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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원(黃景源: 1709~1787)


황경원(黃景源: 1709~1787)                                PDF Download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이다. 휘(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정랑 처신(處信)이고,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기(璣)이며, 어머니는 권취(權冣)의 딸이다. 승원(昇源)의 형이며 이재(李縡)의 문인인 그는 이천보(李天輔), 오원(吳瑗), 남유용(南有容)과 함께 영조 시대의 문장사가(文章四家)로 꼽힌다. 그는 서인계(西人系)의 노론(老論)을 대표하여 강경한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을 주장하였고, 영조와 정조 연간의 사상사, 정치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727년(영조3)에 19세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 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내다가 1740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고, 이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병조 좌랑(兵曹佐郎)을 거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에는 명나라 의종(毅宗)의 추사(追祀)를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이후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겸 양관제학(兩館提學) 등의 청화직(淸華職)을 거쳐, 1761년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고서(姑壻) 이정(李涏)의 상언사건(上言事件)에 연좌되어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합천(陜川)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고향으로 방환(放還)되고, 그 이듬해인 1763년에는 풍천부사(豐川府使)로 복관(復官)되었으며, 1766년에는 문형(文衡)인 대제학(大提學) 직임을 한 달간 역임하였다. 그 해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세손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초대되어 세손 시절의 정조(正祖)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후 영조(英祖)가 승하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호조참판, 홍문관제학, 이조참판 겸 대제학과 형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활약하였다. 1775년에는 교서관 제조(校書館提調)로서 《팔순유곤록(八旬裕昆錄)》을 간행하여 올렸으며,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승하하자, 빈전도감(殯殿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어 <영조대왕 애책문(英祖大王哀冊文)>을 지었다.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이어서 예문관 제학, 의정부 좌참찬, 비변사 제조 등의 직임를 염익하였으며, 1777년에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 재임하던 1787년 2월에 향년 79세의 나이로 졸서(卒逝)하였다.

그는 서예(書藝)에도 뛰어났으며, 예학(禮學)에 정통하고 고문(古文)에도 밝아, 오원(吳瑗), 이천보(李天輔), 남유용(南有容) 등이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춘추대의(春秋大義)로 자임하여 1418년(태종18)부터 1645년(인조23)까지의 《남명서(南明書)》를 편찬하였고, 또 명나라 의종(毅宗) 이래로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조선 사람들로 그들의 전기(傳記)인 《명조배신전(明朝陪臣傳)》을 저술하였는데, 이 글은 그의 문집인 《강한집(江漢集)》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저서인 《남명서》는 《실록(實錄)》이 수록하고 있는 그의 졸기(卒記)와 이민보(李敏輔)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을 통해 당대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명조배신전》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명조배신전》은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병자호란 당시에 명과의 의리를 지켰던 인물로부터 명을 위해 복수해야한 한다고 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완(李浣) 등 숙종 연간 인물까지 무려 65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전기(傳記)를 모은 책이다. 내용은 주로 서사체(敍事體)의 문장을 구사한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졸기(卒記)에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의 평생 문장이 이 책에 다 들어 있다.”

라는 세간의 평가를 인용해 놓았다.

따라서 이 저술은 황경원의 문장력과 대명의리론이 집약된 결정체로 보아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특히 저촌(樗村) 이정섭(李廷燮)이

“삼백 년 이래로 없었던 글”

이라고 평가한 말과 이규상(李奎象)이

“팔문장의 한 사람”

으로 지목한 것과 김윤식(金允植)이

“영조 대의 고문가(古文家)로 황경원이 으뜸”

이라고 평가한 말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외에도 각종 산문 선집으로 홍길주(洪吉周)의 《대동문준(大東文雋)》과 송백옥(宋伯玉)의 《동문집성(東文集成)》과 윤광심(尹光心)의 《병세집(幷世集)》에서도 여전히 문장가로서의 황경원의 이름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교서관(校書館)에서 그의 문집인 《강한집(江漢集)》을 완간하자, 정조 임금이 직접 그 문집에 대한 논평을 하였는데, 그 글이 1790년에 윤행임(尹行恁)이 기록한 《일득록(日得錄)》의 문학조(文學條)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새로 간행한 《황강한집(黃江漢集)》은 뛰어난 문장이라고 할 만하다. 일을 서술한 곳은 시원스러우면서도 기이하고, 논지(論旨)를 세운 곳에서는 뜻이 높으면서도 바르며, 또 간간이 경륜(經綸)이 담겨 있다. <자제위장(子弟衛狀)>과 같은 글은 곧장 소동파(蘇東坡)의 책문(策文)을 뒤좇을 만하니, 이 사람 이후로는 이만한 사람을 얻기 힘들 것이다.”

정조 임금이 호학(好學)하는 군주(君主)인 줄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하의 문집에 대하여 이러한 평언을 하는 것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신하로서 임금으로부터 직접 이러한 평가와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군신간에 상호 그만한 신뢰가 쌓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황경원에게 그만한 내공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동파의 문장을 바짝 뒤좇을 만한 문장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결코 단순한 평가로만 간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실제로 1790년에 교서관 활자본을 간행한 그의 《강한집》은 32권 15책으로 방대한 분량을 자랑할 만하며, 이 문집에는 여러 분야의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황경원은 문장뿐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도 박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 보면, 검토관 이성중(李成中)이 옛날 홍문관에 소장된 책을 열람하다가, 북경본[燕本]인 《역대통감찬요(歷代通鑑纂要)》를 찾아 올렸는데,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내보이며,

“책의 상단에 찍힌 광운지보(廣運之寶)는 어느 시대의 어보(御寶)인가?”

라고 묻자, 당시에 기사관(記事官)이었던 황경원(黃景源)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명나라의 어보입니다. 신이 일찍이 명나라 조정의 고 병부상서(兵部尙書) 전응양(田應暘)의 제서 모본(制書摹本)을 보았는데, 역시 이 어보가 찍혀 있었습니다.”

이처럼 황경원은 폭넓은 식견으로 당시의 군신간의 의리를 돈독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장력은 후대에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 《강한집(江漢集)》 해제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계희(洪啓禧:1703~1771)


홍계희(洪啓禧:1703~1771)                               PDF Download

 

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그의 본관은 남양(南湯)이며 자는 순보(純浦), 호는 담와(淡窩)이다. 아버지는 참판 우전(禹傳)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이상(李翔)의 딸이다. 《담와유고초(淡窩遺稿抄)》에 보면, 그는 몽산(현 김제시 만경읍 몽산리)에서 태어났는데

“몽산이 맑고 깨끗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데 홍계희가 태어난 해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1737년(영조13)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정언(正言)이 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천거로 교리(校理)에 특진되었다. 1742년(영조18)에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로 파견되어 함경도의 진정(賑政)을 살폈고, 이듬해에 다시 북도발견어사(北道發遣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 지방의 지형(地形)과 물정(物情)을 상세히 수록한 지도를 작성함으로써 영조의 칭찬을 받았고, 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추천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었다.

그가 1743년에 부사과(副司果)로 있으면서 함경감사 박문수(朴文秀)의 부정혐의를 탄핵하였다가, 당색(黨色)에 의거하여 공격하였다는 의심을 받아 삭직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승지(承旨)로 특차되었다. 1749년(영조25)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시무(時務)의 능력을 인정받아 그 이듬해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발탁되었으며, 영의정 조현명과 함께 균역법(均役法) 제정을 주관하여 《균역사목(均役事目)》을 작성하고,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균역법이 시행하는 데에 문제가 많다는 중신들의 반발을 사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물러났다가 1754년(영조30)에 이조판서로 재임용되었다. 그 뒤에 형조 판서(刑曹判書), 병조 판서(兵曹判書), 호조 판서(戶曹判書) 및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하였다. 1762년(영조38)에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잘못을 고변하게 함으로써 세자를 죽게 만든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와 예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재(李縡)의 문인이었던 그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실현하고자 했던 개혁실천주의자(改革實踐主義者)로 평가받는다. 영조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이면서, 정치 관료로 활동했던 그는 시무에 밝았다. 그는 젊은 시절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읽고 ‘동방에 없었던 책’이라고 극찬하였으며, 이후, 그는 《반계수록》을 영조에게 추천하였고, 영조는 나랏돈으로 출간하여 보급하라고 명했다. 그가 제시했던 개혁안은 유형원의 개혁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1749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리임용제의도 개선, 대간제도의 개선, 양역(良役)의 모순 해결안 등을 제시하였는데, 이 중 양역문제에 대한 대책이 반영되었다. 영조의 치적이라 할 수 있는 균역법 제정 외에도 청계천(淸溪川) 준설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청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진행한 준설공사가 8년 만에 마무리 되어 영조의 명으로 준천사실 《(濬川事實)》을 편찬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다양한 학문에 대한 높은 관심과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비록 노론(老論)에 몸담고 있었지만, 유형원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여서 여러 분야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수학(數學)과 산학(算學)을 기초로 한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고 국가에 필요한 경세서(經世書)를 간행하는가 하면 음악, 세금, 건축, 역사, 의학 등 여러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일본과 중국에 각각 통신사(通信使)와 연행사(燕行使)의 임무를 통해 얻은 경험 역시 실용학문(實用學問)에 대한 그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일본의 복선사(福善寺)복선사(福善寺): 조선통신사의 영빈관으로 이용되었다. 이곳에 대조루(對潮樓)라는 목각 편액이 걸려있다. 1784년 제10회 조선통신사의 정사 홍계희가 이곳에서 보는 경치에 감탄하여 대조루라고 이름을 지었고, 그의 아들 홍경해가 글씨를 썼다고 한다.에는 그와 아들 홍경해(洪景海)가 남긴 글이 편액(扁額)으로 남아있다. 《심양관도첩(瀋陽館圖牒)》으로도 불리우는 중국 심양관 기록화심양관 기록화: 1760년에 영조는 청에 파견된 정사 홍계희에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기거했고, 현종(顯宗)이 태어났던 심양관 터를 그려오라 명했다. 홍계희 사행단으로 동행한 화원 이필성(李必成)이 그린 《심양관도첩(瀋陽館圖帖)》이 바로 그것이다.는 현종 탄생지를 찾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는 일본과 중국에서 많은 서적을 대량으로 구입하기도 하였다. 지리(地理)와 금석학(金石學)에도 해박하여 1742년(영조18) 왕명을 받아 함경도 북부 지역의 지도, 백두산 지역의 거리 측량을 하였고, 신도비(神道碑)와 사적비(事蹟碑) 등에 글씨를 남긴 당대의 명필가로서 전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시각은 여러 분야에서 다소 차이가 있는 듯하다.

저서로는 삼운성휘(三韻聲彙)》삼운성휘(三韻聲彙)》: 《삼운통고(三韻通考)》, 《사성통해(四聲通解)》, 《홍무정운(洪武正韻)》 등의 운서를 참고로 하여 당시 한국 한자음을 바탕으로 하고, 언문자의 순서에 따라 한국 사람이 사용하기 편하도록 엮은 목판본 운서(韻書)이다.<다음백과>가 있고, 편저서로는균역사실(均役事實)》《균역사실(均役事實)》: 이 책은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중앙에서 내려진 각종 실행조목을 지방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구성은 설청·결미(結米)·은여결(隱餘結)·해세·군관·이획(移劃)·감혁(減革)·급대(給代)·수용(需用)·회록(會錄) 등 모두 10개항으로 되어 있다.<다음백과>
, 《준천사실(濬川事實)》, 《균역사목변통사의(均役事目變通事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왕명을 받아서 1758년(영조34)에 완성하여 간행한 책으로, 성종 때 완성한 《국조오례의》의 상례 부분을 수정하고 증보한 것이다.<다음백과>, 《해동악장(海東樂章)》, 《명사강목(明史綱目)》, 경세지장(經世指掌)》경세지장(經世指掌)》: 2권 2책. 목판본. 1758년(영조34)에 간행하였다. 홍계희가 송나라 소강절(邵康節)이 지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바탕으로 천지자연 및 인간의 역사를 원(元:12만 9,600년)· 회(1만 800년)· 운(運:360년)· 세(世:30년)· 세(歲:1년)· 월(月:1월)의 역법 단위별로 그림을 그려 설명하였다., 《문산선생상전(文山先生詳傳)〉, 《주문공선생행궁편전주차(朱文公先生行宮便殿奏箚)》, 《사곡록(寺谷錄)》, 《창상록(滄桑蹠)》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디지털김제문화대전
– 《조선시대의 정치와 제도》, 집문당, 2003.
– 정만조, 《담와 홍계희의 정치적 생애》, 인하사학10, 인하역사학회, 2003
– 김승대, 《담와 홍계희 연구》,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홍계능(洪啓能:?~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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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호는 신계(莘溪)이다. 아버지는 참봉 우조(禹肇)이다. 1750년(영조26)에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의 천거로 등용되어 1757년(영조33)에 왕손교부(王孫敎傅)가 되고, 이듬해에 자의(諮議)가 되었다. 1759년(영조35)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가 곧 돌아와 지평(持平)을 거쳐 이듬해에 집의(執義)로 승진하였으며, 1763년(영조39)에는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進善)이 되었다. 이듬해에 성격이 난폭하고 남의 비방을 일삼는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1768년(영조44) 다시 진선(進善)에 기용되었다.

이 때 또 다른 풍산 홍씨(豊山洪氏) 일파가 시파(時派)를 결성하여 뒤에 정조가 될 세손(世孫)을 보호하려 하자, 벽파(僻派)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였다가 1776년(영조52)에 정조가 즉위하자, 하옥되어 옥사하였다. 아들 신해(信海)와 조카 이해(履海)도 모두 주살(誅殺)당하였다.

명의록(明義錄)》 에는 홍계능(洪啓能)을 대정현(大靜縣)에 천극(荐棘)하라고 명한 기사가 보이며, 대사간 이의익(李義翊)도 계사를 올려 그에 대하여 신랄한 지적을 하면서 그가 산림(山林)에 초선(抄選)된 것이 부당하다고 논의한 글이 보인다. 이렇듯이 《왕조실록》에만 해도 무려 120여 건의 기사가 보이는데, 관직을 제수하거나 이러저러한 사건과 연루되어 얽히고설킨 가운데 유배를 가는 등 관직생활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다.

실제로 《영조실록(英祖實錄)》의 1758년(영조34)조에 보면, 우의정 신만(申晩)은

“홍계능(洪啓能) 등이 학문이 정밀하고 깊은데도 오히려 정초(旌招)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라고 아뢰자, 임금이

“초선(抄選)하는 예로써 거행하라.”

고 명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홍계능의 사람됨이 음흉하여, 유자(儒者)로서 이름을 도적질하였다고 식자들이 비웃었다.”

라고 적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의리에 입각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것이 지론임을 이 홍계능의 행적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겠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란 바로 이런 경우를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에는 늘 두 가지 양상이 대두된다. 하나는 본받아야할 대상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삶에, 또는 나의 행동에 유익한 정보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경계로 삼아야 할 대상으로 그렇게 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할 경우에 패가망신하거나 엄청난 물의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경우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야만 어떤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연후에 이를 지혜롭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홍계능의 경우는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안타까운 면이 적지 않다. 뭐가 문제인가? 순간의 판단으로 평생을 그르친 결과인가! 역사에 길이 오명(汚名)을 남겨서 후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삼계된 것이 본인의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속명의록(續明義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행상(李行祥: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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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리(公履), 호는 왕림(旺林). 세조 때의 명신인 이석형(李石亨)의 후손으로, 조부는 익위(翊衛) 신로(莘老)이며,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일찍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였으며, 특히 스승인 도암의 임종할 당시에 홀로 향촉(香燭)을 밝히고 마치 친자식처럼 애통해하였다. 스승을 깊이 흠모하였으며 유문(遺文)을 정리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도암의 문하에 이처사(李處士)를 얻어서 사문(師門)이 더욱 높아졌다.”

라고 하였다.

그의 성품은 후덕하고, 강경하면서도 확고하여 한번 책을 잡으면 밤새도록 글을 읽었다. 특히 《소학(小學)》과 《논어(論語)》에 열중하여 늙을 때까지 공부를 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유자(儒者)들의 그릇된 행동을 비판하고 마침내 은둔하여 오로지 내수(內修)에만 정진하였다. 나아가 시골의 수재들을 모아 사우(社宇)를 세우고 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종사하였는데, 학자들은 그를 일러 왕림선생(旺林先生)이라 부르며 존모(尊慕)하였다.

정조 때 왕세자(王世子)를 세우고 경술(經術)에 능한 선비를 구하자,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여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1794년(정조18)에 나이가 많아 그를 경하하기 위한 배려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으며, 1824년(순조24)에는 특별히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로 추증(追贈)하였다. 그는 송단(宋湍), 성덕명(成德明)과 함께 이재 문하의 3처사(三處士)로 불리운다.

<참고문헌>
– 《녹문선생문집(鹿門先生文集)》
– 《영옹재속고(潁翁再續藁)》
– 《매산선생문집(梅山先生文集)》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사병(李師炳: 1714∼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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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도삼(道三)이며, 부친은 외암(巍巖) 이간(李柬)이간(李柬):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질이 특출하여 사물을 독서를 통해 이해하려 들지 않고 문리(文理)를 깨우쳐 빠르게 터득하였다 한다. 그는 14세 때 아버지 외암공이 별세하자, 심히 애통해 하였으나 그 애통함이 절도를 넘어서지는 않았다.

이후부터 경전(經傳) 공부에 전념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더욱 정진하였다. 과문(科文)과 명리(名利)에 관한 공부를 멀리하고 오로지 성인(聖人)의 말씀을 독실하게 따르면서 ‘심(心)’에 관한 공부를 제일 과제로 삼아 전념하였다.

그는 20세가 되던 1735년(영조11)에 도암(陶菴) 이재(李縡)를 처음 만났는데, 도암은 첫 눈에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외암의 네 아들이 제각기 외옹(巍翁)의 일면씩을 닮았는데, 첫째는 그의 통민(通敏)함을 이어 받았고, 둘째는 화수(和粹)함을, 셋째는 엄정(嚴正)함을 그리고 넷째는 강과(剛果)함을 이어 받았다고 하였다. 그 말대로 이사병은 셋째였으며, 매사에 엄정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1782년(정조6)에 향년 69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오윤상(吳允常:1746년∼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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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사집(士執), 호는 영재(寧齋)이다. 대제학(大提學) 판서(判書) 순암(醇庵) 오재순(吳載純)의 맏아들로, 김원행(金元行)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웠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너그러웠으며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고, 특히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올린 서간문을 통해서 그의 성품을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 그의 아버지가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아들에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서간문이 남아 있어서 참고가 된다.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아버지에게 집안이 평안하니, 남은 여정도 무사하시라는 문안의 편지이다. 이 편지글에서 먼 길을 갔다가 돌아오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 그리고 집안 소식을 전하며 아버지의 걱정을 살피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또 평소에 책 읽기를 좋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차기(箚記)하였다. 호남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이는 오윤상이라며, 동문 박윤원(朴胤源)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를 기록하고 있다.
박윤원이 오윤상에게,

“윤상이여, 공자(孔子)께서 ‘위편삼절(韋編三絶)’했다고 하는데 대단하지 않은가?”

하자, 그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성인도 반드시 나처럼 많이 읽지는 않았을 걸세! 공자께서 ‘위편삼절’했다지만 익숙하게 읽었다는 것일 뿐, 1만 번씩 읽지는 않았을 걸세! 성인은 지나치거나 모자란 일이 없으니[過猶不及], 책을 읽는 횟수도 중도(中道)에 맞았으리라!”

하였다.

실제로 그는 《상서(尙書)》는 2만 번,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은 1만 번을 읽었다고 한다. 학문에 뛰어나 두 아우를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였고 여러 경전(經傳) 중에서는 《논어(論語)》를 제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는 《중용차기(中庸箚記)》와 《대학차기(大學箚記)》가 있다. 37세에 요절하였다.

그의 아내도 성품이 남달라서 성년이 되기 전부터 모두들 여중군자(女中君子)라고 칭찬하였다. 금슬(琴瑟)이 서로 좋았던 남편이 죽자, 그의 아내는 성복(成服)을 마치고 물 한 모금 미음 한술도 먹지 않다가 죽었다.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아내의 이야기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문집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오윤상이 죽자, 유인은 애통해함이 도를 넘지 않았으며 염하고 입관할 때 쓰는 수의와 이불을 손수 재봉하니, 집안사람들이 처음에는 그가 따라 죽을 뜻이 초혼(招魂)하던 날에 이미 굳어져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성복(成服)을 하자마자 시부모에게 청하여, 처소를 밀실로 옮기고 이로부터는 이불을 쓰고 누워 다시는 하늘의 해를 보려 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과 말도 하지 않고 물 한 모금 미음 한 술도 입에 넣지 않았다. 시부모가 울며 거듭거듭 타이르면 마지못해 슬픈 빛을 거두고 몇 모금 마시고는 곧바로 생강탕을 복용하여 위장의 작용을 제거하니, 날이 갈수록 목숨이 꺼져 갔다. 주위 사람들이 비록 그가 창졸간에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게 목숨이 사그라지는 것은 누가 지키고 막는다고 해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시댁 쪽의 한 부인이 마음 돌리기를 바라고 달래며 말하기를,

“시부모님은 이미 늙으셨네. 자네가 따라 죽는 것도 옳은 일이나 남편의 평소 효성을 어찌 생각하지 않는가? 죽은 사람의 마음을 거듭 슬프게 하지 말게.”

하니, 유인이 울며 이르기를,

“내 어찌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리오마는 동서 두 사람이 있으니 봉양을 맡길 곳이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시집올 때의 의상을 꺼내어 세탁하고 새로 꿰매어 수의를 갖추게 하고는, 마침내 시부모에게 인사를 올리고 집안사람에게 두루 영결을 고하고 얼굴 씻고 머리 빗기를 겨우 마치더니 마치 기름 다한 등잔이 꺼지듯 목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들 탄식하고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열녀로다, 이 사람이여! 기어코 죽었구나.”

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에 <김유인(金孺人) 사장(事狀)>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 《근재집(近齋集)》
– 《연암집(燕巖集)》
– 《매산집(梅山集)》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청성잡기(靑城雜記)》
– 오윤상 간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의철-2(李宜哲:1703~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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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은 용인(龍仁), 자는 원명(原明), 호는 문암(文菴)이다. 1727년(영조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장릉 참봉(長陵參奉)과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 등을 지내고, 1748년(영조24)에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에 검열(檢閱)이 되었다. 1752년(영조28)에 정언(正言)이 되어 언로확대(言路擴大)를 주장하는 한편, 이종성(李宗城)이 영의정 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대정(大靜)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에 곧 풀려났다. 1769년(영조45)에 영조는 홍봉한(洪鳳漢)에게 이르기를,

“이의철은 고서(古書)를 많이 읽은 데다 성격 또한 침착하고 깔끔한데 너무 오랫동안 침체시켜두었다.”

라고 말하고 이어서 대사헌(大司憲)에 임명하였다.

그 해에 전라도 광주(光州)의 유생 유적(柳迪) 등이 상소하여 박세채(朴世采)의 문묘 종향(文廟從享)을 출방(黜放)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그 소장을 가져오게 하고는 유적은 영구히 청금안(靑衿案)에서 지워버리고, 삼수부(三水府)의 백성들로 하여금 사흘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押送)하게 하였으며, 소하(疏下)의 사람들은 아울러 청금안에 부첨(付籤)하고 방축(放逐)하여 서민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호남(湖南)의 유생으로 무릇 관학(館學)과 경성(京城)에 있는 자들도 또한 모두 방축하게 하였다. 당시 대사성이었던 이의철은 이 유생들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1775년(영조51)에 다시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이 때 영조가 승하하였다. 영조의 행장(行狀)과 시장(諡狀)을 짓기 위하여 찬집청(撰集廳)을 세웠는데, 이때 채제공(蔡濟恭) 등과 함께 당상(堂上)이 되어 이를 주관하였다. 그 뒤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실록》에 수록된 그와 관련된 기사를 좀 더 살펴보면, 영조가 친히 의주(儀註)를 지어 예조(禮曹)에 내리고서 승지 윤광의(尹光毅)에게

“조사(朝士)로서 파직되어 가난한 자도 마땅히 구휼하여야 할 것인데, 마땅히 스스로 와서 받겠는가?”

라는 묻자, 윤광의는 임금이 내리는 것인데 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당시에 한림(翰林)이었던 이의철(李宜哲)은 단호하게

“옳지 않습니다. 임금이 내리시는 것이 비록 소중하기는 하나, 신하의 염의(廉義)도 또한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어찌 조사(朝士)로서 쌀자루를 가지고 민오(民伍)의 사이에 끼어서 구차스럽고 천한 지경을 밟겠습니까?”

라고 하여 반대의견을 제시하자, 결국 영조는,

“좋다. 내가 이로 인하여 조사를 욕되게 할까 두렵다.”

라고 하면서 한발 물러섰고, 이어서

“영갑(令甲)을 밝혀 전의 조관(朝官)은 종들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였다.”

라는 기록이 《영조실록》 25년조의 기사에 보인다.

그리고 그가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그는 언로의 개방을 전제로 하여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옛 법에는 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면 형벌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도는 신하가 말을 하면 죄를 면하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근년 이래로 조정에서는 기상이 수축(愁縮)되고 언의(言議)가 쓸쓸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좌우 근친(近親)의 반열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아부나 하고 뜻만 맞추면서 명위(名位)를 훔치고, 임금의 잘못을 잠자코 바라만 보면서 바로잡으려 하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전하께서는 깊은 궁중에 고립되어 숱한 사람의 말을 도외시하고 국사를 홀로 운영하시니, 무릇 자신을 부지런히 하여 다스리는 것이 모두 허문(虛文)으로 돌아가고 볼 만한 실효(實效)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지난날 외람되게도 사직(史職)에서 청광(淸光)을 가까이 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가 보았더니 전하께서 단정한 선비의 곧은 말을 즐거워하지 아니하시고 소인들의 아부하는 말을 편안히 여기시는 것이 가장 절실한 큰 병통이었습니다. 신이 전하께서 스스로 힘쓰시기를 바라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하였거니와 이와 같이 거침없이 임금의 과오를 지적하여 말한 것 때문에 영조를 자극한 것이 되어 결국 대정(大靜)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1752년(영조28)조의 기록이다. 당시 동료였던 정언 황인검(黃仁儉)이 역시 그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체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뿐만이 아니고 예학(禮學)에도 힘쓰기를 아뢰는 상소를 올렸다. 그 기록은 역시 다음과 같다.

“신이 전후에 재직(在職)하고부터 이미 넉 달이 지났으나 강연(講筵)을 연 횟수는 겨우 한 번의 강연과 네 번의 소대(召對)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비록 예후(睿候)가 편찮으심으로 말미암아 점차 이렇게 되기는 하였으나, 뜻이 가는 곳에 기(氣)가 반드시 가니, 진실로 저하(邸下)께서 학문에 뜻을 도타이 하시면 잗단 병환이 공부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글을 읽는 공(功)은 중간에 끊기는 것을 가장 꺼리거니와, 이제 하루에 열 줄을 읽어 열흘을 쌓으면 1백 줄을 다할 수 있고 누적하여 함영(涵泳)하면 마음이 편안하고 사리가 익숙해질 것인데, 이제 저하께서 글을 읽는 법은 중간에 끊기는 것이 이미 오래 되었고 또 뒤미처 채우는 것도 없습니다.

뭇 신하가 간언(諫言)을 아뢰면 문득 유념하겠다고 말씀하시나 끝내 유념하시는 실속을 보지 못하니, 도리어 유념하겠다고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잘못으로 인하여 그 경계를 받아들이시는 것만 못합니다. 공자(孔子)가 이른바 ‘따르고 고치지 않는다.’는 것이 혹 이것에 가까울 듯합니다.
혹 병환이 있어서 강연에 나아갈 수 없다면 궁관(宮官)을 침소에 불러들여 조용히 강론하시는 것이 또한 늘 학문에 종사하는 한 가지 방도일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날마다 부지런하여 예학(睿學)을 새롭게 하기에 힘쓰소서.”

 

이는 1753년(영조29)조의 기록인데, 이 상소에 대하여

“아뢴 바가 절실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는 비답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에는 《문암집(文菴集)》, 《사서강의(四書講義)》, 《의례훈의(儀禮訓義)》, 《주례요의(周禮要義)》, 《춘추정의(春秋精義)》, 《역전정설(易傳精說)》, 《주자전요(朱子典要)》, 《주서차의후어(朱書箚疑後語)》, 《한림비사(翰林秘史)》, 《백두산기(白頭山記)》 등이 있다.

그 중에 《백두산기》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백두산(白頭山)에서는 화산 폭발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고 하니, 백두산 등정에 선뜻 나서기가 용이치 않았던 듯하다. 그러다가 17세기 후반부터 차츰 백두산 유람에 나섰다는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의철(李宜哲) 이외에도 김진상(金鎭商), 박종(朴琮), 홍계희(洪啟禧) 등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양반들 산행에는 여러 인원이 동원되었는데, 신분제사회이고보니 백성들에게는 고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의철은 산행하기 며칠 전부터 100여명을 보내 산길을 닦고 숙소를 마련한 다음, 포수와 장교를 포함하여 40명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던 것이다. 그가 이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당시 형편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탓에 무리하게 백성들을 동원했던 일을 솔직하게 반성하고서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이 다음에 산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고자 하여 이 《백두산기》를 남긴 것이다.

“백두산에 들어갈 때 길을 안내하는 백성 20여 명 정도를 선발하여 3일 전에 먼저 보내면 임시 숙소와 길을 닦는 것 등은 충분히 해결된다. 그런데 처음에 산 속의 형편을 알지 못하였던 까닭에 백성을 지나치게 많이 동원하였다. 다음에 유람하는 자들은 마땅히 삼가길 바란다.”

이와 같이 실제로 체험한 것을 진솔하게 적은 것만큼 설득력을 얻는 글은 없다. 그리고 비록 산행을 다녀와서 그 경험을 적은 글이지만 이 글을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특히 이 글이 전문은 아니지만 이 짧은 글을 통해서 그가 당시에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 그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그는 강직하여 임금 앞에서도 바른 말을 서슴없이 하는 신하, 백성들의 애환을 어느 정도 어루만져 살필 줄 아는 관리로 인상 깊게 기억될 수 있을 것만 같아 다행이다.

<참고 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중회(趙重晦:1711~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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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자(字)는 익장(益章), 호는 독락재(獨樂齋), 시호(諡號)는 충헌(忠憲)이다. 조선 전기 생육신(生六臣)인 조려(趙旅)의 10세손이며, 유수공 영복(榮福)의 아들이다. 일찍이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1736년(영조12)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제수받았으며, 1739년(영조15)에는 설서(說書)를 역임하고, 1743년(영조19)에는 정언(正言)정언(正言): 간쟁(諫爭)을 맡았으며, 다른 관원들과 함께 간관(諫官), 언관(言官) 또는 대관(臺官)으로 불리었다.이 되었다. 이때 영조가 사묘(私廟)인 육상궁(毓祥宮)육상궁(毓祥宮):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모신 사당을 이른다.에 참배(參拜)하는 것이 부당함을 직간(直諫)하였다가 처형될 뻔하였다. 실록에 실려 있는 그 기록을 잠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조가 육상궁으로 거둥하려하자, 그가 앞을 가로막고 다음과 같이 직간하였다.

“새해에 태묘(太廟)에 배알하는 예를 행하지 않고 사묘인 사당에 먼저 거동하시는 것은 예법이 아닙니다.”

하자, 이 말에 영조는 크게 노하여 곧장 홍화문(弘化門)을 나가 육상궁에 당도하여 눈물을 흘리며 손발을 차가운 연못에 담갔다. 정월 초의 매서운 바람과 추위에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눈물을 흘리며 간하자, 영조는 조중회의 머리를 가져오라 일렀다. 세손이 대신들에게 영조의 말을 전하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아뢰길,

“조중회는 죽어야 할 만한 죄가 없습니다. 어찌 죄 없는 신하를 죽이려 하십니까? 저하께서는 성의를 다하여 전하의 뜻을 돌리도록 하시옵소서.”

하였다. 이에 영조는 여러 대신들의 간언으로 조중회에게 내린 참수(斬首)하라는 명을 거두고, 대신 그를 흑산도(黑山島)로 위리안치(圍籬安置)하게 하고 환궁(還宮)하였다. 그 날로 조중회를 귀양 보내면서 보통 사람의 세 배의 길을 걸어가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흑산도에 도착하기 전에 조중회를 석방하라는 명이 다시 내려져 한양으로 돌아왔다.

다른 기록을 보면, 그가 1743년(계해)에 영조의 사묘(私廟) 참례와 사행(使行)의 폐해에 대해 상소하는 글을 올리자, 영조는 진노하여 6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고, 조중회는 18일이나 석고대죄를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도암 이재는 혼자 이르기를,

“직언한 것이니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조중회는 수일 후에 풀려났다.
영조실록》 19년(1743)조에 ‘언로, 종묘 행사, 심양 문안사와 관련한 존명(尊明) 등에 관한 조중회의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어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언로가 막힌 것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어서 장주(章奏)의 사이에 한마디 말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전하께서 문득 당론(黨論)으로 의심하여 찬출(竄黜)하고 천극(栫棘)하는 것이 앞뒤에 연달았고, 심지어는 항양(桁陽)과 질곡(桎梏)으로 다스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대각(臺閣)에서는 결단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습속을 이루었고, 조정에서도 풍도와 기절이 사라지고 꺾였는데, 점차 변하여 풍속이 허물어지고 세도가 점점 낮아졌으니, 어찌 크게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천재지변이 나날이 더하여 사직단(社稷壇)의 나무에 벼락을 친 변괴는 더욱 마음을 놀라게 하는 일입니다. 인애(仁愛)하신 하늘의 경고(警告)가 깊고 간절한데,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 구언(求言)하는 거조를 보지 못하였고, 정원과 옥당의 진계(陳戒)도 매우 적막하여 들을 길이 없으며, 비지(批旨) 또한 범연히 수응(酬應)하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이렇게 하고도 어떻게 하늘의 뜻을 돌리고 재앙을 소멸할 수 있겠습니까?
종묘를 봉심하고 수개하는 것은 으레 봄가을 중월(仲月)에 행하는 것이 국전(國典)에 실려 있는데, 금년 가을에는 무슨 연고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초순 전에 행했어야 할 봉심을 공연히 그믐께로 미루어 수개를 9월로 연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종묘사직보다 막중한 일이 없는데, 대관(大官)이 이러하니 서료(庶僚)들을 어찌 책망하겠습니까? 게으른 관원을 신칙하고자 하면 대관(大官)들부터 먼저 사직하여야 합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스스로 유의하여 정성으로 자신을 책망하려 하고 숨기는 바가 없어야 하며, 널리 언로(言路)를 열어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소서.
…..중략….
돌아보건대, 오늘날 천하에 예의(禮儀)가 바른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입니다. 저들이 사해(四海)를 석권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편방(偏邦)에 무슨 어려움이 있어서 홀로 그 풍속에 따르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니라, 조신(朝臣)과 위포(韋布) 가운데 충신(忠臣)ㆍ의사(義士)가 가끔 나타나 그들의 마음을 두렵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세교(世敎)가 여지없이 허물어졌으니, 이로부터는 3백 년 동안 유지해 오던 예의의 나라가 장차 모두 오랑캐의 지경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오직 저 황단(皇壇)에 드리는 규벽(圭璧)마저 장차 거의 성실하지 못한 허위(虛僞)에 돌아갈 것이니, 이것이 어찌 우리 영고(寧考)께서 대보단(大報壇)으로 명칭한 본의(本意)이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면, 신은 몹시 마음이 애통합니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임종할 때 그 문인(門人)과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인통함원박부득이(忍痛含冤迫不得巳)라는 여덟 글자를 죽음으로 지킴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에 진실로 느낀 바가 있어서 감히 무릅쓰고 올립니다.”

이 상소문을 통하여 그의 종묘사직을 위한 충성심과 그의 성향을 확연히 인식할 수 있겠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언로를 활짝 열어놓아야 국가의 장래가 밝아진다는 사실은 고금의 진리인 듯하다. 그가 이 부분을 더욱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만 할 듯하다.

그는 1748년에 부수찬으로 복직되어 부교리(副校理)와 헌납(獻納)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는 윤급(尹汲)을 변호하다가 한때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1751년에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부수찬(副修撰)과 겸 필선(兼弼善) 등을 지내고, 1753년 승지(承旨)를 거쳐 1757년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이어 승지, 병조참의(兵曹參議), 영변부사(寧邊府使), 양주목사(楊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762년에 다시 승지로 재직하던 중에 왕세자(王世子)인 장헌세자(莊獻世子)가 폐위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관을 벗어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극간(極諫)하였다.

“예로부터 세자가 임금께 어떤 과오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어찌 죽음에 이르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신은 만 번이라도 죽겠나이다.”

이에 영조는 진노하여 그를 무장(茂長)으로 귀양을 보냈으나 곧 풀어주었다. 1770년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고 이듬해에 도승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1775년에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에 정조가 즉위하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전직했다. 1779년(정조3)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고 이듬해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사위 홍낙빈(洪樂彬)이 세도가인 홍국영(洪國榮)의 숙부이므로 한 때, 그에게 아부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성품이 고결하여 이를 모두 배척하고 지조를 지켰다. 그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다른 누구의 말보다 영조가 자신의 측근에게 일러준 회한이 담긴 몇 마디 말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일을 곧게 처리하고 잘못된 것은 고치게 한 자는 이 사람이 가장 으뜸이었다. 당시 뜰을 메운 많은 신하들이 증기에 찐 곡식처럼 입을 연 자가 한사람도 없는 중에 유독 조중회는 진언을 하였으니, 만약 이러한 자가 한 사람만 더 있었다면 저 지경에 이르지는 안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옛말에 ‘모진 바람 앞에 굳센 풀을 알고 난세에 충신을 안다’고 하더니, 오늘날의 조중회를 두고 이른 말이로다.”

위의 기록은 비록 임금에게 직간(直諫)을 하여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지만, 영조는 이렇듯 그를 충직한 신하로 여겼으며,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씻을 수 없는 후회를 설토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저서인 《입조일기(入朝日記)》는 그가 45년간의 관직생활을 기록하여 남긴 생생한 기록이다. 이 《일기(日記)》에서 자신을 비판하거나 혹은 탄핵한 상소까지도 개인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왕조실록》과 같은 관찬(官撰) 기록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을 담고 있어서 당시 정치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역사문헌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관료의 일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자세히 살필 수 있으며 당시 관직 임명 실태를 알아보는데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받고 있다.

끝으로 죽음도 불사하고 직간을 서슴지 않았던 그에 대하여 함안조씨(咸安趙氏) 대종회(大宗會) 홈페이지에서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매산선생문집(梅山先生文集)》 권34에 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강한집(江漢集)》
– 《도곡집(陶谷集)》
– 《도암집(陶菴集)》
– 《어계집(漁溪集)》
– 《병산집(屛山集)》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정존겸(鄭存謙:1722~1794)


정존겸(鄭存謙: 1722~1794)                               PDF Download

 

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수(大受), 호는 양암(陽菴)·양재(陽齋)·원촌(源村)이다.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8대손이며,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의 5대손인 그는 정문상(鄭文祥)의 아들이다. 그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대제학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1751년(영조27)에 30세 나이로 문과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다. 부제학(副提學) 등 여러 관직을 거쳐 3년 만에 횡성 현감(橫城縣監)으로 나아가 고을을 다스리고, 다시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승지(承旨)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승지(承旨)로 있을 때 1761년(영조37)에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영조의 허락도 없이 평양으로 나들이를 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영조는 관련자들을 모두 색출하여 처벌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비롯한 유한소(兪漢簫)와 이수득(李秀得) 등을 파면시켰다.

정존겸도 세자의 이 일을 눈감아 준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으나, 그 뒤에 곧바로 복직되었다. 그는 다시 1772년(영조48)에 영조가 의욕적으로 펼친 탕평책에 반기를 든 특정 정파의 당론을 부추겼다하여, 이번에는 멀리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다시 풀려나 이조판서에 기용되었다. 그는 영조가 승하하기 1년 전인 1775년(영조51)에 사도세자의 아들로 장차 왕위에 오를 세손의 목숨을 노리던 벽파(僻派)의 거두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등을 거세게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함께 세손보호에 나섰다.

이 일로 인하여 정존겸의 정치적 입지가 굳어졌다. 이듬해 3월에 마침내 영조가 승하하고, 드디어 정조가 보위(寶位)에 올랐다. 그리하여 세손을 모해하려 했던 홍인한의 일당은 몰락하고, 정존겸은 세손의 보호막이었던 시파(時派)의 선봉으로서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정존겸은 영의정 김양택(金陽澤)과 함께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하고, 좌의정 김상철(金尙喆)도 파직되니 3정승이 동시에 물러나는 처지가 되었다.

1777년(정조1) 5월에 정존겸은 다시 좌의정에 복직되고, 김상철도 영의정 자리를 되찾았으며, 우의정에는 정조를 위해 한몫 하였던 판돈녕 부사 서명선(徐命善)이 앉았다. 1781년(정조5)에 정존겸은 실록청 총재관(實錄廳總裁官)이 되어 《영조실록》과 《경종수정실록》 편찬을 지휘하고, 이듬해 10월에 동지사(冬至使)동지사(冬至使): 매년 동지를 기하여, 우리나라 특산물인 인삼, 호피, 수달피, 종이, 명주 등을 공물(貢物)로 중국황제에게 바치러 가는 사신이었다.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3년(정조7) 6월에, 정존겸은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그 때 나이가 62세로 그가 관직에 몸을 담은 지 32년 만이었다. 그 뒤 1791년에 중추부사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정조를 세손시절부터 누구보다도 보호에 앞장서왔지만, 탕평책에 대해서만은 미온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철저한 시파로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정조의 재위 기간 동안 재상을 지낸 인물이 20여 명인데, 이 중 영의정들에 대하여 정조가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권37에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겼다.

“국가에 정승을 두는 것은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해야 할 일이고, 영의정은 일반 대신과는 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나 소자가 왕위에 있은 20여 년의 세월 동안 영의정의 직책을 맡겼던 자를 꼽아 보면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한 장의 상소를 올려 구름을 밀치고 어두운 거리를 해와 별처럼 밝힌 자로는 충헌공(忠憲公) 서명선(徐命善)이 있고, 기미를 환히 알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으로 혼란의 와중에서 스스로 일어난 자로는 문안공(文安公) 정존겸(鄭存謙)이 이에 가깝다. 효제(孝悌)를 독실히 행한 자로는 문정공(文貞公) 김익(金熤)이 있고,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 자로는 효안공(孝安公) 홍낙성(洪樂性)이 있고, 평소 자신의 소신을 지켰던 자로는 문숙공(文肅公) 채제공(蔡濟恭)이 있으며, 인릉군(仁陵君) 이재협(李在協)의 경(敬)은 한마디 말로 서로 감격하는 것보다 더 무게 있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제각기 근거한 바가 있다고 할 만하다.”

정조의 이 회고는 영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내린 돈유(敦諭)의 글이다. 신하들의 성향과 능력에 대하여 환히 꿰뚫고 있는 정조의 안목도 놀랍다. 특히 정존겸에 대하여

“기미를 환히 알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으로 혼란의 와중에서 스스로 일어난 자”

로 평가하고 있는 데에는 그가 수많은 일을 몸소 겪으면서 슬기롭게 처리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면이기도 하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42권에 수록되어 있는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면직을 청한 상소에 대한 비답’의 내용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그의 정치적 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답하노라. 소를 살펴보고 경의 진심을 잘 알았다. 거듭 경을 재상에 임명할 때에 승지를 보내어 마음속에 쌓인 말을 전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별유(別諭)가 사양하는 글보다 우선하는 것은 그 예가 매우 드문 까닭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임금이 되고 나서 덕망 있는 재상을 간택하였는데 경이 그때 맨 처음 이 간택을 받았으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아, 이제 경을 재상으로 세운 지가 겨우 7년인데, 세상의 도리와 조정의 기상은 몇 단계 아래로 떨어진 정도만이 아니다.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혔는데 누가 능히 붙들어 세우겠으며, 기강이 시들고 쇠미해졌는데 누가 능히 진작하여 쇄신하겠는가. 묘당은 날로 잗달아지고 대각은 점점 흐리멍덩해지니,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에 온갖 병이 마구 침범하였는데도 오히려 그대로 방치한 채 모른 척하면서 약을 쓰지 않는 셈이니, 이는 진실로 어떠한 때이겠는가.
다스려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두루 자문할 만한 곳이 없으니,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에 나라를 다스리는 효과가 막연한 실정이다. 매양 이 생각을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벽을 돌면서 방황을 하곤 하는데, 비록 경처럼 오직 나랏일을 염려하는 정성으로도 또한 어찌 모두 알 수 있겠는가.
재상은 어느 것인들 중요한 직임이 아니겠는가마는 영의정은 좌의정이나 우의정에 비해 더욱 중요하다. 근년 이래로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일일이 헤아려 보면 겨우 한두 원로(元老)뿐이었다.
지난번에 경의 사직을 허락해 준 것은 경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었고, 이번에 새로 임명한 것은 결정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러한 때의 이러한 직임을 경이 아니면 누가 맡겠는가. 상참(常參)을 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경은 부디 즉시 일어나 일을 살피도록 하라.

임금이 신하에 대하여 이처럼 진심어린 요청의 글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듯싶다.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정조의 정성어린 당부와 요청의 마음이 행간에 넘쳐흐른다. 그 밖에도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몇몇 기록을 통해서, 그가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말수와 웃음이 적었으며 삼가고 검약하는 점이 선비와 같았으나 강직한 기풍은 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 그가 죽자, 정조가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가장 먼저 이 대신을 정승으로 뽑았던 것은 을미년에 올린 상소가 호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삼가고 두려워하는 한 마음은 옥을 잡고 있듯이 하고 가득한 물그릇을 받들듯이 하여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어도 사람들이 비난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남들보다 한 등급 높은 것이 아니겠는가. 몇 해 동안 앓은 탓에 못 본 지 오래 되었는데 이번에 죽었다고 하니, 애통함과 상심함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서 제사를 지내주고 녹봉은 3년 동안 보내줄 것이며 장례 치르기 전에 시호를 내리라.”

이 내용은 《정조실록》의 1794년(정조18) 8월 6일조에 보인다. 신하된 처지에서 임금으로부터 이러한 총애를 받는 것은 최고의 영광인 것이며, 이러한 조상을 둔 후손들은 더할 나위 없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죽어서 이러한 예우를 받는 줄 알았다면 지하에서도 감격해 마지않았을 법하다. 신하의 죽음에 애통해하고 상심하는 정조의 애틋한 심경이 행간에 묻어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또 조선의 박물학자 황윤석(黃胤錫)과의 일화도 있다. 황윤석은 조선후기 성리학자이면서 실학자요 박물학자이다. 1769년 영조는 백과사전류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간행토록 명하였다. 이를 위해 당상관들은 방대하고도 세밀한 작업에 필요한 각 분야 전문가를 물색하였다. 당상관중 한사람인 정존겸은 황윤석의 학식이 깊은 것을 알고 그에게 각종 책의 교정을 보고 발췌한 부분에 표시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황윤석에게 교정과 교열을 맡겼다. 그리하여 그는 근무를 하는 시간 외에 퇴근 후에도 밤늦게까지 책을 붙들고 작업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눈이 침침해서 안경을 구하고 싶어도 귀한 물건이라 구할 수가 없었다. 황윤석은 눈병을 앓아서 요청을 들어드릴 수 없다면서 정존겸에게 안경을 빌려달라고 편지를 썼다. 정존겸은 늘 꼼꼼한 교정에 감동하여 가장 좋고 구하기 힘든 안경을 구하여 선물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리고 중구 회현동(會賢洞)에 가면 명당터에 전해오는 은행나무전설이 있다. 회현동은 말 그대로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 근처 은행나무 길에 서울시의 지정 보호수로 480여 년이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중종 때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집 앞에 심었다고 하는데, 어느날 그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서대(犀帶)서대(犀帶): 종1품 이상의 관복에만 착용할 수 있는 것으로, 코뿔소나 물소의 뿔로 만들어 왕의 옥대 다음으로 귀히 여기는 제품이다.12개를 은행나무에 걸게 되리라.”

고 일렀다고 한다. 그 후 실제로 이 명당터에서 12명의 정승이 배출되었는데, 정광필의 후손인 정존겸이 그 12명중 한 사람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사마방목(司馬榜目)》
– 《상신고략록(相臣考略錄)》
– 《네이버 지식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 실(鄭實:1701~1776)


정 실(鄭實:1701~1776)                                          PDF Download

 

관은 연일(延日)이며 자는 공화(公華), 호는 염재(念齋)이다. 1701년(숙종27) 충주(忠州)에서 출생하였다. 정철(澈)의 후손으로, 경연(慶演)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호(澔), 아버지는 순하(舜河)이고, 어머니는 김익항(金益炕)의 딸이다.

이재(李載)의 문인으로, 1733년(영조9)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1739년에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교리(校理), 장령(掌令), 정언(正言)을 거쳐, 1748년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과 응교(應敎), 필선(弼善)을 역임하였다. 1756년에는 안동부사(安東府使), 1761년에는 좌유선(左諭善), 1762년에는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다.

1764년에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이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과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대제학(大提學)과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767년에 호조 판서(戶曹判書)와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역임하였다. 1768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이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70년(영조46)에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그는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임금에게 바른말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헌부 지평이 된지 한 달여 만에 올린 상소에서 언론 탄압의 실상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각(臺閣)의 직임은 조정(朝廷)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시(國是)를 주장하는 것이므로 그 위임하여 예우하는 바가 중한데, 오늘날을 보면 과연 어떠합니까? 몇 자의 글을 관례에 따라 써도 문득 방형(邦刑)을 바루라는 명을 내리고, 한 마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장해(瘴海)에 천극(栫棘)하는 법을 가하는 일이 지난해에도 올해에도 잇달았으며, 금정(禁庭)에 붙잡아 들여 고략(拷掠)을 가하기까지 하시니, 이는 성덕(聖德)으로 보아 실로 천고(千古)에 없던 지나친 거조입니다.”

그는 이것 말고도 그 뒤에 국가 운영의 핵심을 조목조목 열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임금의 마음을 바루어 근본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임금이 잘 다스리려면 모두 마음을 바루는 것으로써 지극한 공부로 삼지 않을 수 없고, 신하의 진언(進言) 역시 마음을 바루는 것으로써 요결(要訣)을 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게다가 “문을 닫고 음식을 물리치시는 것도 모자라서 언관(言官)을 나국(拿鞫)하기까지 하셨으니”라고 하여 언관에 대한 탄압을 집요하게 지적하였다. 또한 “이것은 이른바 분노하여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의 공부에 뜻을 더하여 치우치는 흠이 없게 하소서.”라고 하여 영조에게 열심히 수양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시 그는 이 상소를 통해 임금께 도학(道學)을 숭상할 것, 신하를 예로서 대우할 것과 더불어 언로(言路)를 존중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대각(臺閣)을 중하게 여겨서 언로를 넓히소서. 전하께서는 고언(苦言)하는 자를 싫어하여 욕하고 배척하여 내쫓으시므로, 위에서는 언관(言官)으로 대우하지 않고 아래에서는 언관으로 자처하지 않습니다. 이러고도 어찌 언로가 열려 임금의 궐실(闕失)이 들리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지난 과실을 깊이 경계로 삼으시고 받아들이는 도량을 더욱 넓히시어 뭇사람의 뜻이 위에 전달되게 함으로써 언로가 크게 열리게 하소서.”

정실(鄭實)의 이러한 강직한 태도가 영조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실이 한 대신을 논핵한 일로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그를 구명하기 위하여 1744년(영조20)에 정언 이형만(李衡萬)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실(鄭實)은 한 대신을 논했다가 장기(瘴氣)가 있는 바닷가로 귀양가서 1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의당 성세(聖世)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민백상(閔百祥)이 귀양간 것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또한 아비를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한 것이었습니다. 아! 대신은 진실로 전하께서 예모로 대우하는 사람이며 정실은 전하의 삼사(三司)이고 민백상은 민형수(閔亨洙)의 아들입니다.
대신의 지위가 높은 것을 돌아보고 두려워하여 삼사에 있는 사람이 감히 그 일에 대해 논하지 못하고 아들이 된 사람이 감히 아비를 위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못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조중회(趙重晦)를 죄준 이래로 한 사람도 다시 조중회의 일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는 데 대해 신은 실로 상심하고 있습니다.
대저 조중회의 상소는 어리석어서 성인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의 마음만은 성실하여 다른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때 전하께서 한마디 하교하시기를, ‘너의 말은 지나친 것이다.’ 하였다면, 상하가 모두 무사했을 것인데 도리어 천고에 없던 지나친 거조를 하심으로써 일국의 신민들로 하여금 놀라운 나머지 죽고 싶게 만들었으니, 아!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옛날 우리 효종(孝宗)께서는 일 때문에 김홍욱(金弘郁)을 죄주면서 구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사죄로 다스리겠다고 한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는데도 이내 다시 마음이 편치 않아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어떤 간신(諫臣)이 대각에 나와서 간하니, 효종께서 기뻐하여 일어나서 말하기를, ‘국가가 비로소 망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대성인(大聖人)이 세도(世道)를 걱정하고 언관을 격려하는 뜻으로 전고(前古)에 으뜸인 일입니다.
지난번 전하께서 조중회에 대해 노하신 것은 본디 성조(聖祖)께서 당일 노하였던 것만 못했는데도 여러 신하들은 혼이 나가고 기가 죽어서 전하께서 ‘사죄에 해당시켜야 한다.’고 하면 여러 신하들도 ‘사죄에 해당시켜야 합니다.’라고 하고, 전하께서 ‘마땅히 살려야 한다.’고 하면 여러 신하들도 ‘마땅히 살려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국가에 급박한 일이 있으면 다시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세 신하의 죄를 사면하여 주시어 일세(一世)로 하여금 성의(聖意)를 환히 알게 하소서.”

영조는 이 상소문을 읽고 대노하여 이형만까지 기장현(機張縣)으로 귀양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 상소를 받아들였다 하여 승지까지 체직시켰다. 이를 보면 정실에 대한 정조의 노여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뒤에 정실을 구명하려는 신료들의 노력은 계속 이어졌는데, 같은 해 비변사 회의에서 조현명(趙顯命)이 문언박(文彦傳) 문언박(文彦傳:1006~1097): 북송(北宋) 때의 재상. 자(字)는 관부(貫夫).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있다가 어사(御史) 당개(唐介)의 탄핵으로 지방으로 쫓겨났으나, 재차 재상으로 복귀하였다. 뒤에 문언박이 당개를 임금으로 추대하면서 이르기를 “당개가 비록 풍문을 잘못 들은 것은 있어도 또한 신의 병통을 많이 맞추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의 고사를 원용하여 정실(鄭實)과 민백상(閔百祥)을 방면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이때에도 영조는 민백상만 방면하고 정실의 방면은 거절하였으니, 정실에 대한 분노가 쉬 수그러들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정실에 대한 영조의 분노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좋은 사부(師傅)에게 교육시키려는 마음에서 누그러진 듯하다. 1748년(영조24)에 사도세자가 14살 때 세자의 스승을 새로 정하는 의논이 있었다. 이 때 좌의정 조현명이 정실 등 6인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게 할 것을 청하자, 영조가 윤허하였다. 이는 학자로서 정실의 능력이 당시에 크게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정실은 보덕(輔德), 문학(文學), 응교(應敎), 필선(弼善)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세자의 교육에 힘썼으며, 세자에게 네 조목(條目) 네 조목(條目): 과정(課程)은 반드시 엄격하게 하고, 송독(誦讀)은 반드시 입에 익게 하며, 남에게 묻는 것에 인색하지 말고,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자, 동궁이 가납하였다는 기사를 말한다. 《영조실록 69권, 영조25년 2월 18일 병신조(丙申條)》을 올리기도 하였다.

정실이 학문에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다음 몇몇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정실이 관직에서 쫓겨난 뒤에 그를 다시 조정에 불러들일 명분으로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에 적임이자라는 점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정실은 1749년(영조25)에 서장관(書狀館)의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청나라 사신으로 기용되는 관리는 뛰어난 학문을 지녀야 했으니 이러한 사실 역시 그의 학문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751년(영조27)에는 낙향하는 정실에 대해 신하들이 그가 강연(講筵)에 적합한 인물이기에 정실이 조정에 올라오기를 재촉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정실에게 임금에게 경서를 강연하는 일을 맡겨야 한다고 임금에게 주청했으니, 그의 학문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훗날 순조조(純祖朝)에 그의 시호를 문정(文靖)으로 한 것은 이러한 그의 학문적 능력을 보여주는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실은 지방관으로 재직하기도 했는데 이때 백성의 안정과 국방의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1756년(영조32)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재직할 때 수재(水災)와 흉작(凶作)으로 고을이 어려움에 처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조정에 세금을 나누어 낼 수 있게 해달라고 주청하여 고을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었다. 또한 1763년(영조39)에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재직했을 때

“강도(江都)는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으로 진양(晉陽) 진양(晉陽): 동안우(董安于)와 윤탁(尹鐸)이 성주로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관대한 은혜를 베풀고 국방을 튼튼히 했던 곳으로, 조간자(趙簡子)의 유언에 따라 조양자(趙襄子)가 지백(智伯)의 난리를 피신해 간 곳이기도 하다.
에 해당되는 곳인데도 저장해 놓은 군량(軍糧)이 전혀 없어 앉아서 빈 창고만 지킬 뿐입니다.”

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에 힘을 실어줄 것은 요청하였다. 또한 그는

“초지진(草地鎭)은 실로 해로(海路)의 요충지에 해당되는데 진졸(鎭卒)이 단약(單弱)하고 수비가 허술합니다. 이는 대개 목관(牧官)이 나뉘어 거처하고 있어 목자(牧子)로 들어간 진졸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면서 국방의 강화책으로 초지진의 허술함을 해소할 대책을 내놓는 등 관리로서 자신의 직책에 소홀함이 없었다.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그의 성품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1764년(영조40) 경연에 참여하여 임금과 토론하였던 그는 상소를 올려

“아랫사람이 하는 말이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목소리와 기색을 돋우지 말고 부드럽게 처리하셔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이로 인해 갑자기 크게 노하시어 말씀을 예사롭지 않게 하신단 말입니까? 대소 신료들이 두려워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으니, 실로 위대한 성인의 화평한 기상에 흠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로 인해 격노하여 심기를 너무 부린다면 결국 섭양(攝養)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께서는 보령(寶齡)이 8순을 바라다보는 시점에 임하셨으므로 서둘러 심신(心身)을 보양하고 정력(精力)을 아끼셔야 하는데 갑자기 일시의 번뇌로 인하여 지나치게 언성(言聲)과 기색(氣色)을 돋우시니, 삼가 몸을 보존하고 정력을 아끼는 방법에 해가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임금의 건강이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의 상소가 영조의 귀에 조금은 부드럽게 들렸을 듯하다.

그는 도승지(都承旨), 부제학(副提學), 대제학(大提學),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으며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몇 차례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조정의 요청으로 복귀하였던 그가 나이 70에 벼슬을 그만둘 것을 진정으로 청하자, 이에 영조는 봉조하(奉朝賀)라는 명예직을 부여하기도 하였으니, 그를 예우하는 영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1776년(영조52)에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조실록》의 정조 즉위년 4월 18일조의 기사에 보면 그의 졸기(卒記)가 수록되어 있다.

“전 판서 정실(鄭實)이 졸(卒)하였다. 정실은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후손이고, 고 상신(相臣) 정호(鄭澔)의 손자이다. 영묘(英廟)기미년(1739) 에 등제(登第)하여 차례차례 화려하고 중요한 관직 지내고, 동전(東銓)의 장관이 되었다. 문형(文衡)을 맡아 보았으며,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자 치사(致仕)했는데, 물러서는 때가 많고 진출하는 때가 적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염약(恬約)하다고 칭찬하였다.”

이처럼 역사 기록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를

“물러서는 때가 많고 진출하는 때가 적으므로 염약(恬約)하다고 칭찬하였다.”

라고 적고 있는 것은, 그의 한평생에 대한 삶의 궤적이 천추에 길이 빛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의 편저서에 《송강연보(松江年譜)》가 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네이버 지식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