 생산적 기반이 없는 소시민적 삶은 이익을 추구해야 생계를 잇고 노후생활을 보장할 수밖에 없으니, 절대로 이익을 멀리할 수 없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차이이다. 더구나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지 않는가?

이처럼 현대적 삶과 군자나 성인을 지향하는 전통의 유학에 비록 시대적 차이가 있음은 어쩔 수 없으나, 선생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한 구석이 있다.

 

예컨대

“사양하거나 받거나 취하거나 주는 것에서 마땅한지 부당한지 깊이 살피고, 이득을 보면 의에 맞는지 생각해보고 터럭만큼도 구차하거나 지나쳐서는 안 되다.”

 

는 주장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뇌물 수수나 부정청탁 등이 심하여 오죽하면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청탁금지법으로 그것을 막으려고 했겠는가? 정작 선생의 이런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지켰더라면 그 법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인간의 삶에서 이익추구를 부정할 수 없으나, 선생의 이런 가르침은 정의를 벗어나서 지나치게 부당한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응과(應科) – 입시공부에만 매달리지 마라


입시공부에만 매달리지 마라

 

공부의 목적은 무엇일까? 만약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좀 딱딱한 질문이 되겠다. 차라리 ‘공부를 왜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것 같다.

공부의 목적은 그 사람의 경험이나 지적 능력, 또는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말하겠지만, 청소년의 경우 대개 대학입시에 합격하기 위해서라거나 중간·기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왜 그럴까? 공부를 먼 미래의 자신의 삶과 연관시키기보다는 당장에 성적을 올려야 하는 현실의 중압감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좀 어처구니없지만 초등학생들 가운데는 엄마가 공부하라니까 한다는 대답도 종종 있다.

이런 압박감이 덜할 경우 직업을 갖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좀 고상하게 말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러나 후자의 답은 잘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는 진술처럼 그 꿈이 무엇인지 잘 사는 게 어떤 것인지 되물어야 할 형식적 답에 불과하다. 또 어른들이 말하는 이런 형식적인 답 가운데는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있다.

사실 공부의 내용은 자신의 꿈이 무엇이냐에 따라 만족스러울 수도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누구나 거의 똑같은 교육과정을 밟아야 하고, 또 그것에 따라 입시에 통과해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이 현실보다 이상에 가깝다면 입시위주의 공부에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입시공부란 당장의 해당 단계나 과정을 밟기 위해서 필요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그 각각의 단계가 쌓여 꿈을 향해 나아가게 되지만, 그 단계에 오르기 위한 입시자체로만 보면 이상적인 꿈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가령 어떤 소년의 꿈이 율곡 선생처럼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라면 실제 입시공부는 성인이 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비록 성인은 아니더라도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점수 따기에 영악한 사람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크다.

그래서 입시공부와 좋은 인품을 기르는 공부가 서로 배치된다고 생각을 하게 되고, 입시공부가 인성을 함양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믿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공부 잘 한다고 반드시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것은 아니라고 믿게 되는데, 그런 주장을 현실에 뒷받침하기라도 하듯이 이른바 일류대학 출신의 고위 공직자의 비리나 범죄를 종종 접할 때면, 사람들이 보라는 듯이 공부 잘하는 놈들은 모두 이기적이라고 판단해 그 주범이 마치 지나친 입시교육인 것처럼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못난 사람의 범죄는 소수의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피해를 끼치지만, 잘난 사람의 범죄는 사회적으로 큰 손실을 끼치므로, 공부 잘 했던 사람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이 크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입시위주의 공부가 훌륭한 인품을 기르는데 방해가 될까? 이런 고민은 오늘날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모범』의 열한 번째 주제는 과거에 응시하는 문제인 응과(應科)로서 과거는 관리가 되는 시험이므로 오늘날 공무원 입시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선생은 성인이 되는 것을 공부의 목표로 삼으라고 했는데, 얼핏 보면 이런 과거시험과 성인이 되는 공부는 서로 배치되는 것 같다. 이에 대한 선생의 견해가 어떠한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과거는 비록 뜻있는 선비가 골똘히 매달려야 할 일은 아니지만, 요즈음 벼슬하기 위해서 통용되는 규정이다.

만약 도학(道學)에 오로지 뜻을 두고 예의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선비라면, 과거를 숭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치와 교화가 잘 되어서 나라의 성덕(盛德)이 빛나는 것을 보아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수 없다면, 또한 마땅히 성실한 마음으로 공부해야지 부질없이 세월만 허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과거(科擧)의 득실 때문에 자신이 지키는 지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도학(道學)이란 쉽게 말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이다. 그런 공부를 제대로 한 선비라면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초빙하는 것이 오래된 옛날의 전통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시험을 통해 뽑는다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점을 행간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선비에게는 과거는 숭상할 바가 못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가 잘 다스려져 정의롭다면 과거에 응시해야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성인이 되고자 하는 뜻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과거공부 자체는 성인이 되는 공부와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보통의 선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거시험을 보지 말고 오로지 성인이 되고자 하는 도학에만 매달려야 하는가? 아니면 임금을 도와 백성들을 교화하고 잘 살게 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과거시험에 매달려야 하는가?

 

만약 도학에 뜻을 두어 게으르지 않을 수 있다면 일상생활이 이치를 따르지 않음이 없으므로, 과거시험 또한 일상생활 가운데 한 가지 일이어서 실제의 공부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

 

여기서 이상과 현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성인이 되는 공부인 도학이란 멀리 있는 고원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므로, 과거시험이 그것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입시공부가 바른 인성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과 같다. 다만 그 전제 또는 조건은 공부하는 사람의 꿈이 도덕적이고 바람직한 인간이 되는 데 두고 게으르지 말아야 하며 일상생활에서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조건을 충족한다면 입시공부가 훌륭한 인격을 함양하는 데 방해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평소에 착한 학생은 입시공부가 착한 행동에 방해가 되지 않는 논리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도 당시 선비들 가운데는 과거시험 때문에 도학이 방해를 받는다고 여겨서 도학도 제대로 못하고 과거시험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한 가지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면서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다고 선생은 한탄하였다.

선생의 이런 논리는 오늘날 입시위주의 교육 때문에 인성을 제대로 함양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더 나아가 공부만 잘한다고 해서 훌륭한 인품을 보장할 수 없다는 세인들의 생각과도 맞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이것은 공부의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선생의 논리에는 공부하는 사람이 도학에 뜻을 두어 그 공부에 게으르지 않고 과거시험을 준비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나, 오늘날 공부는 그런 훌륭한 인품을 기르는 것보다는 학부모나 학생이 인기 있는 직업을 갖는 것만으로 공부의 목표로 삼아서 오로지 입시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입시공부와 인격공부는 별개의 것이 되고, 학생들의 인간성이 잘못되는 것은 지나친 입시교육 때문이라는 평가는 어쩌면 당연하다.

아무튼 우리의 현실은 미래의 직업이나 생존에 필요한 능력을 도외시하고 훌륭한 인격함양만을 위한 공부에만 매진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인격함양을 무시하고 입시공부에만 매달리는 것도 문제임은 분명하다. 양자를 조화시키려면 나름의 대안이 필요하다. 그런 뜻에서 율곡 선생이 제안하는 논리도 그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가치를 존중하고 준수하는 습관과 태도를 기르는 일이 그것이다.

접인(接人) – 남을 올바르게 대하라


남을 올바르게 대하라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남과 어울려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로빈손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혼자 살았고, 우리나라도 이른바 ‘자연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일도 있어서, 혹 누가 혼자 살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로빈손 크루소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살다가 훗날 사회에 복귀하였고, 자연인 또한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통해 만들어 놓은 물건을 사용하기도 하고 가끔씩 산에서 내려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정해진 질서가 있다. 그 질서 가운데 강제적 규범으로는 법이 있고 자율적 규범으로는 윤리나 도덕 그리고 예법과 관습 등이 있다. 누가 자율적 규범을 어겼을 때 비록 법적인 구속력이 없더라도, 비난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청소년들 사이에도 나름의 질서를 세우는 규범이 있는데, 가령 선배와 후배의 구별, 또래 사이에서 잘 난 척 하지 않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재학 시절에는 대개 같은 나이 많아야 한두 살 차이 나는 학생들과 생활하지만, 일단 사회에 나오면 여러 연령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사람을 올바르게 대하는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나이가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또 조선시대라면 신분이나 덕(德) 또는 벼슬이 거기에 추가 되었다.

오늘날은 그런 신분은 철폐되었고, 벼슬 또한 하나의 직업으로서 직위 또는 지위 개념에 속한 문제라 같은 직장 안에 있는 구성원들에게는 사람을 대하는 나름의 기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는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다만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에게는 거기에 알맞은 예우가 법적으로 정해져 있을 뿐이다. 또 덕이 기준이 되는 경우는 이제 매우 드물다.

어쨌든 나이만은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사람을 대하는 강력한 기준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나이든 노인에게 반말을 쓰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며, 반면에 노인이 젊은 사람에게 반말을 써도 크게 흉이 되지 않는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말을 배울 때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높임말·예사말·낮춤말의 표현이라는 점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가 나이든 사람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면, 버릇없다거나 심지어 ‘싸가지 없다’는 비속어로서 비난받기도 한다. 우리 속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을 보면 안다.’라는 말도 이런 배경에서 생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서 이런 것을 우리의 부정적인 전통 가운데 하나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고, 그 때문에 ‘나이가 무슨 벼슬이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이 『학교모범』 속에서도 나이에 따른 사람을 대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열 번째 주제로서 접인(接人)이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이 나이에 따라 사람을 대우해야 한다고 하는 말이 현대적 관점에서 비판받아야 할 일인가? 일단 선생의 주장을 들어 보자.

 

남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예의를 준수해야 한다. 나이든 사람을 섬길 때는 동생처럼 대하되, 잠자는 것과 먹는 것과 걷는 것은 모두 나이든 사람보다 뒤에 해야 한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 이상이면 형으로 섬기고, 두 배 이상이면 더욱 공손하게 대우한다.

 

일단 여기까지 보면 선생이 사람을 대우하는 기준이 확실히 나이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대전제가 있다. 남을 대할 때 예의를 준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나이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사회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예의였고 선생의 주관적인 생각은 아니다. 이런 전통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왔다. 『예기』나 『논어』나 『맹자』 같은 고전을 보면 나이로 서열을 정하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보다 열 살 이상이면 형으로 섬겨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열 살 이내에는 친구로 사귈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격몽요결』 「접인」장에서는 다섯 살 이상이면 약간의 공경을 더한다고 하여 친구로 여기기는 좀 어색하다.

어쨌든 친구로 사귈 수 있는 대상은 나보다 다섯 살이 넘지 않는 상대이니, 나보다 어린 사람도 해당되므로 앞뒤 열 살 이내는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또 『격몽요결』에서는 나보다 갑절이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기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더욱 공손하게 대우한다는 말이 그 뜻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사회생활 가운데 굳이 나이로만 따지기에는 의미 없는 경우도 있다. 어린이나 친족 그리고 이웃 간의 생활원리 등이 그것이다. 나이가 종적인 규범의 기준 가운데 하나라면 횡적인 기준내지 원리도 필요하다. 그래서 선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어린이를 자애롭게 어루만지며 친족과 화목하고 이웃과 잘 지내서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어야 한다.

매양 덕이 있는 일을 서로 권장하고
[德業相勸],
허물이 있으면 서로 바로잡고
[過失相規],
관혼상제 예법의 풍속을 서로 이루어주며
[禮俗相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서로 도와서
[患難相恤],

남이나 상대를 돕고 이롭게 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남이나 상대를 해치고자 하는 생각을 털끝만큼도 마음에 가져서는 안 된다.

 

횡적인 기준은 어린이와 이웃사랑인데, 그것으로 남이나 상대를 잘 대우하라는 뜻이다. 특이한 것은 향약(鄕約)의 내용이 여기에 들어갔다는 점인데, 이것은 향촌사회의 자치규범이므로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향약의 내용상으로 보면 나름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나, 공동체가 와해된 오늘날 우리들의 도시적 삶에서 그 실행에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다. 다만 어린이를 사랑하고 이웃과 잘 지내야 하는 점은 여전히 우리가 항상 지켜야 할 것들이다.

자, 이제 다시 앞으로 돌아가 나이가 과연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짚어보자. 나이든 사람을 공경했던 옛날에는 나름의 실용적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의 경험이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었고, 권력과 재산권을 가진 사람도 나이든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그런 규범이 중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면서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거나 창출하는 일은 대개 젊은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은 직장에서 내몰리거나 가족 내에서도 은근히 무시를 당하는 경향이 있다. 다행이 나이든 사람에게 많은 재산이나 권력이 있을 경우에는 적어도 겉으로는 공경하는 척 한다. 게다가 나이든 사람들이 사회에서 지탄받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어 젊은이들로부터 공경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나이만으로 공경 받는 시대는 이제 저물어 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일부 뜻있는 노인들은 그 점을 알아차려 나이만으로 대접받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은 제4차 산업혁명이 눈앞에 닥친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바로 인간관계의 중요성이 그것이다. 당분간 기계 또는 로봇이 인간의 감정을 대신할 수 없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며 사랑을 나누는 일은 단연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선생이 제시한 이웃사랑과 남이나 상대를 이롭게 하는 이런 태도는 이 시대에 새로운 블루오션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곧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을 상대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이런 태도 위에 구성한 인적 네트워크는 그 사람만의 자산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가정생활의 도리


가정생활의 도리

 

학교모범』의 아홉 번째 주제는 가정생활이다. 청소년들에게 가정생활을 말한다는 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더구나 요즘은 결혼조차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청년들이 늘어나서,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가정생활을 말한다는 게 지금보다는 어린 나이에 누구나 혼인했던 옛날과 다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 어떻든 간에 누군가 혼인하는 사람은 계속 있을 것이고 따라서 가정이 없어지기야 하겠는가? 어떤 공상소설이나 아나키스트의 주장처럼 아이가 생기면 국가에서 모두 길러주고, 부모는 육아나 교육 더 나아가 가정생활에서 자유롭게 해방되어 산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겠는가? 혹 먼 미래에는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가정이 소멸하기까지 하겠는가?

따라서 가정을 이루게 될 경우 가정생활의 도리를 미리 알아두어서 나쁠 것은 없다. 옛날에는 이렇게 가정생활의 도리를 미리 가르쳐서 부모나 부부의 도리를 다 하도록 했는데, 요즘 학교에서는 이런 것을 좀처럼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부부의 도리나 자식을 올바르게 양육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 부모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로인해 시행착오를 겪는 일은 어쩔 수 없고, 그 때문에 종종 나이든 부부 가운데 본인들이 젊었을 때의 자녀양육과 부부생활에 대해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어버려서 어쩔 수 가 없다.

필자도 솔직히 말하는데, 이런 가정생활의 도리를 미리 배워서 부모가 된 것은 아니다. 비록 아이가 태어난 뒤였지만, 전통학문과 관련된 학문을 전공하면서 자녀교육과 부부생활에 도움을 받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나이도 들고 경험도 쌓였기 때문에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을 보면 그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가령 전철을 타고 가거나 어떤 장소에서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에게 영어단어를 외게 하는 것을 가끔씩 볼 때가 있다. 못 외면 야단까지 쳐 가면서 말이다. 차라리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면 단어보다 말을 가르치는 게 훨씬 낫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굳이 과거 자기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의 영어 공부방식으로 단어를 외게 하는 것은 아이에게는 비교육적이다. 정작 아이는 단어가 문장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도 아직 모르고 있는데, 그걸 외게 하면 훗날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기성세대들이 과거 잘못 배운 영어교육이 아니던가?

또 이런 사례도 있다. 국회에서 인사청문회 하는 과정을 보면 해당 후보자 개인의 경우에는 큰 하자가 없다가도, 그의 부인의 잘못이나 자녀의 일로 곤욕을 당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또한 간접적으로 후보자가 평소 가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일로서, 전통의 유교문화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서는 그 후보자의 부덕(不德)의 소치로 여긴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한 야당국회의원들의 집요한 지적은 국민들에게 일정하게 먹힌다고 봐야 한다.

자 그렇다면 율곡 선생은 가정생활에 대한 어떤 견해를 가졌을까? 그리고 그것이 현대의 우리들에게 과연 어떤 도움이 될까? 가정생활로 옮긴 원문은 거가(居家)이다.

 

가정생활에서는 도리를 다하여 형은 동생을 우애(友愛)하고 동생은 형을 공경하여 한 몸 같이 하여야 한다.

남편은 온화(溫和)하고 아내는 유순(柔順: 부드럽게 따름)하여 예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바른 도리로써 자녀를 가르치되 지나친 애정으로 아이의 총명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아랫사람을 부리는 선생의 말은 더 있지만 생략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노비와 같은 하인이 없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먼저 가정의 관계를 보면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간의 도리란 관계에서 나오는 도리이기 때문에 이렇게 가정 내에서도 관계가 등장하게 되었다.

먼저 형과 아우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도리가 형과 아우에 따라 조금 다르다. 형이 동생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전통적으로 우애라 불렀고, 동생은 형을 공경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니까 이런 도리는 형이나 동생 모두 지켜야 하는 문제이지, 한쪽이 지키지 않으면서 상대더러 지키게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아내에게 따뜻하고 화합하는 자세로 대해야 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부드럽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남편이 학문과 도리를 익혀 가정을 이끌어야 했지만, 오늘날은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교육을 받아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기 때문에 모두가 상대에게 온화하게 해야 하고 누구를 따르기보다 서로 의논해서 일을 결정해야 한다. 이렇게 남편과 아내의 역할에는 고금의 시대적인 차이가 분명히 있다.

끝으로 자녀의 교육방식은 바른 도리로써 하되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녀의 총명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은 요즘 젊은 부부들에게 해당되는 중요한 선생의 가르침이 될 것 같다. 어느 부모인들 바른 도리로 자녀를 가르치면서 사랑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랑이 지나치다보면 그 사랑에 눈이 멀어 자녀의 잘못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듯 자식이 잘못했는데도 훈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요 되레 자식을 망치게 한다.

 

그래서 『명심보감』에도

“자녀를 사랑하면 회초리로 때리고, 자식을 미워하면 밥을 많이 주라.”

고 하였는데, 이 말은 자식을 사랑할수록 잘못이 있을 경우 훈계하라는 뜻이다.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이런 가르침을 더 자세히 말하고 있다. 아마도 『학교모범』은 선조의 명에 따라 학교교육의 미비점을 올리는 글이기 때문에 요점만 간단히 진술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격몽요결』을 참고하면 더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 이렇게 봤을 때 선생이 말하는 가정생활의 도리는 여전히 현대인의 삶에서 참고해야 할 요소가 있다. 비록 전근대적인 조선사회와 근대화된 오늘날의 시간적 간격에 따라 당시에는 마땅했지만 오늘날에는 불필요한 것이 있어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도 분명히 있다.

예컨대 형제 사이의 우애와 공경도 여전히 필요하다. 어릴 때에는 비교적 잘 지내다가도 성인이 되어 각자 독립된 가정을 이루면 우애와 공경이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놓고 서로 싸우고 왕래까지 끊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부부사이도 서로 공경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특히 나이든 남편의 경우 가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해 아내나 젊은 자식들로부터 지탄을 받거나 심지어 따돌림을 당하는 가장도 있다. 가족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므로 공경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자식의 교육이야 말로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광복 후 최근 몇 십 년 동안 대부분의 가정을 살펴보면 남편은 자녀의 교육을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과 달리 산업이 근대화되고 보니 직장일로 바빠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지만, 자녀의 교육을 아내에게만 맡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 아내가 교육을 잘못시켜서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바른 도리로써 자식을 가르치자면 자신도 바른 도리로써 사회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모범이 못되는 가장이 어찌 밖에 나가서 남에게 좋은 역할을 하겠는가?

아무튼 청소년들이 당장 가정을 갖지는 않지만, 이들에게 가정생활의 도리를 제대로 가르쳐야 개인은 물론 사회든 국가의 장래도 밝아질 것이다.

택우(擇友) – 친구를 잘 선택하라


친구를 잘 선택하라

 

당신에게는 친구가 몇 명이 있는가? 그 친구들이 당신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직장이나 학교 또는 동창회나 동호회처럼 같은 모임에 나가기 때문에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 그리고 사귀는 목적이 무엇인가? 친선도모나 공통의 취미나 취향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같은 학교나 고향출신이라서 사귀는가?

이처럼 성인의 경우라면 대개 학교, 직장, 출신지역, 동호회, 사업, 종교 등을 매개로 친구를 사귀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학교나 출신지역으로 보자면 오래된 친구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친구를 사귀는 경우는 서로 간 나름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사귄다. 사귀는 목적은 대개 친선이나 친교, 상부상조 등이 대부분이고 때로는 학문이나 예술 또는 사회봉사나 종교적 실천의 동반자로서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청소년들은 어떤 기준에서 사귈까? 상대의 외모, 집안 배경, 뛰어난 자질이나 능력 등도 한 몫 할 것이다. 예컨대 집안이 부유하여 돈을 잘 쓴다든지, 외모가 출중하여 남의 시선을 끌거나 탁월한 운동기능이나 예능이 있을 때 친구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상대가 마음이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아야 한다. 아무리 이런 조건을 갖추어도 마음이 옹졸하고 이기적이면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

사실 그보다도 청소년들에게는 같이 놀아주는 상대가 친구가 되는 경우가 가장 훨씬 많다. 운동이나 취미활동 및 여행 등은 물론이고, 음주나 흡연처럼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조차도 함께하고 호응해야 친구가 된다. 그래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처럼 청소년기에는 친구를 잘못 사귀어 탈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2014년에 개봉했던 영화 ‘피 끊는 청춘’에서도 보이지만, 이른바 ‘일진’을 중심으로 친구들이 몰려다니고 패싸움 따위를 하기도 한다. 친구의 잘못을 말하기는커녕 같이 행동하고 그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않는다. 비록 대등한 관계의 친구가 아닐지라도 같이 어울려 다닌다. 이 영화는 주인공인 이종석(중길 역)과 박보영(영숙 역)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이렇게 좋게 끝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친구는 잘 사귀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당시는 어떠했을까? 율곡 선생이 권하는 친구사이는 어떠한가? 『학교모범』의 여덟 번째 주제는 택우(擇友) 곧 친구를 골라서 사귀는 일이다.

 

학문을 갈고 닦아 인(仁)을 돕는 일은 실로 친구로부터 힘을 얻는다.

 

선생의 이 말에는 친구를 사귀는 목적이 들어 있다. 그 목적은 인(仁)을 돕는 곧 보인(輔仁)에 있다는 것이다. 보인이란 말은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인데,

“군자는 학문을 익히면서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
(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니까 친구를 사귀는 목적은 친구들끼리 바른 도리를 서로 권하여 인덕(仁德: 어진 덕)을 쌓는 데 있다.

그런데 착한 덕을 쌓기 위해 친구를 사귄다는 말은 요즘 청소년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친구를 사귀는 동기자체가 덕을 쌓는 것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거리가 있는가? 이것은 청소년들이 대체로 이성보다는 감성의 지배를 많이 받기 때문에, 육체적이고 감각적이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자극적인 일에는 쉽게 반응하고 관심을 보이지만, 이성적인 덕이나 도덕은 좀처럼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수의 성인(成人)들도 그러할진대 청소년이나 그 이하의 어린이들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바로 여기서 윤리나 도덕에 관련된 교사나 교수 그리고 인성교육을 바라는 학부모들의 세심한 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 현대사회는 청소년들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비도덕적인 유혹이 너무 많아서, 그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일단 이런 청소년들의 경향을 이해하고 인성교육이든 도덕교육이든 이들에게 먹힐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율곡의 이런 친구사귀는 목적이 자칫 현실에서 하나의 이상론으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어떠할까?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반드시 충성과 신의, 효도와 우애가 있고, 강직하고 방정하며, 돈독한 사람을 가려 친구로 사귀어야 한다.

잘못이 있으면 서로 경계하고 선행(善行)을 함으로써 서로 충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함으로써 친구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만약 마음먹은 것이 독실하지 못하고 자기 몸을 단속하는 일이 엄숙하지 못하여 경박하고 방탕하며 즐겁게 노는 것만 좋아하고 말 잘하는 것과 기운만 숭상하는 자는 모두 벗으로 사귀지 말아야 한다.

 

친구를 사귀는 목적이 그러하듯, 사귀는 방법도 도덕적인 사람을 골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친구에게 잘못이 있을 때 충고할 수 있어야 한다. 『논어』에서는 충고하여 잘 인도해야 하는데 친구가 말을 듣지 않아 그렇게 할 수 없으며 그만 두라고 한다. 그러니 방탕하고 경박하고 덕이 되지 못하는 일을 숭상하는 사람이야 친구로 사귈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이 우리 조상들 특히 선비들의 친구 사귀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의 친구사귀는 것이 오늘날 통할까? 청소년은 물론이고 성인사회에 있어서도 상당이 난처해 보인다. 우선 같이 놀아야 친구가 된다. 오락실도 같이 가고 운동도 경우에 따라서는 탈선도 같이 해야 친구가 된다.

보통의 성인의 경우도 같이 노는 것은 물론이고 각자에게 이득이 되어야 친구로 두려고 한다. 사업이나 승진 또는 출세하거나 아니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심지어 남에게 자랑이라도 할 수 있는 지위나 명성을 지닌 사람을 친구로 두려고 하지, 내게 손만 벌리고 늘 도움만 받으려고만 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친구로 사귀려 들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러한 도움 없이 그 사람의 인품만 훌륭하다고 해서 쉽사리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 더욱이 그런 분이 가난하다면 더욱 멀리 할 것이다. 그나마 나은 경우라면 서로가 필요할 때 돕는 호혜평등(互惠平等)의 원리가 적용되는 친구사이이다. 성인사회의 친구사귀는 동기는 실제로 도덕보다 이런 이익이 지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의 친구 사귀는 목적과 방식에 비추어 오늘날 보통 사람들의 친구사귀는 목적이나 방식을 비난할 수 있을까? 혹 우리가 이익을 떠나서 살 수만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가 친구를 사귀는 목적은 서로의 이익을 포함하여 서로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며, 같은 목표를 실천하는 동지로서, 때로는 가족처럼 필요할 때 서로 돕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목적의 외연이 선생이 말하는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더 넓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도덕적 덕을 쌓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더라도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떻든 아무나 함부로 친구를 사귀어서는 안 되겠다. 그 점은 예나지금이나 통용되는 진리이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

는 말이 있듯이 친구 때문에 내가 잘못될 수도 있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에 유학을 따르던 옛날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사회나 인간을 바라보는 철학이나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다. 오늘날 유학의 가르침도 수많은 가르침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사(事師) – 스승을 잘 따르라


스승을 잘 따르라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스승의 날에 부르는 노랫말의 일부이다. 이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은 정말로 노랫말처럼 생각하고 있을까? 그저 지나가는 행사이나 아무 생각 없이 부를까? 그 답은 독자 여러분의 몫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사회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저 필요에 따라 인용하는 옛말일 뿐이고, 스승을 존경하기는커녕 비난하거나 대드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버렸다. 학교 급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심지어 ‘스승은 종업원 학생은 고객’이 되어, 스승은 고객의 진상에 쩔쩔매는 종업원의 신세로 전락한 느낌마저 든다. 이제 스승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이나 정보를 파는 사람, 그 지식이나 정보가 하잘 것 없으면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고 마는 처지에 놓였다. 고매한 인격과 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이런 현상이 개탄할 일이라고 목청 높여 말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는 지식과 정보가 일부 사대부들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배우려면 그들은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보통의 지식과 정보를 가질 수 있으니 그런 지식을 소유했다고 해서 존경스러운 일도 아니리라. 더구나 돈 되는 지식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지 않겠는가?

게다가 스승이 얼마나 많은가? 학교나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강사, 교수의 수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 가운데 혹 누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실제로 권력의 시녀가 되거나 곡학아세(曲學阿世)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우는 스승들도 있어서, 줄곧 스승의 권위가 점점 땅에 떨어지는 데 일조하였다. 참된 스승이 어딘들 없겠냐마는 스승을 존경하는 사람을 점점 찾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학교모범일곱째 항목에서 율곡 선생이 스승을 섬기라는 사사(事師)가 그저 당시에만 통용되고 오늘날 불필요한 말일까? 게다가 율곡 선생은 맹목적으로 스승을 섬기라고만 했을까? 선생이 스승을 섬기라는 내용은 어떤 것일까?

 

배우는 자가 성심으로 도에 뜻을 두었다면 먼저 반드시 스승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여야 한다. 사람은 임금·스승·어버이 세 분 덕에 태어나고 가르침을 받고 길러지니, 하나같이 섬겨서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임금·스승·어버이를 교육적 차원에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로 여겨 그 은혜가 같다고 여겼다. 옛날에는 이렇게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요즘은 임금이 없으니 임금대신에 국가나 사회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거나 국가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니, 은혜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니 당시와 지금의 시대적 문화 차이 때문에 선생의 이런 발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배우는 사람들이 부모님이나 스승의 은혜, 그리고 국가의 보살핌에 감사하는 일이 있다면 매우 가상한 일이고, 또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 보살핌과 가르침을 자신의 권리라고 여겨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선생은 구체적으로 스승을 어떻게 섬기라고 했을까?

 

평상시에 모시고 받들 때 존경을 다하고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고 명심하여 그것을 잃지 않도록 한다.

스승의 언행에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조용히 질문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지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스승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또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스승의 말만 무작정 믿어서는 안 된다.

 

율곡 선생도 가르치는 스승이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승도 인간인 이상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이 있을 수 있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존경하고 가르침을 믿고 명심하라고 하였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사실 스승은 가르침을 위해 존재한다. 학생이 스승을 찾는 것은 배우기 위해서이다. 만약 배움을 주는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하물며 배우는 학생이 사리가 분명한 성인(成人)도 아니고 청소년이라면, 더구나 그가 존경할 수 없고 심지어 비난받아야 할 스승으로 여긴다면 그로부터 무엇을 배우겠는가?

그래서 일찍이 순자(荀子)도

“스승을 비난하면 스승이 없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학생이 스승을 존경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스승을 위해서라 아니라 배우는 학생자신을 위한 일이다. 스승을 잘 섬기는 것은 학생이 제대로 배우는 지름길이었다. 예컨대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닮으려고 한다. 옷차림은 물론 언행까지도 모방하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그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승을 존경해야 스승의 가르침이 먹히기 때문이다.

그럼 스승의 잘못을 그냥 보고 넘어가자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단지 비난하지 말고 조용히 질문을 하라고 한다. 그 질문에 스승이 자신의 잘못을 알아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학생의 오해일 수도 있어 그것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질문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학생의 머릿속에는 스승의 잘못만 기억하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해야 한다.

이렇게 율곡 선생의 스승을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스승의 잘못에 대해 학생들끼리 수군거릴 뿐 아무도 질문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간혹 학생이 스승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한다고 싶으면 다짜고짜 항의부터 하려 드는데, 선생이 말한 이러한 정중한 질문이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이 아닐까? 물론 스승 된 자도 이런 질문에 솔직해야 하고 화를 내서도 안 된다.

아무튼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확인되지 않은 나쁜 소문이나 평판만 듣고 가르치는 사람을 평가한다든지, 때로는 작은 오해로 스승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 또한 제대로 배울 수 없는 태도이다.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사람 곧 스승이 된 사람은 항상 언행에 조심하고 학생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단지 직업으로 가르치는 일에만 종사하고 평소 자신의 행동을 삼가지 않으면 교육적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스승의 권위가 조선시대만 못한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만약 어떤 가르치는 사람이 스승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보통의 가르치는 사람에게 없는 특별한 지식과 기능과 인품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제자를 골라 가르칠 수 있다. 그런 능력이 없이 단지 도덕적 교훈 따위로 스승을 잘 섬기라고 해서 잘 섬기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인간은 대개 자기보다 특출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사친(事親) – 어버이를 잠 섬겨라


어버이를 잠 섬겨라

 

자식이 부모에게 패륜을 저지른 범죄가 종종 보도되고 있다. 부모에게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비록 패륜은 아니더라도 나이든 부모를 잘 모시지 않거나 심지어 홀로 방치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물론 생활형편이 어려워 모실 수 없는 경우도 있겠고, 무관심과 부부나 형제사이 의견의 불일치로 모시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홀로 사는 독거노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어느 지역에 홀로 사는 노인 가운데서 하루사이 세 건이나 고독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고독사한 노인들 가운데는 자식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까? 죽어서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젠 남의 일이 아닌 듯이 보인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돈 없는 부모는 그저 귀찮고 성가신 존재일 뿐일까? 아니면 함께 살 수 없는 피치 못할 어려운 여건 때문이었을까?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예전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이 줄어든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효도를 해야 하며, 또 어떻게 효도를 해야 하는가? 아니 효도랄 것도 없이 어떻게 하면 자식이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까?

학교모범』의 여섯 번째 주제는 어버이를 섬기는 사친(事親)이다. 옛 사람들의 효도의 이유와 방법을 알아보자.

효도는 그리스도교의 십계명에도 있을 정도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덕목이지만, 특히 유학에서 강조해 왔다. 부모께 효도해야 하는 이유는 보통 낳아주고 길러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으로서 도리이자 천리(天理)라고 가르쳐 왔다. 그래서 율곡 선생도 삼천 가지 죄목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크다는 옛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다.

사실 낳아주고 길러주었기 때문에 효도해야 한다는 것은 조건적인 규범이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쉽게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난점 때문에 유학은 인간이 되는 근거 가운데 하나를 효도에 둠으로써 그 실천의 당위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래서 이런 유교문화 때문에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효도가 잘 먹힌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율곡 선생은 아래와 같이 효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평소에 반드시 극진하게 공경하여 명을 받들어 따르는 예(禮)를 다하여야 한다.

봉양할 때는 즐겁게 하여 음식으로 받들며, 병이 들었을 때에는 근심하며 치료해 드리고, 돌아가시면 슬퍼하며 상례를 치루며, 제사를 지낼 때는 엄숙하게 추모의 정성을 다해야 한다.

 

일단 공경(恭敬)을 먼저 말하고 이어서 봉양과 질병의 치료, 그리고 상례와 제례를 말하였다. 그러니까 살았을 때만 아니라 돌아가셨을 때도 효도가 필요하였다. 봉양만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공경해야 해야 한다는 점은 공자가 일찍이 강조한 일이기도 하다. 공경이란 쉽게 말해 공손히 섬기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봉양을 잘해도 공손히 모시지 못하면 진정한 효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요즘은 종교에 따라 장례 방식도 차이가 있고 또 점차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으니, 이런 분들을 불효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런 선생의 가르침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법으로 정한 일도 아니고 관습도 변하고 있으니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제사는커녕 살아있는 부모를 제대로 모시는 것만도 훌륭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면 부모가 살아계실 때에 하는 효도의 방법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겨울에는 따뜻하게 모시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며 아침에는 문안으로 살피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드리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알리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뵙는 것까지도 모두 성인의 가르침을 따른다.

부모에게 혹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정성을 다하여 은근히 말씀드려서 점차 도리로써 깨닫게 해야 한다.

자식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몸을 돌이켜 보아 바른 행동이 갖추어지게 하고 시종일관 덕을 온전히 하여, 부모를 욕되지 않게 하고서야 능히 어버이를 섬긴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내용을 보면 한부모의 자녀로서 오늘날 실천하는 데도 손색이 없다. 특히 부모에게 잘못이 있을 때 간(諫)하는 것이나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여 부모를 욕되지 않게 하는 점은 오늘날 더욱 필요한 일이다. 아무튼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 이렇게 부모를 모셨으니 효도하는 본인 또한 훗날 그 자식으로부터 이렇게 효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효도는 어쩌면 상부상조하는 훌륭한 사회보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혼인을 못해서, 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직장 때문에, 또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해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또 사회적 분위기가 예전같이 않아 자신의 배우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효도를 제대로 할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혼인을 해도 자식을 낳을 생각도 안한다. 양육비와 교육비가 많이 드는 까닭도 있지만, 어차피 낳아서 길러봐야 효도를 받기는 글러서 밑지는 장사(?)라는 생각도 작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유야 어떻든 아무리 효도를 강조하고 또 어떤 철학적·윤리적 근거를 가지고 효도를 주장해도 그것을 실천하는 자식들은 늘지 않을 전망이다. 특히 부모가 돈이 많이 드는 중병이나 치매 같은 난치병에 걸리면 모시기가 쉽지 않다. 병원 치료비도 문제지만, 직장일로 잘 보살필 수도 없다. 단지 효도하려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민으로서 제대로 모시려니 생활자체가 파탄에 이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다보니 이제 자신도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나이든 자식이 더 나이든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럴 경우 모두 국가에서 해결해주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세태가 그러해도 여전히 효도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 가운데에는 가문의 전통과 관습이나 의무감 또는 도덕적 양심 때문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간혹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계산적이지 않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랑하기 때문에 가까이 있고 싶고 잘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으로 양육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사랑하는 방법이 훌륭한지 졸렬한지 다를 뿐이다. 사랑하는 방법이 훌륭하다면 자식의 가슴속에 부모의 사랑이 전달될 것이지만, 그 방법이 졸렬하다면 반항심과 증오만 키울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데도 올바른 방법이 필요하며, 그 경우에 간혹 효도를 강조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알아서 효도하게 된다. 자식이 혼인한 이후의 그 배우자인 며느리와 사위도 자기 자식처럼 그렇게 사랑한다면 먼 훗날 그 며느리나 사위도 친부모처럼 사랑하지 않겠는가?

이치가 이러하나 요즈음 나이든 중년 이상의 부모들을 보면 아예 자녀의 효도 따위를 체념해 버리고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요양원에 들어가는 일이나 고독사는 이제 피치 못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아니면 그게 싫어서 돈으로 면해 보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인생의 끝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존심(存心) –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라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라

 

여러분의 마음 상태를 스스로 관찰해 본적이 있는가?

하루 동안 아니 한 순간에도 가만있지 못하고 온갖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할 것이다. 심지어 잠잘 때 꿈속에서도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청소년기에 집중적으로 떠오르는 마음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당장의 학교공부, 상급학교 입시, 미래의 꿈, 가족사이의 갈등, 외모나 신체조건, 이성에 대한 그리움, 또래 친구들의 관심과 갈등, 연예인처럼 인기를 끄는 것 등 온갖 것들이 번갈아 가며 마음을 가득 채울 것이다. 성인의 경우라면 돈 모으고 버는 일, 투자, 은행대출과 빚, 직장일, 건강, 승진과 해고, 자녀의 교육, 부부나 가족 간의 갈등, 부부관계, 부모 모시기, 불확실한 미래, 직장동료와 갈등, 주택마련, 여행 등 온갖 일로 청소년들보다 다 많은 일들이 마음을 채울 것이다.

정말이지 이렇게 마음을 가득 채운 일은 사람을 즐겁게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갈피를 잡지 못하게 힘들 때도 있다. 이렇게 여러 일로 마음이 복잡할 때는 중심을 잡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굳이 모든 일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마음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마음을 바르게 하거나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었다. 결국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사람의 행동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학교모범』의 다섯 번째 주제는 마음을 보존하라는 존심(存心)이다.

사실 마음에도 종류가 많은데 여기서 간직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 가운데 양심을 말할까? 잘 알다시피 마음에는 좋지 않은 것도 있기 때문에 『대학』에서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정심(正心)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존심은 이처럼 바르게 한 마음일까? 또 『서경』에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도 등장하는데, 인심은 육체의 욕구와 관련된 마음이고, 도심이란 일종의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마음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 마음의 안의 일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서로 다른 마음일까? 그렇다면 선생이 간직해야 한다는 마음은 육체적 욕망과 관련된 것이 아닌 도덕적인 마음일까? 그것도 아니면 보존해야 할 특별한 마음을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 선생의 말을 살펴보자.

 

다섯 번째는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니, 배우는 자가 자기 몸을 닦으려면 반드시 안으로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외부 사물의 유혹을 받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그런 다음에 마음이 편안하여 온갖 나쁜 생각이 물러가고 참된 덕에 나아간다.

 

이 글만 보면 보존해야 할 마음이란 바르게 하여 외부 사물의 유혹을 받지 않는 마음을 가리킨다. 바르게 한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처음부터 바른 마음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처음부터 바른 마음이었다면 바르게 할 이유가 없다. 그 마음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잘못된 길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바르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선생의 의도를 보면 사람의 마음에 처음부터 바른 마음과 바르지 못한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음인데 바르게 될 수도 바르게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본 것 같다. 만약 처음부터 바른 마음과 바르지 못한 마음이 있다고 여겼다면, 착한 마음을 잘 보존하라고 하면 되지 굳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외부 사물의 유혹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외부 사물의 유혹을 받지 않게 할 것인가?

 

가령 한 생각이 일어나면 반드시 선악의 조짐을 살펴서, 선하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로서 윤리도덕에 부합하는 행동의 원칙을 탐구하고, 악하면 그 싹을 잘라 버린다.

 

어떤 생각이 마음에 떠오를 때부터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 구별하여 보존하거나 잘라내야 한다고 한다. 특히 선할 경우 그것을 가지고 윤리도덕에 부합하는 행동의 원칙을 탐구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생각이 어떻게 선한지 악한지 구별할 것인가? 이점에 대해서 여기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다. 유학에서는 그런 선악판단이 인간이 배우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여긴다.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능력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맹자(孟子)의 주장에 따르고 있다. 하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옳고 그름을 따질 줄 안다. 비록 그 옳고 그름이 객관적이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것을 따질 줄은 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옳고 그름이 사람이나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살인이나 효도는 누가 보더라도 쉽게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지만, 가령 개고기를 먹는 일처럼 각자의 이익이나 문화를 놓고 갈등할 때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이처럼 나의 생각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칼로 무를 자르듯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을까? 설령 그것이 나의 욕심과 관계되더라도 정당한 것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지 않은가? 또 나는 정당하게 생각해도 상대는 그렇지 않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대학』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 곧 사물을 탐구하여 앎을 이루는 가르침을 두었고, 유학에서는 공부와 강학(講學)을 매우 중시하였다.

아무튼 마음을 보존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이렇게 바른 마음을 잘 간직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그 방법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부터 선악을 살피여서 보존하거나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쉬운가? 더구나 청소년기에는 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다반사이이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하고, 놀고 싶으면 놀려고 한다. 대부분의 성인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단지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돈이 없거나 그럴만한 형편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이나 옛 성현들이 되지도 않을 괜한 헛소리를 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대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산다. 청소년의 경우 일반 성인보다 이런 욕망의 지배를 크게 받는 것도 사실이다. 이성적인 가르침이 잘 먹히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욕망을 지나치게 추구하다보면 사회가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해당되는 사람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역사의 한 페이지만 넘겨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성현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위해 대안을 제시하거나 가르침을 남긴 것은 이러한 인간 각자의 과도한 욕망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여 도덕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유학자들은 지나치게 도덕적인 엄숙을 강조한 고리타분한 인사로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는 일은 과거만이 아니라 특히 복잡한 일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어서, 과도한 욕망과 그로 인한 부도덕한 행위나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생존전략이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성공의 지름길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비록 오늘날 도덕적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따돌림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한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성공적인 고귀한 삶의 과정에서 치러야 하는 작은 대가라고 보면 어떨지?

신언(愼言) – 말조심하라


말조심하라

 

말을 잘못하여 낭패를 본 일이 있는가?

말실수나 험담을 하여 당사자와 얼굴을 보면서 직접 싸우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 되어 버렸다. 요즘은 상대를 보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과 무관한 터무니없는 글을 올려 상대방이나 특정인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거짓이나 비방하는 댓글을 다는 일이다. 그 때문에 종종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당하여 손해배상금을 물기도 한다. 정작 말하는 사람은 장난처럼 했으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정치인의 말실수는 치명적이다. 여성을 비하하는 성차별과 종교적 편견과 노인폄하와 관련된 발언, 또 특정 지역이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발언으로 지지도가 떨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정치인생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꼭 누구를 대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비속어나 상스런 말을 사용하여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상대방을 지지하는 국민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은 정치인도 있고, 각종 집회에서 자신들이 반대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향하여 온갖 과격하고 살벌한 말을 내뱉기도 한다.

말은 그 사람의 거울이다.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품이 값싸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인품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사이다’ 같은 발언을 함으로써 인기를 얻기 위한 전략일까? 아무리 인기를 얻는 것도 좋지만 품위 없는 말을 막 써도 괜찮을까?

그렇다면 그 옛날 율곡 선생이 살았을 때는 말조심을 어떻게 했을까? 오늘날 우리가 배울 점은 어떤 것일까? 『학교모범』의 네 번째 주제는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신언(愼言)이다.

 

배우는 자가 선비의 행실을 조심하려면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사람의 잘못은 대부분 말 때문인데, 말은 반드시 충직하고 믿음직하게 해야 하고 승낙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말투를 정숙하게 하고 실없는 농담을 하지 말며 시끄럽게 떠들지 말아야 한다. 단지 학문이나 도리에 유익한 말만 해야지 허황되거나 잡스럽거나 괴상하거나 신비한 말, 시정잡배들이 하는 상스런 말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가령 동료들과 잡담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현재의 정치를 함부로 논하거나 남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따위는 모두 공부에 방해되고 일을 해치는 것이니 일체 경계해야 한다.

 

말을 충직하게 하라는 것은 내면의 성실성을 담보해서 하라는 얘기다. 믿음직하게 하라는 것은 남이 신뢰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하고, 승낙을 신중하게 하라는 것은 당사자가 믿음직한지 판단한 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는 태도의 덕목은 충신(忠信)으로서, 보통 충성(忠誠)과 신의(信義)로 풀이하는데 정확하게 이해될지 미지수다. 사실 충과 신은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해당되는 사람의 내적인 성실성이 없으면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충성의 결과가 드러난 것이 신의라 하겠다. 시비를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윗사람을 잘 모시는 따위가 충성이 아니라, 어떤 바람직한 가치나 신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것이 충성이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성실성이 담보된 충직한 말은 그러한 신뢰를 가져온다. 그러니 믿음이 안 가는 말처럼 공허한 것도 없다. 특히 정치나 사업이나 종교나 교육현장 등에서 그러하다.

말투 또한 정숙하게 하고 실없는 농담을 하지 말며 시끄럽게 떠들지 말아야 하며, 허황되거나 잡스럽거나 괴상하거나 신비한 말, 시정잡배들이 하는 상스런 말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당시의 분위기로 봐서 학문적 엄숙주의가 선비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예법이나 도리를 중요시하여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는 원칙이 문화의 저변에서 통용되었다.

또 선생의 말에서 사람의 잘못은 대부분 말 때문이라는 주장에는 주의를 기울일 만 하다. 당시는 당쟁이 막 시작하던 때였고, 그래서 남의 말의 꼬투리를 잡아 상대를 비판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신중하게 말하는 태도가 중시되었다. 선생이 살았던 이전시대에 일어났던 사화(士禍)에 대한 역사적 경험도 물론 이런 말조심의 태도를 강화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당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조심을 하면서 농담 한마디도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누군가 매사에 이런 식이라면 그 사람은 뭔가 모르는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따돌림 당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필요에 따라 농담을 할 줄도 알고 유머 감각도 있어야 한다. 특히 남의 윗사람이 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윗사람이 늘 원리원칙 대로 도덕적이고 엄숙한 말만 한다고 어떤 조직이나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까? 그것만이 아니다. 때로는 허황되고 괴상하거나 신기한 얘기도 할 줄 알아야 자칫 딱딱해 질 수 있는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 수 있다. 쉽게 말해 깐깐하면 아랫사람이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없는 농담이나 유머가 필요할 때도 있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개인적인 모임이나 친구사이 또는 가족 모임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런 경우에도 가능한 모임의 자리를 가려서 농도를 조절해야 한다. 그래서 유머나 농담도 대상에 따라 수위를 달리해야 한다.

그런데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구분하지 못하고 비속한 말이나 상스런 말을 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공인(公人)들도 있다. 참으로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세대에 따라 다르게 통용되는 말이 있어서 공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내용도 많다. 더 나아가 성차별적 발언이나 장애인과 노인 비하,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이나 세력을 불순한 집단이나 사람으로 딱지 붙이는 발언, 남을 비난하여 단순히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추종자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한 발언, 출신지역의 편견이나 문화와 관련된 발언 등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정치가나 종교인이나 교육자 그리고 인기연예인 등에겐 대단한 금물이다.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여 훗날 낭패를 보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특히 남의 주목을 끌기 위해 일부러 고약한 말을 하여 비록 더러운 이름이라도 사람에게 알리려고 뻔뻔하게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치밀기 이전에 애처롭기까지 하다. 인생을 꼭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측은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청소년들이 말의 절반 이상을 욕을 섞어 쓰는 경우 또한 훗날 그 습관으로 이런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무서운 일이다.

만약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말투가 거칠든 저속하든 상소리를 잘하든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단지 그 사람의 인품만 손상되고 주변 사람들을 다소 불편하게 할 뿐이다. 사실 살다보면 상소리나 저속한 표현이 꼭 어울리는 상황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평소에 말을 신중하고 조심하여 자신의 인격을 지키는 게 좋다. 자신의 말에 신뢰를 얻는다면 그 또한 보너스다. 게다가 때와 장소에 맞게 유머와 농담까지 섞어 쓴다면 금상첨화다. 이러니 말이란 하기 나름이고,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율곡 선생의 말을 때와 장소와 상대에 맞게 되씹어 보라.

독서(讀書) – 독서와 그 방법


독서와 그 방법

 

요즘 청소년들은 책을 얼마나 읽을까? 학생들의 독서 상황을 보면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부모의 권유나 주변 사람들의 영향으로 그런 대로 책을 읽는 편이다. 그러나 정작 5학년만 되면 학원이나 과외 때문에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 책 읽는 일이 드물다. 상급학교 입시를 위해 책을 읽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펴내는 아동 대상 도서는 대개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을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불행한 일이다. 다행히도 일부 소수의 학생들만 상급학교 올라가도 계속해서 책을 읽고 또 독서토론에 참여하고 있어서, 큰 기대를 걸어본다.

 

명심보감』에 보면

‘독서는 가정을 일으키는 근본이다
(讀書起家之本).’

는 말이 있다. 그 말의 의미는 물론 그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글을 읽어 훗날 관리가 되어서 가정을 흥하게 하는 것도 포함되겠지만,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이치를 터득함으로써 먼저 본인이 바르게 되어 자손을 올바르게 양육하여서 훌륭한 가문을 만든다는 의미도 있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독서를 강조하는 것도 가까이는 입시공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멀리는 자신의 교양과 인격을 함양하고 더 나아가 삶의 지혜를 얻어 합리적이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가정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

그래서 『학교모범』의 세 번째 주제는 독서이고 열여섯 번째 주제는 독서의 방법인데, 여기서 이 두 주제를 통합하여 살펴보겠다. 독서와 그 방법은 『격몽요결』과 중복되니 그 책을 참고하면 더 좋겠다(본 누리집의 “인성교육교재-『격몽요결』-초급편(하)-4.독서의 방법”을 참조바람).

먼저 독서의 목적은 의리(義理)를 밝히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리란 조직폭력배의 의리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로서 윤리도덕에 부합하는 행동준칙이며, 옛사람들이 말하는 천리(天理)이다. 쉽게 말해 독서의 목적이 도덕적 실천을 위한 원리의 탐구이다. 독서의 목적을 이렇게 좁혀서 본 것은 율곡 선생이 종사한 학문이 성리학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성리학은 도덕적 사회 건설을 이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청소년들이 책을 읽는 목적에는 도덕적 사람이 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입시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또 하루가 멀다 하고 생산되는 각종 지식과 정보가 본인의 성장이나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꿈으로 여기는 직업에 진입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독서의 목적이 다르다고 해서 옛날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회나 학문이 지향하는 시대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만 취하면 된다. 따라서 선생이 말한 의리를 밝히는 것도 여전히 유효하다.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은 어려서 아직 경험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판단하려면 평소의 경험 못지않게 많은 독서량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리분별이 분명해져 실수와 손해를 줄여나갈 수 있다. 그러니까 독서가 당장에 써먹을 지식이나 실용적 목적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독서의 방법에 대해서 선생은 이렇게 권유한다.

 

글 속에 깊이 잠겨 자맥질 하면서 반드시 마음으로 터득하기를 스스로 약속한다. 글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태도를 정숙하게 하고 단정히 앉아서 마음과 뜻을 한 곳으로 모은다. 한 책을 숙독(熟讀)한 다음에 다른 책을 읽고, 이 책 저책 섭렵하는 것에 힘쓰지 말고 억지로 기억하는 것을 일삼지 말아야 한다.

 

먼저 글 속에 푹 빠져서 반드시 이해하기를 힘쓰라고 한다. 이해되지 않은 글은 읽으나마나한 일이어서 독서의 흥미를 잃게 만들고 짜증나게 한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수준에 맞거나 수준보다 약간 높은 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책을 굳이 읽으려면 함께 읽고 설명해주는 스승이 있어야 한다. 옛날의 유교 경전의 공부가 모두 이런 식이었다.

또 책을 읽을 때 태도나 주위가 정숙한 것이 좋고 단정히 앉아서 읽으면 마음과 의지를 한 곳으로 집중하기 쉽다. 그래서 조용한 도서관이나 독서실을 찾기도 하는데, 예전 청년들은 큰 시험을 앞두고 책 보따리 들고 절에 가서 책을 읽기도 했다. 그리고 자세가 나쁘면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바른 자세를 요구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한 책을 완전히 숙독할 때까지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한다. 숙독이란 무엇인가? 자세히 읽는 것을 말하는데, 요즘말로 거의 이해해서 읽는다는 뜻이다. 사실 학생들이 책을 읽다보면 백퍼센트 이해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지적 수준이 저자의 수준을 능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 책만 평생 읽을 수도 없다. 아무튼 그 이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읽은 사람의 수준에서 말하는 이해일 뿐이다.

그래서 같은 책도 성인이 된 뒤에 읽어보면 이해하는 깊이가 다르겠지만, 청소년들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면 좋겠다. 또 하나 선생이 제안하는 중요 포인트는 억지로 외려고 하지 말하는 점이다. 억지로 외면 힘들고 피곤하다. 만약에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전제한다면 이렇게 외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의 책 읽는 독특한 방법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공부든 삶의 문제든 질문이 있게 마련이다. 삶이나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질문이 없을 수 없다. 아무튼 질문이 있다면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책을 읽으면 효과가 좋다. 책에서 답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더 읽게 된다.

또 선생이 제안하는 독서의 순서는 『소학』부터 시작하여 『대학』·『근사록』·『논어』·『맹자』·『중용』에 이어 오경(五經)과 『사기』 등으로 이어지는데, 모두 유학과 역사에 관련된 책이다. 그런데 오늘날 청소년들은 이렇게 읽을 수 없다. 아무튼 동서고금의 고전을 분야별로 선택하여 읽고, 현대인들이 쓴 책도 틈틈이 읽어야 하니, 옛날 사람보다 읽어야 할 게 더 많다는 게 또 하나의 불평이 될지 모르겠다.

끝으로 선생이 제안하는 것에는 당시의 학교에서 실시하는 일종의 독서토론이나 좌담회와 유사한 것이 있다. 그 방법은 매월 초하루나 보름에 학생들이 학교에 모여 스승과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담당자가 긁을 읽고 나면 뜻을 밝히거나 토론하면서 질문한다. 만약 의논할 일이 있으면 이런 강론(講論)을 통해 결정하고, 학생들이 의논할 일이 있으면 스승이 먼저 밖으로 나간 뒤에 한다.

그러나 언제나 글만 읽을 수는 없는 법, 틈틈이 여가를 즐겨야 한다. 사실이지 여가나 휴식은 독서나 공부의 능률을 올리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선생은 거문고 연주, 활쏘기 연습, 투호(投壺) 등을 적절하게 방해되지 않은 범위에서 하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바둑이나 장기 등과 같은 것은 공부에 방해되어 권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것들은 머리를 많이 쓰거나 승부에 집착하여 독서에 방해가 되어서인지 모르겠다. 오늘날 청소년들도 노는 것에 너무 빠져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