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신(黃愼)


황신(黃愼)                                                             PDF Download

1562년(명종 15)~1617년(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여기서는 1596년 일본에 파견되었던 통신사 황신의 일본에 대한 시각을 그의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황신은 1562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본관은 창원(昌原),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아버지는 정랑 황대수(黃大受)이며, 어머니는 내섬시정 곽회영(郭懷英)의 딸이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2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588년 알성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는 임진왜란 중 심유경의 배신으로 일본군 진영에 1년 여간 머물렀으며, 1596년 명나라 사신과 함께 일본을 다녀왔다.
황신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진행될 때에 명나라 사람들과 함께 협상 현장에 있었고, 조선을 대표하여 일본을 직접 방문했던 인물이다. 일본의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에 따라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통신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황신은 통신사 파견 이전 강화(講和)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일본의 재침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때문에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가 구체화되면서 조선의 장수들 대부분이 강화를 통해 전쟁이 끝날 것으로 믿는 분위기를 경계하며, 일본의 재침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1596년 7월 17일 조선 정부는 일본에 서신과 예물을 보냈다. 8월 2일 박홍장은 서신과 예물을 가지고 부산에 도착했고, 8일 조선 사신 일행은 일본을 향해 출발하였다. 조선 사신은 쓰시마(對馬島)․잇키(一岐島)․나고야(名古屋)․아이노시마(藍島)․아카노미세케(赤間關) 등을 거쳐 사카이하마(界濱)에 이르렀다.
1596년 9월 히데요시는 일본의 왕자 방환에 대한 조선의 사례가 없었다는 점, 고관을 사신으로 파견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이유로 조선 정부가 보낸 선물도 받지 않았다. 이에 황신은 히데요시가 조선 사신의 접견을 거부한 사실과 함께 일본의 재침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선조에게 알렸다.
1596년 12월 일본에서 돌아온 후 황신은 이듬해 봄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선조에게 알렸다. 구체적으로는 1~2월 일본의 선발대가 침략할 것이며, 3~4월에는 일본군 전부가 부산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였다. 더 구체적으로 일본군이 조선의 수군을 격파한 후 육군과 합세하여 먼저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일본의 수군은 야간 기습작전으로 조선의 전선을 5~6척 내지 7~8척으로 포위하여 일시에 공격하여 돌진할 것이라며 일본군의 구체적 전략까지 알렸다. 황신은 일본에서 직접 자신이 보고 들은 바에 따라 일본의 재침을 예상했던 것이다.
황신은 조선에 주둔 중인 일본군 진영을 ‘늑대와 범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그가 일본을 믿을 수 없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신은 일본 사신행차 중 일본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중과 상인 외의 남자는 길고 짧은 두 가지 칼을 차며, 3~4개의 칼을 찬 자도 있다. 원통한 일이 있으면 칼로 배를 십자로 갈라 스스로 해명하고, 원수를 지게 되면 반드시 칼을 빼어 갚는다.”

이러한 모습을 목격한 만큼 일본은 모든 문제를 대화가 아닌 칼로 해결하려 한다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일본의 재침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들이 가장 알고 싶었던 정보는 히데요시에 관한 것이다. 그 이유는 히데요시가 바로 조선을 침략한 원흉이기 때문이다. 황신은 히데요시가 아랫사람에게 포악하며, 남의 수고는 생각지 않아 일본인 모두에게 원한이 사무쳤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황신은 일본의 정치체제에 대해 천황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과, 실제 정치는 간파쿠에 의해 행해지며 국왕전(國王殿)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히데요시의 집권과정과 일본의 정치체제에 대한 황신의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다.
조선인들은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히데요시와 함께 쓰시마에 주목했다. 그 이유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쓰시마의 책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에 전쟁과 관련된 쓰시마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황신이 일본의 조선 침략에 쓰시마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을 다녀온 이후의 일이지만, 1598년 12월 황신은 전쟁의 주역으로 쓰시마를 지목하고, 쓰시마 정벌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을 다녀온 직후, 선조가 쓰시마를 공격할 경우 승산이 있는지를 묻자, 쓰시마는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비축된 식량이 없는 만큼 조선이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대답한 바 있다. 때문에 자신이 선봉이 되어 쓰시마를 공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던 것이다.
황신은 일본인들은 “부자형제간에 친애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일본의 가정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또 일본인들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 목욕하고 희롱한다며, 남녀유별의 분수를 모르는 야만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또 남성 간에 동성연애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기록하였다. 일본에서 오누이 간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사실, 부자가 한 여성과 간음한 사실 등을 금수의 풍속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일본 여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음란하다고 이해하였다.

“부녀자들은 경쾌하고 영리하며 얼굴이 훤칠하지만, 성질이 음탕하여 비록 지체가 있는 좋은 집안의 여자라도 대개 딴 마음이 있고, 장사치의 여성 역시 몰래 사사로이 지내는 자가 있으며, 승려 역시 부녀자를 데리고 사찰에서 사는 자가 있다.”

황신은 성리학적 윤리규범에 입각하여 일본의 풍속을 바라보았다. 때문에 조선의 성리학적 풍속과 다른 일본의 모습을 야만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에 1596년 7월 13일 새벽에 발생한 후시미(伏見) 지진에 대해,

“일본국의 각처에 지진이 크게 일어나서 집들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사람이 거의 만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라고 하며, 지진으로 인한 피해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귀국 후 선조에게 복명할 때에도 일본에 지진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로 보아 그는 일본의 지진을 매우 특이한 경험으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일본에 지진이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통해 일본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황신은 일본에는 진귀한 생선이나 특이한 것이 없다고 설명하였다.

“숭어는 뼈가 많고, 은어는 기름이 적으며, 송이버섯은 향기가 없고, 소는 누린내가 나고 힘줄이 많으며, 닭은 발에도 털이 났고 고기가 굳으며, 꿩은 털이 검고 고기에 비린내가 나며, 생물(生物)의 성질이 이와 같이 달랐다.”

이러한 평가 역시 일본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며, 일본에 있는 동물과 식물 역시 조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그의 일본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황신이 일본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그가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일본을 오랑캐로 본 것만은 아니었다. 화이론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준말로,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물론 일본 역시 오랑캐로 간주되었다. 그는 일본의 풍속은 간소하여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긍정적인 면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 일본인들의 성격은 경박하지만 영리하고 솔직하여 남의 말을 잘 믿는다고 하여, 일본인에게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점도 있음을 인정하였다. 황신은 일본의 농민에 대한 세금제도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농민에게 전답마다 절반을 거두고, 그 외에는 다른 부역이 없으며, 수송하는 일은 모두 품삯을 주기 때문에 폐단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농민들에게 전세(田稅) 외에 별도로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조선의 농민들은 조세(租稅)나 지대(地代) 외에 역(役)과 공납(貢納) 등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또 인신적 구속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황신이 농민에게 어떤 강제적 부담도 지우지 않는 일본의 세제를 소개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부분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황신은 일본의 면적이 조선보다 넓다는 점을 지적했다. 조선은 일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영토 역시 조선보다 작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일본을 조선의 1개 도(道) 정도의 크기로 표시하고 있음은,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을 직접 방문한 후 일본이 조선보다 국토가 작다는 인식이 잘못된 사실임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황신이 일본 사신행차를 통해 일본의 실상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의 일본에 대한 시각 역시 사신행차 전과는 달리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황신은 1596년 8월 8일 일본으로 향했고, 11월 23일 부산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그가 일본에 머무른 기간은 130일 정도로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다. 그는 히데요시를 직접 만나지 못했던 만큼, 그가 입수한 대일정보의 대부분은 명나라 사신을 통해 입수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제공한 일본 정보는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황신은 전쟁 중 일본을 다녀왔고, 그가 제공한 정보는 조선이 일본과의 전쟁 수행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전후에도 일본과 관련된 정책 수립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면서 일본의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의 일본인식은 당시 사람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추포 황신의 대일인식」(방기철, 『한국사상과 문화』74, 한국사상문화학회, 20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