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

3.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

 

효종은 소현세자의 동생으로 원래는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었다. 왕세자인 소현세자가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것도 소현세자의 아들, 즉 원손이 있었음에도, ‘임금은 나이가 있어야 한다’는 인조의 강력한 주장으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조정의 많은 신하들, 특히 서인 관리들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했었다. 세자가 되는 것은 바로 차기 임금이 되는 것을 뜻했다.
효종은 봉림대군 시절, 서인에 속했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약 1년간 유학을 배운 적이 있었다. 1635년, 당시 29살이었던 송시열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 주변에 이름이 알려져 봉림대군의 사부(師傅, 세자시강원에서 교육을 맡은 관리)로 임명되어 그에게 글을 가르쳤다.
송시열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송준길(宋浚吉, 1606년∼1672년) 역시 효종이 즉위하자 곧바로 발탁되어 조정의 주요 인사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송준길은 김장생과 그 아들인 김집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1624년(인조 3년)에 진사가 되어 세마(洗馬, 세자익위사에 두었던 정9품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는 관직을 사양하였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왕위 계승권이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미움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면서 스승 김집의 천거로 새 조정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효종이 집권하자 율곡과 성혼을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하였던 서인들은 두 스승의 문묘 종사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효종의 스승이 바로 서인의 지도자급인 송시열이었고, 같은 서인 송준길도 효종을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으며, 임금 주위의 고위직에 서인 관료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인 유학자들은 효종 즉위 직후부터 율곡과 성혼에 대한 문묘 종사 건의를 담은 상소문을 조정에 올리기 시작했다.

효종 즉위년 즉 1649년 11월 23일(음력), 태학생(太學生), 즉 성균관의 유생인 홍위(洪葳) 등 수백명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와 관련하여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그들은 먼저 다음과 같이 우리나라의 문묘 배향과 관련된 사실을 설명했다.

“우리 나라가 처음에는 비루하다고 불렸는데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이 비로소 문자(文字)를 알았고, 우리의 도(道, 즉 유학의 도)가 동쪽으로 오기에 미쳐서 안향(安珦)·정몽주(鄭夢周)가 일어나 크게 사문(斯文, 유학)을 천명(闡明)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우리나라 학궁(學宮, 즉 문묘)에서 향사(배향하고 모심)함은 원래 마땅합니다. 그리고 본조의 다섯 현인(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에 이르러서는 그 학문의 깊이와 실천의 바름이 이전 왕조의 여러 유학자들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모두 묘향(廟享, 문묘 배향)에 들었으니, 이 어찌 일대의 성전(盛典, 성대한 의식)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효종 시대 이전까지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들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고 다음과 같이 율곡과 성혼에 대한 문묘 종사를 건의하였다.

“다섯 현인 이후에는 또 선정신(先正臣, 앞 시대의 고명한 신하)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른 나이부터 변함없이 성현의 도를 사모해 경전의 뜻에 침잠(沈潛)해 초연히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이이는 조정에서 벼슬하여 세도(世道,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자기 임무로 삼았으며, 성혼은 시골에 물러가서 덕(德)을 기르고 도(道)를 닦았습니다.”

율곡과 성혼을 함께 언급하며 문묘 종사를 건의한 것은 인조 시대 때부터의 일종의 전통이 되어있었다. 두 유학자의 제자들이 함께 힘을 합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또 각각의 제자들이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두 분을 함께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는 동료의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홍위 등의 상소문은 율곡과 성혼의 학문과 인물 됨됨이에 대한 소개로 이어졌다.

“대개 이이의 학문은 고명(高明)하고 투철(透徹)해서 도체(道體, 도의 본체)를 통찰했기 때문에 그의 동정과 안팎이 명백하고, 정대(正大, 바르고 당당함)하여 저절로 뛰어났습니다. 그가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겨 은택을 이르게 할 뜻이 푸른 하늘에 뜬 태양과 같았음은 세상 누구나 모두 알았습니다. 그는 선조(宣祖) 임금의 인정을 받아 위임함이 극도로 융숭하여 장차 큰일을 해보려고 했는데, 불행히도 세상을 하직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어찌 천고의 한이 아니겠습니까?
한편, 성혼은 단정하고 엄숙하여 굳게 지키고 힘써 행하였으며 그 마음가짐과 일 처리를 한결같이 성현을 법으로 삼았습니다. 집에 있으면서 반드시 실질적인 학문을 하여 맺힌 데가 없으므로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사도(師道)가 존엄한 자라고 한 말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만년에 인정을 받아 조정에 나와 임금께 자신의 의견을 진술하였는데, 모두 당세의 간절한 일들로 임금을 걱정하고 백성을 근심한 그의 성심이 간절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우같은 소인배들의 참소로 임금의 총애가 끝을 맺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불행하단 말입니까?”

이와같이 율곡과 성혼이 조정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였으나 율곡은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고, 성혼은 소인배들의 참소를 받아 크게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상소문은 이어서 율곡과 성혼의 ‘(학문적) 조예의 깊이와 행실의 바름이 모두 옛날 현인에게 부끄럽지 않아서 백대의 사표(師表)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문묘 종사를 건의하였다.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두 신하의 도덕은 마땅히 백세(百世, 오랜 세월)의 모범이 되는데, 지금까지 성전(盛典, 문묘종사의 성대한 의례)을 거행하지 않아 아직껏 존사(尊祀, 귀하게 여기고 제사를 지냄)하는 반열에 들지 못하고 있으니, 사림(유학자들)의 수치와 성조(聖朝, 성스러운 조정)의 흠결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신들이 일찍이 이로써 선조(先朝)에 아뢰었는데 병자년과 정축년의 난리를 만나 중지되었고, 이어서 일이 많아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는 실로 신들의 죄이며, 혹은 하늘의 뜻이 기다리는 것이 있어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새로 교화하여 분발하고 유학자들을 존숭하고 도를 중히 여기는 날을 맞이하여 우리 유학의 빠진 전례(典禮, 즉 문묘종사의 의례)를 추진하는 것을 마땅히 먼저 해야 합니다. 공론(公論)이 한번 일어나자 많은 선비들이 향응(響應)해 모의를 하지 않아도 의견이 같습니다. 신들은 삼가 덕을 좋아하는 정성을 다하여 어진이를 높이는 분부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임금)께서는 깊이 두 신하(율곡과 성혼)의 성대한 도덕이 일찍이 종사(從祀)한 제현(諸賢, 여러 현인들)만 못하지 않음을 살피셔서 빨리 신들의 구구하고 간절한 청을 허락하여 많은 선비들의 귀의(歸依)할 바가 있게 하소서.”

효종은 이러한 건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을 내렸다.

“성묘(聖廟,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막중하고 막대한 전례(典禮)여서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울 듯싶다.”

이러한 답변을 받고 성균관의 유생들은 그 뒤에도 여러 번의 상소문을 지속적으로 올렸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다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