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헌부의 중재 의견과 관료들의 반발

6. 사헌부의 중재 의견과 관료들의 반발

 

신석형의 상소문이 올라가고 약 2주 정도가 지난 (효종 1년) 5월 20일, 관리들의 감찰업무를 담당하는 사헌부가 직접 나섰다. 율곡의 문묘 종사 문제를 가지고 건의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대립이 심각해지자 관리들이 사헌부 명의로 임금에게 직접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영남 유생들(신석형 등 40여명의 경상도 유생들)이 이이와 성혼을 변호하여 상소한 것은 한때의 공의(公議, 공적인 논의)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추악한 무리들(유직 등 문묘 종사 반대파 유생들)이 서로 배척하여 그들(신석형 등)의 집을 허물고 경상도에서 축출하는 벌을 가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야말로 과거 정인홍(鄭仁弘)이 한 도를 위협했던 풍조라 할 것입니다. 방백(도백, 즉 경상도 관찰사)으로 하여금 공명정대하게 조사하여 주동한 자를 적발해서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사헌부는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유생들, 즉 유직 등이 율곡과 성혼의 사상을 변호하는 유생들, 즉 신석형 등의 집을 허물고 그들을 거주지에서 축출하는 벌을 가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를 조사하여 정죄하고자 한다고 건의한 것이다. 모두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경상도 지역 책임자인 관찰사에게 이 사건을 조사하여 관련자를 처벌하자고 건의하였다.
효종은 이를 허락한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내가 보기에 (양측이) 서로 배격했다는 점에서는 (율곡의 문묘종사를 찬성하는)서울의 유생들이 반대파 유생들의 학적을 삭제한 행동도 마찬가지로 나쁘다고 생각한다.”

서울의 유생들이 반대파 유생들의 학적을 삭제한 행동이란 성균관에 속한 유생들이 이상진(李象震), 유직 등 종사(從祀)를 반대하는 유생들을 처벌하기 위해 그들 이름을 유생들의 목록(儒籍)에서 삭제한 일을 말한다.
하지만 사헌부 관리들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신석형의 상소에 대해서 경상도 지역의 유생들이 사적인 벌을 가하는 것은 분명히 국법으로도 처벌할 수 있는 죄이기 때문에 이를 건의한 것이고 임금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허락한 것이다.
사헌부 관리들은 대개 서인측 관리들이며,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유생들은 대개 남인쪽 학자들이었다. 효종은 내심 남인 쪽 유학자들을 두둔하면서 문묘 종사 반대파 유생들의 지나친 행동에 대해서는 처벌을 허락하였지만, 그래도 양쪽이 나쁘다고 한 것이다.

6월 3일, 효종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낀 영의정 이경여(李敬輿, 1585∼1657)가 나섰다. 이경여는 세종의 7대손으로 서인 측 관료였다. 이날 그는 여러 관리들과 함께 임금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효종이 물었다.

“당론(黨論, 각 당파가 서로 옳다고 내세우거나 지지하는 의견이나 논의)의 해가 요즈음 심해지는 듯하다. 조정이 바르게 된 뒤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법인데, 지금 이와 같으니 어떻게 구제해야 하겠는가?”

‘당론의 해’라는 것은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둘러싸고 양쪽 붕당세력이 싸운다는 뜻이었다. 즉 서인과 남인 세력이 서로 대립하여 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율곡의 문묘 종사와 관련한 당시 효종의 인식이었다. 율곡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는 것은 오직 서인들이며 그것은 나라 안의 많은 유생들이 함께 공감하는 ‘공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영의정 이경여는 여기에 이렇게 답하였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두 현신(賢臣)에 대해서 선묘조(宣廟朝) 임오·계미년 무렵에 한쪽 편 사람들이 그들에게 큰 허물이 있다고 배척했습니다. 그 뒤로, 그 문하생과 자손들은 기어코 종사(從祀)하려 하고 배척한 사람의 자손들은 한사코 깎아 내리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분당 현상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논의라 하더라도 한쪽에 치우치는 때가 어찌 없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 그 언론을 살피시어 만약 쓸 만하면 당파 갈등을 염두에 두지 마시고 쓰는 것이 옳습니다. 더구나 공론(公論)의 경우는 역시 편당(즉 당파 싸움) 때문에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론은 어떤 분당 세력을 넘어서 모든 관료들, 선비들의 공통된 의견이지 어느 한쪽의 의견은 아니라는 것이다. 임금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 문제를 당파싸움으로 보지 말고, ‘언론을 살피시어 만약 쓸 만하면 당파 갈등을 염두에 두지 마시고 쓰는 것이 옳다’고 한 것이다. 문묘종사 문제를 서인과 남인의 당파 문제로 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에 대해서 효종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에는 당파 싸움이 점점 더 정밀해져서 그 흔적을 없애고 하기때문에 임금이 위에서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오직 대신이 힘써 진정시키는 것이 좋겠다. 양현(兩賢, 율곡과 성혼)의 종사 문제도 부당한 점이 있다. 막중한 전례(典禮)를 경솔히 의논할 수 없는 만큼 의논이 정해지는 날을 서서히 기다렸어야 마땅한데, 마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들 배격하고 있다. 이런데도 종사를 허락한다면 이 풍조가 점차 자라날 것이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효종은 율곡과 성혼의 종사를 건의하는 것이 부당한 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왜 서인 쪽에서 좀 더 기다리지 않는가? 그리고 서인들이 상대방을 원수처럼 대하고 배격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풍조가 점차 더 자라날 것이기 때문에 종사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문제의 본질보다는 이렇게 급하게 종사를 추진하는 것에 따른 부작용을 더 앞세운 것이다.
이러한 임금의 대답을 듣던 교리 홍처윤(洪處尹)이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날 종사를 청하는 영남 유생들의 소에 대해 성상께서 ‘까마귀가 자웅을 다투는 듯하다’고 비답을 내리셨으므로 이를 듣는 자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이는 오직 시비를 밝히려고 한 일일 뿐입니다. 시비가 위에서 밝혀지기만 한다면 아무리 당론이 있다 하더라도 나라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문묘종사 문제를 양비론으로 몰아 결정을 회피하고 있는 임금의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율곡과 성혼의 이기론에 대한 잘못된 비난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 임금이 ‘양쪽 다 나쁘다’고 한 것은 임금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었다. 임금은 이에 이렇게 변명했다.

“당론이 유생들의 개인적인 일로 그치는 것이라면 내가 왜 굳이 말하겠는가? 끝내는 국가의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명 뒤에 다른 이야기들이 임금과 고위 관료들 사이에 오갔다. 이렇게 면담이 끝나는가 했는데, 임금은 갑자기 같은 자리에 있던 승지 유경창(柳慶昌)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교리 홍처윤이 ‘아무리 당론이 있다 하더라도 국가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너무도 형편없다. 우선 추고하라.”

추고하라는 말은 관리의 죄나 허물을 소상히 조사하라는 뜻이다. 홍처윤의 비판이 내심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홍처윤은 아무리 한쪽 당파 사람들이 주장한다고 해도 시시비비를 정확히 가리면 그것이 국가에 무슨 해가 됩니까, 하고 따지듯이 말했는데, 효종은 그 점이 몹시도 불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변명을 너무도 정확히 논파했기 때문에 임금의 권력으로 그것을 방어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율곡과 성혼의 종사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져 경상도 유생들 사이에서 찬성파와 반대파 간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처음에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여 상소문을 올린 경상도 진사 유직은 성균관의 유생들에 의해서 두 현인(율곡과 성혼)을 근거없이 모합하였다는 죄목으로 성균관에서 유적(儒籍, 유학자 명부)을 삭제당했다.
이에 유직 등 문묘 종사 반대파는 같은 경상도에 근거를 둔 유생으로 자기들의 잘못된 점을 논박하는 상소문을 올린 경상도 유생 신석형을 지역 유생 조직에서 제외하고 축출해버렸다.
사헌부에서는 5월 20일자 임금의 허락에 근거하여 사건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앙에서 지명한 감사가 현지에 가서 조사를 시작하자 경상도 유생들은 집단으로 과거시험을 거부했다. 이러한 일이 임금에 보고되고 효종실록에 기록된 것이 효종 1년 7월 1일자 기사이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에서 다시 공도회(公都會, 감사 등이 관내 유생에게 보이는 소과小科 초시初試)를 열고 제술 시험을 보였으나 도내의 유생들이 모두 시험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태학생(성균관 유생들)이, 본도(경상도) 유생 유직이 진소하여 현인(賢人, 율곡과 성혼)을 무함하였다는 이유로 이름을 유적(儒籍, 유생들의 학적목록)에서 삭제하자, 유직 등은 신석형(申碩亨)이 자기들의 의논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떼 지어 일어나 그를 축출하였다.
조정이 그런 폐습을 징계하려고 본도 감사 민응협(閔應協)에게 조사해서 다스리게 했는데, 그 무리들(유직 등 문묘종사 반대파 무리들)이 모두 분개하여, 시험날에 한 사람도 응시하지 않았다. 민응협이 그 일을 보고하자, 예조가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영남의 사습(士習)이 매우 아름답지 못하긴 하나 위엄으로 제압해서는 안 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여러 유생들을 잘 타일러 가능한 한 진정시키도록 하소서.’ 임금은 이러한 건의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