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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성즉리와 심즉리

10. 성즉리와 심즉리

 

가. 성즉리

‘성즉리(性卽理)’는 ‘본성(性)은 곧 리다’는 뜻이며, ‘심즉리(心卽理)’는 ‘마음은 곧 리다’는 뜻이다. 전자는 성리학의 대전제이며, 후자는 양명학의 대전제이다.
‘성즉리’를 맨 처음 말한 사람은 북송의 정이(程頤, 1033년~1107년, 호는 이천伊川)라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형 정호(程顥, 1032년~1085년, 호는 명도明道)와 더불어 성리학이 형성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은 두 형제를 함께 모아 이정(二程)이라 부른다.
정이는 “본성은 곧 리다.(性卽理也)”라고 하였다.(이하 『이정전서』권22, 「이천어록」참조) 그러면서 그는 “천하에 존재하는 리(理, 이치)를 살펴보아 그것이 유래한 바를 더듬어 올라가보면 지금까지 선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天下之理, 原其所自, 未有不善.)”라고 하였다. ‘리’라는 것은 모두 착한 것이고, 그 리가 본성(本性)이라는 것이다. 또 이러한 리는 이 세상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며 하나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모두 착하다고 하고, 착하지 않는 점이 있는 것은 인간의 ‘재(才)’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재(才)라는 단어는 재주 또는 재능, 솜씨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에는 악한 재능, 악한 재주, 악한 솜씨가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남송 시대(南宋時代, 1127년~1279년)에 주희(朱熹, 1130년 ~ 1200년)는 정이의 ‘성즉리’ 사상을 이어받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본성은 리이다.(性卽理也) 마음에 있는 것은 본성이라 부르고(在心喚做性), 모든 사물에 있는 것은 리라고 부른다(在事喚做理)”(『주자어류』상 제5권)

주자는 리를 마음의 리와 사물의 리로 나누어 정의하였다. 이원론적인 설명이다. 그는 마음의 리는 본성(性)이고 사물의 것은 ‘리’이다. 그는 마음에 있는 리, 즉 본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주자대전』「옥산강의」 참고)

하늘이 만물을 만들어 낼 때 각각 모든 만물에 본성을 부여하였다. 여기서 만물이란 사람과 사물로 나눌 수 있는데, 주자가 지금 말하는 것은 사람을 특히 주목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마음에 담겨 있는 리이다. 마음 안에 내재한 리가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리를 더 세분해서 살펴보면 어짐(仁), 의로움(義), 예의(禮), 지혜(智), 믿음(信)이다. 이것들은 모두 진실무망(眞實無妄), 즉 진실하며, 거짓됨이 없는 마음들이다.
여기서 어짐(仁), 의로움(義), 예의(禮), 지혜(智) 즉 ‘인·의·예·지’는 모두 ‘리’지만 거기에는 또 각각 구별이 있다. 이러한 마음의 본성은 아직 발동하지 않을 때, 즉 아직 작용하지 않을 때(未發時)에는 겉으로 나타나는 형상은 없지만 그것이 발동하면 어짐은 측은한 마음으로 나타나고, 의로움은 부끄러움으로 나타나고, 예의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타나며 지혜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인·의·예·지 가운데에는 또 두 가지 큰 구분이 있다. 인(어짐)과 의(의리)가 그것이다. 인과 의는 자연에서의 음(陰)과 양(陽)이라고 하는 두 개의 기(氣)와 같다. 이 두 개의 기는 유행하게 되면 사계절의 순환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역할을 인과 의가 인간의 본성에서 작용을 한다.

주자의 해석에 따르면 인의예지는 ‘인’과 ‘의’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인이라는 한 글자로 집약된다. 인의예지 네 가지 본성의 구별은 명확하지만 그와 동시에 서로 간에 구별이 전혀 되지 않기도 한다. 구별이 있으나 구별이 없고, 구별이 없으나 구별이 있다. 이것이 주자가 말한 본성의 논리다.(『주자어류』하, 「석씨」)
주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텅빈 것이라는 공(空)의 개념은 불교에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적용이 된다. 주자는 인간의 본성을 주목하여 그러한 ‘공’이 사실은 텅빈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실재(實, 가득 참)’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 본성의 본체인 리가 인의예지라는 형식으로 실재하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하마, 198)

인간의 본성(性)에 대한 논의는 고대부터 있었다. 그중에 특히 주목할 만한 논의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는 주장이다. 송나라 주자 학자들은 맹자의 이 성선설을 기본으로 받아들였다.
맹자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즉 선(善)한 마음의 맹아를 생득적(선천적으로, 즉 태어나면서 획득하여)으로 갖추고 태어난다. 그것을 우리는 잘 키워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우리 삶에는 많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 방해 요인을 억제하고 제거하여 적극적으로 키워야 한다.
맹자가 말한 착한 마음의 맹아, 즉 실마리는 바로 사단(四端, 네 가지 실마리),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말한다. 그것은 또 양심(良心)이라고도 한다. 맹자는 이러한 착한 마음의 실마리를 잘 키우면 인의예지의 덕을 갖춘 이상적인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다.
주자는 이러한 맹자의 성선설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맹자와는 정반대로 생각했다. 즉 주자는 인간에게 인의예지신의 리가 선천적으로 갖추어졌고, 그것이 기로서 현상 세계에 나타나는 것이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감정(情)이라고 설명한 것이다.(미조구치, 상141)

나. 심즉리

명나라 시대 중엽 왕수인(王守仁, 1472~1528, 호는 양명陽明)은 주자학의 대명제인 ‘성즉리(性卽理, 본성은 즉 리이다)’를 바꿔서 ‘심즉리(마음이 곧 리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요 저서는 『전습록』으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눈 문답집이다. 그는 ‘본성’을 ‘마음’으로 바꿈으로써 사상적인 대전환을 이루고 명나라 시대의 새로운 학문인 양명학(陽明學)을 구축하고 심학(心學)을 일으켰다. ‘심학’, 즉 ‘마음의 학문’이라는 말은 그의 ‘심즉리’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심학은 ‘왕학(왕수인의 학문)’이라고도 한다. 주자학인 이학(理學), 정주학(程朱學)에 대응한 호칭이다.
심즉리의 사상은 왕수인이 독자적으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남송시대에 육구연(陸九淵, 1139년~1192년, 호는 상산象山)이라는 사상가가 제창하였다. 왕수인은 이러한 육구연의 사상을 받아들여 주자학, 즉 성리학에 대응하는 사상체계를 세웠다. 주자학은 중국사회에서 관료나 사대부층이 주로 수용하였으나 양명학은 일반의 서민층에도 널리 퍼졌다. 이 덕분에 유교의 가르침이 강학활동 등을 통해 민중사회 깊숙한 곳까지 전해지는 효과가 있었다.(미조구치, 724)
주자학은 자기 앞에 놓인 사물의 리를 잘 관찰하여 그것을 파악하는 것을 실천의 과제로 삼는다. 그러나 양명학은 내 마음 안에 리가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심즉리(마음은 즉 리)’라는 사상이다. 왕수인은 그의 저서 『전습록』에서 천하에서 마음 바깥에 있는 리는 없다, 마음 바깥에 사물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리를 갖춘 마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마음에 서서 살아갈 것을 제창하였다. 따라서 양명학에서 권장하는 수양의 방법은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외향적, 실천적으로 살아갈 것을 주장하였다.(미조구치, 725-727)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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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 2018, 『율곡이 묻고 퇴계가 답하다』, 바다출판사
미조구치 유조 등저, 김석근 등역, 2011, 『중국사상문화사전』상, 책과함께
송석구, 2017, 『송석구 교수의 율곡 철학강의』, 예문서원
안유경, 2015, 『성리학이란 무엇인가』, 새문사
오하마 아키라, 이형성 역, 1997, 『범주로 보는 주자학』, 예문서원
이경무, 2009, 「‘군자’와 공자의 이상적 인간상」, 『동서철학연구』54,
이광호, 2013,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 홍익출판사
이기동, 2000, 『이토오 진사이』, 성대 출판부
이동준, 1996, 「이이(李珥)」,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이동희, 1995, 「사단칠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옥균, 2007, 『이이 – 정치적 실천철학의 완성』, 성대출판부
진순, 박완식 역, 2005, 『성리자의-성리학의 이해』, 여강
황의동, 2007, 『율곡 이이-성리학과 실학을 겸비한 실천적 지성』, 살림
황준연, 1995, 『율곡철학의 이해』, 서광사

9. 이기호발설과 기발이승일도설

9. 이기호발설과 기발이승일도설

 

가. 이기호발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란 ‘리와 기가 서로 발동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단칠정’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나면서 구체화되었다.
‘이기호발’이란 리(理)도 발하고 기(氣)도 발한다는 뜻이다. 리가 발동 혹은 발현한다는 것은 리가 주동적으로 현상계에서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기가 주체적으로 움직임을 보인다는 뜻이다.
퇴계는 사단칠정론에서 사단(四端)은 리가 발한 것이며, 칠정(七情)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정의하였다.(「천명신도」: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 리기 모두가 발한 것으로, 이것이 ‘이기호발설’이다. 이기양발설(理氣兩發說)이라고도 한다. 퇴계는 ‘사단은 리가 발하고 기가 그것을 따른다’(『성학십도』: 四端理發而氣隨之)라고도 주장 했다. 칠정에 대해서는 ‘칠정은 기가 발하고 리가 그것에 편승한다(『성학십도』: 七情氣發而理乘之)’고 했다.
퇴계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리가 기 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상대적으로 기라는 것은 리보다 하위의 존재라고 보았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인간의 순수한 마음의 발현인 사단을 소중히 하고 인간의 착한 의지(善意志)와 이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권정안, 1995) 단순히 철학적인 이론에만 매몰되어 이러한 주장은 아니었다. 그는 항상 조선의 사회와 자신이 처한 환경을 염두에 두고 성리학 이론을 세워나갔다.
퇴계와 오랫동안 논쟁을 벌인 고봉 기대승도 “감정이 발동하는 것은, 리가 움직여 기가 갖추어지거나, 기가 느껴서 리가 거기에 편승한 것이다”(情之發也, 或理動而氣俱, 或氣感而理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리가 움직인다(理動)’는 개념은 퇴계의 ‘리가 발한다(理發)’는 개념과 같다.
그런데 이런 논쟁은 왜 중요할까?
송나라의 주자(주희朱熹)는 세상의 만물을 성리학의 이기론으로 설명하였다. 이기론에 따르면 세상은 리와 기로 이루어졌다. 리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물의 ‘원리’이며, 기는 보이는 것으로 물질적인 존재이다. 주자가 이 이기론을 정의할 때 그는 리와 기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不相離), 서로 섞이지 않는 관계라고 하였다.(不相雜) 그리고 이 둘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고 하였다. 이기는 어떤 사물 안에 다 담겨 있는데 리는 원리적인 측면을 지칭하며 기는 물리적인 측면을 지칭한다.
예를 들면 여기에 배구공이 있다. 땅에 던지면 공이 튀어 오른다. 튀어 오르는 것은 리라는 원리가 작동해서 튀어 오를까? 아니면 물질적인 기가 어떤 원리의 개입 없이 튀어 오를까? 사실 하나의 공 안에는 리와 기가 모두 있다. 이기호발설에 따르면 공은 리가 발하여 튀어 오르기도 하고, 기가 발하여 튀어 오르기도 한다.
그러면 리가 발하여 튀어 오를 때는 언제이고, 기가 발하여 튀어오를 때는 언제인가 설명하기가 다소 어렵다. 아니면 어떤 공은 리가 발하여 튀어오르고, 어떤 공은 기가 발하여 튀어 오르는가? 이 역시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물질로 설명한다면 이기호발설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기호발설이 등장한 것은 인간의 감정을 논할 때였다. 즉 사단칠정론이다. 사단은 무엇인가, 칠정은 무엇인가 설명할 때 생겨난 개념이 이기호발설이다.
퇴계는 인간의 순수하고도 착한 개념인 ‘사단’, 즉 네 개의 실마리 감정은 리가 발동한 것이라고 보았다. 리라는 것이 본래 순수하고 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전히 순수하고 착하지 못한 존재인 기가 발동하여 감정이 생겨날 때, 그것은 칠정, 즉 일곱 가지 감정인데, 그 감정은 기를 닮아 ‘완전히 순수하지 못하고 또 완전히 착하지 못한’ 감정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감정은 리가 발동하기도 하고 기가 발동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이기호발설을 설명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좋은 감정은 리가 발동하는 것이고, 나쁜 감정은 기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주장에 대해서 율곡은 반대하고 부정하였다.

나. 기발이승일도설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란 ‘기가 발하고 리는 그것에 편승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리가 혼자서, 먼저 발현/발동하는 일은 없다. 항상 기가 발동하면 거기에 리는 마치 말을 타듯이 탈 뿐이다. 기의 움직임에 편승하여 리는 ‘원리’를 발현할 뿐이다. 이것은 율곡의 주장이다.
율곡은 퇴계의 이기호발설에 대응하여 이러한 ‘기발이승’의 주장을 폈다. 율곡은 리라는 것은 활동성과 작용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즉 스스로 활동도 못하고 작용도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발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사단과 칠정은 모두 인간의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 둘 사이에는 어떤 구분이 없다고 보았다. 단지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감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단은 착한 것이며 칠정과 대응되는 것이고, 리가 발동한 것으로 보는 이기호발설과는 다르다. 인간의 감정이 발현할 때 발현하는 것은 기이며, 그것을 발하게 하는 까닭(所以) 즉 이유는 리라고 보았다.
율곡이 퇴계의 ‘리가 발하고 기가 그것을 따른다(理發而氣隨之)’는 주장을 비판한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황의동, 74-75 참조) 하나는 리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므로 절대로 혼자서 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작용을 능동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퇴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리가 혼자서 작용을 한다면 일단 성리학의 대전제가 무너진다. 성리학에서 리는 어떤 원리나 원칙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리가 발하고 기가 그것을 따른다’는 말은 언뜻 보면 ‘리가 먼저 발하면, 기가 나중에 그것을 따른다’는 뜻으로 들린다. 즉 시간적으로 리가 먼저고 기는 나중이라는 것이다. 시간의 선후 관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율곡은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고,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한 것이다.
율곡이 보기에 우주자연이나 인간의 심성은 모두 기발이승의 형식만 존재한다. 자연현상도 작용과 변화는 모두 기의 소산일 뿐이다. 다만 리는 그 배후에서 기의 운동과 변화를 주재하고 그것이 가능하게 한다. 리의 존재이유는 거기에 있다. 리는 스스로 작용을 하지 않으면서 기의 운동과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황의동, 76)
기발이승, 즉 ‘기가 발하면 리가 거기에 편승한다’는 말은 우주만물의 존재 자체를 표현한 것이다. 율곡은 순수한 존재론적인 시각에서 리와 기를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 가치론적인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을 보고 이기호발을 주장했던 퇴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바로 이 점이다.

8. 사단과 칠정

8. 사단과 칠정

 

가. 사단

‘사단(四端, 네 가지 단서, 즉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의 ‘단(端)’이란 ‘단서’, 혹은 ‘실마리’라는 뜻이다. ‘바르다’는 의미도 있다. 한자 이름이 ‘바를 단(端)’이다. 그러니까 ‘바른 단서’, 혹은 ‘올바른 실마리’라는 의미도 있다.
‘사단’이란 원래 『맹자』(공손추장)에 나온 말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다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 흔연히 놀래어 측은한 마음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제하려는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명예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며, 그 비난하는 소리를 무서워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맹자』 공손추상)

원래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측은한’ 마음을 이렇게 소개한 것이다. 맹자는 이러한 측은한 마음(惻隱之心)을 인(仁, 어짐)의 단서(端)라하고,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수오(羞惡)의 마음을 의(義, 의리)의 단서(端)라 하고, 사양하는 마음을 예의 단서라 하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시비(是非)의 마음을 지(智, 지혜)의 단서라고 하였다. 바꿔 말하면 어짐의 실마리는 측은지심이요, 의리의 실마리는 수오지심이요, 예의의 실마리는 사양지심이요, 지혜의 실마리는 시비지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주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성(性)이다. 그리고 측은, 수오, 사양, 시비는 사단(四端)으로 정(情)이다. 그 정(情)이 발(發)하기 때문에 성(性)의 본연을 볼 수가 있다.(『맹자집주』) ‘인의예지’라고 하는 본성(性)은 인간이면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사단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맹자는 이 사단을 확충해야만 참된 인간이 되고 또 본성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보았다.(송석구, 143쪽)
이러한 ‘사단’이라는 개념은 대개 다음에 설명하는 ‘칠정(七情)’과 함께 사용된다. 두 개념은 성리학의 논의에서 매우 중시되는 것으로 오랫동안 유학자들의 연구 주제였다.

나. 칠정

‘칠정(七情)’은 ‘일곱 가지 감정’으로 희(喜, 기쁨), 애(哀, 슬픔), 노(怒, 화냄), 애(愛, 애정), 구(懼, 두려움), 오(惡, 싫어함), 욕(欲, 욕구)을 말한다. 이는 『예기』(예운편)에 처음 등장한다.
고대 중국인들이 말하는 이러한, 인간의 7가지 감정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1) 기쁘고, 2) 슬프고, 3)화나고, 4) 사랑하고, 5) 무서워하고, 6) 싫어하고, 7) 욕심을 내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들 외에 우리는 생활하면서 다른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예를 들면 그리워하고, 통쾌하고, 상쾌하고, 짜증나고, 절망스럽고 등등 그런 감정들이다. 따라서 칠정이란 인간의 많은 감정 중에 일부를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의 후대 성리학자들은 희(喜), 노(怒), 애(愛), 락(樂)을 앞서 말한 칠정을 대표한 것으로 보았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감정을 그렇게 지칭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희노애락은 단지 네 가지의 감정일 뿐이지만, 그 의미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통합적으로 말한 것으로 앞서 소개한 일곱 가지 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네 가지든, 일곱 가지든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주자도 희·노·애·락을 인간의 대표적인 감정(情)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그러한 감정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본성(性)이라고 하였다.(안유경, 203-204쪽)
사단과 칠정은 다 같은 정이지만 차이가 있다. 사단은 순선(純善, 온전하게 선함, 즉 아주 선함)한 것이며, 칠정은 희(喜)·노(怒)·애(愛)·구(懼)·오(惡)·욕(欲)의 감정이 드러나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감정이다.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사단은 ‘리’인데 선하며, 칠정은 ‘기’인데,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즉 순선한 사단은 리이며,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칠정은 기로 보는 것이다. 주자는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 체계적인 분석과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학자들 사이에 개념상 논란이 많았다. 이 문제는 조선의 유학자들, 특히 이황을 비롯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분석에 매진하였으며, 나중에 사단칠정논쟁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한국유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논쟁’(안유경, 205쪽)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다. 사단칠정론

사단(四端, 네 가지 단서), 즉 측은한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그리고 시비를 따지는 마음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정(情)이다. 칠정(七情)도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곱 가지 감정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그 출발이 각각 달랐는데, 일단 두 개념이 한자리에 불려 나오자 즉 ‘사단칠정’으로 사용되자 우리나라에서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먼저 사단칠정에 관한 논쟁이 발생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기로 한다.(안유경, 266쪽 참조)
추만 정지운(鄭之雲)이 자기 동생을 가르치기 위해서 「천명도(天命道)」와 그 해석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에 사람들에게 유포되어 퇴계 이황이 이를 보게 되었다. 퇴계는 정지운이 ‘사단은 리에서 발동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서 발동한 것이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한 부분에 대해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고치도록 제안하였다. 이렇게 제안한 근거는 주자가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주자어류』「맹자3」)라고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임옥균, 129쪽 참조)
정지운은 결국 퇴계의 제안에 따라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라고 바꿨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치게 대립적이고 분별의 느낌이 강하여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되었다.
이후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사이에서 그러한 문구를 두고 다시 논쟁이 일어났다. 기대승은 이전에 퇴계가 “사단은 리가 발현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주장한 것에 대하여 “칠정 이 외에 달리 또 사단이라는 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칠정이나 사단이나 모두 인간의 감정(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구분했던 것이다. 퇴계의 생각은 사단은 리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퇴계는 기대승의 반론을 듣고 앞서 한 말을 이렇게 바꾸었다.

“사단은 리가 발현하는데 기가 거기에 따른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는데 리가 거기에 편승한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

이 말은 퇴계가 전에 한 주장, 즉 ‘사단은 리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고 한 말보다는 덜 극단적인 것이었다. 사단은 리가 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기가 따라 온다는 것이다. 칠정은 역시 기가 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리가 거기에 탄 것이라고 하였다. 리기 어느 한쪽을 배제하지 않고 리와 기를 모두 언급함으로써 이전에 자신이 제시했던 주장에서 한 발 물러선 것이다. 하지만 퇴계가 물러서지 않았던 것은 리도 발현하는 존재이고 기도 발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라고 한다.
율곡은 기대승의 주장을 지지하고 퇴계의 주장은 반대하였다.

“마음과 본성(性)을 두 가지 서로 다른 작용으로 생각하고, 사단과 칠정을 역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감정(情)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리와 기에 대해서 투철하지 못한 까닭이다. 대체로 감정(情)이 발동할 때, 발동하는 것은 기이고, 발동하는 까닭은 리이다. 기가 아니면 발동할 수 없고, 리가 아니면 발동할 까닭이 없으니, 리와 기는 섞여서 원래부터 서로 떠나지 못한다.(중략) 리란 태극이고, 기란 음양인데, 태극과 음양이 서로 움직인다고 하면(즉 리기 호발(互發)을 의미-역자주) 말이 되지 않다. 태극과 음양이 서로 움직일 수 없는데, 리와 기가 서로 발동한다는 것이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성학집요』「수기」)

율곡은 퇴계가 리와 기에 대해서 좀 더 철저하게 분석하지 못한 점을 비판하면서 오직 기(氣)만이 발동(발현)할 수 있으며 리는 발동할 수 없다고 보았다. 리는 다만 스스로 발동은 못하지만 기에 편승하여 기와 함께 움직인다고 주장하였다.
또 율곡은 칠정은 기가 발현된 감정으로, 사단이 칠정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나아가, 칠정은 사단을 겸하며, 사단은 칠정을 겸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그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관계와도 같다고 하였는데, 본연지성은 기질을 겸하지 않고 말한 것이며,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을 겸한 것이라고 하였다. 기질지성이 본연지성을 포함한다는 논리다.
이후 사단칠정에 관한 논의는 더욱더 널리 알려지게 되고, 확대되었는데, 이 논의는 사단칠정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기론 나아가 정치 사회적인 논의로 확장되었다. 논쟁자들은 주리학파, 주기학파로 나뉘었으며 이에 기반한 두 유형의 대립적인 사고방식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이동희, 1995)

7. 이발기승과 기발이승

7. 이발기승과 기발이승

 

이발기승(理發氣乘)에서 ‘이발(理發)’은 ‘리가 발(發)하면’이란 뜻이다. 여기에서 한자어 ‘발(發)’이라는 말은 ‘발생하다’, ‘출발하다’, ‘발전하다’, ‘발동하다’, ‘발현하다’, ‘떠나다’ 등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가장 가까운 뜻은 ‘발현하다’, 혹은 ‘발동하다’라는 말로 ‘리가 발현하면’, 혹은 ‘리가 발동하면’이라는 뜻이다. ‘기승(氣乘)’에서 ‘승(乘)’이란 ‘타다’, ‘승차하다’, ‘편승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기가 (거기에) 탄다(乘)’, 혹은 ‘기가 (거기에, 즉 ‘리’에) 편승(便乘)한다’는 뜻이다.
기발이승(氣發理乘)은 ‘이발 기승’과 반대되는 말로 ‘기발(氣發)’ 즉 ‘기가 발하면’, ‘기가 발동하면’이라는 뜻이다. ‘이승(理乘)’이란 ‘리가 거기에 편승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개념은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에서 시작되었다.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해석한 것이다. 그는 정지운(鄭之雲, 1509년~1561년, 호는 추만秋巒)이 ‘사단발어리(四端發於理, 사단은 리에서 발현하며), 칠정발어기(七情發於氣, 칠정은 기에서 발현한다)’라고 한 것을 고쳐서 ‘사단리지발(四端理之發, 사단은 리의 발현이며), 칠정기지발(七情氣之發,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년~1572년)을 비롯한 당시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송석구, 145쪽) 나중에 퇴계는 이것을 발전시켜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사단리발이기수지(四端理發而氣隨之, 사단은 리가 발현하여 기가 그것을 따르며), 칠정기발이리승지(七情氣發而理乘之, 칠정은 기가 발현하여 리가 그것을 편승한다)’라고 하였다.
퇴계는 ‘이발기승(理發氣乘, 리가 발하면 기가 편승한다)’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이발기수(理發而氣隨, 리가 발하면 기가 따른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나 의미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 뒤에 나오는 말이 ‘기발이이승(氣發而理乘)’이기 때문에 아마도 퇴계는 글자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기승(氣乘)’ 대신이 기수(氣隨)라는 말을 사용한 것 같다.
이동희는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분석한 바 있다.

“(퇴계는) ‘수(隨)’자와 ‘승(乘)’자를 대치시켜 은연중 리(理)를 강조하려는 생각을 표현하게 되어, 결국 존재론적 개념인 리·기의 개념에 혼란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이동희, 1995)

한편, ‘사단은 리에서 발현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한다’는 이러한 논의는 중국철학에서는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으로(안유경, 266쪽) 우리나라 유학 사상사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율곡은 ‘기발이승’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기가 발동하면 리가 편승한다(氣發理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다음과 같다. 음이 고요하고 양이 움직이는 것은 기(機)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고,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양이 움직이면 리가 움직임에 편승하는 것이고, 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음이 고요하면 리가 고요함에 편승하는 것이지, 리가 고요한 것이 아니다.”(『율곡전서』「답성호원」)

율곡은 퇴계가 ‘리’를 중시하여 ‘리도 발동할 수 있다’(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는 입장을 비판하며, 위와 같은 ‘기발이승’의 주장을 하였다.

6. 주리론과 주기론

6. 주리론과 주기론

 

가. 주리론

‘주리(主理)’에서 한자 ‘주(主)’는 주인 주, 주관할 주이며, 혹은 ‘가장 중요한’이란 뜻을 가진 한자다. 그러므로 ‘주리’란 리(理)를 가장 중시하는 이론, 혹은 리를 ‘주인과 같이 여기’는 이론이 주리론이다.
‘리’를 중시한다는 것은 물론 기보다 리를 더 중시하며, 리의 우위성을 긍정한다는 뜻이다. 이는 우주 만물, 삼라만상의 생성과 변화가 리의 법칙 혹은 리의 의지에 따른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주리론은 중국에서 발생한 ‘전통적인 성리학의 흐름으로 윤리적 입장에서 리를 가치 표준으로 삼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목적’(황의동, 76쪽)이다. 이러한 주리론을 따르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주로 다음과 같다.(황의동, 96-97쪽 참고)

1) 리는 하늘이 준 본성으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본질이자 조건이다.
2) 리는 의리(義理)로 해석되며, 인간 행위의 준칙이고 삶의 원칙이다.
3) 의리는 인간이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숭고한 이념이며 가치다.
4) 리는 하늘처럼 높고 절대적이며 신성하다.
5) 학문은 다름 아닌 리의 인식이고 실천이다.
6) 기는 리에 비하여 사악하며, 악할 가능성이 있으며 경계의 대상이다.
7) 리는 귀한 것이며, 기는 천한 것이다.
8) 리는 높은 것이며, 기는 낮은 것이다.
9) 리는 선한 것이며, 기는 악한 것이다.
10) 리가 군자라면, 기는 소인배이다.
11) 리가 왕도(王道, 인의仁義에 의한 도덕적인 정치)라면, 기는 패도(覇道, 무력과 권모술수에 의한 정치)이다.

우리나라에서 주리론은 이언적(李彦迪, 1491년~1553년, 호는 회재晦齋)과 퇴계 이황(退溪 李滉, 양력 1502년 ~ 1571년)이 그 중심이었는데, 이후 퇴계학파 즉 영남학파 학자들이 주로 주장하였다.
퇴계가 활동했던 시기인 1500년대, 즉 16세기에 특히 이러한 주리론적인 학풍이 크게 일어난 것은 당시 사회와도 큰 관련이 있었다. 연산군 시대(1494년∽1506년)의 폭정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었고,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 기묘사화(1519년), 을사사화(1545년) 등 4대 사화(士禍)로 선비, 즉 유학자들이 탄압을 받고 가치관이 흔들리는 심각한 시대 현실 있었다. 학자들은 당시 ‘국가 기강과 윤리와 강상을 세워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자각하였고 ‘사회정의를 확립하고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질서와 윤리를 바로 잡는다’ 의식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그들은 공명정대한 사회기풍을 진작하고, 유교 본래의 도덕사회를 구현한다는 염원을 가졌다.(황의동, 97쪽)
이러한 시대적 환경을 배경으로 등장한 주리론은 이후 조선시대 유학 사상사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다.

나. 주기론

‘주리(主氣)’에서 ‘주(主)’는 앞서 소개한 대로 그 뜻이 ‘주인’, 혹은 ‘주관하다’, ‘가장 중요하다’이다. 그러므로 ‘주기론’란 기(氣)를 주인으로 삼는 이론, 즉 기를 가장 중시하는 이론을 말한다.
‘기’를 중시한다는 것은 리보다 기를 더 중시한다는 뜻이며, 기의 독자성, 혹은 우위성을 긍정한다는 뜻이다. 이는 우주 만물, 삼라만상의 생성과 변화가, 리가 아닌 기의 법칙 혹은 의지에 따른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주장은 화담 서경덕을 비롯하여 율곡학파의 인물들, 기호학파가 주로 주장하였다. 주기론을 주장한 유학자들은 우주 자연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자연의 형이상학적 탐구와 함께 자연이 변화하는 이치를 탐구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이이는 주리론 학자들이 인간의 윤리문제에 관심이 컸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황의동, 97쪽)
율곡 이이의 경우는 리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큰 틀에서 보면 주기론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광호는 다음과 같이 퇴계와 율곡을 소개한 바 있다.

“사서삼경과 퇴계의 저술 가운데는 이(理)에 대한 서술은 자세하지만 기에 대한 서술은 자세하지 않다. 이는 유학의 문제의식이 도덕의 문제, 사람다움의 문제, 가치의 문제와 사회질서의 문제에 치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서삼경과 유학의 문제의식이 이러하지만 조선 유학사에는 기(氣)를 중시하는 유학사의 맥이 있다. 화담 서경덕의 학맥이 그러하다. 퇴계의 경우에는 확고한 주리론의 입장에서 유학을 공부하여 화담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 그러나 파주가 고향인 율곡의 경우는 개성을 중심으로 한 화담학파의 영향을 수용하여 기를 중시하는 입장이 뚜렷하다.”(이광호, 312쪽)

율곡을 주기론을 주장한 화담 서경덕과 같은 계열로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와는 다른 주장을 한 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면 이동준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흔히 서경덕은 물론이요 이이(율곡)까지도 ‘주기론(主氣論)’이라 하여 학문적으로 연관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서경덕과 이이는 다 같이 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기의 불멸성, 능동성을 강조해 기의 면을 전폭적으로 긍정한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이 이기의 불리(不離)에 대한 이해는 깊고 투철하지만, 그 위에 뚜렷이 극본궁원(極本窮源)하는 이(理)의 면이 있음을 몰랐다고 비판했다. 서경덕이나 송대의 장재(張載)가 기에 치우치고 이기를 혼동해 성현의 뜻에 묘계(妙契)치 못하였다고 지적했다.(중략)
이이는 이황처럼 이와 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이가 기에 우월하다는 이우위설(理優位說)을 주장했다. 이와 기는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기의 추뉴(樞紐, 만물의 축과 중심)요 근저(根柢)요 주재(主宰)라는 것이다. 이의 본체는 통일적 원리이지만 그것은 사사물물에서 유행하는 것이요 만유(萬有)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황이 이와 기가 각각 실질적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이이는 이기는 이합과 선후가 없다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이동준, 1996년)

율곡은 주기론을 주장한 서경덕도 비판했으며, 주리론을 주장한 퇴계도 비판했다는 것이다. 율곡은 주기론은 분명히 아니며, 주리론도 역시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황의동도 마찬가지다. 그는 율곡의 입장에 대해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율곡은 주리론과 주기론을 종합하고 조화하는 곳에 있다. 율곡의 입장은 주리도 아니고 주기도 아니다. 리가 있으면 반드시 기도 있어야 하듯이, 기가 있으면 리도 있어야 한다. 리 없는 기 없고 기 없는 리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입장에서는 리도 중요하지만 기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리 없는 기, 기 없는 리는 하나의 불완전한 존재다. 리는 기를 통해 기는 리를 통해 온전해진다. 이러한 율곡의 철학정신에서 주리와 주기를 지양하는 논리가 가능하다. 그래서 율곡은 당시, 퇴계, 회재(晦齋) 중심의 주리론과 화담 중심의 주기론을 하나로 종합하고 조화하는 이기지묘(理氣之妙)의 철학을 열었다.”(황의동, 98-99쪽)

5. 이일분수와 이통기국

5. 이일분수와 이통기국

 

가. 이일분수

‘이일분수(理一分殊)’에서 ‘이일(理一)’이란 ‘리는 하나’라는 뜻이다. ‘분수(分殊)’란 ‘나뉘어서 다르게 된다’라는 의미다. 여기에서 한자 수(殊)자는 ‘죽일 수’, 혹은 ‘다를 수’인데, ‘죽이다’, ‘끊다’, ‘결심하다’, 그리고 ‘다르다’는 뜻이 있다. 참고로 한자어 ‘특수(特殊)’가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특별히 다르다’는 뜻이다. 이일분수는 그러므로, ‘리는 하나이지만 그것은 나뉘어서 다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일분수’라는 개념은 정이(程頤)가 북송의 유학자 장재의 『서명(西銘)』을 소개하는 말에서 처음 나온다. 정이는 이렇게 말했다.

“『서명』은 이일(理一)이면서 분수(分殊)임을 분명히 한다.”(『이정전서』권46)

장재가 지은 『서명』은 한자로 253자가 되는 매우 짧은 글이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내용은 매우 심오하여 송나라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하늘(乾)을 아버지(父)라 부르고, 땅(坤)을 어머니(母)라 부른다. 나는 여기에 조그만 존재로, 홀연히 살고 있다. 그러므로 천지에 가득찬 기운을 나는 몸(體)으로 삼고, 천지를 거느리는 이치를 나는 내 본성(性)으로 삼는다. 백성들은 나의 동포요, 만물은 나와 함께한다. 위대한 임금은 내 부모님의 맏아들이요, 대신은 그 아들의 가신이다.”(원문: 乾稱父, 坤稱母, 予玆藐焉, 乃混然中處. 故天地之塞, 吾其體, 天地之帥, 吾其性, 民吾同胞, 物吾與也. 大君者, 吾父母宗子, 其大臣, 宗子之家相也.)

주자는 『서명』에 대한 정이의 평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로 아버지를 삼고, 땅으로 어머니를 삼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들로서 그러지 아니함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이일(理一)’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이 생길 때 혈맥이 있는 무리들이 각각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하고 각각 그 자식을 자식으로 하면 또한 그 분(分)이 어찌 다르지(殊) 않을 수 있겠는가?”(『주자대전』하, 권2: 以乾爲父, 以坤爲母, 有生之類, 無物不然, 所謂理一也. 而人物之生, 血脈之屬, 各親其親, 各子其子, 則其分, 亦安得而不殊哉?)

이것이 ‘이일분수’ 논의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이일분수’에 대해서는 그동안 학자들 사이에는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여기에서는 한국 유학계에서 발표된 저술(안유경의 『성리학이란 무엇인가』)과 일본 학계에서 발표된 저술(오하마 아키라의 『범주로 보는 주자학』)을 서로 비교하면서 ‘이일분수’에 대한 그들의 설명을 소개하기로 한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유교의 차등적 윤리관 : 차별성의 부각
2) 존재론: 이 세계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이론
3) 달라짐의 원인은 기의 차이 : 동일성의 부각
4) ‘이일 분수’는 이와 기의 문제이다
5) 분수(分殊)는 분수(分守)다 : 봉건적인 신분조직 유지의 근거

1,2,3은 ‘이일분수’에 대한 한국의 유학연구자 안유경의 설명이며, 4,5는 일본의 유학연구자 오하마 아키라(大浜晧)의 설명이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유교의 차등적 윤리관 : 차별성의 부각

안유경은 우선 이일분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일분수는 리가 하나라는 측면과 리가 다양하다는 측면을 동시에 설명하는 이론이다. 리가 하나라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 ‘이일’이고, 하나인 리가 나누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 ‘분수’이다.”(안유경, 130)

이러한 이일분수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달(‘이일’)과 그 달빛을 반사하며, 수많은 강물 위해서 동일하게 빛나는 달(‘분수’)의 예를 든다. 즉 현상세계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양한 모습은 하나의 리에 근원한다는 말이다.(131쪽)
저자는 이어서 정이가 ‘이일분수’의 논리를 가지고 유가의 차등적 사랑을 설명하였음을 상기하였다. 즉 ‘사람이라면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것이 “이일”이고 대상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이 “분수”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도덕원칙 안에서는 모두 하나될 수 있으나 내 부모와 내 자식, 남의 부모와 남의 자식 사이에는 분명한 선후와 차등이 있다.……(정이는) 유가의 사랑이 묵자의 겸애설과 구분되는 차등의 원칙에 입각해 있음을 밝힌 것이다.’(안유경, 132) 이것이 이일분수가 처음 제시된 이유였다.
안유경의 설명에 따르면, ‘이일’은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같은 보편적 도덕원칙이다. 반면에 ‘분수’는 사랑이라는 도덕적 실천과정에서 내 부모와 남의 부모, 내 자식과 남의 자식 사이에 순서와 차등이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안유경, 134-135쪽)
안유경은 이러한 차등적 윤리관 덕분에 가정을 포함한 국가 사회에서는 계급과 등급에 따른 상하의 질서가 존재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분수’에 기반한 차등은 국가사회를 유지하는 질서로 이어진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형은 형답게, 동생은 동생답게 등등 ‘분수’가 신분의 등급으로 해석됨으로써 봉건적 신분 위계를 지탱하는 근거가 된다.(135쪽)
2) 존재론: 이 세계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이론

안유경은 시선을 ‘태극’으로 돌려서 이일분수에 근거하는 주자의 존재론, 즉 이 세계에 대한 인식론을 설명한다. 즉 이일분수에서 ‘이일’은 우주의 보편법칙이자 만물의 존재근거가 되는 근원적인 원리를 말한다. 그런데 ‘분수’는 각각의 사물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띠는 개별적인 원리를 말한다. 따라서 ‘분수’의 측면에서 보면 이 세계는 천차만별로 다양하지만, ‘이일’의 측면에서 보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원리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책상, 사슴, 사람이 각각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분수’다. 하지만 책상, 사람, 사슴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원리가 들어있는데 이것이 ‘이일’이다. 결국 전체적인 측면에서 이 세계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말하려는 것이 ‘이일’이고, 개개의 구체적 사물의 측면에서 이 세계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말하려는 것이 ‘분수’이다. 즉 우주 전체를 하나의 원리에서 본 것이 ‘이일’이고, 개개 사물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본 것이 ‘분수’이다.(136-137쪽)

주자는 이러한 근원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태극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 태극의 개념으로 이일과 분수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근원적인 하나의 태극과 개개 사물 속에 갖추어져 있는 태극의 관계를 통해서 이일과 분수를 설명하였는데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즉 태극은 하나이지만 태극이 들어 있는 만물은 다양하다. 그렇지만 근원적인 하나의 태극과 태극이 들어있는 만물 사이에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주 만물 전체에도 하나의 태극기 있고, 각각의 사물에도 하나의 태극이 있다.(138쪽)
주자에게 있어서 태극은 바로 리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근원적인 태극과 수많은 개개 사물 속의 태극은 ‘이일’의 리(전자)와 ‘분수’의 리(후자)라고 할 수 있다. 즉 리가 하나라는 설명이 ‘이일’의 리이며, 리가 사물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분수’의 리이다. 달에 비유하면 이일의 리는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달이고, ‘분수’의 리는 강, 호수 등 수많은 물결 위에 비추어지는 달이다.(140쪽)
주자가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안유경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이 주로 현상세계의 다양한 차별성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드러나는 개별적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고 그 이면에 흐르는 보편적 원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141쪽) 주자는 이일분수를 통해서 인간의 리(성)이 우주 본체, 즉 근원적인 하나의 리에서 유래하였음을 밝히고, 우주본체인 리와 인간에게 내재된 개별적인 리의 내용이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우주 본체인 리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주자에게 이 이일분수의 논리는 맹자 성선론의 논리적 근거가 된 것이다.(안유경, 142쪽)

3) 달라짐의 원인은 기의 차이 : 동일성의 부각

그렇다면 만물이 서로 달라지는 원인, 즉 ‘분수’의 원인은 무엇인가? 주자에 따르면 이렇게 분수가 생기는 것은 기 혹은 기질의 차이 때문이다. 기의 다양성 때문에 사물들 사이에서 ‘분수’가 발생한다.(안유경, 142쪽)
사물이 생겨날 때는 기가 모여서 형테를 이루고 이어서 리가 부여된다. 기가 모여 형체가 이루어질 때 맑은 기를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탁한 기를 얻은 것은 사물이 된다. 아울러 사람도 맑은 기를 얻느냐 탁한 기를 얻느냐에 따라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어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 진다. 결국 삼라만상, 모든 인간과 사물은 하늘로부터 동일한 리를 부여받지만, 기의 차이에 따라 리가 달라질 수 있다. 책상‧사슴‧사람의 차이에 따라 책상의 리, 사슴의 리, 사람의 리가 서로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이일분수이다. 이일의 측면에서는 모두 동일한 하나의 리이지만, 분수의 측면에서는 리가 서로 다른 것이다.(144쪽)
주자는 인간의 본성(性)이 바로 하늘의 이치(理)라고 말했다. ‘성즉리(性卽理)’가 바로 그것이다. 리란 착한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성선설로 주장하였듯이 인간은 누구나 착하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나쁜 사람, 어질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인간은 누구에게나 인의예지라는 착한 본성이 온전히 내재되어 있다. 이 선한 본성을 회복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주자가 이일분수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같고, 누구나 착하다는 것이다.(145-146쪽)

이상은 한국의 유학연구자가 설명하는 주자의 ‘이일분수’설이다. 다음에 소개할 내용은 똑같은 ‘이일분수’를 일본의 유학연구자 오하마 아키라(大浜晧, 1904-1987)가 설명하는 내용이다. 오하마는 중국철학연구자로 1934년에 규슈(九州)제국대학 법문학부 중국철학과를 졸업하고, 1939년에 동경제국대학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1941년에 타이베이제국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48년 이후에는 나고야 대학 문학부에서 교수로 있다가 1968년에 정년 퇴임하였다. 그가 발표한 주요 저술은 다음과 같다.

• 『중국고대의 논리(中国古代の論理)『, 東京大学出版会, 1959
• 『노자의 철학(老子の哲学)『, 勁草書房, 1962
• 『장자의 철학(荘子の哲学)『, 勁草書房, 1966
• 『중국적 사유의 전통(中国的思惟の伝統『, 勁草書房, 1969
• 『사기와 사통(中国・歴史・運命 史記と史通)『, 勁草書房, 1975
• 『중국고대사상론(中国古代思想論)『, 勁草書房, 1977
• 『주자의 철학(朱子の哲学)『, 東京大学出版会, 1983
• 『중국의 역사관(史記と史通の世界 中国の歴史観)『, 東方書店, 1992

4) ‘이일 분수’는 이와 기의 문제이다

오하마는 ‘이일분수’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이일분수는 리와 기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오하마, 148) 앞서 소개한 안유경의 설명은 ‘이일분수는 리가 하나라는 측면과 리가 다양하다는 측면을 동시에 설명하는 이론이다’라고 하여 리와 기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리와 다양한 리를 동시에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하여 리를 중시한 것과는 자못 입장이 다르다.
오하마는 이어서 ‘이일’이라고 하는 것은 리의 일관성, 공통성, 그리고 보편성이며, ‘분수’라고 하는 것은 사물 각각의 신분과 역할에서 차이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자는 이 이일분수를 자신의 이기 철학에 포함하여 이해하였다는 것이다.(149쪽) 주자는 이기론의 하나로 이일분수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하마의 주장에 따르면, 천지 만물을 종합하여 그 궁극에 있는 것, 곧 근원에 있는 것은 보편적인, 하나의 리이다. 이러한 리가 사람에 내재할 때에는 사람마다 각각 하나의 리를 갖는다. 이때 각 사람이 각각 가진 리는 그 신분,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근원으로서의 리는 동일하다. 하지만 각 사람에게 리는 기와 함께 존재한다. 이일분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문제이며, 따라서 기와 리의 문제이다.(149쪽)
그는 왜 이일분수를 이기의 문제라고 보는 것일까? 오하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천지와 사람은 동일한 기와 동일한 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천지의 작용과 사람의 작용은 동일하고, 천지와 사람간에 차이는 없다. 다만 사람에게는 사욕이 있기 때문에 천지와 사람이 다르게 되며, 천지의 작용과 사람의 작용도 다르게 된다. 사욕이 없는 성인만이 천지와 동일한 리, 그리고 동일한 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보통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지와 다른 차이점 즉 눈에 보이는 ‘분(分)’의 차이는 서로 다른 기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오하마, 150-151쪽)
주자는 ‘이일’을 체(體, 본체), ‘분수’를 용(用, 작용)으로 인식했다. 체는 형이상(形而上)의 본체(體)를 말하며, 용은 형이하(形而下)의 ‘발용’(用, 작용)을 말한다. 성인(聖人)의 경우는 체와 용을 겸한다.(말하자면, 성인은 도덕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행동이 천리(하늘에서 받은 리理) 그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즉 ‘이일’이지만 또 ‘분수’이기도 하다. 성인은 유일 절대의 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때와 장소에 대응하여 방도를 달리하고 사고를 달리해도 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과 사물의 무리는 리가 본래 하나였지만, 그 ‘분(分)’ 다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즉 ‘분수(分殊)’로서 항상 달랐다.(152쪽)
오하마의 주장에 따르면, 주자는 ‘이일분수’를 리와 기, 형이상과 형이하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도덕과 연관시켰다. 어버이를 친히 여기는 사랑의 리를 백성에게 끼치게 하고 사물에 미치도록 하는 것은 ‘이일’이다. 하지만 친척과 친척이 아닌 사람,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차이 나게 대하는 것은 ‘분수’이다.(153쪽) 분수(分殊)란 기 작용이 서로 다른 것이다. 리를 받은 것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 실천에서 순서, 차등, 얕고 깊음이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154쪽)
오하마의 리와 분수에 대한 서론적인 설명은 여기까지이다. 그는 이기론을 동원하여 이일분수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즉 이일은 리요, 분수는 기라는 논리다. 엄밀히 말하면 ‘이일’은 리의 체요, ‘분수’는 기의 용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앞서 살펴본 안유경의 설명과는 다르다. 오하마가 이렇게 설명을 시작한 것은 다음에 소개할 그의 ‘분수론(分殊論)’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분수(分殊)는 분수(分守)다 : 봉건적인 신분조직 유지의 근거

오하마는 ‘이일분수’의 문제를 ‘안분(安分)’의 문제로 바꿔서 설명한다.

“초목은 산에서 자라니 이것이 초목의 본분이다.(『주자어류』하, 권95. 「程子之書1」: 譬如一草木合在山上, 此是本分.) 초목이 있을 수 있는 장소에 있는 것이 본분이고, 본래의 구별이다. ‘분(分)’을 본분의 의미로 해석할 때, ‘분수(分殊)’는 사물의 본분이 각각 다르다는 말이 된다. 자연계에서는 이것이 분수이다.”(오하마, 155쪽)

오하마는 왜 갑자기 ‘이일분수’의 문제에서 ‘본분(本分, 본래의 직분에 따른 책임이나 의무)’의 문제를 가져왔을까? ‘본분’은 안분(安分, 자신의 몫에 편안하게 느낌)의 문제로 이어지며 그것은 또 ‘분수(分守)를 안다’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이일분수의 ‘분수(分殊)’는 리는 하나이지만 그것이 나뉘어져 서로 다르게 된다는 의미인데, 나누어져 다르게 된다(分殊)는 것은 어떻게 ‘본분(本分)’과 관련되는 것일까?
오하마의 설명에 따르면, 천분(天分)은 곧 천리(天理)이다. 아버지는 그 아버지의 분수에 편안하고, 자식은 그 자식의 분수에 편안하고, 임금은 그 임금의 분수에 편안하고, 신하는 그 신하의 분수에 편안하면 어찌 사사로울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정자의 말이다. 이러한 말을 빌려서 오하마는, 주자는 분수(分殊)를 만물의 각각 본분(本分)에 있어서 서로 다름이라고 인식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주자에게는 리가 ‘봉건적 신분 위계 조직을 지탱하는 근거’(오하마, 156)라고 하였다. 나아가 오하마는 주자의 정치사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주자는) 상하 질서가 존재하는 국가 관계에서 군신 관계를 최고로 중시한다. 군주의 마음을 천하의 가장 근본으로 삼는 것은 왜 그런가? 천하의 일은 천변만화(千變萬化, 수없이 변화)하여 그 실마리가 무궁하지만, 한결같이 군주의 마음에 근본하는 것이 곧 자연의 리이기 때문이다. ……군주의 절대성이 자연의 리이다. 임금과 신하‧백성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은 자연의 리를 거스름이 된다. 따라서 군신의 ‘분(分)’은 엄함으로써 주를 삼고, 조정의 예(禮)는 경(敬)으로써 주를 삼는다. 군신의 ‘분’은 털끝만한 혼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156쪽)

여기에서 ‘분(分)’은 이제 ‘구분’의 의미로 사용된다. 오하마는 ‘이일분수’에서 ‘나뉨’의 뜻이 있던 ‘분(分)’을 신분상의 구분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군주의 절대성이라고 하는 자연의 리를 거슬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주자가 해석하였음을 지적하였다.(오하마, 156) 이러한 지적의 근거가 되는 주자의 말은 사실상 ‘이일분수’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하마는 이일분수와는 관련이 없는 주자 사상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안분’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분수(分殊)’의 문제는 나아가 예와 관련하여 국가사회의 질서 문제로 발전한다. 오하마에 따르면 예는 상하‧친소 등 자연히 나누어진 바에서 만들어지며, 인간성의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것으로 외적인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만물은 각각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각각의 사물은 자연‧필연의 리를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157-158쪽)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상하의 분수는 천리의 자연이다.(『주자대전』중,권59: 上下名分, 此是天理自然) 말하자면 분수(名分)는 자연‧필연의 리이고, 분수를 지키는 것은 예이다. 예는 타고난 인간 본성의 자연에서 나온다. 자연‧필연이고 타고난 인간 본성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예를 어지럽힌다거나 그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 예를 어지럽히고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불의이다. 거기에는 화합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다. 천리와 자연에는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엄함이 있다. 그러나 엄함의 가운데 아름다움이 있다.”(오하마, 159) 이것이 바로 주자 정치사상의 기본이었다고 오하마는 ‘이일분수’에 대한 설명의 결론을 지었다.

일본 학자 오하마의 이일분수에 대한 설명은, 한국의 학자 안유경의 설명과 비교해보면 서로 많이 다르다. 특히 오하마가 ‘분수(分殊)’을 ‘안분(安分)’의 문제로 환원하여 사회의 각 계층이 자기의 분수를 지킨다는 문제로 해석한 것은 다소 논리의 비약도 느껴진다. 하지만 리는 하나이지만 나뉘어서 다르게 된다는 것은 결국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다름과 차별, 그리고 계급적‧계층적인 문제와도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오하마의 주장에 수긍되는 점도 있다. 아마도 오하마는 일본 사회가 주자학을 받아들여서 일본화시키는 과정에서 경험한 사상적 축적을 ‘이일분수’의 문제에 대입시켜 설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상세한 논의를 할 수 없지만 ‘안분’의 논의에는 고문사학파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사상적 영향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일분수’의 문제는 이렇게 한일 유교사상사의 차별적 발전하고도 관련이 있어 흥미롭다.

나. 이통기국

‘이통기국(理通氣局)’이란 율곡이 제창한 개념이다. 이 말의 뜻은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는 것이다. 리는 원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널리 통용이 되지만 기는 물질적인 것이라서 시간과 장소에 제약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중국의 정이가 제창한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개념을 율곡 자신의 용어로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임옥균, 120쪽)
율곡은 ‘이일분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율곡전서』권10, 「답성호원」)

“무릇 리는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본래 치우침과 바름(偏正), 통함과 막힘(通塞), 맑음과 탁함(淸濁), 순수함과 잡박함(粹駁)등의 구분이 없다. 그러나 리를 등에 태운 기는 올랐다 내렸다 또 높이 오르면서 지금까지 쉬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뒤섞여 고르지 못하나, 천지 만물을 낳는다. 어떤 것은 바르고 어떤 것은 치우치며, 어떤 것은 통하고 어떤 것은 막히며, 어떤 것은 맑고 어떤 것은 탁하며, 어떤 것은 순수하고 어떤 것은 잡스럽다.”(원문: 夫理, 一而已矣, 本無偏正通塞淸濁粹駁之異, 而所乘之氣, 升降飛揚, 未嘗止息, 雜糅參差, 是生天地萬物, 而或正或偏, 或通或塞, 或淸或濁, 或粹或駁焉.)

이 부분은 율곡이 리와 기를 소개하는 부분이다. 리는 하나이면서 어떤 구분이 없으나 기는 온갖 모습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기는 리를 태우고 부지런이 움직이며 천지 만물을 낳는다. 율곡은 리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기를 중시한다. 인용문에는 이러한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계속해서 율곡은 ‘이일분수’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다.

”리는 비록 하나이지만 이미 기에 올라탔기 때문에 그 나뉨(分)이 만 가지로 다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에서는 하늘과 땅의 리가 되고, 만물에서는 만물의 리가 되며, 사람에게서는 사람의 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 가지로 다양한 것은 기가 행하는 바이다. 비록 기의 행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리가 있어 주재(主宰)하는 것이니, 만 가지로 다양한 이유는 역시 리가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리가 그렇지 않은데 기만 홀로 그런 것은 아니다.“(원문: 理雖一, 而旣乘於氣, 則其分萬殊, 故在天地而爲天地之理, 在萬物而爲萬物之理, 在吾人而爲吾人之理, 然則參差不齊者, 氣之所爲也. 雖曰氣之所爲, 而必有理爲之主宰, 則其所以參差不齊者, 亦是理當如此, 非理不如此而氣獨如此也.)

‘이일분수’를 하나의 리와 다양한 리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은 앞서 소개한 한국의 유학연구자 안유경의 설명과 유사하다. 율곡은 기를 중시하는 유학자이기는 하지만 ‘이일분수’를 리와 기의 관계로 설명하고자 하는 일본학자 오하마하고는 확실히 설명 방식이 다르다. 기를 중시하는 율곡이 리의 역할을 주목하여 강조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계속해서 율곡은 이렇게 말한다.

“천지와 사람과 만물에는 비록 각각 그 리가 있는데, 천지의 리가 곧 만물의 리이요, 만물의 리가 곧 사람의 리이다. 이것이 이른바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 모든 사물의 공통된 근원으로서의 태극)”이란 것이다. 비록 하나의 리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본성(性)이 만물의 본성이 아니며, 개의 본성이 소의 본성이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각일기성(各一其性, 각각 그 본성을 하나로 가짐)’이다.”(天地人物, 雖各有其理, 而天地之理, 卽萬物之理, 萬物之理, 卽吾人之理也, 此所謂統體一太極也. 雖曰一理, 而人之性, 非物之性, 犬之性, 非牛之性, 此所謂各一其性者也.)

하나의 커다란 만물의 리가 있고, 그 리는 나뉘어서 각기 다른 사물의 본성을 구성한다. 즉 각각 하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전체적인 리가 있고 개별 사물에 그 사물의 리가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역시 다양한 모습의 기 보다는 다양하게 나뉘어진 리에 주목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통기국’에 대해서 율곡은 지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이통기국(理通氣局)’ 네 글자는 내가 발견하여 얻은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또 내 자신이 독서가 많지 않아 벌써 이런 말을 다른 사람이 한 것을 미쳐 보지 못하였나 싶기도 합니다.”(『율곡전서』권10, 답성호원)

‘이통기국(理通氣局)’이란 단어를 중국에서 유명한 검색 사이트 바이두(百度, https://www.baidu.com)에서 검색해보면 율곡의 ‘이통기국’ 자료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이통기국의 사상은 율곡의 독자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사상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중국에서 송나라 시대 성리학자들이 이기론을 제시하면서 이와 유사한 개념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율곡이 이야기하듯이 율곡은 이러한 표현을 처음 발견한 것일 뿐이다.

먼저 ‘이통(理通)’에 대해서 살펴보면 율곡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리가 통한다는 것(理通)’은 무엇인가? 리는 본말(本末, 처음과 끝)이 없다. 선후(先後, 앞과 뒤)도 없다. 본말도 없고 선후도 없으므로 아직 반응하지 않았을 때도 ‘먼저’가 아니며, 이미 반응했을 때에도 ‘뒤’가 아니다.【이것은 정자程子의 말이다.】 그러므로 (리가) 기를 타고 운행하여 천태만상으로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그 본연의 묘리(妙理)는 없는 곳이 없다.(理通者, 何謂也? 理者, 無本末也, 無先後也. 無本末無先後, 故未應不是先, 已應不是後.【程子說】 是故, 乘氣流行, 參差不齊, 而其本然之妙, 無乎不在.)

원문의 ‘삼차부제(參差不齊)’는 ‘길고 짧고 들쭉날쭉하여 가지런하지 않음’, 즉 다양함, 다채로움을 표현한 말이다. ‘리’라는 존재는 매우 다양한 현상으로 발현되며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곳에나 통하는 것이 리라는 말이다. 율곡은 리가 모든 곳에 통한다는 점에 대해서 계속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가 치우치면 리도 역시 치우치게 된다. 하지만 치우친 것은 리가 아니라 기이다. 기가 온전하면 리도 역시 온전하다. 하지만 온전한 것은 리가 아니라 기이다. 맑고 탁하고(淸濁), 순수하고 잡스러운(粹駁) 것과 찌꺼기(糟粕)·재(煨燼)·거름(糞壤)·오물(汙穢) 가운데도 리가 있지 않은 곳은 없다. 리는 각각 그것들의 본성(性)이 되지만 리 본연의 묘함(妙)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이다. 이것을 말하여 리가 통한다고 하는 것이다.(氣之偏則理亦偏, 而所偏非理也, 氣也, 氣之全則理亦全, 而所全非理也, 氣也. 至於淸濁粹駁, 糟粕煨燼, 糞壤汚穢之中, 理無所不在, 各爲其性, 而其本然之妙, 則不害其自若也, 此之謂理之通也.)

율곡이 보기에 변화하는 주체, 즉 치우치거나 온전하거나 탁하거나 순수하거나 하는 등 다양성을 보이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기이다. 하지만 기가 주체라고 해서 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리는 묘하게 손상되지 않으면서 모든 기의 작용에서 ‘본성(性)’이 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또 율곡은 ‘기국(氣局)’, 즉 ‘기는 국한된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기가 국한된다(氣局)’는 것은 무엇인가? 기는 이미 형적(形迹)에 간섭하기 때문에, 본말이 있고 선후가 있다. 기의 본체는 담일청허(湛一淸虛, 맑고 한데 어울려 있으면서 텅 비어 있음)할 뿐이다. 어찌 일찍이 (처음부터) 찌꺼기‧재·거름·오물 등의 기가 있겠는가? 오직 그것이 오르거나 내리고, 혹은 높이 날거나 하여 조금도 쉬지 않으므로 천태만상으로 다양하게 만 가지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氣局者, 何謂也? 氣已涉形迹, 故有本末也, 有先後也. 氣之本則湛一淸虛而已, 曷嘗有糟粕煨燼糞壤汚穢之氣哉? 惟其升降飛揚, 未嘗止息, 故參差不齊, 而萬變生焉.)

여기서는 변화하는 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만 가지 변화가 생기는 것은 기가 쉴 틈 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의 본체는 맑고 텅 비어있는 것이다. 거기에 거름이나 오물 등의 기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움직이고 변화하는 가운데 거름이나 오물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 기가 운행할 때에 그 본연을 잃지 않는 것도 있고, 그 본연을 잃어버리는 것도 있다. 이미 그 본연을 잃어버리면 기의 본연은 이미 있는 데가 없다. 치우친 것은 치우친 기며, 온전한 기가 아니다. 맑은 것은 맑은 기며, 이미 탁한 기가 아니다. 찌꺼기나 재는 찌꺼기나 재의 기이지, 맑고 하나이면서 텅 비어있는 그런 기가 아니다. 이는 리가 만물 가운데서 그 본연의 묘함이 있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다르다. 이것이 이른바 기는 국한된다는 것이다.”(원문:於是氣之流行也, 有不失其本然者, 有失其本然者, 旣失其本然, 則氣之本然者, 已無所在, 偏者, 偏氣也, 非全氣也, 淸者, 淸氣也, 非濁氣也, 糟粕煨燼, 糟粕煨燼之氣也, 非湛一淸虛之氣也, 非若理之於萬物, 本然之妙, 無乎不在也, 此所謂氣之局也.)

기는 한번 생성하여 변화되면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이미 자기의 기질이 형성되고 그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또 기는 리와 달리 모든 사물에 존재하지 않고 각각의 사물에 국한되어서 존재한다. 이것이 기가 국한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통기국’의 사상은 율곡이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의 유기론적(唯氣論的) 입장을 비판할 때 제시하였다. 서경덕은 오직 ‘기’만을 중시하는 유학자였다. 그는 리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리가 독자적으로 기능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서경덕의 주장에 대해서 율곡은 그가 ‘한 모퉁이만 본 사람(見一隅者)’라 비판하고 ‘이통기국(理通氣局)’을 들어 반박하였다. 기는 사물이나 현상마다 국한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리는 만물 모든 곳에 통한다는 것이다. 서경덕은 ‘태허의 기(太虛之氣)’가 궁극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태극의 리(太極之理)’를 궁극적인 존재로 보았다.
율곡은 퇴계와 같이 리와 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리가 기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리와 기는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것이며, 리는 기의 중추요 근저(根柢)이며 주재(主宰)라고 보았다. 아울러 리의 본체는 통일적 원리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건과 사물에서 운행되는 것이요, 삼라만상이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다만 율곡이 퇴계와 다른 점은 퇴계가 리와 기를 각각 주체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들이 각각 실질적인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율곡은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지거나 합하는 것도 없고,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이고 하는 것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기가 발동을 하면 리는 거기에 편승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다.

다. 이기지묘

앞서 소개한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율곡이 독자적으로 제창한 개념이라고 하였는데, ‘이기지묘(理氣之妙)’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두 개념은 모두 율곡 이기론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율곡 철학 연구자인 송석구는 ‘이기지묘’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였다.

“이기지묘는 율곡에게 있어서 이기론의 궁극점이다. 그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인 무형무위(無形無爲)의 리와 형이하자(形而下者)인 유형유위(有形有爲)의 기가 혼융무간(渾融無間, 서로 혼합되고 융합하여 간격이 없음)한 관계에 있으면서 그들 각자들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존재가 현현(顯現, 드러남)한다고 보았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이기의 조화가 아닌 것이 없다. 이 자연세계는 유형유위의 기화(氣化)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기화의 주재는 언제나 리와 기에 승(乘, 편승)함으로써 존재는 나타나는 것이다.”(송석구, 115)

이 세계의 삼라만상은 리와 기의 조화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어느 한 쪽만의 역할이 아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만이 주체가 아니다. 묘하게 혼융무간(渾融無間) 리와 기가 각자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이기의 묘함이다.
율곡은 이러한 리와 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율곡전서』권10, 「답성호원」)

“리라는 것은 기를 주재(主宰)한다. 기라는 것은 리가 편승하는 것이다. 리가 아니면 기가 뿌리를 박을 데가 없다. 기가 아니면 리가 의지할 데가 없다. (리와 기는) 이미 두 물건도 아니고, 또한 한 물건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이면서 둘이다. 두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둘이면서 하나이다.”(원문: 夫理者, 氣之主宰也, 氣者, 理之所乘也, 非理則氣無所根柢, 非氣則理無所依著, 旣非二物, 又非一物, 非一物, 故一而二, 非二物, 故二而一也.)

리와 기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리는 기를 주재하고 기는 리를 편승하도록 한다. 율곡은 불교적인 표현으로 기묘하게 리와 기의 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결국 리와 기는 하나의 몸체에 내재한 두 개의 개체라는 뜻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리와 기의 묘합(妙合, 묘한 결합)을 설명한다.

“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리와 기가 비록 서로 떠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묘합(妙合)한 그 가운데서 리는 본래 리요, 기는 본래 기이니, 서로 뒤섞이지 아니하므로 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비록 리는 본래 리요, 기는 본래 기라고 하더라도 서로 간의 구별이 모호하여 선후도 없고, 이합(離合)도 없어서 그것이 두 물건이 됨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두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動)과 정(靜)이 끝이 없고, 음(陰)과 양(陽)이 시작이 없다. 리에 처음이 없기 때문에 기도 역시 처음이 없는 것이다.(원문: 非一物者, 何謂也? 理氣雖相離不得, 而妙合之中, 理自理, 氣自氣, 不相挾雜, 故非一物也. 非二物者, 何謂也? 雖曰理自理氣自氣, 而渾淪無閒, 無先後無離合, 不見其爲二物, 故非二物也. 是故, 動靜無端, 陰陽無始, 理無始, 故氣亦無始也.)

이러한 율곡의 ‘이기지묘’ 사상에 대해서 율곡학 연구자 황의동은 이렇게 그 의미를 평가한 바 있다.

”이 세상에 수많은 가치들, 주의나 주장들은 서로 대립한다.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가치는 모순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다. 나와 다르다고 싸우거나 갈등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 나와 마주 서 있는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기지묘는 사랑의 철학이며 평화와 조화의 철학이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할 때 대화는 시작되고 소통이 가능하다. 대립과 반목의 갈등을 이기지묘의 철학으로 풀어야한다.“(황의동, 72-73)

이러한 황의동의 평가는 다소 논리 비약적인 측면이 있으나 동양철학에서 주기론과 주리론의 사상사적 대립을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현실의 영역으로 확대하면 ‘이기지묘’의 사상은 단순한 이기론의 논쟁이 아니라 현실의 분쟁을 극복하고 화합하게 할 수 있는 화쟁(和爭)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리와 기

4. 리와 기

 

가. 리

‘리(理)’는 보통 ‘이치’라고 번역한다.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리를 ‘이치’로 번역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최근에는 ‘리’로 그대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리’란 우리나라의 말 ‘이치’와는 또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리’는 중국 철학에서 탄생한 단어로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회 환경에서 출발한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현실과는 괴리가 존재한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역시 ‘리’라는 발음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철학에서 ‘로고스(logos)’라는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로고스’라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

참고로 ‘로고스’는 그리스어로 ‘λόγος’, 영어로 ‘logos’이며 그 뜻은 ‘말’, ‘이야기’, ‘어구’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통로, 혹은 이성(理性)으로 사용되기 도 한다. 또 ‘기준’, ‘비율’의 뜻도 있으며, 이법(理法)이란 의미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도 이 말이 사용된다. 요한복음 제1장 1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에서 말씀은 영어 ‘Word’의 번역어인데, 그것은 또 그리스어 로고스(‘λόγος’)의 번역어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로고스’라는 것이다. 성리학에서 기초개념으로 통하는 ‘리(理)’는 서양철학에서는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 리의 대응개념은 로고스이며, 로고스의 대응개념은 리이다. 물론 이 두 단어는 그 뜻도 다르고 개념도 전혀 다르다. 동서양 문명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그러나 양 문명의 철학사상에서의 중요도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리(理)’는 매우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주요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다스리다, 다스려지다, 통하다, 손질하다, 수선하다, 처리하다.
2) 결, 도리, 조리, 무늬, 살결, 꾸미다, 장식하다.
3) 옥을 갈다. 바루다, 바르게하다, 재판을 하다, 구별하다.
4) 길, 도(道),
5) 성질, 매개, 행동
6) 의지하다, 관리하다, 깨닫다, 이해하다.

이중에 리의 가장 기초적이고도 핵심적인 뜻은 2번이다. 특히 ‘결’, ‘무늬’라는 뜻이다. 『설문해자주』에서 ‘리(理)’자를 살펴보면 ‘쪼개 나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옥을 가공할 때 그 결을 따라 잘 가공하면 쉽게 그것을 다룰 수 있다고 하였다.
『한비자』(「해로」)에서는 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리는 이미 만들어진 사물의 무늬이며, 도는 만물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다.”

리와 도를 논하면서 모든 만물에 내재해 있는 무늬로서 리를 설명하고 이에 대응하여 만물을 성립하게 하는 것으로서 도(道)를 소개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리는 사물의 개별적인 형체나 성질에 관련된 것을 가리키고, 도는 보편적인 원리나 법칙을 나타냈다.(미조구치, 73)

전한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논어』에는 ‘리(理)’라는 글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유학 경전중에 가장 중요한 『논어』에 리가 나오지 않는 점은 일본의 유학자들이 크게 주목하고 주자의 성리학을 비판하는데 근거로 삼았다.
예를 들면 일본 고학파의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1627년∼1705년)는 이렇게 말했다.

“리(理)와 같은 글자는 원래 죽은 글자다. 이 글자는 옥(玉)의 뜻과 리(里)의 소리가 합쳐진 형성문자로 옥의 무늬를 말한다. 이는 사물의 ‘조리’를 형용하는 것으로 천지가 만물을 화생하는 이치를 묘사할 수 있는 글자가 아니다.”(『어맹자의』)

송대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나 하늘(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리는 상상의 견해일 뿐이다. 천지가 생기기 전과 천지가 시작될 때 누가 그것을 보고, 누가 전했겠는가? 만약에 세상에 어떤 사람이 천지가 개벽되기 전에 태어나 수백억만세를 살아서 눈으로 그것을 직접 보고 후인들에게 전하고 그것을 다시 서로 전하고 외워서 오늘에 이르렀다면 참으로 옳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천지가 개벽되기 전에 태어난 사람도 없고 또 수백억 만세를 산 사람도 없다. 그러니 천지개벽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원칙에 상당히 어긋난다.”(『어맹자의』)

그는 이러한 논리로 송나라 유학자들, 특히 주자를 비판했다. 그리고 송유(宋儒)들이 리를 주로 말하는 것은 노장이나 불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였다.(이기동, 65) 앞의 인용문을 보면 그는 실증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천지가 개벽하기 전에 누가 그것을 보았겠는가 물었다. 초월적인 개념으로서의 리를 어떻게 인간이 경험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이 실존했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이토 진사이의 비판은 일본의 같은 고학파인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년~1728년)로 전해져 고문사학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리는 송나라에서 ‘성즉리(性卽理)’의 사상을 제창한 성리학이 성립되는데 핵심개념으로 수많은 학자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명나라 때 일어난 양명학도 ‘마음이 곧 리이다’라는 ‘심즉리(心卽理)’ 사상을 제창하면서 ‘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600여년간 역시 리는 그 시대 사상계에서 범접할 수 없는 개념으로 유학자들의 깊은 신뢰와 추종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등 고학파의 비판이 있었기는 하지만 정통 주자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적어도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나라마다 시기와 강도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리’라고 하는 철학 개념은 핵심 주류를 차지한 사상 개념으로 동아시아인들의 사유와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주자는 이러한 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그의 제자 진순은 이렇게 정리하였다.

1) 도(道)와 리(理)의 구별
2) 리(理)와 성(性)의 구별
3) 리(理)와 의(義)는 체(體)와 용(用)이다.

위에 소개한 각 주제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도(道)와 리(理)의 구별

(‘도(道)’란 ‘법도’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리 역시 ‘이치’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주자의 의도를 좀 더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법도나 이치로 바꾸지 않고 ‘도’와 ‘리’를 그대로 사용하여 번역해보기로 한다.-필자 주. 이하 ()안의 내용은 모두 필자의 주석임.)

도와 리는 대략 하나의 물건이다.(도와 리가 물체가 아닌데 원문에서 물物자를 써서 지칭한 것은 중국어로서 물物자가 가진 성격 때문이다. 중국어의 ‘물’자는 물체 외에도 ‘내용’이나 ‘실질’ 혹은 ‘일’이나 ‘사정’ 혹은 ‘만사萬事’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누어서 두 글자로 만든 것은 역시 반드시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만약 도와 리가 하나의 뜻으로 완벽하게 일치된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이렇게 두 글자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각기 다른 뜻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른 글자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까지 원문: 道與理大概只是一件物, 然析為二字, 亦須有分別.)

도(道)란 사람이 통행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붙인 글자이다. ‘리’자와 서로 대응시켜 말한다면, 도라는 글자는 비교적 느슨한 편이다. 반면에 ‘리’자는 비교적 절실하다.(혹은 진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에는 분명하여 바꿀 수 없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만고에 통행되는 것은 도이며, 만고에 바꿀 수 없는 것은 리이다.(원문: 道是就人所通行上立字, 與理對說, 則道字較寬. 理字較實, 理有確然不易底意. 故萬古通行者, 道也. 萬古不易者, 理也.)

(주자가 도와 리를 대립시켜 그 뜻을 구분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앞서 『한비자』(「해로」)에서 도와 리를 구분하여 설명했던 것을 기억해보자. 한비자는 ‘리는 이미 만들어진 사물의 무늬이며, 도는 만물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리는 개별 사물과 관련되지만 도는 만물과 관련된다. 리의 의미는 ‘도’보다는 국한적이고, 작은 것이었다. 오직 ‘도道’만이 보편적인 원리나 법칙을 의미했다. 그러나 주자는 리도 도와 같이 만물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나아가 리를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만고에 불변하는 원리理로 까지 평가하여 그 위상을 높였다.)

리란 형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을까? 각 사물에는(여기에서 말하는 사물事物은 일 혹은 사건과 사물을 말한다) 하나의 당연한 준칙이 있다. 이것이 리이다. 칙則이란 준칙, 법칙을 말한다.(준칙準則이란 행위의 규범이나 윤리의 원칙을 말한다.) 여기에는 확정되어 바뀔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원문: 理無形狀, 如何見得. 只是事物上一個當然之則, 便是理. 則是準則、法則,有個確定不易底意.)
모든 일과 사물에는 바로 합당하게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지나침도 없고 미치지 못함도 없다. 그것이 바로 준칙(則)이다. 예를 들면 ‘임금이 된 사람은 인仁에 머문다’고 하는데, 인이란 바로 임금으로서는 당연한 준칙이다.(只是事物上正合當做處便是當然. 即這恰好, 無過些, 亦無不及些, 便是則. 如為君止於仁,止仁便是為君當然之則.)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문다’고 하는데, 경이란 바로 신하로서의 당연한 준칙이다.(여기에서 공경 경敬이란 한자는 ‘공경하다’, ‘훈계하다’, ‘정중하다’, ‘공손하다’, ‘삼가다’, 그리고 사의를 표하는 예禮를 나타내기도 한다.) ‘아버지가 된 자는 자애로움에 머문다’, 그리고 ‘자식은 효도에 머문다’고 하는데, 효도와 자애는 바로 부모와 자식이 행해야 할 당연한 준칙인 것이다.(원문: 為臣止於敬, 止敬便是為臣當然之則. 為父止於慈, 為子止於孝, 孝慈便是父子當然之則.)

또한 ‘발의 거동은 무겁게 한다’고 하는데, 무겁게 한다는 것은 바로 발의 거동으로서는 당연한 준칙이다.(여기에서는 행동거지, 즉 행동하는 일事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또 ‘손의 거동은 공손하게 한다’고 하는데, 공손함이란 손의 거동으로서는 당연한 준칙이다. ‘앉아 있을 때는 시동尸童처럼 한다’는 것은 앉아 있을 때는 당연히 따라야 할 준칙이다. ‘제사 지내듯이 삼가며 선다’는 것은, 서 있을 때의 당연한 준칙이다.(원문: 又如足容重, 重便是足容當然之則;手容恭,恭便是手容當然之則. 如尸便是坐中當然之則,如齊便是立中當然之則.)

옛사람들이 격물(格物, 사물에 다가가) 궁리(窮理, 그 이치를 살핌)한 것은 일과 사물의 당연한 준칙과 법칙을 궁구(窮究,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는 역시 (그 이치를) 잘 살펴서 행동하기에 적합한 것이나 혹은 적절한 것을 찾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古人, 格物窮理,要就事物上窮個當然之則,亦不過只是窮到那合做處、恰好處而已.)

(주자는 도와 리를 구별한다고 이야기를 시작하였으나 이 설명의 중반 이후에는 온통 리에 대한 설명뿐이다. 그만큼 주자로서는 리가 중요한 사상적인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2) 리(理)와 성(性)의 구별

리와 성은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다.(여기에서 성性은 인간의 본성本性을 지칭한다.) 리는 바로 사물에 있는 리를 말한다. 반면에 성(性)이란 나에게 있는 리를 말한다. 사물에 있는 것은 바로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과 사물에 공통으로 공유하는 도리이다. 나에게 있는 것은 바로 리가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획득하여 나에게 있는 것을 말한다.(원문: 理與性字對說,理乃是在物之理,性乃是在我之理. 在物底便是天地人物公共底道理, 在我底乃是此理已具, 得為我所有者.)

(여기에서 주자는 리와 성을 구별한다고 하였으나, 사실상 리와 성은 같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것이 다른 점은 그것이 존재하는 위치뿐이다. 즉 사물과 타인에게 존재하는 것은 리이며, 나에게 존재하는 것은 성性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왜 주자는 타인과 나를 구분하여, 타인에게 존재하는 것은 리, 나에게 존재하는 것은 성性이라고 하였을까? 왜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은 성性이요, 사물에 존재하는 것은 리理라고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을까?
주자는 머리가 매우 명석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부터 내려오는 온갖 사상 서적을 섭렵하여 성리학이라는 철학 체계를 집대성하였다. 하지만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모으려고 노력하였고, 너무 많은 개념을 단순화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욕심 때문에 그는 가끔 논리를 비약시켰고, 가끔은 이렇듯 매끄럽지 못한 설명을 남겼다. 이러한 빈틈은 후세 학자들의 열띤 논쟁거리가 되었다.)

3) 리와 의(義)는 체(體)와 용(用)이다.

리와 의를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리는 체(體, 본체)요. 의(義)는 용(用, 작용)이다. (여기에서는 ‘상대적’이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는 의리義에 비추어보면 본체의 입장이다. 본체體라는 것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의리義에 비추어보면 리가 본체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의는 ‘작용’하는 것이다. 혹은 활용하는 것,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 몸에는 리라는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 이 리를 잘 활용하면 그 결과로서 의리義가 된다는 뜻이다.)
리란 사물에 있는 당연한 법칙 혹은 준칙이다. 의리는 이러한 리를 처리하는 까닭(즉 근거)이다. 그러므로 정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에 있는 것은 리이다. 그런데, 사물을 처리할 때는 의리義를 행한다.(원문: 理與義對說,則理是體,義是用. 理是在物當然之則,義是所以處此理者. 故程子曰, 在物為理,處物為義.)

‘리’는 성리학에서 ‘성즉리(性卽理, 성은 바로 리이다)’라는 대명제로 정리되었다. 주자의 ‘성즉리’ 이론에 대해서 진순은 다음과 같은 자기 스승의 설명을 전하고 있다.

성(性)은 곧 리이다.(이것은 주자학의 대명제다. 인간의 본성은 리, 즉 이치 그것이라는 것이다.-필자 주) 그런데 (인간의 본성을) 왜 ‘리’라고 말하지 않고 ‘성’이라 말했을까? 리란 범칭으로,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과 만물이 공적으로 함께하는 리를 말한다. 성이란 나에게 있는 리이다. 이 리는 하늘에서 받은 것으로 내가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성이라 한다.(원문: 性即理也. 何以不謂之理而謂之性? 蓋理是泛言, 天地間人物公共之理. 性是在我之理. 只這道理受於天而為我所有, 故謂之性.)

(주자는 왜 ‘내가 가진 것’, ‘나에게 있는 리’등의 표현을 썼을까? 그러한 표현 대신에 ‘인간이 가진 것’, ‘인간에게 있는 리’ 등으로 표현했으면 더 명쾌하지 않았을까? 인간에게 있는 ‘리’가 본성性이기 때문이다.

중국어로 ‘인간’은 인(人)이다. ‘인간(人間)’이라는 말은 근대에 만들어진 말로 주자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人)’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 말은 중국에서 타인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알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아(我, 나 혹은 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표현이 여기에서 미묘하게 혼란을 일으켜 타인의 성性은 리라고 부르고 오직 나의 성性만을 성性이라 부르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일으킨다. 그러나 주자가 말한 의미는 인간에게 있는 리는 그가 누구든지 ‘본성性’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리가 아니라, 주자의 주장이며 제안이다. 성리학은 이러한 제안, 즉 ‘성은 리다(性卽理)’는 가설을 받아들여야 성립된다.)

성(性)자는 생(生)자 변에다가 심(心)자를 덧붙여 쓴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고 있는 것은 마음 속에 담긴 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성(性)이라 부르는 것이다.(원문: 性字從生從心, 是人生來具是理於心, 方名之曰性.)
성의 큰 조목으로는 단지 인‧의‧예‧지 네 가지가 있을 뿐이다. 하늘이 명한 원(元)을 얻어 나에게 있는 것을 불러 인(仁)이라고 하고, 하늘이 명한 형(亨)을 얻어 나에게 있는 것을 불러 예禮라 하고, 하늘이 명한 이(利)를 얻어 나에게 있는 것을 일컬어 의(義)라 하고, 하늘이 명한 정(貞)을 얻어 나에게 있는 것을 일컬어 지(智)라고 한다.(원문: 共大目只是仁義禮智四者而已. 得天命之元,在我謂之仁, 得天命之亨, 在我謂之禮, 得天命之利, 在我謂之義. 得天命之貞, 在我謂之智.)

(『주역』에 보이는 ‘원형리정元亨利貞’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그런데 주자는 ‘원형리정’을 ‘인의예지’와 대응시켜 설명하고 있다.)

성(性)과 명(命)이란 본래 두 가지가 아니다.(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하늘에 있는 것으로 말하면 이를 명이라 하고,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말하면 이것을 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정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부여한 바를 명이라 하고, 사람이 받은 바를 성이라 한다.’ 라고. 주자는 ’원형리정은 하늘에 있는 도의 강상(綱常, 지켜야할 도리)이며, 인의예지는 인간에게 있는 성(性)의 강상이다(즉 인간에게 있는 본성이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소학』「제사」)라고 하였다.(원문: 性與命本非二物,在天謂之命,在人謂之性. 故程子曰, 天所付為命,人所受為性. 文公曰, 元亨利貞,天道之常. 仁義禮智,人性之綱.)(이러한 주자의 ’성즉리‘ 사상은 성리학 사상의 핵심이 되었으며, 주자학과 양명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사상이 탄생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 기

‘기(氣)’는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생명체가 활동하는 데 필요한 육체적, 정신적 힘
2) 사람에게서 나오는 어떠한 기운
3) 사람이 숨을 쉴 때 나오는 기운

1번의 뜻은 기운(氣運)을 말한다. 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힘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위기 따위로 알 수 있는 어떤 느낌이다. 혹은 만물이 나고 자라는 힘의 근원을 말한다. ‘기가 세다’, ‘기가 죽다’ 등의 말에서 사용하는 기는 2번의 기를 말한다.

이와 같은 ‘기(氣)’의 뜻에는 이기론에서 말하는 물질적인 존재인 ‘기’가 보이지 않는다. 중국 송대에 일어난 주자학, 즉 성리학에서 논의되는 이기론의 ‘기’는 사실상 특이한 ‘기’이다. 중국의 철학사상사에서도 그러한 ‘기’의 의미는 매우 한정적이고 편협하다. ‘기’는 송대 사상가들이 언급하기 이전에 이미 독자적인 뜻을 가지고 오랜 고대시대부터 긴 역사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의미와 뜻을 가지게 되었다. 송대 사상가들은 그러한 ‘기’를 수용하여, ‘리(理)’와 대립시키고 조화시키면서 송대의 신유학인, 성리학 사상을 만들어냈다.
여기서는 기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그것이 고대 때부터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이하 미조구치, 52-66참조)

1) 기(氣)는 선물로 주는 곡식이라는 뜻이었다.

허신의 『설문해자』에 설명된 기의 의미다. ‘기(氣)’는 선물로 주는 곡식 혹은 그 곡식을 손님에게 증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2) 기는 바람(風)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전국시대 말기부터 진한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기는 바람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에 바람은 이 세상 사방(四方)의 끝에 바람 신(風神)이 사는 데 그 신이 일으킨 바람을 뜻했다. 사람들은 이 바람이 농작물의 생육과 숙성에 깊이 관련 된다고 믿었다.

3) 하늘의 여섯 기(氣)

『좌전』소공 원년조에 나오는 것으로 육기(六氣)라는 표현이 있다. 여섯 개의 기는 음기(陰氣), 양기(陽氣), 풍기(風氣), 우기(雨氣), 회기(晦氣), 명기(明氣)를 지칭했다. 이 중에 회기(晦氣)는 어두운 기운을 말한다. ‘회(晦)’는 그믐, 어두움, 캄캄함의 뜻이 있다.

4) 생명력을 뜻하는 혈기(血氣)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좌전』, 『논어』 등에 ‘혈기’라는 말이 있다. 『좌전』(소공 10년조)에서는 “혈기가 있는 것은 모두 투쟁심이 있다”는 문장이 있다. 『논어』에는 색욕과도 관련된 표현으로 ‘혈기’가 사용된다.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사용된 표현이다. 『논어』에 등장하는 기식(氣息), 사기(辭氣, 혹은 어기語氣), 식기(食氣) 등도 ‘기(氣)’가 생명력을 의미했음을 보여 준다.

5) 기(氣)는 마음(心)과 대응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국시대 중기에 사용된 기(氣)의 뜻이다. 『맹자』에 나오는 말로 통솔자를 심지(心志), 피통솔자를 기(氣)로 표현한 문장이 있다. 여기에서 기는 신체에 충만한 기이다. 심지와 기가 통솔자와 피통솔자의 의미로 서로 대응한다. 『손자병법』(군쟁편)에서는 전투의 요점으로 장수의 마음(心)과 병졸의 기(氣)가 서로 대응된다. 아울러 마음(心志)은 이지적(理智的) 존재, 기는 비이지적 존재로 표현된다.

6) 하루의 네 가지 기를 나타내는 표현에 사용되었다.

『손자』와 『맹자』에 나오는 표현이다. 하루의 기(氣)는 네 가지가 있는데 조기(朝氣), 주기(晝氣), 모기(暮氣), 야기(夜氣) 등이 있다. 그리고 하루 중에 시간에 갈수록, 즉 조기→주기→모기→야기로 진행될수록 인간의 기는 에너지가 저하된다.

7) 기(氣)는 인체 내부의 구조를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맹자』, 『장자』 등에 표현된 것으로 인체의 중층적 구조를 기(氣) → 심(心 혹은 지志) → 언(言 혹은 이耳)으로 표현하였다. 당시 도가는 기를 더 근원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중시하였다. 『맹자』는 마음(心)을 도덕심의 근거로 생각하였는데 기가 그것을 동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기를 가지고 의(義)와 도(道)를 양육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호연지기(浩然之氣)’라 칭하였다.

8) 기(氣)를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맹자』가 집필된 전국시대 중기에 양기(養氣, 기를 기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호연지기’도 그 일종이다. 맹자는 덕으로 기를 기를 수 있고 좋은 기는 또 덕을 기를 수 있다고 보았다. 『좌전』(소공 9년)에는 음식물의 맛(味)이 기를 돌게 한다고 하였다. 이 시기에 호흡을 동반한 행기법(行氣法)이 언급되었으며, 『장자』에 호흡법과 함께 덕으로 기를 기르는 도인(導引)의 운동법이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기를 조작하는 기공법의 수련이 실천되었다.

9) 추연의 오행설은 덕과 기를 대응시켰다.

추연(鄒衍, 기원전 305~240)의 오행설에 기에 대한 개념이 보인다. 추연은 전국시대의 음양가(陰陽家)로 기존의 오행사상(五行思想)과 음양이원론(陰陽二元論)을 결합하여 ‘음양오행사상’을 구축하였다. 그는 인간의 내부에 잠재하는 오덕(五德)에 대응하여 오행(五行)의 기가 나타나는데, 오행의 기에 의거하여 실천하면 오덕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덕과 기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10) 만물에는 기가 공통의 구성요소로 존재한다.

『순자』(왕제편)에 표현된 말이다. 순자는 “물과 불에는 기가 있다. 식물에는 기와 생명이 있다. 동물에는 기와 생명과 지려(知慮, 지혜와 근심)가 있는데, 인간에게는 생명과 지려 이외에 예의도 있다”고 하였다. 그는 기(氣)가 만물 모두에 존재하는 구성요소로 보았다. 즉 만물은 기가 지탱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1)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기(氣)뿐이다.

『장자』(지북유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이 나올 즈음에 기의 내용이 분화하였다. 종래의 기에 서열을 붙이고 새로운 기를 창출하는 등 변화가 있었다. 『관자』‧『여씨춘추』 등에 보통의 기와는 다른 우수한 작용을 하는 정기(精氣)가 등장한다. 또 세계의 다양성은 기의 종류나 성질 그리고 차원 등의 차이에 의해서 설명되었다.

12) 기(氣)일원론의 등장

전국시대 말엽 이후에 존재론과 생성론이 출현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 『역경』(「계사전」상편)의 태극론이 있다. 태극(太極)→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의 구도이다. 여기에서 양의(兩儀)는 음양(陰陽)이며, 음양의 근원은 일기(一氣)라고 하였다. 또 이것을 우주의 근원이 되는 원기(元氣)라는 주장이 나왔다. 태극은 바로 원기를 뜻한다고 하여 ‘원기→음양→사시(四時의 氣)→만물’이라는 기일원론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기 일원론은 도가에게 전승되었다. 도가는 근원적인 실재와 이법(理法)으로서의 도(道)에 관심을 갖고 그 도와 현실 세계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기(氣)를 주목하였다. 그들은 기를 매개로 이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주의 시작과 만물의 생성을 기로 설명하는 우주생성론적인 기론이 탄생하였고, 인간의 생사를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 의한 것이라 보고 기를 길러서 생명을 온전히 할 수 있다고 하는 양생론적인 기론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나중에 송나라 시대 유학자들의 이기론(理氣論)으로 계승되었다(미조구치, 57)

‘기’의 개념 측면에서 보면 송대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 성립에는 5단계의 사상적 모색이 있었다.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미조구치, 63-67 참조)

1단계: 당대 불교의 사상적 모색

중국의 전통적인 본체론이나 생성론의 궁극적인 실체인 허무(虛無)나 원기(元氣)를 배척하고 불교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그것은 ‘불멸(不滅)의 진심(眞心)’과 생멸(生滅)의 망상(妄想)이 화합해서 형성된 아뢰야식(阿賴耶識) 인식론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원기(元氣)’는 인식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고 불교적인 존재론으로 대체하였다.

2단계: 도교의 사상적 모색

상청파 오균(吳筠)의 『현강론(玄綱論)』, 『신선가학론(神仙可學論)』 등에 보인다. ‘허(虛)-신(神)-기(氣)-형(形, 사람)’이라는 생성론을 제기하면서 그것을 ‘형(形)-기(氣)-신(神)-도(道, 신선)’로 거슬러 올라가는 실천론을 모색하였다.

3단계: 주돈이의 모색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새로운 모색을 제안했다. 그는 『역경』을 기본으로 삼고, 『노자』의 무극(無極)을 더하여 기의 생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무극(無極) → 태극(太極) → 음양(陰陽) → 오행(五行) → 만물(萬物)

이 과정 안에 그는 개개인이 실천해야 할 유교 도덕인 ‘인의중정(仁義中正)’을 배치하였다. 또한 실천 원리로서 ‘주정(主靜)’을 제시하였다. 각기 독립된 개념들이 『태극도설』안에서 하나의 체계적인 사상으로 정리된 것이다.

4단계: 장재의 모색

‘태극즉기론(太極卽氣論)’을 제시하여 도교의 허‧무의 생성론과 불교의 식(識)의 존재론을 비판했다. 그는 이 세계는 기가 모이고 흩어짐에 의해서 구성된다고 보았다. 세계 내의 존재를 태허(太虛)와 만물로 나누고 태허는 기 본래의 존재방식이 그대로 나타나는 상태이며, 만물은 엉키고 정체되어 기가 열화(劣化)된 상태라고 하였다. 본래의 성은 ‘천지의 성’, 열화된 만물의 성은 ‘기질의 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수양을 통해서 기질을 변화시켜 본래의 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5단계: 주희의 모색

남송시대에 산 주희, 즉 주자는 주돈이의 사상을 수용하고, 정이의 리 사상, 그리고 장재의 기 사상을 계승하여 성리학의 독특한 존재론을 구축하였다. 그는 이 세상이 ‘일기(一氣)-음양-오행’이라는 중층적이며, 동시 병행적으로 전개되는 기의 취산(聚散, 모이고 흩어짐, 혹은 집합과 해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운동 변화에는 일정한 항상성(恒常性)과 법칙성이 관찰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항상성이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성질’ 혹은 ‘여러 가지 조건이 바뀌어도 항상 같게 현상’을 말한다.
이 항상성은 리라는 개념으로 실체화, 구체화하였다. 특히 그는 리를 원래 무질서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는 기의 운동을 올바르게 규제하는 하나의 실재로 파악하였다. 아울러 다양한 사물에 내재하는 개별적인 리를 인정하고, 기의 존재란 하나의 리, 즉 태극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진 상태(分相)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사상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리가 먼저 존재하고 기가 그 뒤에 생겨난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의 본질로서 마음에 설정된 성(性)에 대해서는 ‘성즉리(性卽理, 성은 바로 리이다)’의 입장을 위하여 모든 사람은 리를 본성을 갖추고 있다(본연의 성)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심신(心身)을 구성하는 기와 질(형태를 지닌 기)에 맑고 탁함, 깊고 얕음의 차이기 있기 때문에 선악이 생긴다(기질의 성)고 하였다. 하지만 인간은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통해서 이 기질을 변화시켜 리를 완전하게 발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3. 군자와 성인

3. 군자와 성인

 

가. 군자

‘군자(君子)’란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보면 군자란 1) 학식이 높고 행실이 어진 사람, 2) 마음이 착하고 무던한 사람, 3)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군자는 또 ‘소인(小人)’과는 구분이 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군자와 소인은 서로 대응되는 존재이다. 그러면 ‘소인’은 어떤 사람인가?
사전을 찾아보면 소인은 다음과 같은 사람을 말한다.

1) 예전에, 신분이 낮은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던 말
2) 나이가 어린 사람
3) 키나 몸집이 작은 사람
4)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

이중에 1, 2, 3은 군자와 대응이 되는 사람이 아니다. 군자에 대응이 되는 소인은 4의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이다.
군자와 소인은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다. 군자이면서 소인이 될 수는 없다. 군자는 소인이 아니고, 소인은 또 군자가 아니다.
고대 중국에서 ‘군자’에 대한 논의나 군자에 대한 의미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을 모은 『논어』에 많이 나타난다.
『논어』에서 ‘군자’라는 말은 모두 107차례나 나타나는데 거의 대부분이 도덕적으로 ‘인격(人格)’이 높은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인격’이란 사람의 품격이나 자격을 말한다. 도덕적 인격이란 덕을 행하는 사람다운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공자는 또 ‘군자’라는 말 대신에 그것을 ‘성인(聖)’이나 ‘현인(賢)’으로 지칭하기도 하고 대인(大人), 성인(成人), 선자(善者), 인자(仁者) 등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소인’과 대조하면서 설명하기도 하였다.(이경무, 105)

공자가 말하는 군자의 상세한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군자는 개인의 인격 완성이나 자아실현을 추구하면서, 이를 위한 실천과 수양에 힘쓰는 사람이다.
2) 군자는 자신의 인격 완성으로부터 나아가 조화로운 인간관계 및 공동체의 건강성을 실현 또는 증진하고자 하며, 이를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자세와 태도를 확립하는 사람이다.
3) 군자는 우주 자연에 대한 체득을 지향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조화를 추구하면서, 인간과 자연‧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군자론은 이경무가 그의 연구논문 「군자와 공자의 이상적 인간상」에서 주로 『논어』에 제시된 공자의 군자에 대한 인식을 정리한 것이다.(이경무, 105-111)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군자란 1) 인격 완성과 자아실현 추구, 2) 실천과 수양 중시, 3) 조화로운 인간관계의 도모, 4) 공동체의 건강성 추구, 5) 우주 자연에 대한 체득 지향 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군자는 통치 계급의 세습 귀족을 호칭하는 말로 사용되다 일반적으로 통치자, 혹은 지배층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 말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소인(小人)이 있었는데 이 말은 피지배층을 의미했다. 하지만 공자는 ‘군자’라는 개념을 바꿔서 ‘인격자’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으며, 배움을 추구하는 모든 이, 혹은 덕이 있는 자를 군자로 부르기도 하였다. 아울러 소인은 서민이나 피지배층의 개념에서 인간적으로 졸렬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이경무, 111)

나. 성인

‘성인(聖人)’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로 사용된다.

1) 덕과 지혜가 뛰어나고 사리에 정통하여 모든 사람이 길이 우러러 받들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
2) 순교자나 거룩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은 사람 가운데 그 덕행이 뛰어나 공경을 받을 만하다고 교황청에서 특별한 심의 절차를 거쳐 공식적으로 선포한 사람

2번의 ‘성인’은 카톨릭 교단에서 말하는 성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성인의 의미을 살펴보면 1) 덕과 지혜가 뛰어난 사람, 2) 사리에 정통한 사람, 3) 모든 사람이 우러러 받드는 사람, 4)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보면 그가 말한 성인은 다음과 같다.
1) 성인(聖人)은 중(中)·정(正)·인(仁)·의(義)로 온갖 일을 안정시키고 고요함을 주로 하여 사람의 표준을 세웠다.(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 立人極焉)
2) 성인(聖人)은 천지와 덕을 함께하고(聖人與天地合其德) 해와 달과 그 밝음을 함께하고(日月合其明) 사계절과 그 차례를 함께하며(四時合其序) 귀신과 그 길함과 흉함을 함께 한다.(鬼神合其吉凶)

여기서 말하는 ‘성인’이란 존재는 어떤 것인가? 상당히 신비스러운 존재로 묘사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1) 중(中)·정(正)·인(仁)·의(義)로 온갖 일을 안정키는 사람
2) 고요함을 주로 하여 사람의 표준을 세운 자
3) 천지와 덕을 함께한 자
4) 해와 달과 그 밝음을 함께한 자
5) 사계절과 그 차례를 함께한 자
6) 귀신과 그 길함과 흉함을 함께한 자

주돈이는 이러한 성인 외에 군자와 소인을 따로 언급하고 있어, 성인은 인간들 중에 매우 특별한 존재로 정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별한 존재로서의 ‘성인’은 인간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며, 어떠한 존재일까? 미조구치 유조 등이 지은 『중국문화사전』을 보면 성인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다.(미조구치, 187)

1) 인간으로서 최고의 존재다.
2) 종교성을 내포한다.
3) 지극히 뛰어난 인간이다.
4) 이상적인 군주이다.
5)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이다.
6) 인격적인 완성자이다.
7) 천지의 도와 일체가 된 인물이다.
8) 문화의 창출자이다.
9) 높은 덕을 지닌 종교가이다.

성인을 나타내는 글자인 ‘성(聖)’자는 그 뜻이 ‘성인’, 혹은 ‘성스러운’의 의미다. 이 글자는 은나라 시대 갑골문에도 나타난다.

갑골문에 보이는 성(聖)

 

위에 보이는 그림 문자(갑골문)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데 유독 귀가 크다. 왼쪽 아래는 입(口)을 표현한 글자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을 그림 문자로 상징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성인(聖)’은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간 상고시대에는 야수의 발자국 소리를 조심스럽게 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시대가 더 진화하면서 신의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사람을 표현하는 한자 ‘성’이란 글자는 나중에는 그 뜻이 확장되어 ‘평범한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 ‘사회를 복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 ‘인류의 문명에 크게 공헌한 사람’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이경무, 113)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성인’이란 명칭은 일반화되었으며 또 다시 다양한 의미가 추가되었다.
공자는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도덕 인격으로 바로 이 ‘성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군자’라 불렀다. 성인이라는 말은 『논어』에서 처음 등장한다.(미조구치, 188)
『논어』 술이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성인을 나는 만날 수 없구나. 군자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좋겠다.(聖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君子者, 斯可矣)”(『논어』술이)

이 문장을 보면 성인은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왜 만날 수 없을까? 이미 사망하여 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성인은 옛 시대에 태어나 활동하던 위대한 인물을 가리킨다. 군자는 어떤가? 공자가 만나볼 수 있는 사람이다. 같은 시대에 살면서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공자가 생각하는 성인은 신화속의 인물인 요임금과 순임금 그리고 역사상의 인물인 백이(伯夷)와 이윤(伊尹) 등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만나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나중에 공자 제자들은 공자를 역시 ‘성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인에는 ‘처음부터 천하를 통치하는 권력자’라는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최고 통치자가 아니면 성인이 아니었다. 공자는 최고 통치자가 아니었으나 성인으로 추종된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공자의 이미지가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孔子)’라는 호칭에서 ‘자(子)’라는 단어가 붙는 것은 그가 ‘성인’이기 때문이다. 공자 이후 중국의 황제들은 공자의 권위를 이용하기 위해서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기도 하고 ‘대성지성 하는 시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대성지성문선왕’이란 시호는 원나라 무종이 내린 시호인데 16번째로 공자가 받은 시호였다. 거기에는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지극한 성인 문선왕(至聖文宣王)’이란 글자가 들어 있다.
『논어』 술이편에는 맨 처음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서술을 하지만 짓지는 않는다. 옛것을 좋아하여 믿고 좋아한다. 몰래 나를 노팽과 비교해본다.(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술(述)은 ‘지을 술’이다. 그 뜻은 짓다, 글로 표현하다, 말하다, 설명하다, 해석하다, 잇다, 좇다 등 다양하다. ‘작(作)’은 짓다, 만들다, 일으키다 등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술이부작’은 ‘만들지만 짓지 않는다’, ‘전해주기는 하지만 창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송나라 때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는 ‘술이부작’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술(術)은 옛것을 전하는 것이고, 작(作)은 처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作)은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고, 술(述)은 현자도 할 수 있는 것이다.(述, 傳舊而已. 作, 則創始也. 故作非聖人不能, 而述則賢者可及.)”(『논어집주』술이편)

이러한 성인의 개념은 성리학이 나타나면서 성인의 개념이 철학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의 개념은 그대로 전승되었으니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소위 성인 개념의 중층화, 내면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앞서 소개한 『태극도설』의 저자 주돈이는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성인은 보통사람들이 잘 배워서 도달할 수 있는 존재인가?”(『통학』‧「안자소호하학론顔子所好何學論」)

그는 공자보다 먼저 죽은 공자의 제자 안회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이런 의문을 가졌다. 안회는 어떤 관직도 없었으며 공자처럼 선왕(先王)의 도를 전한 공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그를 높게 평가하였으며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높고, 바람직한 수준의 학문에 도달했다. 결국 주돈이는 모든 사람들은 학문과 수양을 거쳐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미조구치, 193)
사실 송나라 시대에는 주돈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그 시대 유학자들, 즉 도학자들은 이러한 관념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었으며, 배움을 통해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도학파들의 핵심적인 사상이었다.(미조구치, 193)

그러므로 다시 『태극도설』로 돌아가서 주돈이가 “성인(聖人)은 중(中)·정(正)·인(仁)·의(義)로 온갖 일을 안정시키고 고요함을 주장하여 사람의 표준을 세웠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덕을 함께하고 해와 달과 그 밝음을 함께하고 사계절과 그 차례를 함께하며 귀신과 그 길함과 흉함을 함께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미 사망한 고대의 이상적인 인간을 말하기도 하지만 현세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돈이의 사상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에게 전해져 성리학 사상의 중요한 이론 바탕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 주자학자들에게 중요하게 되었을까? 송나라 이전의 시대는 중국에서 당나라 시대에 해당된다. 한나라 이후 위진남북조, 수나라, 당나라 시대는 불교의 시대였다. 이 시대의 특징은 또 분열과 혼란의 시대였다. 한나라 후기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염세적인 풍토가 전국에 퍼져나가고 전국의 젊은이들은 불교사찰로 몰려들었다. 불교는 이 세상 모든 것은 공(空)이며 이 허무한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운명, 즉 윤회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어 성불(成佛)을 해야한다고 호소하였다. 북송의 유학자들은 중국 사회가 혼란한 원인 중 하나는 불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에 대응하는 사상을 모색하고 있었다.
불교의 『열반경』은 모든 것은 불성(佛性,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축도생(竺道生, ?~434)의 ‘불성당유론(佛性當有論)’이나 ‘실개성불론(悉皆成佛論)’은 유명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 깨달으면 곧 부처다.
2) 불성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3) 극악한 성질을 가진 자도 부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당나라 중엽 선종이 퍼지면서 민중 속으로 더욱 널리 전해졌다.(미조구치, 194) 여기에서 유학자들이 말한 ‘배우면 성인도 될 수 있다’는 사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다만 주자학자들은 보통 사람들도 모두 성인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지속적인 배움과 수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뒤에 등장한 양명학자들은 ‘누구나 성인이다’고 주장하면서 거리를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 안에 ‘성인이 될 수 있는 본성(聖性)’이 담겨있다고 보았다. 결국 성인은 고대의 신적인 존재에서 양명학에 이르러서는 누구나 성인이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보통사람들도 성인이 되는, 개념상의 변화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음양과 오행

2. 음양과 오행

 

가. 음양

앞서 태극에서 소개하였는데, 주돈이는 음양을 태극과 결부하여 소개하였다. 그는 태극이 한번 움직이며 양(陽)이 탄생하며, 태극의 움직임이 극에 달하여 고요해지면 음(陰)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또다시 움직인데 한번 움직이면 한번 고요해지고 또 한번 움직이면 다시 고요해지고 하여 서로가 서로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
주돈이가 말하는 태극의 움직임은 우주 만물의 근본적인 리듬이다. 이런 리듬이 자연의 변화를 만들고, 이러한 자연 변화의 양상이 음양이며, 이 음양이 교대로 일어나는 활동을 통해서 오행이 생긴다.(안유경, 43쪽)
‘음양’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매우 철학적이다. 북송시대에 살았던 주돈이의 설명은 사실상 음양의 원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원래 음양의 ‘음(陰)’은 구름이 해를 덮은 것을 표현한 글자였으며 그런 뜻이었다. ‘양(陽)’은 해가 나온 것을 표현한 글자이다. 이것이 발전하여 ‘음’이 뜻하는 의미는 구름, 비, 어두움, 어두운 땅, 북쪽, 뒷면 등이 되었다. 반면에 ‘양’은 해가 나옴, 양지 바른 곳, 남향, 정면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미조구치, 873쪽)
춘추 전국시대 초기부터 중기 무렵에 각종 서적, 예를 들면 『좌전』, 『국어』, 『관자』등에서 등장하는 ‘음·양’이라는 글자는 보통 계절, 기후 등을 나타내며 ‘기(氣, 기운)’라는 글자와 함께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양기(陽氣), 음기(陰氣), 혹은 여름의 ‘기’로서 양(陽), 가을의 기로서 음(陰) 등이다. 또 음과 양이 두 가지만 서로 대립적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다른 글자들과 함께 나열되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조기(燥氣), 양기(陽氣), 습기(濕氣), 음기(淫氣)
2) 풍(風), 양(陽), 음(陰), 한(寒)

전국시대 말엽에 음·양은 도가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 인체를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계절과 시절의 기후 요인을 지배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나아가 하늘의 기(氣)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로 표현되거나 주재자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또 『여씨춘주』에 등장하는 사용례를 보면 음양이 천지를 대신하며,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관장하는 존재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음·양의 개념은 분류의 원리로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미조구치, 874-875)

성리학에서 음양의 개념은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주자의 제자, 남송의 진순은 귀신을 설명하면서 음양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진순, 195-198참조)

1) “귀신은 음양 굴신의 뜻이다.”
2) “귀신은 음양에 소속된다.”
3) “사람과 만물 모두에게 음양이 있는데, 이것이 모두 귀신이다.”

그의 상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귀신은 음양 굴신의 뜻이다.”

정자(程子, 북송의 유학자 정호와 정이)는 이렇게 말했다.
“귀신은 조화의 발자취다.”
여기에서 ‘조화의 발자취’라는 뜻은 음양오행이 하늘과 땅 사이에 나타나는 것으로 말한 것이다. 귀신은 천지간에 불쑥 불쑥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편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북송의 장재(張載, 1020년~1077년)는 이렇게 말했다. “귀신은 음양 두 기(氣, 기운)의 양능(良能)이다.” 여기에서 ‘양능’이란 타고난 재능을 뜻한다. 진순은 ‘양능’을 ‘두 기운으로 굴신(屈伸, 굽히고 펴고 혹은 물러나고 나타남) 왕래(往來, 가고 옴)가 자연스럽게, 즉 자유스럽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귀신은 음양 두 기운이 타고난 재능이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음과 양 두 기운이 타고난 재능은 귀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귀신’은 어떤 뜻인가? 사람들은 언뜻 유령과 같은 존재를 생각할 것이지만 진순이 인식하는 귀신은 그것이 아니다. ‘귀(鬼)’와 ‘신(神)’을 말한다. 진순은 귀(鬼)를 동사로 간주하여 ‘돌아가다’, ‘물러가다’라고 해석한다. ‘신(神)’은 ‘늘어나다’, ‘펴지다’, ‘확장하다’, ‘신장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진순이 말한 ‘귀신은 음양 두 기(氣)의 양능(良能)이다’라는 말은 바로 ‘물러가고 나타나는 것은 음양 두 기가 잘하는 일이다’라는 뜻이다.
(이상 진순의 설명 원문: 程子云, 鬼神者, 造化之跡. 張子云, 鬼神者,二氣之良能。二說皆精切, 造化之跡, 以陰陽流行, 著見於天地間言之. 良能, 言二氣之屈伸往來, 自然能如此。大抵鬼神只是陰陽二氣,主屈伸往來者言之.)

진순은 ‘귀신’을 설명하면서 귀신의 ‘신(神)’은 양(陽)의 영(靈)이며 귀(鬼)는 음(陰)의 영(靈)이라고 하였다. ‘영(靈)’이라고 말한 것은 자연스러운 굴신 왕래가 그처럼 활기차기 때문이다. 한 기운으로 말하면 바야흐로 신장되어 오는 기운은 ‘양’에 속하니 신(神)이며, 이미 굽혀서 되돌아가는 기운은 음에 속하니 귀(鬼)이다. 예를 들면 봄과 여름은 바야흐로 생장하는 기운이니, 양에 속한다. 그러므로 신(神)이며, 가을과 겨울은 물러가는 기운이니 음에 속하므로 귀(鬼)이다. 하지만 실제로 두 기운은 곧 하나이다.
(이상 원문: 神是陽之靈, 鬼是陰之靈。靈云者,只是自然屈伸往來,恁地活爾。自一氣言之,則氣之方伸而來者屬陽為神. 氣之已屈而往者,屬陰為鬼。如春夏是氣之方長, 屬陽為神. 秋冬是氣之已退, 屬陰為鬼. 其實二氣亦只是一氣耳.)

진순은 이렇게 귀신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음양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는 송나라 유학자들의 귀신 관념이기도 하고 음양의 관념이기도 하다. 특이한 점은 ‘귀(鬼)’라는 글자를 돌아가다는 뜻의 ‘귀(歸)’로 풀이하여 설명하였고, 신(神)이라는 글자를 ‘펴다(伸)’는 글자를 동원하여 설명한 점이다. 결국 주자학에서 귀신은 음양의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2) “귀신은 음양에 소속된다.”

천지간에는 음양이 아닌 것이 없다. 즉 음양으로 가득차 있다. 음양은 어느 곳에나 있으며, 귀신 또한 어느 곳에나 있다. 귀신의 신(神)이란 신장함(伸, 폄, 늘어남)이라는 뜻이다. 늘어난다는 것은 뻗어나가는 기운을 말한다. 귀(鬼)란 돌아가는 것(歸)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물러가는 기운을 말한다.(원문: 天地間無物不是陰陽,陰陽無所不在,則鬼神亦無所不有.大抵神之為言伸也,伸是氣之方長者也, 鬼之為言歸也,歸是氣之已退者也.)

하늘과 땅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하늘은 양(陽)에 속하니 신(神)이다. 땅은 음에 속하니 귀(鬼)이다. 사계절을 가지고 말한다면 봄과 여름은 신장된 기운으로 신(神)에 속하고, 가을과 겨울은 물러가는 기운으로 귀(鬼)에 속한다. 주야로 나누어 본다면 낮은 신이고, 밤은 귀이다. 해와 달로 말한다면 해는 신이고, 달은 귀이다. 또 천둥이 치고 바람과 비가 대지를 윤택하게 하는 것은 신장되는 기운이니 신에 속하고, 수렴된 후 편안하게 움직이지 않고 발자취가 없는 것은 돌아가는 기운이니 귀에 속한다.(원문: 自天地言之,天屬陽,神也. 地屬陰,鬼也.就四時言之,春夏氣之伸屬神. 秋冬氣之屈屬鬼. 又自晝夜分之, 晝屬神,夜屬鬼. 就日月言之,日屬神,月屬鬼. 又如鼓 之以雷霆,潤之以風雨,是氣之伸屬神. 及至收斂後, 帖然無蹤跡,是氣之歸屬鬼.)

진순이 이렇게 귀신의 귀(鬼)를 귀(歸, 돌아감, 물러남)으로 풀이하고, 귀신의 신(神)을 신장함(伸) 혹은 늘어남으로 해석하여 자연현상에 결부시키는 것은 다소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예를 들면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것은 신(神)에 속하고 조용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귀(鬼)에 속한다는 점이나 해는 신(神)이고 달은 귀(鬼)라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통해서 삼라만상의 자연현상을 하나의 원리 즉 귀(鬼, 혹은 歸)와 신(神 혹은 伸)으로 종합, 수렴하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주자학, 즉 성리학이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진순은 또 이렇게 귀신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하루를 가지고 말한다면 이른 아침에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은 신(神)이다. 그런데 정오 이후에 점차 기울어가는 것은 귀(鬼)이다. 한 달을 가지고 말한다면, 달이 초삼일에 솟아오르는 것은 신(神)이요, 15일 이후에 기울어가는 것은 귀(鬼)이다. 초목에 가지와 잎이 돋아나는 계절은 신(神)이요, 가지와 잎이 쇠퇴하여 떨어지는 계절은 귀(鬼)이다. 조수가 밀려오는 것은 신(神)이요, 밀려 나가는 것은 귀(鬼)이다.(원문: 以一日言之, 則早起日方升, 屬神, 午以後漸退,屬鬼. 以一月言之,則月初三生來屬神, 到十五以後屬鬼. 如草木生枝生葉時屬神,衰落時屬鬼. 如潮之來屬神, 潮之退屬鬼.)

이렇게 설명하고 진순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는다.
“이렇게 신장이 되는 기운은 모두 양이고, 신(神)에 속하며, 퇴보하는 기운 즉 돌아가고 움츠려드는 기운은 모두 음이며 귀(鬼)에 속한다. 옛 사람들이 귀신에 대해서 한 논의는 대개 이와 같다. 스스로가 이를 체득하고 탐구해야할 것이다.(凡氣之伸者皆為陽,屬神. 凡氣之屈者皆為陰,屬鬼. 古人論鬼神大概如此,更在人自體究.)

진순은 이렇게 자연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귀·신의 원리를 스스로 체득하고 규명하라고 권한다. 이것은 결국 주자의 가르침이며,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탐구방법이다. 아울러 주자학자들이 실천을 중시하는 점도 이러한 설명에서 발견할 수 있다.

3) “사람과 만물 모두에게 음양이 있는데, 이것이 모두 귀신이다.”

「예운」편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음양이 교류하고 귀신이 모여 있다.”
이 말은 참으로 성현다운 말이다. 한나라 시대의 유학자로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원문: 禮運言, 人者陰陽之交, 鬼神之會. 說得亦親切, 比真聖賢之遺言, 非漢儒所能道也)

사람은 음양의 두 기운을 받아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 몸은 음양이 아닌 것이 없다. 기운은 양이요, 혈액은 음이다. 맥락은 양이요, 육체는 음이다. 머리는 양이요, 발은 음이다. 상태는 양이요, 하체는 음이다. 언어와 침묵, 눈을 뜨고 감는 것, 호흡을 들이쉬고 내 쉬는 것, 손발을 펴고 굽히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음양으로 나누어지는 것이지, 사람이 스스로 이처럼 하는 것은 아니다. 만물 모두가 그렇다.(원문: 蓋人受陰陽二氣而生, 此身莫非陰陽. 如氣陽血陰, 脈陽體陰, 頭陽足陰, 上體為陽, 下體為陰. 至於口之語默, 目之寤寐, 鼻怠之呼吸, 手足之屈仲, 皆是陰陽分屬, 不待人如此. 凡萬物皆然,)

『중용』에 이런 말이 있다.
“만물의 몸체가 되어 남김이 없다.”(제16장)
이 말은 음양의 두 기운이 만물의 몸체가 되어있는데 그것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어느 한 물건이라도 음양 아닌 것이 없다. 이는 바로 어느 한 물건이라도 귀신이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원문: 中庸所謂, 體物而不遺者, 言陰陽二氣為物之體而無不在耳. 天地間無一物不是陰陽, 則無一物不是鬼神.)

나. 오행

‘오행(五行)’은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한다.
앞서 소개한 동중서의 <태극도설>에서 오행은 어떠한 존재일까? 그것은 음(陰)과 양(陽)이 세워진 뒤에, 양이 변화하고 음이 결합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수(水, 물)·화(火, 불)·목(木, 나무)·금(金, 쇠)·토(土, 흙) 등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다섯 개의 기(氣) 즉 기운이 순차적으로 퍼지면 네 계절이 바뀌면서 운행한다. 오행의 다섯 가지 요소는 각각 자기만의 독특한 성질이 있다. 이 오행은 만물을 생성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되는데, 1) 무극의 진리, 2) 음양의 이기(二氣), 3) 자신의 정기(精氣)를 묘하게 섞고 합하여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먼저 만들어 낸 뒤, 최종적으로 만물을 낳고 그것들을 무궁하게 변화시켜나간다. 이것이 주돈이가 설명하는 오행의 역할이다.
‘오행’은 중국 고대에 형성된 개념이었다. 고대부터 다양한 해석과 설명이 가해지면서 주돈이의 오행설까지 발전된 것이다.(미조구치, 875-885참조)
주자는 오행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음양은 기이다. 오행은 질(質, 바탕)이다. 질이 있어야 사물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행은 질이지만 또한 오행의 기가 있어야 비로소 사물이 만들어 질수 있다. 그러나 음양의 두 기가 나뉘어 다섯이 되는 것이니 음양의 밖에 별도로 오행이 있는 것은 아니다.”(『주자어류』상, 권1)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천지가 만물을 낳은 것은 음양·오행에 불과하지만 오행은 실로 하나의 음양이다.”(『맹자혹문』권1)

모든 사물은 음양과 오행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음양과 오행은 일체 이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다. 음양 외에 달리 오행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주자는 음양은 ‘기’이고, 오행은 ‘질’이라고 하였다. 기(氣)와 질(質)은 어떻게 다른가? 기가 맑은 것은 기가 되고 탁한 것은 질이 된다. 지각 운동은 양의 작용이 되고, 형체는 음의 작용이 된다. 주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들의 지각(知覺)운동은 깨끗하여 양이 되는 기가 작용하고, 뼈나 살 그리고 털 등의 형체는 탁하여 음이 되는 기, 곧 질이 작용한다.(오하마, 122참조)

주자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설명한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서 음양과 오행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음양이 있으면 한 번은 변하고 한 번은 합하여 오행을 이룬다. 그러나 오행은 그 질(質)이 땅에 갖춰진 것이고, 그 기는 하늘에서 운행한다. 질을 가지고 그 발생 순서를 말하면 수→화→목→금→토이다. 수와 목은 양이고, 화와 금은 음이다. 기를 가지고 그 운행의 순서를 말한다면 목→화→금→토→수이다. 목과 화는 양이고 금과 수는 음이다. 통합하여 말하면 기는 양이고 질은 음이다. 또 교차하여 말하면, 동(움직임)은 양이고 정(고요함)은 음이다. 대개 오행의 변화는 다 할 수 없는데 까지 이르는데, 가는 곳마다 음양의 도(道)가 아닌 것이 없다.”(원문: 有陰陽, 則一變一合而五行具. 然五行者, 質具於地, 而氣行於天者也. 以質而語其生之序, 則曰水ㆍ火ㆍ木ㆍ金ㆍ土, 而水ㆍ木, 陽也, 火ㆍ金, 陰也. 以氣而語其行之序, 則曰木ㆍ火ㆍ土ㆍ金ㆍ水, 而木ㆍ火, 陽也, 金ㆍ水, 陰也. 又統而言之, 則氣陽而質陰也. 又錯而言之, 則動陽而靜陰也. 蓋五行之變, 至於不可窮, 然無適而非陰陽之道.)

주자의 오행에 대한 설명은 이렇듯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더 발전시킨 것이다. 주자는 기와 질을 가지고 오행을 설명하였다. 기는 양이고, 질은 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는 하늘에서 운행하고 질은 땅에서 갖추어진 것이다.
주자학에서 설명하는 음양과 오행의 관계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오하마, 124 참조)

음양의 음은 음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음양을 가지고 있다. 양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그 가운데에 또 음양이 있다. 남자가 양에 속한다고 해도 그는 음을 가지고 있다. 여자가 음에 속한다고 해도 역시 양을 가지고 있다. 사람 몸의 기는 양에 속하지만 기에는 음양이 있다. 피는 음에 속하지만 그 피에는 음양이 모두 존재한다.
오행도 마찬가지다. 하늘이 맨 처음 물(水)을 낳는 것은 양이 음을 낳는 것과 같지만 물속에는 또 음과 양이 있다. 땅이 두 번째로 불을 낳는 것은 음이 양을 낳는 것과 같지만, 불안에는 역시 음과 양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오행에도 음과 양이 있으며, 음이라고 분류되는 물(水)에도 음과 양이 있고, 양으로 분류되는 불(火)에도 음양이 있다. 음양과 오행은 이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자학에서 말하는 이러한 음과 양의 구분이나 분류는 과학적인 것인가?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주자학을 논할 때 주의할 점이다.

황준연과 송석구의 저술 비교2 – 저작 의도와 주장

#8. 황준연과 송석구의 저술 비교2 – 저작 의도와 주장

3.4 저자는 왜 이 책을 썼는가?

황준연의 『율곡철학의 이해』는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 『율곡의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 『성학집요』를 중심으로』)을 바탕으로 집필한 것인데, 일반 독자들이 알기 쉽게 풀어쓴 것이다. 체계도 일부 바꾸고 용어를 읽기 쉽게 수정하였으며 일부 내용, 예를 들어 유교의 학문관, 율곡의 생애, 그리고 율곡 사상 형성의 역사적 배경 및 경세 사상 등은 추가로 보완했다고 한다.(5쪽)
저자는 이 책을 내놓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율곡이 생각하는 학문이란 문자를 배워서 일상생활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능력을 길러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미사어구만을 자랑하는 현학적인 ‘말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학문을 통하여 철저히 실질적인 효과가 있기를 소망하였다. 이와 같은 율곡의 정신을 이 시대에 계승하려는 것이 필자의 일관된 생각이고, 또한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다.”(4쪽)
율곡에 대해서 실천을 전제로 한 학문을 추구했던 인물로 소개하고 그러한 실천 정신을 이 시대에 계승하고자 하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이 책의 저술 동기라고 한다.
저자는 「지은이의 말」에서 율곡의 철학 이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도 피력하였다.
“율곡의 이론은 당시 우리의 현실과 직결되어 있으며, 그의 주장은(취사선택이 필요한 일이지만) 오늘날 현대인에게도 적실(的實, 틀림없이 확실)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의 주장 속에는 이 시대의 어떤 개혁주의자보다도 더욱 절실한 개혁 의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의지는 고도한 철학성과 함께 언어의 차원을 넘어서는 실천성을 수반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도 적용 가능한 율곡의 사상에는 현대의 어떠한 개혁주의자보다도 더 절실한 개혁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또한 거기에는 고도의 철학성과 실천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율곡의 사상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율곡의 저서는 한문으로 이루어 졌다. 이 점에 대해서 황준연은 율곡의 한문은 중국인의 한문, 즉 ‘중국어’가 아니라 한국인의 한문으로 이루어졌으며 유럽의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도 라틴어로 글을 썼지만 네덜란드의 학문적인 업적으로 평가를 받는다고 소개하였다. 아울러 율곡의 글은 중국 유교사상의 테두리 안에 있으나 한국인으로서 사유의 독창성이 돋보인다고 주장하고, “시대가 무한 경쟁을 향하여 숨 가쁘게 치닫고 있는 이때에, 이제는 우리 것(國學)을 개발하여 세계에 내놓을 때가 아닐까? 가령 어떤 한국인이 칸트의 철학 사상을 연구하여 독일의 전문가와 경쟁할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시대는 학문의 수입 차원을 넘어서 우리 것의 수출을 요구하는 때로 접어들고 있으며, 지성인들의 각성이 크게 요구되는 때이다”(3쪽)라고 주장하였다.
저자는 이탈리아의 국립 동양학대학에서 2년간 한국어 및 한국 사상을 강의한 바 있으며, 중국 산동(山東) 사회과학원 유학연구소 객원교수, 중국 섬서(陝西)사범대학 중국사상문화연구소 방문학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Berkeley) 중국학연구소 방문학자 등 자격으로 해외 학술계 방문 경험이 적지 않다. 또 그는 영문 공저로 Reader in Korean Religion(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1993)을 출판한 바 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황준연은 율곡의 철학사상이 바로 그러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한편 송석구 저 『율곡의 철학사상』은 어떤 계기로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가? 저자는 율곡 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불교에도 조예가 깊은 학자다. 그의 저서 중에는 앞서 소개하였듯이 『한국의 유불사상』(1997), 『불교와 유교』(1993) 등 불교 관련 서적도 있다. 그리고 그는 불교를 중시하는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머리말에서 그는 율곡에게 ‘이상한 매력’을 느껴왔다면서 다음과 같이 율곡에 대해서 소개했다.(7-8쪽)

율곡은 철저한 유가출신이면서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읽고 어렵다는 선수행(禪修行)을 하였다. 율곡이 어느 스님(僧)과의 문답에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소리개가 날아 하늘에 오르고, 불고기가 못에서 뛰어 노는 것은 색(色)이냐 공(空)이냐?”
스님이 대답했다.
“비색(非色), 비공(非空)은 진여체(眞如體)다. 어찌 이 시에 비할 수 있겠느냐”
율곡이 응답했다.
“이미 언설이 있었으니 바로 경계(境界)다. 어찌 체(體)라고 하겠느냐? 만일 그렇다면 유가의 묘처(妙處)는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이요. 불씨의 도는 문자 밖에 있지 않는 것이다.”
이상의 글을 읽고 나서 나는 더욱 율곡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가 율곡에게 빠져든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자 송석구는 또 율곡이 어떤 성리학자들 보다 ‘입지(立志, 뜻을 세움)’를 중시했고 입지가 바로 서야 모든 일이 성실하게 이루어진다고 확신하였다는 점도 지적하였다.(8쪽) 율곡이 말하는 입지란 ‘성인(聖人)’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말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불교식으로 풀이하자면 ‘발원(發願)’이며 ‘부처’가 되겠다는 의미이다. 율곡의 많은 사상 중에서 이러한 점을 주목한 것은 역시 불교도로서 율곡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떤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 적이 있다.
“다른 종교를 넘나든 경험이 없기에 나는 불교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불교 속에 살았다는 뜻은 나의 팔십 평생의 역사 속에 명멸되었던 슬픔과 기쁨, 고뇌와 좌절, 성공과 실패가 모두 불교의 믿음에 의존해서 극복되었기 때문이다.”(<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2020.12.03.)
이렇듯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는 유학자 율곡의 철학을 깊이 연구 했는데, 그 계기가 율곡의 불교도적인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율곡의 사상적인 진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원래는 율곡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구상을 하였으나 율곡의 사상만으로 내용이 방대하여 생애 부분은 제외하였다고 한다. 율곡의 생애는 이전에 나온 선행연구로 미루고 자신은 율곡의 철학사상에 집중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또 ‘철학사상’이라고 책 이름을 붙인 것은 순수한 성리학설과 그에 따른 윤리학설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저자는 이 책에서 특히 율곡이 “주기적(主氣的)이면서 성리(性理)의 의리적(義理的) 측면을 어떻게 수기(修己)에서 적용되었는가를 해명하고자 하였다”고 한다.(9쪽)
송석구의 책 『율곡의 철학사상』은 1984년에 출판되었는데 이보다 2년 뒤인 1986년에 그는 『송석구 교수의 율곡철학 강의』(예문서원, 2016)의 초판서문(1986년 12월 집필)에서 다음과 같이 율곡 철학에 대해서 소개한 바 있다.
“이제부터가 율곡을 통하여 한국적 성리학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첫 단계의 작업의 시작이라고 본다. 율곡성리학의 특성이 그가 정주성리학의 모방이 아니라 그 자신 성리학에 영향을 주었던 불교적 체계에도 이미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착안할 때 한국적 성리학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시사되는 바가 많다고 보인다.”(7쪽)
율곡 철학에 한국적 성리학의 독자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아울러 율곡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그러한 특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하였다. 참고로 예문서원에서 출판한 『송석구 교수의 율곡철학 강의』는 1984년 중앙일보사에서 출판한 『율곡의 철학사상』과 내용의 거의 동일하다. 다만 목차 구성이 다소 변경되었으며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한자를 대폭 줄이고 어려운 용어를 쉽게 바꿔서 편집한 것이다. 요즘의 젊은 독자들에게 1984년본 『율곡의 철학사상』은 한자와 한문으로 된 원문이 많아 거의 외국서적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송석구 교수의 율곡철학 강의』를 읽을 것을 권한다.

3.5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황준연이 『율곡철학의 이해』에서 주장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해보기로 한다.

1) 율곡에게 성학(聖學)의 의미는?
2)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의 비교
3) 율곡은 학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4) 율곡의 태극론은?
5) 율곡의 이기론
6) 율곡의 사단 칠정론
7) 율곡의 심성론
8) 정치에 대한 율곡의 기대
9) 율곡이 원하는 사회

1) 율곡에게 성학(聖學)의 의미는?

황준연의 『율곡철학의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성학(聖學)’이다. 그는 율곡 철학의 가장 핵심사상으로 바로 이 ‘성학’을 주목하고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성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율곡에게) 학문이란 자기 자신을 닦고 타인을 다스리는 이른바 ‘수기치인’의 방법을 통하여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이와 같은 학문은 곧 유교의 특징이며, 이를 ‘성학(聖學)’이라고 부른다.”(18쪽)
율곡도 마찬가지였지만, 유학자가 ‘학문을 하는 이유는 도덕적 수양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고 군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통하여 성숙한 인격을 갖춘 군자는 도를 밝혀서 세상에 봉사하고자 한다. 유학에서는 이를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고 표현한다. 즉, ‘내성(內聖)’이란 학문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는 길이며, ‘외왕(外王)’이란 도를 밝혀 세상을 구제하는 길즉, ‘밖으로 제왕(帝王)의 길’을 말한다.(13쪽) 유학에서는 이와 같은 의미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용어도 함께 사용되는데, 이는 ‘자기 자신을 닦고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내성외왕’이 제왕의 학문이라면, ‘수기치인’은 군자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14쪽)

2)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의 비교

저자는 제2부 제5장 ‘율곡 성학의 구조와 내용’과 제6장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에 대한 비교 검토’에서 두 성학 관련 저술을 비교하였다. 제5장은 율곡의 『성학집요』를 분석하고, 제6장은 퇴계의 『성학십도』를 분석한 것이다. 이 두 책에 대한 비교 결과는 제6장 제2절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저자는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는 한국 성리학의 빛나는 업적’이라고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다.
“유교의 이상이 ‘수기치인’의 개념으로 대표된다면 퇴계의 『성학십도』는 ‘수기’의 결정본이요, 율곡의 『성학집요』는 ‘수기와 치인’의 총화이다. 그리고 퇴계는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경으로써 그 정신세계를 일관하였으며, 율곡은 ‘경’도 중시하였지만 『중용』의 입장에서 ‘성(誠)’을 보다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퇴계의 『성학십도』가 중국 성리학의 한국적인 수용 또는 소화라고 볼 수 있고, 율곡의 『성학집요』는 중국 유학의 집약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212쪽)
일반적으로 퇴계의 사상이 중국 유학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고, 율곡의 사상은 한국적인 입장에서, 즉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변화를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저자는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었다. 비록 성학 관련 저술의 비교를 통한 결론이지만 퇴계의 사상에 한국적인 해석이 더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3) 율곡은 학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태도를 지적하였다. 하나는 율곡이 학문적인 목표를 ‘성인의 경지(聖域)’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40세의 나이에 완성한 『성학집요』라는 저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율곡은 거기에서 성왕(聖王)이 되는 학문을 권장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기를 주장하였다. 다른 하나는 그가 여러 가지 학문에 대해 광범위한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율곡은 불교나 노자 그리고 양명학에 대해서도 ‘일단 선입견을 유보하고, 허심탄회한 심정으로 접근’하였다.(51쪽)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율곡은 학문적 입장에서는 앞선 선비들의 학설을 묵수하는 태도를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았고, 자신이 평생 추구하였던 학문의 대상인 주자의 유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대했으며, 여러 학문 분야에 있어서도 편견이 없이 공평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저자는 주장하였다.(58쪽)

4) 율곡의 태극론은?

저자는 율곡의 태극론이 “정이천과 주자의 학설을 좇아서 ‘기(氣)’보다는 ‘이(理)’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았는데, 다음과 같이 율곡의 견해를 정리하여 제시하였다.(87쪽)
가) 우주의 시원에 있어서 동정(動靜)이전의 기운, 즉 기(氣)란 없다. 다만 이치(理)로서 태극만이 존재한다.
나) 공허하고 광막하여 조짐이 없는 것은 ‘이치’라고 이름할 수 있고, 이것이 음양·동정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5) 율곡의 이기론

먼저 저자는 노사광의 『중국철학사』(제3권, 상, 삼민서국, 1981)에 근거하여 주자의 이기론을 정리하였다. 주자는 리와 기가 ‘존재 자체만의 측면에서 볼 때는 확연하게 구분될 수 있지만, 그 운행의 동작 상태에 있어서는 상호 분리되지 않는 것’(91쪽)이라고 하였는데 율곡은 리와 기가 개념적으로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로 구분된다는 주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리와 기가 동작이 없는 존재 자체든 혹은 동작이 있는 운행 중이든 간에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견해를 취한다. 이 점은 율곡의 이기론이 주자와 다른 점이다.
아울러 율곡은 리기가 “그 존재에 있어서건 혹은 그 동작에 있어서건 두 가지 물건으로 파악하지 않고 ‘서로 떠날 수 없음’(不能相離)을 강조”(91쪽)하였다. 또한 저자에 따르면, 퇴계가 리와 기가 상호간에 발용한다고 주장한 것(理氣互發說)에 반대하여 율곡은 이기 상호간의 발용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91-92쪽)
저자는 율곡 이기설의 특징으로 이른바 ‘이기지묘(理氣之妙)’를 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율곡은 주자나 화담(서경덕) 그리고 퇴계 등에 비하여 이기의 절충을 강조하여 그 묘합(妙合)의 논리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불교적인 중도(中道)의 논리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저자는 그 근거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구절을 소개하고 형상이 있는 현상 세계와 형상이 없는 본체 세계가 서로 통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중도의 세계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곡의 이기론도 리와 기가 서로 떠나지 않고, 서로 섞이지 않는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중도’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것이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기지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95쪽)
저자는 율곡의 이기론 중에 ‘이통기국(理通氣局)’의 사상에 대해서도 한 절을 설정하여 상세하게 논하였다. 그는 ‘이통기국’의 사상에 대해서 율곡이 스스로 ‘독창적’인 것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언어 표현상의 독창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주자가 이미 ‘리는 같고 기는 다르다(理同氣異)’라는 유사한 표현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 율곡의 사단 칠정론

퇴계는 사단과 칠정은 각기 그 유래하는 바가 있는데, 사단은 ‘리’에서, 칠정은 ‘기’에서 각각 발동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퇴계의 학설을 거부하고 칠정 안에 사단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는 퇴계와 사단칠정과 관련된 논변을 하였던 고봉의 주장이었다. 율곡은 고봉의 주장을 수용하여 사단 칠정의 문제를 집대성하였다.(111쪽)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율곡에 이르러 이러한 문제가 집대성될 수 있었던 것은 1) 율곡이 유달리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며, 2) 시대적으로 퇴계와 고봉의 다음에 나와서 두 학자의 학설을 충분하게 검토할 만한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7) 율곡의 심성론

사람의 마음(心)과 본성(性)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제4장 제4절에서 저자는 이렇게 묻고 다음과 같이 간략히 율곡의 심성론에 관한 기본 입장을 정리하였다.
“(율곡의) 심성론이 문제는 마음(心), 본성(性), 정(情), 뜻(意)의 관계와 인심(人心), 도심(道心)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들 개념은 모두 동양철학의 인성론이 우주론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만큼, 당연히 ‘이기’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112쪽)
율곡의 심성론도 바로 율곡이 주장하는 이기론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율곡의 심성론을 『성학집요』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마음의 본체(心之體)는 본성(性)이요, 마음의 작용(心之用)은 정(情)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자는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며, 후자는 이미 마음이 발동하여 나타난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음은 본성, 정, 뜻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마음을 발동한다고 말할 때는 ‘기(氣)’를 가리키는 것이며, 발동하게 하는 까닭은 곧 ‘리(理)’ 때문이다”(114쪽)
아울러 저자는 율곡의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에 대해서 먼저 퇴계의 이론과 다소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율곡은 사단이 도심인 것은 가하나 칠정은 인심 도심을 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120쪽)고 지적하였다. 퇴계는 인심은 칠정이 되고, 도심은 사단이 된다고 하였다.

8) 정치에 대한 율곡의 기대

저자는 제8장 제1절에서 정치에 대한 율곡의 기대에 대해서 두 가지 사항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하나는 1) ‘시대파악’이며 다른 하나는 2) ‘여론을 중시함’이다. 여기에서 시대파악이란 율곡이 파악한 당시 시대상을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율곡은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한마디로 일대 개혁, 즉 경장(更張)이 필요한 때라고 보았다. 그가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그 시대가 이른바 ‘해묵은 집’이나 ‘기운이 다해버린 노인’과 같은 상태로 이해했기 때문이다.(226쪽)
즉, 그는 자신의 시대가 쇠퇴기에 들어섰다고 진단하고, 철저히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아울러 ‘개혁’이야 말고 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인식 내용은 그의 『동호문답』이나 『만언봉사』 그리고 각종 상소문에 잘 제시되어 있다.
저자에 따르면 율곡은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여론, 즉 언로의 개방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은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비판의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현명한 임금은 백성의 귀를 자신의 귀로 삼고, 백성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삼아서 잘 듣고 잘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31쪽) 이와 같이 언로를 열어서 좋은 의견을 잘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민의를 수렴하여 국정에 반영하여야 좋은 정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에 따르면 정치에 대한 율곡의 기대는 “왕도 정치의 실현이라는 대전제를 그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현실에 대한 올바른 진단과 그에 따른 언로의 확충을 필수 조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건이 확보될 때 비로소 각종의 시책이 효과적으로 실천될 수 있는 것”(232쪽)이기 때문이었다.

9) 율곡이 원하는 사회

결국 율곡이 원하는 사회는 어떤 것인가? 저자에 따르면 율곡은 1) 기강이 확립된 사회이며, 2) 평등이 확보된 사회였다.
당시 율곡이 처했던 사회는 권세 있는 간사한 신하들이 나라를 버려놓았으며, 선비들은 기운이 꺾인 채로 입을 다물고 살아가는 상태였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회 및 정치 현실이 매우 비관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율곡은 왕을 중심으로 기강이 확립된 사회를 희망하였다.(237쪽)
그리고 저자는 율곡이 사람을 쓰되 ‘그 출신을 묻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신분 제도에 따라서 출세 길을 달리하던 당시 사회에서 율곡의 이와 같은 주장은 매우 혁신적이며, 동시에 그가 바람직한 사회란 평등이 확보된 사회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현대적인 평등 관념과 완전히 일치된 주장은 아니나, 저자는 “그 시대에는 이와 같은 평등 의식의 소유자마저 드물었다는 점에서 그의 선구자적 역할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240쪽)

한편 송석구 저 『율곡의 철학사상』은 율곡 철학에 대해서 1) 태극론, 2) 이기론, 3) 심성론, 4) 실천론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여기에서는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룬 태극론, 이기론, 심성론 부분에서 저자가 율곡 철학에 대해서 어떤 주장을 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태극론

저자가 소개하는 율곡의 태극론은 앞서 살펴보았던 황준연의 주장과는 다소 다르다. 황준연은 율곡의 태극론이 ‘기(氣)’보다는 ‘이(理)’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고, 우주가 처음 시작한 때, 즉 동정(動靜)이전에 리(理)로서 태극만이 존재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송석구는 율곡의 태극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가. 율곡의 인식에 따르면, 『주역』 계사전의 ‘태극이 양의(음양)을 낳았다(太極生兩儀)’는 말은 마치 태극에서 음양이 발생한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태극에서 음양이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음양은 본래 있는 것이다.(11쪽) 즉 그것이 어느 때에 생겨한 것이 아니다. 즉, 기와 리가 함께 있었다.(24쪽)

나. 태극과 음양은 본래부터 함께 있는 것이기 음양이 없는데 태극이 홀로 있을 수 없다. 태극이 있으면 음양이 이미 있으며 거기에 항상 태극이 있음으로 태극이나 음양이 독립적으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다.(12쪽)

다. 율곡의 태극론은 기만 존재하는 ‘형이하(形而下)’에 떨어지지 않았고, 또 태극이 음양을 떠나 있다는 ‘리’ 유일론에도 떨어지지 않았다.(17쪽) 즉 그는 화담 서경덕의 기일원론과 정이천과 주자 그리고 퇴계의 주리적 태극론을 극복하여 두 사상의 조화를 꾀하였다.(27쪽) 황준연의 경우는 율곡의 태극론에서 리를 강조하였는데, 송석구는 율곡의 태극론 가운데 리와 기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2) 이기론

저자는 제2장에서 이기론을 논하면서 장 제목으로 ‘이기에 관한 새로운 접근’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접근이란 율곡이 기존의 ‘기’일원론 혹은 ‘리’일원론을 지양하고 이기에 대해서 새로운 접근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율곡의 이기론을 정리하였다.

가. 율곡은 퇴계의 이발기발(理發氣發, 리도 발동하고 기도 발동한다)설에 대해서는 기발리승(氣發理乘, 기가 발동하면 리가 거기에 편승한다)으로, 화담의 ‘담일청허의 기’(湛一淸虛의 氣, 맑고 깊으면서 비어 있는 듯하나 존재의 근원이 되는 기)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로 극복 조화하려 하였다.(43쪽)

나. 후대 사람들은 율곡이 퇴계의 이발설을 반대하고 화담의 용어를 차용하였으며, 기발리승을 주장한 것 때문에 그를 주기론자라는 궁핍한 별명을 붙이고, 한국유학이 주기, 주리론으로 나뉘어 숱한 갈등과 학적 토론을 자아내게 한 장본인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기를 앞세운 기일원론자가 아니다. 그는 리를 말할 때나 기를 말할 때나 언제나 이기는 혼륜(渾淪, 사물의 분별이 뚜렷하지 않음), 무간(無間, 틈이 없음)하다고 말하였고, 무형무위(無形無爲, 형태도 없고 행위도 없음)의 리가 유형유위(有形有爲, 형태도 있고 행위도 있음)의 기의 주체가 된다고도 하였다.(43쪽)

다. 율곡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은 임성주(鹿門 任聖周, 1711~1788)에 의하여 유기론(唯氣論)의 측면에서 기일분수(氣一分殊)의 측면으로 다루어졌고,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에 의해서 유리적(唯理的) 측면에서 이일분수(理一分殊)로 다루어졌다. 이렇게 보면 율곡은 퇴계의 이발과 하담의 기일원론을 종합하여 이통기국론을 창안함으로써 앞의 두 학자들보다 2백년 앞서 유기적(唯氣的), 유리적(唯理的) 양면을 종합한 것이다.(78쪽)

라. 율곡은 화담과 퇴계의 학문을 종합하려 하였다. 그는 화담이 주장한 기의 능동성과 활동성을 충분히 통찰하고, 기의 사실성과 실재성을 깊이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를 궁극적인 보편적 존재로 파악한다든가 기일원론적 입장에 서지는 않았다. 퇴계의 ‘이발’설에 대해서도 반대하여 리의 무위성(無爲性)을 철저히 강조하였다. 율곡은 이기의 이합(離合)과 선후가 없음을 강조하고, 리는 무위(無爲)요 기는 유위(有爲)이기 때문에 기가 발동하면 리는 거기에 편승한다고 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제시하였다.(86-87쪽)

마. 율곡이 제시한 ‘이기지묘’는 그의 성리학 전체 체계에서 일관되어 있다. 이는 모든 사고의 독단성을 화쟁(和諍, 불교의 용어로 각 종파의 서로 다른 이론을 인정하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통합을 시도하려함)하는 논리가 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기지묘의 의의다.(92쪽)

3) 심성론

저자는 율곡의 심성론에 대해서 심·성·정·의의 문제, 사단·칠정의 문제, 분연지성·기질지성의 문제, 그리고 인심·도심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가. 주자는 마음(心)은 성(性)과 정(情)을 모두 통합한 것이라 보았고, 마음의 본체는 본래 착하지 않음이 없으나 정에 의해서 선악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또 마음의 리는 태극이요, 마음의 동정(動靜)은 음양이라 하였으며, 성(性)은 태극과 같고 마음은 음양과 같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자의 심성정관(心性情觀)위에 율곡은 ‘의(意)’를 하나 더함으로써 학문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다.(98-99쪽)

나. 율곡은 마음이 지각하는 능력은 기(氣)이지만, 그렇게 하는 까닭은 리라고 하여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고(理氣不相離), 기가 발하면 리가 이것을 탄다(氣發而理乘)고 보았다.(101쪽)

다. 율곡은 마음이 성정의(性情意)의 주(主)가 됨을 역설하였다. 심과 성(性)이 둘이 아니며, 성(性)과 정(情)이 둘이 아니다. 다만 한마음 속에서 그 기능이 서로 다를 뿐이다. 즉 마음의 리로서 성은 마음의 본체이며, 성의 발(發)으로서 정은 마음의 용(用)이다. 정이 발하여 있는 상태를 계교상량(計較商量, 서로 견주어 따져 보고 살피며, 헤아려서 잘 생각함)하는 것은 의(意)라 한다. 이것은 모두 심성정의 하나이지 서로 다른 ‘이물(二物)’이 아니다.(104쪽)

라. 퇴계는 사단(四端)을 순수한 리로서 선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보고, 칠정(七情)은 기를 겸한 것으로 선악이 있다고 생각했다. 퇴계는 이를 다시 리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는 사상과 결합시켜 사단과 칠정을 별개의 것으로 보았다. 이에 반하여 고봉은 칠정은 정의 전부로서 선악이 있으며, 사단은 칠정 중에서 착한 한쪽이라고 했다. 이것은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七情包四端)는 논리다. 사단칠정론에 대한 퇴계와 고봉의 이러한 상이점을 보완한 것이 율곡의 사칠설(四七說)과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다.(111-112쪽)

마. 율곡이 ‘마음은 기(心是氣)’라든지 ‘기가 발하고 리가 여기에 편승함(氣發理乘)’과 같은 주기적(主氣的)인 주장을 편 것은 인간의 도덕적인 선함을 그대로 열어 밝히려는 데 목적이 있지, 기가 능동적 성질이 있어서 우주와 인생의 근본을 이룬다고 본 것은 결코 아니다. 성즉리(性卽理)로서의 성(性)과 도(道) 또는 본래적인 선함(純善)이 현상계에 나타나느냐, 나타나지 않느냐의 여부는 그것들이 형기(形氣)에 의해서 가려지느냐, 가려지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형기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고 파악하여 본성인 리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율곡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지, 기를 높고 귀하게 보아 그것을 높이는데 있지는 않았다.(123쪽)

바. 율곡은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양쪽으로 나누는 것은 척박한 논리라고 보았다. 그는 기질지리(氣質之理) 안에 본연지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133쪽) 결국 율곡이 ‘본연지성’을 ‘기질지성’에 포함시켜 설명한 의도는 하나의 성(性) 속에 두 개의 성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고, 이 두 성을 조화하여 본연지성을 회복시키려는 데 있었다.(137쪽)

사. 율곡이 주장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의의는 성의(誠意)를 통하여 도심(道心)을 회복하려는 데 있었다. 인심이라고 하여 모두 사람의 욕심이라고 보고 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도심이라고 하여 제멋대로 행동하여 사사로운 욕심이 개재되면 도심도 인심으로 결말 지워지는 것이니, 부단하게 성의(誠意)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율곡이 인심을 인간의 욕심이나 악한 것으로 보지 않은 것은 그 당시의 성리학적 풍토에서 볼 때 탁견이 아닐 수 없으며 동시에 율곡이 보여준 근대적 사고의 일면이라고 생각된다.(1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